로고스의 언어를 해체하는 시퍼런 메스를 든 철학자
로고스의 언어를 해체하는 시퍼런 메스를 든 철학자
마르시안 조회 17 |추천 0 | 2008.12.29. 04:02
로고스의 언어를 해체하는 시퍼런 메스를 든 철학자
-『목소리와 현상』(자끄 데리다, 2006. 인간사랑)에 대한 서평
http://cafe.daum.net/modernnitchz/94K3/726?docid=KIg8|94K3|726|20081229040207&q=%BE%F0%BE%EE%C3%B6%C7%D0%C0%DA&srchid=CCBKIg8|94K3|726|20081229040207
신승철 : 동국대 철학과 박사과정, 노동자의 책 집행위원
공역서 <사이버맑스>(이후, 2003),
저서 <눈 밖에 난 철학, 디지털로 본 철학>(중앙 M&B, 2005)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인 자끄 데리다는 2004년 10월 9일 췌장암으로 숨을 거두면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마지막 기고문을 남긴다. 마지막 그가 남긴 말은 그의 최후의 앙숙이었던 하버마스와 화해라도 하는 듯, “과거의 계몽과 앞으로 올 계몽”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다. 그는 새롭게 열리게 될 계몽의 사회는 세계질서를 이분법으로 몰아가는 일방주의와 일류 공통의 적들의 논리를 극복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최후의 그의 표현은 죽음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삶의 목소리를 희망하는 데리다의 바램마저도 담고 있어 더 여운이 남았다.
2006년도를 예감하는 데리다의 책 『목소리와 현상』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해체주의의 반격서이며, 의사소통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깨는 멋진 개념들로 구성되어 있는 상상력이 넘치는 책이다. 우선 그는 반복적 동일성의 재현과 상호주관성에 의해 형성된 객관성의 이념적 대상의 수반현전에 대하여 로고스의 언어이자, 실지로는 주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장소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매개성을 거부하고, 삶이라는 직접적 현전 속에서 현상학의 기본개념들인 생, 체험, 살아있는 현재, 정신성 등의 개념을 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그는 후설의 현상학을 재독해하면서, 우리가 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데리다가 삶의 영역을 환원주의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삶이라는 영역에서 타자와의 조우는 이상적 담화상태를 이끄는 동화같은 스토리가 아니다. 담화는 끝없이 불-안정적이며, 의식과 언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이 복잡함의 해답은 단순한 하나로 결집되는데, 그것이 ‘목소리’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을 연쇄적으로 표시하는 행위의 일부라는 로고스적 기호체제, 즉 글로 기록하는 행위로 대표되는 행위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표현한다는 것은 표시가 아니라 말이며, 말은 일종의 몸짓이며, 혼잣말하는 고혼의 생의 절대적인 낮은 목소리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중얼거리는 독백이 외출을 할 때, ‘나’라는 주체와 ‘여기’, ‘지금’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의 표시체제인 인칭대명사와 공간성에 익숙해져 있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를 내면서 바깥으로 그것을 전염시킨다. 이것을 발화와 매질, 음소, 음운 등으로 판단하는 이상야릇한 언어이론들은 우리의 신체에서 뿜어 나오는 숨결이 표현하면서 만들어내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을 때, 타자에게 노출될 때 굳이 이념적 대상의 수반현전을 매개하지 않고도, 근원적 직관과 직접적 지각에 의해서 타자의 현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타자와의 관계가 발신자와 수신자의 피드백이라는 단순명제의 함수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관계는 표지를 필요로 할 뿐이다. 독백을 하는 사람들인 이 사람들은 상징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낱말은 상상된 것이며, 아무리 기호로 발화된 것이든, 인쇄된 것이든 현존하지 않는 비실재적인 것이다.
‘내면발화를 하는 나’라는 사람은 재현과 상상 속에서 자신을 표현할 뿐이지, 소통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통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기호질서를 삶에 이식하는 로고스적 언어이론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줄곧 독백하며, 이따금씩 외출한다. 그것은 절대적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늘 가지고 있는 반복이다. 절대적 반복인 이념은 표시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표시라는 기호작용은 나의 죽음의 공간을 의미할 뿐이다. “동지, 자아비판 하시요.”, “판결을 속기하세요.”라는 기호작용의 공간은 사실 절대적 반복의 이념의 공간이자, 내면발화가 불가능하며, 상상작용으로서 여유롭게 외출하는 우리의 목소리가 불가능한 현시적 공간일 뿐이다. 살아있는 지금, 여기서의 경험과 지각이 모든 사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경험적 심리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월적 삶의 근원성, ‘나’의 비가시성과 표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기 없는 음향 상태로 말하지 않고, 혼을 가진 신체의 상태에서 말하며, 그러한 자기촉발로 인해 목소리가 된 그 낱말은 신체의 일부로서 변양된다. 그 낱말이 만일 말뜻이 부재한다고 하더라도 ‘아브라카다브라’처럼 대상이 부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화, 반복, 기표작용이 기록처럼 뚜렷하게 이루어지려면, 사실 나의 죽음이 수반되어야 하며, 어떤 무명씨에 의해서 쓰인 글을 모노드라마 형태로 번갈아 읽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데리다의 『목소리와 현상』은 죽기 전에 하버마스와 화해를 통해서라도 이루고 싶었던 진보의 희망을 다시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 사건 이전에 존재했던 하버마스와의 팽팽한 대결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창의적인 역작이라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2006년 초 이 책은 살아있는 데리다가 더 이상 그의 목소리와 호흡으로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표되었지만, 삶을 표현하려는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상상계를 자극하여 도도히 시작되고 있는 열린 신질서를 꿈꾸게 하는 책이다.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redshand님의 블로그
마르시안 조회 17 |추천 0 | 2008.12.29. 04:02
로고스의 언어를 해체하는 시퍼런 메스를 든 철학자
-『목소리와 현상』(자끄 데리다, 2006. 인간사랑)에 대한 서평
http://cafe.daum.net/modernnitchz/94K3/726?docid=KIg8|94K3|726|20081229040207&q=%BE%F0%BE%EE%C3%B6%C7%D0%C0%DA&srchid=CCBKIg8|94K3|726|20081229040207
신승철 : 동국대 철학과 박사과정, 노동자의 책 집행위원
공역서 <사이버맑스>(이후, 2003),
저서 <눈 밖에 난 철학, 디지털로 본 철학>(중앙 M&B, 2005)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인 자끄 데리다는 2004년 10월 9일 췌장암으로 숨을 거두면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마지막 기고문을 남긴다. 마지막 그가 남긴 말은 그의 최후의 앙숙이었던 하버마스와 화해라도 하는 듯, “과거의 계몽과 앞으로 올 계몽”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다. 그는 새롭게 열리게 될 계몽의 사회는 세계질서를 이분법으로 몰아가는 일방주의와 일류 공통의 적들의 논리를 극복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최후의 그의 표현은 죽음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삶의 목소리를 희망하는 데리다의 바램마저도 담고 있어 더 여운이 남았다.
2006년도를 예감하는 데리다의 책 『목소리와 현상』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해체주의의 반격서이며, 의사소통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깨는 멋진 개념들로 구성되어 있는 상상력이 넘치는 책이다. 우선 그는 반복적 동일성의 재현과 상호주관성에 의해 형성된 객관성의 이념적 대상의 수반현전에 대하여 로고스의 언어이자, 실지로는 주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장소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매개성을 거부하고, 삶이라는 직접적 현전 속에서 현상학의 기본개념들인 생, 체험, 살아있는 현재, 정신성 등의 개념을 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그는 후설의 현상학을 재독해하면서, 우리가 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데리다가 삶의 영역을 환원주의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삶이라는 영역에서 타자와의 조우는 이상적 담화상태를 이끄는 동화같은 스토리가 아니다. 담화는 끝없이 불-안정적이며, 의식과 언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이 복잡함의 해답은 단순한 하나로 결집되는데, 그것이 ‘목소리’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을 연쇄적으로 표시하는 행위의 일부라는 로고스적 기호체제, 즉 글로 기록하는 행위로 대표되는 행위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표현한다는 것은 표시가 아니라 말이며, 말은 일종의 몸짓이며, 혼잣말하는 고혼의 생의 절대적인 낮은 목소리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중얼거리는 독백이 외출을 할 때, ‘나’라는 주체와 ‘여기’, ‘지금’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의 표시체제인 인칭대명사와 공간성에 익숙해져 있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를 내면서 바깥으로 그것을 전염시킨다. 이것을 발화와 매질, 음소, 음운 등으로 판단하는 이상야릇한 언어이론들은 우리의 신체에서 뿜어 나오는 숨결이 표현하면서 만들어내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을 때, 타자에게 노출될 때 굳이 이념적 대상의 수반현전을 매개하지 않고도, 근원적 직관과 직접적 지각에 의해서 타자의 현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타자와의 관계가 발신자와 수신자의 피드백이라는 단순명제의 함수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관계는 표지를 필요로 할 뿐이다. 독백을 하는 사람들인 이 사람들은 상징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낱말은 상상된 것이며, 아무리 기호로 발화된 것이든, 인쇄된 것이든 현존하지 않는 비실재적인 것이다.
‘내면발화를 하는 나’라는 사람은 재현과 상상 속에서 자신을 표현할 뿐이지, 소통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통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기호질서를 삶에 이식하는 로고스적 언어이론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줄곧 독백하며, 이따금씩 외출한다. 그것은 절대적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늘 가지고 있는 반복이다. 절대적 반복인 이념은 표시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표시라는 기호작용은 나의 죽음의 공간을 의미할 뿐이다. “동지, 자아비판 하시요.”, “판결을 속기하세요.”라는 기호작용의 공간은 사실 절대적 반복의 이념의 공간이자, 내면발화가 불가능하며, 상상작용으로서 여유롭게 외출하는 우리의 목소리가 불가능한 현시적 공간일 뿐이다. 살아있는 지금, 여기서의 경험과 지각이 모든 사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경험적 심리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월적 삶의 근원성, ‘나’의 비가시성과 표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기 없는 음향 상태로 말하지 않고, 혼을 가진 신체의 상태에서 말하며, 그러한 자기촉발로 인해 목소리가 된 그 낱말은 신체의 일부로서 변양된다. 그 낱말이 만일 말뜻이 부재한다고 하더라도 ‘아브라카다브라’처럼 대상이 부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화, 반복, 기표작용이 기록처럼 뚜렷하게 이루어지려면, 사실 나의 죽음이 수반되어야 하며, 어떤 무명씨에 의해서 쓰인 글을 모노드라마 형태로 번갈아 읽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데리다의 『목소리와 현상』은 죽기 전에 하버마스와 화해를 통해서라도 이루고 싶었던 진보의 희망을 다시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 사건 이전에 존재했던 하버마스와의 팽팽한 대결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창의적인 역작이라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2006년 초 이 책은 살아있는 데리다가 더 이상 그의 목소리와 호흡으로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표되었지만, 삶을 표현하려는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상상계를 자극하여 도도히 시작되고 있는 열린 신질서를 꿈꾸게 하는 책이다.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redshand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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