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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의 순환 - 폭력과 희생자의 하나님 -

모방의 순환 - 폭력과 희생자의 하나님 -
(Der mimetische Zirkel- Gewalt und der "Gott der Opfer")
르네 지라르의 모방 이론은 종교와 폭력의 관계에 대한 풍부한 분석을 제공한다
http://cafe.naver.com/girard/62
필자: Wolfgang Palaver(인스부르크 신학대학 교의학 교수) 2006. 2. 24.
번역: 이충만(고려신학대학원 M.div) 2007. 6. 13
 
세계2차 대전 후, 독일어권에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평화능력이 자주 강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드러난 폭력의 외상을 무엇보다 먼저 위로해야만 한다는 아름다운 착각이었다. 우리가 거대한 정치적 연합이나 우리의 매일의 일반적인 삶을 잠깐 동안이나마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우리의 우호적이며 예민한 관계를 너무나 쉽게 어지럽힐 수 있는 폭력의 가능성을 만난다. 선한 인간의 꿈은 원시민족들에 대한 관찰에서 오래전에 그 실체가 들어났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삶은 폭력이 없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프랑스 선교사 Eric de Rosny와 같이 누군가가 아프리카의 구원자를 위해 제정되어진 원시민족의 다년간의 성년식 과정을 관찰하면 표면적인 조화와 비폭력의 관계 이면에 실제로 숨겨져 있는 폭력을 알게 된다: “그것에서 사람들 사이의 폭력이 분명히 드러남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된다.”(1) 거대한 세계 정치적 지평에서 냉전(der Kalter Krieg)은 국가와 국가 사이, 국민과 국민 사이, 그리고 민족과 민족 사이의 숨어있는 폭력을 억제하는 것을 돕는 여타의 구조들 중에 하나였다. 냉전이 끝날 무렵, 평화의 조화로운 통치에 이른 것이 아니라 갑자기 우리의 세계를 뒤덮은 피투성이의 시민투쟁들(blutigen Buergerkriegen)로 귀결되었다. 오히려 하나의 냉각제(Tiefhuehltruhe)로써 잠재되어 있는 투쟁이 뜨겁게 표출되는 것을 막았을 때, 냉전은 평화의 보증인이었음이 다시금 올바르게 비판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에는 매일의 평범한 인사에 대해 주목할 만한 연구를 함으로써 인간관계에서의 폭력의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10년 전 스페인 철학자 Jose Ortega y Gasset은 일정한 예의범절 안에 “그 자체로 사회라고 불리 우는 상호투쟁과 싸움의 완화를 위한 사회적 기술”이 있음을 인식하였다.(2) 그는 종종 간과되는 “우리의 일상의 근거”를 보다 정확하게 연구하면서, 사회를 주조하는 이 싸움을 만나게 되었다.(3)
 
모방적 경쟁 혹은 공통으로 욕망되는 대상
(Mimetische Rivalitaet oder der Kampf um gemeinsam begehrte Objekte)
 
이러한 기본적인 폭력 관계를 추적하게 될 때, 르네 자라르의 모방 이론은 점차로 중요하며 지속적인 도구로 인정된다. Eric de Rosny도 새롭게 얻게 된 인간 사이의 폭력 가능성에 대한 통찰을 반성하면서 이러한 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다. Antje Vollmer는 그녀가 냉전을 이은 “강렬한 평화(heissen Frieden)“에 대해 숙고할 때 이 프랑스계 미국인 문화인류학자(르네 지라르를 말함-역자주)를 지적하였다.(4) 또한 Ortega y Gasset도 인간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하지 않고 오히려 공통의 대상- 그것은 ”유화 그림, 하나의 결과, 사회적 지위 혹은..... 한 명의 여성“이 될 수 있다-에 동일한 욕구를 가지게 되어 경쟁할 때 인간은 곧 서로 서로 투쟁하기 시작한다는 독특한 현상을 기술하면서 지라르의 이론을 공유하였다(5): "그러기에 타자는 나와 일치하는 상황에서 나와 충돌하며, 나를 부정한다.”
 
그러나 Ortega y Gasset이 인간적인 투쟁의 독특한 원천으로 취급한 그것이 지라르의 모방 이론에서는 중심에 서 있다. Cervantes, Stendhal, Flaubert, Proust, 그리고 Dostojewksi와 같은 유럽의 위대한 소설가들에 대한 체계적인 강의를 진행하면서, 지라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모방 위에 정초시키는 모방적인, 혹은 흉내 내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통찰을 가지게 되었다.(6) 우리의 근원적인 필요가 충족되면, 우리는 무엇보다 타자가 욕망하는 그것을 욕망한다. 그 욕망이 배타적이고, 나눌 수 없으며 혹은 공동으로 즐길 수 없는 재화들에게 집중 될 때, 사람들 간의 폭력의 본질적인 원인들 중에 하나인 모방적 경쟁(mimetische Rivalitaet)이 곧장 생겨나게 된다. 지라르는 모방적 경쟁과 함께 시기와 질투로도 묘사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폭력의 근원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가 우리의 전범이 점유하고 있거나 욕망하고 있는 바로 그 대상을 소유하려고 할 때, 투쟁과 폭력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위험 앞에 십계명의 제9계명과 제10계명으로 경고하고 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출 20:17)(7)
 
하지만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의 본질적인 원인을 모방적 경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지라르는 폭력의 이 근원을 자연적 필연성(Naturnotwendigkeit)으로 내세우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인간관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지라르에게 미메시스적(모방적) 욕망은 인간에게 속해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 언어나 문화의 습득과 같은-으로써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며 마치 신과 신의 초월적인 보화에 대한 인간의 열림(die menschliche Oeffnung)과 다르지 않다.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은 다른 폭력이론들과 차별성이 있다. 다른 폭력이론들은 인간을 기본적으로 선하게 보며, 모든 폭력을 오직 그릇된 사회적 구조를 통해서 설명하려고 시도한 순진한 르네상스의 전도된 위험과 동일하게 공격본능이나 공격성향(Aggressionsinstinkt oder - trieb)을 취급한다. 신학적 관점에 기인한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은 원죄 교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가 이미 어거스틴에게서 모방적 경쟁을 인간 사이의 폭력의 근원으로써 발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전쟁에 기울어진 세속의 국가에는 “공동으로 소유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불운한 욕망(eine "unselige Begehrlichkeit um solche Dinge die nicht gemeinsam besessen werden koennen)”이 유행한다.(8) 지라르는 예로써 Romulus와 Remus 두 쌍둥이 형제를 제시하는데, 그들의 관계는 두 명이 모두 배타적인 통치권에 오르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죽음으로 끝났다.(9)
 
인간 문화의 종교적 기원으로써의 희생양 메커니즘
(Der Suendenbockmechanismus als religioeser Ursprung der menschlichen Kultur)
 
미메시스 이론은 사람들 사이의 폭력에 대한 개별적 원인을 탐구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폭력에 대한 사회적 제재(制裁)의 기원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유용한 문화 이론으로써 입증된다. 60년대 그의 두 번째 책에서 지라르는 유럽의 소설에 대한 열정에서부터 미메시스 욕망과 그것과 함께 나타나는 사회적 위기라는 주제로 옮겨 갔고, 고전 문학과 민족학 연구의 근원 문서들(den Quellentexten der ethnologischen Forschung)을 추적하였다. Sophokles와 Euripides의 고전적인 비극들을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지라르는 이 연구의 결과물을 1972년 「성스러움과 폭력(Das Heilige und die Gewalt)」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10) 이 작품은 모방적 경쟁에 기원한 근원적인 위기 경험(eine urspruengliche Krisenerfahrung)이 고대 문화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근원적인 위기 경험에는 이러한 위기 경험을 극복하고 인간 문화의 근간을 다지는 고대 사회에 존재했던 문화적 메커니즘이 연결되어져 있었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것에는 의식화 되지 않은 집단적 과정이 중요했다. 곧 그 그룹의 한 구성원을 그 위기의 장본인으로써 추방하거나 살해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희생양 메커니즘(Suendenbockmechanismus)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미메시스적 위기에 대한 이러한 근원적인 해결이 그 추방되거나 살해 된 희생자가 절대적으로 악하며- 그는 이 위기에 대해 홀로 책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그의 폐기(seine Ausloeschung)가 평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선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 문화적 행위는 종교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지라르는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저주와 축복의 이러한 이중적인 전용(轉用)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종교의 근본 언어들 가운데 나타나는 고대 종교심의 핵심을 이루었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종교의 근원과 동일시된다. 금령들, 의식들, 그리고 신화들과 같은 모든 고대 종교들의 중심적인 요소들은 이러한 폭력적인 초석적 행위에(in diesem gewalttaetigen Gruendungsakt) 기원한다.
 
지라는 다양한 신화들 안에서 초석적 살인(Gruendungsmorde)의 흔적들을 찾았다. 그의 대표적인 예는 오이디푸스 신화(Oedipus-Mythos)이다. Thebe에 페스트가 창궐하였을 때, 긴 싸움 후 소위 친부 살인자로써, 그리고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와의 근친 상관의 이유로, 도시에 닥친 위기의 책임이 오이디푸스 자신에게 전가되었다. 사람들은 하나의 희생양으로써 그를 도시에서 몰아내었다. Sophokles는 그를 악의 구현이며 재앙의 장본인으로만 그 특징을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로부터의 추방 이후 어떻게 오이디푸스가 생전에 이미 Thebe와 Athen이 자신의 시체에 대해서 경쟁하는 그러한 구원자로 갑작스럽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신약 성경을 관찰하면서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과 사탄을 동실시 한다. 희생양 메커니즘 안에서 카오스로부터 질서가 발생하는 것처럼, 사탄은 다름 아닌 카오스와 질서의 구현이다. 그는 악마(der daibolos)적인, 난잡한 노름꾼이기도(der Durcheinanderwuerfler)하고, "세계의 지배자(Herrscher der Welt)"이기도 하며, 또한 세계 질서의 원리(weltliches Ordnungsprinzip)이기도 하다. 사탄은 모방적 경쟁과 그것의 가능한 펼침과 동실시 된다. 나눌 수 없는 재화에 대해 경쟁자를 흉내 내는 욕망을 통하여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곳에서, 사탄은 자신의 카오스적이며 투쟁을 불러오는 측면을 보여준다. 이와 반대로 위기로 흔들리는 사회가 다시금 모방적으로 갑작스럽게 하나의 희생에 합일하는 곳에서 사탄은 자신을 질서를 세우는 힘으로써 드러낸다. 지라르에 따르면 거짓된 욕망과 문화의 기초를 이루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기능, 그리고 그것의 신화적 은닉이 진술되지 않았던 사탄의 모방적 본질핵심이 요한복음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그를 죽이려는 자들을 대면하셨을 때, 사탄의 본질을 폭로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지라르에 의하면 인간의 문화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11) 정당한 질서가 초석적 살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본원적인 사형 제도에서 드러난다. 정치적인 공동생활을 위해서 적대감의 정형적인 형태는 밖으로 드러나 의식에 의해서 중재되어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환원된다. 희생양 메커니즘이 제 삼자에 대한 집단적 폭력으로써 한 그룹 안에 평화를 가지고 오는 것과 동일하게, 공동의 외부적 적이 정치적 합일의 내부적 평화에 대한 보증인이 된다. 냉전의 상대적 평화는 폭력에 의해 버텨지는 폭력의 억제라는 독특한 형태의 한 예이다.
 
초석적 폭력의 성경적 폭로와 희생자의 하나님
(Die biblische Aufdeckung der Gruendungsgewalt und der "Gott der Opfer")
 
미메시스 이론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특별히 흥미롭다. 지라르는 그의 세 번째 책에서 독특한 종교 이론을 전재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성경을 자신의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12) 지라르는 성경의 중심적인 본문들이 고대의 신화들과 구별됨을 인식하였는데, 그것은 성경이 쫓겨남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 희생양들과 연대하며, 이로 인해 희생양 메커니즘을 밝히 드러낸 것이다. 성경은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난 희생양들의 무죄를 묘사하고 있다. 로마의 신화가 형제 살인자인 Romulus의 피 비린내 나는 행동에 대해 정당화 하며 Romulus의 측면에서 만들어져 있지만, 성경은 살인자 가인을 고소하며 살해당한 동생 아벨과 연대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의 요셉의 역사(歷史)또한 오이디푸스 신화와 대조적인 서술이 전개 된다.(13) 오이디푸스와 요셉 모두 자녀로써 이미 희생양의 운명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 의해 팔렸다. 하지만 이 두 서술에는 차이점이 유사점보다 더욱 중요하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어머니와의 근친상관으로 인해 Thebe에 창궐한 페스트의 책임을 지게 되었던 것에 반해, 요셉은 비슷한 죄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역으로 그녀에게서 유혹을 받았다. 성경은 독특하게 희생자인 요셉의 측면에서 기술되어져 있다. 성경은 요셉의 질투심 많은 형제들과 연대하지 않으며, 또한 애굽의 고소자들과도 연대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가 추방 이후에 신의 도구로 추앙을 받았던 반면, 요셉은 이전에 자신을 괴롭혔던 형제들의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였다(창 50:18f).
 
신화적 종교의 신들은 그 근원적 폭력의 구체화이며, 폭력으로 인해 보장되어진 평화를 확립시키기 위해 새로운 피투성이의 희생을 요구하는 신격화된 희생이다. 이와 달리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희생양들과 연대하는 비폭력의 “희생자의 하나님(Gott der Opfer)”으로 나타난다.(14) 이에 관하여 구약 성경에서는 탄식시나 욥기와 나란히 무엇보다 제2이사야의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노래가 두드러진다. 하나님의 종의 노래는 사람들에 의해 멸시받고, 때림을 당하며 내어 쫓김을 당하는 고난 받는 자의 운명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운명은 전적으로 희생양과 일치 한다(사 53:2f.8f). 하지만 최종적인 성경의 구절은 종의 무죄를 드러내며 그의 편을 든다. 이사야 53장 9절에서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핍박을 받으며 버림을 당했다. 그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독특하게 핍박자들에게 돌아가고, 그들은 끝내 자신들의 핍박자로서의 심정을 자백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신약 성경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수난 기사는 성경의 관점과 신화적 관점의 구별에 있어서 가장 명백한 것이다. 많은 신화에는 한 희생자에 대한 집단적 폭력이 있다. 그러나 신화들과의 구별되는 복음서는 자기 자신을 급진적으로 희생양 예수와 동일시하며 그의 무죄를 드러낸다: “연고 없이 그들이 나를 미워하였다.”(요 15:25) 복음서는 예수 안에서 불의에 의해 핍박받는 희생양을 인식한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며 제2이사야의 핍박받는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안에서 모든 희생양과 연대하며 폭력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제시하는 저 성경적인 "희생자의 하나님(Gott der Opfer)"가 계시된다. 그분 안에 예를 들어 인권의 전통에 들어맞는 희생에 대한 현대적 불안(die modernen Sorge um die Opfer)이 서있다.
 
적그리스도의 시대에 나타나는 탄식 종교의 시도
(Die klagereligioese Versuchung im Zeitalter des Antichrist)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성경의 폭로로 인하여 폭력이 우리들의 세계로부터 즉시, 그리고 영구히 추방되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것이리라. 이미 그 역(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폭력 억제의 형태들을 성경이 위태롭게 한 것은 간접적으로 세계정세의 종말적인 악화에 기여하였다. 성경 기사의 결과로써 인간적인 폭력 투쟁의 급격한 증가의 기세가 보인다. 예수는 이것에 대해 그의 말씀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말씀 하셨다.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성경의 폭로를 통하여 폭력의 폭발적인 증가의 문제는 문필가이며 문화 철학자인 Elias Canetti가 외형적으로 기독교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지적한 탄식 종교라는 기생적 형태 안에서 예시적으로 드러난다.(15) 이 개념을 가지고 그는 인간이 핍박 받는 희생 제물과 함께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보복하는 폭력에로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예를 들어 묘사하였다. 탄식하는 자로써 그들의 폭력은 정당화 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십자군 시대의 탄식 종교의 형태를 알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받은 자(예수 그리스도를 말함-역자주)와의 연대성을 근거로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에게 보복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인디언들이 모든 고대의 희생폭력보다 더 나은 자신들의 인간 희생(Menschenopfer) 때문에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을 때, 유럽 정복자들의 대량 학살도 이 형태를 쫓았다.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복수를 열망하는 탄식 종교의 이러한 형태의 문제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성경의 폭로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희생양 메커니즘의 폭로로부터 “희생양 사냥군에 대한 사냥”이 생겨난다(Aus der Offenlegung des Suenden bockmechanismus wird eine "Jagd auf die Suendenbockjaeger").(16) 지라르는 성경의 계시로 인하여 가능하게 된 이러한 시도를 명백하게 자기 스스로를 위험한 새로운 전체주의로 내세우는 적그리스도의 형태라 논증한다: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를 흉내 내면서 웃음꺼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핍박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미명하에 극악한 박해 행위들이 실행되어지는 우리 고유의 세계에 대한 묘사를 포함한다...... 인간은 나찌와 같이 기독교의 행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저항하거나, 혹은 부정직한 의도를 가지고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역할로 스며들어간 후 그 목표를 굴절시킬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오늘날의 전체주의에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17)
이러한 탄식 종교의 시도는 우리의 세계 안에서 자주 우세한 표준이 되었다. 그것은 십자군의 정신이며, 약하고 핍박받는 자들의 변호인으로써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현재의 테러리즘과 비슷한 경향을 지닌 폭력적 도덕주의자의 정신이다.
 
종말적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임무
(Die Aufgabe der Kirche in einer apokalyptischen Welt)
 
적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는 종말적인 폭력 문제의 악화에 직면하여 교회는 자신의 존재 전체에 성경의 계시가 제시하는 비폭력적 영을 살아 있도록 할 의무가 있다. 탄식 종교의 시도는 사실 그것의 분리를 통하여 투쟁과 폭력을 부추기는, 기독교 유산에 대한 이단적 습득이다: “모방적 경쟁의 싸움터에서 계시를 무기로 이용하고, 그것에 분열의 힘을 수여하기 위해 그것은 먼저 나누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흠 없이 보존되는 동안, 그것은 평화의 힘으로 남는다; 파편화 될 때, 그것은 먼저 전쟁의 종이 된다.”(18)
 
기독교의 전통은 인간들 사이의 폭력이 가지고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모방적인 출구를 알고 있다. 이 출구는 예수를 따름, 곧 예수를 흉내 내는 것이다. 첫째로, 이것은 모자람이 없기에 모방적 경쟁에로 필연적으로 이끌리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풍성해 지는 저 영원한 보화들에 우리의 욕망을 정초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어거스틴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세속의 국가에 대한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풍성해져 가는 선을 경험하는 하늘나라 시민의 예로써 아벨을 제시하였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욕망을 지라르가 성경의 계시에서 인식하였던 비폭력적인 하나님께 정초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비폭력적인 하나님은 신의 이름으로 살인과 같은 폭력을 정당화 하려는 모든 인각적인 시도들의 토대를 무너뜨리신다. 세 번째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방적 정초에 있어서 방법에 주의해야 한다. 삼가며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모방을 예수의 영에 의해 이끌리도록 할 때, 우리는 자유를 증진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인간적 경쟁의 싸움터에서 무기로 전략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마가복음 9:38-41에서 자신의 제자들이 경쟁적인 방법을 위해 예수님 자신의 이름을 증거로 삼으려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인간적인 경계 설정(Grenzziehung)에 반대하신 것에서 예시적으로 드러난다.(19)
 
마지막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의 폭로와 비폭력의 희생자의 하나님의 발견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처형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인식하도록 했던 그 은혜의 선물에서부터 교회가 출현하는 한, 교회는 “화평케 하는”(마 5:9)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할 수 있는 그러한 공동체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강권하여 져서- 우리 자신이 모방적 경쟁에 이끌림을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화평을 이루는 자로 행한다. 그 때에 각각의 확실하게 살아있는 모범이 모방의 감염을 통해서 긍정적인 방법으로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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