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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Ren Girard)의 성서적 종교와 비폭력

르네 지라르(Ren Girard)의 성서적 종교와 비폭력
박종균(부산장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
http://blog.naver.com/sdsds/140007125070
 
Ⅰ. 들어가면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 따르면 "20세기는 사실상, 레닌이 예견했듯이,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으며, 그러므로 전쟁과 혁명의 공통분모라고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폭력의 세기였다." Hannah Arendt, On Violence, (New York: Harcourt Brace and World, 1970), 24.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인류에게 가져다줄 진보된 미래에 대한 계몽 사상가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근대 문명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테러를 낳게 되었다. 20세기 문명의 가장 큰 야만이 히틀러 같은 한 개인의 독단적인 오류 혹은 인류가 20세기에 들어 갑자기 더 포악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란 어느 곳, 어떤 시대에도 잔인하기 마련이지만, 20세기의 전쟁과 대량학살이 우리에게 던지는 충격은 그것이 인류의 정치적 삶의 진보와 경제 발전을 포함한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전개되었으며, 더구나 그러한 "발전"들이 전쟁이 양상을 더욱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공헌해 왔다는 역설적인 사실 때문일 것이다. 나치의 600만 학살 사건에 대해 토인비는 그의 『역사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20세기 독일의 정신은 인류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하는 볼록거울이었다. 만일 20세기의 독일이 괴물이었다면, 20세기의 유럽의 문명은 독일의 괴물을 만들어 낸 프랑켄슈타인이었다." 또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오 독일이여, 창백한 어머니여! 어떻게 당신은 이런 오욕 속에서 민중들 가운데 앉아 있나요?", "독일이여, 부드러운 이마에 먹구름 낀 당신의 말없는 하늘에 무엇이 생겨나는가?: 당신은 단지 유럽의 똥통일 뿐…" 최창모, 『이스라엘史』(서울: 대한교과서(주), 1994), 284-285.

이러한 현실은 희망과 기대 속에서 맞은 새로운 밀레니엄의 문턱에서도 여전할 따름이다. 문명의 걸작인 컴퓨터, 비행기를 이용하여 단번에 수천 명이 살해당한 미국의 9. 11 사태와 최신예 살상무기들이 총동원된 보복 전쟁, 제국주의 시대를 방불케하는 초강대국의 침략전쟁, 종교와 인종적 갈등을 둘러싼 유혈 충돌 등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의 확산이 21세기는 학수고대하던 평화의 세기가 아니라 양상을 달리하는 또 다른 전쟁과 폭력의 세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온 지구를 어둡게 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 현실에서 폭력과 전쟁 행위가 끊이지 않고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억제할 수 없는 공격적인 본능 때문인가? 아니면 군비 축소에 내재하는 심각한 경제적․사회적 위험 때문인가? 엥겔스는 폭력을 경제 발전의 촉매제로 정의하고 있으며, 미국의 『아이언 마운틴 보고서』(Report from Iron Mountain) (New York, 1967)에 따르면, "전쟁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므로, 우리의 문제를 처리하는 훨씬 더 살인적인 방법을 발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을 감히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전제하면서, 대공황이라는 실업의 위기가 어느 정도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는지를 잊고 있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다(H. Arendt, On Violence, 26-27).

아니면 국제 사회에서 최종적인 대체물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인가? 작은 폭력들이 행해지는 각각의 이유들을 모두 합하면 큰 폭력의 원인이 되는 것일까? 폭력은 여전히 최후의 수단(ultima ratio)인가?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폭력과 종교의 연관성에 관한 물음을 갖게된다. 폭력은 종교와 무관한가? 본질적으로 폭력은 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 종교를 믿는 인간들에 의해 그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동기를 가진 폭력에 오용되어 온 것인가? 아니면 그 종교 자체가 원초적으로 폭력에 기인했거나, 따라서 태생적으로 폭력적인 동기가 내장되어 있는 것인가? 사실 종교는 인간을 궁극적인 실재와 연합되어 인간 실존이 지닌 상처를 치유할 것을 약속해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종교 역사는 유혈과 희생적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혐의를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종교 역사에 나타난 폭력성은 오히려 종교와 폭력 간에 있을지도 모를 모종의 연관성에 관한 의문을 강하게 제기하게 된다. 도대체 폭력이 종교와 어떤 관련성을 지니기에 무지몽매한 자들뿐 아니라 그토록 학식 있고 종교심이 깊은 사람들조차 파괴적 놀음에 춤추게 되는가? 여기엔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저변에 흐르는 모종의 양식이 존재하는 것인가?

양심적으로 역사적 기독교를 들여다본다면, 기독교 전통이 수많은 형태의 폭력에 실제로 기여했다는 증거들을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는 말하기 쉬울는지 모른다: “기독교의 내용 혹은 본질은 비폭력적이다. 그러나 그 내용적 의미로부터 그것을 왜곡시키는 것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인간이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하게 기독교와 폭력의 무관성이 변호될 수 있을까? 다른 한편 프랑소와 오타르(Francois Houtart)의 말대로 “사실 폭력의 뿌리는 종교들 내부에서 바로 발견될 수 있으며 그래서 종교들이 또한 쉽게 폭력적 성향들에 대한 매체로서 봉사할 수 있는 것” Francois Houtart, “The Cult of Violence in the Name of Religion: A Panorama," in Wim Beuien and Karl Josef Kuschel, Religion as a Source of Violence? (New York: Orbis Press, 1997), 1.

인가? 굳이 그의 말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는 폭력의 역사를 가져왔다. 강력하게 부인하고 싶은 우리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성서 자체와, 기독교가 발전되고 확장된 과정에서 성서가 해석되고 이해된 방식에서 폭력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문학 비평가이며 문화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 나름대로 강력한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폭력과 종교를 연계시키는 메커니즘을 발견했으며, 폭력과 종교의 연계 메커니즘은 모든 문화의 기원이라 확신한다. 현재 성서학이나 신학, 심리학 심지어 경제학 분야에서까지 자신의 영역을 해명하기 지라르의 이론에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햄머튼 켈리(Robert Hamerton-Kelly)와 윌리엄스(James G. Williams)는 지라르 이론을 중심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있으며, 슈바거(Raymond Schwager)는 지라르의 제안에 대해 신학적으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기 르포르(Guy Lefort)같은 프랑스 정진분석학자들은 자아의 철저한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욕망, 소유, 히스테리, 최면과 같은 용어를 지라르적으로 해석하는 “간개인적”(interdividual) 심리학을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오를리앙(Andr Orlan)같은 경제학자들은 시장, 경쟁, 희소성, 부(wealth) 그리고 화폐가치와 같은 경제문제들을 지라르 이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라르에 따르면 문화 진화의 과정에서 살해는 집단의 일원을 죽이는 일이 집단 전체에 신비한 평화와 긴장을 해소한다는 점을 주지시켜왔다. 이것이 “대리적 희생 메커니즘”의 토대가 된다. 희생당한 자가 평화의 담지자 또는 성스러운 인물 나아가 신으로 높여지게 되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은 최초에 희생양을 향한 폭력으로서 나타난다. 모든 문화는 희생양에다가 모방경쟁의 긴장과 폭력을 해소함으로서 안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모방갈등이 재연되고 긴장이 고조되면 성스러운 폭력은 다시금 필요하게 된다.

지라르에 의하면 여러 신화들은 그러한 문화적 기원을 체계적으로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 문화는 폭력을 통제하기 위해 법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하지만 문화가 희생적 실천을 직접적으로 행할 수 없다하더라도 여전히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끊이지 않는다. 집단 린치가 사회질서의 초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라르에 의하면, 오직 성서만이 폭력의 양식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으며 폭력을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라르는 비록 어떠한 종교적 전통에도 물들지 않은 세속적인 사상가로 출발했지만, 이러한 폭력에 대한 문화적 연구 과정을 통해 기독교적 계시만이 폭력의 양식들을 폭로하고 신적인 응답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복음만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온전한 진리를 드러낸다는 확신과 더불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여러 면에서 기독교에 도전을 주고 있다. 그는 보편적인 문화 인류학적 논의의 장에 성서적 계시에 기초한 서구 문명의 통찰의 이정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독특한 문화읽기를 주창했다. 그는 성서적 역사에 있어서 성서의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분명하고도 신선한 지적 양태로 말미암아 밭에 감추어진 보화의 구실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James Williams, The Girard Reader (New York: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996), 4.

신학과 윤리를 본질적으로 통합하고, 십자가 중심적 사고에 대한 통찰을 자극했으며, 무엇보다 신학과 윤리가 비폭력적 사랑의 최우선성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임을 매우 날카롭게 상기시켜 주었다. 지라르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비폭력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란 특별하게 비폭력적인 백성들로 부름 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지라르가 논구한 ‘희생양 메커니즘’과 그것에 대한 변혁과 희망의 비전으로 제시한 성서적 비폭력 사상을 소개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다음의 순서를 따를 것이다. 첫째는 지라르 사상의 주요 주제를 ‘모방 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을 축으로 검토할 것이며, 두 번째는 그가 모든 인간 문화의 초석이 되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돌파구로 제시하는 성서적 종교와 비폭력 사상을 논의할 것이다. 세 번째는 그의 이론에 내장되어 있는 방법론적 문제들을 다양한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Ⅱ. ‘모방 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
지라르의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일단은 다음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도록 하자.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든 상징적인 것이든 일단은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로 수용해보자.

아주 오랜 옛날 치열한 경쟁 때문에 협조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유원인 들이 살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다른 자들을 내심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모방이 성공적일수록 그 자신은 자신이 모방하는 대상의 적수가 되고, 모방의 대상에 근접할수록 적대관계는 더욱 폭력적으로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협력해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어느 날, 인간 문화 역사의 가장 위대한 날이 도래했다. 적대관계에 있던 그 둘은 한 가지 사실, 즉 다른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에 동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집단 전체가 그들을 모방하는 어쩔 수 없는 가능성이 되었으며, 최초의 인간적 연대의 계기가 린치 폭도(lynch mob)의 교제를 통해 일어났던 셈이다. James Williams, The Bible, Violence and the Sacred (San Francisco: Harper Collins, 1991), 7.

위의 이야기에서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지라르 이론의 두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요소는 ‘모방 욕망’(mimetic desire) 지라르가 말하는 욕망은 한 주체가 어느 특정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기술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전범’(model)이나 ‘중개자’(mediator)라고 부르는 제3자를 매개로 한 욕망된 대상과의 관계로 설명한다. 이것을 "욕망의 삼각형"이라고 말하는 바, 우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만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말이며 결국 욕망의 대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표적이 되는 것은 실제의 대상이 아니라 중개자의 존재이다. “대상의 충동은 결국 중개자의 충동이다.” 그리고 이 삼각형의 구조, 즉 주체/중개자/대상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중개가 있다. 하나는 외면적 중개(external mediation)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 중개(internal mediation)이다. 전자는 욕망하는 주체와 전범으로서의 중개자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경우이다. 이때는 실제적인 경쟁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타자의 욕망’은 유쾌한 광기의 수준에 머물고 만다(돈키호테의 경우에서처럼).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내면적 중개는 욕망하는 주체와 전범으로서의 중개자, 이 두 영역이 서로 접근한다. 중개자는 대상을 욕망하거나 소유한다. 따라서 그는 경쟁자/적대자가 된다. 중개자가 장애물로서 전범이 되기 까닭에 욕망의 삼각형은 폭력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지라르는 그의 책 Deceit, Desire and the Novel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6)에서 세르반테스의 세계와 스탕달와 프루스트의 작품을 통해 욕망의 삼각형을 분석하고 있다.

이다. 욕망이란 근본적으로 탐욕적이다. 욕망은 만족을 주는 대상, 사회적 지위, 또는 그것에 필적할 만한 재화를 소유하고자 한다. 어떤 형태든 욕망은 궁극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러나 욕망은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바로 이 점이 모방적 요소들이 뚫고 들어오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 본래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다른 어떤 이들이 이미 욕망하고 있거나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욕망한다. 타자가 욕망하거나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획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준거가 되며 그것을 욕망하거나 소유하고 있는 사람(전범 또는 중개자)은 우리가 대상을 쟁취하는 욕망의 방식을 안내하는 경쟁자로 기여한다. 결국 모방 욕망은 전범(model)이 장애물이 되고 장애물이 전범이 되는 과정인 바, 이 모방 욕망의 결과 중의 하나는 차이의 상실이며 또 그것이 폭력을 발생시킨다. 지라르가 보기에 타자와의 차이의 상실은 치명적인 위험을 이룬다. 문화영역이란 모두 차이들로 구성되는 체계인 바, “이 차이가 상실될 때, 더 이상 순화작용은 존재하지 않으며, 해롭고 전염성이 강한 폭력, 즉 상호적 폭력이 공동체에 퍼져 나간다 … 차이의 위기는 다시 말해 총체적인 문화 질서의 위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사실 문화 질서는 차이들의 조직된 제도에 다름 아니다. 모든 개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 따라 자신의 자리를 잡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이 차별적 편차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Girard, La Violence et le Sacre, 김진석/ 박무호 공역, 『폭력과 성스러움』(서울: 민음사, 1993), 76-77.

이러한 차이가 사라질 때 한 공동체의 성원들은 서로 교환할 수 있게 되며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일반화된 모방 폭력의 원인이자 표현인 동시에 그 결과이다. 모방 욕망에 본래부터 내재된 경쟁심은 결국은 사회적 갈등으로 돌변하고 말며 그것은 폭력으로 심화된다. 모방 욕망은 인간 사회가 유혈사태를 통해 어떻게 해체되는 가를 해명하고자 했던 지라르의 핵심 개념이다.
둘째 요소는 인간 사회가 해체를 극복하는 과정과 연관된다.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욕망, 차이의 상실과 적대적 대립의 절정에서 폭력에 의해 파멸의 위험에 접한 사회 구성원을 구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은 이 폭력 모방 욕망과 관련된 폭력은 인간 사회를 분열시킨다. 그러나 희생 폭력은 무질서를 발생시키는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질서를 발생시키는 폭력이 된다. 희생 폭력을 통해 사회는 화해된다.

을 하나의 희생양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의 앞부분에서는 희생물(victime emissaire)이라고 부르지만, 후반부에서는 특히 예수의 희생을 말하는 대목에 와서는 희생양(bouc emissaire)라고 부른다. 물론 불어에서 victime와 bouc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희생양으로 통일할 것이다. 왜냐하면, 희생양이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종교․제의적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사려 되기 때문이다.
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 희생양은 복수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복수의 연쇄를 종식시킬 것이다. 지라르는 이 과정을 ‘희생양 메커니즘’(victimage mechanism)이라 명명한다. 희생양으로 지목된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바로 이 과정을 통해서 갈등을 극복하고 재 연합된다. 사회에 위협이 되거나 혼란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의 원인은 희생양에게 돌려진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이든 지배적인 문화적 관습과는 이질적이거나 일탈적이면서 동시에 비난의 화살과 폭력을 피해나갈 수 없는 무력한 경우라면, 희생양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인류의 모든 제의는 자연 발생적인 최초의 린치의 반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에 다시 질서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희생양에 대한 폭력이 악순환을 끝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악순환, 즉 문화 전체의 악순환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희생제의의 악순환을 시작한다.” Girard, 『폭력과 성스러움』, 142.
환언하면, 이러한 초석적인 린치(founding lynch)가 인류의 성스러움과 문화의 기원, 그리고 원시종교의 기반이 되는 희생, 제의, 금기, 신화의 모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원시 종교의 기원이 희생양에게 실제로 행해진 폭력에 있다면, 이 기원은 은폐되지 않으면 안 된다. 초석적인 폭력과 린치는 은폐되지 않으면 그 효과를 상실하게 된다.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자도 그 희생을 믿는 자도 폭력이 행하는 역할을 알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희생양이 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다. 결국 희생 자체가 하나의 신화적 해석을 제공해 준다. 신이 희생양을 요구한다고 여기면서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사회 전체의 만장일치를 실현함으로써 폭력을 진정시키며 그리고 구성원들에게 그들 자신의 폭력을 은폐하고 폭력이 외재적이고 초월적인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폭력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방지해 주는 이중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신화 신화의 경우 외양적으로는 폭력 메커니즘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있을지라도, 지라르에 의하면 신화에 나오는 신과 영웅 이야기를 통해 신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희생양의 변형이라고 주장한다(Girard, Le Bouc Emissaire, 김진식 역, 『희생양』(서울: 민음사, 1998) 3장-8장.
는 폭력에서 진실을 추방하는 데 성공하는 우선적인 수단이다. 희생양은 실제로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죄가 있고 해로우며 혼란의 책임이 있는 희생양이 제물로 바쳐진다. 그리고 나서 희생양은 이로운 것이 되어 신격화된다. 희생 행위가 사회 내에서 실제로 질서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움의 기원에는 폭력이 있으며 성스러움을 처음 만들어내는 신들은 희생물의 변형된 형태에 다름 아니다.

지라르의 논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종교는 본질적으로 ‘희생’이라는 테제이다. 지라르의 이해에 따르면 종교적 희생은 항상 기만, 폭력, 그리고 무고한 자의 희생을 강력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교적 신화와 제의적 희생의 측면은 사회가 실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살인을 저지르는 원초적 이유나 실천을 은폐하고, 성스럽게 만들며 정당화시킬 때만이 사회적 결속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Ⅲ. 성서적 종교와 ‘비폭력’
지라르에 의하면, 기적적이게도 세계역사의 어느 순간에 모방폭력에 단절이 생기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단절은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Things Hidden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즉 초석적인 폭력에 대한 진실이 계시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성서는 전 세계의 신화 체계와 비교해 볼 때 철저하게 독특하다. Girard, Des Choses cachees depuis la fondation du monde, Stephen Bann and Michael Metteer. trans., Things Hidden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7), 154.
그것은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것을 제공해준다. Ibid., 144.

신화의 텍스트들이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집단폭력에 충실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반영이라면, 또한 그 텍스트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실제로 일어난 폭력에 대한 보고가 거짓은 아니지만 희생양 메커니즘의 효과에 의해 왜곡되고 변형된 것이라면, 예컨대 신화가 자신들의 박해에 대한 박해자들의 회고의 시각이라면, 우리는 희생당한 편에 서서 희생양에게는 죄가 없으며, 그를 죽인 자들에게 오히려 죄가 있다고 하는 (혁명적인) 관점의 변화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Ibid., 147-148.

성서적 종교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반복하거나 정당화시키지 않고 ‘모방 욕망’의 살해적 의미를 은폐시키지 않는 다는 점에서 유일한 것이다. 오히려 성서적 종교는 그러한 의미를 강력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성서적 종교는 희생양에 대한 폭력으로부터 혜택을 누리려는 권력을 지닌 사회 엘리트들의 편을 드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무고한 희생양들과 스스로 연대하는 종교다. 성서 기자들은 도덕적으로 희생된 자들의 편을 들고, 그들을 옹호하려는 강한 경향성을 보인다는 베버(Max Weber)의 관점을 지라르는 전적으로 지지한다(Ibid., 147).
성서적 종교는 “희생양들은 죄가 없으며 살해에 기초한 문화는 결국에 가서는 자기 파괴적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다” Ibid., 149.
는 사실과, 진정한 죄인은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들이라고 계시한다.

예를 들면, 카인과 아벨의 신화는 로물루스(Romulus)가 레무스(Remus)를 죽여 로마시(市)를 창립하는 신화의 살해와 외관상으로는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초석적인 폭력이 로마신화와는 달리 폭력 그 자체로서 나타나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난받는다. Ibid.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 ”(창4:1-24).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초석적 살해에 개입해서 오히려 살해를 금지하는 율법을 선포해버린다. Ibid., 146.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5). 뿐만 아니라 요셉, 모세, 여호와의 종들은 타인에 의해서든 자신에 의해서든 죄 없는 희생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Girard, 『희생양』. 202.

시편의 많은 시들이 희생자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으며, 욥기의 저자는 욥의 친구들보다는 비방 당하는 욥의 편을 들고 있다. 세 사람의 친구와 그들의 신은 폭력을 성화시킨다. 그들은 욥의 말을 듣지 않고, 그에게 집단적 린치를 가하며, 그것을 성스러운 싸움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욥이 자신의 죄를 수락하고, 그들의 단죄를 받아들인다면, 속죄양의 유죄는 만장일치가 될 터이지만, 욥은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 그 항의가 욥을 진정한 속죄양으로 만들지 못하게 한 요인이며, 욥의 이야기를 신화로 변모시키지 못하게 한 요인이다[Girard, La Route antique des hommes pervers (Paris: Grasset, 1985) 참조].
고난받는 종의 노래는 오래된 신화론적 드라마를 재현하고 있는 바, 군중들이 무고한 희생자를 둘러싸서 그에게 해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관점은 변한다. 성서 기자는 그러한 비난을 수용하지 않으며, 희생자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 옹호된다고 보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기자들이 인류역사에서 최초로 주장한 것이 바로 인간공동체가 숨겨진 희생양들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과 이 희생양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이다. 성서의 계시가 도발적이고도 전복적인 것은, 신화는 초석적 살해가 없었다고 은폐․설득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성서는 그것을 명백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탈신화화 작업이 성취되지 않는다. 신화, 희생, 금기는 여전히 존속되며 특히 희생양의 죽음이 어떤 때는 인간공동체의 책임으로, 또 어떤 때는 복수를 요구하는 여호와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Girard, Things Hidden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158.
아직도 철저하게 비폭력적인 신관념과는 거리가 있다. 희생양에 대한 진실을 왜곡 없이 철저하게 폭로하고 구약성서에 의해 나타난 계시를 완성하는 것은 오직 복음서 텍스트에서이다.

복음서,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 본문’에서 예수는 “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마13:35)라고 말한다.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로 감춰진 것은 무엇인가? 지라르에게는 그것이 초석적 살해에 대한 진실이다. “화 있을찐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눅 11: 47-50).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살해를 자행한 자들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초석적 폭력에 의해 촉발된 정신적 구조에 여전히 지배되어 있다. Ibid., 160.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만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3-44). 이 본문에서는 세 가지가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탄 지라르에 의하면, “사탄은 악순환적인 폭력 메커니즘 즉 폭력적인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문화 또는 철학적 체계에 인간을 매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Ibid., 162).
, 원초적 살해, 그리고 거짓말이다. 사탄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거짓말을 유업으로 물려받는 것이며 그 거짓말은 살해를 은폐한 거짓말이다. 결과적으로 예수가 말하는 거짓말은 이중적 살해를 말한다. 거짓말은 과거의 살해를 덮기 위해 저지르는 또 다른 살해인 것이다. 사탄의 자녀란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선지자들을 살해했던 사람들의 자녀를 말하는 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은 이러한 부류에 해당한다는 비판이다. Ibid., 161.

따라서 복음서가 말해주는 것은 바로 인간문화에 대한 진실이다. 초석적 살해의 메커니즘과 그것의 역사적인 은폐는 복음서의 계시 즉 의로운 자가 무죄라는 계시에 의해 폭로된다. Ibid., 166-167.
그러므로 초석적 살해를 계시한 다음에는 의당 수난이라는 행동에 의한 계시가 뒤따른다. 외양상으로는 예수의 수난이 종교적 제의와 유사하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가 희생양을 살해하여 그 자신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난다. 따라서 예수의 수난을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외관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성서적 종교는 이전의 종교와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 신화나 종교에서는 희생양이 죄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예수의 수난은 극심한 불의일 뿐만 아니라 예수에게 가해진 폭력은 전혀 부당한 것임을 보여준다.

복음서는 신화처럼 박해자의 관점이 아니라, 철저하게 희생자의 시각에서 기록되었다. 따라서 복음서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드러내며 희생당한 자의 초석적 죽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수는 폭력을 당함으로서 모든 종교가 폭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여지없이 폭로시켰다.

이제부터는 부당하게 박해받는 것이 그대로 폭로되지 않는 희생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신성화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신화창조도 박해를 왜곡시키지 못할 것이다. 복음서는 그 어떤 신화화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초석적인 메커니즘을 폭로함으로써, (희생) 메커니즘의 작용에 제동을 걸기 때문이다. Ibid., 174.

예수의 수난의 기능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함으로써 그 메커니즘의 기능을 영원히 막는 것이라면, 역사적인 기독교의 전통과는 상관없이 예수의 수난은 희생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끊임없이 희생제의를 거부하고 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예수는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의 희생으로서 죽는 것이 아니라, 희생이라는 것에 대항해서 더 이상 희생이 없게 하기 위해 죽은 것이다. ”폭력이 주인 노릇하는 곳에서 예수는 죽어야 한다.“ Ibid., 210.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은 그 어떤 복수와도 근본적으로 무관하며 신의 폭력이라는 관념만큼 복음서를 왜곡하는 것은 없게 된다. 따라서 복음서는 원시종교에서 신이 갖는 기능을 신에게서 제거한다. 예수는 철저하게 ‘비폭력적’ 지라르의 담론에서 ‘비폭력’이란 ‘희생’이란 말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비폭력은 종교적 희생을 부정하는 모든 긍정적인 도덕적 특징을 대변한다. 용감하게 진리를 선포하고, 평화를 애호하며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을 옹호하는 일이 비폭력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이며 그의 가르침에서 전혀 새로운 것은 복수의 포기와 원수 사랑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복음서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모든 희생 종교의 장치인 금기와 제의를 대신한 사랑이며 폭력의 추방으로 모방 위기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며 인간관계 속에 있는 모든 복수와 모든 보복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Ibid., 196-197.
나아가 모든 인간이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더 이상 원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Ibid., 211.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인자’(Son of Man)라고 불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만이 신이 인류 전체에게 부여한 목적을 달성한 유일한 인간이며 폭력과 그 결과에 의존하지 않는 이 땅 위에서의 유일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Ibid., 213.
지라르에 의하면, 폭력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비폭력과 화해이다. 폭력의 메커니즘이 예수에 의해 완전히 폭로된 마당에, 인간의 희망은 복수심을 버리고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폭력 모방의 포기는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문제이며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은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모방하는 것이 인류의 최종적 희망이 되는 셈이다.
이토록 성서적 종교의 계시가 분명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지난 2천년 동안 그것이 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일까? 오히려 역사상 최대의 희생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은 사탄의 부추김을 받아 모든 힘을 다해 기독교 계시에 저항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Guy Sorman, The Real thinkers of the twentieth century, 강위석 역, 『세계를 움직인 사상가들』(서울: 한국경제신문사, 1992), 367.
사탄이 무죄한 사람을 유죄라고 규탄하는 검사라면 예수는 “모든 박해의 재현과의 싸움에 있어서 성령(보혜사)이다.” Girard,『희생양』, 290.

예수가 사랑으로 폭력 메커니즘의 악순환을 막고, 그것으로 박해자들의 신화를 깨뜨린다면,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사탄이란, 그런 의미에서 폭력 메커니즘, 모방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사탄은 경쟁상태와 무질서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거짓 질서의 시원에 있는, 이 세계의 군주이며 원칙이다. “사탄의 질서에서는 살인 외의 다른 질서가 없으며, 이 살인은 거짓이다. 인간이 사탄의 아들인 것은 그들이 살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Ibid., 185.
사탄은 박해의 원칙이며 속죄양을 만드는 왕이다. 그의 뒤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는 “천하만국과 그 영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탈신비화의 기독교는 또한 신비화의 기독교이기도 하다. 예수의 수난을 제의로 만드는 순간, 기독교는 신화가 되어, 박해자의 대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서구문화가 제국주의적 박해문화일 수 있는 것은 예수 수난을 제의적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성서를 제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비제의적 텍스트이다.
폭력이 야만적으로 되어 갈수록 희생은 불합리해져 가고, 희생자가 무죄라는 점이 더욱 분명해질수록 폭력의 무의미성은 더욱 분명해진다는 점에서 성서적 종교의 계시는 여전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지라르는 온 인류가 무시무시한 폭력의 위협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독교는 쓸모없는 증언자 노릇과 기독교 계시의 대변자 노릇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요청한 것같이 자비라는 당위성으로 폭력의 논리를 갈아 치워 버려야 하는 독특한 사명을 감당할 때임을 역설한다. Ibid., 368.

Ⅳ. 방법론적 문제
사실 우리는 지라르의 작업을 통해서 그의 과도한 해석학적인 사용을 적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개념적인 문제들을 너무도 자주 수사학적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의 이론이 거짓으로 입증될 수 없다는 인상을 심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이론에 상충되는 증거는 종교가 자신의 진정한 기원을 은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에 의해 교묘히 넘어간다. 즉 해석학적인 과용을 무기로, 지라르는 자신의 이론을 반증에 대한 응답보다는 진리의 척도로 사용하려는 듯이 보인다. 심지어 지라르는 분명히 프로이트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극복했다고 믿는 것 같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제 7장에서 프로이트가 모방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욕망은 대상(어머니)에게 철저하게 뿌리박고 있다는 생각과 아들에게 아버지를 죽이고 근친상간을 하고 싶다는 신화적 욕망에 지나치게 사로잡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라르는 너무도 빈번히 자신의 담론을 진리를 결정짓는 정경(canon)으로 취급하고 있다. James Williams, "the Innocent Victim: Rene Girard on Violence, Sacrifice, and the Sacred," Religious Studies Review (1988 14/4 ), 323.

지라르는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엄밀하게 말해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방법이 가설적 및 연역적인 학문의 전통에서 과학적이기를 욕망한다. 지라르의 학문적 방법론은 하나의 모델을 구성하고서는 그 다음에 그것을 다수의 사실 속에 끼워 맞추는 식이다. 지라르는 자신의 가설 ― 모든 인간의 활동 근원에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단 하나의 모델이 있다는 가설 ― 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가설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기에는 많은 난관에 봉착하고 있으며, 더욱이 희생양 메커니즘이 나타나지 않는 신화나 종교의 예도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라르의 확고한 믿음은 성서해석학의 영역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당당하게 누구도 자신 보다 성서를 잘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고 본다. “우리는 성서를 관통하는 일관성을 찾고자 하였으며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음을 믿는다.” Girard, Things Hidden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210.
성서의 일관성, 즉 “2천년 동안 거기서(성서) 기다려 오던 지식”은 지라르 자신의 이론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다. Ibid., 219.
그는 성서적 계시가 존재론적 신성(deity), 구속사역, 또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하고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그러한 모든 요소들은 거부한다. Ibid., 183-216.
지라르는 성서의 유일무이성을 ‘비폭력’과 ‘희생’의 극명한 대조와 희생을 배격하고 비폭력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지라르의 성서 해석은 많은 점에서 비판에 직면해 있으며 성서적 종교가 실제로 지라르 자신이 제시하는 근거들에 빈틈없이 부합되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예컨대, “복음서에서는 그 어디에도 예수의 죽음을 희생 ― 희생을 속죄, 대속 등 그 무엇으로 정의하든지 간에 ― 으로 암시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이 희생으로 정의된 곳은 어디에도 없다” Ibid., 180.
고 단정하는 것에서 그의 지나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성서적 종교의 발전과 그 정점에 비폭력을 그것의 전체적인 경향성으로 삼으려 했고, 비폭력을 ‘희생’의 정반대의 극에 상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테제를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복음서로부터 희생적 모티프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지라르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검토해 보자. 무고한 자들의 집단적인 살해가 모든 인간 사회의 초석에 보편적 문화 현상으로 나타나고, 더구나 이러한 폭력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욕망의 무질서로부터 발생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탐욕 ― ‘모방 욕망’을 성서적으로 해석하면 ‘탐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 바 ― 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왜곡된 마음이 극복될 수 있을까.

지라르에 의하면, 모방 욕망과 그것의 살인적 결과를 추방하려면, 희생양 메커니즘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초석적 메커니즘이 드러나게 되면, 희생양 메커니즘 즉 폭력에 의한 폭력의 배제는 그 드러남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며 그것은 더 이상 관심사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의 진정한 관심은 이러한 드러남에 의해 앞으로 제물로 희생될 인간, 즉 사탄적 메커니즘의 종말에 있다는 것이다. Girard, 『희생양』, 326.
복음서의 도덕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형제를 철저하게 사랑하고, ‘짝패’(double) 관계’ 끝없는 욕망모방은 그 전범(중개자)이 욕망주체와 가까운 사이에 있을 때 주체와 중개자 사이에는 은연중에 경쟁관계가 생겨나면서 질투, 원한, 선망과 같은 미묘한 감정을 낳게 하는데, 이렇게 너무나 가까워서 욕망주체와 거의 같은, 그래서 그의 분신과도 같은 중개자를 지라르는 ‘짝패’(double)이라고 부른다.
에 연루된 폭력적 모방을 포기할 것을 촉구하며 무엇보다 신에게는 그러한 흔적들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Girard, Things Hidden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215.
복음서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려는 지라르의 공로는, 폭력의 공허함과 어리석음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주장을 바꾸고 태도를 변경하는 일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며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오해와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깨우친 것이다. Ibid., 201.

지라르가 역설한 내용이 합리적인 지성을 갖춘 현대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만한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에서 아무리 직접적인 신학적 숙고가 생략되어 있다고 해도, 또한 지라르가 주장하는 바대로의 희생적 관점을 우리가 백 번 채택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주장들이 신학적으로 부적절하다는 판단은 양보할 수 없다. 지라르의 이론이 함의하고 있는 바대로 야만적이고 부정의를 당한 희생양을 위해서는 인과응보적 감정과 태도로부터 단순히 해방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인 것이다.

지라르의 탁월한 미사여구에서 불구하고, 그의 주장에는 재고되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지라르의 날카로운 통찰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성서의 깊고 풍부한 메시지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신학적 약점을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가 파악한대로 복음서는 예수가 폭력적인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분명 세례 요한과 혁명적 메시아 전통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사건과 언설이 저변에 흐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 5:9)”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오 검을 주러왔다(마 10:34)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누구든지 네 오른빰을 치거든 왼빰을 돌려 대라(마 5:39)“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아느냐. 아니다, 도리어 분쟁케 하러 왔노라(눅 12:51)“ 그리고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마 26:52)“와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검을 살지니라(눅 22:36)“, 또한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미워하는 자를 선하게 대하라(눅 6:27)“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환전상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 2:15)“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복음서가 비폭력적 평화의 메시아니즘을 말해주는 측면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예수가 당대의 보편적 메시아니즘이었던 혁명적 메시아니즘과도 역시 연관되어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과 해석을 갈등 속에서 단지 역사적 기독교가 예수가 비정치적인 태도, 즉 로마 정부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이해하고 그런 탈정치적 문맥을 강화시켜 온 것만은 명백한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성에 대해 S. Brandon은 “마태, 누가, 요한복음의 저자들은 예수의 박해를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는 데 관심했다. 그들은 대체로 마가의 이야기를 따랐으나, 일차적인 것은 예수를 친 로마적인 인물로 그리는데 주안점을 두었기에, 예수의 평화주의의 주제를 발전시킨 것이다”라고 과감하게 주장한다[S. Brandon, The Trial of Jesus of Nazareth (New York: Dorset Press, 1988), 76]. 실제로 복음서에서는 로마의 앞잡이 요세푸스 조차 매우 비열하고 포악한 인물로 그리고 있는 총독 빌라도를 예수의 처형의 문제로 매우 번뇌하는, 즉 매우 인간적인 면모들 드러내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누가의 경우는 예수의 재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을 삽입시키고 있다. 헤롯과 빌라도가 야합하는 장면인데, 분명히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소란(sedition)을 야기한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체포되었는데, 자기 관할에서 일어난 일이요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을 갈릴리의 허수아비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에게 넘겼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아마도 누가의 의도는 예수의 무죄, 즉 로마에 대한 선동의 무관함에 대한 증인으로 헤롯과 빌라도가 서로 떠넘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Ibid., 121-122).

또한 지라르는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이론적 무리가 뒤따른다. 역사적인 문화의 대부분이 그것의 기원을 은폐하는데 공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증거를 확보하는데 있어 논리적 난관에 봉착한다. 대리적 폭력 메커니즘이 단지 파편화된 형태로만 나타난다하더라도, 지라르는 이러한 사실이 문화의 폭력적인 죄악적 기원을 은폐하려는 시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 은폐된 메커니즘의 문제는 그 주장이 반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데 있다.
근대역사에 대한 지라르의 해석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지라르는 희생자들의 참상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기 위해 그리고 근대과학의 발전과 사회정의의 추구를 위해 성서적 전통에 지나친 신뢰를 보이고 있다. 지라르에 의하면 성서는 모든 문화의 허구성을 탈신비화시키는 힘이다. 바로 기독교는 바로 자기의 박해를 정당화시키는 박해자들의 신화를 폭로하는 텍스트에 의지하는 종교이다. 그 탈신비화의 능력 때문에 과학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과학정신은 복음서가 갖고 있는 지적, 도덕적, 종교적 요소의 복합, 탈신비화 정신에 많이 빚고 있으며, “과학을 발명했기 때문에 마녀사냥을 그만 둔 것이 아니라 마녀사냥을 그만뒀기 때문에 과학을 만들어 낸 것이다.”[김현, 『르네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서울: 나남출판사, 1987), 71]
지난 몇 세기 동안 운용된 다양한 힘들 가운데서 유독 성서적 거듭해서 강조함으로써 다른 중요한 요소들은 주변화 되고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가 서구의 사회․정치적 역사나 지성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분명하지만, 근대 역사의 많은 부분이 기독교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복음의 숨은 영향력만을 근대 문화사의 추동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순진하게 본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근대 역사의 진보, 즉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확보되고 자유가 신장되며 사회 정의 실현되는 과정에 오히려 기독교가 장애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20세기의 대량학살은 복음이 적어도 과거에는 무제약적인 폭력 발생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주었던 전통적인 희생 메커니즘을 침해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현대세계에서는 희생 메커니즘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메커니즘은 더욱 필사적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더 많은 희생양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금세기의 대량학살에 대해 적절하게 해명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근대 이전에도 대량학살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량으로 학살할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했던 것이다. 나치의 학살이나 스탈린의 대숙청 그리고 그 이외의 대량학살이 일차적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복음의 폭로로 연유되었다는 것은 입증될 수 없는 주장이다.
더욱이 지라르는 역사의 동력을 인지시키고 폭력과 희생양을 삼는 양식을 포기시키며 복음의 비폭력적 호소로 세상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매우 묵시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일차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복음적 비폭력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은 감정에는 호소하는 바가 있으나 그다지 현실적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또한 비폭력에 대한 지라르의 호소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폭력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폭력을 가장 단순하게 타인에게 물리적인 상해를 입히는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는 매우 협소한 폭력개념이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이 폭력적 행위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화가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 역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지 않음으로 인해 폭력의 폐지를 호소하는 지라르의 주장은 매우 모호한 채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비폭력주의가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된다. 예컨대 악한 정권 아래서 자유와 평화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고통을 받고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는 호소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을 사용해선 안 되기에 구조적인 사회정의의 문제를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의 손길에 맡겨버리고 자신은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 희생당하면서 그 폭력을 폭로하는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주장은 현실 사회에서는 오히려 무책임하게 보인다.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통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고통을 해소하는 작업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John Bennett, Christian Realism (New York: Scribner"s Sons, 1974), 98.
비폭력주의가 어떠한 역사적 조건에서도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폭력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성스럽고 평화적이어야 할 종교에까지 깊이 내재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절망감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의 문제는 냉철한 숙고를 요하는 문제이다. 폭력을 일반화시켜서 이해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것을 어떻게 문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할 것이다. 폭력의 종류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하다. 아무리 단순하게 논의를 하더라도, 폭력은 불의한 근원적 폭력 혹은 제도화된 폭력과, 거기에 불가피하게 폭력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는 반역적이고 혁명적인 폭력, 그리고 그 저항적 폭력을 진압하는 진압적 폭력의 형태로 논의될 수 있다. 폭력은 그 어떤 폭력이든지 일차적인 의미 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무조건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문제이다. 폭력의 악순환의 딜레마가 항상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라르의 비폭력주의는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철저한 비폭력주의라는 양보할 수 없는 입장으로 고정시켰을 경우, 정당한 이유를 갖는 온갖 형태의 전쟁이나 무장폭력과 유혈폭력은 반복음적이고 반기독교적으로 매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폭력적인 상황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의 역사적 기독교가 보여주었듯이 어느 한쪽만의 폭력을 문제시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평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폭력적인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데도 별 도움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그러한 폭력적인 상황이 지속될 수 있는 요건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미 공고화된 불의한 폭력, 즉 제도화된 폭력에 대한 비판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폭력이란 이집트제국, 로마제국, 그리고 콘스탄틴 이후의 제도화된 교회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 온갖 전제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이며,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제도로 인해 억압받는 불의한 상황 자체이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에 항거하는 출애굽적인 정당한 폭력이 있어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거대한 폭력은 늘 합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합법적인 형태를 가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정당한 것은 아니며, 반대로 제도화된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이 비합법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부당한 것은 아니다. 결국 폭력에 대한 비판은 대응논리로서 비폭력만을 무조건적으로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현상에 내재된 다양한 폭력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총체적인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아울러 폭력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역사적 기독교는 온갖 형태의 폭력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들 그리고 체계들 내에 스며들어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정직한 자기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며, 현대 사회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 즉 육체적 폭력(살인, 학살 등), 구조적 폭력(사회, 정치적, 문화적 구조들이 사람들의 집단을 억누르거나, 차별하거나, 배제시키거나 무시하는 폭력), 경제적 폭력(경제생활이 존엄하게 살고자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조차 부정하는 방식으로 조직화된 폭력), 사회적 폭력(인종차별, 성차별과 같이 피부색, 성, 계급, 민족에 따라 인간을 소외시키는 폭력), 가정폭력(아내와 아동학대), 심리적 폭력(개인 혹은 집단이 사회 안에서 협박당하거나 공포를 느끼게 하는 폭력), 도덕적 폭력(권력을 가진 쪽에서 약한 쪽을 향해 도덕적인 잣대로 가하는 폭력),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등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며, WCC처럼 그러한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WCC 제8차 총회에서 정한 ‘폭력극복 10년’(Decade to Overcome Violence:2001-2010)은 폭력이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의 세 가지 요소에 가장 위협적인 것이라는 인식에 정초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조적인 폭력, 그리고 경제문제와 생태문제 등이 새롭게 재개념화 되었고 교회에 의해 정당화되었던 폭력의 문제에 새로운 도전을 주게 되었다. 그것의 목표는 첫째, 모든 형태의 폭력을 언급하면서, 폭력에 대한 세계 각 지역이 분석과 폭력극복을 위한 방법들을 배우는 것이다. 둘째, 교회들에게 폭력 극복을 촉구하고, 폭력의 신학적 정당화를 폐지하고 화해와 비폭력의 영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셋째, 지배의 감정이 아닌 협력에 기초한 공동체 내 공동안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창조한다. 넷째, 공동체 내의 다른 종교와 협력하기 위해 그리고 다원사회에서 종교와 인종 문제를 남용하는 교회들에 도전하기 위해 다른 종교로부터 평화건설에 대한 영성을 배우고 자료들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군사문화에 도전한다(“폭력극복 10년 소개,” http://www.kncc.or.kr/dov.htm). 폭력극복을 위해 WCC는 폭력의 구조적, 문화적 뿌리를 찾아내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폭력을 자행하는 자들과 폭력의 도구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생명을 가치와 존엄성을 추구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혁신적인 예배의식, 성경공부, 신학적 논의 등을 개발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이를 위한 네트워크 개발을 지원하고자 한다. WCC는 교회와 에큐메니칼 단체들 그리고 전세계의 시민단체들에게 폭력의 악순환을 깨기 위한 시급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바로 “도시에 평화를”(Peace to the City) 캠페인이다(“A Basic Framework for the Decade to Overcome Violence: Working Document Adopted by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26 August-3 September 1999" in http://www.wcc-coe.org/wcc/dov/frame-e.html).
을 다양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일이 절실하다 하겠다.

Ⅴ. 나오면서
인류문명의 근본에는 초석적인 폭력이 있고 이의 모방을 통하여 반복되는 폭력으로 폭력을 막는 희생제의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성스러움은 폭력이다. 모든 희생은 희생양 메커니즘에 일치한다. 희생은 종교 일반에 기초해 있으며 인간 사회 문화 전체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된다. 이제 우리는 지라르가 주장한 대로 인류 문명의 근본에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전 인류가 사랑과 화해를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희생제의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비희생적 맥락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된 본질을 회복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모방경쟁이라는 지라르의 가설은 이론적 신선함과 아울러 그의 이론이 갖는 한계로 인해 현재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음도 사실이다.
얼마전, 교황 바오로 2세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를 포함하여, 카톨릭교회가 지난 2000년 동안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전 세계를 향해 용서를 구한다는 중대한 연설을 했다. 특히 그는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폭력"을 언급하면서 "카톨릭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억을 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통이나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된 종교적 박해의 무서운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이를테면 민족성이나 인종, 계급 등의 특정 논지를 토대로 정치적 반대자나 종교적 이단을 박해하거나 학대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왔다. 기독교 내에서의 분쟁과 다른 측에 대한 박해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정통과 이단의 이념은 교회가 미혹되기 쉬운 악덕들이었다. 이 이념은 우리가 언제나 옳다는 교만함의 악덕, 타자의 신앙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현학적인 악덕, 합리적인 비판이 설자리가 없는 허영심의 악덕 등을 교묘하게 은폐시켜 주었다. 오만과 편견, 억측과 자만심으로 인해 가장 비인간적이고 공포스러운 일을 저질 수 있었던 것이 종교였으며, 그 종교의 지식 생산자였다. 오늘날에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나 이스라엘의 과격파 시온주의자들, 그리고 미국의 극단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 또한 그렇다. 그들이 저질러 온 폭력은 항상 "신의 이름"과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되었다. 이제는 독선과 적대감, 권력화 된 신학과 교권적 기득권 등의 악덕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 동안 전제하기 힘들었던 "우리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이상적이며, 깊이 있는 신학적 성찰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라르가 인류의 희망으로 여기는 성서적 종교의 비폭력주의 정신은 정작 성서를 절대화하면서도 성서와는 거리를 두고 존속해온 역사적 기독교에 하나의 의미 있는 도전과 충고였으며, 나아가 전쟁과 폭력을 거부하고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할 기독교의 본래적 사명을 일깨운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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