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퍼_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⑧
쉐퍼_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⑧
http://blog.naver.com/joyintheo/10069013778
들어가며
벌써 열한 번째 프란시스 쉐퍼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이렇게 긴 연재가 될 것이라고는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연재가 길어지면서 약간의 어려움을 겪는 부분도 없지 않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프란시스 쉐퍼라는 위대한 복음주의 지성의 글을 부족하게나마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무척 큰 기쁨이 되고 있고, 또 이 글을 통해 간혹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글쓰기’를 소명으로 삼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하심은 나의 유한한 지성으로는 조금도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나는 프란시스 쉐퍼의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현대 인식론이 실존주의와 언어 분석으로 귀결되면서 철저한 회의에 빠진 과정을 요약하여 설명해 보았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는 이와 같은 인식론적 딜레마에 어떤 대답을 주고 있는가? 이것이 오늘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에 대한 소개를 마감하면서 정리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 기독교는 현대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대답을 줄 수 있는가?
1.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무엇인가?
프란시스 쉐퍼는 ‘인식론적 회의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말은 내가 좀 더 개념을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해 만든 용어인데, 쉐퍼는 이 말을 ‘인식론적 문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식론적 회의주의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기본적으로 철학에서 인식론은 ‘우리는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다시 말해, 내가 나라는 존재 외부에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확실한(틀림없는) 사실’을 ‘정확하게(있는 그대로)’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수많은 것들이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현대 지식인들은 대부분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의심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도 확실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근본적인 회의주의적 전제 위에서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매우 파괴적인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데, 현대인들은 바로 이런 파괴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인식가능성에 대해 철저하게 회의하고 있다.
여기서 파괴적인 결과라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인 진리를 알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식론적 회의주의 위에서는 필연적으로 ‘절대 진리’ 같은 것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절대 진리’ 같은 것이 정말 존재한다고 해도(존재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내가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보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군가가 ‘절대 진리를 알고 있다’라고 말하면, ‘독선적이다’, ‘겸손하지 못하다’라고 비난을 하게 된다.
2.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전도사 : 자크 데리다
이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현대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보증해 왔던 ‘근대적 사고방식’과 ‘과학의 객관성’이라는 신화가 처참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말하면 의심하지 않고 믿어도 될 만한 ‘객관적 사실’(진리)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마이클 폴라니와 토마스 쿤 같은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과학의 객관성은 근본적으로 허물어졌다. 우리의 객관적 인식 가능성을 보장해 주었던 현대 과학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주1)
이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특히 언어 분석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이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Jaques Derrida라고 할 수 있다.(주2) 데리다에 대해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본 연재의 목적이 아니며, 또한 그 일은 필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데리다가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영향을 미친 점만 간략하게 지적하겠다.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라는 탁월한 작품을 저술한 개혁주의 신학자 케빈 밴후저Kevin J. Vanhoozer에 따르면, 데리다는 언어 분석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 간 철학자 중 하나다. 철학자로서 데리다는 문학은 비유와 은유를 통해 진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철학(신학을 포함하여)은 보다 명제적이고 명료한 언어 구사를 통해 진리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는 기존의 전제를 철저하게 해체시켜 버린다. 객관성을 담보하는 언어 구사라는 것은 마치 과학이 그랬던 것처럼 허구적 신화라는 말이다. 철학(과 신학)의 언어 구사는 독특한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여 마치 문학 이상의 명료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는데 성공해 왔으나, 데리다는 사실은 철학도 일종의 문학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데리다는 텍스트에 담긴 ‘객관적 의미’를 가능하게 했던 저자author의 존재를 무위화undoing하는데, 다시 말해 저자가 자신이 의도했던 순수한 의미를 텍스트 속에 ‘있는 그대로’ 담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를 ‘저자의 의도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전통적이고 신학적인 해석학은 해체되어 버린다. 여기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어떤 단어(기표)가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기의)을 순수하게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데리다는 인간의 언어적 인식의 유한성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인다.(주3)
이렇게 생각해 보자.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해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무언가’를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내 입을 떠난 문장들이 상대방의 귀를 통해 ‘전달되었을 때’ 과연 두 사람은 ‘정확하게 동일한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좀 더 극단적인 예를 들면 ‘예수’를 믿는 두 기독교인이 있다고 해 보자. A는 정통 기독교인이고, B는 자유주의자다. 두 사람은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서 말한다.(주4) A는 B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B가 자신과 같은 유형의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B가 ‘예수를 믿는다’라는 문장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마음 속의 그 내용’이 과연 A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일까?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쉽게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우리가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 속 ‘그 의미’를 그대로 표현해준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자크 데리다는 바로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람은 각자 자신이 자라온 문화적 배경에 맞게 특정한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를 ‘자신의 문화적 편견’을 덧씌워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도 사실은 서로 전혀 다른 의미의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상대방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처럼 가정하면서 사실은 각자 딴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현대인은 서로 의사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언어는 한 개인의 내부(주관) 속에서만 정의되고 의미를 가질 뿐이다.
우리의 입을 통해 어떤 단어나 문장이 말해지거나 우리의 손을 통해 어떤 단어나 문장이 쓰이는 순간, 표현된 그 단어나 문장은 내 마음에 있었던 본래의 그 의미가 아닌 것이 된다. 현대인은 의사소통이 단절된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정확히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표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바탕으로 볼 때, 성경은 인간의 부정확한 언어로 기록된 것이기에 진리를 ‘있는 그대로’(쉐퍼에 따르면 ‘명제적으로’) 담을 수 없고 우리는 오로지 상징과 비유를 읽듯이 ‘희미하게’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성경으로부터 명제적으로 도출해 낸 진리의 집합인 ‘교리’는 부정확한 진리의 진술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성경을 포함한 언어로 기술된 그 어떤 텍스트를 통해서도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사실상 없는 것이 되고, 정통 기독교는 모두 허구가 된다. 진리를 안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의 말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제 이 세상은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3.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
언어에 대한 회의주의, 인식론의 문제야말로 현대를 지배하는 진리관의 핵심 문제라는 사실을 프란시스 쉐퍼는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삼부작에서 이 언어의 문제를 끊임없이 다루고 있으며, 이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을 주고자 노력했다.
왜 현대인은 이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프란시스 쉐퍼가 볼 때, 이러한 철저한 인식가능성에 대한 절망의 출발은 과학의 전제가 뒤바뀐 데서 시작되었다. 초창기 과학인 근대 과학자들은 ‘열린 체계에서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열린 체계open system라 는 말은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자연 체계 내부의 인과 관계를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과학적 연구의 전제다. 자연법칙이라고 하는 인과 관계를 통해 ‘논리적/합리적으로’ 자연이 움직이지 않고 ‘우연하게’ 자연이 움직이고 있다면 자연에 대한 과학적 연구라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따라서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근대 과학은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 가능성을 초창기 근대 과학자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지 난 시간에 다룬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가 뿌려놓은 씨앗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계시를 압도하게 되었고 과학적 탐구로 입증될 수 없는 초월적 개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과학의 전제가 바뀌게 되었는데, ‘닫힌 체계(closed system)(주5)에서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으로 전제가 전환되었고 이와 함께 현대 과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무신론’적 전제를 과학이 어느 순간 받아들인 것이다.(주6)
이것이 현대의 언어적 회의와 어떻게 관련이 될까? 쉐퍼의 표현대로,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내다버린 (근)현대인들은 이제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의사소통의 근거를 만들어야 했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음에도 다른 인간과 언어로 ‘의미있고 진실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동안 인간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진실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보증되어 왔다. 다 시 말해, 인간은 유한하게 창조되었기에 무한하신 하나님처럼 완벽한 언어를 가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언어 능력은 하나님의 언어 능력을 닮은 것이기에, 또 인격적인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인격적인 인간과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능력을 부여해 주신 것이기에 완벽하지 않더라도 인간 사이에 ‘진실하고 의미있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사소통의 보증자였던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부정되자,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근거로 의사소통을 보증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유한한 언어만으로는 의사소통의 확실성을 담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인간의 언어적 이성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과학적 탐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연구자의 언어가 문화적 배경에 의한 편견에 물든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인간이 과학을 통해서 객관적 진리를 발견한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게 되었다. 인간의 언어를 통한 인식가능성,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불확실해지자 텍스트를 해석하는 인간의 인식가능성 또한 불확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의 작품에서 매우 통찰력 있는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인간은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근거해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A와 B 사이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해 보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아무것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을 것이며, 두 사람이 ‘뜻을 모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상거래’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합의’에 의해 이끌어지는 민주주의 또한 불가능해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두려워하며 서로를 피해 도망 다니며 생존을 위해 서로 싸워야 하는 마치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야만적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쉐퍼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그대로 적용해서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인간됨이 드러나고 있는 삶의 모습이 잘못된 것일까, 역사적으로 ‘닫힌 체계’를 전제하기 시작한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프란시스 쉐퍼는 현대인들의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풀어나가고 있다.
4. 기독교적 인식론
프란시스 쉐퍼는 종교개혁이 전제하는 인식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한하시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배제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의 논리의 출발은 ‘유한한 인간인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데, 이와 같은 전제에서 출발하면 그 끝은 ‘인식론적 회의주의’라는 것을 바로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적 개념에서 출발하면 전혀 다른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은 인간을 유한하지만 인격적으로 창조하였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언어로 자신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인격적인)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하지만 발화자(speaker)의 마음 속 의도를 ‘참되게’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만약 인격적인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전적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인격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독교적 인식론은 두 가지의 극단을 피해야 하는데, 첫 번째 극단은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단어와 문장은 발화자의 문화적 배경에 의한 편견이 덧씌워져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란 ‘전혀 불가능하다’라는 회의주의적 입장이다. 두 번째 극단은 인간은 각자의 문화적 배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완벽하게 객관적이고 동일한 의미가 담긴 단어와 문장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다’라는 순진한 입장이다(이는 실증주의와도 연결될 수 있다). 기독교적 인식론은 이 두 가지 대답을 모두 거부하며,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완벽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참된 의사소통’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 내부에서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의 혼선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의사소통을 실제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쉐퍼는 바로 이런 기독교적 인식론의 입장이야말로 인간과 의사소통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도 그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해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모든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시진 않았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은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참된 사실’들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참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성경으로부터 바르게 도출된 교리들을 ‘진리’로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과 우주에 대한 ‘참된 진리’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독선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참된 진리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주7)
마치며
이 글로써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에 대한 탐구는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쉐퍼의 핵심 저작인 삼부작의 내용을 예수가족교회 주보를 통해 소개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상대주의적 진리관, 절대 진리에 대한 철저한 회의와 절망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진리는 존재하며, 우리는 그 진리를 알 수 있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진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그들에게 복음을 통해 대답을 제시하고자 했던 프란시스 쉐퍼의 그 마음을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주8)
* 참고문헌
김정훈. “쉐퍼가 본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기초.”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성인경 엮음. 1996. 『프란시스 쉐퍼 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성인경. “프란시스 쉐퍼의 교훈.”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이우재. “칸트, 헤겔, 그리고 쉐퍼의 진리관.”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윌리엄 에드가. “모더니티, 포스트모던, 그리고 복음.”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주도홍.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와 영성” (강의안)
Chalmers, A. F. 1999.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3판) University of Queensland Press [국역: 신중섭․이상원 역. 2003. 『과학이란 무엇인가?』. 서광사」
Parkhurst, L. G. 1985. Francis Schaeffer. Kingsway Publications [국역: 성기문 역. 1995. 『프란시스 쉐퍼』. 두란노]
Schaeffer. F. A. 1968. The God Who Is There. Inter-Varsity Press, England [국역: 김기찬 역. 1994. 『거기 계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68. Escape from Reason. Inter-Varisty Fellowship, England [국역: 김영재 역. 1970. 『이성에서의 도피』.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2.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Tyndale House [국역: 허긴 역. 1973.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6. How Should We Then Live? Fleming H. Revell [국역: 김기찬 역. 198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말씀사]
Vanhoozer, K. J. 1998. 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 Zondervan [국역: 김재영 역. 2003.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IVP]
이성 근본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인 '모더니즘'과 중심과 절대는 없다고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 앞에서도 복음의 진리성과 절대성, 그리고 그 능력을 자신 있게 확신하지만, 모더니티를 신앙고백으로 삼아버린 현대 복음주의 교회 앞에서 '성령의 탄식'을 느끼기 시작한 정통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
주
1)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지난 호 연재를 참고하라.
2)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의 책에서 자크 데리다를 다루지 않고 있다.
3)언어학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없었던 분들께는 이와 같은 논리가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두꺼운 편이지만 케빈 밴후저의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IVP)를 직접 탐독하면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4)이것은 내가 그렇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도 보통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을 한다.
5)닫힌 체계라는 표현은 열린 체계라는 말의 반대로, 자연 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개입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6)그러나 무신론 그 자체 또한 과학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에 두고 살아갔던 아담이 하나님께 반기를 든 것처럼, 하나님을 위에 두고 시작된 근대 과학은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철저하게 타락했다고 봐야 한다.
7)여기서 쉐퍼가 강조했던 반정립적 진리관이 매우 중요해지는데, 이 진리관에 따르면 우리가 모든 진리를 알고 있지 않더라도 A라고 하는 진리를 안다면 非A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동시에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모든 진리를 다 알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어떤 진리들을 알고 있다면 그와 반대되는 주장은 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8)프란시스 쉐퍼 전집을 모두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처음 의도였으나, 우선 삼부작을 소개한 것으로 만족하고 추후에 나머지 저작들에 대해서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또한, 조만간 준비되는 대로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다른 주제의 글들을 주보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http://blog.naver.com/joyintheo/10069013778
들어가며
벌써 열한 번째 프란시스 쉐퍼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이렇게 긴 연재가 될 것이라고는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연재가 길어지면서 약간의 어려움을 겪는 부분도 없지 않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프란시스 쉐퍼라는 위대한 복음주의 지성의 글을 부족하게나마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무척 큰 기쁨이 되고 있고, 또 이 글을 통해 간혹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글쓰기’를 소명으로 삼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하심은 나의 유한한 지성으로는 조금도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나는 프란시스 쉐퍼의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현대 인식론이 실존주의와 언어 분석으로 귀결되면서 철저한 회의에 빠진 과정을 요약하여 설명해 보았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는 이와 같은 인식론적 딜레마에 어떤 대답을 주고 있는가? 이것이 오늘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에 대한 소개를 마감하면서 정리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 기독교는 현대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대답을 줄 수 있는가?
1.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무엇인가?
프란시스 쉐퍼는 ‘인식론적 회의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말은 내가 좀 더 개념을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해 만든 용어인데, 쉐퍼는 이 말을 ‘인식론적 문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식론적 회의주의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기본적으로 철학에서 인식론은 ‘우리는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다시 말해, 내가 나라는 존재 외부에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확실한(틀림없는) 사실’을 ‘정확하게(있는 그대로)’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수많은 것들이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현대 지식인들은 대부분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의심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도 확실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근본적인 회의주의적 전제 위에서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매우 파괴적인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데, 현대인들은 바로 이런 파괴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인식가능성에 대해 철저하게 회의하고 있다.
여기서 파괴적인 결과라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인 진리를 알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식론적 회의주의 위에서는 필연적으로 ‘절대 진리’ 같은 것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절대 진리’ 같은 것이 정말 존재한다고 해도(존재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내가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보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군가가 ‘절대 진리를 알고 있다’라고 말하면, ‘독선적이다’, ‘겸손하지 못하다’라고 비난을 하게 된다.
2.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전도사 : 자크 데리다
이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현대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보증해 왔던 ‘근대적 사고방식’과 ‘과학의 객관성’이라는 신화가 처참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말하면 의심하지 않고 믿어도 될 만한 ‘객관적 사실’(진리)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마이클 폴라니와 토마스 쿤 같은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과학의 객관성은 근본적으로 허물어졌다. 우리의 객관적 인식 가능성을 보장해 주었던 현대 과학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주1)
이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특히 언어 분석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이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Jaques Derrida라고 할 수 있다.(주2) 데리다에 대해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본 연재의 목적이 아니며, 또한 그 일은 필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데리다가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영향을 미친 점만 간략하게 지적하겠다.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라는 탁월한 작품을 저술한 개혁주의 신학자 케빈 밴후저Kevin J. Vanhoozer에 따르면, 데리다는 언어 분석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 간 철학자 중 하나다. 철학자로서 데리다는 문학은 비유와 은유를 통해 진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철학(신학을 포함하여)은 보다 명제적이고 명료한 언어 구사를 통해 진리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는 기존의 전제를 철저하게 해체시켜 버린다. 객관성을 담보하는 언어 구사라는 것은 마치 과학이 그랬던 것처럼 허구적 신화라는 말이다. 철학(과 신학)의 언어 구사는 독특한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여 마치 문학 이상의 명료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는데 성공해 왔으나, 데리다는 사실은 철학도 일종의 문학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데리다는 텍스트에 담긴 ‘객관적 의미’를 가능하게 했던 저자author의 존재를 무위화undoing하는데, 다시 말해 저자가 자신이 의도했던 순수한 의미를 텍스트 속에 ‘있는 그대로’ 담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를 ‘저자의 의도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전통적이고 신학적인 해석학은 해체되어 버린다. 여기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어떤 단어(기표)가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기의)을 순수하게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데리다는 인간의 언어적 인식의 유한성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인다.(주3)
이렇게 생각해 보자.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해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무언가’를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내 입을 떠난 문장들이 상대방의 귀를 통해 ‘전달되었을 때’ 과연 두 사람은 ‘정확하게 동일한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좀 더 극단적인 예를 들면 ‘예수’를 믿는 두 기독교인이 있다고 해 보자. A는 정통 기독교인이고, B는 자유주의자다. 두 사람은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서 말한다.(주4) A는 B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B가 자신과 같은 유형의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B가 ‘예수를 믿는다’라는 문장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마음 속의 그 내용’이 과연 A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일까?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쉽게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우리가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 속 ‘그 의미’를 그대로 표현해준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자크 데리다는 바로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람은 각자 자신이 자라온 문화적 배경에 맞게 특정한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를 ‘자신의 문화적 편견’을 덧씌워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도 사실은 서로 전혀 다른 의미의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상대방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처럼 가정하면서 사실은 각자 딴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현대인은 서로 의사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언어는 한 개인의 내부(주관) 속에서만 정의되고 의미를 가질 뿐이다.
우리의 입을 통해 어떤 단어나 문장이 말해지거나 우리의 손을 통해 어떤 단어나 문장이 쓰이는 순간, 표현된 그 단어나 문장은 내 마음에 있었던 본래의 그 의미가 아닌 것이 된다. 현대인은 의사소통이 단절된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정확히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표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바탕으로 볼 때, 성경은 인간의 부정확한 언어로 기록된 것이기에 진리를 ‘있는 그대로’(쉐퍼에 따르면 ‘명제적으로’) 담을 수 없고 우리는 오로지 상징과 비유를 읽듯이 ‘희미하게’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성경으로부터 명제적으로 도출해 낸 진리의 집합인 ‘교리’는 부정확한 진리의 진술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성경을 포함한 언어로 기술된 그 어떤 텍스트를 통해서도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사실상 없는 것이 되고, 정통 기독교는 모두 허구가 된다. 진리를 안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의 말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제 이 세상은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3.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
언어에 대한 회의주의, 인식론의 문제야말로 현대를 지배하는 진리관의 핵심 문제라는 사실을 프란시스 쉐퍼는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삼부작에서 이 언어의 문제를 끊임없이 다루고 있으며, 이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을 주고자 노력했다.
왜 현대인은 이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프란시스 쉐퍼가 볼 때, 이러한 철저한 인식가능성에 대한 절망의 출발은 과학의 전제가 뒤바뀐 데서 시작되었다. 초창기 과학인 근대 과학자들은 ‘열린 체계에서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열린 체계open system라 는 말은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자연 체계 내부의 인과 관계를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과학적 연구의 전제다. 자연법칙이라고 하는 인과 관계를 통해 ‘논리적/합리적으로’ 자연이 움직이지 않고 ‘우연하게’ 자연이 움직이고 있다면 자연에 대한 과학적 연구라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따라서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근대 과학은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 가능성을 초창기 근대 과학자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지 난 시간에 다룬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가 뿌려놓은 씨앗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계시를 압도하게 되었고 과학적 탐구로 입증될 수 없는 초월적 개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과학의 전제가 바뀌게 되었는데, ‘닫힌 체계(closed system)(주5)에서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으로 전제가 전환되었고 이와 함께 현대 과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무신론’적 전제를 과학이 어느 순간 받아들인 것이다.(주6)
이것이 현대의 언어적 회의와 어떻게 관련이 될까? 쉐퍼의 표현대로,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내다버린 (근)현대인들은 이제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의사소통의 근거를 만들어야 했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음에도 다른 인간과 언어로 ‘의미있고 진실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동안 인간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진실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보증되어 왔다. 다 시 말해, 인간은 유한하게 창조되었기에 무한하신 하나님처럼 완벽한 언어를 가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언어 능력은 하나님의 언어 능력을 닮은 것이기에, 또 인격적인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인격적인 인간과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능력을 부여해 주신 것이기에 완벽하지 않더라도 인간 사이에 ‘진실하고 의미있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사소통의 보증자였던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부정되자,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근거로 의사소통을 보증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유한한 언어만으로는 의사소통의 확실성을 담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인간의 언어적 이성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과학적 탐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연구자의 언어가 문화적 배경에 의한 편견에 물든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인간이 과학을 통해서 객관적 진리를 발견한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게 되었다. 인간의 언어를 통한 인식가능성,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불확실해지자 텍스트를 해석하는 인간의 인식가능성 또한 불확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의 작품에서 매우 통찰력 있는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인간은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근거해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A와 B 사이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해 보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아무것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을 것이며, 두 사람이 ‘뜻을 모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상거래’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합의’에 의해 이끌어지는 민주주의 또한 불가능해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두려워하며 서로를 피해 도망 다니며 생존을 위해 서로 싸워야 하는 마치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야만적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쉐퍼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그대로 적용해서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인간됨이 드러나고 있는 삶의 모습이 잘못된 것일까, 역사적으로 ‘닫힌 체계’를 전제하기 시작한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프란시스 쉐퍼는 현대인들의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풀어나가고 있다.
4. 기독교적 인식론
프란시스 쉐퍼는 종교개혁이 전제하는 인식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한하시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배제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의 논리의 출발은 ‘유한한 인간인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데, 이와 같은 전제에서 출발하면 그 끝은 ‘인식론적 회의주의’라는 것을 바로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적 개념에서 출발하면 전혀 다른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은 인간을 유한하지만 인격적으로 창조하였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언어로 자신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인격적인)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하지만 발화자(speaker)의 마음 속 의도를 ‘참되게’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만약 인격적인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전적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인격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독교적 인식론은 두 가지의 극단을 피해야 하는데, 첫 번째 극단은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단어와 문장은 발화자의 문화적 배경에 의한 편견이 덧씌워져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란 ‘전혀 불가능하다’라는 회의주의적 입장이다. 두 번째 극단은 인간은 각자의 문화적 배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완벽하게 객관적이고 동일한 의미가 담긴 단어와 문장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다’라는 순진한 입장이다(이는 실증주의와도 연결될 수 있다). 기독교적 인식론은 이 두 가지 대답을 모두 거부하며,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완벽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참된 의사소통’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 내부에서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의 혼선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의사소통을 실제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쉐퍼는 바로 이런 기독교적 인식론의 입장이야말로 인간과 의사소통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도 그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해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모든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시진 않았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은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참된 사실’들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참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성경으로부터 바르게 도출된 교리들을 ‘진리’로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과 우주에 대한 ‘참된 진리’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독선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참된 진리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주7)
마치며
이 글로써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에 대한 탐구는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쉐퍼의 핵심 저작인 삼부작의 내용을 예수가족교회 주보를 통해 소개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상대주의적 진리관, 절대 진리에 대한 철저한 회의와 절망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진리는 존재하며, 우리는 그 진리를 알 수 있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진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그들에게 복음을 통해 대답을 제시하고자 했던 프란시스 쉐퍼의 그 마음을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주8)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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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hoozer, K. J. 1998. 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 Zondervan [국역: 김재영 역. 2003.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IVP]
이성 근본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인 '모더니즘'과 중심과 절대는 없다고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 앞에서도 복음의 진리성과 절대성, 그리고 그 능력을 자신 있게 확신하지만, 모더니티를 신앙고백으로 삼아버린 현대 복음주의 교회 앞에서 '성령의 탄식'을 느끼기 시작한 정통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
주
1)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지난 호 연재를 참고하라.
2)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의 책에서 자크 데리다를 다루지 않고 있다.
3)언어학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없었던 분들께는 이와 같은 논리가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두꺼운 편이지만 케빈 밴후저의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IVP)를 직접 탐독하면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4)이것은 내가 그렇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도 보통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을 한다.
5)닫힌 체계라는 표현은 열린 체계라는 말의 반대로, 자연 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개입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6)그러나 무신론 그 자체 또한 과학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에 두고 살아갔던 아담이 하나님께 반기를 든 것처럼, 하나님을 위에 두고 시작된 근대 과학은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철저하게 타락했다고 봐야 한다.
7)여기서 쉐퍼가 강조했던 반정립적 진리관이 매우 중요해지는데, 이 진리관에 따르면 우리가 모든 진리를 알고 있지 않더라도 A라고 하는 진리를 안다면 非A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동시에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모든 진리를 다 알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어떤 진리들을 알고 있다면 그와 반대되는 주장은 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8)프란시스 쉐퍼 전집을 모두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처음 의도였으나, 우선 삼부작을 소개한 것으로 만족하고 추후에 나머지 저작들에 대해서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또한, 조만간 준비되는 대로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다른 주제의 글들을 주보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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