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퍼_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⑦
쉐퍼_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⑦
http://blog.naver.com/joyintheo/10069013753
들어가며
지 난 시간에는 철학과 진리 탐구에 대한 중요한 물음인 “존재란 무엇인가”(존재론/형이상학), “도덕이란 무엇인가?”(윤리학)에 대한 인간의 딜레마에 대해 프란시스 쉐퍼의 대답을 소개하였다. 평소에 이와 같은 질문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대체로 생소하고 어려운 개념으로 느껴졌을 수 있으나, 조금이라도 인간과 우주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질문의 중요성을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시간은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의 마지막 주제인, 인식론적 딜레마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분량의 문제로 인해, 인식론적 딜레마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은 다음 연재에서 다루고자 한다.
* 인식론적 딜레마 :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1. 플라톤 : 인식론적 딜레마에 대한 대답으로 보편자를 찾고자 했던 인물
프 란시스 쉐퍼는 인식론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제3장에서 플라톤을 소개함으로써 글을 시작한다. 철학 또는 지성사를 접해보지 않은 경우, 플라톤은 유명한 희랍 철학자라는 사실만을 얼핏 들어 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을 자세히 소개하려는 것이 목적은 아니므로, 이에 대해서는 철학 개론이나 철학사를 다루는 좋은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어쨌든 B.C. 5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생존했던 플라톤Plato은 철학 또는 인류 사상사의 기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쉐퍼가 자신의 글에서 플라톤을 주목했던 지점은 ‘개별자만으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플라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말은 만약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의미, 가치, 도덕, 인간의 존엄성’ 등은 도무지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의미가 있으려면, 삶의 이유가 존재하려면, 도덕이 실제로 가능하려면 그 모든 것을 절대적인 위치에서 설명해주는 “보편적인 기준”(이하 ‘보편자’)이 존재해야 한다.(주1) 만약 이와 같은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각자(개별자)는 어떤 방법으로도 의미나 가치를 설명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주2)
이 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인데, 이런 의미에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결국 ‘진리(보편자)’를 찾기 위한 기나긴 투쟁 속에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그 보편자를 찾을 수 있다는 낙관적인 희망 속에서 지적 탐구를 이어 왔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보편자를 찾고자 했던 시도에서 실패해 왔다는 것이다.
쉐 퍼에 따르면, 고대 희랍 철학은 보편자를 찾기 위해 두 가지 시도를 했는데, 하나는 폴리스(polis)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의 신(神) 개념이다. 폴리스란 ‘도시’라는 말로, 개별적인 인간들이 모여 이룬 ‘사회’가 보편자(우주에 관한 절대 기준)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란 다수가 지배하는 형태 또는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형태(철인 통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어떠한 경우에도 시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를 제공할 수가 없다. 다수란 51%의 여론의 귀결이므로 다수가 형성되는 정황에 따라 진리는 바뀌게 된다.(주3)
또한 탁월한 지성을 소유한 철인(철학자 또는 지식인)에 의한 소수의 엘리트 지배의 경우에도, 결코 보편자를 담을 만한 무한한 지성을 소유한 지식인의 존재는 불가능하므로 역시 진리는 바뀌게 된다. 그리스의 신 개념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스의 신은 인격적인 신이다.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사랑하고 분노하며 지배하고 다스린다. 마치 인간과 같다. 그러나 이들은 다신(多神) 개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한 신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무한하고 유일한 신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을 통일시켜줄 수 있는 보편적인 준거점을 찾는 데 고대 희랍 사상은 실패하고 만다.
2. 토마스 아퀴나스 : 자연을 자율적 존재로 만들어버린 신학자
쉐퍼가 두 번째로 주목한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다. 이 사람은 중세 가톨릭 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으로서 종교개혁 신학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로마 가톨릭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다.
쉐 퍼가 볼 때 이 사람이 중세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는데,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까지 (신학적/사상적 차원에서) 초자연적 세계(은총의 영역)에 비해 자연적 세계는 그다지 의미와 가치가 없었다. 그 이유는 플라톤적 영향에 경도되었던 중세 초기 신학은 진정한 진리의 세계는 하나님이 계신 저 하늘의 세계(은총의 영역)이며, 우리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으로 감각하고 살아가는 이 물리적 세계(자연의 영역)는 세속적이며 거짓된 영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저 하늘에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주4)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와 같은 은총과 자연의 이원론을 유지하면서, 자연의 영역을 ‘타락하지 않은’ 영역이라고 신학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이전의 사상가들과 자신의 사상을 구분 지었다. 자연이 타락하지 않은 곳으로 설정이 되자, 자연은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하게 되었다. 쉐퍼가 볼 때, 자연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 선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에 속한 것들에 대해 중요하고 선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이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적 이원론에 빠져 있던 중세 신학을 일정하게 바로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을 강조한 방식에 있다. 성경에서 자연(주5)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부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자연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타락을 부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또 다른 극단에 치우치게 되었는데, 자연은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자연에 속한 인간의 이성 또한 타락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성은 완전하고 선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결국 우리의 이성만으로 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 인간에게 속한 것만으로 충분히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자율적’이라고 말한다. 아퀴나스는 인간 이성에 자율성을 부여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에 전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를 두지 않고 인간 이성에 의해 이루어진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에 두는 로마 가톨릭적 자연 신학의 개념이 확립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이와 같은 시도가 계시와 이성, 은총과 자연을 균형 있게 강조하는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쉐퍼가 볼 때 역사적으로 은총과 자연의 이분법 속에서 자연에 자율성을 부여한 결과 ‘자연이 은총을 삼켜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합리주의로 특징 지워지는 근대의 출현이다. 아퀴나스는 ‘근대’의 씨앗을 뿌렸다.
3. 실증주의 : 근대 이성의 낭만적 도약
아 퀴나스를 지나 근대에 이르자, 더 이상 인간에게 ‘은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은총의 영역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허구와 같았다. 우주에는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영역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자연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적 도구는 ‘과학’이었다. 현대 과학의 출현으로 인간은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과학이 지배하는 근대는 ‘실증주의positivism’ 라고 하는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실증주의는 자연의 영역을 우리가 완전히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개별적인 인간이 자신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우리 외부에 불변하는 진리가 서 있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주관적으로 진리를 파악한다는 말은 진리란 우리 외부에 불변하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의 입장에서 파악되는 형태로 진리가 존재한다(진리는 각자에게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증주의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객관적으로’ 자연에 관한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도구는 ‘과학’이며,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은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인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주6)
쉐 퍼에 따르면, 실증주의는 초월적 세계를 배제하고 자연적 세계에 대한 진리를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있는 그대로’ 또는 ‘진리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이와 같은 순진한 인식론은 루소, 칸트, 헤겔 및 키에르케고르를 거치며 진리 개념의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주7)
결정적으로 실증주의는 현대 철학의 도전을 받으며 무너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개인적 지식Personal Knowledge, an Introduction to Post-critical Philosophy)이라는 책을 통해 과학적 지식이 전제했던 객관성이 허구며, 객관적 지식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의 신념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결정적으로 밝혀냈다.(주8) 마이클 폴라니 외에 칼 포퍼Karl Popper 또한 쉐퍼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데, 포퍼는 초기 입장에서 검증과 반증의 과학을 주장하고 있으며, 후기 입장에서는 검증을 포기하고 반증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쉐퍼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과학철학에서 중요한 또 한 사람은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인데, 이 사람은 과학이 계속해서 진리를 축적해 나간다고 하는 전통적 개념을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이론을 통해 반박함으로써 과학적 진리 탐구에 대한 전통적 사고방식을 뒤집어 놓았다.
현 대 사회에도 과학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발견해내는 것’인양 상식적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마치 이와 같은 개념이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관찰, 실험이 이어지고 있는 경향이 있으나, 더 이상 과학이 순수한 사실을 추출해내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자 했던 근대 합리주의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4. 실존주의와 언어분석 : 보편자에 대한 추구를 포기
사 정이 이렇게 되니,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통해 보편적인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근대적 신념을 믿기가 어려워졌다. 실증주의가 최종적으로 무너지면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 보편자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론적으로 제기되기 어려워졌다.
따 라서 현대 철학의 경향은 두 가지로 나뉘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실존주의와 언어분석이다. 실존주의는 이미 충분히 다루었던 것처럼,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합리적으로 보편자를 발견하고자하는 시도를 최종적으로 포기하고 ‘논리적 비약’을 통해 인간에게 의미를 주는 은총의 영역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시도다. 합리적으로 인간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인간에게는 의미가 필요하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을 통해 은총의 영역에 접근하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철학적 시도는 인간의 언어를 분석하려는 경향이다. 유명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이 나 하이데거 등은 언어에 대한 관찰을 시작했는데, 역시 은총이라는 상층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보편자에 대한 포기가 여기에도 전제되어 있다. 인간은 보편자를 알 수 없으며, 다만 우리의 인식이란 우리가 이성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 언어를 명료하게 정의(定義)하는 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대 철학에서 언어 분석은 매우 흥미로운 접근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안타까운 점은 ‘언어로 구성된 세계’를 파헤치며 그 허구를 분석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리다Jacques Derrida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평가받는 인물인데 절대적인 것은 없으므로 모든 것을 해체시키려는 입장에 서 있다.
여 기서 실존주의와 언어분석을 자세하게 서술할 수는 없지만, 이 두 철학으로 대표되는 현대적 사고방식 또는 현대 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의미와 가치, 도덕과 존엄성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더 이상 인간은 ‘논리적 비약의 형태’(현대인은 이것을 신앙이라고 말한다)로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받아들이는 방법 외에는 인간을 기계와 구분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인식론적 딜레마다. 더 이상 인간은 은총과 자연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글을 맺으며
지 면 관계상, 인식론적 딜레마에 대해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존주의와 언어분석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현대인은 더 이상 ‘객관적이고 확실한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다’라는 회의주의적 절망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와 성경의 진리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미 서구 사회는 기독교와 성경의 진리 또한 ‘객관적이고 확실한 진리’가 아니며, 만약 객관적이고 확실한 진리일지라도 그렇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더라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기독교 진리를 연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기독교 교리를 경시하는 태도가 출현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적인 것에 대한 한계 체험’이다. 교리적 내용과 상관없이 기독교라는 종교가 신적인 것을 체험하게 해 줌으로써,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일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들이 체계적으로 고찰해서 내린 절망적 결론을 일반인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렇다면 우리들은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이며, 어떻게 참되게 기독교적으로 신앙할 것인가? 우리 시대에 종교개혁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단순히 교리적 내용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이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현대인들에게 충분하지 않다. 신비주의자인 현대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기독교 교리를 배우며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인식론적 회의와 절망을 전제한 상태에서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기독교 교리만으로는 대답을 줄 수가 없다. 쉐퍼의 주장은, 기독교 정통 교리를 교회가 철저하게 고수해야 하지만 바로 이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와 절망에 대해 교회가 지적으로 변증해주지 않는다면 진정한 종교개혁 신앙을 우리가 고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복음이 대답이 된다는 점을 현대인들에게 제대로 깨닫게 할 수도 없다는 말도 된다.
쉐 퍼의 문화적 변증학, 또는 전제적 변증학이 인식론에 회의를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그 어느 때 보다도 시의적절하며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정통 교리를 철저하게 탐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세상이 던지고 있는 정직한 지적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대답해주려는 노력’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지성을 포기하면, 참된 복음도 함께 사라진다.
* 참고문헌
김정훈. “쉐퍼가 본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기초.”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성인경 엮음. 1996. 『프란시스 쉐퍼 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성인경. “프란시스 쉐퍼의 교훈.”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이우재. “칸트, 헤겔, 그리고 쉐퍼의 진리관.”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윌리엄 에드가. “모더니티, 포스트모던, 그리고 복음.”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주도홍.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와 영성” (강의안)
Chalmers, A. F. 1999.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3판) University of Queensland Press [국역: 신중섭․이상원 역. 2003. 『과학이란 무엇인가?』. 서광사」
Middleton, J. R./Walsh, B. J. 1995.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Biblical Faith In A Postmodern Age. InterVarsity Press [국역: 김기현․신광은 역. 2007.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살림]
Parkhurst, L. G. 1985. Francis Schaeffer. Kingsway Publications [국역: 성기문 역. 1995. 『프란시스 쉐퍼』. 두란노]
Schaeffer. F. A. 1968. The God Who Is There. Inter-Varsity Press, England [국역: 김기찬 역. 1994. 『거기 계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68. Escape from Reason. Inter-Varisty Fellowship, England [국역: 김영재 역. 1970. 『이성에서의 도피』.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2.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Tyndale House [국역: 허긴 역. 1973.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6. How Should We Then Live? Fleming H. Revell [국역: 김기찬 역. 198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말씀사]
* 이 주 일 : 청년부 2교구 간사, 예수 대학 <기독교 문화관> 강사
이 성 근본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인 '모더니즘'과 중심과 절대는 없다고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 앞에서도 복음의 진리성과 절대성, 그리고 그 능력을 자신 있게 확신하지만, 모더니티를 신앙고백으로 삼아버린 현대 복음주의 교회 앞에서 '성령의 탄식'을 느끼기 시작한 정통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
주
1)우 리가 대학 교양 수업 때 한 번쯤 들어봤을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개념은 단순히 플라톤의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개념이 아니다. 플라톤이 설정한 ‘이데아’라는 것은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했을지라도 고대에서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정신세계를 틀 지우고 있는 위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2)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보편자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3)오늘날의 여론 조사를 생각해 보라.
4)이 말은 오늘날에도 매우 성경적으로 들린다. 이 말을 듣고 아무런 경계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분별력 없이 플라톤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 신학에 따르면, 이와 같은 플라톤적 이원론은 반성경적인 사상으로 우리가 배격해야 하는 잘못된 이원론이다. (쉐퍼는 이 점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5)여기서 자연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환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적인 것(하늘/은총/계시 등)에 대비되는 인간적인 것(땅/이성/육체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6)현대 과학 철학에서 이와 같은 실증주의적 입장은 매우 순진한naive 견해로 취급되고 있다. 더 이상 아무도 이런 실증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7)이에 대해서는 나의 이전 글들을 참조하라. 이미 충분히 소개했다고 생각되므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8)쉐퍼에 따르면, 마이클 폴라니는 인식하는 주체(knower)를 배제하고 인식 과정을 순진하게 바라보려 했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joyintheo/10069013753
들어가며
지 난 시간에는 철학과 진리 탐구에 대한 중요한 물음인 “존재란 무엇인가”(존재론/형이상학), “도덕이란 무엇인가?”(윤리학)에 대한 인간의 딜레마에 대해 프란시스 쉐퍼의 대답을 소개하였다. 평소에 이와 같은 질문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대체로 생소하고 어려운 개념으로 느껴졌을 수 있으나, 조금이라도 인간과 우주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질문의 중요성을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시간은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의 마지막 주제인, 인식론적 딜레마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분량의 문제로 인해, 인식론적 딜레마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은 다음 연재에서 다루고자 한다.
* 인식론적 딜레마 :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1. 플라톤 : 인식론적 딜레마에 대한 대답으로 보편자를 찾고자 했던 인물
프 란시스 쉐퍼는 인식론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제3장에서 플라톤을 소개함으로써 글을 시작한다. 철학 또는 지성사를 접해보지 않은 경우, 플라톤은 유명한 희랍 철학자라는 사실만을 얼핏 들어 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을 자세히 소개하려는 것이 목적은 아니므로, 이에 대해서는 철학 개론이나 철학사를 다루는 좋은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어쨌든 B.C. 5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생존했던 플라톤Plato은 철학 또는 인류 사상사의 기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쉐퍼가 자신의 글에서 플라톤을 주목했던 지점은 ‘개별자만으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플라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말은 만약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의미, 가치, 도덕, 인간의 존엄성’ 등은 도무지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의미가 있으려면, 삶의 이유가 존재하려면, 도덕이 실제로 가능하려면 그 모든 것을 절대적인 위치에서 설명해주는 “보편적인 기준”(이하 ‘보편자’)이 존재해야 한다.(주1) 만약 이와 같은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각자(개별자)는 어떤 방법으로도 의미나 가치를 설명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주2)
이 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인데, 이런 의미에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결국 ‘진리(보편자)’를 찾기 위한 기나긴 투쟁 속에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그 보편자를 찾을 수 있다는 낙관적인 희망 속에서 지적 탐구를 이어 왔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보편자를 찾고자 했던 시도에서 실패해 왔다는 것이다.
쉐 퍼에 따르면, 고대 희랍 철학은 보편자를 찾기 위해 두 가지 시도를 했는데, 하나는 폴리스(polis)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의 신(神) 개념이다. 폴리스란 ‘도시’라는 말로, 개별적인 인간들이 모여 이룬 ‘사회’가 보편자(우주에 관한 절대 기준)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란 다수가 지배하는 형태 또는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형태(철인 통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어떠한 경우에도 시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를 제공할 수가 없다. 다수란 51%의 여론의 귀결이므로 다수가 형성되는 정황에 따라 진리는 바뀌게 된다.(주3)
또한 탁월한 지성을 소유한 철인(철학자 또는 지식인)에 의한 소수의 엘리트 지배의 경우에도, 결코 보편자를 담을 만한 무한한 지성을 소유한 지식인의 존재는 불가능하므로 역시 진리는 바뀌게 된다. 그리스의 신 개념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스의 신은 인격적인 신이다.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사랑하고 분노하며 지배하고 다스린다. 마치 인간과 같다. 그러나 이들은 다신(多神) 개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한 신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무한하고 유일한 신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을 통일시켜줄 수 있는 보편적인 준거점을 찾는 데 고대 희랍 사상은 실패하고 만다.
2. 토마스 아퀴나스 : 자연을 자율적 존재로 만들어버린 신학자
쉐퍼가 두 번째로 주목한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다. 이 사람은 중세 가톨릭 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으로서 종교개혁 신학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로마 가톨릭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다.
쉐 퍼가 볼 때 이 사람이 중세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는데,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까지 (신학적/사상적 차원에서) 초자연적 세계(은총의 영역)에 비해 자연적 세계는 그다지 의미와 가치가 없었다. 그 이유는 플라톤적 영향에 경도되었던 중세 초기 신학은 진정한 진리의 세계는 하나님이 계신 저 하늘의 세계(은총의 영역)이며, 우리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으로 감각하고 살아가는 이 물리적 세계(자연의 영역)는 세속적이며 거짓된 영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저 하늘에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주4)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와 같은 은총과 자연의 이원론을 유지하면서, 자연의 영역을 ‘타락하지 않은’ 영역이라고 신학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이전의 사상가들과 자신의 사상을 구분 지었다. 자연이 타락하지 않은 곳으로 설정이 되자, 자연은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하게 되었다. 쉐퍼가 볼 때, 자연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 선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에 속한 것들에 대해 중요하고 선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이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적 이원론에 빠져 있던 중세 신학을 일정하게 바로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을 강조한 방식에 있다. 성경에서 자연(주5)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부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자연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타락을 부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또 다른 극단에 치우치게 되었는데, 자연은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자연에 속한 인간의 이성 또한 타락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성은 완전하고 선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결국 우리의 이성만으로 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 인간에게 속한 것만으로 충분히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자율적’이라고 말한다. 아퀴나스는 인간 이성에 자율성을 부여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에 전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를 두지 않고 인간 이성에 의해 이루어진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에 두는 로마 가톨릭적 자연 신학의 개념이 확립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이와 같은 시도가 계시와 이성, 은총과 자연을 균형 있게 강조하는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쉐퍼가 볼 때 역사적으로 은총과 자연의 이분법 속에서 자연에 자율성을 부여한 결과 ‘자연이 은총을 삼켜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합리주의로 특징 지워지는 근대의 출현이다. 아퀴나스는 ‘근대’의 씨앗을 뿌렸다.
3. 실증주의 : 근대 이성의 낭만적 도약
아 퀴나스를 지나 근대에 이르자, 더 이상 인간에게 ‘은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은총의 영역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허구와 같았다. 우주에는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영역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자연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적 도구는 ‘과학’이었다. 현대 과학의 출현으로 인간은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과학이 지배하는 근대는 ‘실증주의positivism’ 라고 하는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실증주의는 자연의 영역을 우리가 완전히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개별적인 인간이 자신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우리 외부에 불변하는 진리가 서 있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주관적으로 진리를 파악한다는 말은 진리란 우리 외부에 불변하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의 입장에서 파악되는 형태로 진리가 존재한다(진리는 각자에게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증주의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객관적으로’ 자연에 관한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도구는 ‘과학’이며,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은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인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주6)
쉐 퍼에 따르면, 실증주의는 초월적 세계를 배제하고 자연적 세계에 대한 진리를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있는 그대로’ 또는 ‘진리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이와 같은 순진한 인식론은 루소, 칸트, 헤겔 및 키에르케고르를 거치며 진리 개념의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주7)
결정적으로 실증주의는 현대 철학의 도전을 받으며 무너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개인적 지식Personal Knowledge, an Introduction to Post-critical Philosophy)이라는 책을 통해 과학적 지식이 전제했던 객관성이 허구며, 객관적 지식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의 신념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결정적으로 밝혀냈다.(주8) 마이클 폴라니 외에 칼 포퍼Karl Popper 또한 쉐퍼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데, 포퍼는 초기 입장에서 검증과 반증의 과학을 주장하고 있으며, 후기 입장에서는 검증을 포기하고 반증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쉐퍼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과학철학에서 중요한 또 한 사람은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인데, 이 사람은 과학이 계속해서 진리를 축적해 나간다고 하는 전통적 개념을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이론을 통해 반박함으로써 과학적 진리 탐구에 대한 전통적 사고방식을 뒤집어 놓았다.
현 대 사회에도 과학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발견해내는 것’인양 상식적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마치 이와 같은 개념이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관찰, 실험이 이어지고 있는 경향이 있으나, 더 이상 과학이 순수한 사실을 추출해내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자 했던 근대 합리주의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4. 실존주의와 언어분석 : 보편자에 대한 추구를 포기
사 정이 이렇게 되니,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통해 보편적인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근대적 신념을 믿기가 어려워졌다. 실증주의가 최종적으로 무너지면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 보편자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론적으로 제기되기 어려워졌다.
따 라서 현대 철학의 경향은 두 가지로 나뉘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실존주의와 언어분석이다. 실존주의는 이미 충분히 다루었던 것처럼,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합리적으로 보편자를 발견하고자하는 시도를 최종적으로 포기하고 ‘논리적 비약’을 통해 인간에게 의미를 주는 은총의 영역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시도다. 합리적으로 인간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인간에게는 의미가 필요하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을 통해 은총의 영역에 접근하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철학적 시도는 인간의 언어를 분석하려는 경향이다. 유명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이 나 하이데거 등은 언어에 대한 관찰을 시작했는데, 역시 은총이라는 상층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보편자에 대한 포기가 여기에도 전제되어 있다. 인간은 보편자를 알 수 없으며, 다만 우리의 인식이란 우리가 이성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 언어를 명료하게 정의(定義)하는 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대 철학에서 언어 분석은 매우 흥미로운 접근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안타까운 점은 ‘언어로 구성된 세계’를 파헤치며 그 허구를 분석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리다Jacques Derrida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평가받는 인물인데 절대적인 것은 없으므로 모든 것을 해체시키려는 입장에 서 있다.
여 기서 실존주의와 언어분석을 자세하게 서술할 수는 없지만, 이 두 철학으로 대표되는 현대적 사고방식 또는 현대 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의미와 가치, 도덕과 존엄성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더 이상 인간은 ‘논리적 비약의 형태’(현대인은 이것을 신앙이라고 말한다)로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받아들이는 방법 외에는 인간을 기계와 구분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인식론적 딜레마다. 더 이상 인간은 은총과 자연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글을 맺으며
지 면 관계상, 인식론적 딜레마에 대해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존주의와 언어분석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현대인은 더 이상 ‘객관적이고 확실한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다’라는 회의주의적 절망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와 성경의 진리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미 서구 사회는 기독교와 성경의 진리 또한 ‘객관적이고 확실한 진리’가 아니며, 만약 객관적이고 확실한 진리일지라도 그렇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더라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기독교 진리를 연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기독교 교리를 경시하는 태도가 출현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적인 것에 대한 한계 체험’이다. 교리적 내용과 상관없이 기독교라는 종교가 신적인 것을 체험하게 해 줌으로써,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일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들이 체계적으로 고찰해서 내린 절망적 결론을 일반인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렇다면 우리들은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이며, 어떻게 참되게 기독교적으로 신앙할 것인가? 우리 시대에 종교개혁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단순히 교리적 내용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이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현대인들에게 충분하지 않다. 신비주의자인 현대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기독교 교리를 배우며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인식론적 회의와 절망을 전제한 상태에서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기독교 교리만으로는 대답을 줄 수가 없다. 쉐퍼의 주장은, 기독교 정통 교리를 교회가 철저하게 고수해야 하지만 바로 이와 같은 인식론적 회의와 절망에 대해 교회가 지적으로 변증해주지 않는다면 진정한 종교개혁 신앙을 우리가 고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복음이 대답이 된다는 점을 현대인들에게 제대로 깨닫게 할 수도 없다는 말도 된다.
쉐 퍼의 문화적 변증학, 또는 전제적 변증학이 인식론에 회의를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그 어느 때 보다도 시의적절하며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정통 교리를 철저하게 탐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세상이 던지고 있는 정직한 지적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대답해주려는 노력’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지성을 포기하면, 참된 복음도 함께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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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주 일 : 청년부 2교구 간사, 예수 대학 <기독교 문화관> 강사
이 성 근본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인 '모더니즘'과 중심과 절대는 없다고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 앞에서도 복음의 진리성과 절대성, 그리고 그 능력을 자신 있게 확신하지만, 모더니티를 신앙고백으로 삼아버린 현대 복음주의 교회 앞에서 '성령의 탄식'을 느끼기 시작한 정통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
주
1)우 리가 대학 교양 수업 때 한 번쯤 들어봤을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개념은 단순히 플라톤의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개념이 아니다. 플라톤이 설정한 ‘이데아’라는 것은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했을지라도 고대에서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정신세계를 틀 지우고 있는 위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2)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보편자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3)오늘날의 여론 조사를 생각해 보라.
4)이 말은 오늘날에도 매우 성경적으로 들린다. 이 말을 듣고 아무런 경계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분별력 없이 플라톤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 신학에 따르면, 이와 같은 플라톤적 이원론은 반성경적인 사상으로 우리가 배격해야 하는 잘못된 이원론이다. (쉐퍼는 이 점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5)여기서 자연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환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적인 것(하늘/은총/계시 등)에 대비되는 인간적인 것(땅/이성/육체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6)현대 과학 철학에서 이와 같은 실증주의적 입장은 매우 순진한naive 견해로 취급되고 있다. 더 이상 아무도 이런 실증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7)이에 대해서는 나의 이전 글들을 참조하라. 이미 충분히 소개했다고 생각되므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8)쉐퍼에 따르면, 마이클 폴라니는 인식하는 주체(knower)를 배제하고 인식 과정을 순진하게 바라보려 했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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