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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_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⑤

쉐퍼_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⑤
http://blog.naver.com/joyintheo/10069013686
 
1. 프란시스 쉐퍼의 <거기 계시는 하나님>과 <이성에서의 도피>를 정리하며
지난 시간까지 <거기 계시는 하나님>과 <이성에서의 도피>에서 프란시스 쉐퍼가 언급한 내용을 다루어 보았다. 7회에 걸쳐 이어진 글을 꼼꼼히 읽은 사람이라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야기의 골자를 대강은 파악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앞의 연재를 읽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란시스 쉐퍼는 20세기 서구 문명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리스도인이자 복음 전도자였다. 종교개혁적 사고방식 속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전하려고 했던 쉐퍼는 복음 전도의 현장에서 ‘근대인’과 ‘탈근대인’이라는 용어로 이해될 수 있는 ‘현대인’을 만나게 된다. 이 ‘현대인’은 종교개혁적 사고방식으로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새롭고 신비한 존재였다. 이 현대인을 대면하고 세상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쉐퍼는 어떻게 해야 ‘복음을 복음답게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 즉 변증학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쉐퍼의 고민의 대상은 ‘현대’라는 독특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었다. 
 
오랜 연구를 통해 쉐퍼는 드디어 이 ‘현대인’이 어디서 탄생하게 된 것인지, 어떤 존재 양식을 갖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쉐퍼만의 특수한 통찰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의 변증학적 연구결과는 전통적 사고방식 속에 갇혀서 현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던 복음주의 교회를 크게 각성케 만들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바로 이 ‘현대인’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쉐퍼의 중심 질문은 역사적이며 철학적이고 또 문화적이며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영역’(주1)이 중세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즉, 탈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그는 소상히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전혀 다른 세상에 살던 복음주의 교회는 쉐퍼의 책을 통해 비로소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고, 자신이 복음을 전해야하는 이 세상(현대)이 어떤 곳인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현대인)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듣는 사람의 ‘상황context’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참된 복음 전도는 인격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복음 전도를 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은 4영리로 된 복음의 골자를 외우고 계시다가 누구를 만나든지 4영리식 복음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시지 않았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의 수가에 들리신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서 다가오는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이 물을 스스로 마실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여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 아니다. 유대인에게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으로서 ①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에 대한 질문 ②참된 예배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③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 등에 가로막혀 복음을 깨달을 수 없었던 한 여인의 가슴 깊은 질문과 고민을 끄집어내신 후 차례차례 대답해 주심으로써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해주시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만나셨을 때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나 참된 예배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었던 질문, 즉 어떻게 해야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 곧장 대답해 주셨다. 예수님은 각자의 처한 상황에서 고유하게 갖고 있는 ‘질문’을 끄집어내신 후 그에 대해 적절히 대답하심으로써 복음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게 도우셨다. 즉, 각 개인에게 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복음을 인격적으로 참되게 전하고자 했던 쉐퍼는 복음 전도의 대상인 ‘현대인’을 먼저 이해해야 했다. 즉, 현대인이 누구이며 어떤 질문을 갖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만, 거기에 대한 복음의 대답이 무엇인지, 복음이 어떻게 그들에게 참된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쉐퍼가 저술한 첫 번째 작품으로서, 우선 철학에서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인간이 현대인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철학 뿐 아니라 미술, 음악, 문학에서도 일어났으며, 마지막으로 신학에서 칼 바르트가 키에르케고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 쉐퍼의 결론이다. 또한, 내가 다루지 않았지만 쉐퍼는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서 역사적 기독교, 즉 종교개혁적 기독교가 이와 같이 현대적 사고방식에 물든 신학의 메시지와 얼마나 다른가를 설명하고 있으며(제3부),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대해 쉐퍼가 고안한 ‘전제적 변증학’을 소개하고 있다(제4,5부).
 
<이성에서의 도피>는 <거기 계시는 하나님> 이후에 쓰인 작품으로서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제1부와 제2부를 좀 더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성에서의 도피’라는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대인들의 신앙은 ‘신비주의’, 다시 말해 ‘이성과 분리된 신앙’이라는 것이 쉐퍼의 진단이다. 쉐퍼가 볼 때, 예수님과 사도 시대 이후로 전통적인 신앙은 ‘이성에 기초한 신앙’이었다. <이성에서의 도피>에서 쉐퍼는 이성과 신앙을 분리시켰던 출발점으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언급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과 은총이라는 두 가지 영역을 서로 분리된 것으로 파악함으로서, ‘은총’만을 바라보았던 신학에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균형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선한 의도에서 고안된 자연과 은총 개념은 후세대를 통해 ‘은총과 분리된 자율적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잠시 ‘이성에 기초한 신앙’, ‘은총과 통일된 자연’의 개념으로 회복되었으나, 결국 칸트Kant와 루소Rousseau, 헤겔Hegel,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를 통해 19세기 중반에 건너지 말아야 했던 다리를 넘고 말았다(절망선). 그래서 현대인은 더 이상 ‘이성에 기초한 신앙’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성으로는 절대로 ‘영적인 세계’를 알 수 없다고 믿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영적인 세계를 필요로하는 현대인은 이성을 포기하고 ‘신비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쉐퍼가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현대인은 이와 같이 이성을 포기하고 신비주의를 받아들인 신비주의자였다.
 
2. 신비주의자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신비주의자란 ‘신비’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 골방에서 명상을 하다가 극단적인 체험을 하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하며 업무를 마치면 퇴근해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보내는 바로 우리 ‘현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절대로 이성에 기초해서, 즉 합리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교회에 갈 때 잠시 이성을 접어둔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이성’이란 직장,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의 ‘세속적’ 영역에서 사용하는 것이고, 종교라고 하는 ‘성스러운’ 영역은 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즉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성과 신앙을 철저히 분리시킨 채 종교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은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자신의 신앙을 갖기 때문에 바로 ‘신비주의자’가 된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면 두 가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첫째로 복음은 ‘(명제적) 언어로 주어진 계시’인데, 신비주의자들은 언어로 주어진 계시의 ‘내용’을 증발시켜 버리고 ‘체험’에 집중하게 된다. 다시 말해, 복음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진리인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괘념치 않고, 단지 복음이 주는 ‘신앙 체험’만을 추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 라서 기독교 신앙이 주는 ‘체험’을 다른 종교에서도 얻을 수 있다면 ‘진리의 내용’과 상관없이 다른 종교도 기독교와 같은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복음의 내용에 실제로 전혀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용어’나 ‘신앙 활동’이 주는 신비한 체험을 얻으려고 하게 된다. 즉, 내용(근거)에 기초하지 않은 체험 신앙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참된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다. 둘째로 복음은 직장,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의 ‘세속적’ 영역을 지배하는 이성과 분리된 ‘성스러운’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에 절대로 ‘세속적’ 영역과 연결 지으려 해서는 안 된다.
 
즉, 종교를 세속적인 문제와 연결짓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하게 합리적인 사람처럼 생활하다가, 종교 활동을 할 때는 이성을 닫고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여 만족감을 얻음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살려고 한다. 즉, 현대인은 분열된 두 인간(합리적 인간 vs 비합리적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대인이 기독교를 믿게 되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에서는 이성을 잠시 닫아두고 아무런 객관적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은 채 단지 신앙생활이 줄 수 있는 ‘체험’, 즉 영적 만족감을 얻는 것에 집중한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 만족감만 줄 수 있다면, 굳이 기독교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또한, 절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직장,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에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 독교를 믿는 현대인은 쉽게 말해 ①교리(하나님의 말씀)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영적 만족감을 얻기 위해 이성을 잠시 놓아두고 교회에 가며, ②합리적인 현대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직장,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으로 들어갈 때 신앙을 잠시 놓아두고 간다. 이것이 신비주의에 물든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의 정체다!
 
따라서 쉐퍼가 볼 때,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참된 기독교가 아니다. 현대 복음주의자가 믿고 있는 복음은 비록 ‘교리적 내용’은 동일하게 고백되고 있을지 몰라도 참되게 고백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비주의자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쉐퍼는 다시 종교개혁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쉐퍼가 ‘역사적 기독교’라고 언급하고 있는 종교개혁적 기독교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교리)에 기초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합리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종교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사실과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철저하게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에 기초한 기독교는 어떤 체험을 제공하든지 또 어떤 영적 만족감을 제공해주든지 허구일 뿐이다. 믿어서는 안 되는 종교가 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철저히 진리라면, 또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 것이라면, 이 신앙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직장,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일관되게 적용되고 실천되는 것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바로 이와 같은 복음에 대한 관점이 회복되어야만 우리는 참되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을 참되게 고백하는 신자가 되어야만, 우리는 신비주의에 물든 현대인에게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있다.
 
3. 모더티니modernity의 문제 : 모더니즘modernism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프란시스 쉐퍼가 직접적으로 모더니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현대를 분석하진 않았다. 모더니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20세기 말에 주목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했던 쉐퍼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때 현대인에 대한 쉐퍼의 분석에는 바로 모더니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들이 함축되어 있다. 이 문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므로, 간략히 정리해서 소개해 보겠다.
 
우리는 역사의 시대를 구분할 때, 크게 4단계로 나눈다. ①고대 ②중세 ③근대 ④현대가 바로 그것인데, 영어로 고대는 ancient times, 중세는 the Middle Ages 또는 medieval! times, 근대는 the modern age 또는 modern times, 현대는 the present age 또는 modern times라고 한다. 즉 우리말로 ‘모던’이라고 하는 말은 ‘근대’ 또는 ‘현대’라는 시대를 나타내는 말이 된다. 학자들마다 연대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서양문화사 또는 서양사상사를 구분할 때 고대는 B.C. 6세기부터 A.D. 5세기 또는 6세기까지, 중세는 A.D. 6세기부터 A.D. 15세기까지, 근대는 A.D. 16세기부터 1950년대까지, 현대는 1960년대 이후라고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가 ‘현대’(모던)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시대는 ‘근대’와 ‘현대’로 더 정밀하게 구분되는 것이고, 근대와 현대의 기점은 대체로 1950년대에서 1960년대가 되는 것이다.(주2) 왜 이렇게 모던을 학자들은 둘로 쪼개놓았을까.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모더니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세 가지 용어를 이해해야 한다.
모더니티란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근대성 또는 현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모던의 개념에 대한 입장에 따라 ‘근대성’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현대성’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대성’이라는 번역을 지지하는 편이다. 어쨌든 모더니티라는 말은 근대와 현대를 모두 포함하여 ‘모던’이라고 하는 시대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모더니티는 ①자본주의 발생 ②기술과 산업의 발달 ③빠른 통신수단의 발달 ④도시화와 세계화 ⑤민주주의 ⑥세속화의 특징을 가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중세라고 하는 전통적인 사회는 모더니티라고 하는 6가지의 특징을 지닌 모던한 사회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의 변화는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기도 했는데, 이에 따라 등장한 사상을 가리켜 모더니즘이라고 한다. 모더니즘은 우리말로 ‘근대주의’ 또는 ‘현대주의’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역시 학문적 입장에 따라 다르다. 나는 이 말을 근대주의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한다. 모더니티라는 특성을 지닌 사회는 맨 처음 모더니즘이라는 사상을 만들어냈다. 모더니즘은 바로 ‘합리주의’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이 합리성과 합리주의는 매우 다른 말이다. 합리주의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떠나서 자율적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만으로 진리를 알 수 있으며 사회의 진보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신념 체계다.
 
중세를 거치며 다소 왜곡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말씀이라는 근거 위에서 합리적으로 진리를 이해하려 했던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말씀이라는 근거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오직 인간은 인간 자신만을 믿을 수 있을 뿐이며(인본주의), 인간 스스로의 (이성의) 힘으로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사회의 진보를 이루고 유토피아(지상 천국)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합리주의이며, 모더니즘의 핵심이다. 모더니티는 바로 모더니즘을 자신의 첫 번째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이성을 가진 인간의 능력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움은 필요 없었다. 그것은 미신에 사로잡힌 중세인에게 유용할 뿐이었다.
 
그 러나 무한한 이성의 능력을 가진 자율적 인간은 과학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핵폭탄과 화학무기로 순식간에 다른 인간을 무자비하게 죽였으며(제1,2차 세계대전), 인종적 우생학에 기반하여 우월한 인종만을 남겨야 한다고 외쳤고(파시즘), 우월한 과학기술에 의지하여 다른 민족을 지배했으며(제국주의), 자신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환경을 파괴시켜 스스로의 생존을 위협하고 말았다(환경오염). 인간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더니즘의 신앙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더니티는 모더니즘이라는 신앙을 버릴지언정 자신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신앙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근대주의’ 또는 ‘탈현대주의’로 번역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탈근대주의를 선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믿어왔던 모든 신념들이 허구라고 선언하였다. 모더니즘이 신뢰해왔던 자율적 인간의 이성, 진보에 대한 믿음, 가부장적 사고, 인종주의, 오리엔탈리즘 등 거의 전방위적인 공격을 통해 모더니즘을 해체시킨 후 포스트모더니즘은 등장하였다. 모더니티의 6가지 특징을 그대로 가져가지만, 모더니즘이 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믿음을 도입한 것이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것이 모더니즘이라면, 이성에 대한 신뢰를 철회시키고 이성에 기초한 어떠한 진리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 기초한 모더니티는 다원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이성과 분리된 신비주의적 신앙이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이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할 수 있게 해 준 사상적 기반이 바로 실존주의다.(주3)
 
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각 시대의 교회는 그 시대가 짊어지고 있는 세상의 문화에 저항하며 복음을 믿고 전해야할 책임이 있다. 초대 교회는 유대교와 로마 제국에 저항해야 했고, 중세 교회는 이단, 그리스 철학(계몽주의로 발전)과 이슬람 문화, 권위주의에 맞서야 했으며, 근대 교회(모더니즘 시대)는 합리주의와 싸워야 했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신앙하는 모더니티와 싸워야 한다. 역사적으로 각 시대의 교회가 그 시대의 세상 문화에 제대로 저항하며 승리한 때가 많지 않았듯이, 현대 복음주의 교회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신앙하는 모더니티에 철저하게 물들어가고 있다.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 마케팅에 물든 기독교, 이머징 교회 등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을 신앙하는 모더니티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통 개혁주의적 복음주의 교회에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우리가 믿음대로 살기 위해 가장 민감하게 분별하고 싸워야할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는 ‘이단’이라고 하면, 즉시 무기를 들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단’ 보다 더 무서운 적이 있는데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신앙하는 모더니티’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현대 문화인 것이다. 이단과 사이비는 교리적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기 쉽기 때문에 비교적 그 피해가 적다. 쉽게 말해서 현대 사회에서 이단과 사이비를 맞설 때는 국지전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교리를 알고 있어도 분별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현대성 또는 현대 문화라고 하는 괴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신앙하는 모더니티’라고 하는 형체 없는 적그리스도는 이미 정통 개혁주의적 복음주의 교회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있고, 대다수의 현대 복음주의 교회를 오염시켜 버렸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교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단과는 국지전으로 충분할지 몰라도, 현대 문화와는 전면전에 나서야만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참된 교회로 거듭날 것이다. 모더니티에 물든 복음주의는 이제 후스, 쯔빙글리, 루터, 칼빈 등이 목숨을 걸고 전생애를 바쳐서 헌신했던 바로 그 종교개혁을 다시 시도해야만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 참고문헌
김정훈. “쉐퍼가 본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기초.”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성인경 엮음. 1996. 『프란시스 쉐퍼 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성인경. “프란시스 쉐퍼의 교훈.”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이우재. “칸트, 헤겔, 그리고 쉐퍼의 진리관.”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윌리엄 에드가. “모더니티, 포스트모던, 그리고 복음.”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주도홍.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와 영성” (강의안)
Middleton, J. R./Walsh, B. J. 1995.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Biblical Faith In A Postmodern Age. InterVarsity Press [국역: 김기현?신광은 역. 2007.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살림]
Parkhurst, L. G. 1985. Francis Schaeffer. Kingsway Publications [국역: 성기문 역. 1995. 『프란시스 쉐퍼』. 두란노]
Schaeffer. F. A. 1968. The God Who Is There. Inter-Varsity Press, England [국역: 김기찬 역. 1994. 『거기 계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68. Escape from Reason. Inter-Varisty Fellowship, England [국역: 김영재 역. 1970. 『이성에서의 도피』.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2.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Tyndale House [국역: 허긴 역. 1973.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6. How Should We Then Live? Fleming H. Revell [국역: 김기찬 역. 198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말씀사]
 


1)철학, 미술, 음악, 문학, 언어학, 신학 등
2)이러한 구분은 학자마다, 지역(나라)마다 구체적으로 다를 수 있다.
3)실존주의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사상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프란시스 쉐퍼가 현대인을 분석하면서 실존주의가 그 절망선이라고 지적했던 것은 매우 예리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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