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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_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④

쉐퍼_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④
http://blog.naver.com/joyintheo/10069013649
 
들어가며
지난 6회 연재까지 나는 프란시스 쉐퍼가 말한 ‘절망선line of despair’이란 무엇이며, 이 세계가 근대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어떻게 절망선을 통과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을 비교적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 보고자 노력했다. 지면 관계상 프란시스 쉐퍼가 자신의 저작에서 언급한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생략되었고, 그 핵심만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치밀하고 깊이 있는 내용의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을 직접 읽는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글을 통해서 이해한 내용만으로 마치 쉐퍼를 다 이해한 것처럼 ‘착각’한다면, 마치 성경 ‘개관’을 공부하고 나서 66권의 성경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현대 사회와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 프란시스 쉐퍼가 주는 함의는 그만큼 크고 깊다.
 
이번 글에서 나는 쉐퍼가 말한 절망선 이후 현대 사회의 핵심인 ‘신비주의’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의 핵심 중 하나는 신비주의다. 우리가 집에 앉아 TV를 보든, 영화관에서 연인과 영화를 즐기든, 학교에서 공부를 하든, 심지어 복음주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신비주의를 접하며 그 영향을 받고 있다.(주1)
 
1. 신비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
우선 신비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보자. 기본적으로 ‘신비mystery’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다시 말해 우리의 이성에 반하는 사건 또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누군가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그 일이 실현되었다면, 우리는 그 현상을 이해할 수 없기에 신비롭다고 표현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우리의 이성으로는 추론(이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신비주의mysticism란 이와 같은 ‘신비’가 이 세상 또는 우주의 본질이라는 신념 체계(철학)다.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해 보자. 이 세상이 합리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과학이다. 과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우주(이 세상)가 합리적인 규칙(과학 법칙)에 따라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전제가 없다면, 과학자들은 과학적인 연구를 실행할 수 있는 기반을 잃고 말 것이다.(주2)
 
그렇다면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매우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제를 한 가지 검토해 보자. 종교는 과학적인가? 아니면 종교란 비과학적인가? 이렇게 물어도 같은 질문이 된다. 종교는 합리적인가? 아니면 종교란 비합리적인가? 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서 나는 근대 이후의 오랜 논쟁 중의 하나인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종교란 합리적인가를 묻는 것이다.(주3) 정통적이며 개혁주의적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자들마저도 이 질문 앞에서 ‘종교는 합리적이야!’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 종교를 기독교로 바꿔 보자. 또는 우리의 믿음의 근거인 성경으로 바꿔도 좋다. 기독교는 합리적인가? 우리의 믿음은 합리적인가? 우리가 믿는 성경은 합리적인가? 종교개혁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이 인간과 우주를 합리적으로 창조했으며 성경을 합리적인 인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게 주셨다는 전제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초월자)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분(합리적인 분)이기 때문이다.(주4)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복음주의 교회는 반성경적이며 반개혁주의적인 종교와 과학의 이분법적 분리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종교개혁 전통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성경을 믿게 되었을까? 그것이 지난번 글까지 다루었던 프란시스 쉐퍼의 절망선이다. 칸트와 헤겔과 키에르케고르를 지나며 ‘실존주의’라는 형태로 이성과 신앙을 철저히 분리시킨 현대적 사고방식을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무분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신비주의가 무엇인지를 물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신비주의, 특히 현대의 신비주의는 이성을 통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데카르트 이후 근대주의자들의 ‘절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러 더 이상 현대인들은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보편자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보편자가 없는 인간의 이성은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프란시스 쉐퍼가 말하는 ‘현대인의 절망’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을 무엇이라 정의했는가? 그는 신앙의 본질을 합리적인 근거에서 출발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신앙의 도약)이라고 본 것이다.
 
현 대인은 성경을 ‘믿고’ 예수를 구원자이자 주(主)로 ‘믿는 것’은 성경이 오류가 없는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또 예수가 ‘역사적’인 의미에서 오류가 없이(즉 실제 사건으로)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역사적으로 볼 때 오류가 있지만(즉 실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없지만) 어쨌든 그것을 믿으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즉, 합리적 근거 없이 비약의 과정을 통해 신앙을 갖는 것이 현대인이다. 이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미에서 진리인지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방식, 즉 신비한 방식으로 신앙을 갖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서, 현대인들은 교회를 다니고 교리를 배우면서도 자신이 배우는 이 교리가 ‘객관적으로 진리인가’에 대해 더 이상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질문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비교적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의 부활이라는 설교를 들었을 때 ‘어떻게 그것이 사실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따져 물을 것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사고방식, 즉 신비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아무런 거부감이나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동시에 이슬람 사원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거부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신비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 현대인은 자신이 갖는 종교적 신앙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 종교란 단지 ‘하나님’(주5)을 ‘체험하게’ 해 주는 신비로운 통로일 뿐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시대에 합리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에 대한 근거와 이유를 알려주었던 종교(특히 유럽에서는 기독교)는 현대인에게 비합리적인 의미의 탈출구에 불과할 뿐이다. 근대 이후 인간은 계시를 버리고 합리주의적 방식으로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단 한 사람도 성공하지 못하고 근대의 합리주의적 시도는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근대 이후의 인간은 존엄하지도 않고, 어떤 삶의 의미도 없으며, 지켜야할 가치나 도덕 또한 없는 ‘기계’가 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것과 잔인하지 않은 것이 차이가 없어졌다.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어졌다. 인간은 기계다. 이것이 합리주의의 절망적 결론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엄하며 도덕적이며 의미를 통해 살아가야하는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근거 없는 믿음’을 추구하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을 찾고자 했던 합리주의의 실험은 완벽하게 실패했지만, 인간은 이제 근거가 없더라도 이와 같은 것들을 유지하고자 했다. 신비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 신비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신학
칼 바르트 이후 현대 신학은 절망선을 지났다. 즉, 비합리성에 근거한 신비주의적 신학이다. 현대 신학의 중요한 특징은 쉐퍼가 볼 때 ‘언어’에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했던 ‘신학적 언어’를 모두 그대로 사용한다. 이들은 설교할 때, 또는 책을 쓸 때 ‘예수’, ‘구원’, ‘믿음’, ‘부활’ 이런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한다. 실존주의나 신비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진실로 ‘성경적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쉐퍼가 볼 때 이는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칼 바르트 이후의 현대 신학자들은 이와 같은 말을 사전적 정의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폴 틸리히는 “하나님 뒤에 계시는 하나님”(God behind God)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 ‘깊은 영성’의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에 대해 틸리히가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늘 하던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 정통교회의 설교와는 사뭇 다르다는 신선한 느낌을 받게 된다. 바로 이것이 쉐퍼가 말하는 ‘환상’이다. 기독교 (신)자유주의자들도 ‘구원’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그들이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구원’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즉, 그들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단순히 ‘인간성의 회복’만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그들도 우리처럼 ‘복음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다. 역사적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복음이란, 이와 같은 ‘환상’이 아니다. 복음이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실재, 즉 실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한 진리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를 다 믿고 있어도 사실은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다. (주6)
 
3. 신비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미술과 언어
미술은 단지 취미 활동이나 그림 그리기가 아니다. 한스 로크마커Hans R. Rookmaaker에 따르면, 특히 회화는 진리를 보여주는 활동이었다. 중세 성당 내부에 수많은 그림들이 장식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저 성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서? 그렇지 않다. 그 그림들이야 말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비록 왜곡되었을지라도 기독교적 진리를 믿었던 수많은 미술가들은 자신의 미술 작품에 그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애를 썼다. 따라서 근대 이후 현대 미술이 등장하기 전까지(절망선을 지나기 전까지) 미술은 기독교의 계시 또는 최소한 합리주의적 기반 위에 있었다. 그러나 절망선을 지난 현대 미술은 합리적 또는 합리주의적 기반에서 떠났으며, 우주의 본질(진리)을 보여주기 위해서 신비주의적 기초를 선택했다. 쉐퍼는 폴 클레Paul Klee라는 미술가를 소개하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 우주가 자신의 그림 작업을 이끌어서 자신의 본질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었다. 합리적인 또는 합리주의적인 의미의 근거는 없다. 마치 이는 범신론적 개념과도 유사하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십자가에 달리신 성 요한의 그리스도’를 그렸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리스도는 역사상의 실존했던 구원자 예수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상징화하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했던 것뿐이다. 즉, ‘예수’라는 단어의 ‘환상’(내포)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해서 전혀 다른 대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이 그림을 본다면, 우리들은 살바도르 달리가 복음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고 착각할 것이다.
 
현대의 신비주의는 언어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현대의 언어는 ‘사전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시인이나 쓸 법한 ‘상징적 의미’, ‘내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불신자 시인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인 ‘실제로 존재했고 현재도 존재하는 예수’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예수’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이미지’만이 중요할 뿐이다.
 
4. 신비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음악과 문학
최근 인기를 끌었던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이었던 강마에는 새롭게 선출된 시장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그의 취임식에서 존 케이지John Cage의 음악을 지휘한다. 드라마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곡은 실제로 아무런 음악 소리도 연주되지 않는 곡이다. 4분 33초 동안 오케스트라에는 침묵이 흐르고 관객들은 웅성대기 시작한다. 미리 정해진 소리는 없다.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소리들일 뿐이다. 매우 독특한 방식의 음악가인 존 케이지는 이와 같이 ‘우연’과 ‘불확실성’이야말로 우주의 본질이며 진리라는 것을 자신의 음악에 실험적인 방식으로 담았다. 사실 ‘윤리적 저항성’의 의미를 담고 강마에가 한 지휘는 이 음악의 본질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었으며, 우리의 이성을 통해 합리적으로 그려진 악보와 미리 짜여진 계획에 따른 연습을 통해 이와 같은 우주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전통적인 음악과는 매우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현대 음악인 것이다. 현대 음악은 더 이상 합리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이 없다. 모든 것은 우연적이고 불확실한 것일 뿐이다.
 
문학에서 쉐퍼는 헨리 밀러Henry Miller를 분석한다. 헨리 밀러는 자신의 책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처음에 수면에 호흡을 불어 넣었던 영이 새롭게 창조할 것이다……이 영이 말씀 그 자체가 아니라면 최후의 말은 없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프란시스 쉐퍼, 1994:116에서 재인용) 이 글을 읽는다면, 우리들은 헨리 밀러가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의 글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그가 성경 구절을 언급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했던 것이 기독교적 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징적 의미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헨리 밀러는 범신론자이다.
 
나오며
프란시스 쉐퍼는 현대 문화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예리하게 분석했다. 문제는 이와 같은 현실을 대다수의 복음주의 교회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저 여기저기서 ‘예수’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단어가 언급되기만 하면 곧 성경과 부합하는 신앙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 전혀 역사적 기독교의 내용이 없이 반기독교적 내용, 신비주의적 내용을 ‘예수’나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소개하고 성경 구절을 언급하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다. 음악을 들을 때 전혀 반기독교적이거나 범신론적인 사상을 전달 받으면서도 무언가 영적인 분위기가 풍기면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전혀 역사적 기독교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면서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고 언급하든지 성경 구절을 언급하면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설교와 예배라고 판단해 버린다.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 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가 강조하는 ‘삶이 곧 진리다’라는 사상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종교, 어떤 믿음에서 출발했든지 그 사람의 삶이 훌륭하면 그것은 곧 진리다. 여기서 우리는 혼란스러워진다. 역사적 기독교의 믿음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 믿음이 올바른 것이 되려면, 믿음의 대상이 올바른 것이어야 하고 믿음의 내용이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없이는 우리의 믿음은 성립할 수가 없다. 현대의 신비주의는 이런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 다만 당신의 영적 생활이 풍요롭고, 다만 당신의 삶이 만족스러우면 그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반성경적이며 역사적 기독교에 반하는 잘못된 믿음일 뿐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유한한 이성만으로 다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영역이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 하나님을 믿을 때는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객관적인 근거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우리는 위로와 평안이 필요해서 가상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 분이 말씀하셨고 예수는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즉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복음을 믿는다.
 
* 참고문헌
김정훈. “쉐퍼가 본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기초.”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성인경 엮음. 1996. 『프란시스 쉐퍼 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성인경. “프란시스 쉐퍼의 교훈.”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이우재. “칸트, 헤겔, 그리고 쉐퍼의 진리관.”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윌리엄 에드가. “모더니티, 포스트모던, 그리고 복음.” (한국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주도홍.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와 영성” (강의안)
Parkhurst, L. G. 1985. Francis Schaeffer. Kingsway Publications [국역: 성기문 역. 1995. 『프란시스 쉐퍼』. 두란노]
Schaeffer. F. A. 1968. The God Who Is There. Inter-Varsity Press, England [국역: 김기찬 역. 1994. 『거기 계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68. Escape from Reason. Inter-Varisty Fellowship, England [국역: 김영재 역. 1970. 『이성에서의 도피』.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2.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Tyndale House [국역: 허긴 역. 1973.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6. How Should We Then Live? Fleming H. Revell [국역: 김기찬 역. 198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말씀사]
Gombrich, E. H. The Story of Art. [국역: 백승길, 이종승 역. 1997. 『서양미술사』. 예경]
Rookmaaker, H. R. 1970. Modern Art and the Death of a Culture. Inter-Varsity Press [국역: 김유리 역. 1993.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 IVP]
 

1)우리가 복음주의 교회 또는 복음적이라고 생각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에도 신비주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충격적일 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 신비주의를 인식하고 철저한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개혁주의)에서 예배와 말씀을 진행하는 교회는 현대 사회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그만큼 현대 교회는 현대 사회와 문화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2)프란시스 쉐퍼는 비기독교인이었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와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의 연구에 근거하여 근대 과학의 탄생은 기독교적 전제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즉, 언어적 계시를 주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는데, 따라서 이성은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도구다. 이 말은 하나님은 합리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고 인간은 이성을 통해 우주를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기독교적 전제가 중세 유럽을 지배했기 때문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등은 근대 과학을 탄생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한다면, 프란시스 쉐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참조하라.
3)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있는가? 또는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근본적으로 종교는 비과학적 또는 비합리적인 것이고, 과학은 합리적인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비합리적인 것을 종교로, 합리적인 것을 과학으로 전제하는 것은 근대 사회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신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같은 근대 사회의 신념과 전혀 반대되는 전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4)이것이야말로 프란시스 쉐퍼가 볼 때 모든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의 핵심 중 하나다.
5)이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그저 합리적으로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6)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믿음의 객관적 근거를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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