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서평
프란시스 쉐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서평
http://blog.naver.com/joyintheo/10069013281
들어가며
2009년 3학기 예수대학인 <프란시스 쉐퍼와 기독교 문화관>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의 명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How Should We Then Live?>를 다시 집어 들었다. 꽤 오래 전부터 읽기 시작하여 이번이 벌써 세 번째임에도 여전히 이 책은 만만치 않았다.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등과 함께 20세기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의 거인이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손꼽히는 프란시스 쉐퍼는 1912년에 태어나 1984년에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1968년에 진리관의 왜곡을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신랄하게 지적하고 변증한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를 출판한 것으로 시작하여 1984년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 를 마지막으로 출판하기까지 20여권을 훌쩍 넘기는 저술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중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1974년에 출판된 책으로,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 교회에 관련된 저술인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를 제외하면 사실상 종교개혁적 관점으로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며 성경적 진리를 변호한 책으로는 최종 완성판인 셈이다. 그래서 쉐퍼 사상의 핵심인 3부작의 내용을 확장하여 서구 역사와 사회를 로마 시대(초기 기독교)부터 20세기 말 현대에 이르기까지 분석하고 예측한 풍부한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미 그의 3부작에서 핵심적 사상의 골자를 밝혀 놓았기에 여기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그 기초가 다루어지나, 그럼에도 3부작의 핵심을 원숙하게 끌어올린 이 책을 잘 소화한다면 쉐퍼의 사상을 매우 풍부하게 독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술 배경과 특징
사실 이 책은 처음부터 책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아들 프랭키의 끈질긴 설득으로 인해 쉐퍼는 일련의 강의를 통해 하던 이야기들을 모아 종교개혁적 기독교를 떠난 서구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에 쉐퍼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하나의 책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최근 발간된 프란시스 쉐퍼의 전기(傳記)인 <프랜시스 쉐퍼>(콜린 듀리에즈, 복있는 사람)를 보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열 시간 반이나 되는 영화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미국과 유럽에서 꽤 상당한 호응을 얻었는데 관련 내용을 조금 인용해 보겠다.
(325 쪽부터) … (이 영화 상영에) 오클랜드에서 약 4,500명, 시카고에서 3,900명, 로스앤젤레스에서 6,600명, 그리고 토론토에서 4,400명이 각각 참석했다. 이 영화 시리즈는 유럽 여러 지역에도 상영되었으며, 영국에서는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지방별로 그것을 주관했다. 가스펠 필름스사(社)는 그 야심적인 미지의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가 전례 없는 수확을 맛보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가 쉽게 가정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책 마지막에 ‘특별한 노트’라는 제목이 달린 ‘기독교인들을 위한 글’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후기 기독교 사회Post-Christianity Era(기 독교적 사고와 문화가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무신론적 전제와 문화가 지배하게 된 현대 서구 사회를 가리키는 말)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서구 사회와 역사가 혼란과 무질서, 쇠퇴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원인을 분석한 일반 대중 교양서다. 따라서 독자들이 이 책의 주장에 동의를 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불문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수준의 지성을 갖춘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이 책은 쓰였다. 또한 이 책은 전문적인 역사학이나 인문/사회과학 학술서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통찰과 식견을 가진 사상가가 교양적이고 대중적인 수준에 맞춰 쓴 책이기 때문에 조금만 집중하여 인내를 가지고 읽으면 전체적인 맥락과 그 주장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읽기도 전에 너무 겁내지 말라는 뜻이다.)
쉐퍼 사상의 기초
쉐퍼가 볼 때 성경적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이다(생명의말씀사판 전집5권 337페이지에서 인용). 즉, 구속사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종교개혁적 성경/역사 이해가 쉐퍼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칼빈주의가 그러했듯이, 쉐퍼는 성경은 ‘종교적(즉, 영적 구원)’ 차원에서의 진리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우주와 역사에 대해서도 ‘참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즉,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탄생과 인류의 역사에 대해 ‘모든 진리’를 말해주진 않지만,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실들을 ‘바르게’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우주와 역사에 관한 진리를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신자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신비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사람들이다. 성경이 단순히 ‘종교적 수양과 관련된 책’이 아닌, 인간의 구원을 비롯해 우주와 역사에 대한 진리를 바르게 말해주고 있다고 하는 종교개혁적 성경 이해는 쉐퍼의 성경관과 세계관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여기서 모든 쉐퍼의 사상이 도출된다.
쉐퍼의 우주관과 역사관의 기초
쉐퍼는 우주와 역사에 관한 객관적 진리를 파악할 때, 일반 계시(자연 세계를 연구하는 인간의 이성 활동을 통해 얻은 지식)로서의 철학, 역사, 과학 등이 인간에게 우주와 역사에 관한 사실들을 알려주는 데 유익한 점이 있지만, 우주와 역사에 관한 ‘대전제’로서의 근원적 사실들은 특별 계시(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은 지식)로 주어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을 따라 성경이 모든 다른 지식들을 규정하는 ‘최고이자 유일한 권위’가 된다고 하는 ‘오직 성경’의 원리가 함축하고 있는 바다. 즉, 성경이 말하는 우주와 역사에 관한 사실들 위에 철학, 과학, 역사 등의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지식과 연구가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처럼 기독교 집단의 패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교회가 세상 권력을 다시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걸고 명백히 반대하고 저항해야 한다), 성경이 역사와 우주에 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성경)으로부터 떠나, 무신론적 전제 위에서 인간의 이성과 직관, 경험을 유일한 권위와 수단으로 하여 우주와 역사에 관한 사실들을 재구성해 가고 있는 시대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은 성경이 ‘종교적 체험’을 제공할 뿐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의 구성과 역사적 사실에 관한 객관적 진리는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종교적 진리’(종교적 체험을 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와 ‘과학적 진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성경은 ‘종교적 진리’를 얻고자 할 때만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과학과 역사와 사회에 관한 성경의 주장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것’(즉, 오류가 있다!)이며, 우주와 역사에 관한 진리를 알고자 할 때는 종교로부터 독립된 ‘학문’을 사용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계보를 잇는 현대적 진리관의 핵심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유일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무신론적 사고) 오직 현대인의 눈에 보이는 지고한 존재인 인간을 그 출발점이자 기초로 삼아 우주와 역사의 실체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것을 ‘인본주의’ 또는 ‘합리주의’라고 한다.
쉐퍼가 볼 때, 역사와 우주, 그리고 인간과 모든 사물에 통일된 보편적 질서를 부여하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자신을 참되게 알리시기 위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이 참된 기독교의 바른 출발점이다.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에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인간은 무한하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알 길이 없으며, 우주와 역사, 그리고 인간과 모든 개별 사물들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의미와 가치를 참되게 이해할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성과 탐구 능력에 기초하여 역사와 우주를 파악하는 과학적 연구 방법은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기초하여 출발할 때만 역사와 우주, 인간과 개별 사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참되게’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무신론적 전제에서 출발하는 현대 과학의 연구 방법은 기독교적 기초를 상실했고 실제 우주와 역사, 인간과 개별 사물을 충분히 바르고 참되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다시 말해, 무신론적 전제에서 출발하는 현대 과학의 연구 전통 위에 서 있는 많은 현대의 철학, 미술, 음악, 문학, 영화 그리고 현대의 신학까지도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말씀, 그리고 우주와 역사, 인간과 개별 사물들을 잘못 파악하는 오류 위에 서 있다.
고대 로마는 왜 망했는가?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을 대체로 가리키는 고대 로마가 무너진 원인에 대한 쉐퍼의 관점은 매우 독특하다. 로마의 도덕적 부패․시민사회의 해체․위생 문제․지리적 상황․게르만족의 침입 등 다양한 원인들이 로마를 멸망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은 기존 역사가들에 의해서 이미 주장된 바 있다. 쉐퍼는 한 나라 또는 사회의 흥망성쇠의 문제를 그 사회의 ‘기반’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여기서 ‘기반’이라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정신적․문화적․도덕적 기초를 가리킨다. 로마는 첫째 폴리스(도시 국가), 둘째 그리스인들의 신들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다. 쉐퍼가 볼 때, 폴리스는 한 사회를 세우기에 충분한 기반이 아니었으며(여기에 대해 쉐퍼가 자세히 설명은 안하지만, 추측컨대 폴리스란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인데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영적․정신적․도덕적 기반이 없는 시민 중심의 민주 사회는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 보다는 뛰어나지만 무한하지 않고 인간처럼 유한한 존재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로마를 굳건히 지탱해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유한하고 불충분한 기반 위에 놓인 고대 로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로마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절대적인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이는 황제 숭배와 권위주의적 통치로 이어졌다. 황제 숭배와 권위주의적 통치는 로마 제국을 유지시키기 위한 ‘절대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인간적 시도였으나,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한 인본주의적 수단을 사용한 결과는 인간을 압제하고 자유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중세는 왜 무너졌는가?
기독교를 불법이자 반역 종교로 간주하고 박해했던 고대 로마 시대를 살피다보면,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중세는 왜 무너졌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참된 기독교의 기초는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참되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오류 없이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최종적이고 유일한 권위가 부여되어야만 참된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성경)에 유일하고 최종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판단하려 했다. 따라서 참된 기독교의 모습을 비교적 지켜갈 수 있었다(완벽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권위,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교회를 지배하는 교황과 성직자들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와 동등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의 권위 보다 교회의 권위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 보다 교회를 다스리는 인간의 권위가 더 우세해진 것이다. 이것을 쉐퍼는 인본주의적 요소가 기독교에 덧붙여진 것(혼합주의)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왜곡은 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거스틴은 인간의 모든 것이 타락했다는 ‘전적 타락’을 주장한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탐구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중세는 외관상 기독교적 기초 위에 서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본주의적 요소가 지배하는 유사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기였고, 결국 14-16세기에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나게 된다. 첫째는 본격적으로 인본주의적 개혁으로 나아가려는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다. 이제 사람들은 유사 기독교가 내세웠던 무한한 절대자 하나님을 내어던지고 인간을 기초로 한 사회를 구축하려 했다. 둘째는 다시 성경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권위에 기초한 신본주의적 개혁으로 나아가려는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인본주의적 요소가 덧입혀진 중세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고 다시 기독교의 참된 본질이자 기초인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로 철저히 돌아가고자 했다. 어찌됐든 결국 중세가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바르게 기초하지 못하자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고대 그리스 정신과 문화를 재발견하여 인간을 중심에 둔 인본주의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르네상스 시대는 다양하고 풍성한 업적을 남겼음에 틀림없으나, 결국 유한한 인간을 중심에 두고서는 인간과 개별 사물에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도덕 질서와 가치 체계를 부여할 방법을 발견할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하고 만다.
쉐퍼가 볼 때, 르네상스 시대가 기초한 정신의 한계를 자각한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다. 수학자, 화학자, 음악가, 건축가, 해부학자, 식물학자, 공학기사 그리고 예술가였던 당대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인본주의적 전제에서 출발하면 결코 인간과 개별 사물에 보편적인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인간은 다만 기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임을 발견했다. 결국 자신이 의지했던 수학이나 기타 학문으로는 보편적 의미와 질서를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예술에 의지하여 그 보편적 의미와 질서를 발견하려 했으나 역시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인간을 철저히 믿었으나, 인간에 대한 믿음은 결국 인간을 기계로 만들고 말았다.
이에 비해 쉐퍼가 볼 때 종교개혁 시대는 이 땅에서 완전히 회복될 수 없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불완전한 점들을 많이 지니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기초한 참된 기독교의 모습을 상당히 회복한 시기였다. 남부 유럽을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운동이 지배했던 반면, 북부 유럽은 종교개혁을 통해 그와는 정 반대의 기초를 제공 받았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지배했던 북부 유럽은 성경적 기초를 받아들였고 인간이 참된 자유를 얻고 개별 사물이 참된 의미를 부여받는 데 아무런 갈등이나 문제가 없었다. 예를 들면, 과학과 예술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른 개별자가 갖지 못한 위대한 존엄성을 부여받았으며, 더불어 타락한 존재로서 불완전한 죄인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즉, 인간의 위대함과 인간의 잔인성의 공존은 아무런 갈등과 혼란이 없이 해결되고 이해될 수 있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웠기에 혼란이 없는 자유였고 어떠한 인간적 권위에도 절대적으로는 규제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성직자 이외에도 인간의 각자의 삶은 하나님의 소명으로서 존엄하게 여겨졌고, 평신도 장로들이 교회의 지도에 참여하여 민주주의적 교회 정치가 발전하게 되었다(장로교 교회 정치 제도의 기원). 교회 내의 민주주의의 진전은 사회 내의 민주주의 진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민주주의의 기원이 종교개혁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문화와 예술 또한 예배 때 우상으로 사용되는 점을 제외하고는 종교개혁의 기초 위에서 풍성해졌고 그 결과 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 헨델Handel, 렘브란트Rembrandt 등의 종교개혁의 기초 위에 선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일하고 최종적인 절대 권위를 두는 종교개혁 신앙은 어떠한 인간적 권위도 절대적 권위를 소유할 수 없다고 믿었기에 당시의 권위주의 정치에 규제를 가하고자 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칼빈Calvin의 입헌주의적 사상이었다. 이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칼빈은 제네바에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 및 정치를 입헌주의적 모델로 제시하였다. 칼빈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의 노력으로 영국에서는 절대주의의 위협이 좌절되었으며 영국과 미국은 대학살을 불러온 프랑스 혁명의 끔찍한 결과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건강했던 종교개혁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존중되고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쉐퍼는 두 가지를 지적하는데, 첫째는 인종적 편견에 근거한 노예 제도를 유지한 점, 둘째는 산업 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부를 자비롭게 사용하지 않았던 점. 특히 이 두 가지에 대해 교회는 성경 말씀대로 말하고 실천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존 웨슬리John Wesley, 존 뉴턴John Newton,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등의 종교개혁 신앙의 후예들에 의해 노예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진다.
계몽주의, 과학혁명, 그리고 현대
종교개혁의 일정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구 사회는 르네상스 운동으로 시작된 인본주의적 토대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특히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을 중심으로 우주와 자연을 탐구했던 전통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관찰과 실험, 증명을 통해 우주와 자연을 탐구하는 전통으로 과학적 연구 방법이 전환된다. 이것을 과학 혁명이라고 하는데, 성경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연구 전통에 기반하고 있던 중세 가톨릭 시대의 과학적 사고의 전제들을 뒤집고 근대적 과학 혁명이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등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합리적이고 질서 있는 우주와 자연을 전제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근대 과학의 출발은 이제 과학 혁명의 진전 과정에서 그 출발의 전제였던 기독교적 전통을 제거하고 인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현대 과학이 탄생한 것이다.
인본주의적 요소가 덧입혀지긴 했어도 적어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편적 토대 위에 세워져 있던 중세 사회가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을 바탕으로 인본주의적 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혼란스럽지 않은 참된 자유의 보장을 위한 보편적 통일성의 근거였던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제거되고 철저하게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출발하는 인본주의 사회인 근대가 되자, 기존에 통일성을 이루고 있던 많은 영역들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철학에서는 인간에게 도덕과 가치, 의미를 일관되게 제공해 주는 보편자를 합리적으로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게 되었고, 논리적 사고를 던져버린 일종의 도약Jump을 통해 보편자를 찾으려고 하게 되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보편자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절대 도덕은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유전적/심리적/환경적/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지어진 하나의 기계로 전락하게 되었다. 존재에는 아무런 이유나 의미, 도덕적 기준 같은 것은 부여될 수 없었고, 다만 존재 그 자체가 곧 도덕이 되어버렸다.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철저하게 인간을 중심으로 출발하는 인본주의적 전제는 신학에도 침투하여 기독교 (구)자유주의와 실존주의적 기독교인 신정통주의(신자유주의)를 탄생시켰다. 성경은 실제로는 오류로 가득차서 합리적으로는 신뢰할 수가 없지만, 종교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말씀이 오류 속에서 뚫고 나와 신자에게 전달된다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적 성경관과 진리관이 종교개혁의 기독교를 뒤바꿔 놓기도 했다.
현대의 미술과 음악과 문화와 영화 또한 보편자를 잃어버리고 합리적으로 의미와 도덕과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참된 이유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성을 버리고 신비주의로 기울어짐으로써 스스로 붕괴하고 만다.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라는 보편자를 잃어버린 현대 사회는 이제 ‘개인적 평안과 풍요’(개인주의적/자본주의적/물질주의적 가치)를 그 가치로 받아들였다. 현대 사회는 개인주의적 가치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자율적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과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 이 두 가지의 기준을 존재의 이유이자 목표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제 노동이란 추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신성하고 존엄한 노동이란 사라졌다. 양차 세계 대전, 전체주의, 공산주의, 권위주의 정치의 출현, 엘리트 중심의 대중 조작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갔다. 기독교적 기반이 없는 민주주의는 방향 없는 다수의 폭압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쉐퍼의 말처럼 “사회를 판단할 절대가 없다면, 사회가 절대라는 것이다.”(311쪽에서 인용)
전망과 대안
쉐퍼는 앞으로 다가올 극도의 경제적 붕괴, 핵전쟁의 위협, 테러와 폭력의 공포, 권력과 부의 재분배, 식량과 자원의 부족 등의 극단적 조건들이 인류를 상당히 압박할 것으로 보았다. 특히, 이와 같은 극단적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권위주의적 정치를 묵인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며, 엘리트와 지배 권력은 이와 같은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하여 대중을 조작하곤 한다. 특히 다니엘 벨Daniel Bell이 지적한 것처럼, 현대 사회의 주요한 엘리트 중 하나는 기술 관료들이기 때문에, 현대의 첨단 기술을 지배하는 기술 관료들은 자신이 소유한 기술적 능력을 사용하여 대중을 손쉽게 조작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개인의 평안과 풍요라는 극히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가치를 그 존재의 이유이나 목표로 받아들인 현대인들이 과연 이와 같은 엘리트에 바르게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자신을 희생하고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쉐퍼의 현재와 미래 사회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자 예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대안은 무엇인가? 다시 성경적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과 우주,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진리 또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진리이기에 이 진리에 기초한 사회가 될 때만이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적 진리에 기초한 사회, 기독교적 전제(또는 합의)에서 출발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 기독교인이 반드시 다수가 되어야할 필요는 없다고 쉐퍼는 말한다. 참된 기독교인은 항상 소수였고, 그 소수의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되게 깨닫고 믿으며 실천하게 될 때 그 결과로 한 사회가 성경적 진리를 그 사회의 전제로 받아들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처럼 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완전한 사회를 약속하고 있지 않다.)
글을 맺으며
교회의 1차적이고 우선적인 과업이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임은 흔들릴 수 없이 분명하다(복음 전도와 설교). 이것을 잃어버리고서는 도무지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엄히 명령하고 있는 절대적인 도덕 명령을 신자들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 가운데 온전하게 지키고 순종하는 것(성화와 순종), 이것은 노예제를 유지하는 사회에서는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일하는 윌리엄 윌버포스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며, 권위주의 정치가 유지되는 사회에서는 권위주의 정치에 저항하는 형태로 드러날 것이고, 낙태와 안락사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실천으로 연결될 것이다. 바른 중생과 회심을 체험한 신자가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전하며 숫자와 세력의 규모에 상관없이 그 말씀이 명령하는 절대적 도덕 명령을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순종하게 될 때, 세상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만이 참된 자유를 주는 유일한 진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http://blog.naver.com/joyintheo/10069013281
들어가며
2009년 3학기 예수대학인 <프란시스 쉐퍼와 기독교 문화관>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의 명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How Should We Then Live?>를 다시 집어 들었다. 꽤 오래 전부터 읽기 시작하여 이번이 벌써 세 번째임에도 여전히 이 책은 만만치 않았다.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등과 함께 20세기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의 거인이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손꼽히는 프란시스 쉐퍼는 1912년에 태어나 1984년에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1968년에 진리관의 왜곡을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신랄하게 지적하고 변증한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를 출판한 것으로 시작하여 1984년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 를 마지막으로 출판하기까지 20여권을 훌쩍 넘기는 저술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중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1974년에 출판된 책으로,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 교회에 관련된 저술인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를 제외하면 사실상 종교개혁적 관점으로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며 성경적 진리를 변호한 책으로는 최종 완성판인 셈이다. 그래서 쉐퍼 사상의 핵심인 3부작의 내용을 확장하여 서구 역사와 사회를 로마 시대(초기 기독교)부터 20세기 말 현대에 이르기까지 분석하고 예측한 풍부한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미 그의 3부작에서 핵심적 사상의 골자를 밝혀 놓았기에 여기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그 기초가 다루어지나, 그럼에도 3부작의 핵심을 원숙하게 끌어올린 이 책을 잘 소화한다면 쉐퍼의 사상을 매우 풍부하게 독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술 배경과 특징
사실 이 책은 처음부터 책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아들 프랭키의 끈질긴 설득으로 인해 쉐퍼는 일련의 강의를 통해 하던 이야기들을 모아 종교개혁적 기독교를 떠난 서구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에 쉐퍼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하나의 책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최근 발간된 프란시스 쉐퍼의 전기(傳記)인 <프랜시스 쉐퍼>(콜린 듀리에즈, 복있는 사람)를 보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열 시간 반이나 되는 영화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미국과 유럽에서 꽤 상당한 호응을 얻었는데 관련 내용을 조금 인용해 보겠다.
(325 쪽부터) … (이 영화 상영에) 오클랜드에서 약 4,500명, 시카고에서 3,900명, 로스앤젤레스에서 6,600명, 그리고 토론토에서 4,400명이 각각 참석했다. 이 영화 시리즈는 유럽 여러 지역에도 상영되었으며, 영국에서는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지방별로 그것을 주관했다. 가스펠 필름스사(社)는 그 야심적인 미지의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가 전례 없는 수확을 맛보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가 쉽게 가정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책 마지막에 ‘특별한 노트’라는 제목이 달린 ‘기독교인들을 위한 글’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후기 기독교 사회Post-Christianity Era(기 독교적 사고와 문화가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무신론적 전제와 문화가 지배하게 된 현대 서구 사회를 가리키는 말)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서구 사회와 역사가 혼란과 무질서, 쇠퇴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원인을 분석한 일반 대중 교양서다. 따라서 독자들이 이 책의 주장에 동의를 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불문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수준의 지성을 갖춘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이 책은 쓰였다. 또한 이 책은 전문적인 역사학이나 인문/사회과학 학술서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통찰과 식견을 가진 사상가가 교양적이고 대중적인 수준에 맞춰 쓴 책이기 때문에 조금만 집중하여 인내를 가지고 읽으면 전체적인 맥락과 그 주장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읽기도 전에 너무 겁내지 말라는 뜻이다.)
쉐퍼 사상의 기초
쉐퍼가 볼 때 성경적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이다(생명의말씀사판 전집5권 337페이지에서 인용). 즉, 구속사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종교개혁적 성경/역사 이해가 쉐퍼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칼빈주의가 그러했듯이, 쉐퍼는 성경은 ‘종교적(즉, 영적 구원)’ 차원에서의 진리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우주와 역사에 대해서도 ‘참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즉,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탄생과 인류의 역사에 대해 ‘모든 진리’를 말해주진 않지만,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실들을 ‘바르게’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우주와 역사에 관한 진리를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신자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신비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사람들이다. 성경이 단순히 ‘종교적 수양과 관련된 책’이 아닌, 인간의 구원을 비롯해 우주와 역사에 대한 진리를 바르게 말해주고 있다고 하는 종교개혁적 성경 이해는 쉐퍼의 성경관과 세계관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여기서 모든 쉐퍼의 사상이 도출된다.
쉐퍼의 우주관과 역사관의 기초
쉐퍼는 우주와 역사에 관한 객관적 진리를 파악할 때, 일반 계시(자연 세계를 연구하는 인간의 이성 활동을 통해 얻은 지식)로서의 철학, 역사, 과학 등이 인간에게 우주와 역사에 관한 사실들을 알려주는 데 유익한 점이 있지만, 우주와 역사에 관한 ‘대전제’로서의 근원적 사실들은 특별 계시(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은 지식)로 주어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을 따라 성경이 모든 다른 지식들을 규정하는 ‘최고이자 유일한 권위’가 된다고 하는 ‘오직 성경’의 원리가 함축하고 있는 바다. 즉, 성경이 말하는 우주와 역사에 관한 사실들 위에 철학, 과학, 역사 등의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지식과 연구가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처럼 기독교 집단의 패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교회가 세상 권력을 다시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걸고 명백히 반대하고 저항해야 한다), 성경이 역사와 우주에 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성경)으로부터 떠나, 무신론적 전제 위에서 인간의 이성과 직관, 경험을 유일한 권위와 수단으로 하여 우주와 역사에 관한 사실들을 재구성해 가고 있는 시대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은 성경이 ‘종교적 체험’을 제공할 뿐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의 구성과 역사적 사실에 관한 객관적 진리는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종교적 진리’(종교적 체험을 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와 ‘과학적 진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성경은 ‘종교적 진리’를 얻고자 할 때만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과학과 역사와 사회에 관한 성경의 주장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것’(즉, 오류가 있다!)이며, 우주와 역사에 관한 진리를 알고자 할 때는 종교로부터 독립된 ‘학문’을 사용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계보를 잇는 현대적 진리관의 핵심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유일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무신론적 사고) 오직 현대인의 눈에 보이는 지고한 존재인 인간을 그 출발점이자 기초로 삼아 우주와 역사의 실체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것을 ‘인본주의’ 또는 ‘합리주의’라고 한다.
쉐퍼가 볼 때, 역사와 우주, 그리고 인간과 모든 사물에 통일된 보편적 질서를 부여하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자신을 참되게 알리시기 위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이 참된 기독교의 바른 출발점이다.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에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인간은 무한하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알 길이 없으며, 우주와 역사, 그리고 인간과 모든 개별 사물들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의미와 가치를 참되게 이해할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성과 탐구 능력에 기초하여 역사와 우주를 파악하는 과학적 연구 방법은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기초하여 출발할 때만 역사와 우주, 인간과 개별 사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참되게’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무신론적 전제에서 출발하는 현대 과학의 연구 방법은 기독교적 기초를 상실했고 실제 우주와 역사, 인간과 개별 사물을 충분히 바르고 참되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다시 말해, 무신론적 전제에서 출발하는 현대 과학의 연구 전통 위에 서 있는 많은 현대의 철학, 미술, 음악, 문학, 영화 그리고 현대의 신학까지도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말씀, 그리고 우주와 역사, 인간과 개별 사물들을 잘못 파악하는 오류 위에 서 있다.
고대 로마는 왜 망했는가?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을 대체로 가리키는 고대 로마가 무너진 원인에 대한 쉐퍼의 관점은 매우 독특하다. 로마의 도덕적 부패․시민사회의 해체․위생 문제․지리적 상황․게르만족의 침입 등 다양한 원인들이 로마를 멸망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은 기존 역사가들에 의해서 이미 주장된 바 있다. 쉐퍼는 한 나라 또는 사회의 흥망성쇠의 문제를 그 사회의 ‘기반’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여기서 ‘기반’이라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정신적․문화적․도덕적 기초를 가리킨다. 로마는 첫째 폴리스(도시 국가), 둘째 그리스인들의 신들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다. 쉐퍼가 볼 때, 폴리스는 한 사회를 세우기에 충분한 기반이 아니었으며(여기에 대해 쉐퍼가 자세히 설명은 안하지만, 추측컨대 폴리스란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인데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영적․정신적․도덕적 기반이 없는 시민 중심의 민주 사회는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 보다는 뛰어나지만 무한하지 않고 인간처럼 유한한 존재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로마를 굳건히 지탱해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유한하고 불충분한 기반 위에 놓인 고대 로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로마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절대적인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이는 황제 숭배와 권위주의적 통치로 이어졌다. 황제 숭배와 권위주의적 통치는 로마 제국을 유지시키기 위한 ‘절대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인간적 시도였으나,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한 인본주의적 수단을 사용한 결과는 인간을 압제하고 자유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중세는 왜 무너졌는가?
기독교를 불법이자 반역 종교로 간주하고 박해했던 고대 로마 시대를 살피다보면,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중세는 왜 무너졌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참된 기독교의 기초는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참되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오류 없이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최종적이고 유일한 권위가 부여되어야만 참된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성경)에 유일하고 최종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판단하려 했다. 따라서 참된 기독교의 모습을 비교적 지켜갈 수 있었다(완벽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권위,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교회를 지배하는 교황과 성직자들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와 동등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의 권위 보다 교회의 권위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 보다 교회를 다스리는 인간의 권위가 더 우세해진 것이다. 이것을 쉐퍼는 인본주의적 요소가 기독교에 덧붙여진 것(혼합주의)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왜곡은 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거스틴은 인간의 모든 것이 타락했다는 ‘전적 타락’을 주장한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탐구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중세는 외관상 기독교적 기초 위에 서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본주의적 요소가 지배하는 유사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기였고, 결국 14-16세기에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나게 된다. 첫째는 본격적으로 인본주의적 개혁으로 나아가려는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다. 이제 사람들은 유사 기독교가 내세웠던 무한한 절대자 하나님을 내어던지고 인간을 기초로 한 사회를 구축하려 했다. 둘째는 다시 성경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권위에 기초한 신본주의적 개혁으로 나아가려는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인본주의적 요소가 덧입혀진 중세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고 다시 기독교의 참된 본질이자 기초인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로 철저히 돌아가고자 했다. 어찌됐든 결국 중세가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바르게 기초하지 못하자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고대 그리스 정신과 문화를 재발견하여 인간을 중심에 둔 인본주의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르네상스 시대는 다양하고 풍성한 업적을 남겼음에 틀림없으나, 결국 유한한 인간을 중심에 두고서는 인간과 개별 사물에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도덕 질서와 가치 체계를 부여할 방법을 발견할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하고 만다.
쉐퍼가 볼 때, 르네상스 시대가 기초한 정신의 한계를 자각한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다. 수학자, 화학자, 음악가, 건축가, 해부학자, 식물학자, 공학기사 그리고 예술가였던 당대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인본주의적 전제에서 출발하면 결코 인간과 개별 사물에 보편적인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인간은 다만 기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임을 발견했다. 결국 자신이 의지했던 수학이나 기타 학문으로는 보편적 의미와 질서를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예술에 의지하여 그 보편적 의미와 질서를 발견하려 했으나 역시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인간을 철저히 믿었으나, 인간에 대한 믿음은 결국 인간을 기계로 만들고 말았다.
이에 비해 쉐퍼가 볼 때 종교개혁 시대는 이 땅에서 완전히 회복될 수 없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불완전한 점들을 많이 지니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기초한 참된 기독교의 모습을 상당히 회복한 시기였다. 남부 유럽을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운동이 지배했던 반면, 북부 유럽은 종교개혁을 통해 그와는 정 반대의 기초를 제공 받았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지배했던 북부 유럽은 성경적 기초를 받아들였고 인간이 참된 자유를 얻고 개별 사물이 참된 의미를 부여받는 데 아무런 갈등이나 문제가 없었다. 예를 들면, 과학과 예술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른 개별자가 갖지 못한 위대한 존엄성을 부여받았으며, 더불어 타락한 존재로서 불완전한 죄인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즉, 인간의 위대함과 인간의 잔인성의 공존은 아무런 갈등과 혼란이 없이 해결되고 이해될 수 있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웠기에 혼란이 없는 자유였고 어떠한 인간적 권위에도 절대적으로는 규제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성직자 이외에도 인간의 각자의 삶은 하나님의 소명으로서 존엄하게 여겨졌고, 평신도 장로들이 교회의 지도에 참여하여 민주주의적 교회 정치가 발전하게 되었다(장로교 교회 정치 제도의 기원). 교회 내의 민주주의의 진전은 사회 내의 민주주의 진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민주주의의 기원이 종교개혁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문화와 예술 또한 예배 때 우상으로 사용되는 점을 제외하고는 종교개혁의 기초 위에서 풍성해졌고 그 결과 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 헨델Handel, 렘브란트Rembrandt 등의 종교개혁의 기초 위에 선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일하고 최종적인 절대 권위를 두는 종교개혁 신앙은 어떠한 인간적 권위도 절대적 권위를 소유할 수 없다고 믿었기에 당시의 권위주의 정치에 규제를 가하고자 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칼빈Calvin의 입헌주의적 사상이었다. 이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칼빈은 제네바에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 및 정치를 입헌주의적 모델로 제시하였다. 칼빈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의 노력으로 영국에서는 절대주의의 위협이 좌절되었으며 영국과 미국은 대학살을 불러온 프랑스 혁명의 끔찍한 결과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건강했던 종교개혁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존중되고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쉐퍼는 두 가지를 지적하는데, 첫째는 인종적 편견에 근거한 노예 제도를 유지한 점, 둘째는 산업 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부를 자비롭게 사용하지 않았던 점. 특히 이 두 가지에 대해 교회는 성경 말씀대로 말하고 실천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존 웨슬리John Wesley, 존 뉴턴John Newton,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등의 종교개혁 신앙의 후예들에 의해 노예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진다.
계몽주의, 과학혁명, 그리고 현대
종교개혁의 일정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구 사회는 르네상스 운동으로 시작된 인본주의적 토대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특히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을 중심으로 우주와 자연을 탐구했던 전통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관찰과 실험, 증명을 통해 우주와 자연을 탐구하는 전통으로 과학적 연구 방법이 전환된다. 이것을 과학 혁명이라고 하는데, 성경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연구 전통에 기반하고 있던 중세 가톨릭 시대의 과학적 사고의 전제들을 뒤집고 근대적 과학 혁명이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등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합리적이고 질서 있는 우주와 자연을 전제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근대 과학의 출발은 이제 과학 혁명의 진전 과정에서 그 출발의 전제였던 기독교적 전통을 제거하고 인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현대 과학이 탄생한 것이다.
인본주의적 요소가 덧입혀지긴 했어도 적어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편적 토대 위에 세워져 있던 중세 사회가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을 바탕으로 인본주의적 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혼란스럽지 않은 참된 자유의 보장을 위한 보편적 통일성의 근거였던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제거되고 철저하게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출발하는 인본주의 사회인 근대가 되자, 기존에 통일성을 이루고 있던 많은 영역들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철학에서는 인간에게 도덕과 가치, 의미를 일관되게 제공해 주는 보편자를 합리적으로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게 되었고, 논리적 사고를 던져버린 일종의 도약Jump을 통해 보편자를 찾으려고 하게 되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보편자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절대 도덕은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유전적/심리적/환경적/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지어진 하나의 기계로 전락하게 되었다. 존재에는 아무런 이유나 의미, 도덕적 기준 같은 것은 부여될 수 없었고, 다만 존재 그 자체가 곧 도덕이 되어버렸다.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철저하게 인간을 중심으로 출발하는 인본주의적 전제는 신학에도 침투하여 기독교 (구)자유주의와 실존주의적 기독교인 신정통주의(신자유주의)를 탄생시켰다. 성경은 실제로는 오류로 가득차서 합리적으로는 신뢰할 수가 없지만, 종교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말씀이 오류 속에서 뚫고 나와 신자에게 전달된다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적 성경관과 진리관이 종교개혁의 기독교를 뒤바꿔 놓기도 했다.
현대의 미술과 음악과 문화와 영화 또한 보편자를 잃어버리고 합리적으로 의미와 도덕과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참된 이유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성을 버리고 신비주의로 기울어짐으로써 스스로 붕괴하고 만다.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라는 보편자를 잃어버린 현대 사회는 이제 ‘개인적 평안과 풍요’(개인주의적/자본주의적/물질주의적 가치)를 그 가치로 받아들였다. 현대 사회는 개인주의적 가치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자율적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과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 이 두 가지의 기준을 존재의 이유이자 목표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제 노동이란 추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신성하고 존엄한 노동이란 사라졌다. 양차 세계 대전, 전체주의, 공산주의, 권위주의 정치의 출현, 엘리트 중심의 대중 조작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갔다. 기독교적 기반이 없는 민주주의는 방향 없는 다수의 폭압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쉐퍼의 말처럼 “사회를 판단할 절대가 없다면, 사회가 절대라는 것이다.”(311쪽에서 인용)
전망과 대안
쉐퍼는 앞으로 다가올 극도의 경제적 붕괴, 핵전쟁의 위협, 테러와 폭력의 공포, 권력과 부의 재분배, 식량과 자원의 부족 등의 극단적 조건들이 인류를 상당히 압박할 것으로 보았다. 특히, 이와 같은 극단적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권위주의적 정치를 묵인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며, 엘리트와 지배 권력은 이와 같은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하여 대중을 조작하곤 한다. 특히 다니엘 벨Daniel Bell이 지적한 것처럼, 현대 사회의 주요한 엘리트 중 하나는 기술 관료들이기 때문에, 현대의 첨단 기술을 지배하는 기술 관료들은 자신이 소유한 기술적 능력을 사용하여 대중을 손쉽게 조작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개인의 평안과 풍요라는 극히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가치를 그 존재의 이유이나 목표로 받아들인 현대인들이 과연 이와 같은 엘리트에 바르게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자신을 희생하고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쉐퍼의 현재와 미래 사회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자 예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대안은 무엇인가? 다시 성경적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과 우주,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진리 또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진리이기에 이 진리에 기초한 사회가 될 때만이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적 진리에 기초한 사회, 기독교적 전제(또는 합의)에서 출발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 기독교인이 반드시 다수가 되어야할 필요는 없다고 쉐퍼는 말한다. 참된 기독교인은 항상 소수였고, 그 소수의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되게 깨닫고 믿으며 실천하게 될 때 그 결과로 한 사회가 성경적 진리를 그 사회의 전제로 받아들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처럼 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완전한 사회를 약속하고 있지 않다.)
글을 맺으며
교회의 1차적이고 우선적인 과업이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임은 흔들릴 수 없이 분명하다(복음 전도와 설교). 이것을 잃어버리고서는 도무지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엄히 명령하고 있는 절대적인 도덕 명령을 신자들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 가운데 온전하게 지키고 순종하는 것(성화와 순종), 이것은 노예제를 유지하는 사회에서는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일하는 윌리엄 윌버포스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며, 권위주의 정치가 유지되는 사회에서는 권위주의 정치에 저항하는 형태로 드러날 것이고, 낙태와 안락사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실천으로 연결될 것이다. 바른 중생과 회심을 체험한 신자가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전하며 숫자와 세력의 규모에 상관없이 그 말씀이 명령하는 절대적 도덕 명령을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순종하게 될 때, 세상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만이 참된 자유를 주는 유일한 진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