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6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6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130
프랜이 없는 일상은 이디스를 풀이 죽게 만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세기가 넘게 사셨다. 그녀의 어머니도 85세까지 사셨다. 이디스는 69세였다. 그녀는 계속 살아야 했다. 그녀는 로체스터에 남아야 했다. 프랜은 그곳에 묻혔다. 고위직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문장이 보내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프랜을 “우리 세기에 가장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중의 한 명… 그의 삶은 수많은 영혼을 울렸고, 그들을 그들의 창조주의 진리로 돌아오게 했다.”이라고 극찬했다.
빌리 그래함은 말했다. “그는 진실로 우리 세대에 위대한 복음주의적 정치가였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신학과 철학에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어떤 사람들 보다 뛰어났다.”
라브리는 스위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 되었다.
프랜과 이디스의 환상적인 일정들이 이어지던 15년 동안은 하루하루의 경영이 다른 사람들,특히 샌드리스, 머큐리, 미들맴에게 맡겨졌다. 존과 프리실라 샌드리는 여러해 휴모즈에 머물렀다. 라날드와 수잔 머큐리는 1984년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우도와 데비 미들맴은 그리욘 라브리에서 살았다. 유럽에서 공동체의 주요 지점이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에 세워졌다. 미국에서는 사우스보로우, 메사추세츠, 로체스터에 라브리가 세워졌다. 이 지점들에는 방들과 토론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게다가 다양한 국가에 지원 센터를 세웠다. 이들은 방문자 정보를 관리했다. 지원 센터들도 라브리 지점이 되길를 원했다. 전체 조직은 50명 밖에 되지 않아 매우 연약했다.
그러나 이디스는 이렇게 썼다. “이 사역을 위해 한달에 300달러가 필요하다고 기도하기 시작했었는데 1980년에는 75만 달러를 놓고 기도한다.”
떠난 사람은 프랭키 뿐이었다. 그와 지니는 크리스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미래라고 여겨서 떠나게 되었다. 프랭키는 또한 크리스천 운동 잡지의 시작을 도왔다. 그러나 프랜이 죽은지 얼마 안되서 프랭키는 장로교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번영하는 듯한 기독교와 끊임없는 교단의 분열은 그를 힘들게 했다. 처음에는 천주교의 안정성에 끌려서 곧 미국 천주교가 사회주의와 현대주의에 점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동방정교회를 선택했고 1990년까지 정교회의 회원이었다. 1993년에 프랭키는 “Portofino”라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한다. 그 이야기의 나레이터는 1962년에 10세의 소년인 칼빈 벡커이다. 그의 부모는 2차 세계 대전 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스위스로 건너간 칼빈 개혁주의 교회의 선교사다. 벡커 가족은 이탈리아 리베라에서 휴가를 보낸다. 프랭키 자신의 삶과도 비슷하다. 그 소설에서 프랭키는 칼빈주의자들, 특히 예정설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변덕을 꼬집는다. 칼빈의 아버지는 다혈질이었고, 불공정했으며 어리석었다. 그의 어머니는 광신자에 위선자였다. 그의 누이들은 화를 잘 내고 지각이 없는 자들이었다.
세속적인 비평가들은 그 소설을 좋아했다. 기독교를 우습게 만드는 것보다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만한 게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은 그 소년을 극찾했다. 그는 매력적이었다. 그는 인간중의 인간으로 높여졌다. 그들은 벡커의 부모가 그들의 모든 인간적인 문제를 성경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실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들은 잔혹성과 난폭성에 진저리 치면서 벡커의 부모를 좁은 식견을 가진 광신자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하면, 프랭키 같은 칼빈이 멋진 것이었다. 쉐퍼스러운 가족은 난처한 것이었다.
프랭키는 그 소설이 쉐퍼 가족의 모습을 닮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단순히 소설 작가가 쓰는 기법을 썼을 뿐이었다. 그는 단지 그가 친숙하게 알고 있던 상황을 끌어다 쓴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 소설에서 프랭키의 목표중의 하나는 장로교를 공격하고 신성한 종교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동방정교로 개종한 이후에 이 소설을 집필했다. “크리스천 운동”에서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벡커가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의 축소판임을 알게 된다.” 벡커 가족은 역사적 기독교에서 동떨어진 진공관 속에 그들의 믿음을 만들어 낸다. 관점의 차이는 그 가족의 종교가 형식적 예배가 아니라 정확한 신앙 요소를 갖게 되기 전까지는 용인되어지지 않았다. 규범에서의 일탈은 공격을 받았다.”
“Portofino”가 실제 프랭키의 가족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비신자들이 그 소설을 좋아했다. Portofino가 프랜과 이디스의 명성을 더렵혔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 소설은 식어진 관심을 다시 돌리려는 듯 영화로 만들어 졌다. 그리고 프랭키는 좀더 광대한 내용을 담아 후속편을 출간했다.
이디스는 꿋꿋이 인내했다. 프랜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1986년에 “가족에게”라는 그녀의 편지글로 공격을 받았다. 그녀의 출판사는 하퍼 앤 로우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39년간의 모든 편지를 출판하려면 적어도 5천 페이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불가능 했다. 편지의 80 %만 추려서 두권으로 출판해야만 했다. 1988년에 이디스의 “라브리 가족 편지들, 1948~1960”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1989년에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라브리 가족 편지 1961~1986”으로 나오게 되었다. 게다가 이디스는 라브리를 위한 가족 편지를 계속 썼다.
2000년도까지 라브리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을 인도하고 있다. 한국의 서울에도 라브리가 생겼다. 7개의 주요 지점들은 학생들을 위한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구체적인 것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의 지점에서는 30여명의 학사에게 매일 15~20달러를 제공한다. 보통 2주나 8~10주간의 교육이 가능하다. 게다가 지점들에서는 세인트 루이스, 시드니, 인도, 루벤에 네개의 지원 센터가 있다. 2000년도에 이르러서는 존과 프리실라 샌드리가 스위스에 남았다. 로날드와 수잔 머큐리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종종 그레이트햄을 방문한다. 우도와 데비는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우도는 뉴욕의 킹스 대학의 종교학부 교수이다. 그는 또한 쉐퍼의 작품들의 “충격 확대”를 위한 쉐퍼 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의 이사로서 그는 러시아에의 교육을 돕는데도 관여했다.
2000년도 까지 이디스는 로체스터에 남아있었다. 그녀는 86세의 여성 리더로 살았다. 그녀에게는 4명의 결혼한 자녀와 15명의 손주들이 있었다. 그녀의 증손주들은 이미 손주들의 수를 넘어선다. 그녀는 아직도 강건하다. 그녀는 머리속에 아직도 출간하려고 하는 많은 책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그녀는 중국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기록했다. 그녀는 “메이 푸: 중국에서의 기억들”이라는 제목의 어린이 책을 썼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가족 편지는 쓰지 않았다. 대신 LEV(히브리 어로 마음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2년에 한번 출간되는 연보로 대체되었다.
새천년, 프랜의 입지는 복음주의적 영화로 남아있다. 게다가 언약 신학 대학교에서는 쉐퍼의 방법으로 냉소적, 세속적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많은 프랜의 책들이 여전히 출간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그의 사상의 흠을 잡기도 한다. 프랜의 논쟁이 그들의 논리를 실제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판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프랜은 경멸한다. 1999년에 이디스는 CBN의 TV 프로그램 700 클럽에서 프랜의 주요한 업적을 설명했다.
기독교는 기본적인 질문에 지적인 대답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당신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당신의 지성을 문에 걸어두듯 건성의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만 하는 논리적인 대답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프랜은 그의 성경적 세계관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그는 선한싸움을 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가 주장하는 동안 그는 신학자도 아니고 변증자도 아니었으며 순수하고 단순한 복음주의자였다. 그러나 프랜의 세계관과 그의 근거들은 2000년도 까지 남아있다. 영아살해, 안락사, 낙태의 수용은 선악을 분별 못하는 사회에서 득세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계속해서 진리를 찾는 잘못된 방법인 상대주의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프랜은 구도자들에게 진리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말한다. 그리고 왜 기독교 인지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프랜은 여러 번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130
프랜이 없는 일상은 이디스를 풀이 죽게 만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세기가 넘게 사셨다. 그녀의 어머니도 85세까지 사셨다. 이디스는 69세였다. 그녀는 계속 살아야 했다. 그녀는 로체스터에 남아야 했다. 프랜은 그곳에 묻혔다. 고위직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문장이 보내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프랜을 “우리 세기에 가장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중의 한 명… 그의 삶은 수많은 영혼을 울렸고, 그들을 그들의 창조주의 진리로 돌아오게 했다.”이라고 극찬했다.
빌리 그래함은 말했다. “그는 진실로 우리 세대에 위대한 복음주의적 정치가였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신학과 철학에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어떤 사람들 보다 뛰어났다.”
라브리는 스위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 되었다.
프랜과 이디스의 환상적인 일정들이 이어지던 15년 동안은 하루하루의 경영이 다른 사람들,특히 샌드리스, 머큐리, 미들맴에게 맡겨졌다. 존과 프리실라 샌드리는 여러해 휴모즈에 머물렀다. 라날드와 수잔 머큐리는 1984년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우도와 데비 미들맴은 그리욘 라브리에서 살았다. 유럽에서 공동체의 주요 지점이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에 세워졌다. 미국에서는 사우스보로우, 메사추세츠, 로체스터에 라브리가 세워졌다. 이 지점들에는 방들과 토론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게다가 다양한 국가에 지원 센터를 세웠다. 이들은 방문자 정보를 관리했다. 지원 센터들도 라브리 지점이 되길를 원했다. 전체 조직은 50명 밖에 되지 않아 매우 연약했다.
그러나 이디스는 이렇게 썼다. “이 사역을 위해 한달에 300달러가 필요하다고 기도하기 시작했었는데 1980년에는 75만 달러를 놓고 기도한다.”
떠난 사람은 프랭키 뿐이었다. 그와 지니는 크리스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미래라고 여겨서 떠나게 되었다. 프랭키는 또한 크리스천 운동 잡지의 시작을 도왔다. 그러나 프랜이 죽은지 얼마 안되서 프랭키는 장로교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번영하는 듯한 기독교와 끊임없는 교단의 분열은 그를 힘들게 했다. 처음에는 천주교의 안정성에 끌려서 곧 미국 천주교가 사회주의와 현대주의에 점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동방정교회를 선택했고 1990년까지 정교회의 회원이었다. 1993년에 프랭키는 “Portofino”라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한다. 그 이야기의 나레이터는 1962년에 10세의 소년인 칼빈 벡커이다. 그의 부모는 2차 세계 대전 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스위스로 건너간 칼빈 개혁주의 교회의 선교사다. 벡커 가족은 이탈리아 리베라에서 휴가를 보낸다. 프랭키 자신의 삶과도 비슷하다. 그 소설에서 프랭키는 칼빈주의자들, 특히 예정설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변덕을 꼬집는다. 칼빈의 아버지는 다혈질이었고, 불공정했으며 어리석었다. 그의 어머니는 광신자에 위선자였다. 그의 누이들은 화를 잘 내고 지각이 없는 자들이었다.
세속적인 비평가들은 그 소설을 좋아했다. 기독교를 우습게 만드는 것보다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만한 게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은 그 소년을 극찾했다. 그는 매력적이었다. 그는 인간중의 인간으로 높여졌다. 그들은 벡커의 부모가 그들의 모든 인간적인 문제를 성경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실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들은 잔혹성과 난폭성에 진저리 치면서 벡커의 부모를 좁은 식견을 가진 광신자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하면, 프랭키 같은 칼빈이 멋진 것이었다. 쉐퍼스러운 가족은 난처한 것이었다.
프랭키는 그 소설이 쉐퍼 가족의 모습을 닮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단순히 소설 작가가 쓰는 기법을 썼을 뿐이었다. 그는 단지 그가 친숙하게 알고 있던 상황을 끌어다 쓴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 소설에서 프랭키의 목표중의 하나는 장로교를 공격하고 신성한 종교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동방정교로 개종한 이후에 이 소설을 집필했다. “크리스천 운동”에서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벡커가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의 축소판임을 알게 된다.” 벡커 가족은 역사적 기독교에서 동떨어진 진공관 속에 그들의 믿음을 만들어 낸다. 관점의 차이는 그 가족의 종교가 형식적 예배가 아니라 정확한 신앙 요소를 갖게 되기 전까지는 용인되어지지 않았다. 규범에서의 일탈은 공격을 받았다.”
“Portofino”가 실제 프랭키의 가족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비신자들이 그 소설을 좋아했다. Portofino가 프랜과 이디스의 명성을 더렵혔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 소설은 식어진 관심을 다시 돌리려는 듯 영화로 만들어 졌다. 그리고 프랭키는 좀더 광대한 내용을 담아 후속편을 출간했다.
이디스는 꿋꿋이 인내했다. 프랜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1986년에 “가족에게”라는 그녀의 편지글로 공격을 받았다. 그녀의 출판사는 하퍼 앤 로우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39년간의 모든 편지를 출판하려면 적어도 5천 페이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불가능 했다. 편지의 80 %만 추려서 두권으로 출판해야만 했다. 1988년에 이디스의 “라브리 가족 편지들, 1948~1960”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1989년에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라브리 가족 편지 1961~1986”으로 나오게 되었다. 게다가 이디스는 라브리를 위한 가족 편지를 계속 썼다.
2000년도까지 라브리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을 인도하고 있다. 한국의 서울에도 라브리가 생겼다. 7개의 주요 지점들은 학생들을 위한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구체적인 것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의 지점에서는 30여명의 학사에게 매일 15~20달러를 제공한다. 보통 2주나 8~10주간의 교육이 가능하다. 게다가 지점들에서는 세인트 루이스, 시드니, 인도, 루벤에 네개의 지원 센터가 있다. 2000년도에 이르러서는 존과 프리실라 샌드리가 스위스에 남았다. 로날드와 수잔 머큐리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종종 그레이트햄을 방문한다. 우도와 데비는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우도는 뉴욕의 킹스 대학의 종교학부 교수이다. 그는 또한 쉐퍼의 작품들의 “충격 확대”를 위한 쉐퍼 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의 이사로서 그는 러시아에의 교육을 돕는데도 관여했다.
2000년도 까지 이디스는 로체스터에 남아있었다. 그녀는 86세의 여성 리더로 살았다. 그녀에게는 4명의 결혼한 자녀와 15명의 손주들이 있었다. 그녀의 증손주들은 이미 손주들의 수를 넘어선다. 그녀는 아직도 강건하다. 그녀는 머리속에 아직도 출간하려고 하는 많은 책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그녀는 중국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기록했다. 그녀는 “메이 푸: 중국에서의 기억들”이라는 제목의 어린이 책을 썼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가족 편지는 쓰지 않았다. 대신 LEV(히브리 어로 마음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2년에 한번 출간되는 연보로 대체되었다.
새천년, 프랜의 입지는 복음주의적 영화로 남아있다. 게다가 언약 신학 대학교에서는 쉐퍼의 방법으로 냉소적, 세속적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많은 프랜의 책들이 여전히 출간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그의 사상의 흠을 잡기도 한다. 프랜의 논쟁이 그들의 논리를 실제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판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프랜은 경멸한다. 1999년에 이디스는 CBN의 TV 프로그램 700 클럽에서 프랜의 주요한 업적을 설명했다.
기독교는 기본적인 질문에 지적인 대답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당신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당신의 지성을 문에 걸어두듯 건성의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만 하는 논리적인 대답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프랜은 그의 성경적 세계관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그는 선한싸움을 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가 주장하는 동안 그는 신학자도 아니고 변증자도 아니었으며 순수하고 단순한 복음주의자였다. 그러나 프랜의 세계관과 그의 근거들은 2000년도 까지 남아있다. 영아살해, 안락사, 낙태의 수용은 선악을 분별 못하는 사회에서 득세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계속해서 진리를 찾는 잘못된 방법인 상대주의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프랜은 구도자들에게 진리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말한다. 그리고 왜 기독교 인지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프랜은 여러 번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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