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5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5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129
프랜과 이디스는 성 마리아 병원에서 마요 클리닉의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로체스터, 미네소타로 향했다. 그리고 거의 일주일 만에 다시 그의 빡빡한 일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병에 대한 걱정은 그의 갑상선 비대로 커져갔다. 어느 날 아침엔 이디스가 그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프랜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내분비 제거 수술이 치명적이었던 것 같소. 림프 시스템에도 영향을 준 것 같소.”
치명적! 암! 이디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프랜은 침착하게 그의 자녀들에게 전화를 걸고나서 CT 촬영을 하고 골수 검사를 받았다. 데비와 프랭키는 곧 스위스에서 건너왔다. 데비는 시편 71편의 말씀을 의지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주님은 어릴 때부터 나를 가르치셨기에, 주님께서 보여 주신 그 놀라운 일들을 내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늙어서, 머리카락에 희끗희끗 인생의 서리가 내렸어도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팔을 펴서 나타내 보이신 그 능력을 오고오는 세대에 전하렵니다.
하나님, 주님의 의로우심이 저 하늘 높은 곳까지 미칩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그 어느 누구를 주님과 견주어 보겠습니까?
주님께서 비록 많은 재난과 불행을 나에게 내리셨으나, 주님께서는 나를 다시 살려 주시며, 땅 깊은 곳에서, 나를 다시 이끌어내어 주실 줄 믿습니다.
(시편 71편 17~20절)
구약 시대 사람들은 죽고 나면 또 다른 삶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당신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디스는 기도했다.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진실되게 하시고, 우리의 바람이 당신의 뜻 가운데서 이뤄지게 해 주소서. 그리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공격을 넉넉히 이기게 하소서. 주여, 우리로 하늘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이제 당신의 영광을 보일 때 입니다. 우리로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프랜의 검사 결과는 좋지 만은 않았다. 66세의 프랜이 임파종이라니! 창자 뒤의 림프관이 부어서 축구공 만해졌다. 또 림프관과 뼈 여러 곳에 암이 전이되어 있었다. 집중적이 치료가 필요했다. 21일 주기로 6개월간의 화학 요법, 16일 간의 회복기 후에는 5일 동안 화학치료를 받았다.
“스위스로는 가지도 못하겠군.” 어떤 이들은 그렇게 불평했다.
친구들의 재정적 도움 덕분에 이디스는 3층짜리 건물을 얻었다. 그의 자녀들이 수시로 그 집을 방문했다. 프랜은 그의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미 첫번째 화학 치료를 받았다. 화학 치료는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덜 힘들었다. 그는 단지 약할 뿐이었다. 남은 16일 동안은 복부 통증과 피로에 시달렸다.
이디스는 프랜을 위해 건강 식이요법을 제공했다. 그들은 둘 다 고전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디스는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 마쉬 등이 쓴 작품을 큰 소리로 읽었다. 때때로 그녀는 어렸을 적 읽던 “팬로드와 샘” 같은 작품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없었다. 편지들, 전화 그리고 전보들은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첫 주기가 끝날 무렵, 페팃 박사는 프랜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의 내분비선과 혈액은 이전보다 정상적이었고, 조직 덩어리도 줄어들고 있었다. 두번째 주기가 끝났을 때는 더 많이 회복되었다. 쉐퍼 가족들은 이제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희망을 품었다. 프랜과 이디스는 로체스터에서 복음 전도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종종 프랜은 그의 영화를 상영한 이후에 설교를 했다. 한번에 600여명이 오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믿기지 않게도 그들은 1979년 3월에 로체스터를 떠날 수 있었다.
의사는 더 이상 임파종이 없다고 했다. “당신이 어떤 상태였는지 모르고 이 CT 촬영 결과를 봤다면 난 그저 건강한 사람의 사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오.” 의사가 말했다.
이제는 정기적인 건강 검진만 받으면 된다. 프랜은 인터뷰에서 그가 회복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남보다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믿음이 강한 사람들 중에는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프랜은 곧 그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곧 그는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에 대한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영화와 책을 영국, 스웨덴, 호주, 그리고 미국의 12개 도시에 전하기 시작했다.
메사추세츠에서는 프랜에게 대상 포진(어릴 때 몸에 남아 있던 수두균에 의한 수포성 피부질환)이 발병했다. 대상포진은 피부에 물집이 생기는 바이러스성 질병이었다. 대상포진은 면역체계가 약한 사람에게 주로 발병한다. 이디스는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에 대한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나오는 프랜의 강력한 메시지 때문에 사탄이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상포진에 걸렸음에도 프랜은 일에 정진했다. 첫 10개 도시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프랜과 이디스는 미국에 죽음의 문화 확산을 경고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대해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프랜이 말했다. “우리가 이 일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이 세미나는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중요하오. 뼈 속까지 열정으로 가득찬 것 같소.”
그러나 20개 도시에서의 일정을 마친 그는 비관주의자가 된 것 같았다. 그 세미나에 대한 반대 운동이 더 거세지고 있었다. 참석자도 줄어들고 있었다. 이미 늦은 것이었을까? 무리한 일정의 결과는 프랜의 컨디션으로 나타났다. 1979년 8월, 건강진단을 받은 프랜은 목에 림프 노드가 다시 확대 되었다는 결과를 받았다. 그는 다시 화학 치료를 받아야 했다. 프랜은 이디스에게 자기 대신 영국 캠브리지 대학 강의를 하라고 부탁했다. 12월에 그녀가 돌아왔을 때 프랜의 건강은 더 악화되어 있었다. 화학 치료가 더 강화되었다.
프랜이 햄프던 시드니 캠퍼스에 신입생으로 발을 디딘지 정확시 49년이 되는 1980년 5월 30일에 햄프던 시드니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그의 일평생이 한 줄로 요약되는 것처럼 보였다. 크로스웨이 출판사를 위해 그는 그리스도인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요약한 “그리스도인 선언”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삶에 아무런 목적을 부여하지 않는 미국에서 우세해진 인본주의가 마틴 마티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에 의해 옹호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역설했다.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라는 요한계시록 3장의 말씀은 프랜의 나팔소리였다.
프랜은 20권의 책을 저술했다. 몇몇은 초점을 잃었다. 크로스웨이 출판사는 그의 저서를 5권으로 출간하기로 했다. 프랜의 모든 저서는 “거기 계시는 하나님”, “이성에서의 도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세 권에 기초하고 있다. “이 세 권의 책이 다른 책들에 대해 바퀴의 축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라고 프랜은 말했다. 모든 책이 다시 편집되었다. 프랜은 인생의 모든 부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이 그의 모든 저서의 일관된 주제라고 말했다. 인용구절들도 일부 수정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요청 때문에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는 “변증학에 대한 질문”이라는 제목의 부록이 추가되었다. 출간되기로 한 해는 1982년이었다. 시리즈의 제목은 “프란시스 A. 쉐퍼의 역작 :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이라고 붙여졌다. 프랜의 일생이 2천 페이지 분량에 100만 단어로 쓰여졌다.
이디스도 또한 책 출 출간으로 바빴다. 그녀는 다작 작가였다. “가족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맑은 날, 타는 듯한 오후, 또는 한 시간 정도의 시간, 심지어 5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도 중요한 보물을 찾을 수 있다. 폭풍이 몰아쳐서 흐려지기 전에 우리 기억에 울타리를 쳐둘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랬다. 1981년에 “가족 편지”에서 이디스는 왜 그녀가 몇 달동안 출간을 못했는지 이야기 하고 있다.
나는 월드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이었던 600 페이지 정도 되는 “융단”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있었다. 프랜과 나 그리고 우리의 삶과 일에 대한 전기문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싸우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삶과 어떤 순간에 알게 된,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중요한 선택을 만들어 준 하나님의 계획이 조화된 역사로 된 글을 쓰면 왜 안되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고 우리의 본이 되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며 그 분만이 각 사람의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를 아신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성급하지 않게 일을 행하시며 불안함을 없이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할 수 있을텐데… 역사에는 의미가 있고, 패턴이 계속 되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사실도 …
지금까지 이디스는 많은 책을 써왔다. 프랜은 저서 활동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일이었다고 말했다. 주요 저서는 “라브리”와 “융단”이었다. 그러나 이디스에게 많은 것들이 남아있었다. 그녀의 “가족 편지” 역시 쉐퍼 가족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혹자는 그 편지이 진가를 높이기 위해 이디스가 1947년 이래로 매년 5만개의 단어를 편지를 편집하는데 썼다고 말하기도 한다. 1982년 말까지 그녀의 단어들은 거의 2백만개나 되었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는 조금 기다려야 했는데 프랜이 암과 싸우는 동안 이디스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C. 에버렛 쿱 박사는 낙태, 영아 살해, 안락사에 반대하는 연설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라고 프랜이 1982년 2월에 이야기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쿱 박사를 미 공중 위생국장으로 지명했다. 낙태 반대를 원치 않았던 민주당은 그가 가격이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로 그의 인사를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의사로서 쿱의 자격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의 인사는 승인되었고 낙태 반대를 멈추지 않았다. 1983년 여름, 아틀란타와 런던에서 집회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프랜은 아틀란타에서 낙태 시술에서는 죽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 죽은 14명의 아이들을 위한 추도식을 진행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비극의 희생자들은 결국 그들의 죽음으로 그들도 인간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프랜은 비통하게 말했다.
1983년 추수감사절에 휴모즈로 돌아온 프랜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평상시처럼 벨의 조류용 양념, 소금, 후추, 버터, 부스러진 빵가루, 샐러리, 얇게 썬 양파, 껍질 벗긴 아몬드를 곁들인 감사절 칠면조를 준비하는 이디스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요리 가운데에 풍요를 상징하는 뿔(양파, 포도, 당근, 딸기, 순무, 나뭇가지, 땅콩을 가지고 )을 만들었다. 보라색과 색바랜 붉은 색의 양초도 장식했다. 프랜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칠면조 요리, 드레싱, 크랜베리 소스, 롤빵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먹기는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그가 매우 아팠던게 분명하다…” 나중에 이디스는 그렇게 기억했다.
프랜은 열병과 치통을 번갈아 가며 겪어야 했다. 6일 후에 그의 주치의는 그를 에이글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곳에서 쉐퍼의 가족들은 그가 즉시 전문가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친구의 도움으로 프랜은 로체서터의 마요 클리닉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라는 제목의 책을 마무리 하고자 했다. 결국에는 4권까지 쓰게 되었다. 그 책은 복음주의 교회의 화해의 결과로 인한 폐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인본주의와 무신론의 맹공격에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러나 1900년 초에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정확성이라는 복음주의의 위대함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머첸이 장로교에서 성직을 박탈당한 1936년까지 인본주의의 승리는 거의 확실시 되는 듯 보였다.
프랜의 책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는 군중을 깨우려는 또 다른 시도였따.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로체스터에서 프랜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프랜의 임파종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출혈도 있었고 결장의 반을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수술후에 그는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디스에게 로체스터에 집을 구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라브리 사역을 병원 근처에서 해야 했다. 그는 바다를 건널 때 마다 병이 재발했따. 1984년 1월 30일 프랜이 72일간의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디스는 짐을 싸기 위해 스위스로 날아갔다. 물론, 휴모즈에 있는 그 별장은 라브리 소유로 남겨 두었다. 짐을 다 싼 후, 이디스는 35년간 머물렀던 스위스를 떠났다. 그녀는 프랜이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를 병원에서 출간한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게다가 컨퍼런스에도 참석한다고 했다.
“책을 홍보하기 위해서요.” 프랜이 말했다.
그러나 컨퍼런스를 마치고 로체스터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병원으로 갔다. 부활절까지 이디스는 자녀들을 불러들였다. 프랜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알았다. 그는 침착하게 이디스에게 그가 죽은 후 로체스터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네”라고 대답했을 때, 그는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요구는 그들의 새 집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그들은 5월 5일 병원을 떠나 집으로 병원 장비를 가지고 왔다. 그는 정원을 볼 수 있었다. 나무에 싹이 나기 시작했다. 다람쥐와 새들이 그곳에서 뛰어 다녔다. 프랜은 기뻤다. 이디스는 항상 그가 좋아하는 음악(슈베르트, 바하, 베토벤, 쇼팽 같은)을 틀어놓았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날 이디스와 그의 자녀들은 그의 주위에 모였다.
5월 13일 주일 아침, 프랜은 막시즘에 대항하는 제임스 키드니의 설교를 TV로 보았다. 그는 기뻤다.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계속해, 계속해..더 강력하게..”
프랜은 점점 약해졌다. 그는 기도했다. “아버지 하나님,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마쳤습니다. 나를 당신의 집으로 이끄소서. 나는 지쳤습니다.” 5월 15일 자정이 조금 지나서, 이디스와 다른 이들은 프랜에게 “매일의 빛”을 읽어주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프랜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다가왔다. 그 첫 말씀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 말씀이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많은 책들의 인용문들이 성경에서 나온다. 모두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겼음을 증거한다. 1984년 5월 15일 새벽 4시에 프란시스 A. 쉐퍼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디스는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프랜과 그녀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녀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프랜의 피곤한 얼굴이 환하게 변하는 것을 보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말씀이 그것을 증거한다.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고린도후서 5장 8절)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129
프랜과 이디스는 성 마리아 병원에서 마요 클리닉의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로체스터, 미네소타로 향했다. 그리고 거의 일주일 만에 다시 그의 빡빡한 일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병에 대한 걱정은 그의 갑상선 비대로 커져갔다. 어느 날 아침엔 이디스가 그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프랜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내분비 제거 수술이 치명적이었던 것 같소. 림프 시스템에도 영향을 준 것 같소.”
치명적! 암! 이디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프랜은 침착하게 그의 자녀들에게 전화를 걸고나서 CT 촬영을 하고 골수 검사를 받았다. 데비와 프랭키는 곧 스위스에서 건너왔다. 데비는 시편 71편의 말씀을 의지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주님은 어릴 때부터 나를 가르치셨기에, 주님께서 보여 주신 그 놀라운 일들을 내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늙어서, 머리카락에 희끗희끗 인생의 서리가 내렸어도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팔을 펴서 나타내 보이신 그 능력을 오고오는 세대에 전하렵니다.
하나님, 주님의 의로우심이 저 하늘 높은 곳까지 미칩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그 어느 누구를 주님과 견주어 보겠습니까?
주님께서 비록 많은 재난과 불행을 나에게 내리셨으나, 주님께서는 나를 다시 살려 주시며, 땅 깊은 곳에서, 나를 다시 이끌어내어 주실 줄 믿습니다.
(시편 71편 17~20절)
구약 시대 사람들은 죽고 나면 또 다른 삶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당신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디스는 기도했다.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진실되게 하시고, 우리의 바람이 당신의 뜻 가운데서 이뤄지게 해 주소서. 그리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공격을 넉넉히 이기게 하소서. 주여, 우리로 하늘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이제 당신의 영광을 보일 때 입니다. 우리로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프랜의 검사 결과는 좋지 만은 않았다. 66세의 프랜이 임파종이라니! 창자 뒤의 림프관이 부어서 축구공 만해졌다. 또 림프관과 뼈 여러 곳에 암이 전이되어 있었다. 집중적이 치료가 필요했다. 21일 주기로 6개월간의 화학 요법, 16일 간의 회복기 후에는 5일 동안 화학치료를 받았다.
“스위스로는 가지도 못하겠군.” 어떤 이들은 그렇게 불평했다.
친구들의 재정적 도움 덕분에 이디스는 3층짜리 건물을 얻었다. 그의 자녀들이 수시로 그 집을 방문했다. 프랜은 그의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미 첫번째 화학 치료를 받았다. 화학 치료는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덜 힘들었다. 그는 단지 약할 뿐이었다. 남은 16일 동안은 복부 통증과 피로에 시달렸다.
이디스는 프랜을 위해 건강 식이요법을 제공했다. 그들은 둘 다 고전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디스는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 마쉬 등이 쓴 작품을 큰 소리로 읽었다. 때때로 그녀는 어렸을 적 읽던 “팬로드와 샘” 같은 작품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없었다. 편지들, 전화 그리고 전보들은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첫 주기가 끝날 무렵, 페팃 박사는 프랜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의 내분비선과 혈액은 이전보다 정상적이었고, 조직 덩어리도 줄어들고 있었다. 두번째 주기가 끝났을 때는 더 많이 회복되었다. 쉐퍼 가족들은 이제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희망을 품었다. 프랜과 이디스는 로체스터에서 복음 전도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종종 프랜은 그의 영화를 상영한 이후에 설교를 했다. 한번에 600여명이 오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믿기지 않게도 그들은 1979년 3월에 로체스터를 떠날 수 있었다.
의사는 더 이상 임파종이 없다고 했다. “당신이 어떤 상태였는지 모르고 이 CT 촬영 결과를 봤다면 난 그저 건강한 사람의 사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오.” 의사가 말했다.
이제는 정기적인 건강 검진만 받으면 된다. 프랜은 인터뷰에서 그가 회복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남보다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믿음이 강한 사람들 중에는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프랜은 곧 그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곧 그는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에 대한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영화와 책을 영국, 스웨덴, 호주, 그리고 미국의 12개 도시에 전하기 시작했다.
메사추세츠에서는 프랜에게 대상 포진(어릴 때 몸에 남아 있던 수두균에 의한 수포성 피부질환)이 발병했다. 대상포진은 피부에 물집이 생기는 바이러스성 질병이었다. 대상포진은 면역체계가 약한 사람에게 주로 발병한다. 이디스는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에 대한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나오는 프랜의 강력한 메시지 때문에 사탄이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상포진에 걸렸음에도 프랜은 일에 정진했다. 첫 10개 도시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프랜과 이디스는 미국에 죽음의 문화 확산을 경고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대해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프랜이 말했다. “우리가 이 일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이 세미나는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중요하오. 뼈 속까지 열정으로 가득찬 것 같소.”
그러나 20개 도시에서의 일정을 마친 그는 비관주의자가 된 것 같았다. 그 세미나에 대한 반대 운동이 더 거세지고 있었다. 참석자도 줄어들고 있었다. 이미 늦은 것이었을까? 무리한 일정의 결과는 프랜의 컨디션으로 나타났다. 1979년 8월, 건강진단을 받은 프랜은 목에 림프 노드가 다시 확대 되었다는 결과를 받았다. 그는 다시 화학 치료를 받아야 했다. 프랜은 이디스에게 자기 대신 영국 캠브리지 대학 강의를 하라고 부탁했다. 12월에 그녀가 돌아왔을 때 프랜의 건강은 더 악화되어 있었다. 화학 치료가 더 강화되었다.
프랜이 햄프던 시드니 캠퍼스에 신입생으로 발을 디딘지 정확시 49년이 되는 1980년 5월 30일에 햄프던 시드니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그의 일평생이 한 줄로 요약되는 것처럼 보였다. 크로스웨이 출판사를 위해 그는 그리스도인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요약한 “그리스도인 선언”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삶에 아무런 목적을 부여하지 않는 미국에서 우세해진 인본주의가 마틴 마티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에 의해 옹호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역설했다.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라는 요한계시록 3장의 말씀은 프랜의 나팔소리였다.
프랜은 20권의 책을 저술했다. 몇몇은 초점을 잃었다. 크로스웨이 출판사는 그의 저서를 5권으로 출간하기로 했다. 프랜의 모든 저서는 “거기 계시는 하나님”, “이성에서의 도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세 권에 기초하고 있다. “이 세 권의 책이 다른 책들에 대해 바퀴의 축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라고 프랜은 말했다. 모든 책이 다시 편집되었다. 프랜은 인생의 모든 부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이 그의 모든 저서의 일관된 주제라고 말했다. 인용구절들도 일부 수정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요청 때문에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는 “변증학에 대한 질문”이라는 제목의 부록이 추가되었다. 출간되기로 한 해는 1982년이었다. 시리즈의 제목은 “프란시스 A. 쉐퍼의 역작 :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이라고 붙여졌다. 프랜의 일생이 2천 페이지 분량에 100만 단어로 쓰여졌다.
이디스도 또한 책 출 출간으로 바빴다. 그녀는 다작 작가였다. “가족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맑은 날, 타는 듯한 오후, 또는 한 시간 정도의 시간, 심지어 5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도 중요한 보물을 찾을 수 있다. 폭풍이 몰아쳐서 흐려지기 전에 우리 기억에 울타리를 쳐둘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랬다. 1981년에 “가족 편지”에서 이디스는 왜 그녀가 몇 달동안 출간을 못했는지 이야기 하고 있다.
나는 월드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이었던 600 페이지 정도 되는 “융단”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있었다. 프랜과 나 그리고 우리의 삶과 일에 대한 전기문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싸우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삶과 어떤 순간에 알게 된,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중요한 선택을 만들어 준 하나님의 계획이 조화된 역사로 된 글을 쓰면 왜 안되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고 우리의 본이 되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며 그 분만이 각 사람의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를 아신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성급하지 않게 일을 행하시며 불안함을 없이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할 수 있을텐데… 역사에는 의미가 있고, 패턴이 계속 되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사실도 …
지금까지 이디스는 많은 책을 써왔다. 프랜은 저서 활동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일이었다고 말했다. 주요 저서는 “라브리”와 “융단”이었다. 그러나 이디스에게 많은 것들이 남아있었다. 그녀의 “가족 편지” 역시 쉐퍼 가족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혹자는 그 편지이 진가를 높이기 위해 이디스가 1947년 이래로 매년 5만개의 단어를 편지를 편집하는데 썼다고 말하기도 한다. 1982년 말까지 그녀의 단어들은 거의 2백만개나 되었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는 조금 기다려야 했는데 프랜이 암과 싸우는 동안 이디스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C. 에버렛 쿱 박사는 낙태, 영아 살해, 안락사에 반대하는 연설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라고 프랜이 1982년 2월에 이야기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쿱 박사를 미 공중 위생국장으로 지명했다. 낙태 반대를 원치 않았던 민주당은 그가 가격이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로 그의 인사를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의사로서 쿱의 자격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의 인사는 승인되었고 낙태 반대를 멈추지 않았다. 1983년 여름, 아틀란타와 런던에서 집회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프랜은 아틀란타에서 낙태 시술에서는 죽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 죽은 14명의 아이들을 위한 추도식을 진행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비극의 희생자들은 결국 그들의 죽음으로 그들도 인간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프랜은 비통하게 말했다.
1983년 추수감사절에 휴모즈로 돌아온 프랜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평상시처럼 벨의 조류용 양념, 소금, 후추, 버터, 부스러진 빵가루, 샐러리, 얇게 썬 양파, 껍질 벗긴 아몬드를 곁들인 감사절 칠면조를 준비하는 이디스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요리 가운데에 풍요를 상징하는 뿔(양파, 포도, 당근, 딸기, 순무, 나뭇가지, 땅콩을 가지고 )을 만들었다. 보라색과 색바랜 붉은 색의 양초도 장식했다. 프랜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칠면조 요리, 드레싱, 크랜베리 소스, 롤빵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먹기는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그가 매우 아팠던게 분명하다…” 나중에 이디스는 그렇게 기억했다.
프랜은 열병과 치통을 번갈아 가며 겪어야 했다. 6일 후에 그의 주치의는 그를 에이글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곳에서 쉐퍼의 가족들은 그가 즉시 전문가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친구의 도움으로 프랜은 로체서터의 마요 클리닉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라는 제목의 책을 마무리 하고자 했다. 결국에는 4권까지 쓰게 되었다. 그 책은 복음주의 교회의 화해의 결과로 인한 폐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인본주의와 무신론의 맹공격에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러나 1900년 초에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정확성이라는 복음주의의 위대함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머첸이 장로교에서 성직을 박탈당한 1936년까지 인본주의의 승리는 거의 확실시 되는 듯 보였다.
프랜의 책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는 군중을 깨우려는 또 다른 시도였따.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로체스터에서 프랜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프랜의 임파종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출혈도 있었고 결장의 반을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수술후에 그는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디스에게 로체스터에 집을 구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라브리 사역을 병원 근처에서 해야 했다. 그는 바다를 건널 때 마다 병이 재발했따. 1984년 1월 30일 프랜이 72일간의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디스는 짐을 싸기 위해 스위스로 날아갔다. 물론, 휴모즈에 있는 그 별장은 라브리 소유로 남겨 두었다. 짐을 다 싼 후, 이디스는 35년간 머물렀던 스위스를 떠났다. 그녀는 프랜이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를 병원에서 출간한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게다가 컨퍼런스에도 참석한다고 했다.
“책을 홍보하기 위해서요.” 프랜이 말했다.
그러나 컨퍼런스를 마치고 로체스터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병원으로 갔다. 부활절까지 이디스는 자녀들을 불러들였다. 프랜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알았다. 그는 침착하게 이디스에게 그가 죽은 후 로체스터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네”라고 대답했을 때, 그는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요구는 그들의 새 집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그들은 5월 5일 병원을 떠나 집으로 병원 장비를 가지고 왔다. 그는 정원을 볼 수 있었다. 나무에 싹이 나기 시작했다. 다람쥐와 새들이 그곳에서 뛰어 다녔다. 프랜은 기뻤다. 이디스는 항상 그가 좋아하는 음악(슈베르트, 바하, 베토벤, 쇼팽 같은)을 틀어놓았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날 이디스와 그의 자녀들은 그의 주위에 모였다.
5월 13일 주일 아침, 프랜은 막시즘에 대항하는 제임스 키드니의 설교를 TV로 보았다. 그는 기뻤다.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계속해, 계속해..더 강력하게..”
프랜은 점점 약해졌다. 그는 기도했다. “아버지 하나님,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마쳤습니다. 나를 당신의 집으로 이끄소서. 나는 지쳤습니다.” 5월 15일 자정이 조금 지나서, 이디스와 다른 이들은 프랜에게 “매일의 빛”을 읽어주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프랜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다가왔다. 그 첫 말씀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 말씀이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많은 책들의 인용문들이 성경에서 나온다. 모두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겼음을 증거한다. 1984년 5월 15일 새벽 4시에 프란시스 A. 쉐퍼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디스는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프랜과 그녀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녀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프랜의 피곤한 얼굴이 환하게 변하는 것을 보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말씀이 그것을 증거한다.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고린도후서 5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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