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4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4
자료출처http://cafe.daum.net/CPI2002/5m8A/128
무엇보다도 먼저 프랜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라고 지적했다.
그의 설명으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도들 만이 인격적인 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현대의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격적인 하나님 보다도 존재의 근거 정도로 결론짓는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힌두교와 기독교를 혼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다음으로 프랜은 기독교는 진실
: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진실이다. 구약은 일어날 일을 예언했고, 신약은 그 일이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프랜은 그렇게 기록했다. 성경을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떻게 기독교를 증거할 수 있을까? C.S 루이스도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그와 같은 언급을 했다. 그는 근본적 변증학이 제한적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하곤 했지만 선전제(presuppositional)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특히 방법론에 대해 말다툼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것은 그가 선전제와 증명 방법을 혼합해서 사용한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증명(Verification)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는 선전제에서 시작했는지, 가정에서 시작했는지 자주 질문을 받았다.
“그런 논쟁으로 시간낭비 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선 제 이야길 들어주세요.”
먼저 프랜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왜 우주가 생겨났고, 질서가 유지 될까? 왜 인류는 독특할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프랜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대답이 있다고 답변했다. : 세상이 무에서 나왔던지, 비 인격적인 근원에서 나왔던지 아니면 인격적인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이 무에서 나왔다고 하는 주장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1장 20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프랜에게도 엉터리 처럼 들렸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세상이 무에서 나왔다고 여길수 있을까? 우주가 비 인격에서 나왔다고 하는 두번째 가설은 자유주의 신학자, 범신론자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프랜은 이 가설에 대해서 비 인격에서 인격이 나올 수 없다는 것으로 반박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격이라는 것은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되받아 치기도 한다. 프랜은 어떤 사람도 그런 가정을 가지고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인격적인 근원은 인격 뿐만 아니라 목적과 방향도 부여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두번째로 프랜은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한 인간의 양성성(mannishness)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인간은 독특하다. 그들은 참 다양하고 사랑, 윤리, 합리, 예술 그리고 잔인함도 갖추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전체가 다 조화될 수 없는 듯이 보이고 그들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프랜은 인간이 본래 선하다는 인본주의자들의 주장을 거절한다. 인간이 악하다는 근거는 한번도 강해진 적이 없다. 20세기는 유태인 대학살과 같은 살상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많은 학살이 캄보디아, 러시아의 수용소, 인도, 르완다에서 일어났다. 프랜은 인간의 악한 본성이 인간의 본질까지 추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비인격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선이나 악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가 없다.”고 그는 지적했다.
인격적인 근원은 그러한 대답을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가지 가능성 이상의 것을 남긴다. 아마도 인간은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창조자도 악한 존재가 된다. 다른 가능성은 인간이 처음에는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악을 선택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프랜은 그의 세 저서: “거기 계시는 하나님”, “이성으로부터 도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에서 이 논리를 설명하고 있다. 차갑고 비인격의 우주를 믿는 것은 결국 자살로 이어지게 된다. 그가 나중에 쓴 모든 저서들에서 그는 이 세 권의 책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세권의 저서가 기본이다. 그의 차후의 저서들을 읽는 사람들은 먼저 이 세권의 저서를 읽고 그 논리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프랜은 이 세권의 책을 군더더기 없이 15만개의 단어로만 지필했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그의 논리가 비약적이라고 비난한다. 그의 논리 전개는 윌과 아리엘 듀란트의 잘 알려진 문명의 역사에 있는 용어들의 3 %만으로 되어 있다.
“그들이 결과물이나 결과에 관심을 가졌나요?” 프랜의 옹호자들은 그렇게 말한다.
프랜은 그가 옳다는 확신을 가졌다. 수도원과 종교적 사고가 쇠퇴하는 증거는 특히 1960년대에 급속하게 퍼졌다. TV에 자주 나오는 얄팍한 사상가들은 베트남 전으로 인한 미국의 혼란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 근본 원인은 더 깊은데 있었다. 대중매체는 성경을 헐뜯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막연한 상대주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마약과 섹스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프랜은 더 이상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가 끊임없이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 이디스도 함께 도왔다.
그녀가 원고를 이미 몇 년전에 마쳤는데도 그녀의 라브리 이야기는 1969년에 출간되었다. 이제 그녀는 1948년부터 써온 많은 양의 원고를 어떻게 편집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들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마도 책 한권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상담에 관한 그녀의 재능으로 크리스천 투데이지에 칼럼을 연재했다. 1971년부터 시작하여 2주 마다 연재한 것이다. 가족 전문가들도 그곳에 있었다. 이디스는 쉐퍼의 할머니께서 1971년 돌아가시기까지 6년 동안 보살폈다.
“할머니의 삶은 그렇게 떠나갔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이디스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문체로 그렇게 썼다.
그 후로 프랜은 이디스와 산책을 하며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그는 찬송가가 떠오르면 “종이!, 잉크!”를 외치던 찰스 웨슬리 같았다. 그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그의 저서에 그의 생각들을 정리했다. 게다가 그는 그 전에는 없었던 것을 얻었다. 그는 그의 생각들을 영화 시리즈로 내놓았다. 그의 시리즈는 1969년 인기리에 방영된 기네스 클락의 문명이라는 TV 시리즈에도 방영되었다. 클락은 인본주의자면서 무신론자였다. 클락은 쉐퍼처럼 문화에 대한 연구를 했지만 인간은 매우 훌륭한 존재라고 결론내렸다. 클락은 동양종교에 대한 그의 경이를 나타냈는데 그것은 동양종교가 자연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 공영방송국은 이러한 메시지를 담은 “문명”이라는 시리즈를 전국에 방영했다.
“문명”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프랜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과 철학에 박식한 프랜이 성경적 세계관으로 클락을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리즈의 제목은 킹제임스 성경 에스켈 33장 10절에서 따왔다.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어찌 능히 살리요(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제목을 생각한 사람은 다름아닌 그의 아들 프랭키였다. 프랭키는 이제 막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그와 지니 월쉬는 1970년 여름 올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예술적이고 힘이넘치는 프랭키가 바로 영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10부작으로 미국,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에서 6개월 동안 방영되었다. 그들은 광장, 교회, 박물관 등에서 촬영을 했다. 프랜의 메시지는 철학이나 현대 과학 어떤 것도 그 대답을 해줄 수 없고, 그 답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대답을 해 줄 수 있다.”
그 시리즈는 클락의 시리즈는 아니었지만 의기소침해진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시리즈는 크리스천들도 철학과 예술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들은 더 이상 믿음으로의 도약이나 광적인 믿음에 의지할 수 없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C.S 루이스가 1940년부터 1950년도까지의 저서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은 것이었다. 프랜은 이어 18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만든 시리즈를 내 놓았고, 1976년에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게다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공산주의의 비참한 실패에 대한 보고를 담은 현대 문화의 타락을 이야기 한 것 때문에 심각한 경고를 받기도 했다.
“만약 크리스천들이 그들이 변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만약 그들이 점점 무신론 사회가 되어가는 곳에서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무신론 사회의 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미국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프랜을 볼 때 충격을 받는다. 그는 1948년에 어두운 정장, 타이를 하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깨끗하게 면도를 한 모습으로 유럽으로 갔었다. 그런 그가 이제 긴 스타킹을 신고, 무릎까지 오는 하이킹 슈즈를 신고 풀어진 셔츠 차림으로 다닌다. 그의 풀어진 머리는 귀를 덮는다. 그의 턱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덮여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다시 정장 차림으로 돌아온다. 그는 또한 낙태라는 심각한 사태와 직면하게 되었다. 1973년에 대법원은 로우 대 웨이드 사건에서 임신 6개월 이전의 여성은 낙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규정했다. 대량 살상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이를 태아(fetus)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미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임신 중절 합법화를 지지했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pro-life라고 불렀지만 언론을 포함한 낙태 찬성자들은 그들을 anti-abortionists라고 불렀다. 프랜의 허위적인 말들에 넘어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 심각한 사태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한탄했다.
1977년은 쉐퍼에게는 끔찍한 해였다. 프랜과 이디스와 매우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이 죽었다. 한스 룩매커는 56세 밖에 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 그는 너무 젊잖아. 그리고 그가 얼마나 강건했는데… 그는 내가 12살 때부터 마치 젊은 예술가처럼 나를 도와주었는데…”
그리고 이디스의 아버지 조지 세빌랴가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디스는 미국으로 돌아와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은 그녀를 매우 힘들게 했다. 그리고 이디스는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못한 것에 마음아파했다. 또 쉐퍼 부부는 휴모즈의 교회가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모든 것이 재가 되었다. 다시 건물을 세우는데 2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치 사단이 우리의 사역을 멈추게 하는 것 같았다”고 이디스는 말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녀는 같은 해에 “고통”이라는 책을 썼다. 1977년에 쉐퍼 부부의 오랜 친구인 C. 엘퍼트 쿱이 라브리에서 강연을 했다. 쿱은 어린이를 위한 의학 잡지를 만들었다. 그는 의학자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쿱은 미국인들이 점점 살생에 대해 무감각해 지는 것을 경고했다. 반대자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것은 나치 성향을 보였지만 미국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쉐퍼 부부와 프랭키는 분노했다.
“우리는 이 위험을 알리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프랜과 쿱 박사는 그보다도 그들의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것은 책으로 출간될 것이었다. 왠만해서는 충격을 받지 않는 프랜도 낙태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태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명중에 한명은 살인자라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아이가 필요없다고 판단되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얼만큼이나 시간이 지나야 낙태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결국 많은 기성세대들은 원하지 않게 낙태주의자가 되었다. 프랜은 쿱 박사와 함께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주제로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그 책은 낙태의 포악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인본주의자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비인본주의적인지와 그 의미에 대해서 서술했다. 그리고 안락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점점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프랜과 쿱 박사는 자신들의 의견을 옹호하려고 애썼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인간은 특별하고 그들의 삶은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인생은 소중하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우리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그렇다. 모든 개인은 남녀노소와 아픈자나 건강한자나, 태어난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자나 인종에 상관 없이 이 권리를 위해 싸울 권한이 있다.
만약 이 20세기 마지막에 크리스천 공동체가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없는 분자들의 집합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각인의 인생에 대한 권리에 대해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면 이 세대 가운데서 위대한 윤리적 시험에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에 대한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만들어졌다. 프랭키는 낙태, 영아 살해, 안락사, 진리 추구에 대한 변증, 그리고 성경 그 자체에 대한 5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50분짜리 영화를 만들었다. 촬영지는 미국, 호수, 스위스, 이탈리아였다. 프랜은 갈릴리 북쪽에서 남쪽까지 촬영했던 이스라엘에서 경외감에 휩싸였다.
“프랭키는 이 다섯번째 에피소드를 촬영하면서 내 생애에서 한번도 할 수 없었던 그런 명쾌한 복음 선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프랜은 감격에 차서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매워 완벽했다. 계속 설교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놀랍게도 프랜의 말들은 마음에 사무치게 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는 영화를 찍는 동안 체중이 줄어 의사의 진료를 받기도 했다. 프랜은 비장 확대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디스는 미국 마요 클리닉에 있는 친구 의사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나서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에 대한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완성되고 6시간 후 1978년 8월에 그들은 이디스가 나중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토끼 굴을 지나가는 것 같은 대단한 8월이었다”라고 쓴 것처럼 변화를 경험했다.
자료출처http://cafe.daum.net/CPI2002/5m8A/128
무엇보다도 먼저 프랜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라고 지적했다.
그의 설명으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도들 만이 인격적인 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현대의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격적인 하나님 보다도 존재의 근거 정도로 결론짓는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힌두교와 기독교를 혼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다음으로 프랜은 기독교는 진실
: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진실이다. 구약은 일어날 일을 예언했고, 신약은 그 일이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프랜은 그렇게 기록했다. 성경을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떻게 기독교를 증거할 수 있을까? C.S 루이스도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그와 같은 언급을 했다. 그는 근본적 변증학이 제한적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하곤 했지만 선전제(presuppositional)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특히 방법론에 대해 말다툼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것은 그가 선전제와 증명 방법을 혼합해서 사용한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증명(Verification)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는 선전제에서 시작했는지, 가정에서 시작했는지 자주 질문을 받았다.
“그런 논쟁으로 시간낭비 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선 제 이야길 들어주세요.”
먼저 프랜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왜 우주가 생겨났고, 질서가 유지 될까? 왜 인류는 독특할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프랜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대답이 있다고 답변했다. : 세상이 무에서 나왔던지, 비 인격적인 근원에서 나왔던지 아니면 인격적인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이 무에서 나왔다고 하는 주장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1장 20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프랜에게도 엉터리 처럼 들렸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세상이 무에서 나왔다고 여길수 있을까? 우주가 비 인격에서 나왔다고 하는 두번째 가설은 자유주의 신학자, 범신론자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프랜은 이 가설에 대해서 비 인격에서 인격이 나올 수 없다는 것으로 반박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격이라는 것은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되받아 치기도 한다. 프랜은 어떤 사람도 그런 가정을 가지고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인격적인 근원은 인격 뿐만 아니라 목적과 방향도 부여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두번째로 프랜은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한 인간의 양성성(mannishness)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인간은 독특하다. 그들은 참 다양하고 사랑, 윤리, 합리, 예술 그리고 잔인함도 갖추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전체가 다 조화될 수 없는 듯이 보이고 그들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프랜은 인간이 본래 선하다는 인본주의자들의 주장을 거절한다. 인간이 악하다는 근거는 한번도 강해진 적이 없다. 20세기는 유태인 대학살과 같은 살상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많은 학살이 캄보디아, 러시아의 수용소, 인도, 르완다에서 일어났다. 프랜은 인간의 악한 본성이 인간의 본질까지 추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비인격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선이나 악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가 없다.”고 그는 지적했다.
인격적인 근원은 그러한 대답을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가지 가능성 이상의 것을 남긴다. 아마도 인간은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창조자도 악한 존재가 된다. 다른 가능성은 인간이 처음에는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악을 선택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프랜은 그의 세 저서: “거기 계시는 하나님”, “이성으로부터 도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에서 이 논리를 설명하고 있다. 차갑고 비인격의 우주를 믿는 것은 결국 자살로 이어지게 된다. 그가 나중에 쓴 모든 저서들에서 그는 이 세 권의 책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세권의 저서가 기본이다. 그의 차후의 저서들을 읽는 사람들은 먼저 이 세권의 저서를 읽고 그 논리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프랜은 이 세권의 책을 군더더기 없이 15만개의 단어로만 지필했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그의 논리가 비약적이라고 비난한다. 그의 논리 전개는 윌과 아리엘 듀란트의 잘 알려진 문명의 역사에 있는 용어들의 3 %만으로 되어 있다.
“그들이 결과물이나 결과에 관심을 가졌나요?” 프랜의 옹호자들은 그렇게 말한다.
프랜은 그가 옳다는 확신을 가졌다. 수도원과 종교적 사고가 쇠퇴하는 증거는 특히 1960년대에 급속하게 퍼졌다. TV에 자주 나오는 얄팍한 사상가들은 베트남 전으로 인한 미국의 혼란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 근본 원인은 더 깊은데 있었다. 대중매체는 성경을 헐뜯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막연한 상대주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마약과 섹스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프랜은 더 이상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가 끊임없이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 이디스도 함께 도왔다.
그녀가 원고를 이미 몇 년전에 마쳤는데도 그녀의 라브리 이야기는 1969년에 출간되었다. 이제 그녀는 1948년부터 써온 많은 양의 원고를 어떻게 편집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들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마도 책 한권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상담에 관한 그녀의 재능으로 크리스천 투데이지에 칼럼을 연재했다. 1971년부터 시작하여 2주 마다 연재한 것이다. 가족 전문가들도 그곳에 있었다. 이디스는 쉐퍼의 할머니께서 1971년 돌아가시기까지 6년 동안 보살폈다.
“할머니의 삶은 그렇게 떠나갔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이디스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문체로 그렇게 썼다.
그 후로 프랜은 이디스와 산책을 하며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그는 찬송가가 떠오르면 “종이!, 잉크!”를 외치던 찰스 웨슬리 같았다. 그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그의 저서에 그의 생각들을 정리했다. 게다가 그는 그 전에는 없었던 것을 얻었다. 그는 그의 생각들을 영화 시리즈로 내놓았다. 그의 시리즈는 1969년 인기리에 방영된 기네스 클락의 문명이라는 TV 시리즈에도 방영되었다. 클락은 인본주의자면서 무신론자였다. 클락은 쉐퍼처럼 문화에 대한 연구를 했지만 인간은 매우 훌륭한 존재라고 결론내렸다. 클락은 동양종교에 대한 그의 경이를 나타냈는데 그것은 동양종교가 자연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 공영방송국은 이러한 메시지를 담은 “문명”이라는 시리즈를 전국에 방영했다.
“문명”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프랜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과 철학에 박식한 프랜이 성경적 세계관으로 클락을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리즈의 제목은 킹제임스 성경 에스켈 33장 10절에서 따왔다.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어찌 능히 살리요(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제목을 생각한 사람은 다름아닌 그의 아들 프랭키였다. 프랭키는 이제 막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그와 지니 월쉬는 1970년 여름 올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예술적이고 힘이넘치는 프랭키가 바로 영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10부작으로 미국,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에서 6개월 동안 방영되었다. 그들은 광장, 교회, 박물관 등에서 촬영을 했다. 프랜의 메시지는 철학이나 현대 과학 어떤 것도 그 대답을 해줄 수 없고, 그 답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대답을 해 줄 수 있다.”
그 시리즈는 클락의 시리즈는 아니었지만 의기소침해진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시리즈는 크리스천들도 철학과 예술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들은 더 이상 믿음으로의 도약이나 광적인 믿음에 의지할 수 없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C.S 루이스가 1940년부터 1950년도까지의 저서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은 것이었다. 프랜은 이어 18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만든 시리즈를 내 놓았고, 1976년에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게다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공산주의의 비참한 실패에 대한 보고를 담은 현대 문화의 타락을 이야기 한 것 때문에 심각한 경고를 받기도 했다.
“만약 크리스천들이 그들이 변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만약 그들이 점점 무신론 사회가 되어가는 곳에서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무신론 사회의 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미국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프랜을 볼 때 충격을 받는다. 그는 1948년에 어두운 정장, 타이를 하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깨끗하게 면도를 한 모습으로 유럽으로 갔었다. 그런 그가 이제 긴 스타킹을 신고, 무릎까지 오는 하이킹 슈즈를 신고 풀어진 셔츠 차림으로 다닌다. 그의 풀어진 머리는 귀를 덮는다. 그의 턱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덮여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다시 정장 차림으로 돌아온다. 그는 또한 낙태라는 심각한 사태와 직면하게 되었다. 1973년에 대법원은 로우 대 웨이드 사건에서 임신 6개월 이전의 여성은 낙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규정했다. 대량 살상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이를 태아(fetus)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미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임신 중절 합법화를 지지했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pro-life라고 불렀지만 언론을 포함한 낙태 찬성자들은 그들을 anti-abortionists라고 불렀다. 프랜의 허위적인 말들에 넘어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 심각한 사태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한탄했다.
1977년은 쉐퍼에게는 끔찍한 해였다. 프랜과 이디스와 매우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이 죽었다. 한스 룩매커는 56세 밖에 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 그는 너무 젊잖아. 그리고 그가 얼마나 강건했는데… 그는 내가 12살 때부터 마치 젊은 예술가처럼 나를 도와주었는데…”
그리고 이디스의 아버지 조지 세빌랴가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디스는 미국으로 돌아와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은 그녀를 매우 힘들게 했다. 그리고 이디스는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못한 것에 마음아파했다. 또 쉐퍼 부부는 휴모즈의 교회가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모든 것이 재가 되었다. 다시 건물을 세우는데 2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치 사단이 우리의 사역을 멈추게 하는 것 같았다”고 이디스는 말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녀는 같은 해에 “고통”이라는 책을 썼다. 1977년에 쉐퍼 부부의 오랜 친구인 C. 엘퍼트 쿱이 라브리에서 강연을 했다. 쿱은 어린이를 위한 의학 잡지를 만들었다. 그는 의학자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쿱은 미국인들이 점점 살생에 대해 무감각해 지는 것을 경고했다. 반대자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것은 나치 성향을 보였지만 미국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쉐퍼 부부와 프랭키는 분노했다.
“우리는 이 위험을 알리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프랜과 쿱 박사는 그보다도 그들의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것은 책으로 출간될 것이었다. 왠만해서는 충격을 받지 않는 프랜도 낙태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태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명중에 한명은 살인자라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아이가 필요없다고 판단되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얼만큼이나 시간이 지나야 낙태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결국 많은 기성세대들은 원하지 않게 낙태주의자가 되었다. 프랜은 쿱 박사와 함께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주제로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그 책은 낙태의 포악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인본주의자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비인본주의적인지와 그 의미에 대해서 서술했다. 그리고 안락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점점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프랜과 쿱 박사는 자신들의 의견을 옹호하려고 애썼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인간은 특별하고 그들의 삶은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인생은 소중하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우리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그렇다. 모든 개인은 남녀노소와 아픈자나 건강한자나, 태어난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자나 인종에 상관 없이 이 권리를 위해 싸울 권한이 있다.
만약 이 20세기 마지막에 크리스천 공동체가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없는 분자들의 집합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각인의 인생에 대한 권리에 대해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면 이 세대 가운데서 위대한 윤리적 시험에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에 대한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만들어졌다. 프랭키는 낙태, 영아 살해, 안락사, 진리 추구에 대한 변증, 그리고 성경 그 자체에 대한 5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50분짜리 영화를 만들었다. 촬영지는 미국, 호수, 스위스, 이탈리아였다. 프랜은 갈릴리 북쪽에서 남쪽까지 촬영했던 이스라엘에서 경외감에 휩싸였다.
“프랭키는 이 다섯번째 에피소드를 촬영하면서 내 생애에서 한번도 할 수 없었던 그런 명쾌한 복음 선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프랜은 감격에 차서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매워 완벽했다. 계속 설교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놀랍게도 프랜의 말들은 마음에 사무치게 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는 영화를 찍는 동안 체중이 줄어 의사의 진료를 받기도 했다. 프랜은 비장 확대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디스는 미국 마요 클리닉에 있는 친구 의사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나서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에 대한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완성되고 6시간 후 1978년 8월에 그들은 이디스가 나중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토끼 굴을 지나가는 것 같은 대단한 8월이었다”라고 쓴 것처럼 변화를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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