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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3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3
자료출처http://cafe.daum.net/CPI2002/5m8A/118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thirteen
 
이디스는 라브리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처럼 일해야 했고, 프랭키도 돌봐야 했다. 그녀는 프랜에게 그 짐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동의했지만 점점더 방문자들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이디스는 나중에 이렇게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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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트족들, 히피들, 마약 중독자들, 동성연애자들, 그리고 정신분열자들과 이야기 했다. 그는 아프리카인, 이탈리아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남미인, 오스트레일리아인, 뉴질랜드 인, 그리고 유럽인들과 미국인, 캐나다 인들과 이야기 해야 했다. 그는 정치적 색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했다. 그는 의사, 변호사, 과학자, 예술가, 작가, 기술자, 각 분야의 연구가들, 철학가들, 사업가, 기자, 배우, 유명인, 노동자들과 이야기 했다. 그는 두 세대와 이야기 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번에 많은 사람들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답은 주어졌다. 학구적인 연구결과가 아니라, 살아있는 토론을 통해서다. 그는 실제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세심하게 실제적인 답변을 했다. 그는 종종 흥분해서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건 정말 제대로 된 대답이었소. 이디스; 적절했다구 아주. 그건 정말 진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적절했다오.” 그 흥분은 꾸밈이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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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프랜의 흥분은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성공적인 토론 후에는 프랜은 이디스와 불화를 일으킬 때가 많았다. 그는 종종 벽을 치기도 했다.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불이 켜져 있는 것 봐요… 그러나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소수의 몇 사람 빼고는 말이다…우리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는 그의 메시지를 더 많은 청중들에게 전해야 했다. 그가 책을 출간하기 까지 작업들은 매우 멀게만 느껴졌다. 단지 라브리에 있는 손님들에게만 강의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과 연락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래서 이디스는 프랜이 때때로 간단한 여행은 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라브리에서 너무 멀리 떠나는 것에는 불만이 많았다. 그녀는 설교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예민해 졌다. 프랜은 자주 이성을 잃었다. 그의 영적 상태는 퇴보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여행하는 동안에는 늘 에너지가 넘쳤다.
 
그러는 동안 라브리도 성장했다. 1965년에는 예배당을 분리해서 설립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레널드와 수잔은 런던에서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다. 영국 라브리도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휴모즈에서는 자가 소유든 전세이든 Tzi No라 불리게 되었다. Tzi No옆에는 마조트라 불리는 작은 별장이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프리실라와 존 샌드리가 지내게 되었다. 존의 역할은 불어를 가르치고 테잎을 복사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목사이기도 했고 파렐 하우스에서 공부했다. 1964년에 쉐퍼의 셋째 딸이 올랜 교회에서 결혼했다. 데비는 우도 미들맨과 결혼했다. 우도는 스위스와 인접한 독일 뷰템베르그 출신이었다. 우도의 가족들은 도도하게 굴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히틀러가 12년 동안 독일을 통치하는 동안 히틀러를 반대했다. 데비와 우도는 프리실라와 존 샌드리의 길을 따랐다.
“세이트루이스로 가서 우도는 커버넌트 신학교에 갈거야.” 데비가 말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자녀들은 이제 이디스에게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세 딸은 모두 결혼했다. 사실 프리실라와 수잔은 엄마가 되있었다. 이제 프랭키만 키우면 된다. 그도 곧 성인이 되었다. 프랭키가 집에서 공부하는 것을 좀 싫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교육은 누나들 보다는 덜 강압적으로 이뤄졌다. 적절한 교육을 받기 위해서 프랭키는 영국의 사립학교로 가게 되었다. 프랜과 이디스는 프랭키가 학교 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나서야 안심 할 수 있었다. 프랭키는 그 나이 또래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또 높이 뛰기 같은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프랜이 점점 더 그의 제한된 사역에 좌절하자, 이디스의 마음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이디스가 놀라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라브리의 젊은이들이 아니라 쮜리히에서 나이든 교수들과 같이 있었다. 냉소적이고 적대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저녁에 프랜은 그 교수들을 압도했다. 그들은 아이들처럼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디스는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프랜은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막고 있었다.

오 하나님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기도했다. 결국 이디스는 반성하게 되었다. “1960년대 초에 나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나만을 위한 일에 눈길을 돌렸고, 내 생각과 내 기도는 나의 바람으로만 채워졌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합리화 하려는 마음뿐이었다.”
 
프랜에게는 점점 더 많은 설교 일정이 짜여졌다. 이디스는 프랜을 잘 도왔다. 그녀는 여대생들과 사랑, 결혼, 성 그리고 변하는 세상에서의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가정을 돌보는 일이 창조적인 활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녀는 개인적인 상담에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상담은 잘 받아들여졌다. 그녀도 스위스 라브리를 떠나있을 때가 많았다. 곧 그녀와 프랜은 매년 3개월만 스위스 라브리에서 보냈다.
 
프랜의 발표 능력은 10년 동안 어려운 질문들에 대답해 주며 닦아온 실력으로 점점 더 연마되었다. 그는 모든 주요 대학에서 연설했다. 몇 년 동안 복음주의적이고,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 들은 자리를 잡아갔다. 프랜의 미술, 문학, 철학 전시회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몰렸다. 그는 출판업계에서는 여전히 지식인이나 일부 복음주의자들에게 과소평가 되었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그를 공개 토론에 초대하고 싶어했다. 그는 생각이 깊고 절도 있는 연설가였다. 그리고 그는 공손하고 인내심 많은 청취자였다. 그는 자신의 불 같은 성질을 제어했다. 대부분의 청중들은 그가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는 요구하는 것 없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한시간이나 그 이상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연설들로 이어지던 그의 신념들은 책으로 출간되었다. 1965년에 휘튼 대학에서 한 그의 강의는 1968년에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비평가들은 냉소적으로 그의 책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평했다. 그들은 그의 주장의 범위가 꽤 넓은 분야를 아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런 식으로 평했다.

“위험한 것은 그가 학자가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학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휘튼 대학 마크 놀 교수가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 당시에 이디스에게는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프랜이 강의하는 동안 그녀는 그의 강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알아갔다. 그녀는 라브에서 손님을 맡고, 집안 일을 하고, 프랭키를 돌보는 일 등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빴었다. 이제 그녀는 프랜의 가장 열성적인 청중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필기를 하며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논리적 단계를 점검했다. 그녀에게는 기독교의 진실성을 설득하기 위한 논쟁은 필요 없었지만, 그녀는 그런 토론의 힘에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회의론자를 설득하는데 그런 방법들을 사용했다.

IVP같은 기독교 출판사에게는 프랜이 기회였다. 그들은 그의 저서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그의 책은 잘 팔렸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의 저서를 출간했다. 몇몇은 중복되거나 남기도 했다. 손실도 있었다. 그의 저서는 C.S 루이스의 멋들어진 산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1968년부터 1972까지 프랜은 IVP와 틴들하우스에서 13권을 책을 냈다. 첫해에 그는 중복 되는 것 같지만 너무나 중요한 두 책 - “거기 계시는 하나님”, “이성에서의 도피” – 을 발간했다. 또 세번째 주 도서인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진정한 영적 생활”을 썼다. 그 다음해에 “다시 자유와 존엄으로”와 “기초 성경공부”, “창세기의 시공간성”을 썼다.

프랜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역사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떤 점에서는 이 장들이 인간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과 인간의 독특성을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 장들은 인간의 궁금증과 그의 약점들까지도 설명해 준다.”

프랜은 이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리더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계에서 지식인들로부터 복음을 수호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전 복음의 수호자 였던 C.S 루이스가 1963년에 타계했다. 프랜을 지지하지 않는 학계에서는 그를 성경 근본주의자로 결론내리지 않았지만, 그를 가치 있는 반대자로 여겼다. 1973년까지 그는 프린스톤, 하버드, 예일, 옥스포드, 캠프리지에서 강의했다. 그는 잭 켐프, 제리 파렐, 척 콜슨, 빌 브리아트, 팻 로버트슨, 칼 토마스 그리고 다른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프랜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그의 메시지에 매료되었다. 프랜이 “믿음의 도약”(비 기독교도들이 광신이라 여기는)이라는 개념을 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랜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명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사실이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다.”

이디스는 프랜의 여행에 잠깐동안 같이 했다. 1965년 말에 그녀는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라브리로 돌아왔다. 프랜의 어머니는 85세나 되셔서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라브리로 이사오게 되었다. 이디스 말고는 시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없었다. 물론 이디스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라브리의 소식을 알리던 “가족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프랜은 각지를 다니며 강의했다.

프랜의 기독교 변증을 위한 주요 저서 3권의 저서로 결실을 맺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변증을 위한 긴 도입에 해당한다. “이성에서의 도피”는 도입부분이 중복되긴 하지만 변증을 확장했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주 변증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프랜은 사람들이 실재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에 답하려고 하는 방법들을 추적했다.
“즉, 그들은 어떻게 진리를 찾는가?”
 
프랜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같은 방법으로 논증해 왔다고 주장했다. 어떤 답이 옳다고 여겨지면 그것의 반대는 그른 것이었다. 인류는 또한 절대가 있다고 여겨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연을 초월하는 위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왔다. 그런 사상은 13세기가 오면서 가톨릭 신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바뀌기 시작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하면 인간은 자급자족(Self-sufficient)하며 살아왔다. 프랜에 따르면 이것으로 인해 아퀴나스와 많은 기독교도들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퀴나스 자신은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하나의 문을 열게 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독립적이 되어갔다. 성경의 근본적인 권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초기 현대 과학자들은,” 프랜이 계속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셨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주를 탐구할 수 있었다.”

영국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과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로 인해 17세기 말에 현대 과학이 태동했다. 우주는 외부적 간섭이 없는 개채로 여겨졌다. 폐쇄적인 우주인 것이다. 합리주의가 태동했다. 사람들은 우주를 개별적인 것으로 만들어 갔다. 경험주의 방법은 아퀴나스가 사용했던 방법이었다(하나님을 제외한 것을 빼고). 이것은 단계였지만 여전히 진리를 찾기에는 적절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자연주의”의 도래를 알렸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종교, 문화, 과학에서는 얻을 것이 없고 단지 타락했다고 했다.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도 절대 자유를 주장했다. 그러나 프랜은 그 결과로 무정부 상태 뿐 아니라 보편의 부족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했다. 보편성이 없으면 전제도 없다. 전제가 없으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프랜은 루소 이전의 사상가들도 절망스러웠다고 확신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보편은 어디로 갔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지요? 어떻게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을 이끌어 내겠습니까? 당신은 알고있다고 확신합니까?”

그러는 동안 18세기 말에, 독일 철학가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으로 폐쇄적 우주에 대해 대항했다. 단지 관찰하고 측정하는 유물주의적 합리주의로 어떻게 의미와 가치 같은 초월적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가? 닫혀 있고, 신이 없다는 이 딜레마는 모든 것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시기까지 인간은 “반정립”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A는 A다, 그리고 A 는 non-A 가 아니다. 이것이 고전적인 논리의 단계였다. 반정립에서 하나가 참이면 그것의 반대는 거짓이었다.
프랜에 의하면, “반정립은 인식론의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독일 철학자 헤겔은 반정립 방법만이 모든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즉, 헤겔은 닫힌 우주에 대한 가정 보다는 진리를 찾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 결과 그는 진리를 찾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정립을 사용하는 대신에, 그는 정반합 적인 사고를 제안했다. 그는 이것 저것 중에 선택할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답은 항상 통합이었다. 그리고 나서 19세기 중반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마지막 폭풍을 몰고 왔다.
“그는 현대 세속적 사고와 새로운 신학의 아버지이다.” 프랜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이 말하는 정반합이 이성에 의해 지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전적인 정/반의 사고로 돌아가는 대신에 “믿음으로 도약”을 이야기 했다. 20세기의 초두에 유럽의 모든 철학적 사고는 희망을 상실한 두 가지로 나눠졌다. 유물론적 사고가 팽배했었다. 그러나 가치나 의미같이 측정 할 수 없는 진리들이 제거되자 사상은 빈약해 지기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사랑,믿음 등 측정할 수 없는 개념들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접근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회의자들이 비 논리적이라고 여기는 믿음으로의 도약이 진리를 아는 방법이라고 했다.
“나는 이 것을 절망의 선이라고 부른다.” 그는 키에르케고르의 개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그렇다. 키에르케고르의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절망을 가져왔다. 모더니즘의 잘못된 방법들은 철학과 신학에서 진리에 대한 목적을 운명지었다. 결과적으로 모더니즘은 실존주의로 정형화되었다. 이성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고 경험하는 일이었다. 두려움, 공포 같은 설명할 수 없는 느낌들이 존재했다. 모더니즘은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것 같았다. 논리적인 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 버트란트 러셀 등이 늪에서 사고(thinking)을 구출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 프랜은 이 방법도 전제가 없다는 점에서 결점이 있다고 보았다.
“첫번째 단계인 이론적인 보편성이 없다.” 프랜이 결론지었다.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서글픈 철학사조는 다른 영역에도 전해졌다. 프랜은 예술에서의 절망의 시작은 전기 인상주의와 현대 미술이라는 형태의 인지할 수 없는 형태로 대표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절망을 설명하기를 어려워했지만, 모던 재즈가 이 절망을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고 믿었다. 다른 것들은 하드 락 뮤직에서 보여졌다. “일반적 문화”의 범위에 프랜은 문학시키고, 현대 소설가 헨리 밀러에 의해 모던 문학의 무정부와 포르노그래피로 대표된다고 했다. 일반적인 문화에서 동성애, 낙태 같은 것들이 점점더 받아들여졌다. 어디서나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절망할 수 밖에 없었고, 좌절했다. 그리고 프랜은 이것이 하나의 이유로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정반합에 의해 진리를 찾는 현대의 방법의 결점이었다.
프랜은 이 결점들이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신학에서의 붕괴의 최절정은 칼바르트의 경험주의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다. 단지 믿음으로 도약해야 한다. 바르트의 신학을 받아들인 신학계의 지식인들 때문에 수문이 열렸다. 현대 신학에 편승함으로 믿음으로의 맹목적인 도약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졌다. 청교도들 중에서는 폴 틸리치, 라인홀드 니버, 비솝 존 로빈슨이 있었다. 가톨릭은 텔라드 드 샤르뎅과 칼 라너, 한스 퀑에 의해 길을 잃고 있었다.
프랜은 신학에서 진리를 찾는데 결점이 있는 정반합을 이용하면 결국 세가지 중의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다고 주장했다. 절망의 선은 결국 허무주의를 낳는다. 구도자들은 결국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결론내린다. 모든 것은 혼란일 뿐이다. 인간은 더 이상 지혜로운 존재가 아니라 우연한 존재로 전락한다. 다른 결말은 단순하게 희망없는 2분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 인성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비이성이 되고, 존재하는 물질들도 의미가 없어진다. 프랜은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위층”이라는 용어를,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래층”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의 관점은 정반합의 방법으로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믿음의 도약이 없이는 위층으로도 아래층으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결말은 신학에서 정반합의 원리로 진리를 찾게 되면 현대 신비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다. 프랜은 이런 화두를 던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역사적 기독교, 성경적 세계관은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 회의론자의 도전에 맞서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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