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2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2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117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twelve
프랜은 자신이 1953년 여름에 알아낸 사실들을 성경 학교에서 발표했다. “진정한 영적 생활” 또는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결론을 내린 것은 두 가지 였다.
프랜은 어떤 이가 열매 맺기에 실패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두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다섯 가지 가능한 가정을 했다.
1.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에 대해 배웠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하신 일의 실제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한 그리스도인 일 경우
2.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배웠지만, 그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경우.
3. 그 반대로 배웠지만, 즉 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도덕초월론자인 경우
4. 2차적 축복(second blessing)에 대해서 배웠지만, 그것을 받은 순간 완벽해 진다고 여기는 경우.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단지 희망 없이 기다리거나 그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행동하는 경우.
5. 칭의 이후에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진실성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는 경우. 종교개혁의 정통적이고 역사적인 흐름에 서있는 많은 사람들의 관점을 무시한 경우이다.
프랜은 두번째 이유를 “실천 없는 이론”이라고 했다. “지난 분석에 따르면…” 그는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교리만이 아니다. 실천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칭의 교리에서 볼 수 있다. 복음을 들었지만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모시지 않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진실을 알 수도 있고, 지식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 삶에는 열매가 없다. 칭의 교리에서 우리는 보고 깨달아야 하며 우리 스스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화의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 우리 안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칭의는 단번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화는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며 기계적인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영적 생활로 정진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세단계를 통해 성화를 이루는 것이다.
1. 내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 나는 즉시 성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되었다.
2.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 했을 때, 나는 또한 성자 하나님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나의 포도나무이고, 신랑이다. 내가 포도나무의 가지이고 그의 신랑이라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3.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나는 성령 하나님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 하나님의 중개인으로 내 안에 거하신다. 이제 성령의 열매는 성경에 있는 대로 나타난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부족한가? 한마디로 죄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칭의는 한번에 일어났음에도 성화가 계속되는 이유이다. 죄라는 전쟁터에서의 무기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증명되어야 한다고 프랜은 결론을 내렸다.
세상은 프랜이 그의 영적 투쟁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1952년 8월 3일에 그의 아들 프랭키가 태어났다. 프랭키의 큰 누나 프리실라가 13살 때의 일이었다. 1953년에 쉐퍼 가족은 미국으로 긴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딸아이들은 저먼타운의 스티븐씨 댁에 갔다. 프리실라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프랜은 윌밍턴의 페이스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켈리포니아 롱비치의 하이랜드 대학은 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는 또한 많은 교회를 다니며 설교했다. 사실, 이디스가 세어 본 대로라면 346회의 설교를 했다. 프랜이 새로 발견하여 감시의 사랑이라고 불렀던 영성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다. 그가 융화나 타협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었다. 프랜은 성화되기 위한 사랑에 대해서 설교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성숙했다고 생각했다.
“선교 위원회에서 우리를 스위스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구려.”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그는 그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전쟁적인 분위기에 지쳐갔다. 믿을 수 없었지만 다른 분리가 일어났다. 한번은 칼 맥킨티어가 프랜과 몇몇 사람들을 다른 교파로 인도한 적이 있었다. 이 곳은 성경 장로교회라고 불렸고, 나중에는 복음 장로교회로 이름이 바뀐 곳이었다. 세인트 루이스에 있던 이 새 교파는 새 신학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언약 신학이라 불렸다. 프랜의 교회는 점점 작아졌다. 그는 사람들이 모더니즘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 때문에 괴로워 했다.
그렇게 균열이 일어나고 있을 때 쉐퍼 가족은 특별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다. 이 아이디어는 1955년 1월에 이디스가 이사야 2장을 읽다가 생각해낸 것이었다.
-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이사야 2:2~3)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로 ‘하나님의 집’의 주인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스위스 산에 말이에요.” 이디스가 말했다.
곧 프랜도 그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피난처”라는 뜻의 불어 라브리(L’Abri)는 젊은 이들을 위한 연구센터와 휴식하는 공간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프랜은 나중에 라브리는 열성적인 복음 전도 활동을 하는 곳은 아니지만 현 세대들에게 하나님께서 실재하심에 대해 논증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프랜과 이디스가 진정한 영적생활을 실현시켜나간 하나의 방법이었다. 어쨌든, 프랜은 영적으로 배고픔을 겪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첫번째 방문자는 18살이 된 프리실라가 데리고 왔다. 때때로 그들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정말로 답을 찾기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마침내 프랜은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의 문화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분노가 제거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한 조직에 대해서 논하지 않고, 단지 사상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다.
그러나 프랜의 선교위원회는 라브리의 진가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선교 위원회가 지원을 끊으려고 하고 있소.” 흥분한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풀 타임 선교사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서 말이오.”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유럽의 많은 교회에서 프랜이 타락했다는 비난의 편지들이 날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경고했다. 프랜은 영적으로 새로워 진 후 그의 사역이 놀라운 변화라고 여겼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랭키는 척수성 소아마비였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닉 했다. 이디스에게 프랭키는 정말로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밝고 명랑했을 뿐 아니라 또래 아이들보다 건강한 아이였다. 그런데 프랭키가 소아마비라니… 그는 이제 마사지나 운동 같은 것에 늘 신경써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때, 수잔은 류마티스성의 발열로 누워있어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고통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위스 연방 주에서 우리가 챔퍼리로 가지 못하게 하다니!” 그들은 힘들어 했다.
그들은 그들의 복음 전도 사역에 최선을 다해왔었다. 그런데 5월 31일 까지 집을 구하지 못하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놀라운 응답이 주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쉐퍼 가족들은 지도를 꺼내 들고 홍보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챔퍼리에서 론골짜기로 내려가는 길과 다른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그들은 바우드 주에 도달했다. 그곳은 챔퍼리와 흡사한 올론 이라는 마을 위에 다섯 마을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 다섯마을 중 하나가 휴모즈였다. 휴모즈에 집을 구입했다. 집 이름인 레스 메레제스는 낙엽송 근처의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쉐퍼 가족들은 정말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 같았다. 라브리는 레스 메레제스에서 시작되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을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선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언했다.
재정적인 지원이 거의 없었지만 프랜은 자유함을 느꼈다. 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적은 수 이지만 전 보다 더 진리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디스는 주부의 삶도 집주인의 삶도 모두 좋아했다. 더 많은 손님들이 올수록 도전도 더 커졌다. 2년 동안 라브리에는 평상시에 12명 정도의 사람이 머물렀다. 쉐퍼 가족이 지불해야 할 비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군인들, 학생들, 부랑자들과 같은 방문자들은 종이, 걸래, 접시, 커튼 같은 것들을 모두 사용했다. 그리고 소모된 물품들에 대해서는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이 충원되었다. 이디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라브리 가족 편지”를 썼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일을 했다. 그녀의 편지들은 매우 길고 자세했다.
그녀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요약을 잘 못해요.”
곧 그녀는 천명의 메일링 리스트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필요한 것이 있어도, 결코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보고서를 쓴 것이었다. 3년 동안 그들은 3개의 별장-멜레제스, 뷰사이트, 체세렛-에서 손님을 맞았다. 거의 첫 손님이었던 사람은 19살의 스위스계 미국인 존 샌드리였다. 존은 벨기에에서 태어나 뉴욕 스카스대일에서 자랐다. 그는 친구 소개로 라브리에 오게 되었다. 존은 어렸을 때 교회에 갔었고, 기독교는 단지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라브리는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단지 사상들에 대해서 논했다. 어떤 사상이라도 그것이 살기위한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용인되었다. 어린 프랭키는 목발을 집고 있었지만 여전히 활달하게 토론에 참가했다. 그리고 쉐퍼가족들은 각자의 전공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을 손님으로 맞기도 했다. 한스 룩매커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 했다. C.에퍼렛 쿱은 의학에 대해 이야기 했다.
불 같은 성미의 프랜도 구도자들에게 인내를 보여주며 투혼했다. 그는 단순히 강의만 하지 않고 한사람씩 또는 소그룹을 이루어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때는 프랜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 받기도 했다. 금요일에는 늘 새로운 방문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강의를 들은 후 한 주 내내 토론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프랜은 주일 아침 11시 반에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주일 오후에는 이디스가 준비하는 간단한 저녁 식사가 있었다. 이 시간에는 지역 사람들도 찾아와서 라브리에는 평소보다 세배의 사람이 모였다. 월요일부터 목요일 까지는 프랜이 근처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가르쳤던 성경 강좌가 있었다. 그는 로잔의 카페에서 강의를 했었다. 그는 바젤까지 먼거리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바젤은 스위스 영토였지만 독일의 검은 숲을 끼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갔었다. 그가 성경 강좌를 위해 여행하는 동안 이디스는 별장에서 손님들을 관리했다.
쉐퍼 가족은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가졌다. 프랜과 이디스는 가족들만 따로 하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라브리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특히 제노바 근처의 해변가를 좋아했다. 산책하고, 해변으로 소풍을 가고 지중해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책도 읽고 지역 문화도 체험했다. 그들은 알라시오의 호텔에 머물렀다. 물론 아이들은 스폰지처럼 이탈리아어를 쉽게 따라했다. 프랭키도 그의 R발음을 굴리기 시작했다. 가끔씩 그들은 산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한번은 고도 8000 피트에 위치에 있는 현기증 날 것 같은 곳에서 5일을 머물기도 했다. 산에서든 지중해 해변에서든 큰소리로 책을 읽는 것은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이디스는 항상 유익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골랐다. 전기문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래서 그들은 로라 인걸스가 미국의 19세기 삶을 그린 “초원 위의 작은 집”을 읽었다. 인도의 도나버 공동체를 설립한 선교사 에이미 카마이클에 대한 책도 읽었다. “미모사” 라는 제목으로 된 에이미의 실제 이야기는 아주 좋았다.
1957년 8월, 프리실라는 존 샌드리와 결혼했다. 올론의 교회의 예식장은 1500년 초기에 위대한 스위스 종교개혁자 파렐이 설교가 울려퍼지던 4세기나 된 오래된 건물이었다. 여기에는 17개의 좌석밖에 없었고 중앙 복도도 없었다. 반주자는 결혼식을 위해 바하의 곡을 연주했다. 검은 머리에 날씬한 몸매를 한 프리실라는 어머니 이디스가 결혼할 때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성격이 급한 것이 똑 같았다. 이디스를 닮아서 차분하고 침착한 것은 수잔이었다. 결혼식 후에 신혼부부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로잔으로 갔다. 1년 뒤에 그 둘은 존이 커버넌트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세인트 루잇로 갔다. 프리실라는 가족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작별 편지를 써서 그들의 배게 밑에 두었다.
1958년 프랜이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할 때, 몇몇의 학생들이 그와 C.S 루이스를 만나게 해 주려고 시도했다. 60세의 루이스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 작가였다. 그는 칼바르트나 폴 틸리치 같은 류의 신학자였다.
많은 크리스천들의 그들의 루이스의 훌륭한 작품들 – 순전한 기독교, 기적, 고통의 문제-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한 루이스는 매우 공격적인 토론자로 소문나 있었다. 루이스는 아브라함의 출현으로 성경이 역사적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아브라함 이전은 그의 관점으로는 신화였다. 그런 그의 견해는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신화를 좋아했으며 그것 나름대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프랜은 성경의 모든 것이 역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과 토론하는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소.”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라브리는 건물은 준비되지 않았지만 영국에도 세워졌다. 캠브리지에서 가장 열성적인 학생들 중에 키가 크고 붉은 머리를 한 남부 아프리카인 레널드 머큐리가 있었다. 그는 법학 학사를 마쳤지만 프랜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이제 그는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곧 라브리에 방문했다. 휴모즈는 점점 더 바빠졌다. 1959년 여름, 프랜과 이디스는 185명의 손님들을 맞았다. 방문자들은 16개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네달란드도 라브리에 열광했다. 네덜란드에도 지부가 생겼다. 프랜과 이디스는 이제 매년 영국과 네덜란드를 방문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재정만 가능하다면…” 프랜은 이렇게 덧붙였다.
1960년 새해 벽두에 이디스의 어머니께서 85세의 나이로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이디스는 어머니를 6년동안 보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놀란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85세가 되신 아버지는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손길이 쉐퍼의 가족에 있는 듯 했다. 왜냐하면 미국에 있는 동안, 프랭키가 피츠버그 어린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다리의 앞 근육을 뒤로 옮기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프랭키는 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었다.
1960년에, 라브리에서는 파렐 하우스라는 연구 센터를 열었다. 쉐퍼 가족들은 수 백년 전에 썩은 감자를 던지는 여성들에 의해 휴모즈에서 쫓겨났던 위대한 종교개혁자 윌리엄 파렐을 존경했다. 레널드 머큐리와 영국에서 결혼한 드러커 부부는 파렐 하우스를 시작하도록 도왔다. 반나절은 라브리에서 각자 연구에 몰두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을 했다. 쉐퍼네 가족은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고, 뷰사이트의 일광욕실을 작업실로 내 놓았다. 1960년 11월, 3명의 학생이 그 일광욕 실에 자리를 잡았다. 책들은 런던의 기독교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여전히 책상 두개가 비어 있었다. 모두가 파렐 하우스가 급성장하고, 라브리가 필요한 공간과 장비를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인식에 대한 첫번째 힌트는 1960년 가을에 출판계에서 시작되었다. 타임지에서 쉐퍼가족을 인터뷰하기 위해 기자가 4시간 걸리는 거리를 달려왔다. 그 다음날에는 사진작가와 함께 갔다. 그 기사는 1961년 1월에 “지식인들을 향한 선교”라는 제목으로 타임지에 실렸다.
“매 주말마다 쉐퍼씨네 집에는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세계 각국에서 온 미술가, 작가, 배우, 가수, 비트족(인습을 배척하는 사람 – 역주)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 기사는 정확했지만 쉐퍼가 너무 지식인 층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치우친 기사였다. 프랜은 말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경의 역사적인 진리들을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이다. 현재도 과거와 같이 성경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이 지식인들의 시대라 할지라도..”
그 기사 때문에 라브리에 대해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쉐퍼 조차도 그 기사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어쨌든 프랜은 라브리의 필요한 시설들의 확장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그의 메시지를 해외에도 알리기를 원했다. 그는 지금 라브리에서 하는 것처럼 30명에서 40명 사이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100명 또는 500명 또는 넓은 강당에서 5000명에게 강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뜻으로 그는 백만의 사람들에게 책을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디스는 프랜의 여행을 반대했다.
1961년, 수잔이 레널드 머큐리와 올론 교회에서 결혼하기 위해 옥스포드에서 공부 하다가 돌아왔다. 레널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결혼식 때 스코틀랜드 전통복장을 입었다. 9살의 프랭키도 그 전통복을 입었다. 로널드와 수잔은 로날드가 런던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수잔도 가족 한사람 한사람에게 작별 편지를 썼다. 그것은 가족 전통이 되버렸다.
그때 당시에, 우도 미들맨이라는 법학을 공부하는 독일인이 라브리에 찾아왔다. 라브리에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려는 학생들의 야심찬 계획이 펼쳐지고 있을 때였다. 새로온 사람들은 프랜의 정말 괜찮은 강의안들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래서 강의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 테잎들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분류하고, 보관하고, 배포를 위해 복사를 했다. 새 직원들은 프랜의 메시지를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는 것을 행복하게 여겼다.
그러나 라브리에서의 성공은 프랜과 이디스 사이의 불안한 긴장을 가져왔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117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twelve
프랜은 자신이 1953년 여름에 알아낸 사실들을 성경 학교에서 발표했다. “진정한 영적 생활” 또는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결론을 내린 것은 두 가지 였다.
프랜은 어떤 이가 열매 맺기에 실패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두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다섯 가지 가능한 가정을 했다.
1.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에 대해 배웠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하신 일의 실제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한 그리스도인 일 경우
2.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배웠지만, 그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경우.
3. 그 반대로 배웠지만, 즉 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도덕초월론자인 경우
4. 2차적 축복(second blessing)에 대해서 배웠지만, 그것을 받은 순간 완벽해 진다고 여기는 경우.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단지 희망 없이 기다리거나 그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행동하는 경우.
5. 칭의 이후에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진실성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는 경우. 종교개혁의 정통적이고 역사적인 흐름에 서있는 많은 사람들의 관점을 무시한 경우이다.
프랜은 두번째 이유를 “실천 없는 이론”이라고 했다. “지난 분석에 따르면…” 그는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교리만이 아니다. 실천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칭의 교리에서 볼 수 있다. 복음을 들었지만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모시지 않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진실을 알 수도 있고, 지식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 삶에는 열매가 없다. 칭의 교리에서 우리는 보고 깨달아야 하며 우리 스스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화의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 우리 안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칭의는 단번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화는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며 기계적인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영적 생활로 정진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세단계를 통해 성화를 이루는 것이다.
1. 내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 나는 즉시 성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되었다.
2.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 했을 때, 나는 또한 성자 하나님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나의 포도나무이고, 신랑이다. 내가 포도나무의 가지이고 그의 신랑이라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3.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나는 성령 하나님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 하나님의 중개인으로 내 안에 거하신다. 이제 성령의 열매는 성경에 있는 대로 나타난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부족한가? 한마디로 죄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칭의는 한번에 일어났음에도 성화가 계속되는 이유이다. 죄라는 전쟁터에서의 무기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증명되어야 한다고 프랜은 결론을 내렸다.
세상은 프랜이 그의 영적 투쟁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1952년 8월 3일에 그의 아들 프랭키가 태어났다. 프랭키의 큰 누나 프리실라가 13살 때의 일이었다. 1953년에 쉐퍼 가족은 미국으로 긴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딸아이들은 저먼타운의 스티븐씨 댁에 갔다. 프리실라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프랜은 윌밍턴의 페이스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켈리포니아 롱비치의 하이랜드 대학은 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는 또한 많은 교회를 다니며 설교했다. 사실, 이디스가 세어 본 대로라면 346회의 설교를 했다. 프랜이 새로 발견하여 감시의 사랑이라고 불렀던 영성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다. 그가 융화나 타협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었다. 프랜은 성화되기 위한 사랑에 대해서 설교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성숙했다고 생각했다.
“선교 위원회에서 우리를 스위스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구려.”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그는 그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전쟁적인 분위기에 지쳐갔다. 믿을 수 없었지만 다른 분리가 일어났다. 한번은 칼 맥킨티어가 프랜과 몇몇 사람들을 다른 교파로 인도한 적이 있었다. 이 곳은 성경 장로교회라고 불렸고, 나중에는 복음 장로교회로 이름이 바뀐 곳이었다. 세인트 루이스에 있던 이 새 교파는 새 신학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언약 신학이라 불렸다. 프랜의 교회는 점점 작아졌다. 그는 사람들이 모더니즘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 때문에 괴로워 했다.
그렇게 균열이 일어나고 있을 때 쉐퍼 가족은 특별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다. 이 아이디어는 1955년 1월에 이디스가 이사야 2장을 읽다가 생각해낸 것이었다.
-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이사야 2:2~3)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로 ‘하나님의 집’의 주인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스위스 산에 말이에요.” 이디스가 말했다.
곧 프랜도 그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피난처”라는 뜻의 불어 라브리(L’Abri)는 젊은 이들을 위한 연구센터와 휴식하는 공간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프랜은 나중에 라브리는 열성적인 복음 전도 활동을 하는 곳은 아니지만 현 세대들에게 하나님께서 실재하심에 대해 논증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프랜과 이디스가 진정한 영적생활을 실현시켜나간 하나의 방법이었다. 어쨌든, 프랜은 영적으로 배고픔을 겪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첫번째 방문자는 18살이 된 프리실라가 데리고 왔다. 때때로 그들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정말로 답을 찾기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마침내 프랜은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의 문화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분노가 제거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한 조직에 대해서 논하지 않고, 단지 사상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다.
그러나 프랜의 선교위원회는 라브리의 진가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선교 위원회가 지원을 끊으려고 하고 있소.” 흥분한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풀 타임 선교사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서 말이오.”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유럽의 많은 교회에서 프랜이 타락했다는 비난의 편지들이 날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경고했다. 프랜은 영적으로 새로워 진 후 그의 사역이 놀라운 변화라고 여겼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랭키는 척수성 소아마비였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닉 했다. 이디스에게 프랭키는 정말로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밝고 명랑했을 뿐 아니라 또래 아이들보다 건강한 아이였다. 그런데 프랭키가 소아마비라니… 그는 이제 마사지나 운동 같은 것에 늘 신경써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때, 수잔은 류마티스성의 발열로 누워있어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고통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위스 연방 주에서 우리가 챔퍼리로 가지 못하게 하다니!” 그들은 힘들어 했다.
그들은 그들의 복음 전도 사역에 최선을 다해왔었다. 그런데 5월 31일 까지 집을 구하지 못하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놀라운 응답이 주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쉐퍼 가족들은 지도를 꺼내 들고 홍보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챔퍼리에서 론골짜기로 내려가는 길과 다른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그들은 바우드 주에 도달했다. 그곳은 챔퍼리와 흡사한 올론 이라는 마을 위에 다섯 마을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 다섯마을 중 하나가 휴모즈였다. 휴모즈에 집을 구입했다. 집 이름인 레스 메레제스는 낙엽송 근처의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쉐퍼 가족들은 정말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 같았다. 라브리는 레스 메레제스에서 시작되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을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선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언했다.
재정적인 지원이 거의 없었지만 프랜은 자유함을 느꼈다. 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적은 수 이지만 전 보다 더 진리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디스는 주부의 삶도 집주인의 삶도 모두 좋아했다. 더 많은 손님들이 올수록 도전도 더 커졌다. 2년 동안 라브리에는 평상시에 12명 정도의 사람이 머물렀다. 쉐퍼 가족이 지불해야 할 비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군인들, 학생들, 부랑자들과 같은 방문자들은 종이, 걸래, 접시, 커튼 같은 것들을 모두 사용했다. 그리고 소모된 물품들에 대해서는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이 충원되었다. 이디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라브리 가족 편지”를 썼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일을 했다. 그녀의 편지들은 매우 길고 자세했다.
그녀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요약을 잘 못해요.”
곧 그녀는 천명의 메일링 리스트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필요한 것이 있어도, 결코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보고서를 쓴 것이었다. 3년 동안 그들은 3개의 별장-멜레제스, 뷰사이트, 체세렛-에서 손님을 맞았다. 거의 첫 손님이었던 사람은 19살의 스위스계 미국인 존 샌드리였다. 존은 벨기에에서 태어나 뉴욕 스카스대일에서 자랐다. 그는 친구 소개로 라브리에 오게 되었다. 존은 어렸을 때 교회에 갔었고, 기독교는 단지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라브리는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단지 사상들에 대해서 논했다. 어떤 사상이라도 그것이 살기위한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용인되었다. 어린 프랭키는 목발을 집고 있었지만 여전히 활달하게 토론에 참가했다. 그리고 쉐퍼가족들은 각자의 전공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을 손님으로 맞기도 했다. 한스 룩매커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 했다. C.에퍼렛 쿱은 의학에 대해 이야기 했다.
불 같은 성미의 프랜도 구도자들에게 인내를 보여주며 투혼했다. 그는 단순히 강의만 하지 않고 한사람씩 또는 소그룹을 이루어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때는 프랜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 받기도 했다. 금요일에는 늘 새로운 방문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강의를 들은 후 한 주 내내 토론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프랜은 주일 아침 11시 반에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주일 오후에는 이디스가 준비하는 간단한 저녁 식사가 있었다. 이 시간에는 지역 사람들도 찾아와서 라브리에는 평소보다 세배의 사람이 모였다. 월요일부터 목요일 까지는 프랜이 근처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가르쳤던 성경 강좌가 있었다. 그는 로잔의 카페에서 강의를 했었다. 그는 바젤까지 먼거리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바젤은 스위스 영토였지만 독일의 검은 숲을 끼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갔었다. 그가 성경 강좌를 위해 여행하는 동안 이디스는 별장에서 손님들을 관리했다.
쉐퍼 가족은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가졌다. 프랜과 이디스는 가족들만 따로 하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라브리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특히 제노바 근처의 해변가를 좋아했다. 산책하고, 해변으로 소풍을 가고 지중해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책도 읽고 지역 문화도 체험했다. 그들은 알라시오의 호텔에 머물렀다. 물론 아이들은 스폰지처럼 이탈리아어를 쉽게 따라했다. 프랭키도 그의 R발음을 굴리기 시작했다. 가끔씩 그들은 산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한번은 고도 8000 피트에 위치에 있는 현기증 날 것 같은 곳에서 5일을 머물기도 했다. 산에서든 지중해 해변에서든 큰소리로 책을 읽는 것은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이디스는 항상 유익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골랐다. 전기문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래서 그들은 로라 인걸스가 미국의 19세기 삶을 그린 “초원 위의 작은 집”을 읽었다. 인도의 도나버 공동체를 설립한 선교사 에이미 카마이클에 대한 책도 읽었다. “미모사” 라는 제목으로 된 에이미의 실제 이야기는 아주 좋았다.
1957년 8월, 프리실라는 존 샌드리와 결혼했다. 올론의 교회의 예식장은 1500년 초기에 위대한 스위스 종교개혁자 파렐이 설교가 울려퍼지던 4세기나 된 오래된 건물이었다. 여기에는 17개의 좌석밖에 없었고 중앙 복도도 없었다. 반주자는 결혼식을 위해 바하의 곡을 연주했다. 검은 머리에 날씬한 몸매를 한 프리실라는 어머니 이디스가 결혼할 때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성격이 급한 것이 똑 같았다. 이디스를 닮아서 차분하고 침착한 것은 수잔이었다. 결혼식 후에 신혼부부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로잔으로 갔다. 1년 뒤에 그 둘은 존이 커버넌트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세인트 루잇로 갔다. 프리실라는 가족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작별 편지를 써서 그들의 배게 밑에 두었다.
1958년 프랜이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할 때, 몇몇의 학생들이 그와 C.S 루이스를 만나게 해 주려고 시도했다. 60세의 루이스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 작가였다. 그는 칼바르트나 폴 틸리치 같은 류의 신학자였다.
많은 크리스천들의 그들의 루이스의 훌륭한 작품들 – 순전한 기독교, 기적, 고통의 문제-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한 루이스는 매우 공격적인 토론자로 소문나 있었다. 루이스는 아브라함의 출현으로 성경이 역사적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아브라함 이전은 그의 관점으로는 신화였다. 그런 그의 견해는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신화를 좋아했으며 그것 나름대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프랜은 성경의 모든 것이 역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과 토론하는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소.”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라브리는 건물은 준비되지 않았지만 영국에도 세워졌다. 캠브리지에서 가장 열성적인 학생들 중에 키가 크고 붉은 머리를 한 남부 아프리카인 레널드 머큐리가 있었다. 그는 법학 학사를 마쳤지만 프랜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이제 그는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곧 라브리에 방문했다. 휴모즈는 점점 더 바빠졌다. 1959년 여름, 프랜과 이디스는 185명의 손님들을 맞았다. 방문자들은 16개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네달란드도 라브리에 열광했다. 네덜란드에도 지부가 생겼다. 프랜과 이디스는 이제 매년 영국과 네덜란드를 방문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재정만 가능하다면…” 프랜은 이렇게 덧붙였다.
1960년 새해 벽두에 이디스의 어머니께서 85세의 나이로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이디스는 어머니를 6년동안 보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놀란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85세가 되신 아버지는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손길이 쉐퍼의 가족에 있는 듯 했다. 왜냐하면 미국에 있는 동안, 프랭키가 피츠버그 어린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다리의 앞 근육을 뒤로 옮기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프랭키는 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었다.
1960년에, 라브리에서는 파렐 하우스라는 연구 센터를 열었다. 쉐퍼 가족들은 수 백년 전에 썩은 감자를 던지는 여성들에 의해 휴모즈에서 쫓겨났던 위대한 종교개혁자 윌리엄 파렐을 존경했다. 레널드 머큐리와 영국에서 결혼한 드러커 부부는 파렐 하우스를 시작하도록 도왔다. 반나절은 라브리에서 각자 연구에 몰두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을 했다. 쉐퍼네 가족은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고, 뷰사이트의 일광욕실을 작업실로 내 놓았다. 1960년 11월, 3명의 학생이 그 일광욕 실에 자리를 잡았다. 책들은 런던의 기독교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여전히 책상 두개가 비어 있었다. 모두가 파렐 하우스가 급성장하고, 라브리가 필요한 공간과 장비를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인식에 대한 첫번째 힌트는 1960년 가을에 출판계에서 시작되었다. 타임지에서 쉐퍼가족을 인터뷰하기 위해 기자가 4시간 걸리는 거리를 달려왔다. 그 다음날에는 사진작가와 함께 갔다. 그 기사는 1961년 1월에 “지식인들을 향한 선교”라는 제목으로 타임지에 실렸다.
“매 주말마다 쉐퍼씨네 집에는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세계 각국에서 온 미술가, 작가, 배우, 가수, 비트족(인습을 배척하는 사람 – 역주)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 기사는 정확했지만 쉐퍼가 너무 지식인 층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치우친 기사였다. 프랜은 말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경의 역사적인 진리들을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이다. 현재도 과거와 같이 성경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이 지식인들의 시대라 할지라도..”
그 기사 때문에 라브리에 대해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쉐퍼 조차도 그 기사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어쨌든 프랜은 라브리의 필요한 시설들의 확장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그의 메시지를 해외에도 알리기를 원했다. 그는 지금 라브리에서 하는 것처럼 30명에서 40명 사이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100명 또는 500명 또는 넓은 강당에서 5000명에게 강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뜻으로 그는 백만의 사람들에게 책을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디스는 프랜의 여행을 반대했다.
1961년, 수잔이 레널드 머큐리와 올론 교회에서 결혼하기 위해 옥스포드에서 공부 하다가 돌아왔다. 레널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결혼식 때 스코틀랜드 전통복장을 입었다. 9살의 프랭키도 그 전통복을 입었다. 로널드와 수잔은 로날드가 런던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수잔도 가족 한사람 한사람에게 작별 편지를 썼다. 그것은 가족 전통이 되버렸다.
그때 당시에, 우도 미들맨이라는 법학을 공부하는 독일인이 라브리에 찾아왔다. 라브리에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려는 학생들의 야심찬 계획이 펼쳐지고 있을 때였다. 새로온 사람들은 프랜의 정말 괜찮은 강의안들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래서 강의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 테잎들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분류하고, 보관하고, 배포를 위해 복사를 했다. 새 직원들은 프랜의 메시지를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는 것을 행복하게 여겼다.
그러나 라브리에서의 성공은 프랜과 이디스 사이의 불안한 긴장을 가져왔다…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