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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1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1
자료출처http://cafe.daum.net/CPI2002/5m8A/119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eleven
 
당국이 결정을 철회했어요: 프랜이 기쁜 마음으로 알려왔다.
이제 프랜과 이디스는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한편, 프랜은 형제회의 엔드레 씨에 의해 열린 행사에 참가하고 있었다. 안드레씨는 이미 프랜이 무엇을 해야할 지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지역 어린이들에게 설교를 아주 잘 했다. 그래서 프랜은 그가 많은 어린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디스는 특히 젊은 여성들과 예배에 대해 토론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프랜보다 더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몇 사람은 그녀의 그런 적극성을 부담스러워 했지만, 대부분은 잘 받아들였다.
 
그녀는 종종 복음 호두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이것은 미국 선교 연합에서 얻은 것으로 안에 리본이 들어 잇는 것이었다. 축을 돌리면 리본이 나오는 것이다. 리본의 처음 3인치는 검정색이었다. “이것은 당신의 죄 입니다.” 이디스는 리본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 3인치는 붉은 색이었다. “이것은 구원주의 피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흰색이 나올 때까지 리본을 잡아 당겼다. “예수님은 당신의 죄를 씻기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복음 호두는 매우 단순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3월에 프랜은 네덜란드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어린이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싶어하는 커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들은 그 프로그램을 4월부터 시작 할 수 있도록 와서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다른 일이 많더라도 이디스와 프랜이 어떻게 그런 요청을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떠나기 전에, 안드레씨가 프랜을 찾았다.
 
40명의 사람들은 모더니즘이 현대 교회를 점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갈등과 좌절을 주고 있다는 프랜의 설명을 들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어린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심이 쏠려있었다. 아이들이 희망 없는 세대와 갈등하기 전에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이 필요했다. 프랜의 미국여행기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청취자들은 그의 긴박한 메시지에 어리둥절 했다. 그의 메시지에 감동 받은 안드레씨는 프랜이 아이들을 위해 쓴 저작물들을 불어로 번역했다.

“어딜 가든지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를 열망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 지는 것을 느낀다오.”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그들의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 해 주기 전까지 그들은 절말적인 상황을 명확히 알지 못했소. 이런 일이 내 사역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아이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떠났다. 봄방학이 3주 정도 였기 때문에 학교에는 그렇게 많이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에서 프랜은 5개의 교회에 그의 ‘그리스도를 위한 어린이’ 프로그램을 설명했다. 그 프로그램에 감명 받은 사람들이 그의 설명을 다른 집회 때도 해 주길 원했다.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프랜과 이디스는 이 봉사자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그의 가르침은 네덜란드어로 통역되어야 했다. 미술사학자인 한스 룩매커와 그의 아내 앤키도 이 일을 도왔다. 다시 한번 한스와 프랜은 미술과 기독교에 대해 틈나는 대로 토론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랜에게는 교회 청년부, 개혁교회 학생모임, 심지어는 선원들의 모임에도 약속이 잡혀져 있었다.

그 다음달이 지나고, ICCC의 콕 의원도 프랜의 ‘그리스도를 위한 어린이’ 프로그램을 홍보했다. 유럽의 각 국에서 이 프로그램에 대한 문의가 들어왔다. 한편, 쉐퍼 가족들은 여름을 보내기 위해 기차가 아닌 트럭을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챔퍼리,로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챔퍼리에서의 여름은 너무나 즐거웠다. 그녀는 산에서의 생활을 좋아했다. 프랜은 그런 그녀가 신기했다. 한번은 프랜이 프리실라와 수잔고 함께 가파른 곳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길을 잃었었다. 그들은 쩔쩔매며 산을 내려와야 했다.

“우리는 마른 강바닥을 기어와야 했어요. 미끄러져 내려오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거든요.” 흙투성이가 된 아이들이 말했다.
 
1949년 9월 17일, 쉐퍼 가족은 스위스에 온 1주년을 기념했다. 어느 날 프랜이 여행을 간 사이 여인숙 주인인 마클레이 부인이 이디스에게 1년 동안 챔퍼리의 별장을 빌릴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여름에 다른 곳에서 지낸 다면 더 싸게 빌려주겠다고 했다. 사실 그 가격은 여름에만 별장을 쓰는 가격과 거의 같았다. 이디스는 너무나 놀랬다. 그것은 로잔에서의 가격보다 훨씬 싼 것이었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냉장고나 다른 짐들이 많았다. 이제 그들은 그 짐들을 가지고 올 수 있게 되었다. 챔퍼리를 그들의 집으로 만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그녀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프랜은 여간 깐깐한 사람이 아니었다. 프랜이 여행하는데 돈이 얼마나 들까? 아이들 교육비는? 겨울에 난방은 잘 될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이 술술 나왔다. 프랜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렸다.
그가 말했다. “만약 돈을 절약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역에 적절하다면, 아이들 학교와도 가깝다면, 건강에도 좋다면,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갑자기 이디스의 꿈이 현실화 되었다. 12살의 프리실라는 챔퍼리에서 멀지 않은 에꼬레 알피나 사립학교에 갈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사실이 로잔에서도 일어났다. 그들은 20년전 영국 여자가 만든 데스 프렌즈라는 집을 빌렸다. 그 집은 꽤 규모가 있었다. 터리안 부인의 팬션에서 지낸 이후로 이디스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큰 정원이 있었고, 챔퍼리 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중앙 난방이 되는 집이었다. 안에는 흰 페인트 칠이 된 나무 벽에 양탄자가 깔린 원목 바닥으로 되어 있었다. 거실, 식당, 주방은 1층에 있었다. 2층에는 침실 5개가 있었다. 3층에는 방이 2개 더 있고 큰 창고가 있었다. 그 집은 너무 거대해서 그들의 사역에 너무 걸맞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유럽에서 갈 길을 잃은 많은 학생들과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다. 이들은 매우 좌절해 있었고, 현대 사회가 주지 못하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쉐퍼 가족들이 이런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고 그들의 상담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가 여기 이렇게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이디스는 의아해 했다.

다행히도 프랜의 딸들은 챔퍼리에 머무는 것을 이디스 보다도 더 좋아했다. 그리고 이시기에 행정당국은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 제한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2년 동안 방치되었던 그들의 짐들(냉장고, 그릇들, 주방기구, 램프, 그림, 장신구, 책들, 아이들 2층 침대)은 마치 선물과 같았다. 2년 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짐을 쌀 때, 아이들은 불어의 불자도 몰랐었다. 그런데 이제 수잔과 데비는 불어를 모국어로 구사한다. 프리실라도 꽤 불어를 잘 했다. 11월 18일에 챔퍼리에는 처음으로 많은 눈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쉐퍼 가족들은 여기저기 다녀야 했다. 폭설 후에, 이디스는 프랜과 함께 ICCC 회의차 파리로 갔다.
“앞으로는 계속 바쁠 것 같네요.” 그들은 동의했다.

할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랜은 믿음의 삶을 경주하길 원하는 크리스천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사역은 성경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한 의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래서 프랜은 기초 성경 공부라는 저서를 썼다. 그는 이디스에게 부탁해 각각의 책을 몇 권씩 복사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다 나눠주면 이디스는 더 많은 복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1950년 봄에 프랜은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했다. 노르웨이의 자유 루터파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한 어린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세워 나갈 지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고 있었다. 1950년에, 데스 프렌즈 별장은 8월에 개최되는 국제 기독 교회 연합 2차 본회의 장소로 사용 되었다. 그 회의 전에 프랜은 자유주의 신학의 우상으로 여겨졌던 64세의 신학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더 이상 개혁주의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칼 바르트에게 그는 혐오감을 느꼈다. 바르트는 이전에 세속적인 철학자들이 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프랜이 바르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지요.” 바르트가 대답했다.
“이 세상을 말입니까?”
“이 세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르트가 대답했다.

바르트는 세상을 물리적인 세상과 영적인 세상으로 분리하고, 그 두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여겼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바르트에게는 부적절한 것이었다. 지식인들이 바르트를 동경했을 거라는 사실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믿음을 분리시켰다. 바르트의 운동은 “신정통주의”라고 불렸다. 프랜은 그와의 좌담 내용을 “신 현대주의(신정통주의)와 성경”이라는 내용으로 정리하고 회의 때 발표할 생각이었다.

프랜은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모더니즘과 타협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이야기 했다. 모더니즘에 밀린다면 누가 복음을 전하겠는가? 그는 냉냉한 마음도 거부했다. 그렇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정확하고 엄격해야 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프랜은 몇몇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진리를 위한 싸움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잃어가는 상황을 걱정했다. 정말 몇몇은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우리 중에 몇 사람은 진리를 전하는 것 보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에 더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소.”
 
1950년에, 미군이 독일에 여전히 주둔해 있었다. 프랜과 이디스는 미군 아이들을 위한 2주 짜리 성경학교를 위해서 뮌헨 근처의 베이스를 찾았다. 쉐퍼 가족들은 미군 한사람 한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성경학교의 성공은 참석한 아이들이 말해주었다. 그들은 성경에 매우 해박해져 있었다. 유럽에는 미군들이 많이 있었다. 프랜은 다른 베이스로부터도 성경학교를 열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유럽은 프랜에게도 끊임없는 교육의 장소였다. 뮌헨 바로 밖에는 나치 집결 부대가 있던 다카우였다. 다카우는 종종 죽음의 캠프라고 불렸다. 아우슈비츠 같은 나치의 실험 캠프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린아이들이나 노인까지도 가스실에서 죽어가거나 화장되었다. 또한 수용자들은 나치를 위해 전쟁 무기를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나 식량 부족과 열악한 거주 환경 때문에 이런 수용자들도 죽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면 그들도 화장 되었다. 다카우 캠프를 더 무시무시한 곳으로 만든 것은 나치가 수용자들로 생체실험을 한 사실이었다.
 
다카우에서 나치는 그들의 잔혹함만 나타냈다. 프랜은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혐오스러운 일을 할 수 있었을까?
1950년 11월, 프랜은 천주교의 교리인 마리아가 성스럽다고 하는 억측에 대한 바티칸의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 로마로 갔다. 이것은 1870년에 교황에게는 죄가 없다고 공포한 이후에 교회에 의해 처음으로 공포된 교리였다. 이 교리는 마리아의 몸과 영혼이 천국으로 올려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가 100여년 동안 사람들이 만든 전통으로 성경의 권위 위에 군림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천주교가 마리아를 신의 일종으로 추대하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교리는 세계교회 운동처럼, 장로교와 천주교의 화해를 더 어렵게 하는 것 같았다.
로마로의 여행은 그에게 더 위대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베르니니의 걸작들이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았다.
 
외관상의 성공에도 불구 하고, 프랜은 1951년에 그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열매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성경을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이야기 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 대신에 프랜이 본 것은 다툼과 화냄과 미움이었다. 그리고 프랜이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충만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이 같은 열매들은 이제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또한 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인내는? 평화는? 절제는? 그리고 기쁨은?
 
1951년 4월 그는 친구에게 침착하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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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는 나를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네. 나는 이 운동이 주께서 축복하시는 위치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드네. 우리의 분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세. 유럽에 있는 동안 나는 나의 사역이 1000% 옳다고 믿었네. 그런데 우리 중에 몇몇은 나무를 얻으려다 가지를 잃은 것만 같네.
세계 교회 의회가 반대하더라도 우리의 사역을 던져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일세. 나는 우리가 이 싸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우리가 주를 위해 싸울 때, 그 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네. 그렇지 않나? 어쨌든 나는 묵상할 때, 기쁨만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그 안으로 뛰어들기 원한다네.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더 많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네.
부활절을 맞아, 나는 휴 E. 알렉산더의 부활절 예배에 설교를 하러 제네바에 갔었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같았네. 나는 사람들이 하는 그 싸움에 대해서 이야기 하거나 칭송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네.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의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망의 필요 등등에 대한 강조가 있었네. 그리고 그 때 마치 내 짐을 내려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네. 내가 그 문제를 작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으로 나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되었네. 그것이야 말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 그것이 가벼운 싸움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하심에 실제적으로 따르는 것과 그 싸움 사이의 균형이라는 것일세.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개인적인 영적 실체들을 과소평가 하지 않는 것 말일세.
나는 지난 몇 년 보다 더 밝히 알게 된 것 같네. 이 모든 것이 나의 사역과 무슨 관계가 있는 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믿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이 기쁨을 놓치고 싶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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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에 그는 또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지난 편지에 자네에게 썼던 모든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나의 마음이 편치가 않네. 지도력이 하나님의 실재 앞에 잠잠함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의 사역이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아마도 물리적인 손실보다는 리더쉽의 부재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점점 더 영적으로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을 이뤄나가도록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다면 지도력을 발휘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네. 그래서 우리 스스로는 지도자 없는 것을 선호하거나 결국은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게 될 걸세.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네. 자네는 미국인이 쓴 작품 중에 깊은 신앙의 정수를 드러내는 작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지금 이 사역을 하고 있는 우리 중에 누구라도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그런 신앙의 글을 쓴 사람이 있는가? 자네가 보너, 머리 등이 쓴 작품을 읽을 때, 결코 잊을 수 없는 충격이 있을 것일세. 나는 우리 중에 누가 이런 저서들을 쓸 수 있을 지 의문일세.
 
지금 사역을 함께 하는 그의 동료 들 중에서 정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저서를 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프랜을 괴롭게 했다. 그는 더욱 예술 분야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디스는 프랜이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믿음을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결정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녀는 적어도 이런 점에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프랜은 40의 나이에 회의론자로 돌아가겠다니!
매일매일 그는 거의 쉴새 없이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매우 괴로워하며 바닥을 응시했다. 종종 그는 집을 나와 산책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2달이 지나고 나니 그는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는 일 이상의 일을 한 것 같았다. 좀더 성숙하고,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성경만이 인류의 목적과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성령의 열매가 부족했다.
그리고 나서 결국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첫 발을 내딛는 것일 분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성경을 좀더 연구해야겠다.”
그것은 좀더 성스러운 자세였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951년 말에 그는 또 다른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과거에 나에겐 잘못된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옳다는 생각이었지.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각인과 우리의 운동에 필요하다는 사실이 따랐었지. 나는 더 이상 이것을 믿을 수 없었다네. 분리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고 해도, 만약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다른 원리들이 있다는 인식이 점점더 나의 속에서 솟아오른다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성령님께서 점점 더 나를 그의 길을 내 삶에 보이시도록 간구하는 자리로 이끄신다는 사실 외에 어떤 것도 확신할 수 가 없었네.
1951년 그는 내적인 동요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의문에 대해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공간이 존재하듯이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일세. 시간이 단순히 역사책 속의 날짜로 여겨지던 이전보다 시간이라는 것은 내게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네. 그러나 시간이 점점더 적절한 장소로 들어가게 되면서 다시 하나님은 더 위대하신 분처럼 보였다네 그리고 다시 그것은 사람에게 반대의 영향을 준다네. 산이 점점 작아지면서 시간은…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두신다면, 나에게는 이미 지나간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갖게되네. 그러나 내가 4년 전 처음 유럽에 갔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원히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닐세.
내가 유럽에 온지 3년 반 동안은 내 삶이 풍족했었네. 그러나 갑자기 다른 삶이 찾아오기 시작했어.
… 대학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나는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네. 우리가 이곳에서 바쁘게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대학, 신학교, 목사의 직무에 돌진하는 것과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해서 말일세. 점점 나의 생각은 바뀌어 갔지. 나는 이전에 내가 많은 부분들에서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내가 처음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알게되었을 때, 그는 매우 내게 실제적이었고 그의 사랑이 내게 매우 가까웠음을 기억하고 있네. 그리고 이전 장로교회 체계와 싸움이 시작되었지. 그리고 점점 확대되는 N.A.E(국제 복음주의 연합), “분리주의 운동”과도 싸워야 했네. 나를 오해하지 말아주게. 나의 경험은 이 싸움들이 필요하고 옳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어. 나는 이것이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 일어난 일이 아닌지 궁금하다네.
…나는 “분리”가 옳다고 확신하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원리일 뿐일세. 지켜져야 할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네. 사랑하라는 계명은 어떤 것을 의미해야만 하네… 나는 배우고 싶고 기쁨과 성령의 능력을 동반하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네.
… 하나님의 뜻을 나는 따르되 더 이상 정치적 운동을 하지 않을 걸세.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네.
이 같은 프랜의 방황은 모든 해답을 얻게 된 1953년이 되어야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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