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0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10
http://cafe.daum.net/CPI2002/5m8A/116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ten
“제네바!” 프랜이 소리쳤다.
1947년 7월 16일, 프랜은 스위스 서부의 인구 십만의 도시를 방문했다. 그곳은 개혁 교회 역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도시이다. 또한 그곳은 존 칼빈의 도시였다. 1536년에 그곳에 프랑스에서 27세의 장로교 학자인 위대한 종교개혁가가 오게 되었다. 다른 종교 개혁자 윌리암 페럴은 이미 제네바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칼빈은 학자적인 삶을 원했다. 그러나 윌리암 페럴은 행동가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행동적이면서도 학자적인 종교개혁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종교개혁자들 보다 더 장로교의 교리를 더 분명히 했다. 그의 저서들은 명료하고, 체계적이었으며 설득력이 있었다. 첫번째 개혁은 루터와 쯔빙글리에 의해 전개되었지만, 서유럽과 미국을 흔든 것은 다름아닌 칼빈의 신학이었다.
프랜은 네 사람을 위대한 종교개혁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 윌리엄 페럴, 존 칼빈, 테오도레 베자, 존 낙스가 그들이었다. 베자는 칼빈의 제자였고 승계자였다. 스코틀랜드인인 존 낙스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시간을 보낸 후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세웠다. 프랜은 그가 종교개혁의 중심지에 서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흥분에 가득 차서 그는 칼빈이 묻힌 곳과 존 낙스가 설교했던 성 베드로 성당에 들렀다. 프랜은 스위스에 관한 모든 것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공기도 참 맑았다. 싼 가격에 풍성한 식사를 할 수도 있었다.
프랜은 유럽으로 갔다. 그는 거의 사람들과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유럽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인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종교개혁자의 유산을 잘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미래에 대한 안목도 갖춘 사람이었다. 프랜은 유럽에서의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의 교회들은 미국의 교회들보다 훨씬 더 자유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제네바 시 교회의 60명의 목사들 중 세 명만 성경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적으로 성경을 고수하는 교회들에 전쟁을 선포한 상황이었다. 프랜은 노르웨이에서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의 교회에 있는 성경을 믿는 자들을 향해 “늙어버린 노인들은 가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신할 뻔했다. 그 당시는 자유주의가 진보를 위해 교회도 사회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때였다. 프랜은 그 메시지가 세속적 사회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교회가 사회적 부속물로 남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오, 어디서 그리스도인을 만난단 말인가.” 그는 자유주의자들과 만난 후에 이렇게 한숨 쉬며 말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네이버흐의 연설을 들었다. 사회주의적인 메시지는 여전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세계적인 교회들의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상황을 반대해야만 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하나라도 받아들이게 되면 비성경적인 예배의식만 남기까지 기독교는 그 순수성이 희석될 것이다. 프랜이 유럽을 떠나온 그 때, 그는 성경을 믿는 국제적인 기구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유럽에서 핍박 받고 있는 성경을 믿는 자들을 와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수없이 받았다. 그러나 그가 속해 있는 미국의 기관에서는 그가 돌아올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디스는 조심스럽게 프랜이 유럽에 있을 때 쓴 편지 중에 일부를 복사해 두었다.
그는 성경을 믿는 자들이 명목뿐인 그리스도인인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수없이 들었다. 그는 소위 초교파 운동이라는 것을 반대했다. 그것은 기독교에 더 치명적인 것이었다. “종교적인 연합보다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대도 종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나는 지금의 세대가 나에게 기대하는 진리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프랜은 장로교 해외 선교 연합과 미국 교회 연합 두 곳에 보고 했다. 그들은 놀랐지만 그의 역할에 기뻐했다.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간 그가 어떻게 상대방을 자극 하지 않을 적도로 적절히 선동하고 긴장을 불러일으킨 집회를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당분간은 여행을 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바라는 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장로교 해외 선교 연합에서 우리가 유럽의 선교사로 가길 원하고 있소.”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유럽이라구요?”
중국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시아는? 그 보다도 세인트 루이스는?
참 난처했다. 성경을 믿는 교회들은 국제적인 크리스천 교회의 연합을 구성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첫 회의가 1948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선교사들은 그 날 전까지 도착해야 했다. 사실 그들은 프랜이 유럽에 1948년 2월까지는 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것은 거의 모험에 가까웠다. 모더니스트 들에게는 상당히 눈에 거스르는 일이 될 것이었다. 수적으로도 열악했다. 수 많은 공격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공격들이 그의 가족까지 다치게 할까?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유럽에 있는 교회들은 이미 그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거절할 수 있겠소?” 그는 이디스에게 물었다.
“못해요.”
“우린 결국 스위스로 가야해요.”
그들이 저먼타운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프리실라는 필라델피아의 소아과에서 검사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몇 달 동안 배멀리로 고생하고 있었다. 의사는 프리실라가 유럽에 갈 때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걱정했다. 그 병원의 외과의사는 쉐퍼 가족의 주치의에게 프리실라가 신체적인 질병이 있다고 알려왔다. 진찰 결과 프리실라는 “장파열”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돌기를 제거한 후에 그녀는 회복되었다. 쉐퍼와 이디스는 의사에게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의사는 오히려 그들의 신실한 삶에 감동 받았다고 했다.
“저는 몇 주 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답니다.” 외과의사가 이디스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C. 에브릿 쿱이라는 사람이었다.
프리실라가 진찰도 받지 않고 유럽으로 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1948년 8월에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 잠시 들렀던 것은 이디스가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었다. 배에서 아픈 사람은 프리실라가 아니라 수잔이었다. 누군가는 수잔을 계속 돌봐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긴 항해 끝에 풍차와 가축들이 펼쳐진 초록의 저지대의 나라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흔들리는 배에서 네덜란드의 길고 긴 해안선을 바라보는 것은 괜찮은 일이었다. 이디스는 네덜란드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아직 못했을 때였다.
여행객을 가득 태운 작은 배가 고동 소리를 내며 해안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은 로테르담에서 내렸다. 프랜은 네덜란드의 세관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약간은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꽤나 큰 화물선에 그들의 짐을 실어왔다. 17개의 가방과, 몇 개의 상자들, 자전거 4개 그리고 냉장고 때문이었다. 세관원들이 모든 짐을 열어보려고 하면 어쩌지? 세관원들이 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담배나 술은 얼마나 가지고 오셨습니까?” 세관원이 물었다.
“없습니다.” 이디스가 대답했다.
몇 개의 질문이 이어졌고, 그들은 세관을 통과했다. 세관원들은 짐을 열어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좋은 징조였다. 그들은 짐을 로테르담에 두고 휴식을 취했다. 쉬베닝헌의 휴양지에서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해변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 생선가게로 가득한 해변가의 모습은 이디스에게는 너무나 유흥가처럼 보였다. 다행히도 그들이 머무는 곳은 해변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쉬베닝헌으로 가는 전차 역이 있는 곳이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주일 아침에 그들은 집에 있는 네덜란드 소년 소녀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임시로 만들었다. 다음날 프랜은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이디스는 프랜이 네덜란드까지 오는 과정들에 대해 간단히 메모를 해 두었다. 그는 전년도 보다 많은 요령들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디스와 딸들은 네덜란드 식의 음식을 먹었다. 아침은 우유에 버터나 잼을 바른 빵을 먹었다. 빵은 습기가 많고 무거웠다. 점심은 버터 바른 빵에 치즈 조각이나 고기를 올려 먹었다. 저녁엔 토마토 스프와 양배추나 콩, 생선, 치즈 등을 먹었다. 후식으로는 새콤한 크림이나 옥수수 푸딩을 먹었다. 운 좋게도 우유는 항상 양껏 먹을 수 있었다. 여전히 제한된 식사는 이디스에게 걱정거리였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비타민을 먹이기 시작했다. 가게에서 토마토를 잔뜩 사왔다. 가능하면 비용을 줄이면서 복숭아, 배, 포도 등도 샀다. 아이들도 전에는 잘 안 먹더니 이제는 잘 먹기 시작했다.
“아침에 계란 안 먹어요?” 오래전에 아이들은 이렇게 묻곤 했었는데..
이디스는 타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로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그녀는 찬물만 나오는 곳에서 빨래를 해야 했고, 데비의 담요를 덮은 테이블에서 다림질을 해야 했다. 그녀는 편지는 쓰는 일까지 모든 것을 관리해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프랜의 비서로서 속기로 여러 가지를 타이핑 해야 했다. 그녀는 스위스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이 작업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스위스에서는 불어로도 타이핑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나기가 내리던 주일에 쉐퍼 가족은 택시를 타고 헤이그에 있는 목사님 댁을 방문했다. 그는 시가를 입에 물고 있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이디스는 그 목사의 가족들이 주마다 배급되는 고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프랜에게 주어진 조각이 그 중에서 가장 컸다. 메인 요리는 감자와 콩으로 만든 요리였다. 이디스와 프랜은 네덜란드 인들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차를 마시는 것을 보고 놀랬다.
“오후에 전화할 때는 차를 스무 잔 정도 마시지요.” 그 목사가 말했다.
암스테르담에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디스는 프랜이 참석하는 회의에는 거의 다 참석했다. 쉬베닝헌의 주인집 식구들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워 했다. 그리고 11살이 된 프리실라는 거의 작은 엄마라고도 할 수 있었다. 회의 때문에 쉬베닝헌에서 덴 하그로 전차를 타고 가서, 기차로 헤이그로 갔다가 또 전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거의 2시간이 걸렸다. 암스테르담에서 이디스는 고대 비기니호프에서 넘어지기도 했다. 이곳은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기도했던 곳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중국 대사관인 아레이 콕이 개회 연설을 했다. 콕은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우리는 마치 기드온과 그의 용사들이 미디안 군과 대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 주 후에 이디스는 세 딸을 암스테르담으로 데려와서, 프랜의 연설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암스테르담에 있으면서 국립박물관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디스는 세 딸을 데리고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보러 다녔다. 한번은 프랜이 몹시 화가 나서 쉬베닝헌으로 돌아왔다. 콕이 프랜을 장로교 연합 회의에서 ICCC로 넘겨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발걸음을 스위스로 옮기게 하는 것이었다. 프랜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주께서 그를 선교의 사역에 쓰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ICCC에서 일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회의장을 나오면서 소리쳤다.
“저에게 여전히 성미가 남아있는 것 같군요.” 프랜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회의를 하는 동안 프랜은 미술 사학자인 한스 룩매커를 만났다. 한스는 프랜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를 알아봤다. 그들은 둘 다 서로를 보고 놀랐다. 프랜은 전에 한번도 그와 같이 성경적인 미술 평론가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한스도 미술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목사를 처음 보았다. 프랜은 유럽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미술전을 관람하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그는 작품과 그 의미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다. 프랜과 한스는 세기를 거치며 미술과 기독교가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토론하느라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처음 만나서 이야기 하는데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겨우 겉만 핥은 것 같군요.” 프랜이 말했다. “그러나 다시 만나면 더 깊이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 같아요.”
네덜란드에서 쉐퍼가 머무르고 있는 곳 근처에서 새 여왕의 즉위식이 있어서 거리가 온통 꽃으로 장식되었다. 좋지 않은 건강 때문에 빌헬미나 여왕이 퇴위하게 되었다. 대신 그녀의 딸인 줄리아나가 9월 6일에 왕위를 물려 받았다. 네덜란드에 꽃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것은 쉐퍼 가족인 9월 7일에 네덜란드를 떠나기 전에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벨기에와 프랑스를 경유해서 그들은 스위스 로잔에 도착했다.
로잔은 프랑스 항에서 단지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공기가 참으로 상쾌했다. 로잔 남쪽에는 반짝거리는 레만호라고 불리는 제네바 호수가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인 제네바 호수는 폭은 5~10마일 정도였지만 길이는 45마일이나 되는 긴 호수였다. 깊이는 1000 피트나 되었다. 호수 남쪽에는 알프스 산이 있었다. 북쪽은 쥐라 산맥의 구릉 지대로 둘러져 있었다. 로잔 시내에만도 언덕이 십만개는 넘었다. 그들이 탄 택시가 짐 때문에 텅텅 소리를 내고 있었다. 로잔 시내가 한 눈에 보였다. 레인트 몬트에서 쉐퍼 가족들은 터리안 부인과 그녀의 두 어린 하녀의 배웅을 받았다. 터리안 부인의 팬션은 언덕 뒤쪽에 있었다. 돌담은 거리를 향해 있는 앞 마당을 지켜주고 있었다. 먼저 그들은 집으로 가기 위해 앞마당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3층까지 올라가야 했다. 그곳에 쉐퍼가족을 위한 작은 방 2개가 있었다. 이 곳이 어느 때 까지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쉐퍼 가족이 머물 곳이었다. 그들의 짐을 어디에 어떻게 놓아야 할지 걱정이었다. 특히 세 딸을 위해 침대 세 개를 억지로 밀어 넣어야 했다.
“각각의 방에 발코니가 하나씩 있네요.”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이디스가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꽤 괜찮은 곳이었다. 아래 들판에서 카우벨(암소 목에 다는 방울 – 역주)소리가 들렸다. 세 딸들은 앞마당에 있는 소나무와 과일 나무 아래에서 신나게 놀 수 있었다. 과일나무는 가지를 쳐놔서 줄기가 두 군데밖에 자라지 않았다. 그런 방법으로 그들은 담과 울타리에 나무가 자라도록 했다. 작은 나무들이 울타리를 형성했다. 터리안 부인의 마당은 달리아, 국화, 데이지, 장미 같은 각종 꽃들로 가득했다. 두시 마당은 채소 밭에다 닭장과 토끼장도 있었다. 프리실라는 매일 계란을 모아왔다.
쉐퍼 가족은 윌더머스 부인을 프랑스어 교사로 고용했다. 곧 쉐퍼 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 공부에 열중했다. 이디스는 고등학교 때 불어를 배운 적이 있어서 조금 수월하게 배웠다. 프랜과 이디스는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알아봤다. 그곳은 펜션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학교였다. 가족들은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오트밀과 토스트를 먹고 각자의 일상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프랜과 이디스는 각자 프랜의 일을 나눠서 하거나 불어 공부를 했다. 터리안 부인이 준비하는 점심은 감자에 생선 또는 고기나 치즈를 곁들인 요리에 시금치, 당근, 사탕무, 양파 등이었다. 점심 후에는 사과나 배 같은 후식을 먹었다. 저녁은 쌀죽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서 파스타와 치즈, 고기 등을 먹었다. 주일에는 항상 토끼를 먹었고, 수요일에는 치즈, 금요일에는 생선을 먹었다. 쉐퍼 가족은 그들이 불어와 스위스의 문화에 익숙해 지기 까지 집을 알아보는 일을 미뤘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연속적으로 질병과 싸웠다. 데비는 기관지염을 앓았다.
흉부내과 전문의가 펜션으로 와서 데비를 진찰했다. 그리고 어색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폐렴을 앓고 싶어 하는군요.(she wishes to have pneumonia..)”
약으로 폐렴은 피할 수 있었다.
곧 쉐퍼 가족들은 로잔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불길한 경고가 있었다. : 수이세에서 복음을 전하지는 말라는 것이었다. 스위스에서 복음을 전할 길이 막힌 것이다. 프랜과 이디스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바꿔놓으실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기 전까지는 어쨌든 복음을 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에서 프랜은 다섯 가족과 함께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비록 다섯 명이었지만, 프랜은 마치 5천명 앞에 있는 것처럼 설교했다.
때때로 이디스는 그들이 뒤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겨울이 오면 공기가 차가워졌다. 팬션에 방열기가 있긴 했지만, 쉐퍼 식구들은 집안에서도 옷을 두툼히 껴 입어야 했다. 전기가 아주 귀했다. 이디스는 다른 누구보다 프리실라와 수잔을 걱정했다. 이제 11살인 프리실라와 7살인 수잔은 불어로만 수업이 이뤄지는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학교에서는 그들이 다른 수업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익숙해 질 때까지 프랑스어 수업과 수학 수업만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이디스는 팬션에 있을 때도 아이들에게 불어를 가르쳤다.
쉐퍼 가족들은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자전거를 탔다. 그는 왼쪽 어깨와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심장 질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겨우 36살이었다. 의사는 그것이 수면부족으로 생긴 신경통이라고 했다. 의사는 프랜에게 비타민과 칼슘을 복용하게 했고,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다. 그는 의사 말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의사의 진단은 정확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휴식 후에 그는 몸이 좋아졌다.
쉐퍼 가족들은 팬션 가족들과 터키요리로 1948년의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프리실라는 불어로 크리스마스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크리스마스 후에 그들은 베른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락던의 스페이즈로 갔다. 그곳에서부터 그들은 스위스 알프스로, 아델보덴으로 갔다. 그곳은 융프라우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스키도 탔다. 이 모든 것이 이틀 동안의 여행이었다. 그들이 로잔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 자신 조차도 놀라워 했다.
“타국이 이제는 마치 집처럼 느껴져요.”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1949년 초에 프랜은 은퇴한 스위스 선교사와 경찰로 있는 그의 친구로부터 복음 전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 스위스 헌법에 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들은 당국에 이 같은 요청을 할 변호사 한명을 고용했다. 쉐퍼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과를 기다리면서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집을 구하는 것은 비싼 가격과 가구가 비치 되지 않아서 무산되었다. 프리실라는 학교에서 점점 공부를 잘 하게 되었다. 받아쓰기 시험은 늘 100점이었다. 수잔도 다른 학우들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었다. 프랜과 이디스의 불어 선생이었던 윌더머스 부인은 스위스 산 마을인 챔퍼리로 이사했다. 매 여름에 윌더머스 부인과 그녀의 친척들은 두 달 동안 그 별장에서 지냈다. 그녀는 쉐퍼 가족들에게 여름에 챔퍼리의 별장에서 지낼 의향이 있는 지 물었다. 그들은 불어 레슨을 계속 받아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산을 무척 좋아했다. 터리안 부인도 문제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여름에 두달 동안 윌더머스 부인이 빌려준 별장에서 지냈고, 가을에는 터리안 부인의 팬션으로 돌아갔다.
“이제 나갈까요? 이디스?” 프랜이 물었다.
“저는 아이들과 있을래요.”
그래서 이디스는 몬트렉스 호수 북쪽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론 강이 있는 에이글로 갔다. 그곳에서 2량 짜리 기차를 타고 챔퍼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윌더머스 부인은 이디스에게 그 마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높은 곳이었지만 윌더머스 부인의 별장(여름을 지낼 수 있는 가구가 있는 별장)만큼은 아니었다. 통나무로 된 그 집은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녀는 정리한 후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로잔으로 돌아갔다.
로잔에서는 더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http://cafe.daum.net/CPI2002/5m8A/116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ten
“제네바!” 프랜이 소리쳤다.
1947년 7월 16일, 프랜은 스위스 서부의 인구 십만의 도시를 방문했다. 그곳은 개혁 교회 역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도시이다. 또한 그곳은 존 칼빈의 도시였다. 1536년에 그곳에 프랑스에서 27세의 장로교 학자인 위대한 종교개혁가가 오게 되었다. 다른 종교 개혁자 윌리암 페럴은 이미 제네바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칼빈은 학자적인 삶을 원했다. 그러나 윌리암 페럴은 행동가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행동적이면서도 학자적인 종교개혁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종교개혁자들 보다 더 장로교의 교리를 더 분명히 했다. 그의 저서들은 명료하고, 체계적이었으며 설득력이 있었다. 첫번째 개혁은 루터와 쯔빙글리에 의해 전개되었지만, 서유럽과 미국을 흔든 것은 다름아닌 칼빈의 신학이었다.
프랜은 네 사람을 위대한 종교개혁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 윌리엄 페럴, 존 칼빈, 테오도레 베자, 존 낙스가 그들이었다. 베자는 칼빈의 제자였고 승계자였다. 스코틀랜드인인 존 낙스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시간을 보낸 후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세웠다. 프랜은 그가 종교개혁의 중심지에 서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흥분에 가득 차서 그는 칼빈이 묻힌 곳과 존 낙스가 설교했던 성 베드로 성당에 들렀다. 프랜은 스위스에 관한 모든 것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공기도 참 맑았다. 싼 가격에 풍성한 식사를 할 수도 있었다.
프랜은 유럽으로 갔다. 그는 거의 사람들과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유럽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인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종교개혁자의 유산을 잘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미래에 대한 안목도 갖춘 사람이었다. 프랜은 유럽에서의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의 교회들은 미국의 교회들보다 훨씬 더 자유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제네바 시 교회의 60명의 목사들 중 세 명만 성경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적으로 성경을 고수하는 교회들에 전쟁을 선포한 상황이었다. 프랜은 노르웨이에서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의 교회에 있는 성경을 믿는 자들을 향해 “늙어버린 노인들은 가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신할 뻔했다. 그 당시는 자유주의가 진보를 위해 교회도 사회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때였다. 프랜은 그 메시지가 세속적 사회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교회가 사회적 부속물로 남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오, 어디서 그리스도인을 만난단 말인가.” 그는 자유주의자들과 만난 후에 이렇게 한숨 쉬며 말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네이버흐의 연설을 들었다. 사회주의적인 메시지는 여전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세계적인 교회들의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상황을 반대해야만 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하나라도 받아들이게 되면 비성경적인 예배의식만 남기까지 기독교는 그 순수성이 희석될 것이다. 프랜이 유럽을 떠나온 그 때, 그는 성경을 믿는 국제적인 기구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유럽에서 핍박 받고 있는 성경을 믿는 자들을 와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수없이 받았다. 그러나 그가 속해 있는 미국의 기관에서는 그가 돌아올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디스는 조심스럽게 프랜이 유럽에 있을 때 쓴 편지 중에 일부를 복사해 두었다.
그는 성경을 믿는 자들이 명목뿐인 그리스도인인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수없이 들었다. 그는 소위 초교파 운동이라는 것을 반대했다. 그것은 기독교에 더 치명적인 것이었다. “종교적인 연합보다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대도 종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나는 지금의 세대가 나에게 기대하는 진리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프랜은 장로교 해외 선교 연합과 미국 교회 연합 두 곳에 보고 했다. 그들은 놀랐지만 그의 역할에 기뻐했다.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간 그가 어떻게 상대방을 자극 하지 않을 적도로 적절히 선동하고 긴장을 불러일으킨 집회를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당분간은 여행을 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바라는 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장로교 해외 선교 연합에서 우리가 유럽의 선교사로 가길 원하고 있소.”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유럽이라구요?”
중국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시아는? 그 보다도 세인트 루이스는?
참 난처했다. 성경을 믿는 교회들은 국제적인 크리스천 교회의 연합을 구성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첫 회의가 1948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선교사들은 그 날 전까지 도착해야 했다. 사실 그들은 프랜이 유럽에 1948년 2월까지는 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것은 거의 모험에 가까웠다. 모더니스트 들에게는 상당히 눈에 거스르는 일이 될 것이었다. 수적으로도 열악했다. 수 많은 공격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공격들이 그의 가족까지 다치게 할까?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유럽에 있는 교회들은 이미 그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거절할 수 있겠소?” 그는 이디스에게 물었다.
“못해요.”
“우린 결국 스위스로 가야해요.”
그들이 저먼타운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프리실라는 필라델피아의 소아과에서 검사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몇 달 동안 배멀리로 고생하고 있었다. 의사는 프리실라가 유럽에 갈 때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걱정했다. 그 병원의 외과의사는 쉐퍼 가족의 주치의에게 프리실라가 신체적인 질병이 있다고 알려왔다. 진찰 결과 프리실라는 “장파열”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돌기를 제거한 후에 그녀는 회복되었다. 쉐퍼와 이디스는 의사에게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의사는 오히려 그들의 신실한 삶에 감동 받았다고 했다.
“저는 몇 주 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답니다.” 외과의사가 이디스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C. 에브릿 쿱이라는 사람이었다.
프리실라가 진찰도 받지 않고 유럽으로 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1948년 8월에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 잠시 들렀던 것은 이디스가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었다. 배에서 아픈 사람은 프리실라가 아니라 수잔이었다. 누군가는 수잔을 계속 돌봐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긴 항해 끝에 풍차와 가축들이 펼쳐진 초록의 저지대의 나라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흔들리는 배에서 네덜란드의 길고 긴 해안선을 바라보는 것은 괜찮은 일이었다. 이디스는 네덜란드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아직 못했을 때였다.
여행객을 가득 태운 작은 배가 고동 소리를 내며 해안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은 로테르담에서 내렸다. 프랜은 네덜란드의 세관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약간은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꽤나 큰 화물선에 그들의 짐을 실어왔다. 17개의 가방과, 몇 개의 상자들, 자전거 4개 그리고 냉장고 때문이었다. 세관원들이 모든 짐을 열어보려고 하면 어쩌지? 세관원들이 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담배나 술은 얼마나 가지고 오셨습니까?” 세관원이 물었다.
“없습니다.” 이디스가 대답했다.
몇 개의 질문이 이어졌고, 그들은 세관을 통과했다. 세관원들은 짐을 열어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좋은 징조였다. 그들은 짐을 로테르담에 두고 휴식을 취했다. 쉬베닝헌의 휴양지에서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해변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 생선가게로 가득한 해변가의 모습은 이디스에게는 너무나 유흥가처럼 보였다. 다행히도 그들이 머무는 곳은 해변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쉬베닝헌으로 가는 전차 역이 있는 곳이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주일 아침에 그들은 집에 있는 네덜란드 소년 소녀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임시로 만들었다. 다음날 프랜은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이디스는 프랜이 네덜란드까지 오는 과정들에 대해 간단히 메모를 해 두었다. 그는 전년도 보다 많은 요령들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디스와 딸들은 네덜란드 식의 음식을 먹었다. 아침은 우유에 버터나 잼을 바른 빵을 먹었다. 빵은 습기가 많고 무거웠다. 점심은 버터 바른 빵에 치즈 조각이나 고기를 올려 먹었다. 저녁엔 토마토 스프와 양배추나 콩, 생선, 치즈 등을 먹었다. 후식으로는 새콤한 크림이나 옥수수 푸딩을 먹었다. 운 좋게도 우유는 항상 양껏 먹을 수 있었다. 여전히 제한된 식사는 이디스에게 걱정거리였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비타민을 먹이기 시작했다. 가게에서 토마토를 잔뜩 사왔다. 가능하면 비용을 줄이면서 복숭아, 배, 포도 등도 샀다. 아이들도 전에는 잘 안 먹더니 이제는 잘 먹기 시작했다.
“아침에 계란 안 먹어요?” 오래전에 아이들은 이렇게 묻곤 했었는데..
이디스는 타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로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그녀는 찬물만 나오는 곳에서 빨래를 해야 했고, 데비의 담요를 덮은 테이블에서 다림질을 해야 했다. 그녀는 편지는 쓰는 일까지 모든 것을 관리해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프랜의 비서로서 속기로 여러 가지를 타이핑 해야 했다. 그녀는 스위스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이 작업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스위스에서는 불어로도 타이핑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나기가 내리던 주일에 쉐퍼 가족은 택시를 타고 헤이그에 있는 목사님 댁을 방문했다. 그는 시가를 입에 물고 있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이디스는 그 목사의 가족들이 주마다 배급되는 고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프랜에게 주어진 조각이 그 중에서 가장 컸다. 메인 요리는 감자와 콩으로 만든 요리였다. 이디스와 프랜은 네덜란드 인들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차를 마시는 것을 보고 놀랬다.
“오후에 전화할 때는 차를 스무 잔 정도 마시지요.” 그 목사가 말했다.
암스테르담에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디스는 프랜이 참석하는 회의에는 거의 다 참석했다. 쉬베닝헌의 주인집 식구들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워 했다. 그리고 11살이 된 프리실라는 거의 작은 엄마라고도 할 수 있었다. 회의 때문에 쉬베닝헌에서 덴 하그로 전차를 타고 가서, 기차로 헤이그로 갔다가 또 전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거의 2시간이 걸렸다. 암스테르담에서 이디스는 고대 비기니호프에서 넘어지기도 했다. 이곳은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기도했던 곳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중국 대사관인 아레이 콕이 개회 연설을 했다. 콕은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우리는 마치 기드온과 그의 용사들이 미디안 군과 대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 주 후에 이디스는 세 딸을 암스테르담으로 데려와서, 프랜의 연설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암스테르담에 있으면서 국립박물관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디스는 세 딸을 데리고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보러 다녔다. 한번은 프랜이 몹시 화가 나서 쉬베닝헌으로 돌아왔다. 콕이 프랜을 장로교 연합 회의에서 ICCC로 넘겨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발걸음을 스위스로 옮기게 하는 것이었다. 프랜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주께서 그를 선교의 사역에 쓰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ICCC에서 일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회의장을 나오면서 소리쳤다.
“저에게 여전히 성미가 남아있는 것 같군요.” 프랜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회의를 하는 동안 프랜은 미술 사학자인 한스 룩매커를 만났다. 한스는 프랜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를 알아봤다. 그들은 둘 다 서로를 보고 놀랐다. 프랜은 전에 한번도 그와 같이 성경적인 미술 평론가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한스도 미술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목사를 처음 보았다. 프랜은 유럽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미술전을 관람하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그는 작품과 그 의미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다. 프랜과 한스는 세기를 거치며 미술과 기독교가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토론하느라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처음 만나서 이야기 하는데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겨우 겉만 핥은 것 같군요.” 프랜이 말했다. “그러나 다시 만나면 더 깊이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 같아요.”
네덜란드에서 쉐퍼가 머무르고 있는 곳 근처에서 새 여왕의 즉위식이 있어서 거리가 온통 꽃으로 장식되었다. 좋지 않은 건강 때문에 빌헬미나 여왕이 퇴위하게 되었다. 대신 그녀의 딸인 줄리아나가 9월 6일에 왕위를 물려 받았다. 네덜란드에 꽃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것은 쉐퍼 가족인 9월 7일에 네덜란드를 떠나기 전에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벨기에와 프랑스를 경유해서 그들은 스위스 로잔에 도착했다.
로잔은 프랑스 항에서 단지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공기가 참으로 상쾌했다. 로잔 남쪽에는 반짝거리는 레만호라고 불리는 제네바 호수가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인 제네바 호수는 폭은 5~10마일 정도였지만 길이는 45마일이나 되는 긴 호수였다. 깊이는 1000 피트나 되었다. 호수 남쪽에는 알프스 산이 있었다. 북쪽은 쥐라 산맥의 구릉 지대로 둘러져 있었다. 로잔 시내에만도 언덕이 십만개는 넘었다. 그들이 탄 택시가 짐 때문에 텅텅 소리를 내고 있었다. 로잔 시내가 한 눈에 보였다. 레인트 몬트에서 쉐퍼 가족들은 터리안 부인과 그녀의 두 어린 하녀의 배웅을 받았다. 터리안 부인의 팬션은 언덕 뒤쪽에 있었다. 돌담은 거리를 향해 있는 앞 마당을 지켜주고 있었다. 먼저 그들은 집으로 가기 위해 앞마당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3층까지 올라가야 했다. 그곳에 쉐퍼가족을 위한 작은 방 2개가 있었다. 이 곳이 어느 때 까지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쉐퍼 가족이 머물 곳이었다. 그들의 짐을 어디에 어떻게 놓아야 할지 걱정이었다. 특히 세 딸을 위해 침대 세 개를 억지로 밀어 넣어야 했다.
“각각의 방에 발코니가 하나씩 있네요.”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이디스가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꽤 괜찮은 곳이었다. 아래 들판에서 카우벨(암소 목에 다는 방울 – 역주)소리가 들렸다. 세 딸들은 앞마당에 있는 소나무와 과일 나무 아래에서 신나게 놀 수 있었다. 과일나무는 가지를 쳐놔서 줄기가 두 군데밖에 자라지 않았다. 그런 방법으로 그들은 담과 울타리에 나무가 자라도록 했다. 작은 나무들이 울타리를 형성했다. 터리안 부인의 마당은 달리아, 국화, 데이지, 장미 같은 각종 꽃들로 가득했다. 두시 마당은 채소 밭에다 닭장과 토끼장도 있었다. 프리실라는 매일 계란을 모아왔다.
쉐퍼 가족은 윌더머스 부인을 프랑스어 교사로 고용했다. 곧 쉐퍼 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 공부에 열중했다. 이디스는 고등학교 때 불어를 배운 적이 있어서 조금 수월하게 배웠다. 프랜과 이디스는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알아봤다. 그곳은 펜션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학교였다. 가족들은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오트밀과 토스트를 먹고 각자의 일상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프랜과 이디스는 각자 프랜의 일을 나눠서 하거나 불어 공부를 했다. 터리안 부인이 준비하는 점심은 감자에 생선 또는 고기나 치즈를 곁들인 요리에 시금치, 당근, 사탕무, 양파 등이었다. 점심 후에는 사과나 배 같은 후식을 먹었다. 저녁은 쌀죽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서 파스타와 치즈, 고기 등을 먹었다. 주일에는 항상 토끼를 먹었고, 수요일에는 치즈, 금요일에는 생선을 먹었다. 쉐퍼 가족은 그들이 불어와 스위스의 문화에 익숙해 지기 까지 집을 알아보는 일을 미뤘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연속적으로 질병과 싸웠다. 데비는 기관지염을 앓았다.
흉부내과 전문의가 펜션으로 와서 데비를 진찰했다. 그리고 어색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폐렴을 앓고 싶어 하는군요.(she wishes to have pneumonia..)”
약으로 폐렴은 피할 수 있었다.
곧 쉐퍼 가족들은 로잔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불길한 경고가 있었다. : 수이세에서 복음을 전하지는 말라는 것이었다. 스위스에서 복음을 전할 길이 막힌 것이다. 프랜과 이디스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바꿔놓으실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기 전까지는 어쨌든 복음을 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에서 프랜은 다섯 가족과 함께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비록 다섯 명이었지만, 프랜은 마치 5천명 앞에 있는 것처럼 설교했다.
때때로 이디스는 그들이 뒤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겨울이 오면 공기가 차가워졌다. 팬션에 방열기가 있긴 했지만, 쉐퍼 식구들은 집안에서도 옷을 두툼히 껴 입어야 했다. 전기가 아주 귀했다. 이디스는 다른 누구보다 프리실라와 수잔을 걱정했다. 이제 11살인 프리실라와 7살인 수잔은 불어로만 수업이 이뤄지는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학교에서는 그들이 다른 수업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익숙해 질 때까지 프랑스어 수업과 수학 수업만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이디스는 팬션에 있을 때도 아이들에게 불어를 가르쳤다.
쉐퍼 가족들은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자전거를 탔다. 그는 왼쪽 어깨와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심장 질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겨우 36살이었다. 의사는 그것이 수면부족으로 생긴 신경통이라고 했다. 의사는 프랜에게 비타민과 칼슘을 복용하게 했고,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다. 그는 의사 말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의사의 진단은 정확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휴식 후에 그는 몸이 좋아졌다.
쉐퍼 가족들은 팬션 가족들과 터키요리로 1948년의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프리실라는 불어로 크리스마스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크리스마스 후에 그들은 베른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락던의 스페이즈로 갔다. 그곳에서부터 그들은 스위스 알프스로, 아델보덴으로 갔다. 그곳은 융프라우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스키도 탔다. 이 모든 것이 이틀 동안의 여행이었다. 그들이 로잔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 자신 조차도 놀라워 했다.
“타국이 이제는 마치 집처럼 느껴져요.”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1949년 초에 프랜은 은퇴한 스위스 선교사와 경찰로 있는 그의 친구로부터 복음 전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 스위스 헌법에 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들은 당국에 이 같은 요청을 할 변호사 한명을 고용했다. 쉐퍼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과를 기다리면서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집을 구하는 것은 비싼 가격과 가구가 비치 되지 않아서 무산되었다. 프리실라는 학교에서 점점 공부를 잘 하게 되었다. 받아쓰기 시험은 늘 100점이었다. 수잔도 다른 학우들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었다. 프랜과 이디스의 불어 선생이었던 윌더머스 부인은 스위스 산 마을인 챔퍼리로 이사했다. 매 여름에 윌더머스 부인과 그녀의 친척들은 두 달 동안 그 별장에서 지냈다. 그녀는 쉐퍼 가족들에게 여름에 챔퍼리의 별장에서 지낼 의향이 있는 지 물었다. 그들은 불어 레슨을 계속 받아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산을 무척 좋아했다. 터리안 부인도 문제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여름에 두달 동안 윌더머스 부인이 빌려준 별장에서 지냈고, 가을에는 터리안 부인의 팬션으로 돌아갔다.
“이제 나갈까요? 이디스?” 프랜이 물었다.
“저는 아이들과 있을래요.”
그래서 이디스는 몬트렉스 호수 북쪽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론 강이 있는 에이글로 갔다. 그곳에서 2량 짜리 기차를 타고 챔퍼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윌더머스 부인은 이디스에게 그 마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높은 곳이었지만 윌더머스 부인의 별장(여름을 지낼 수 있는 가구가 있는 별장)만큼은 아니었다. 통나무로 된 그 집은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녀는 정리한 후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로잔으로 돌아갔다.
로잔에서는 더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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