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8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8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113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eight
“아이를 가진 것 같아요...” 이디스가 프랜에게 말했다.
이디스는 출산 준비로 전보다 더 많은 것들을 만들었다. 고객들이 재료를 주면 그녀는 예쁜 옷을 만들어 냈다. 겨울 코드는 8달러에, 주름 장식을 한 롱 드레스는 5달러에 팔았다. 그러고 나니 그들의 재정적 상황은 악화되었다. 그 해 가을 프랜은 맹장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가야 했다. 갑작스런 맹장 수술과 2주간의 입원으로 재정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게다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그의 공부를 방해했다. 저녁에 이디스는 존 영의 신학교 수업 노트를 배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 노트를 프랜에게 갖다 준다. 입덧 할 겨를도 없었다.
“고맙소.” 병원에서 막 자다 일어난 프랜이 말했다. 그가 이디스 없는 삶을 상상이라도 했을까? 퇴원하고 나서도 그는 한달 동안 신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1937년 1월의 어느날 프랜은 아파트에서 그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가 머천 교수의 시험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그 충격적인 소식은 머천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는 겨우 56세였는데… 그는 미국 장로교의 증진을 위해 미 북부 교회들을 순방하는 중이었다. 그는 독감을 앓고 있었고, 그의 계약은 여전했다. 그의 감기는 폐렴으로 발전했다. 비스마르크 노스 다코타에서 그는 병원에 가야 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리스도의 순종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였다.
머천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거장이었다. 그는 또한 새로운 미국 장로교를 위한 접착제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프랜과 이디스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많은 문제들이 조여 오고 있었다. 프랜의 병원비는 75달러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디스는 병원비 충당을 위해 아이를 위해 만들었던 아기 침대를 팔아야 했다. 75달러를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이디스는 병원 원무과에 찾아갔다. 그녀는 병원장에게 그녀의 경제적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그런 경우를 위해 펀드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때 당시, 펀드에는 정확히 75달러가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교수님 사모님의 꾸중을 기억하며 이디스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세세한 기도에 까지 진실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 보다 더 큰 증거는 없다!”
프랜의 건강은 점차 회복되어 갔고 출산일도 다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들의 삶에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머천의 논쟁이 신학교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다. 많은 말다툼(dispute)이 싸움(struggle)에서 시작되었지만, 표면상으로는 두 가지 주요한 이슈로 구체화 되었다. 하나는 개인의 자유 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내용이었다. 1933년 말, 금주법이 철회되었다. 이제 미국인들은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담배, 춤, 카드 놀이 등 소위 성경적으로 경박하다고 하는 것들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조치였다. 이 이슈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라고 여기지 않았음에도 신학교 안에서는 많은 반대가 있었다. 프랜의 입장도 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프랜은 이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꽤 흥분되어 있었고, 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두번째 이슈는 종말의 시점에 대한 것이었다. 19세기는 낙관주의가 팽배한 진보의 세기였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세계대전이 있었고, 뒤따라서 세계 경제 공항이 있었던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먼 시기였다. 세계는 쇠퇴하는 듯 보였고,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에서는 공격적인 파시즘이 나타났으며 러시아에서는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일어났다. 이런 비관주의는 “전천년설”로 불리는 종말론을 대두시켰다. 이 관점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 세상은 점점 악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19세기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런 견해를 미치광이를 위한 피난처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20세기의 끔찍한 일들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종말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연히 웨스트민스터의 광신자들이 그것을 놓고 논쟁을 했다.
“성경이 사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만 봐서는 안된다.” 프랜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인정했다.
그래서 그 두 이슈들은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새 교회의 교리를 정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얼버무리거나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중재자를 원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밴 틸은 장로는 아니었지만 선동가였다. 1937년에 이 두가지 이슈에 대한 뜨거운 논쟁 후에 몇몇 교수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전천년설에 대해 논쟁을 그만(bolt)하기로 결정했다.
“여전히 다른 새 교회들과 새 신학교들이 똑같이 하고 있어요!” 프랜이 실망한 듯 말했다.
사무엘 라이어드는 다른 분파를 만들었다. 그는 윌밍톤, 델라웨어에 있는 그의 첫 독립 교회를 위해 반대 입장에 선 교수들을 권했다. 그것은 별난 허상처럼 보였다. 1937년 가을에 성경 장로 교회와 페이스(Faith)신학교가 시작될 것이었다. 앨런 맥레이가 지휘하는 새 신학교는 칼 맥킨티어, 레이어드 헤리스, 로이 브럼버흐, 프레드 페이스트를 포함한 반대자들에게 일시적인 신용을 얻었다. 25명의 탈퇴한 학생 중에는 동영과 프랜시스 쉐퍼도 있었다. 사실, 프랜은 페이스 신학교에 처음 등록한 학생이었다. 그것은 싸우려는 사람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고, 당국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미국 장로교회들이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를 고수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 페이스 신학과 성경 장로 교회는 근본주의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프랜은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다르게 생각했다. “우리는 진정한 칼빈주의이고, 개혁교회이다.”
이디스의 몸 상태 때문에, 1937년 여름에는 캠프 일을 하지 못했다. 새로운 신학교의 총장 앨런 맥레이는 그 여름에 프랜을 고용했다. 두 사람은 개강을 위해 할 일이 많았다. 6월 초에 이디스는 산고를 겪었다. 프랜은 그녀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는 과속 때문에 경찰에 잡힐 뻔했지만 오히려 이디스 때문에 경찰관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의사는 아이가 나오려는 산고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프랜은 여전히 그의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는 이디스가 그것이 산고가 아니라는 것을 모를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디스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6월 18일, 프랜과 이디스가 이디스의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그녀의 양수가 터졌다.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정말이었다.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디스는 태아를 돕기 위한 호흡법조차 몰랐다. 그녀는 긴장했고 진통과 싸워야 했다. 몇 시간 후에 그녀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에테르 마스크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자 그녀는 잠들었다. 분만실 밖에 있던 프랜은 간호사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오?” 프랜이 물었다.
그는 나중에 저녁 11시 20분에 프리실라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 것이었다! 분만실에서는 의사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결국 인공호흡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다시 한번 이 의사는 이디스를 구하게 되었다. 산모들은 병원에서 2주정도를 더 머문다. 그래서 이디스와 프리실라는 프랜과 앨런 맥레이가 신학교에서 일하는 동안 병원에서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한달 뒤에, 이디스는 새 신학교를 돕겠다고 했다. 프랜이 하는 일은 신학교에 등록할 학생과 교수를 찾는 일이었다. 그래서 프리실라와 함께 이디스는 윌밍톤의 모텔에서 묶었다. 프랜은 집을 사려고 했다. 그들은 교회에서 두 블록정도 떨어진 집을 찾을 수 있었다. 3층짜리 집이었는데 상당한 리모델링이 필요한 집이었다. 그러나 프랜에게 다 방책이 있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정말 감사할 따름이오. 리모델링, 배관공사, 배선, 못질 등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소.”
수리를 위해서는 약간의 돈이 필요했다. 그는 폐품 처리장에서 싱크대, 난로, 변기, 세면기 등을 가져왔다. 그는 배관, 배선 같이 혼자 하기 힘든 일은 사람을 불러서 했다. 중고 가구도 구입했다. 이디스는 침대보와 커텐에 필요한 것을 찾아왔다. 이디스의 도움으로 프랜은 9월에 공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곧 이사왔다. 그리니 거리로부터 그들의 가구를 옮겨온 것은 비가 오는 8월이었다. 그리고 나서 프랜과 이디스, 두달 된 프리실라가 오게 되었다. 윌밍턴으로 오는 동안 프리실라의 갑작스런 설사 때문에 고생을 했다. 기저기도 소용이 없었다. 프랜은 차 안에 가득한 냄새를 견딜 수 없어서 화를 내고 말았다.
“기저기도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거요. 당신?” 이디스를 향해 노발대발했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 진 프랜이 급정거를 했고 젖은 도로 위에서 차가 미끄러져 앞차를 박았다. 이디스는 프랜이 내려서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차분히 내려서 사고 상황을 살폈다. 범퍼가 커서 다행히 피해는 없었다. 그는 다시 차에 올라타서 윌밍턴으로 향했다. 이디스는 그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갑작스런 침착함이 너무 당혹스러웠다.
“추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렇게 해야 했소.”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히브리서 12장 11절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소.”
이디스도 히브리서 12장 11절 말씀을 알고 있었다. “무릇 징계는 어떤 것이든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 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프랜은 계속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사고를 통해 화내고 분냄에 대해서 나를 단련하고 계셨다고 믿소.”
그리고 이디스는 그 사고 이후에 프랜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화가 날 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예전에 그는 강한 집착 때문에 종종 화를 내곤 했다. 여전히 그는 가끔 화를 내는 것 처럼 보이고 때때로 분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의 행동들에 대해 미안해 하게 되었다. 적어도 그의 노력은 이디스에게는 크나 큰 선물이었다. 그녀가 받은 또 다른 선물은 그녀의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신학교의 그리스어 강사로 고용되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주부들의 기도 모임을 인도했다. 몇몇의 여자들이 중국 선교의 베테랑의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인들이 교수의 아내로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 이디스의 어머니는 “교회 안에서 종소리나 듣고 있기 보다는 밖에서 죽어가는 영혼을 구하는 삶이고 싶다”고 말한 위대한 선교사 C.T.스터드처럼 열심을 다했다.
페이스 신학 대학의 강의실로 사용된 교회 건물은 발티모어와 오하이오 기차역 맞은 편에 있었다. 학생들이 진지한 만큼, 그들은 거대한 로열 블루호가 뉴욕에서 워싱턴 D.C.짜기 엄청난 속도로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기차가 지나갈 때면 학생들이 창가로 모여 들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1937년은 순진 무구한 해로 기억 될 것이다.
1938년 5월, 프랜은 전과목 A라는 좋은 성적으로 페이스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성경 장로 교회에 임명된 최초의 목사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보다 좋은 것은, 그가 마침내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많은 타이틀이 붙었다. 그는 감독이었고, 목사였고, 성직자였고, 장로였고, 대사였고, 교회의 천사였고, 하나님의 신령한 집사였다. 얼마나 책임이 컸는지 모른다.
예배하는 동안 이디스는 신학생들이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한 불의 혀를 주소서”라는 찬양을 할 때 큰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을 향한 얼마나 간절한 마음인가!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젊은이들의 마음에 저런 간절함이 있다니..
1938년에 신학교를 떠난 쉐퍼 부부는 1935년 9월에 신학을 시작했던 다른 신혼 부부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프랜은 목사였고, 매우 익숙해졌다. 이디스는 목사 사모였고, 미리실라의 어머니였다. 프리실라는 아장아장 걷고 있다. 쉐퍼 가족은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한다는 그들의 꿈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필라델피아에서 350마일 떨어진 펜실베니아의 그로브 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곳은 피츠버그 북쪽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 길로 나는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죠… 이디스는 생각했다. 그녀는 새 도로와 옛 도로가 씨실과 날씰 처럼 엮여 있다고 생각했다. 1844년에, 그러니까 거의 1세기 전, 북 아일랜드 세인트필드에 있었던 그녀의 증조부 제이콥 크룩스와 증조모 낸시 맥로버츠 크룩스가 피츠버그 북쪽의 얼레그니 강 근처 농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 그들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한명은 이디스 아버지의 어머니인 3살의 엘리자 제인이었다. 낸시 크룩스는 그 가족들에게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호통은 아주 맹렬했다고 사람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밀가루를 다 써버려서 제이콥이 불평할 때, “그것의 마지막을 볼 수 있어서 기쁘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세빌랴의 가족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존 제빌랴는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태어나서 30세가 되던 1819년에 피츠버그로 오게 되었다. 남북전쟁은 존과 그의 세 아들의 죽음으로 세빌랴가에 아픔을 남겼다. 그러나 존이라는 이름의 또 한명의 아들은 남북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존 세빌랴는 엘리자 제인 크룩스와 결혼했다. 그들의 자녀 중에 한명이 이디스의 아버지 조지였다. 그래서 이디스는 펜실베이아 서부에서 예전부터 살았던 것 같이 느껴졌다.
그로브 시의 두 명의 장로가 프란시스 쉐퍼 목사의 이사를 돕기 위해 트럭을 끌고 윌밍턴 까지 왔다. 쉐퍼의 가족은 그들의 자동차로 트럭을 따라갔다. 그로브 시의 언약 장로교회는 지나치게 자유로운 기존의 장로교를 떠난 18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재향군인회 회관에서 만났다. 쉐퍼 가족은 8층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1층에는 주방과 방3개가 있었다. 프랜의 봉급은 한달에 100달러였다. 전세비와 보험료를 제외하고 나면 45달러가 남았다. 발육이 빨랐던 프리실라는 엉뚱한 일을 할 때가 많았다. 약을 모두 변기에 넣어 버린 것이었다.
이디스는 프랜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다. “약이 문제가 아니라 변기가 넘쳤어요.”
주일 아침은 프랜의 첫 설교가 있는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그 교회는 재향 군인회 회관 회의실 윗 층에 있었다. 18명의 회원들이 있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전에 있던 장로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디스는 프리실라를 위해서 기도했다. 이디스는 프랜을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성령하나님께서 프랜을 통해 말씀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것은 그녀의 습관이 되었다. 그녀는 더러운 것들이 그녀의 생각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했다. 그것은 예배때 프랜이 진리의 말씀을 청중들에게 잘 전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설교자의 연약함 때문에 말씀의 능력이 제한된다고 믿지 않았다. 설교자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는 그 말씀을 설교 할 수 있을까? 이디스는 그렇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가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설교는 잘 되가고 있었다. 다만 프리실라가 문제였다. 그는 그들의 어린이들을 불러와야 한다고 격려할 참이었다. 아이들을 모아올 자신이 있었다. 여름이고 소시지 파티를 하기에 좋지 않은가? 그는 마을의 울창한 공원에서 파티하기 좋은 곳을 찾았다. 그는 핫도그, 롤빵, 마쉬맬로우, 아이스크림 등을 샀다. 그리고 나서 놀랄만한 일을 했다. 그는 차를 가지고 와서 소년들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헤이, 너희들 소시지 파티에 가고 싶지 않니?” 그는 구슬치기를 하고 있는 소년들을 큰 소리로 불렀다.
“핫도그와 아이스크림 어떠니?” 그는 야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는 곳 17명의 남자 아이들을 모았다.
소시지가 다 구워질 무렵 그는 아이들에게 소시지를 주면서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프랜을 “Rev(목사님)”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번에 또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소시지 파티는 매주 하게 되었고, 매번 20명 정도의 아이들이 모였다. 이 아이들은 프랜의 2주 여름 성경학교의 토대가 되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프랜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성경학교에 아이들을 초청했다. 결과는 경이적이었다.
“79명!” 이디스는 성경학교 첫날에 놀라면서 말했다.
그들은 5살에서 10살 정도의 아이들이었다. 이디스의 어머니가 도와주러 오신 것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여자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성경학교가 끝날쯤 에는 100명으로 불어났다.
아직까지도 이디스는 그 당시에 그렇게 작은 마을에서 단시간에 그 많은 아이들을 모아온 것에 대해서 경이롭게 생각한다. 그녀는 캠프에 있었을 때부터 그를 지켜봐 왔다. 그는 아이들을 아주 잘 다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즐거움 가운데서 그는 복음을 전했다. 성경학교 마지막 프로그램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들은 가족들과 친척들을 위한 공연을 준비했다. 그것은 진지하면서도 매우 재미있는 공연이었다. 이디스는 몇 명의 아이들이 성경학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어머니와 내가 돕긴 했지만,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것에는 프랜의 공이 컸어요.”
그러나 이런 성공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적은 수의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나왔다. 여전히 프랜과 이디스는 끈기 있게 일해야 했다. 그들은 그로브 시립 대학에서 학생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고, 교회에 나올 것을 권했고, 집에서 하는 청년부 모임에 오도록 권했다. 그들은 고등학생들을 위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인 “신비한 책 클럽”이라는 모임을 열었다. 프랜 식구들도 가난했지만, 그들은 오래된 집을 구했다. 프랜과 이디스는 고칠 것 투성인 집을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 집은 넓어서 사람들이 모이기에 좋은 곳이었다.
“저녁에 모임이 없으면, 가구를 손질 할 수 있어요.” 두 사람은 동의했다. 프랜은 사람들과 통화할 때 조차도 가구를 손질했다. 사포질을 하면서 말이다. 예배 참석자의 수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늘었다. 2년 후에는 100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그가 어두운 곳에 버려진 작고 판잣집 같은 교회를 발견했을 때, 그는 노회에 그 교회를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교회는 4개의 얼룩진 창문이 있었다. 그들은 낡은 교회를 나눠서 그로브 시티에 새로 지었다. 그러나 프랜과 몇몇 사람만이 교회의 뽀족탑에 페인트 칠을 위해 사다리에 올랐다.
1940년 어느 날, 프랜은 그의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아프시다, 빨리 오너라.”
프랜은 저먼타운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정신만은 칼 같았다. 그는 프랜에게 드디어 자신을 예수님께 데려가 달라고 청했다. 처음으로 그의 아버지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 그는 되도록이면 난해한 신학 용어를 빼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렸다.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아버지는 거듭난 삶을 살게 외었다. 1년 후에 프랜의 부모님이 그로브 시에 방문했을 때, 프랜과 이디스는 부모님께 자신의 침대에서 주무시도록 했다. 부모님께서는 그들에게 새 전자 제품을 주겠다고 하셔서 불편함이 사라졌다.
“세탁기와 냉장고라구요!” 이디스가 소리쳤다.
새 교회 건물 봉헌식이 끝났을 때, 성도 수는 110명으로 늘어났다. 프랜은 그로브 시에서 3년간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나서 1941년에 프랜은 펜실베니아의 체스터에 있는 교회에서 부교역자 후보가 되길 바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체스터의 교회는 매우 컸다. 그 뿐아니라 체스터는 필라델피아 남부에 있는 도시였다. 프랜과 이디스는 부모님과, 오래된 친구들, 그리고 페이스 신학교의 동료들과 가까워 질 수 있었다.
프랜과 이디스는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113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eight
“아이를 가진 것 같아요...” 이디스가 프랜에게 말했다.
이디스는 출산 준비로 전보다 더 많은 것들을 만들었다. 고객들이 재료를 주면 그녀는 예쁜 옷을 만들어 냈다. 겨울 코드는 8달러에, 주름 장식을 한 롱 드레스는 5달러에 팔았다. 그러고 나니 그들의 재정적 상황은 악화되었다. 그 해 가을 프랜은 맹장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가야 했다. 갑작스런 맹장 수술과 2주간의 입원으로 재정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게다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그의 공부를 방해했다. 저녁에 이디스는 존 영의 신학교 수업 노트를 배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 노트를 프랜에게 갖다 준다. 입덧 할 겨를도 없었다.
“고맙소.” 병원에서 막 자다 일어난 프랜이 말했다. 그가 이디스 없는 삶을 상상이라도 했을까? 퇴원하고 나서도 그는 한달 동안 신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1937년 1월의 어느날 프랜은 아파트에서 그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가 머천 교수의 시험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그 충격적인 소식은 머천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는 겨우 56세였는데… 그는 미국 장로교의 증진을 위해 미 북부 교회들을 순방하는 중이었다. 그는 독감을 앓고 있었고, 그의 계약은 여전했다. 그의 감기는 폐렴으로 발전했다. 비스마르크 노스 다코타에서 그는 병원에 가야 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리스도의 순종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였다.
머천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거장이었다. 그는 또한 새로운 미국 장로교를 위한 접착제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프랜과 이디스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많은 문제들이 조여 오고 있었다. 프랜의 병원비는 75달러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디스는 병원비 충당을 위해 아이를 위해 만들었던 아기 침대를 팔아야 했다. 75달러를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이디스는 병원 원무과에 찾아갔다. 그녀는 병원장에게 그녀의 경제적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그런 경우를 위해 펀드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때 당시, 펀드에는 정확히 75달러가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교수님 사모님의 꾸중을 기억하며 이디스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세세한 기도에 까지 진실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 보다 더 큰 증거는 없다!”
프랜의 건강은 점차 회복되어 갔고 출산일도 다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들의 삶에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머천의 논쟁이 신학교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다. 많은 말다툼(dispute)이 싸움(struggle)에서 시작되었지만, 표면상으로는 두 가지 주요한 이슈로 구체화 되었다. 하나는 개인의 자유 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내용이었다. 1933년 말, 금주법이 철회되었다. 이제 미국인들은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담배, 춤, 카드 놀이 등 소위 성경적으로 경박하다고 하는 것들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조치였다. 이 이슈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라고 여기지 않았음에도 신학교 안에서는 많은 반대가 있었다. 프랜의 입장도 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프랜은 이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꽤 흥분되어 있었고, 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두번째 이슈는 종말의 시점에 대한 것이었다. 19세기는 낙관주의가 팽배한 진보의 세기였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세계대전이 있었고, 뒤따라서 세계 경제 공항이 있었던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먼 시기였다. 세계는 쇠퇴하는 듯 보였고,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에서는 공격적인 파시즘이 나타났으며 러시아에서는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일어났다. 이런 비관주의는 “전천년설”로 불리는 종말론을 대두시켰다. 이 관점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 세상은 점점 악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19세기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런 견해를 미치광이를 위한 피난처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20세기의 끔찍한 일들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종말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연히 웨스트민스터의 광신자들이 그것을 놓고 논쟁을 했다.
“성경이 사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만 봐서는 안된다.” 프랜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인정했다.
그래서 그 두 이슈들은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새 교회의 교리를 정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얼버무리거나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중재자를 원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밴 틸은 장로는 아니었지만 선동가였다. 1937년에 이 두가지 이슈에 대한 뜨거운 논쟁 후에 몇몇 교수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전천년설에 대해 논쟁을 그만(bolt)하기로 결정했다.
“여전히 다른 새 교회들과 새 신학교들이 똑같이 하고 있어요!” 프랜이 실망한 듯 말했다.
사무엘 라이어드는 다른 분파를 만들었다. 그는 윌밍톤, 델라웨어에 있는 그의 첫 독립 교회를 위해 반대 입장에 선 교수들을 권했다. 그것은 별난 허상처럼 보였다. 1937년 가을에 성경 장로 교회와 페이스(Faith)신학교가 시작될 것이었다. 앨런 맥레이가 지휘하는 새 신학교는 칼 맥킨티어, 레이어드 헤리스, 로이 브럼버흐, 프레드 페이스트를 포함한 반대자들에게 일시적인 신용을 얻었다. 25명의 탈퇴한 학생 중에는 동영과 프랜시스 쉐퍼도 있었다. 사실, 프랜은 페이스 신학교에 처음 등록한 학생이었다. 그것은 싸우려는 사람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고, 당국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미국 장로교회들이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를 고수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 페이스 신학과 성경 장로 교회는 근본주의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프랜은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다르게 생각했다. “우리는 진정한 칼빈주의이고, 개혁교회이다.”
이디스의 몸 상태 때문에, 1937년 여름에는 캠프 일을 하지 못했다. 새로운 신학교의 총장 앨런 맥레이는 그 여름에 프랜을 고용했다. 두 사람은 개강을 위해 할 일이 많았다. 6월 초에 이디스는 산고를 겪었다. 프랜은 그녀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는 과속 때문에 경찰에 잡힐 뻔했지만 오히려 이디스 때문에 경찰관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의사는 아이가 나오려는 산고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프랜은 여전히 그의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는 이디스가 그것이 산고가 아니라는 것을 모를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디스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6월 18일, 프랜과 이디스가 이디스의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그녀의 양수가 터졌다.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정말이었다.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디스는 태아를 돕기 위한 호흡법조차 몰랐다. 그녀는 긴장했고 진통과 싸워야 했다. 몇 시간 후에 그녀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에테르 마스크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자 그녀는 잠들었다. 분만실 밖에 있던 프랜은 간호사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오?” 프랜이 물었다.
그는 나중에 저녁 11시 20분에 프리실라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 것이었다! 분만실에서는 의사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결국 인공호흡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다시 한번 이 의사는 이디스를 구하게 되었다. 산모들은 병원에서 2주정도를 더 머문다. 그래서 이디스와 프리실라는 프랜과 앨런 맥레이가 신학교에서 일하는 동안 병원에서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한달 뒤에, 이디스는 새 신학교를 돕겠다고 했다. 프랜이 하는 일은 신학교에 등록할 학생과 교수를 찾는 일이었다. 그래서 프리실라와 함께 이디스는 윌밍톤의 모텔에서 묶었다. 프랜은 집을 사려고 했다. 그들은 교회에서 두 블록정도 떨어진 집을 찾을 수 있었다. 3층짜리 집이었는데 상당한 리모델링이 필요한 집이었다. 그러나 프랜에게 다 방책이 있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정말 감사할 따름이오. 리모델링, 배관공사, 배선, 못질 등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소.”
수리를 위해서는 약간의 돈이 필요했다. 그는 폐품 처리장에서 싱크대, 난로, 변기, 세면기 등을 가져왔다. 그는 배관, 배선 같이 혼자 하기 힘든 일은 사람을 불러서 했다. 중고 가구도 구입했다. 이디스는 침대보와 커텐에 필요한 것을 찾아왔다. 이디스의 도움으로 프랜은 9월에 공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곧 이사왔다. 그리니 거리로부터 그들의 가구를 옮겨온 것은 비가 오는 8월이었다. 그리고 나서 프랜과 이디스, 두달 된 프리실라가 오게 되었다. 윌밍턴으로 오는 동안 프리실라의 갑작스런 설사 때문에 고생을 했다. 기저기도 소용이 없었다. 프랜은 차 안에 가득한 냄새를 견딜 수 없어서 화를 내고 말았다.
“기저기도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거요. 당신?” 이디스를 향해 노발대발했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 진 프랜이 급정거를 했고 젖은 도로 위에서 차가 미끄러져 앞차를 박았다. 이디스는 프랜이 내려서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차분히 내려서 사고 상황을 살폈다. 범퍼가 커서 다행히 피해는 없었다. 그는 다시 차에 올라타서 윌밍턴으로 향했다. 이디스는 그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갑작스런 침착함이 너무 당혹스러웠다.
“추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렇게 해야 했소.”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히브리서 12장 11절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소.”
이디스도 히브리서 12장 11절 말씀을 알고 있었다. “무릇 징계는 어떤 것이든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 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프랜은 계속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사고를 통해 화내고 분냄에 대해서 나를 단련하고 계셨다고 믿소.”
그리고 이디스는 그 사고 이후에 프랜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화가 날 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예전에 그는 강한 집착 때문에 종종 화를 내곤 했다. 여전히 그는 가끔 화를 내는 것 처럼 보이고 때때로 분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의 행동들에 대해 미안해 하게 되었다. 적어도 그의 노력은 이디스에게는 크나 큰 선물이었다. 그녀가 받은 또 다른 선물은 그녀의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신학교의 그리스어 강사로 고용되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주부들의 기도 모임을 인도했다. 몇몇의 여자들이 중국 선교의 베테랑의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인들이 교수의 아내로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 이디스의 어머니는 “교회 안에서 종소리나 듣고 있기 보다는 밖에서 죽어가는 영혼을 구하는 삶이고 싶다”고 말한 위대한 선교사 C.T.스터드처럼 열심을 다했다.
페이스 신학 대학의 강의실로 사용된 교회 건물은 발티모어와 오하이오 기차역 맞은 편에 있었다. 학생들이 진지한 만큼, 그들은 거대한 로열 블루호가 뉴욕에서 워싱턴 D.C.짜기 엄청난 속도로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기차가 지나갈 때면 학생들이 창가로 모여 들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1937년은 순진 무구한 해로 기억 될 것이다.
1938년 5월, 프랜은 전과목 A라는 좋은 성적으로 페이스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성경 장로 교회에 임명된 최초의 목사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보다 좋은 것은, 그가 마침내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많은 타이틀이 붙었다. 그는 감독이었고, 목사였고, 성직자였고, 장로였고, 대사였고, 교회의 천사였고, 하나님의 신령한 집사였다. 얼마나 책임이 컸는지 모른다.
예배하는 동안 이디스는 신학생들이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한 불의 혀를 주소서”라는 찬양을 할 때 큰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을 향한 얼마나 간절한 마음인가!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젊은이들의 마음에 저런 간절함이 있다니..
1938년에 신학교를 떠난 쉐퍼 부부는 1935년 9월에 신학을 시작했던 다른 신혼 부부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프랜은 목사였고, 매우 익숙해졌다. 이디스는 목사 사모였고, 미리실라의 어머니였다. 프리실라는 아장아장 걷고 있다. 쉐퍼 가족은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한다는 그들의 꿈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필라델피아에서 350마일 떨어진 펜실베니아의 그로브 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곳은 피츠버그 북쪽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 길로 나는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죠… 이디스는 생각했다. 그녀는 새 도로와 옛 도로가 씨실과 날씰 처럼 엮여 있다고 생각했다. 1844년에, 그러니까 거의 1세기 전, 북 아일랜드 세인트필드에 있었던 그녀의 증조부 제이콥 크룩스와 증조모 낸시 맥로버츠 크룩스가 피츠버그 북쪽의 얼레그니 강 근처 농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 그들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한명은 이디스 아버지의 어머니인 3살의 엘리자 제인이었다. 낸시 크룩스는 그 가족들에게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호통은 아주 맹렬했다고 사람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밀가루를 다 써버려서 제이콥이 불평할 때, “그것의 마지막을 볼 수 있어서 기쁘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세빌랴의 가족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존 제빌랴는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태어나서 30세가 되던 1819년에 피츠버그로 오게 되었다. 남북전쟁은 존과 그의 세 아들의 죽음으로 세빌랴가에 아픔을 남겼다. 그러나 존이라는 이름의 또 한명의 아들은 남북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존 세빌랴는 엘리자 제인 크룩스와 결혼했다. 그들의 자녀 중에 한명이 이디스의 아버지 조지였다. 그래서 이디스는 펜실베이아 서부에서 예전부터 살았던 것 같이 느껴졌다.
그로브 시의 두 명의 장로가 프란시스 쉐퍼 목사의 이사를 돕기 위해 트럭을 끌고 윌밍턴 까지 왔다. 쉐퍼의 가족은 그들의 자동차로 트럭을 따라갔다. 그로브 시의 언약 장로교회는 지나치게 자유로운 기존의 장로교를 떠난 18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재향군인회 회관에서 만났다. 쉐퍼 가족은 8층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1층에는 주방과 방3개가 있었다. 프랜의 봉급은 한달에 100달러였다. 전세비와 보험료를 제외하고 나면 45달러가 남았다. 발육이 빨랐던 프리실라는 엉뚱한 일을 할 때가 많았다. 약을 모두 변기에 넣어 버린 것이었다.
이디스는 프랜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다. “약이 문제가 아니라 변기가 넘쳤어요.”
주일 아침은 프랜의 첫 설교가 있는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그 교회는 재향 군인회 회관 회의실 윗 층에 있었다. 18명의 회원들이 있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전에 있던 장로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디스는 프리실라를 위해서 기도했다. 이디스는 프랜을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성령하나님께서 프랜을 통해 말씀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것은 그녀의 습관이 되었다. 그녀는 더러운 것들이 그녀의 생각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했다. 그것은 예배때 프랜이 진리의 말씀을 청중들에게 잘 전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설교자의 연약함 때문에 말씀의 능력이 제한된다고 믿지 않았다. 설교자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는 그 말씀을 설교 할 수 있을까? 이디스는 그렇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가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설교는 잘 되가고 있었다. 다만 프리실라가 문제였다. 그는 그들의 어린이들을 불러와야 한다고 격려할 참이었다. 아이들을 모아올 자신이 있었다. 여름이고 소시지 파티를 하기에 좋지 않은가? 그는 마을의 울창한 공원에서 파티하기 좋은 곳을 찾았다. 그는 핫도그, 롤빵, 마쉬맬로우, 아이스크림 등을 샀다. 그리고 나서 놀랄만한 일을 했다. 그는 차를 가지고 와서 소년들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헤이, 너희들 소시지 파티에 가고 싶지 않니?” 그는 구슬치기를 하고 있는 소년들을 큰 소리로 불렀다.
“핫도그와 아이스크림 어떠니?” 그는 야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는 곳 17명의 남자 아이들을 모았다.
소시지가 다 구워질 무렵 그는 아이들에게 소시지를 주면서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프랜을 “Rev(목사님)”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번에 또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소시지 파티는 매주 하게 되었고, 매번 20명 정도의 아이들이 모였다. 이 아이들은 프랜의 2주 여름 성경학교의 토대가 되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프랜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성경학교에 아이들을 초청했다. 결과는 경이적이었다.
“79명!” 이디스는 성경학교 첫날에 놀라면서 말했다.
그들은 5살에서 10살 정도의 아이들이었다. 이디스의 어머니가 도와주러 오신 것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여자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성경학교가 끝날쯤 에는 100명으로 불어났다.
아직까지도 이디스는 그 당시에 그렇게 작은 마을에서 단시간에 그 많은 아이들을 모아온 것에 대해서 경이롭게 생각한다. 그녀는 캠프에 있었을 때부터 그를 지켜봐 왔다. 그는 아이들을 아주 잘 다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즐거움 가운데서 그는 복음을 전했다. 성경학교 마지막 프로그램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들은 가족들과 친척들을 위한 공연을 준비했다. 그것은 진지하면서도 매우 재미있는 공연이었다. 이디스는 몇 명의 아이들이 성경학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어머니와 내가 돕긴 했지만,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것에는 프랜의 공이 컸어요.”
그러나 이런 성공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적은 수의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나왔다. 여전히 프랜과 이디스는 끈기 있게 일해야 했다. 그들은 그로브 시립 대학에서 학생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고, 교회에 나올 것을 권했고, 집에서 하는 청년부 모임에 오도록 권했다. 그들은 고등학생들을 위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인 “신비한 책 클럽”이라는 모임을 열었다. 프랜 식구들도 가난했지만, 그들은 오래된 집을 구했다. 프랜과 이디스는 고칠 것 투성인 집을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 집은 넓어서 사람들이 모이기에 좋은 곳이었다.
“저녁에 모임이 없으면, 가구를 손질 할 수 있어요.” 두 사람은 동의했다. 프랜은 사람들과 통화할 때 조차도 가구를 손질했다. 사포질을 하면서 말이다. 예배 참석자의 수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늘었다. 2년 후에는 100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그가 어두운 곳에 버려진 작고 판잣집 같은 교회를 발견했을 때, 그는 노회에 그 교회를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교회는 4개의 얼룩진 창문이 있었다. 그들은 낡은 교회를 나눠서 그로브 시티에 새로 지었다. 그러나 프랜과 몇몇 사람만이 교회의 뽀족탑에 페인트 칠을 위해 사다리에 올랐다.
1940년 어느 날, 프랜은 그의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아프시다, 빨리 오너라.”
프랜은 저먼타운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정신만은 칼 같았다. 그는 프랜에게 드디어 자신을 예수님께 데려가 달라고 청했다. 처음으로 그의 아버지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 그는 되도록이면 난해한 신학 용어를 빼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렸다.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아버지는 거듭난 삶을 살게 외었다. 1년 후에 프랜의 부모님이 그로브 시에 방문했을 때, 프랜과 이디스는 부모님께 자신의 침대에서 주무시도록 했다. 부모님께서는 그들에게 새 전자 제품을 주겠다고 하셔서 불편함이 사라졌다.
“세탁기와 냉장고라구요!” 이디스가 소리쳤다.
새 교회 건물 봉헌식이 끝났을 때, 성도 수는 110명으로 늘어났다. 프랜은 그로브 시에서 3년간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나서 1941년에 프랜은 펜실베니아의 체스터에 있는 교회에서 부교역자 후보가 되길 바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체스터의 교회는 매우 컸다. 그 뿐아니라 체스터는 필라델피아 남부에 있는 도시였다. 프랜과 이디스는 부모님과, 오래된 친구들, 그리고 페이스 신학교의 동료들과 가까워 질 수 있었다.
프랜과 이디스는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