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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7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7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5m8A/111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seven
 
“맙소사” 프랜은 소리쳤다. “우리 교회가 J.그래샴 머천의 지위를 박탈할 거라니.. 우리 신학교 총장을!”
J.그래샴 머천과 그의 동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을 뿐 아니라 1933년 장로교 해외 선교를 위한 독립회의를 설립했다. 그들은 머천이 장로교를 전세계에 전하려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에 대해 격분했다. 이런 충격적인 사태가운데, 브런즈윅 장로교는 머천이 미국 장로교가 정한 성직안수식을 위반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지위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 일이 신학교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지?” 프랜은 믿기 어려웠다.
이에 대하여 머천과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그의 동료들은 새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서둘렀다. 머천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성경을 온전히 및는 보수적인 사람을 통해 그의 교회를 든든히 하길 원했다. 그는 결코 교회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36년 미합중국(U.S.A) 장로교 총회에서 그의 과실에 대한 판결이 나오게 되어있었다. 머천의 새 교회는 미국(America)의 장로교회라고 불리게 될 것이었다. 그 날은 프랜이 햄프던 시드니를 졸업하는 날과 같았다. 프랜은 어디로 가야할지 고심했다. 머천과 웨스트민스터에서 있었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교역자들이 교회 안에서 방어적인 자세로 싸워야 하는걸까? 아니면 그곳에서 나와서 새 교회를 시작해야 하는 걸까? 역사에는 위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머물렀고, 어떤 이들은 탈퇴했다. 그러나 프랜은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았다. 그는 총회에서 머천의 일을 결론지을 때 까지 미합중국 장로교에 머물기로 했다.
“먼저는 이번 여름에 이디스와 결혼할거야.”
그는 생각했다.

프랜과 이디스는 7월에 결혼하기로 했다. 장인어른도 흔쾌히 승락했다. 프랜의 아버지(이디스는 벌써 아버지-Pop-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도 반대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반대했다. 그녀는 여유가 있을 때 까지는 결혼하지 않았으면 했다. 프랜이 아직 학생인데 어떻게 결혼한단 말인가? 그녀는 결혼식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이디스는 시댁에 자주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상처를 받았다. 이디스는 시어머니를 용서하고 안좋은 일을 감추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큰 상처가 되었다.

마침내 이디스는 쉐퍼와 함께 햄프던 시드니로 갔다. 4일 후면 프랜의 졸업식이 있다! 졸업식은 꽤나 성스러운 분위기였다. 캠퍼스에는 초목과 꽃들로 가득했다. 아주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교회안에 졸업생들로 가득한 모습이 절정을 이루었다.

프랭크 쉐퍼가 이디스에게 귓속말로 물어봤다. “저기 리본으로 말려있는 흰 두루마기들은 다 뭐냐?” 이디스가 대답했다. “졸업장이에요 아버지, 학위를 증명하는 거요”
프랭크는 순서지에서 아들의 이름을 봤다. “아들 이름이 세 번이나 나오는구나. 두 번보다 나은 거 아니냐? 그렇지?”
“그래요 아버지, 프랜은 그동안 너무 잘 해왔어요.”
프랜이 캠퍼스에서 4년 동안 가장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설리번 상”을 받을 때 프랭크는 또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장식패와 매달을 수여받았다. 졸업식 수에 그는 이디스의 키스를 받았다. 둘 다 곧 있으면 결혼이라는 인생에 더 큰 이벤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랜은 제과점 일을 시작했다. 월급의 일부는 결혼식 케익으로 대체되었다. 이디스는 흰 레이스 주름장식이 있는 블라우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학교 과제로 이브닝 가운도 이미 만들어 놓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웨딩드레스 만드는 것을 도왔다.

그러는 동안 프랜은 그들의 아파트에 들어갈 가구를 모으고 있었다. 몇몇은 그가 직접 구했다. 그들은 필라델피아 그린 거리에 있는 아파트 3층을 구했다. 근처에 미술 박물관이 있었지만 이웃들은 아주 떨어져 있었다. 닳아 해진 아파트에는 4개의 방과 아주 작은 식당, 침식, 화장실, 주방이 있었다. 집은 주석 지붕 쪽이 열려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디스에게는 태양을 향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썩 괜찮치 않은 뒷마당 보기를 꺼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은 파인 거리(Pine Street)에 있어서 걸어가기 적당한 거리였다. 그러나 9월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혼 후에 미시간에 있는 미시던 캠프에서 캠핑 교사로 있어야 했기 때문이야.” 이디스는 놀라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이디스의 아버지는 1935년 7월에 웨인 거리에 있는 연합 장로교회에서 그들을 결혼시켰다. 그녀의 아버지가 신부와 같이 입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소가 변경되었다. 그의 친구이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의 교회사 교수인 폴 울레이가 대신했다. 신랑의 들러리는 역시 웨스트민스터 출신인 리차드 가핀이었다. 가핀과 그의 아내는 들꽃으로 교회를 장식했다. 이디스는 행동이 재빨랐다. 손님들이 도착하자마자 이디스는 그녀를 위해 만든 화관을 씌워주었다. 그녀는 신부 들러리를 위한 부케도 만들었다. 이디스의 부케는 크리스천 꽃 디자이너이 만들어 주었다. 마침내 결혼식이 열렸다. 엄숙하면서도 긴장된 예식이었다. 프랜과 이디스가 하나님 앞에 신중하게 서약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식을 마친후 그 긴장은 온데간데 없었다. 음악과 꽃과 음식과 친구들이 축제 분위기로 바꿔놓았기 때문이었다.
“행복해야해.” 이디스와 프랜을 태운 모델 A가 덜컹거리며 달려갈 때 하객들이 소리쳤다.

그들에게는 돈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가스와 임대 모텔 방을 구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처음 모텔로 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초코렛 밀크 쉐이크를 만들기 위해 멈춰섰다. 이디스의 아름다운 여행복이 얼룩졌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만들었다. 그녀는 흘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부모와 떨어져 본 것이었다. 이 신혼부부는 북쪽으로 여행했다. 클리브랜드에 도착할 때 까지 밤이 되면 모텔에서 쉬었다. 클리브랜드에서 그들은 이디스의 이모댁에서 머물렀다. 그들은 마치 왕족처럼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다. : 프라이드 치킨, 샐러드, 신선한 콩요리, 이모가 직접 만든 잼과 젤리가 올려진 따뜻한 비스켓 등을 먹었다.

2주후에 그들은 미치던 캠프에 도착했다. 그들은 장난꾸러기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약간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디스는 가죽 공예를 가르치는데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인명구조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그것은 시시해 보였다. 한번은 그녀가 직접 물에 빠진 소녀를 구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 자신을 가르쳤어야 했다. 그 해 여름, 돈을 절약하기 위해 그녀는 프랜의 머리를 직접 손질하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손질해 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두 사람은 여름 성경 학교 건물의 꼭대기 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것은 이디스가 어렸을 때 꿈꾸었던 파리의 다락방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아주 얇은 매트리스로 된 좁은 간이 침대가 두개 있었다. 의자 두개와 한 움큼 정도의 옷걸이가 걸려있는 작은 식기장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방은 낮에는 열기 때문에 지내기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디스는 한 쌍의 예쁜 걸상을 만들었다. 이 작은 방은 그들의 첫 집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빈민가 같은 아파트는 이 방에 비하면 맨션과 같아!” 이디스는 밝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디스는 그 여름에 가죽 공예, 인명구조법, 이발에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운전은 잘 못했다. 펜실베니아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모텔로 들어가려다가 앞차를 박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녀가 천천히 운전했고, 앞차의 범퍼가 커서 다행이었다. 두 차 모두 큰 피해는 없었다. 프랜은 상대 운전자에게 정중히 사과 했지만 그 사람은 이디스의 부주의한 운전에 몹시 화를 냈다.

“나 다시는 운전 안할거에요,” 이디스가 말했다. 프랜이 좀 민첩했다면 그녀는 그에게 운전을 맡겼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둘 다 성격이 불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디스는 프랜보다 반발할 때가 많았다. 프랜은 덜 반발적이지만, 한번 화나면 자기 통제가 어려웠다. 이디스는 매번 갈등의 요소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프랜은 필라델피아까지 운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그녀 자신에게 말했다.
그들의 성미는 필라델피아에 도착했을 때 수그러들었다. 허름한 아파트는 여름에 보냈던 작은 다락방 보다는 훨씬 좋아보였다. 침실을 위해 프랜은 옷장과 서랍장을 손질했다. 그리고 철제 침대틀은 크림색으로 칠했다. 이디스는 서랍장에 가죽 손잡이를 댔고, 커튼과 새 침대를 잘 조화시켰다. 매일 밤 프랜은 침실에 카드 책상을 펼쳐 놓고 공부했다. 이디스는 제봉틀을 가지고 일했다.

그녀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옷을 만들었어요, 디자인하고, 만들고, 가죽 벨트와 버튼을 팔기도 했지요. 그걸로 먹을 것과 가스를 구입했어요. 늘 간신히 생활했죠.”
그 젊은 부부는 허름한 집을 늘 새집처럼 가꿨다. 매주마다 둘은 창문과 가구를 윤이 나도록 닦고, 마루에 왁스칠도 잊지 않았다. 지붕에 걸래를 던져 닦기도 했다. 프랜은 두개의 세탁통을 지붕으로 끌고 올라가서 청소햇다.
“다음 봄에는 지붕을 더 올려서 옥탑방을 만듭시다!” 그가 약속했다.
그들의 일상가운데 한 부분은 프랜이 아침을 하고 점심을 챙기는 것이었다. 점심에는 여러 가지 샌드위치와 샐러리, 당근, 건포도, 그리고 다른 과일들과 야채들이 있었다. 프랜은 같은 야채들로 같은 시간에 같은 양을 먹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이디스도 그랬다. 프랜은 파인 거리의 신학교에서 이디스는 그린 거리의 아파트에서 정확히 같은 시각에 저녁을 했다. 그녀는 프랜이 버지니아에, 이디스가 펜실베니아에 있을 때 ‘매일의 빛’이라는 잡지를 같이 읽었던 것처럼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함께하고 있는거에요.”

이디스는 또한 프랜이 잘 때까지 깨어 있으려고 했다. 프랜이 새벽 3시까지 공부하면, 그녀도 바느질이나 가죽 공예를 하며 3시까지 일했다. 프랜이 공부할 때 방해가 될까바 재봉틀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종종 프랜은 이디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곤 했다. 그녀는 기독교 교리로 시를 잘 지었다. 이디스는 시짓기를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히브리어는 좋아하지 않았다. 프랜은 단어카드에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단어를 외워야 했다. 프랜이 히브리어를 열심히 외우는 동안은 이디스에게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의 히브리어 교수는 구약을 함께 가르치는 앨런 맥레이 였다. 코넬리우스 밴 틸, 스톤하우스, 오스왈드 맬리스, 퀴퍼, 울리, 존 머레이 같은 분들이 남아있는 교수들이었다. 밴 틸 교수는 프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50세였고 10살때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 변증론을 강의 했다. 그는 프린스톤 대학의 워필드 밑에서 공부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 신학자들의 책을 탐독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변증론은 복잡한 원리들로 가득했다. 첫째, 어떤 체계가 진리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지 결정해야 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에서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료함은 웨스트민스터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밴 틸은 그것을 확신했지,” 프랜이 이디스에게 말했다.
세가지 체계가 대체로 인식되었다: 증거주의, 예측주의, 검증주의가 그것이다. 증거주의는 귀납법 또는 경험주의라고 불렸고 일반화 하기위해 개별적인 사실에 접근하는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예측주의 또는 연역법은 처음에 어떤 전제를 가정하고, 그 전제에 따라 개별 사실을 증명해 가는 과정이었다. 검증주의, 또는 소위 과학적 방법이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사실들을 시험하기 위해 가설들로부터 증명해 가는 방법이었다. 연역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 보다는 느슨했고, 연역과 귀납의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프랜은 검증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코넬리우스 밴 틸 교수는 귀납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두가지 전제로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만물의 창조자는 삼위 일체 하나님이다. 2.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전제에 반대할 것이다.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을 진리로 놓은 것이 억지처럼 보이지만,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그의 우세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그랬다. 어떤 때라도, 변증론 분야는 논쟁적이면서도 사고력을 증진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생들에게 세상에서 싸울 수 있는 도구를 준비시켰다.
또한 신학교에서 프랜은 그의 교회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서 배웠다.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의 교회가 다른 장로교파와 어떻게 달랐을까? 다른 많은 교회들처럼 그의 교회도 진지하고 엄숙한 예배를 드렸다. 다른 교회들처럼 두번의 성찬식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교파들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직적인 면에서는 달랐다. 지역 그룹은 Session(신도들의 투표로 선출된 성직자들의 모임)이라고 불렸다. 몇몇 회원들은 집사들(교회의 일상적인 일을 담당하는)었다. Session 은 훈계하고, 징계하고, 성찬식에서 제외시키는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 성도들의 영적 관심을 증진시키기 위한 집회를 열기도 한다.
장로교에서 Session 위의 기관은 프랜의 종파와 구별되는 것이다. – 적어도 5명 이상의 모든 성직자들을 포함하고, 각각의 교회에서 한 명씩의 장로가 있다. 그 기관은 모든 요청, 불평, 각각의 session으로부터 받은 내용들을 수렴하고, 성직자 자격을 심사하고, 임명하고, 세우고, 파직하고, 판단하며, 교회 session의 기록을 증명하고 조사한다. 또한 교리에 대한 질문들이나 원리들에 대해 신중하게 논의 하고, 교회의 순수성과 평화를 저해하는 잘못된 견해들에 대해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특정한 교회를 방문해서 그들의 상태를 살피고, 교회 안에서 일어난 잘못된 일들을 고치고,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교회를 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거나 재정비 하거나 새롭게 하는 역할도 한다. 교회 산하의 복지사업을 관할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교파의 실제적인 권한은 노회에 있는 것이지.” 프랜은 중얼거렸다. “총회보다 높은 기관이 아니라..”
프랜과 이디스는 교수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가끔 만났다. 게다가 쉐퍼는 웨스트민스터의 등록 담당자이면서 성경의 권위자인 러드 해리스와 그의 아내 리비를 알고 있었다. 동기생 동영과 그의 아내 순욱(한국 이름 같은데..^^; - 역자)은 쉐퍼와 같은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었다. 순욱은 이디스와 관심사가 비슷했다. 웨스트민스터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옷만들기, 요리, 그리고 국제정세 등에 관심이 있었다. 모든 신학생들과 그들의 아내들은 그들에게 선교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프랜과 이디스는 종종 세계지도를 살폈다. 주방 벽에는 중국 지도(중국 내륙 선교단의 하워드 테일러의 싸인이 있는)가 걸려 있었다. 그 지도에 프랜은 이렇게 썼다. “기쁨으로 주를 섬기자.”

프랜과 이디스는 곧 다른 학생 가족들도 교회의 논쟁으로 인한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불공정해 보였고, 충돌과 다툼을 초래하는 것 같았다. 다른 문제는 그들의 새로워진 믿음의 신조였다. 그들은 칼빈주의자여서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을 믿었다. 문제는 그들이 어느 정도의 자유를 갖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무 자유도 없는가? 아니면 조금? 또는 완벽한 자유의지? 그 문제는 결코 학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에서 두드러지는 문제였다. 이디스는 특정한 것에 대해 기도하는 것 때문에 교수님 사모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세부적인 일을 다 하신다는 것이 그녀의 논리였다. 우리는 세세한 것을 나열하므로 하나님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이디스에게는(아버지가 목사님이셨지만)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렇다. 웨스트민스터는 그들의 믿음에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미국의 장로교는 예정설이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 타협하고 있었고 그것이 1903년에 팽배했던 구원에 대한 태도였다. 영국 청교도들이 1646년에 만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삶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죽음이 예비되어 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 문장에서 허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1646년의 고백서에는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부름받고, 의롭다고 칭해지고, 거룩해진다. 그분의 불가사이한 뜻에 따라 남겨진 인류를 그의 영광스런 공의로 그들의 죄에 따라 벌하신다.”라고 덧붙여졌다.

1903년에, 미합중국의 장로교는 다음과 같이 덧붙임으로 구원의 문을 확장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구원을 제공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서 그들의 행동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의 규율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그들의 죄 말고는 어떤 것도 그들을 비난 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두려움 없이 심판을 맞이할 것이다.”라는 문장도 덧붙였다. 1903년의 수정은 1646년의 교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회들은 1646년의 고백서를 삭제하는 것을 표에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반대는 남아있다. 아마도 그것은 교회의 다른 이슈들을 더 심화시키는 것 같았다. 장로교인들은 많은 안건들을 가지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일 예배 후 프랜과 이디스는 저먼타운에 방문하곤 했다. 이디스의 부모님과 점심을 먹고, 프랜의 부모님과는 저녁을 먹었다. 그 다음주는 순서를 바꿨다. 부모님들께서는 언제나 그들이 집에 싸갈 음식을 준비해 주셨다. 물론 단 둘이 소풍을 가기도 했다. 종종 프랜과 이디스는 페어마운트 공원을 오랜시간 걷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신학교의 일로 시간을 보냈다. 프랜이 첫 해에 좋은 성적을 받게 되어 둘다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1936년 여름에 그들은 다시 캠프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이번엔 그들이 주관하는 것이었다. 뉴잉글랜드 복음주의 단체에 후원으로 럼네이에 리처드 웨버 올리버 캠프장이 마련되었다. 와이트 산은 경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하이킹과 등산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프랜과 이디스는 등산을 잘 하지는 못했지만 곧 등산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열었다. 그러나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에서 J.그래샴 머천을 해직했다는 소식은 캠프를 진행하는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의 제자 중 한명인 칼 맥킨터도 해직되었다.
“나도 미합중국 장로교에서 탈퇴해야 겠소.” 프랜이 말했다.
그는 즉시 사임서를 썼다. 그해 가을 웨스트민스터로 돌아가 머천의 미국 장로교회의 회원이 되었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1936년 가을은 다른 중요한 문제로 젊은 부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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