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4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4
자료출처http://cafe.daum.net/CPI2002/5m8A/96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four
“나는 1914년 11월 3일 아침 웬초의 차이니즈 타운에 있는 플라워 가든 레인에서 이디스 레이첼 세빌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어요.” 프랜의 새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체키앙 지방에서 웬초우는 상하이시의 거대 항구의 남쪽에서 200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꽤 큰 항구였다. 이디스의 부모님은 선교사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China Inlnad Mission의 선교사로 중국에서 처음 만났다. 이디스의 어머니 제시 그린은 중국에 1899년에 왔고, 그녀의 아버지 조지 세빌랴는 1902년에 왔다. 사실 제시는 1899년에 있었던 의화단 운동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중국 황후는 중국의 모든 문제를 외국인들에게 물어서 그녀의 기울어진 인기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중국 전역에서 외국인을 위협하는 의화단들을 풀었다. 의화단은 수백명의 선교사들을 죽였다. 200여명의 선교사가 있는 China Inland Mission에서 58명의 선교사와 21명의 어린이들이 희생당했다. 그래서 제시는 불의 시험을 견뎌야 했다. 중국은 여전히 화약통을 사용했다.
“Chine Inland Mission은 1865년 영국인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세워진 단체였어요.” 이디스는 계속했다. 선교에서 가장 어려운 장벽은 외국어와 수 많은 방언들이었다. 칸톤 지역의 중국인들은 베이징 중국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관습과 문자는 비슷하지만 구어는 너무 달랐다.
“1905년 5월 29일에 불안한 평화가 공표된 이후, 조지 세빌랴는 제시 그린과 결혼했어요.” 이디스는 프랜에게 말했다.
세빌랴 부부는 웬초의 선교지부에서 살았다. 자넷 엘리자베스는 1906년에 태어났다. 1907년에 존이 태어났지만 여덟 달 만에 죽었다. 엘사 루스는 1909년에 태어났다. 1914년 이디스가 태어날 때까지, 자넷은 기숙학교에 다니는 말썽꾸러기 8살꼬마였다. 어머니 제시는 여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래서 이디스가 갓세라고 불리는 대나무 놀이기구를 보고 있을 때, 5살된 엘사와 중국인 보모도 보았다. 그러나 엘사가 1년후에 기숙사 학교로 가서 이디스는 보모와 단 둘이 놀아야 했다.
“나는 미국인이면서 중국인으로 자랐어요,” 이디스는 말했다.
중국은 대부분이 불신자인 나라였다. 모든 도시가 막혀 있었다. 도시 안의 많은 것들도 차단되어 있었다. 선교지부의 건물들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베란다가 있는 2층짜리 선교회 건물 옆에는 잔디와 대나무 정원이 있었다. 미션 스쿨에 있는 중국인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남학생과 여학생은 각각 다른 학교를 다녔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지방 사람들 뿐만 아니라 웬초우에서 원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지부에는 중국인 목회자를 위한 집과, 요리사, 그 외 그곳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명은 문지기 였다. 그는 작은 격자 창을 통해서 누가 들어오는지 감시했다.
그러나 담 안쪽에서 이디스는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다. 그녀는 특히 겉옷을 천막처럼 두르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다.
작은 벌레야 날아라!
작은 벌레야 날아라!
작은 벌래야, 어디서 날아왔니?
보모의 코로 날아가렴!
마지막 가사를 부를 때, 이디스의 작은 손은 보모의 코로 가 있었다. 물론 이디스는 중국어로 그 노래를 불렀다. 이디스는 바나나 튀김, 징다우 시럽 같은 중국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이디스와 보모는 식사시간에 중국인 친구들의 방문하곤 했다. 주인들은 이디스에게 젓가락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밥과 차를 섞지 않고 동시에 먹는 방법 등을 보여주었다. 보모와 요리사는 이디스를 시장으로 데리고 가서 생선과 달걀 값을 깎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안좋은 양파를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살순 없겠는데요!” 이디스가 중국어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중국인들은 “아름다운 행복”을 위한 그녀의 Meifuh를 따라하면서 어린 이디스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가 고집센 어린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피차우!(입 다물어 라는 의미의 말)” 작은 Meifuh가 소리지른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그녀의 부모님도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중국 어린이들을 잡고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너 나한테 설교 하고 싶니?” 그녀는 예의 바르게 물어봤다. 그러나 잠시 후, “아니라고? 그럼 내가 너 한테 설교할게.” 그녀는 부모님께 성경 이야기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지만, 같은 질문을 받는 그녀의 친구들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녀는 강한 복음 전도자였다.
“하루 종일 그렇게 열변을 토했다면 그 고집센 친구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겠죠.” 이디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날 아침 이디스는 산책하던 선교단 대표와 마주쳤다. 용감하게도 그녀는 그와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기도 중이었으므로 이디스에게 주의를 주었다. 매일 그는 그녀에게 4시간 동안 기도했다고 말했다. 네시간! 이디스에게는 엄청 긴 시간이었다. 그 대표는 선교단체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기도수첩에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다음 이름을 읽고 나서 그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기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디스는 그의 세심함과 하나님께 조르지 않고 맡기는 기도의 자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디스는 그렇게 말했다.
자넷과 엘사가 방학때 집으로 오면 이디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한번은 엘사가 “천로역정”을 읽어주었다. 구원을 찾는 사람을 그린 존 번연의 위대한 고전이었다. 그리고 “천로역정”으로 연극도 했다. 이디스는 죄의 짐을 표현하기 위해 배게를 어깨에 맸다. 좁은문을 안내할 전도자를 만날 때 까지 “낙심의 늪”이라고 불리는 수렁과 싸워야 했다.
“거기 누구십니까? 전도자 엘사가 소리쳤다.
“저는 불쌍한 죄인입니다.” 이디스가 대답했다.
“들어오시오!” 이디스를 가상의 문으로 끌어들이며 엘사가 대답했다. 그래서 악마는 마지막 화살을 그녀에게 쏠 수 없었다. “앞을 보시오!” 엘사가 소리쳤다. “좁은 길이 보이십니까? 그 길은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위해 준비된 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야 할 길입니다!”
구원이라고 불리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 길을 따르는 동안, 이디스는 십자가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십자가 앞에서 그녀는 절하고 배게는 계단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고난으로 내가 쉼을 얻었고, 그의 죽음으로 내가 생명을 얻었도다!” 그녀는 기쁨으로 소리쳤다.
죄에서의 해방! 구원! 배게가 떨어져 나갈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디스는 그 연극을 좋아했다. 그녀는 자신이 장난꾸러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용서하신 다는 사실은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도 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주셨다.
“그렇지만 내 삶은 늘 즐겁고 재밌지 만은 않았어요.”
5살 이전까지의 기억들은 재밌는 일들로만 가득했다. 이디스는 트라초마(안과 질병 – 파리에 의해 눈에 박테리아가 감염된 것.)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에 트라초마는 실명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 선교회의 스테드포드 의사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는 감염을 치료할 수 있는 최신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디스의 머리를 두 무릎사이에 누이고, 눈꺼풀에서 박테리아를 제거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에요.” 격앙된 감정을 누르며 이디스가 말했다.
그녀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후에 이디스는 또 다른 질병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아마가 목욕하려고 데워놓은 물을 엎질렀다. 그 일로 이디스는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몇일 동안 그녀는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스테드포드 의사 덕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녀의 중국인 친구들은 그녀가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그들은 이디스를 위해 흰 토끼와 귀여운 아기 염소도 데리고 왔다. 이디스는 특히 염소가 너무 좋았다. 염소는 너무 귀여웠다. 다리가 회복되어 가자 이디스는 염소를 거칠게 다루며 놀았다. 그 정도가 지나쳐서 이디스는 염소뿔에 머리를 받았고, 그녀의 이마에 푸른 멍이 들었다.
“그 일 이후로 나의 귀여운 염소는 다른 염소들하고만 놀 수 있게 되었어요.”
이디스는 정말 말괄량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친절하지 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그녀에게 연 날리는 기술을 소개했다. 중국의 연은 화려한 상자 모양이었다. 한번은 수위 아저씨와 주방에서 일하는 소년의 도움으로 정원에서 연을 날리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 즐거웠다. 갑자기 그녀는 다른 연이 그녀에게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연들이 엉켜버렸다. 완전 통제 불능이었다. 손을 놓는 순간 그녀는 두 연이 사라지는 것을 봐야했다. 다른 연의 주인도 그곳에 있었다.
“연 도둑이로군.” 수위아저씨가 중얼거렸다.
얼마 띄워보지도 못한 연에 너무 아쉬웠다.
한번은 그녀가 가장 나쁘다고 여긴 것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와 함께 인력거에 탔다. 바퀴 두개가 달린 말이 아니라 사람이 끄는 수레였다. 인력거꾼이 마을로 데려다 주어서 그녀는 친구 니나네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인력거꾼은 자갈길을 빨리 달려야 했기 때문에 성큼성큼 뛰어다녔다. 그는 가다가 곁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발로 차기도 했다. 이디스는 깜짝놀랬다. 아이는 괜찮은걸까? 그런 사고 후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녀의 어머니도 아이가 괜찮을 거라고 했다. 이디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괜찮을지 아닌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리고 나도 결코 알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이디스는 슬프게 말했다.
선교지부 밖의 참상들은 그녀에게 경계심을 더해갔다. 한번은 그녀의 보모와 함께 길을 걷는데, 웬초우 근처에 있는 탑을 지나게 되었다. 이디스는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어디서 들리는 거죠?” 이디스가 물었다. 보모는 괴로워 하는 듯 보였다. 결국 보모는 이디스에게 사실을 말해 주었다. 사람들이 원치 않는 딸을 낳았을 때 그 탑에 버려두고 간다는 것이다. 아기들은 버려지면 거의 죽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이디스에게 죽음의 교향곡 처럼 들렸다. 울음소리는 점점 격렬하게 들렸다. 모든 아이들이 소리치며 우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아이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도움을 요청하듯 흐느껴 울었다.
“그렇지만 왜죠?” 이디스는 울면서 물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사내아이만이 집안에 영화를 가져다 준다고 여기지. 왜 소용 없는 계집애를 키우겠니?” 보모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이 너희 부모님께서 이곳에 계신 이유란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면 이런 일은 곧 그칠거야.”
이디스와 같이 처참함을 느낀 사람은 또 없었을까?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생각할수록 이디스는 점점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결국, 이디스도 여자아이 아닌가? 그런일이 있은 후로 중국인들의 축제를 볼 때, 그녀는 중국신의 형상을 한 째려보는 듯한 가면을 싫어했다. 어떤 가면은 우스꽝 스러운 동물 모양이었고, 어떤 것은 용 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우상이라고 했던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무모한 우상숭배는 여자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원인이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다면 이런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위로가 되었죠.” 이디스는 프랜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고향에 대한 멋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고향에 1년 정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다시 7년을 중국에 머물기로 했다. 그들은 곧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1919년 여름이었다.
“다섯살이 채 안되었을 때였죠.”
항해는 한달 정도 지속되었다. 이디스는 긴 갑판을 뛰어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렁찬 찬양소리가 들리는 예배는 활기가 넘쳤다. 그녀가 좋아하는 찬송을 고르도록 할 때도 있었다. 그럴때는 목청껏 찬양을 불렀다. 그녀는 정말 말괄량이었다. 한번은 그녀와 한 친구가 화물실로 몰래 들어가서 상자 안의 초코렛을 먹다가 어머니께 들켜서 몹시 혼나고 초코렛 주인에게 잘못을 시인해야 했다. 이것은 더 이상 “천로역정”같은 연극이 아니었다. 이디스는 정말 죄책감을 느꼈다. 다시 화물실로 돌아갈 때 그녀의 마음은 몹시 쿵쾅거렸다. 잘못을 시인할때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초코렛 주인은 마음씨 좋은 여자여서 사과를 받아 주었다.
“오 꼬마야, 너가 그러기 전에 내가 초코렛을 줬어야 하는데…”
미국에 도착한 후 그들은 저먼타운에 머물렀다. 이디스의 부모는 서부학교에 있는 중국선교(CIM) 본부에서 일했다. 이디스는 체스트넛에 있는 스티븐 여학교의 유치원에 다녔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때까지는 공주처럼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후에 세빌랴 가족은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셨기 때문이다. 그녀는 45세였고 이미 20년을 중국에서 헌신했다.
“그래서 2년동안 우리는 캘리포니아에 살았어요.” 이디스가 말했다.
이디스는 아시아인에 대한 극도의 편견을 경험했다. 사실, 그녀의 고집불통 친구는 그녀를 중국인 취급했다! 이디스는 저항했지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고집쟁이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배웠다. 그러나 이 기간은 유아 질병이 만연했던 때였다. 그녀는 학교에 가는 날보다 집에서 누워 있는 때가 더 많았다. 누구보다 더 이디스를 간호했던 사람은 엘사였다. 1년 동안 이디스의 아버지는 장로신학대에 입학하기 위해 보스턴의 학교로 떠났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외할아버지 메리트와 이모들이 와서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는 80세였지만 허약한 분은 아니셨어요.” 이디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까지도 페인트 칠을 하셨으니까요.”
아버지가 없는 동안, 이디스의 가족은 침례교회를 다녔다. 초교파 CIM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니는 침례교인이었다. 이디스는 침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성찬은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곳 집사회에 찾아가서 따졌다. 그녀의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7살 어린이 치고는 꽤 괜찮게 항변했다. 곧 그녀는 침례를 받게 되었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년도 채 안되서 아버지는 장로신학대에 들어가게 되셔서 그녀의 가족은 펜실베니아 뉴윌밍톤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 후에 아버지는 뉴욕 뉴버그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의 목사로 부임했고 가족들도 그곳으로 이사했다.
“그때 전 8살이었고, 3년동안 학교를 네번이나 옮겼었죠.” 이디스는 말했다.
그러나 올버니보다 뉴욕시에서 가까운 허드슨 강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뉴버그에서의 일상은 오래 지속되었다. 자넷과 엘사 모두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봉급은 너무 적어서 가족들은 늘 궁핍했다. 식사는 단순했다. 이디스의 옷들은 모두 집에서 만든 것들이었다. 다행이도 어머니는 재봉을 꽤 잘 다루셨다. 그녀의 옷은 사다 입은 다른 아이들의 옷보다 더 맵시 있었다. 어머니의 솜씨는 이디스에게 영감을 주었다. 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녀는 요리를 하거나 캔디를 만들어서 약간의 돈을 벌기도 했다. 모든 달러가 그녀에게는 커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정착해서 뉴버그에서 미국인이 되어갔다. 중국인 같은 모습은 옛 이야기가 되어갔다. 이디스는 걸 스카우트에 가입했다. YWCA에서 체육관도 다니고, 수영도 배웠다. 그녀는 학교에서 영어, 수학, 과학에 두각을 보였다. 그녀는 한가지 부분에서 아버지에게 실망했다.
“라틴어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디스의 베스트 프렌드는 에밀리였다. 에밀리는 크리스찬 과학자였다. 그래서 두 소셔는 자주 활기찬 토론을 했다. 토론의 주제들은 거의 철학적인 것들이었다. 에밀리에게 있어서 물질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세계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정신세계야.” 그녀는 주장했다. 물론 이디스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잘 반박했다. 그녀도 모더니즘이 기독교의 노선과(특히 장로교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매우 보수적인 분들이셨다. 그들은 춤추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담배 피는 것, 술마시는 것 심지어 영화를 보는 것까지도 죄로 간주했다. 특히 부모님은 술에 대해서 완강하셨다. 미국은 1919년부터 금주법을 실행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 금주법은 무너졌다. 사람들은 그 법을 무시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그 법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사람들이 어디서나 술을 먹을 수 있게 하라.” 그들은 소리쳤다. “왜 그것이 불법인가?”
교회의 여성들은 이 법의 철회에 대항하여 싸웠다. 많은 사람들이 순결을 상징하는 흰 리본을 달고 금주를 위한 여성들의 모임(WCTU)에 가입했다. 이디스는 WCTU 회의에 참여했는데 회원들이 협상구호를 외치는 모습에 놀랬다. “흰 리본! 흰 리본!” 이런 광적인 분위기는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에게 동의했다. 술은 가정을 무너뜨리는 국가적 중죄였다.
이디스의 어머니는 때때로 그런 반대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교회는 주일에 드리는 아침, 저녁 예배 뿐 아니라 수요 저녁 기도회로 모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회적 활동이 있었다. 게다가 교회 바자회를 통해 기금이 형성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십일조를 더 많이 내시기도 했죠.” 이디스가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그녀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자료출처http://cafe.daum.net/CPI2002/5m8A/96
Francis And Edith
SCHAEFFER
Defenders of the Faith
Sam Wellman
- Barbour Books -
four
“나는 1914년 11월 3일 아침 웬초의 차이니즈 타운에 있는 플라워 가든 레인에서 이디스 레이첼 세빌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어요.” 프랜의 새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체키앙 지방에서 웬초우는 상하이시의 거대 항구의 남쪽에서 200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꽤 큰 항구였다. 이디스의 부모님은 선교사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China Inlnad Mission의 선교사로 중국에서 처음 만났다. 이디스의 어머니 제시 그린은 중국에 1899년에 왔고, 그녀의 아버지 조지 세빌랴는 1902년에 왔다. 사실 제시는 1899년에 있었던 의화단 운동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중국 황후는 중국의 모든 문제를 외국인들에게 물어서 그녀의 기울어진 인기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중국 전역에서 외국인을 위협하는 의화단들을 풀었다. 의화단은 수백명의 선교사들을 죽였다. 200여명의 선교사가 있는 China Inland Mission에서 58명의 선교사와 21명의 어린이들이 희생당했다. 그래서 제시는 불의 시험을 견뎌야 했다. 중국은 여전히 화약통을 사용했다.
“Chine Inland Mission은 1865년 영국인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세워진 단체였어요.” 이디스는 계속했다. 선교에서 가장 어려운 장벽은 외국어와 수 많은 방언들이었다. 칸톤 지역의 중국인들은 베이징 중국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관습과 문자는 비슷하지만 구어는 너무 달랐다.
“1905년 5월 29일에 불안한 평화가 공표된 이후, 조지 세빌랴는 제시 그린과 결혼했어요.” 이디스는 프랜에게 말했다.
세빌랴 부부는 웬초의 선교지부에서 살았다. 자넷 엘리자베스는 1906년에 태어났다. 1907년에 존이 태어났지만 여덟 달 만에 죽었다. 엘사 루스는 1909년에 태어났다. 1914년 이디스가 태어날 때까지, 자넷은 기숙학교에 다니는 말썽꾸러기 8살꼬마였다. 어머니 제시는 여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래서 이디스가 갓세라고 불리는 대나무 놀이기구를 보고 있을 때, 5살된 엘사와 중국인 보모도 보았다. 그러나 엘사가 1년후에 기숙사 학교로 가서 이디스는 보모와 단 둘이 놀아야 했다.
“나는 미국인이면서 중국인으로 자랐어요,” 이디스는 말했다.
중국은 대부분이 불신자인 나라였다. 모든 도시가 막혀 있었다. 도시 안의 많은 것들도 차단되어 있었다. 선교지부의 건물들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베란다가 있는 2층짜리 선교회 건물 옆에는 잔디와 대나무 정원이 있었다. 미션 스쿨에 있는 중국인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남학생과 여학생은 각각 다른 학교를 다녔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지방 사람들 뿐만 아니라 웬초우에서 원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지부에는 중국인 목회자를 위한 집과, 요리사, 그 외 그곳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명은 문지기 였다. 그는 작은 격자 창을 통해서 누가 들어오는지 감시했다.
그러나 담 안쪽에서 이디스는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다. 그녀는 특히 겉옷을 천막처럼 두르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다.
작은 벌레야 날아라!
작은 벌레야 날아라!
작은 벌래야, 어디서 날아왔니?
보모의 코로 날아가렴!
마지막 가사를 부를 때, 이디스의 작은 손은 보모의 코로 가 있었다. 물론 이디스는 중국어로 그 노래를 불렀다. 이디스는 바나나 튀김, 징다우 시럽 같은 중국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이디스와 보모는 식사시간에 중국인 친구들의 방문하곤 했다. 주인들은 이디스에게 젓가락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밥과 차를 섞지 않고 동시에 먹는 방법 등을 보여주었다. 보모와 요리사는 이디스를 시장으로 데리고 가서 생선과 달걀 값을 깎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안좋은 양파를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살순 없겠는데요!” 이디스가 중국어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중국인들은 “아름다운 행복”을 위한 그녀의 Meifuh를 따라하면서 어린 이디스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가 고집센 어린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피차우!(입 다물어 라는 의미의 말)” 작은 Meifuh가 소리지른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그녀의 부모님도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중국 어린이들을 잡고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너 나한테 설교 하고 싶니?” 그녀는 예의 바르게 물어봤다. 그러나 잠시 후, “아니라고? 그럼 내가 너 한테 설교할게.” 그녀는 부모님께 성경 이야기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지만, 같은 질문을 받는 그녀의 친구들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녀는 강한 복음 전도자였다.
“하루 종일 그렇게 열변을 토했다면 그 고집센 친구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겠죠.” 이디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날 아침 이디스는 산책하던 선교단 대표와 마주쳤다. 용감하게도 그녀는 그와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기도 중이었으므로 이디스에게 주의를 주었다. 매일 그는 그녀에게 4시간 동안 기도했다고 말했다. 네시간! 이디스에게는 엄청 긴 시간이었다. 그 대표는 선교단체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기도수첩에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다음 이름을 읽고 나서 그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기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디스는 그의 세심함과 하나님께 조르지 않고 맡기는 기도의 자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디스는 그렇게 말했다.
자넷과 엘사가 방학때 집으로 오면 이디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한번은 엘사가 “천로역정”을 읽어주었다. 구원을 찾는 사람을 그린 존 번연의 위대한 고전이었다. 그리고 “천로역정”으로 연극도 했다. 이디스는 죄의 짐을 표현하기 위해 배게를 어깨에 맸다. 좁은문을 안내할 전도자를 만날 때 까지 “낙심의 늪”이라고 불리는 수렁과 싸워야 했다.
“거기 누구십니까? 전도자 엘사가 소리쳤다.
“저는 불쌍한 죄인입니다.” 이디스가 대답했다.
“들어오시오!” 이디스를 가상의 문으로 끌어들이며 엘사가 대답했다. 그래서 악마는 마지막 화살을 그녀에게 쏠 수 없었다. “앞을 보시오!” 엘사가 소리쳤다. “좁은 길이 보이십니까? 그 길은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위해 준비된 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야 할 길입니다!”
구원이라고 불리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 길을 따르는 동안, 이디스는 십자가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십자가 앞에서 그녀는 절하고 배게는 계단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고난으로 내가 쉼을 얻었고, 그의 죽음으로 내가 생명을 얻었도다!” 그녀는 기쁨으로 소리쳤다.
죄에서의 해방! 구원! 배게가 떨어져 나갈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디스는 그 연극을 좋아했다. 그녀는 자신이 장난꾸러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용서하신 다는 사실은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도 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주셨다.
“그렇지만 내 삶은 늘 즐겁고 재밌지 만은 않았어요.”
5살 이전까지의 기억들은 재밌는 일들로만 가득했다. 이디스는 트라초마(안과 질병 – 파리에 의해 눈에 박테리아가 감염된 것.)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에 트라초마는 실명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 선교회의 스테드포드 의사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는 감염을 치료할 수 있는 최신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디스의 머리를 두 무릎사이에 누이고, 눈꺼풀에서 박테리아를 제거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에요.” 격앙된 감정을 누르며 이디스가 말했다.
그녀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후에 이디스는 또 다른 질병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아마가 목욕하려고 데워놓은 물을 엎질렀다. 그 일로 이디스는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몇일 동안 그녀는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스테드포드 의사 덕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녀의 중국인 친구들은 그녀가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그들은 이디스를 위해 흰 토끼와 귀여운 아기 염소도 데리고 왔다. 이디스는 특히 염소가 너무 좋았다. 염소는 너무 귀여웠다. 다리가 회복되어 가자 이디스는 염소를 거칠게 다루며 놀았다. 그 정도가 지나쳐서 이디스는 염소뿔에 머리를 받았고, 그녀의 이마에 푸른 멍이 들었다.
“그 일 이후로 나의 귀여운 염소는 다른 염소들하고만 놀 수 있게 되었어요.”
이디스는 정말 말괄량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친절하지 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그녀에게 연 날리는 기술을 소개했다. 중국의 연은 화려한 상자 모양이었다. 한번은 수위 아저씨와 주방에서 일하는 소년의 도움으로 정원에서 연을 날리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 즐거웠다. 갑자기 그녀는 다른 연이 그녀에게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연들이 엉켜버렸다. 완전 통제 불능이었다. 손을 놓는 순간 그녀는 두 연이 사라지는 것을 봐야했다. 다른 연의 주인도 그곳에 있었다.
“연 도둑이로군.” 수위아저씨가 중얼거렸다.
얼마 띄워보지도 못한 연에 너무 아쉬웠다.
한번은 그녀가 가장 나쁘다고 여긴 것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와 함께 인력거에 탔다. 바퀴 두개가 달린 말이 아니라 사람이 끄는 수레였다. 인력거꾼이 마을로 데려다 주어서 그녀는 친구 니나네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인력거꾼은 자갈길을 빨리 달려야 했기 때문에 성큼성큼 뛰어다녔다. 그는 가다가 곁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발로 차기도 했다. 이디스는 깜짝놀랬다. 아이는 괜찮은걸까? 그런 사고 후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녀의 어머니도 아이가 괜찮을 거라고 했다. 이디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괜찮을지 아닌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리고 나도 결코 알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이디스는 슬프게 말했다.
선교지부 밖의 참상들은 그녀에게 경계심을 더해갔다. 한번은 그녀의 보모와 함께 길을 걷는데, 웬초우 근처에 있는 탑을 지나게 되었다. 이디스는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어디서 들리는 거죠?” 이디스가 물었다. 보모는 괴로워 하는 듯 보였다. 결국 보모는 이디스에게 사실을 말해 주었다. 사람들이 원치 않는 딸을 낳았을 때 그 탑에 버려두고 간다는 것이다. 아기들은 버려지면 거의 죽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이디스에게 죽음의 교향곡 처럼 들렸다. 울음소리는 점점 격렬하게 들렸다. 모든 아이들이 소리치며 우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아이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도움을 요청하듯 흐느껴 울었다.
“그렇지만 왜죠?” 이디스는 울면서 물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사내아이만이 집안에 영화를 가져다 준다고 여기지. 왜 소용 없는 계집애를 키우겠니?” 보모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이 너희 부모님께서 이곳에 계신 이유란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면 이런 일은 곧 그칠거야.”
이디스와 같이 처참함을 느낀 사람은 또 없었을까?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생각할수록 이디스는 점점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결국, 이디스도 여자아이 아닌가? 그런일이 있은 후로 중국인들의 축제를 볼 때, 그녀는 중국신의 형상을 한 째려보는 듯한 가면을 싫어했다. 어떤 가면은 우스꽝 스러운 동물 모양이었고, 어떤 것은 용 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우상이라고 했던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무모한 우상숭배는 여자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원인이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다면 이런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위로가 되었죠.” 이디스는 프랜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고향에 대한 멋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고향에 1년 정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다시 7년을 중국에 머물기로 했다. 그들은 곧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1919년 여름이었다.
“다섯살이 채 안되었을 때였죠.”
항해는 한달 정도 지속되었다. 이디스는 긴 갑판을 뛰어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렁찬 찬양소리가 들리는 예배는 활기가 넘쳤다. 그녀가 좋아하는 찬송을 고르도록 할 때도 있었다. 그럴때는 목청껏 찬양을 불렀다. 그녀는 정말 말괄량이었다. 한번은 그녀와 한 친구가 화물실로 몰래 들어가서 상자 안의 초코렛을 먹다가 어머니께 들켜서 몹시 혼나고 초코렛 주인에게 잘못을 시인해야 했다. 이것은 더 이상 “천로역정”같은 연극이 아니었다. 이디스는 정말 죄책감을 느꼈다. 다시 화물실로 돌아갈 때 그녀의 마음은 몹시 쿵쾅거렸다. 잘못을 시인할때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초코렛 주인은 마음씨 좋은 여자여서 사과를 받아 주었다.
“오 꼬마야, 너가 그러기 전에 내가 초코렛을 줬어야 하는데…”
미국에 도착한 후 그들은 저먼타운에 머물렀다. 이디스의 부모는 서부학교에 있는 중국선교(CIM) 본부에서 일했다. 이디스는 체스트넛에 있는 스티븐 여학교의 유치원에 다녔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때까지는 공주처럼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후에 세빌랴 가족은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셨기 때문이다. 그녀는 45세였고 이미 20년을 중국에서 헌신했다.
“그래서 2년동안 우리는 캘리포니아에 살았어요.” 이디스가 말했다.
이디스는 아시아인에 대한 극도의 편견을 경험했다. 사실, 그녀의 고집불통 친구는 그녀를 중국인 취급했다! 이디스는 저항했지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고집쟁이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배웠다. 그러나 이 기간은 유아 질병이 만연했던 때였다. 그녀는 학교에 가는 날보다 집에서 누워 있는 때가 더 많았다. 누구보다 더 이디스를 간호했던 사람은 엘사였다. 1년 동안 이디스의 아버지는 장로신학대에 입학하기 위해 보스턴의 학교로 떠났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외할아버지 메리트와 이모들이 와서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는 80세였지만 허약한 분은 아니셨어요.” 이디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까지도 페인트 칠을 하셨으니까요.”
아버지가 없는 동안, 이디스의 가족은 침례교회를 다녔다. 초교파 CIM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니는 침례교인이었다. 이디스는 침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성찬은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곳 집사회에 찾아가서 따졌다. 그녀의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7살 어린이 치고는 꽤 괜찮게 항변했다. 곧 그녀는 침례를 받게 되었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년도 채 안되서 아버지는 장로신학대에 들어가게 되셔서 그녀의 가족은 펜실베니아 뉴윌밍톤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 후에 아버지는 뉴욕 뉴버그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의 목사로 부임했고 가족들도 그곳으로 이사했다.
“그때 전 8살이었고, 3년동안 학교를 네번이나 옮겼었죠.” 이디스는 말했다.
그러나 올버니보다 뉴욕시에서 가까운 허드슨 강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뉴버그에서의 일상은 오래 지속되었다. 자넷과 엘사 모두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봉급은 너무 적어서 가족들은 늘 궁핍했다. 식사는 단순했다. 이디스의 옷들은 모두 집에서 만든 것들이었다. 다행이도 어머니는 재봉을 꽤 잘 다루셨다. 그녀의 옷은 사다 입은 다른 아이들의 옷보다 더 맵시 있었다. 어머니의 솜씨는 이디스에게 영감을 주었다. 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녀는 요리를 하거나 캔디를 만들어서 약간의 돈을 벌기도 했다. 모든 달러가 그녀에게는 커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정착해서 뉴버그에서 미국인이 되어갔다. 중국인 같은 모습은 옛 이야기가 되어갔다. 이디스는 걸 스카우트에 가입했다. YWCA에서 체육관도 다니고, 수영도 배웠다. 그녀는 학교에서 영어, 수학, 과학에 두각을 보였다. 그녀는 한가지 부분에서 아버지에게 실망했다.
“라틴어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디스의 베스트 프렌드는 에밀리였다. 에밀리는 크리스찬 과학자였다. 그래서 두 소셔는 자주 활기찬 토론을 했다. 토론의 주제들은 거의 철학적인 것들이었다. 에밀리에게 있어서 물질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세계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정신세계야.” 그녀는 주장했다. 물론 이디스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잘 반박했다. 그녀도 모더니즘이 기독교의 노선과(특히 장로교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매우 보수적인 분들이셨다. 그들은 춤추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담배 피는 것, 술마시는 것 심지어 영화를 보는 것까지도 죄로 간주했다. 특히 부모님은 술에 대해서 완강하셨다. 미국은 1919년부터 금주법을 실행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 금주법은 무너졌다. 사람들은 그 법을 무시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그 법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사람들이 어디서나 술을 먹을 수 있게 하라.” 그들은 소리쳤다. “왜 그것이 불법인가?”
교회의 여성들은 이 법의 철회에 대항하여 싸웠다. 많은 사람들이 순결을 상징하는 흰 리본을 달고 금주를 위한 여성들의 모임(WCTU)에 가입했다. 이디스는 WCTU 회의에 참여했는데 회원들이 협상구호를 외치는 모습에 놀랬다. “흰 리본! 흰 리본!” 이런 광적인 분위기는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에게 동의했다. 술은 가정을 무너뜨리는 국가적 중죄였다.
이디스의 어머니는 때때로 그런 반대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교회는 주일에 드리는 아침, 저녁 예배 뿐 아니라 수요 저녁 기도회로 모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회적 활동이 있었다. 게다가 교회 바자회를 통해 기금이 형성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십일조를 더 많이 내시기도 했죠.” 이디스가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그녀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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