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색슨 교회의 몰락 교회사 속의 교회들(5)
| 앵글로색슨 교회의 몰락 | ||||
| 교회사 속의 교회들(5) | ||||
| 출처: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8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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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주 목사 진리침례교회 협동목사, 월간 <벱티스트> 편집위원, 전 대전침신대 교회사 강사 1. 자기 개혁을 중단하면 뿌리 뽑힌다 앵글로색슨이 A.D. 7세기 중반에 켈트식 교회체제가 아니라 로마식 교회체제를 선택하면서 종교의 무게중심은 민중의 마음과 삶이 아니라 국왕과 국가통치의 편리성, 따라서 제도성이라는 외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삶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경건하고 참된 삶을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로마교회가 주는 행정적 효율성, 화려함과 장엄함을 더욱 중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과는 달리 외모를 중시하는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종교의 참된 정신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이다. 8세기가 끝나기 직전에 데인족은 파괴자의 모습으로 출현하여 순식간에 잉글랜드 종교의 중심지를 폐허로 만들었다. 잉글랜드의 A.D. 9세기는 그렇게 참혹한 현실에서 출발하였다. 잉글랜드의 9세기는 데인족에 의해 약탈, 파괴, 그리고 점령으로 점철되어 앵글로색슨족과 그들의 왕국들 그리고 그들의 교회들은 잉글랜드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한 백년이었다. 2. 교회가 오늘 보여주는 모습은 그 민족의 장래 모습이다. 흔히 교회사에서는 바이킹 해적의 침략 때문에 앵글로색슨교회가 파괴되고 그 결과로 쇠퇴하였다고 서술한다. 오해하기 십상이다. 잉글랜드 즉, 앵글로색슨 교회는 데인족이 침입하기 전에 이미 쇠퇴하였다. 앵글로색슨교회의 중요한 근간인 수도원들은 8세기 중반에 이미 규율이 느슨해지면서 사치와 오락이 만연하였다. 각종 의무를 회피할 목적으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경우도 점점 많아졌다. 결국 수도원은 단지 도피처에 불과한 곳이 되었다. 당연히 수도원 자원이 낭비되면서 세상을 선도하고 이끌어갈 힘이 없어지고, 영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존재의미를 상실한 수도원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영적 나태와 무기력이 깊이 진행된 뒤에 데인족이 침입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데인족의 침입은 하나님의 경고요 응징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던 데인족이 수도원을, 그것도 중요한 대수도원을 우선적으로 공격한 까닭은? 거기에 재화(財貨)가 많이 쌓여 있었고 가장 풍요로운 곳이면서도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데인족이 각지의 수도원을 파괴하여 영적 침체를 가속화, 심화하였다고 보는 것이 훨씬 정확한 평가다. 물론 더욱 혹독한 평가는, 데인족이 수도원을 파괴한 덕에 더욱 부패한 지경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리다. 9세기 말, 알프레드의 등장과 활약, 무엇보다도 교회부흥을 위한 각종 조치로 앵글로색슨교회는 기사회생하게 된다. 알프레드의 주도 하에 앵글로색슨교회는 프랑스 지역에서 훈련된 사제들을 초빙하여 교회의 영성을 새롭게 일으켰고, 데인족을 기독교화하여 형제로 받아들이고 데인족과 앵글로색슨족의 통합까지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알프레드의 정책, 교회개혁과 발전을 통해 잉글랜드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방침은 9세기말 알프레드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10세기말까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지속된다. 알프레드와 그 후계자들이 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왕정의 편의와 국가발전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이런 정책은 기본적으로는 7세기 중반 이후 알프레드 이전까지의,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정책과 동일하다. 그러나 알프레드와 그 후계자들의 교회가 훨씬 더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단지 추진력, 집중적 투자가 그 전과 달라서가 아니다. 알프레드의 개혁조치로 훌륭한 인재, 좋은 리더들이 육성되었고 그 뒷 세대에서 그 인재들이 괄목할만하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인재들이 자신의 세대에서 최선을 다해서 교회개혁을 더욱 진전시켰다. 10세기 중반에 등장한 던스탄(Dunstan)이란 인물은 이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알프레드의 후손인 국왕 에드먼드(Edmund)가 발탁한 인물이다. 던스탄은 에셀월드(Ethelwold)를, 에셀월드는 오스왈드(Oswald)를 발탁하여 교회개혁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유럽에서 갓 등장한 개혁파 베네딕트 수도규칙을 도입하여 수도원의 영성을 고취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였다. “지속적인 개혁으로 교회를 더욱 더 새롭게 하였다”는 점이 알프레드 이후 앵글로색슨교회가 긍정적인 측면을 지속적으로 간직할 수 있게 만든 핵심요인이었다. 그렇다면 지속적인 개혁조치가 중단되면, 개혁을 가능케 하는 인물들의 육성과 그런 인재들의 활약이 방해받으면, 그 교회와 민족과 나라는 어찌될까? 3.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지라도 역사적 교훈은 반복된다. 던스탄의 개혁은 로마식 교회체제의 약점을 더욱 악화시킨 면이 있다. 로마방식을 따른 앵글로색슨교회의 약점은 외형과 효율성에 치중하여 삶이라는 측면이 약화될 수 있고, 그만큼 종교의 본질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영성 있는 교회지도자를 육성해냈다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던스탄이라는 인물은 세속적 출신(유력한 귀족)성분이 교회 안에서의 성공(왕에 의한 발탁과 후원)에 대한 발판이 되었고, 교회에서의 성공이 세속정치에서의 성공에 이르게 한 측면이 되었다. 다른 성직자들이 성공주의를 추구할, 전범으로 삼을 가능성이 정말 크다. 역사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찬란한 성공이 눈에 띄면서 영성은 다시 사라졌고, 다음 세대를 영성으로 양육할 개혁을 수행하고 이끌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던스탄의 개혁은 다가올 심판을 잠시 뒤로 미루는 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결국 앵글로색슨 교회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걷게 되었다. 고위 성직자들이 국가운영의 최고회위체인 “위탄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고위성직자는, 교회개혁 덕택에 그 지위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그 능력은 최상이었기 때문이다. 국왕과 세속 귀족들 입장에서는 그런 능력을 갖춘 더구나 귀족가문 출신의 고위성직자들은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교회 자체는 어둠이 깊어졌다. 인간의 편의성에 맞춘 효율적인 방식은 좋은 점도 많지만 자칫 영적 부패를 심화시킬 수 있다. 국왕권력에 의존한 의타성은 말씀과 성령에 의존하는 영적 독립성 확보에 걸림돌이 되었고,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매우 심화되었다. 그 심한 병증이 겉으로 도드라져 나타난 현상이 “봉건제도”라는 것이다. 봉건제도가 본격적으로, 체계적으로 정착한 계기는 11세기 중반의 “노르만 정복”이라지만 사실상 봉건화는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봉건화의 본질이 무엇인가? 계급화와 종속화다. 개인의 실력차이가 가문의 세력차이로 나타나고, 가문의 물적 토대가 다시 계급의 차이를 고착시킨다. 계급화가 눈에 띄는 단계가 되면 계급간의 이동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노예로 태어나면 노예로 죽고, 귀족으로 태어나면 귀족으로 죽는다. 피치자로 태어난 사람은 지배자로 태어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도, 부당하게 착취당해도 항의할 수 없다. 하층민이 상층부로 계급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계급이동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상층민들은 하층민을 거리낌 없이 잔인하게 대한다. 그것이 여러모로 유익하고 체제유지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건사회는 혹독하고 잔인하다. 교회가 영성이 약화되면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의 사악한 양상을 닮아간다. 잔인하고 매정한 교회가 된다. 군대를 대신 보내 세금을 거둬들이는,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할 뿐 마찬가지다. 다만 세속군주보다는 조금 덜 잔인해서 고마운 존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봉건화는 “종속화”를 동반한다. 봉건화가 외적, 물질적 토대를 기초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차별화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라면, 봉건화는 그 외적, 물질적 자원을 장악한 세속적 권력에 굴복하고 이끌린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 유력한 가문 출신이 사회의 지도자가 될 뿐만 아니라 가문의 영향력을 통해 손쉽게 큰 교회를 장악하고 심지어 대를 이어 교회를, 그리고 교회가 가진 일체의 힘을 물려받는다. 이 나쁜 관행이 반복 심화되면, 주교 및 대수도원장 직은 신앙의 깊이와 수련의 정도에 의해 교인들로부터 추대되는 영예로운 것이 아니라 문벌, 학위, 권력자와의 친분관계 등 세속적으로 성공한 지위에 도달한 실력으로 차지하는 종교적 지위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식에게 유산으로 증여한다. 유럽의 중세사회는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은 과연 과잉단순화일까? 학벌, 신분, 재산과는 상관없이 신앙과 영성으로 평가받고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외적 조건을 잘 갖추었다는 것만으로 존경받고 교회를 좌지우지 하는 상황, 교회가 이 정도에 이르면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교회라고 한다. 당연시한다. 유럽 교회는 중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앵글로색슨 교회도 10세기 말에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종속화”를 좀 더 생각해보자. 교회를 구한 것이 국왕이며 교회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것이 국왕권력이었다. 점차 교회지도자들은 국왕과 세속권력과의 친밀성, 그리고 그로부터의 인정을 지극히 영예로운 일로 여기게 되었다. 나아가서는 국왕 및 국가로부터의 인준을 당연시 하게 되었다. 대형교회와 대수도원은 국왕이나 그에 버금가는 대귀족이 연고권을 행사해서 주교나 대수도원장을 그들이 정하고 임명한 자를 서품하여 취임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작은 교회들 즉, 교회계급체제의 말단에 해당되며 무수한 하층민들이 출석하는 교회들은? 당연히 그 교회가 세워진 토지의 주인들 즉, 세속영주가 세운 교회인기에 그 영주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도 교회를 주님께 바쳤다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말단교회들은 영주의 장원에 세워진 교구교회였으며, 영주의 소유물로 전락하였고 결과적으로 교구목사들은 영주로부터 땅을 임대한 차지인(소작인) 혹은 농노의 신분과 다를 바 없이 되었다. 당연히 정상적인 교회조직, 사제조직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켈트기독교 선교사들이 잉글랜드에 심어놓은 민스터교회 전통은 갈수록 쇠퇴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the household of God)이라는 개념에서 “예배당” 즉, 예배드리기 위해 사용되는 건축물 개념으로 바뀌었다. 회중과 회중의 의사는 무의미해졌고 성도의 영성은 영주에 대한 무조건적 굴종을 위한 측면에서만 권장되었다. A.D. 1016년 데인족의 크누트(Cnut)가 전면적으로 재침략하여 앵글로색슨 왕국과 교회는 다시 전란에 휩싸이고 회복불능의 상황에 빠졌다. 사사시대가 생각나지 않는가!! 배교한 이스라엘을 연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이교도 군주라는 채찍!! 그렇게 50년 세월이 흐른 뒤 진짜 무서운 채찍을 보내셨다. A.D. 1066년 저 유명한 노르만 공(公)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은 근대 영국사를 새롭게 개창하였다. 앵글로색슨족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고, 앵글로색슨교회도 더불어 역사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1066년의 윌리엄 정복사건 이전에, 영국교회 즉, 앵글로색슨교회는 “봉건화-종속화”라는 교회부패의 절정을 전혀 치유하지 못하면서 사망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잉글랜드의 역사를 다루거나 심지어 교회사를 다룰 때 영국기독교는 거의 단절 없이 오늘날까지 계승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앵글로색슨교회는 켈트기독교의 민스터 전통이라는 민중과 회중의 영성에 기초한 종교를 로마식 종교에 예속시켰지만 그나마 10세기 후반에 쇠퇴시켜버리고, 7세기 중반부터 약 400년에 걸친 앵글로색슨교회의 전통도 11세기 중반의 노르만 정복으로 쇠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앵글로색슨교회는 노르만교회에 의해 정복되고 뿌리 뽑혀 역사적 종말을 고하였다. 노르만교회나 앵글로색슨교회나 다 같이 라틴교회 전통을 계승한 유럽 기독교라는 동일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면을 전체로 간주한 잘못된 판단이다. 상당히 아니, 차라리 전적으로 다른 전통으로 달라졌다고 해야 한다. 앵글로색슨교회는 패망했다. 이 몰락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교회가 자기개혁을 중단하면,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자정능력까지 상실하면 뿌리 채 뽑힌다는 것이다. 유럽 중세시대를 다루면서 이 부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분간 이와 연관된 주제를 다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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