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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교실

반(反)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반(反)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출처: http://cafe.daum.net/suwon2010/FGHE/42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양 극단의 이론인 어거스틴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의 중도적인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신앙에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신앙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면,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은 자기의 자유의지로서 하나님께로 돌아설 수 있고, 그 후에 하나님이 그 새 생명에게 계속 살 수 있는 은혜를 계속해서 부어주신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어거스틴이 가르친 두번째의 강조점과 상충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부르신 사람은 멸망받을 수 없다<참조: 성도의 견인>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후에도 그 은혜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어거스틴이 죽기 직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거스틴 사후에도 계속되다가 529년에 이르러 오렌지 회의에서 해결을 보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사항에는 명백하게 펠라기우스와 반펠라기우스를 정죄하고 있으나, 그 결정문의 끝에 첨가되어 있는  요약 구절은 반어거스틴적이어서 이 결정문의 일관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현재, 이 반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동할수 있는 인간의 의지의 능력을 강조하는 견해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단세설(monergism)에 반대하여 제기되었던 신인협동설을 가리킨다. 교의사에 있어서 이 용어가 생겨난 기원과 그 적용범위는 아직도 명확하게 설정되지 않았다. 
엔리코노리스가 저술한 [Historia Pelagiana](Padua, 1673)의 한 구절을 보면 중세기의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이 용어를 처음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노리스는 트렌트공의회 이후에 스콜라주의 신학을 마무리지은 사람들에게서 이 용어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다고 보아야 더 타당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16세기까지도 이 용어가  루터교 협화신조에서  한번 고립적으로 나타나며(Epitome,581,10), 1601년경에는 루이스 드 몰리나가  공박당하던 논지를 언급한 '조력성총 논의회'(Congregatio de aux-iliis)의 기록들 안에서 발견되고 그 이후에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이로 보아 반펠라기우스주의라는 용어는 도미니쿠스회 소속 토마스주의자들과 예수회소속 신부들 간에 벌어진 몰리나주의 논쟁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그 뒤 이 용어는 얀센주의 논쟁 때문에 몰리나주의가 대중에게 주목을 받게 됨으로써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아퀴타니아의 프로스페르가 반대한 마실리아(현 마르세이유) 신학자들의 죄와 은총의 교리도 따지고 보면 반펠라기우스주의였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으며, 반펠라기우스주의는 그뒤 레지(Riez)의 파우스투스에 의해서도 주장되었고 몇가지 점에서 529년 오랑쥬 교회회의에 의해 이단적 교설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보다 앞서 카르타고 교회회의(418년)는 펠라기우스파를 반대하는 8개조의 결의문을 채택했었는데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다. 
1) 아담이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은 오로지 타락 때문이며,
2) 유아들은 원죄 때문에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하고,
3)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용서 외에 죄를 피하게 하는 능력도 포함하고 있으며,
4) 지상에서 죄없이 완전한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교리 전체가 승인된 것은 아니다. 2년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이단설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가운데, 펠라기우스파가 인간을 의롭게 만들어 주는 은총이 값없이(gratis)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로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고 진술함으로써 카르타고 공의회의 판결을 넘어서고 있다.펠라기우스에 대한 정죄를 승인한 자들이라고 해서 전부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전반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로 역사하는 은총, 사유 그리고 교리'가 구원을 얻는데 충분하였는가 하는 문제 또는 '감화의 은총'이 추가로 또 모든 행위에 대해 내면적으로 꼭 필요했는가 하는 문제-이것이 실질적 쟁점이었다-는 396년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속에 나타나듯이,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는 곳에서  조차   펠라기우스와 반대되는 의미로 답변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때 비탈리스라는 카르타고인을 반박하는 가운데 이 점을 체험했었다.
즉 그는 비탈리스에게 답변하면서(420년경) 은총이 '인간 의지에 선행한다'고 강조하였다. 
선행의 공로 사상과 명백히 모순되는 은총 및 예정에 관한 그의 교설로 인하여 또 다시 하드루메툼의 수도사들 사이에 소요가 발생하자  그는 그들을 좀 더 계몽시키기 위하여 [De gratia et libero arbitrio]를  그들에게 보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은총의 역사가 자유와 공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유와 공로의 기초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이 책에 뒤이어 그는 은총으로만 자유하게 된다는 교리와  성도의 견인교리 그리고 예정된 자의 수효가 확정되어 있다는 교리를 포함하고 있는 [De correptione et gratia]를 발표하였다.
마실리아인들은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생각하였고 카르타고 교회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인간이 선을 행하려면 은총의 감화가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포함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단세설을 싫어하였다.  그들의 신인협동론적 견해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동의하여 복종하든지, 아니면 은총에  무관심하여 그것을 거부하든지 간에 영생과 관련한 인간쪽에서의 결단을 포함하였다.  신앙은 순전히 은총이 역사한 결과로 생기는 것이며 그 은총은 항거할수가 없고 어떤 인간의 행위도, 이를테면 meritum(공로)도 하나님의 은총을 역사시키는 원인으로 간주될 수가 없으며,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만 기초를 두고 있다는 등의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명제들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 신인협동론적 견해는 구원받는 자의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은총의 덕분으로만 돌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감화의 은총' 없이도 가능한 인간의 선행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의 중간이라는  전제하에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지칭되어 왔다. 
따라서 마실리아인들의 신인협동설을 '반'펠라기우스적 견해로생각하는 것은 옳으며 아우구스티누스와 프로스페르가 펠라기우스주의의 reli-quie(잔재)를 찾아낸 것은 그들의 견지로 본다면 충분히 근거있는 일이었다.하지만 일괄적으로는 결코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이단설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마실리아인들의 견해가 반펠라기우스적이었던 것은 그 사상이 펠라기우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중 교회의 승인을 얻지 못한 요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몇가지 명제,즉 그것들을 부인한 사람들이 후일 명백히 정죄를 받게 되었던 몇가지 명제들에 대해서도   반 아우구스티누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로부터 정죄받은 펠라기우스의 사상이 반펠라기우스주의속에 들어 있다고 지적받은 적은 없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그 당시에 널리퍼져 있던 반(anti)펠라기우스적 가톨릭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체계였던가?  오랑쥬 교회회의에서 견책받지 않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로부터 이탈한 것들이라고 해서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실질적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읭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후대의 공식적 교리에 의해서만 정의되어야 한다. 
이단설이라고  비난받은  반펠라기우스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은총의 선행을 부인하고,
2) '신앙'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점을 부인하며,
3) 자연 인간을 선행의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로 보려 하지 않고 인간의 자발적 협조를 은총 역사의 조건으로 삼고,
4) 은총을 '어떤 공로' 때문에 주어지는 것으로 가정하는 점 등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 개념의 내용과 범위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정의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발전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데 달려 있다.  따지고 보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태도는 사실에 충실치 못한 모순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doctor ecclesie(교회의 박사)지만 그의 은총론은 여지껏 공식적으로는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후대에 발전된 교리 심지어 공식적 재가를 받고 있는 교리조차  반펠라기우스적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흘러 왔다. 교회의 이런 불충실한 태도는 반펠라기우스 논쟁을 조정할 때 그대로 놔두게 된 애매하고도 곤혹스러운 점들로부터 야기된다.  오랑쥬의 결정은 모호한 것이다. 
철저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면 오랑쥬 회의의 결정문 가운데서 "모든 세례받은 사람들은 만약 뜻만 품는다면 완전해지기 위해서 충실히 노력할 수 있다"는 문장에다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면 우리는 또한 그럴 뜻도 품게 될 것이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을 추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그 결의문에서는 은총에 저항할 수 있다는 관념이 금지되지 않는다.이 입장은 이미 반펠라기우스주의보다 연대가 앞서는 [Hypomnesticon]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세례받지못한 모든 사람 심지어 기독교도의 죽어가는 영아까지도 예정의 불확실성에 속한 가운데 머물고 있다. 은총이 그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선택받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세례받은 자에 관해서는 반(anti)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 경향이 단연 압도하였다. 왜냐하면 설령 선택된 자들을 그들의 비저항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해도  버림받은 자들의 사망 예정은 그들의 항거에 대한 예견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며, 또 이것은 예견되던 항거가 행해지지 않으면 선택도 조절된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 교리는 뿌리채 뽑혀 버렸다. 모든 세례받은 자에게 있어서 영생에 대한 결단은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그런 사상을 가진 교회로서는 고트샬크가 다시 제창한 예정론을 이단교설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Hypomnesticon]의 이러한 견해는 비밀-반펠라기우스주의(crypto-Semipelagianism)라고 부를 수 있다.  13세기의 프란체스코 신학은 이 견해를 넘어섰다.  
5세기부터 전해 내려온 gratia generalis gratadata(값없이 주어진 보편적 은총)과 구원해 주는 은총의 구별,
또 meritum decongruo(자연을 적절히 사용해서 얻는 공로)와 meritum de condigno(초자연적은총을 근거로 하는 공로)의 구별을 이용하여 반펠라기우스주의적 진술들은 새로운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이 견해들은 신-반펠라기우스주의(Neo-Semipelag-ianism)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오늘날의 로마교회는 나중에 언급된 바로 이 두 가지 견해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조: 성도의 견인, 신인협동설, 예정, 의지의 자유, 은혜, 펠라기우스주의,기독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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