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기우스 논쟁의 성격
펠라기우스 논쟁의 성격
출처: http://www.churchlife.net/file_view.php?fseq=3614&seq=23
- 인간론 논쟁 -
1. 펠라기우스 논쟁의 성격
동방 교회가 그리스도론 논쟁에 힘을 소진하는 동안 라틴 교회는 죄와 은혜에 관한 인간론적, 구원론적 쟁점들에 치중하였다. 이는 서방인들이 철저한 실사구시의 정신을 보여 주는 반면에, 동방인들은 사색적이고 사변적인 정신을 반영한 결과이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론과 인간론은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영지주의의 이원론과 숙명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와 신적 은혜의 필수적인 협력을 크게 강조 하였다. 반면에 라틴 교부들은 사변적 원리들 보다는, 실천적 경험에 토대를 두어 인간의 유전적 죄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하였다. 그리스 교회는 인간의지와 신적 은혜가 협력하여 회심을 일으킨다는 신인협력설(synergism)을 주장한 반면, 라틴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자유 자체를 은혜의 소산으로 이해하는 신단세설(神單勢說, divine monergism)을 주장했다. 이에 반하여, 펠라기우스 주의는 회심의 주된 공로를 인간에 돌리고, 은혜를 단순한 외적 보조물로 격하하는 인단세설(人單勢說, human monergism)을 표방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뒤에 그리스의 신인협력설과 유사한 반(半)펠라기우스주의라는 절충적 사상이 서방에서 유행하였다.
각각 정반대 형태의 단세설을 주장한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전세대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대립, 혹은 이후 세대의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루스 보다 훨씬 더 엄밀한 것이 양 진영을 대표한 사람들이다. 펠라기우스는 심지가 곧은 수사로서, 내면의 갈등을 겪어 본 일이 없이 차분히 발전해 가는 방식으로 율법적 경륜을 닦았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격심한 격동과 갈등을 숱하게 겪다가 값없이 임해온 하나님의 은혜에 함몰되어 믿음과 사랑의 삶으로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었다. 펠라기우스는 대단히 명석한 지성을 가졌고, 도덕적 의지도 근실했으나 숭고한 이상에 오르려는 열정은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낮은 거룩함의 표준을 실천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상승하는 지성과 뜨거운 마음을 가졌고, 내면의 열정적 물결에 오랫동안 동요한 끝에 비로소 평안을 발견하였다. 온갖 죄의 비참함을 맛보았고, 그런 뒤에 구속의 영광을 절실히 깨달았다.
펠라기우스 논쟁은 죄와 은혜를 대립의 축으로 하여 전개된다. 이 논쟁은 인간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윤리적, 종교적 관계에 관한 모든 교리를 포괄하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 원시의(原始義)의 상태에 타락, 중생과 회심, 구속의 영원한 목적, 하나님 은혜의 본질들을 포함한다. 이 논쟁은 결국, 구속이 주로 하나님의 일인가 아니면 인간의 일인가, 인간이 거듭나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개선되기만 하면 되는가 하는 쟁점에 도달하였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자유이고,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펠라기우스는 자연인에게서 시작하여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해 의와 거룩함에 도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도덕적 충족성에 절망하며, 새생명과 선을 행할 능력을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에서 찾는다. 전자가 선택의 자유에서 율법적 경건으로 이어진다면, 후자는 죄의 예속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자유로 이어진다. 전자에게는 그리스도가 단지 스승과 모범이며 은혜는 인간의 태생적 능력 발전에 외적인 보조 수단에 그치지만, 후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제사장이자 왕이시며 은혜는 새생명을 낳고, 양육하고, 완성케 하는 창조의 원리이다. 전자가 중생과 회심을 인간의 덕을 강화하고 완전케 하는 점진적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는 옛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완전한 변화로 이해된다. 전자가 인간의 존엄과 능력을 중시한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전능하심을 숭앙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자기 자랑에서 시작하여 자기기만과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 마치는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인간을 먼저 겸손과 절망의 진토로 밀어 넣은 다음, 자신에 관한 지식이라는 지옥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는 천국으로 인도한다. 전자가 ‘지식이 신앙을 낳는다.’는 명제와 더불어 시작한다면, 후자는 ‘신앙이 지식을 낳는다.’는 명제와 더불어 시작한다. 전자가 성경을 이성에 맞춘다면, 후자는 이성을 성경에 굴복시킨다. 펠라기우스 주의는 이성주의와 결합해 있고, 선천적 의지가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선천적 이성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회심을 일으키는 일에서 인간의 자유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만일 인간의 자유만 강조한다면 인간이 스스로를 구속하는 지위로 격상될 것이고, 반면 은혜만 강조 한다면 이성 없는 기계로 전락 해 버린다. 따라서 전자는 숙명론적 범신론이고 후자는 무신론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진정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양면을 충분히 강조하되, 구주의 신적 사역을 죄 있는 피조물 위에 둠으로써 두 요인을 조화시켜야 한다.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문제를 풀어낸 방법이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할 지라도, 본질적인 점에서 대단히 심오한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사색을 지니고 있다.
2. 펠라기우스 논쟁의 역사(411~431년)
펠라기우스는 평범한 수사로서, 브리타니아에서 태어났다. 두뇌가 명석하고, 성품이 온순하고, 학식과 교양을 겸비하고, 인격이 무흠한 사람이었다. 안디옥 학파의 신학을 공부했고, 외형적인 계율주의자였으며, 금욕적 자기수련과 자기 의를 쌓은 수사였다. 그에게는 믿음이 이론적 신념 이상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종교적 생활은 도덕적 행동, 곧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409년에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기거하면서 바울 서신들에 대한 주석을 집필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로마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서 활동했고, 켈레스티우스라는 저명한 변호사를 회심시켜 자신의 수도 생활과 견해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스승보다 젊고, 더 논리적이며, 철저한 일관성을 갖춘 이 사람을 통해서 논쟁의 불이 붙었다. 이들은 기독교에 교의적 측면 보다 윤리적 측면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411년에 공포스러운 고트족 왕 알라릭을 피하여 로마를 떠나 아프리카로 갔다.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기 위해서 히포로 찾아가서 매우 정중한 편지를 보내었고, 아우구스티누스도 답장을 보냈다.
밀라노의 부제 파울리누스는 주교 아우렐리우스를 찾아가 켈레스티우스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412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그의 고소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켈레스티우스의 저서에서 발견한 7가지 오류들을 고소 이유로 제시했다.
① 아담은 사멸적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서로 죄를 범하지 않았을지라도 죽었을 것이다.
② 아담의 타락은 자기 자신에게만 해를 입혔을 뿐, 인류에게는 해를 입히지 않았다.
③ 유아들은 아담의 타락 전 상태와 동일한 상태로 세상에 들어온다.
④ 인류는 아담의 타락 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다시 사는 것도 아니다.
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도 구원을 받는다.
⑥ 복음 뿐 아니라, 율법도 천국으로 인도한다.
⑦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무죄한 사람이 있었다.
켈레스티우스는 이에 대해 회피적인 답변으로 대응했다. 그리고는 오류들을 시인하고,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공의회는 그에게 출교를 언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조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교리가 많은 지지자들을 얻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교리를 논박하는 논문들을 썼다.
3.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펠라기우스 논쟁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에 체류하면서, 수녀 데메트리아스에게 보낸 서신으로 그곳에서 논쟁이 분출되었다. 당시만 해도, 동방 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자유와 은혜라는 두 개념을 통째로 수용했을 뿐, 둘 사이의 관계를 엄밀히 규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마침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서방 출신의 두 신학자 제롬과 오로치우스가 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펠라기우스에게 이견을 제시했다.
제롬은 초기에는 그리스 교부들의 신인협력설을 확고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암부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절대적이고도 보편적인 죄의 오염 교리에도 동의했다.
스페인의 젊은 성직자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당시에 제롬을 찾아가 함께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갈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전해 준 오리게네스와 펠라기우스 논쟁 관련 서신들을 그에게 전달했다.
415년 6월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이 소집한 교회 회의에서 오로시우스가 펠라기우스를 비판하면서 카르타고 공의회가 이미 켈레스티우스를 단죄했다는 소식과 아울러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오류들을 논박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던 요한은 “내가 아우구스티누스요.” 라고 말한 다음, 피고인 펠라기우스의 변호를 시작했다. 그는 수사이자 평신도에 불과한 펠라기우스를 장로의 지위에 올려주었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주장, 즉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지킬 수 있고 죄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두둔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간 뒤, 이 문제를 로마 주교 이노켄티우스의 판결에 맡기자는 합의가 이루어 졌다. 논쟁에 연루된 양 진영이 모두 서방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는 펠라기우스에게 훨씬 더 유리하게 돌아갔다. 14명의 주교들로 구성된 이 공의회는 가이사랴의 주교 율로기우스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제롬의 편에 서있는 두 주교 헤로스와 라자루스가 펠라기우스를 고소한 건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는 모호한 말로 빠져나가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회의는 오히려 펠라기우스에게서 이단 혐의를 벗겨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롬은 펠라기우스파에 대한 비판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416년 펠라기우스 사상에 동조하는 수사들이 깡패들을 동원하여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수도원으로 몰려가서 행패를 부리고, 건물을 불태우자, 연로한 학자는 무서워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교 요한은 사건 주동자들을 처벌하지 않은 채 지나갔다.
4. 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한 단죄(로마 교회의 입장)
이 문제가 로마 교부에 상정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416년에 열린 두 차례의 아프리카 교회 회의는 다시 한 번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단죄 하고, 판결 결과를 교황 이노켄티우스에게 보냈다. 펠라기우스도 교황에게 서신과 신앙고백문을 보냈으나, 제때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노켄티우스는 논쟁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로마 교부의 이익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자기 교부로 가져오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를 단죄한 아프리카 교회 회의들의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417년 이노켄티우스가 죽고, 조시무스가 취임했다. 그는 동방의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이 중대한 시점에 펠라기우스가 이노켄티우스에게 보냈던 편지가 도착했는데, 자신이 부당하게 비판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사상이 정통 신앙에 부합하다는 내용이었다. 켈레스티우스는 직접 로마를 찾아가 미리 준비해간 문서와 구두 설명으로 조시무스를 만족시키는데 성공했다.
조시무스는 북아프리카 주교들에게 회람서신을 보내었다. 그 골자는 그들이 사안을 좀 더 철저히 심사하지 않은 일과 성경의 교훈을 깨닫는 데 유념하지 않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가한 논쟁에 몰입하는 일에 대해 그들을 책망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의 정통 신앙을 힘주어 강조했다.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눈물이 많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보호를 자주 되뇌이는 사람들로서, 단죄를 받는 일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론에 가서, 주교들에게 로마 교부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호소했다.
아프리카 주교들은 자신들의 대의명분이 확고했던 까닭에, 이 판결에 순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임 교황의 판결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판결이었다. 따라서 417년(혹은 418년)에 카르타고에서 공의회가 열렸을 때 조시무스의 판결에 결연하게 항의하였다. 200명이 넘는 주교들은 펠라기우스의 오류들을 규명한 8조항의 교회법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누구든 아담이 사멸적 존재로 지음 받았고, 죄를 짓지 않았어도 자연적 필연에 의해 죽었으리라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② 누구든 유아세례를 부정하거나, 유아의 원죄를 부정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③ 누구든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천국, 곧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④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저질러진 죄를 사하는 효과만 끼친다고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와 동시에 아프리카 주교들은 황제 호노리우스에게서 펠라기우스파를 규제하는 칙령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상황이 이렇게 조성되어 가자, 조시무스의 견해에도 변화가 일어나, 418년 중반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에게 저주를 선포하고 자신이 인간 본성의 부패에 관한 교리와 세례 및 은혜에 관한 교리에서 카르타고 공의회의 결의와 뜻을 같이한다고 천명하는 회람서신을 발행했다. 회람서신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면직과, 추방과, 재산 몰수의 처벌이 공포되었다.
하지만 에클라눔의 주교 율리아누스는 죽을 때 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유배 상태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에 대립하여 탁월한 역량과 열정으로 자신의 원리를 고수했다.
율리아누스와 켈레스티우스를 비롯한 추방된 펠레기우스파 지도자들은 42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에게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는 그들이 원죄를 부정한 것은 인정할 수 없었으나, 인간 의지에 도덕적 능력이 있다는 교리에는 동조했으며, 황제와 교황 첼레스티노에게 그들을 위해 중재를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마리우스 메르카토르의 자문을 받아 시비곡직을 따져 본 뒤에, 그들에게 수도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후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의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펠라기우스 주의는 이로써 이미 430년경에 외적으로는 종언을 고한 셈이다. 그 뒤로 다시는 교회적 분파로써 일어서지 못하고, 다만 신학 분파로만 남았다.
431년 제 3차 에베소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는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범주에 분류되었다. 둘 다 신성과 인성을 추상적으로 구분하되,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에서, 펠라기우스는 회심사역에서 구분했으며, 생명의 유기적 통일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 쟁점에 대해서 그리스 교회가 보인 태도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명분으로는 펠라기우스주의를 단죄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적극적인 교리들을 채택한 적이 없다. 예전과 다름없이 신인협력설, 혹은 반(半)펠라기우스 주의를 가르쳤으며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성찰하지 않았다.
출처: http://www.churchlife.net/file_view.php?fseq=3614&seq=23
- 인간론 논쟁 -
1. 펠라기우스 논쟁의 성격
동방 교회가 그리스도론 논쟁에 힘을 소진하는 동안 라틴 교회는 죄와 은혜에 관한 인간론적, 구원론적 쟁점들에 치중하였다. 이는 서방인들이 철저한 실사구시의 정신을 보여 주는 반면에, 동방인들은 사색적이고 사변적인 정신을 반영한 결과이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론과 인간론은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영지주의의 이원론과 숙명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와 신적 은혜의 필수적인 협력을 크게 강조 하였다. 반면에 라틴 교부들은 사변적 원리들 보다는, 실천적 경험에 토대를 두어 인간의 유전적 죄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하였다. 그리스 교회는 인간의지와 신적 은혜가 협력하여 회심을 일으킨다는 신인협력설(synergism)을 주장한 반면, 라틴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자유 자체를 은혜의 소산으로 이해하는 신단세설(神單勢說, divine monergism)을 주장했다. 이에 반하여, 펠라기우스 주의는 회심의 주된 공로를 인간에 돌리고, 은혜를 단순한 외적 보조물로 격하하는 인단세설(人單勢說, human monergism)을 표방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뒤에 그리스의 신인협력설과 유사한 반(半)펠라기우스주의라는 절충적 사상이 서방에서 유행하였다.
각각 정반대 형태의 단세설을 주장한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전세대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대립, 혹은 이후 세대의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루스 보다 훨씬 더 엄밀한 것이 양 진영을 대표한 사람들이다. 펠라기우스는 심지가 곧은 수사로서, 내면의 갈등을 겪어 본 일이 없이 차분히 발전해 가는 방식으로 율법적 경륜을 닦았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격심한 격동과 갈등을 숱하게 겪다가 값없이 임해온 하나님의 은혜에 함몰되어 믿음과 사랑의 삶으로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었다. 펠라기우스는 대단히 명석한 지성을 가졌고, 도덕적 의지도 근실했으나 숭고한 이상에 오르려는 열정은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낮은 거룩함의 표준을 실천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상승하는 지성과 뜨거운 마음을 가졌고, 내면의 열정적 물결에 오랫동안 동요한 끝에 비로소 평안을 발견하였다. 온갖 죄의 비참함을 맛보았고, 그런 뒤에 구속의 영광을 절실히 깨달았다.
펠라기우스 논쟁은 죄와 은혜를 대립의 축으로 하여 전개된다. 이 논쟁은 인간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윤리적, 종교적 관계에 관한 모든 교리를 포괄하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 원시의(原始義)의 상태에 타락, 중생과 회심, 구속의 영원한 목적, 하나님 은혜의 본질들을 포함한다. 이 논쟁은 결국, 구속이 주로 하나님의 일인가 아니면 인간의 일인가, 인간이 거듭나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개선되기만 하면 되는가 하는 쟁점에 도달하였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자유이고,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펠라기우스는 자연인에게서 시작하여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해 의와 거룩함에 도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도덕적 충족성에 절망하며, 새생명과 선을 행할 능력을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에서 찾는다. 전자가 선택의 자유에서 율법적 경건으로 이어진다면, 후자는 죄의 예속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자유로 이어진다. 전자에게는 그리스도가 단지 스승과 모범이며 은혜는 인간의 태생적 능력 발전에 외적인 보조 수단에 그치지만, 후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제사장이자 왕이시며 은혜는 새생명을 낳고, 양육하고, 완성케 하는 창조의 원리이다. 전자가 중생과 회심을 인간의 덕을 강화하고 완전케 하는 점진적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는 옛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완전한 변화로 이해된다. 전자가 인간의 존엄과 능력을 중시한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전능하심을 숭앙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자기 자랑에서 시작하여 자기기만과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 마치는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인간을 먼저 겸손과 절망의 진토로 밀어 넣은 다음, 자신에 관한 지식이라는 지옥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는 천국으로 인도한다. 전자가 ‘지식이 신앙을 낳는다.’는 명제와 더불어 시작한다면, 후자는 ‘신앙이 지식을 낳는다.’는 명제와 더불어 시작한다. 전자가 성경을 이성에 맞춘다면, 후자는 이성을 성경에 굴복시킨다. 펠라기우스 주의는 이성주의와 결합해 있고, 선천적 의지가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선천적 이성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회심을 일으키는 일에서 인간의 자유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만일 인간의 자유만 강조한다면 인간이 스스로를 구속하는 지위로 격상될 것이고, 반면 은혜만 강조 한다면 이성 없는 기계로 전락 해 버린다. 따라서 전자는 숙명론적 범신론이고 후자는 무신론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진정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양면을 충분히 강조하되, 구주의 신적 사역을 죄 있는 피조물 위에 둠으로써 두 요인을 조화시켜야 한다.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문제를 풀어낸 방법이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할 지라도, 본질적인 점에서 대단히 심오한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사색을 지니고 있다.
2. 펠라기우스 논쟁의 역사(411~431년)
펠라기우스는 평범한 수사로서, 브리타니아에서 태어났다. 두뇌가 명석하고, 성품이 온순하고, 학식과 교양을 겸비하고, 인격이 무흠한 사람이었다. 안디옥 학파의 신학을 공부했고, 외형적인 계율주의자였으며, 금욕적 자기수련과 자기 의를 쌓은 수사였다. 그에게는 믿음이 이론적 신념 이상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종교적 생활은 도덕적 행동, 곧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409년에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기거하면서 바울 서신들에 대한 주석을 집필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로마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서 활동했고, 켈레스티우스라는 저명한 변호사를 회심시켜 자신의 수도 생활과 견해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스승보다 젊고, 더 논리적이며, 철저한 일관성을 갖춘 이 사람을 통해서 논쟁의 불이 붙었다. 이들은 기독교에 교의적 측면 보다 윤리적 측면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411년에 공포스러운 고트족 왕 알라릭을 피하여 로마를 떠나 아프리카로 갔다.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기 위해서 히포로 찾아가서 매우 정중한 편지를 보내었고, 아우구스티누스도 답장을 보냈다.
밀라노의 부제 파울리누스는 주교 아우렐리우스를 찾아가 켈레스티우스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412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그의 고소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켈레스티우스의 저서에서 발견한 7가지 오류들을 고소 이유로 제시했다.
① 아담은 사멸적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서로 죄를 범하지 않았을지라도 죽었을 것이다.
② 아담의 타락은 자기 자신에게만 해를 입혔을 뿐, 인류에게는 해를 입히지 않았다.
③ 유아들은 아담의 타락 전 상태와 동일한 상태로 세상에 들어온다.
④ 인류는 아담의 타락 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다시 사는 것도 아니다.
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도 구원을 받는다.
⑥ 복음 뿐 아니라, 율법도 천국으로 인도한다.
⑦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무죄한 사람이 있었다.
켈레스티우스는 이에 대해 회피적인 답변으로 대응했다. 그리고는 오류들을 시인하고,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공의회는 그에게 출교를 언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조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교리가 많은 지지자들을 얻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교리를 논박하는 논문들을 썼다.
3.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펠라기우스 논쟁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에 체류하면서, 수녀 데메트리아스에게 보낸 서신으로 그곳에서 논쟁이 분출되었다. 당시만 해도, 동방 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자유와 은혜라는 두 개념을 통째로 수용했을 뿐, 둘 사이의 관계를 엄밀히 규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마침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서방 출신의 두 신학자 제롬과 오로치우스가 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펠라기우스에게 이견을 제시했다.
제롬은 초기에는 그리스 교부들의 신인협력설을 확고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암부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절대적이고도 보편적인 죄의 오염 교리에도 동의했다.
스페인의 젊은 성직자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당시에 제롬을 찾아가 함께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갈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전해 준 오리게네스와 펠라기우스 논쟁 관련 서신들을 그에게 전달했다.
415년 6월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이 소집한 교회 회의에서 오로시우스가 펠라기우스를 비판하면서 카르타고 공의회가 이미 켈레스티우스를 단죄했다는 소식과 아울러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오류들을 논박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던 요한은 “내가 아우구스티누스요.” 라고 말한 다음, 피고인 펠라기우스의 변호를 시작했다. 그는 수사이자 평신도에 불과한 펠라기우스를 장로의 지위에 올려주었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주장, 즉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지킬 수 있고 죄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두둔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간 뒤, 이 문제를 로마 주교 이노켄티우스의 판결에 맡기자는 합의가 이루어 졌다. 논쟁에 연루된 양 진영이 모두 서방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는 펠라기우스에게 훨씬 더 유리하게 돌아갔다. 14명의 주교들로 구성된 이 공의회는 가이사랴의 주교 율로기우스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제롬의 편에 서있는 두 주교 헤로스와 라자루스가 펠라기우스를 고소한 건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는 모호한 말로 빠져나가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회의는 오히려 펠라기우스에게서 이단 혐의를 벗겨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롬은 펠라기우스파에 대한 비판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416년 펠라기우스 사상에 동조하는 수사들이 깡패들을 동원하여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수도원으로 몰려가서 행패를 부리고, 건물을 불태우자, 연로한 학자는 무서워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교 요한은 사건 주동자들을 처벌하지 않은 채 지나갔다.
4. 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한 단죄(로마 교회의 입장)
이 문제가 로마 교부에 상정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416년에 열린 두 차례의 아프리카 교회 회의는 다시 한 번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단죄 하고, 판결 결과를 교황 이노켄티우스에게 보냈다. 펠라기우스도 교황에게 서신과 신앙고백문을 보냈으나, 제때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노켄티우스는 논쟁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로마 교부의 이익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자기 교부로 가져오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를 단죄한 아프리카 교회 회의들의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417년 이노켄티우스가 죽고, 조시무스가 취임했다. 그는 동방의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이 중대한 시점에 펠라기우스가 이노켄티우스에게 보냈던 편지가 도착했는데, 자신이 부당하게 비판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사상이 정통 신앙에 부합하다는 내용이었다. 켈레스티우스는 직접 로마를 찾아가 미리 준비해간 문서와 구두 설명으로 조시무스를 만족시키는데 성공했다.
조시무스는 북아프리카 주교들에게 회람서신을 보내었다. 그 골자는 그들이 사안을 좀 더 철저히 심사하지 않은 일과 성경의 교훈을 깨닫는 데 유념하지 않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가한 논쟁에 몰입하는 일에 대해 그들을 책망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의 정통 신앙을 힘주어 강조했다.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눈물이 많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보호를 자주 되뇌이는 사람들로서, 단죄를 받는 일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론에 가서, 주교들에게 로마 교부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호소했다.
아프리카 주교들은 자신들의 대의명분이 확고했던 까닭에, 이 판결에 순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임 교황의 판결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판결이었다. 따라서 417년(혹은 418년)에 카르타고에서 공의회가 열렸을 때 조시무스의 판결에 결연하게 항의하였다. 200명이 넘는 주교들은 펠라기우스의 오류들을 규명한 8조항의 교회법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누구든 아담이 사멸적 존재로 지음 받았고, 죄를 짓지 않았어도 자연적 필연에 의해 죽었으리라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② 누구든 유아세례를 부정하거나, 유아의 원죄를 부정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③ 누구든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천국, 곧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④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저질러진 죄를 사하는 효과만 끼친다고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와 동시에 아프리카 주교들은 황제 호노리우스에게서 펠라기우스파를 규제하는 칙령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상황이 이렇게 조성되어 가자, 조시무스의 견해에도 변화가 일어나, 418년 중반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에게 저주를 선포하고 자신이 인간 본성의 부패에 관한 교리와 세례 및 은혜에 관한 교리에서 카르타고 공의회의 결의와 뜻을 같이한다고 천명하는 회람서신을 발행했다. 회람서신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면직과, 추방과, 재산 몰수의 처벌이 공포되었다.
하지만 에클라눔의 주교 율리아누스는 죽을 때 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유배 상태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에 대립하여 탁월한 역량과 열정으로 자신의 원리를 고수했다.
율리아누스와 켈레스티우스를 비롯한 추방된 펠레기우스파 지도자들은 42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에게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는 그들이 원죄를 부정한 것은 인정할 수 없었으나, 인간 의지에 도덕적 능력이 있다는 교리에는 동조했으며, 황제와 교황 첼레스티노에게 그들을 위해 중재를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마리우스 메르카토르의 자문을 받아 시비곡직을 따져 본 뒤에, 그들에게 수도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후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의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펠라기우스 주의는 이로써 이미 430년경에 외적으로는 종언을 고한 셈이다. 그 뒤로 다시는 교회적 분파로써 일어서지 못하고, 다만 신학 분파로만 남았다.
431년 제 3차 에베소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는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범주에 분류되었다. 둘 다 신성과 인성을 추상적으로 구분하되,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에서, 펠라기우스는 회심사역에서 구분했으며, 생명의 유기적 통일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 쟁점에 대해서 그리스 교회가 보인 태도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명분으로는 펠라기우스주의를 단죄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적극적인 교리들을 채택한 적이 없다. 예전과 다름없이 신인협력설, 혹은 반(半)펠라기우스 주의를 가르쳤으며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성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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