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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항일독립운동가인가 순교자인가?




주기철 목사, 항일독립운동가인가 순교자인가?
이상규 승인 2015.05.26  06:48:28
 
교계신문을 보니 지난 4월 24일 경남 진해시 남문동 841번지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을 건립하고 기념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우선 이 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하신 관계자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를 상징하는 시설물이 별로 없는 부산경남지방에서 주기철 목사를 기념하고 그의 사적을 기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한영 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를 기념하는 시설물이 다름 아닌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다. 기념관에 전시된 유물이나 기념물이 무엇인가와 상관없이 주기철 목사를 기념하는 시설물에서 주기철 목사를 ‘항일독립운동가’로 규정한 것이다. 비명(碑銘)이나 비문(碑文) 혹은 기념관은 기념대상 인물이 살아온 삶의 자취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다가 끝내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항일독립운동가’로 명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기철 목사는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의 길을 갔단 말인가? 그가 항일의 기치를 들고 투쟁해 온 민족주의적인 인물이었다는 말인가? 기념관의 이름은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이나 그가 지향했던 거룩한 소명을 함축적으로 명명하는데, 주기철 목사를 항일독립운동가로 정리한 것은 받아드리기 어렵다.

물론 그 배후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국비와 지방비를 지원받으면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 기념관’으로 명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국가기관의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불가피하게 주기철 목사를 ‘항일독립운동가’로 포장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아마도 기념관 건립에 관여하셨던 분들도 주기철 목사를 ‘항일독립운동가’로 명명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설물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해 볼 때 주기철 목사를 ‘항일독립운동가’로 제시한 것은 역사의 가면이다.

물론 주기철 목사에게도 민족 혹은 민족의식이 있었고 내면에 요동치는 반일독립의지가 없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조만식 장로가 설립한 민족학교인 오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민의 아픔을 경험했고,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반일 독립을 갈망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 그의 신사참배 거부와 투쟁이 결과적으로 반일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없지 않았다. 의도한 행동과 획득된 결과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 다. 비록 신앙적 동기에서 국가권력에 대항하고 싸웠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없지 않다. 이런 인식에서 1963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되었고, 1968년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를 항일 독립운동가로 명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에 대한 정당한 명명은 못된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행위의 진정한 동기는 민족(주의)적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가 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위해 투옥되고 순교의 길을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주기철 목사는 민족주의자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민족(주의)적 동기가 신앙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가 1936년 7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했을 때 첫 설교, “세 가지의 신앙”은 민족주의에 대한 분명한 경계선을 제시한 설교였다. 실제로 민족주의는 배타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타 민족에 대한 공격적 성격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정의(justitia omnibus)일 수 없다. 이미 1930년대에 주기철 목사는 “주 목사는 대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이 아니란 말이냐, 일본국민이기는 하다.”라고 했고, 1940년 창씨개명이 요구되었을 때 비록 불기피한 현실이기는 했으나 신천기철(新川基徹)로 개명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주기철 목사는 ‘참된 믿음이 곧 애국의 길’이라고 믿었고, 그 신앙행위가 곧 애국의 길이었을 뿐이다. 그는 독립운동하기 위해 감옥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일사각오의 의지로 전후 4차례의 투옥과 5여년 간의 형고(刑苦)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그 결과로 순교에 이르게 된 것은 민족적 울분이나 반일적 차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신사참배 강요가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대표적니 칼빈학자인 와타나베 노부오 같은 양심적 인사들이 주기철 목사를 흠모하는 것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주기철 목사를 ‘항일독립운동가’로 명명하는 것은 그의 저항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념관 설립을 위하 수고하신 분들의 노고를 기억하고 감사하지만 이런 지적에 대해서도 널리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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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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