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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교실

존 웨슬리와 신비주의

존 웨슬리와 신비주의
발제자 : 통합1 김효성
자료출처 http://cafe379.daum.net/_c21_/filefilter_viewer_hdn
 
 
1. 들어가며
  잠시 종교개혁 시대를 떠올려 본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서곡을 울렸던 “95개조 반박문”이 비텐베르크의 성당에 붙여지는 모습(실제 이 반박문의 공포가 역사적 사실인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개연성에 근거하여 상상을 해 본다)을 그려보고, 카예탄의 심문 앞에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루터의 모습도 그려본다. 츠빙글리, 칼빈 등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유럽 각지에서 새로운 종교운동을 펼쳐나가는 모습도 그려본다. 돈으로 매매되어지는 면죄부 대신 믿음과 은총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감격을 선포하는 교회, 성서가 번역되고 출판되어져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예전 전통 또한 보통 사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바뀌어가는 변화의 모습 또한 함께 그려본다. 아주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밑그림에 불과하지만 “종교개혁” 하면 떠오르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한 번 들여다본다면, 그 당시 유럽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지배해왔던 로마 카톨릭의 권위와 질서에 반기를 들고, 기독교 신앙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실존적 투쟁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궁극적 존재와의 합일을 최대 과제로 설정하여 외부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그 과제를 이루고자 끊임없는 인간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 비역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인효론을 특징으로 하는 “신비주의”와는 상반되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절대 은총을 강조하며, 철저한 역사성을 보여주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이 이러한 신비주의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일까? 보다 구체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의 본질적 신앙고백과 현상적 역사성의 양상 가운데 신비주의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는 것일까? 만약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면 이를 어느 정도의 범위로 한정지을 수 있을까?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본 소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들이다. 연구대상으로서의 종교개혁자는 존 웨슬리(John Wesley)이다. 루터나 칼빈으로 대표될 수 있는 종교개혁의 시대와는 2세기 정도 지난 18세기의 인물이나, 당시 유럽 대륙에서 진행되었던 종교개혁의 양상과는 다소 다르게 진행되었던 영국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존 웨슬리는 분명 영국에 있어, 루터나 칼빈과 같은 중요한 종교개혁자로서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인물이라 사려되어 선택하였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는 먼저 존 웨슬리의 신학, 특히 성화에 대한 이해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신비주의와의 연관성 속에서 분석한 후 신비주의의 경향성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존 웨슬리의 신학 이해 : 성화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존 웨슬리의 신학을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신비주의와의 연관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신비주의의 가장 주된 화두가 궁극적 존재와의 합일에 있음을 상기해 보면서, 존 웨슬리의 성화에 관한 내용, 특히 인간과 초월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성화의 개념을 풀어본다면 그 연관성을 비교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2.1 인간,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 아래에 있는 죄의 소유자
  웨슬리는 성서의 기록, 창세기의 아담과 그의 타락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인간이해에 대한 설명을 전개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고, 이 형상은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과 사람이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아담이 타락한 결과로 온 인류도 타락하게 되었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된다고 이해했다.1) 따라서 인간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의 개념이 나온다. 웨슬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재적 은총을 이미 베풀어 주셨다. 이는 회개의 신앙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모든 사람에게 열어주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양심, 종교성, 자유의지라는 빛을 주셨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의 부분적 회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2)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 선재적 은총에 대한 응답의 결단이 요구되게 되었다. 이 응답은 바로 회개(repentence)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깨우치고 책망 받아서 가능하게 된다. 인간의 선택, 자유의지가 요구되나 이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먼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회개를 통해 이제 인간은 의롭다함을 받고 거듭남의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믿음(faith)”이다.
 
2.2 믿음, 의인화(Justification)와 거듭남(Rebirth)의 조건
  웨슬리는 죄의 종류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전 인류에게 미친 원죄와 개개인이 스스로 짓는 자범죄로 구분한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율법적인 관계에서 설명된 것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죄책이라 일컫는다. 후자는 범죄한 사람 자신에 관한 주관적인 것으로 죄의 부패성이라 한다. 인간은 죄책에서 그리고 죄의 부패성에서 모두 씻음 받아야 한다. 이런 죄의 성격에서 구원론을 설명할 때, 죄책에서의 용서는 “의인화”, 죄의 부패성에서 씻김 받는 것은 “성화”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시작은 "거듭남"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3) 의인화는 곧 죄책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4)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회개하고 믿는 것”이다. 죄책에서의 용서, 곧 의롭다함은 객관적으로 부여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에 참여하는 변화도 받게 된다. 곧, 전가되고 주어지는 의 - 의인화(義認化) -일 뿐만 아니라, 본성이 의롭게 변화되는 의 - 의인화(義人化) -도 의미한다.5) 이러한 의인화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거듭남이다. 의인화와 거듭남은 시간적인 순서의 차이가 아니다. 이는 단지 논리적인 순서이다.
 
[새로운 탄생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생명으로 옮기실 때, 그가 영혼을 죄의 죽음으로부터 의의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저 위대한 변화입니다. 그것이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다시 새롭게 될’ 때 … 하나님의 전능하신 영이 영혼 전체에 역사하시는 변화입니다.6)
 
  의인화가 상대적 변화라면, 거듭남은 실제적 변화이다. 의인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 돌아오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이라면, 거듭남은 속사람이 변하여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의인화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이라면, 거듭남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7) 거듭남을 통해 인간은 “성화”의 과정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새롭게 되는, 대신 죄악성을 죽여 가는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믿음”을 통하여 가능하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영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2.3 성화(Sanctification), 그 끊임없는 과정
  인간은 용서받은 죄인이다. 의롭다고 인정은 받았으나 여전히 죄지을 가능성이 있다. 내재적 죄악성, 죄의 부패성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죄는 의인화 되고 거듭난 인간을 지배하지 못한다. 인간은 이 죄의 부패성을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경고하심에 따라 끊임없이 회개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노력해야 한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화이다.8) 성화는 한 순간에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과정인 것이다.
  이 성화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부어주신 사랑의 체험이다. 소극적 차원에서 죄로부터의 깨끗함뿐 만 아니라, 적극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능력,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 내면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과 닮음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자연스레 하나님의 사랑이 증가하면서 점차적으로 죄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굴레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순결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로 변하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마음(하나님 형상)으로 갱신, 변형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화의 목표인 기독교적 완전, 즉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이다. 이 완전은 성화의 목표로서 존재하며, 실현이 가능한 목표이다.9) 그렇다면 어떻게 성화는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언급될 수 있는 것이 “은혜의 수단”이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지시되고 있는바, 매우 값비싼 진주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혹은 받는 수단으로서 구하라고, 발견하기 위해서 찾으라고, 또한 만일 우리가 그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두드리고 계속하여 구하고 찾으라는 지시를 받습니다.10)
 
  웨슬리가 말하는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이 정하신 외적 표시(signs), 말 혹은 행동”으로서 그 정해진 목적인 “선행, 칭의 혹은 성화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평상적인 통로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께서 좌지우지 하시지만 그 은총이 외적인 수단과 통로를 매개로 하여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기도, 성경탐구(듣기, 읽기와 묵상), 성찬을 받는 일, 금식, 기독교적 모임(예배, 신도회, 속회 등) 등을 언급하였다. 이와 같은 일반적이고 평상적인 교회의 규례 혹은 규칙을 지키고 사용하게 될 때,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접하게 되며 그 가운데서 성장하여 인간의 영혼이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다시 새롭게 되는 성화를 이루어 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은 이 모든 수단을 초월하는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수단은 수단이지 그 이상은 절대 아니며,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은혜를 구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자유로우신 하나님은 그 수단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원하시는 대로 은혜를 주실 수도, 안주실 수도 있다. 다만 웨슬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도 인간이 추구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고 그냥 남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은혜에 대하여 인간 쪽에서의 응답적인 갈망과 추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11) 결국 의인화는 믿음으로 이루어졌지만, 성화는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또한 인간의 행위로는 완전에 이르기가 불가능하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
 
3. 존 웨슬리의 신학과 신비주의와의 연관성
  웨슬리의 인간이해, 의인화, 거듭남 그리고 기독교적 완전에 이르기까지의 성화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중요하게 위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이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이 만나는 순간이다. 이는 의인화와 거듭남의 순간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성화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의 만남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의 연속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궁극적 절대자와의 합일을 꿈꾸며 지향하고 노력하는 신비주의와의 접촉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3.1 의인화와 거듭남의 순간 그리고 신비주의
  타락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웨슬리는 “선재적 은총”을 언급했다. 이 은총으로 인해 감히 이루지 못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고, 하나님의 형상마저도 닮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지게 되었다. 그 가능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인간이 열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은총의 길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은총에의 응답으로 “믿음”만이 요구되어 진다. 믿음으로 타락한 인간의 죄를 회개할 때, 의인화와 거듭남의 순간이 다시 은총으로 주어진다. 믿음으로 응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만나는 그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절대적 초월자 하나님과 합일하는 순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서 신앙인은 성도의 삶을 비로소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신비주의의 인간 중심적 인효론의 요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아마도 “믿음”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과 결단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결단마저도,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해 진 길이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현실화된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성령을 받기’ 전까지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존재한다. … 그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계시해 주시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일을 알 수가 없다. … “자연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전까지는 그것들을 결코 분별할 수 없다. ‘계시한다’는 것은 베일을 벗기고, 덮은 것을 벗긴다는 뜻이다. 우리가 전에 모르던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으신 바” 된 것이다. 성령은 우리 자신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우리 영혼 속에 숨으로 불어넣으시며, 주입하신다.12)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그러나 이 은총에 응답하는 믿음에 대한 결단은 인간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그 노력에 의한 자신의 공적에 의해 가리워지는 신비주의의 성향과는 구분된다.
  신비주의 역사인식과의 비교는 어떠할까? 궁극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그들의 인간적인 노력은 대체로 역사성을 결여한 특징을 보인다. 그 과정은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담을 쌓아 혼자만의 노력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 그렇다면 웨슬리가 말하는 이 의인화와 거듭남의 순간은 어떠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을까. 은혜의 수단을 잠시 언급한다면, 이 은혜의 수단은 기독교적 완전에의 길을 향한 과정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웨슬리가 말했던 것처럼 “선행, 칭의, 성화의 은총을 전달하는 평상적인 통로”로서의 은혜의 수단을 고려하다면, 의인화와 거듭남의 순간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도 은혜의 수단은 사용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수단에서 주목할 부분은 성찬을 받는 일, 기독교적 모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 수단이 아니다.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 이 역시 신비주의의 성향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3.2 성화, 그 끊임없는 과정과 신비주의
  이미 인간은 의인화와 거듭남의 순간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을 경험했다. 웨슬리의 말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 영혼 전체에 역사하는 변화가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불가능하다.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은총이 있어야만 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또한 인간의 본질적, 실제적인 변화는 의인화와 거듭남의 순간, 그 순간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했다. 여전이 인간은 죄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겸손하나 온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그의 겸손은 자만과 섞여져 있다. 그는 온유하나 때때로 분노가 그의 온유를 부숴버린다 … (결국)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융해되지 못한 것이다.13)
 
  그렇다면 의인화와 거듭남의 순간 이 후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변화를 이루는 원천인 성령의 내주와 역사하심이 절대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혜의 수단을 통한 인간의 노력, 행위를 웨슬리는 강조했지만 이는 역시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이것 역시 신비주의의 인효론적 요소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은 이로써 성령과 함께하는 신적 합일 상태의 일상적 생활화의 수준과 다름없이 된다. 이러한 성도적 삶의 본질은 단속적이고 또한 이 단속적인 합일 상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신비주의의 일상적 경향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성화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완전, 즉 완전한 사랑에의 길은 신비주의의 역사의식과의 비교에서 보다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웨슬리의 성화 개념은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인간의 개인적 내면의 본질 변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을 추구하며, 개인적이고 내적인 수련의 과정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웨슬리가 공동체와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함께 강조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웨슬리는 단지 공동체와 함께하는 정기적인 집회, 훈련, 제도적 장치는 모두 신자들을 성화의 훈련에 맡기는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본다. 신자들은 이러한 조직된 통로를 통해 서로 짐을 지어주고 그리스도의 율법인 사랑을 성취하는 삶의 성장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웨슬리는 신도회(society), 속회(class), 신도반(band), 선발 신도회(select socitety) 등을 조직하여 신자들이 공동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하나는 완전한 사랑을 목표로 추구하는 성화의 과정이 사회적 거룩함을 이루는 형제 사랑, 세상 변혁의 종교성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하나님 사랑은 성서 말씀대로 이웃 사랑의 두 차원과 함께 실천해 나가야 한다. 웨슬리는 이로써 우리 마음의 구원의 증거가 삶의 외적 증거인 열매들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성화를 추구하는 신자들의 삶에서 필수적인 실천이었다.14) 실제로 웨슬리는 이러한 사회적 성화, 사랑의 실천을 그가 조직한 공동체에서 실천하도록 했다. 속회에서는 매주 1페니(penny)씩 헌금하여 구제 사업에 힘썼다. 웨슬리는 자신의 개인적 생활에 있어서도 복음 전도뿐만 아니라 병자 방문 활동, 무료진료소 개설, 학교 설립 등을 통해 구제 사업에 힘썼다.15) 이러한 공동체 활동, 이웃 사랑의 가치 실현은 개인의 신적 합일 상태로 가기 위한 자기 수도의 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웨슬리에게 이웃 사랑은 다름 아닌 하나님 사랑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이 사람(완(온)전한 자)은 모든 인류에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증거 할 수 있다. 그는 마음과 온갖 행실이 ‘그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다.’ 그는 ‘마음을 다하여 주 그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힘을 다하여’ 그를 섬긴다. 그는 ‘이웃 즉 모든 사람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한다.16)
 
4. 나가며
  본 소고에서는 이제까지 웨슬리의 신학을 성화의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를 신비주의와의 연관성 속에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웨슬리의 신학은 신비주의와는 구분되는 것임을 밝혔다. 죄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의지하며, 그 은총으로 인해 의인화와 거듭남을 경험한 인간은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비주의가 말하는 궁극적 존재와의 합일을 경험한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있다. 오히려 이 만남 속에서 인간은 현실의 삶 속에서 성령과 함께,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이웃과 함께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변화되어 신적 합일 상태의 현실화, 일상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사용되어지는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인간적 노력 또한 아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나, 그러나 그것도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웨슬리는 강조했다. 결국 웨슬리에서 신비주의의 성향은 인효론적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믿음에의 응답, 회개의 결단, 은혜의 수단의 활용이라는 부분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는 부분은 오히려 공동체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역사성을 보여주면서 신비주의와는 차별적인 측면을 가진다. 본질적 측면에서도 인간적인 노력과 의지 이면에 자리한 절대적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고백이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때,  웨슬리의 신학의 신비주의적 성향은 박약하다라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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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8), 125-127.
2) 김홍기,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역사적 재조명』(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87.
3)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 173-174.
4)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 175
5) 김홍기,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역사적 재조명』, 93.
6) Sermon 45, "The New Birth," Works 2:187, 이후정, 『성화의 길: 오늘을 위한 웨슬리의 영성』(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82에서 재인용.
7) 김홍기,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역사적 재조명』, 95-96.
8) 김홍기,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역사적 재조명』, 98-102.
9) 이후정, 『성화의 길: 오늘을 위한 웨슬리의 영성』, 132-133.
10) Sermon 16, "The Means of Grace," Works 1:384, 이후정, 『성화의 길: 오늘을 위한 웨슬리의 영성』, 102에서 재인용.
11) 이후정, 『성화의 길: 오늘을 위한 웨슬리의 영성』, 101-105.
12) A father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 Part I, §Ⅴ. 27-28, Works 11:170-171. Runyon, The New Creation, 151에서 중인, 이후정, 『성화의 길: 오늘을 위한 웨슬리의 영성』, 90에서 재인용
13) Works Ⅵ, 489.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 185에서 재인용.
14) 이후정, 『성화의 길: 오늘을 위한 웨슬리의 영성』, 116-124.
15) 김홍기,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역사적 재조명』, 44, 59-60.
16) 존 웨슬리 지음, 이후정 옮김, 『그리스도인의 완전』(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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