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의 역사와 신학(4)
고신의 역사와 신학(4)
자료출처 http://cafe.daum.net/osm.or.kr/CPdF/6
[고신의 역사와 신학]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2-3.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의 성경 중심적 보수주의
박윤선 목사를 만나기 전에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가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운위하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비록 이들이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공언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신학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학교와 목회 현장의 괴리를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신학이 있으며, 있다면 어떤 신학인가? “한상동은 기도 중에 다음 계획을 세웠다. 신학교를 세워 보수신학의 요람을 만드는 일이었다. 생활의 순결을 생명으로 하는 성경중심의 교역자 양성을 하여 점차적으로 한국교회를 정화하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성경 중심과 기도의 신학이었다.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신사참배, 동방요배, 국기배례 등 모든 죄악을 우상숭배로 파악하였다. 즉 신사참배는 영적 간음이며,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로 보았다. “신사참배는 일본 국신을 숭배하는 일종의 우상 숭배와 종교 의식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 기독교 신자로서는 양심적으로 생각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나, 절대로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명을 내놓을지언정 신사참배는 절대로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기도하였고, 기도로 말씀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들은 고려신학교를 기도하는 학교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앙을 개혁신학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차라리 정통신학, 또는 보수주의, 또는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아니면 박윤선 목사의 표현처럼 근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신학 10년을 회고하면서 고려신학교는 혼란한 신학 사조 가운데서 진리를 밝혀주는 보수신학과 회개운동을 주도한다고 말한다. 혼란한 신학 사조로는 신신학, 신정통, 신비사상 등을 들지만,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로 보건대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는 신학적 훈련을 크게 받지 못한 인물들이다. 그저 평양신학교의 청교도적인 경건을 배워 성실하게 사역한 목회자들이다.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선교사 교수들에 대해서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르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 혹은 개혁주의 사상을 신봉하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의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그들도 역시 평양신학교에서 받은 그대로 성경 무오성을 믿으며 경건하고 정직하게 목회하는 보수주의자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은 신학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신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지도 않았다. 가령 이들의 글이나 설교에서 신신학이나 신정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경계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또 웨스터민스터 신조에 대한 이들의 입장도 그러하다. 비록 고려신학교 교육 지표에는 신조에 대한 언급이 분명하게 나오지만, 이들이 신조를 연구했거나 설교나 강의로 교인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공식적인 입장 표명과 그것을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것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크게 존재한다. 그들이 신조에 대해서 미온적이었고, 신학적 훈련을 계속하거나 자력으로 연구하지도 않았지만, 이들의 신학을 굳이 지목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선교사로부터 전해 받은 단순한 경건 생활과 그것을 삶으로 실천한 소박한 목회에서 나오는 현장의 신학이라 하겠다. 많이 배우거나 연구하지 않았지만, 성경 말씀에 기본적으로 충실하였고 그 말씀을 따라 설교하고 가르쳤으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당대의 다른 목회자들과는 달리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파악하는 영적 통찰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핍박을 감내하면서도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믿음의 용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결단을 내리는 이들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특별하신 은혜라고 할 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가 회개운동의 중심이라고 자주 말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를 정화시키겠다는 계획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려고 신학교를 세웠다. 이들이 공적 회개와 권징을 주장하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데 실패한 한국사회의 일부로서 회개하지 않았다. 당시 교권을 잡은 이들은 대부분이 친일 행적을 지닌 자들이었고, 이들이 스스로 회개하지 않을 때,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는 회개를 지속적으로 촉구하였다.
이 회개와 권징에 대한 이견 역시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는 이유였다. 그가 떠나자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신학교 지지 세력은 분리주의적인 폐쇄 집단으로 비쳐지기 시작한다. 박 박사는 참 교회 건설에 선행해야 하는 공적 회개와 권징을 간과하고 총회의 인준을 받는 신학교 설립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옥중 성도들이 “새 교단을 형성하고자 교회 밖에서 싸우고 있다”고 발언하여 이들이 교회분열주의자로 눈총을 받는 데에 일조하였다.
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삼지 않으려는 한상동 목사의 태도는 오해를 사고도 남았다.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재편과 여기에서 나타난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적 좌경에서 교훈을 얻어 신학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총회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그가 교회 자체를 불신한 것은 아니다. 총회 직영은 피하거나 유보하면서도 경남노회의 인허는 취득했다. 즉 적대적인 총회와 호의적인 노회를 구별한 것이다. 이것은 교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른바 ‘신성파’도 아니었다. 이들은 야심 없이 소박하였고, 그냥 제한적인 방법만을 강구하였다. 친일하다가 친미로 전향한 당시의 여러 교계 지도자들이 지녔던 타협적인 처세술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당시의 평균적인 목사보다 조금이라도 더 신학적 소양을 가졌고, 세태를 파악하고 전체 장로교회를 장악하려는 욕심을 가졌더라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신학교 측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호의적인 경기노회를 기반으로 삼아 총회 직영으로 인정받았고 결국 인정 철회에 반발하여 총회를 떠났다. 이들이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은 것은 일제의 통치를 자기들 방식으로 평가한 정치적 처신이다. 이들은 분명한 처세술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성경 비판학’을 소개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을 갖추었고, 학적 사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이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교수는 신학의 제학설을 소개하고 학생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게” 한다는 교육이념을 표방하였다. 조선신학교(1940년 개교) 설립의 견인차였던 김재준은 “당시 한국교회의 전투적인 교권주의와 독선적인 바리새주의에게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그의 신학적 실존을 토로하기를, ‘저가 칼빈신학을 애호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나는 칼빈이 주장하였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학자의 순수한 학적 양심을 두드리다가 결국 칼빈의 문하에서 내 지적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정세 변화에 따르는 처세술에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학적 대세를 판단하고서 스스로 칼빈을 읽고 칼빈신학 애호자로 자청할 수 있는 신학적 훈련도 쌓았다.
이런 정치력과 자발적인 교회 분리 자세를 출옥 성도들은 갖고 있지도 않았다. 처세술이라는 것은 없고 신학적 훈련도 부족했고 신조에 대한 태도도 불분명했던 옥중성도들이 제시한 교회 재건의 원칙은 결과적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그들과 유사한 핍박을 받았으나 전후의 독일교회를 화합의 장으로 이끌었던 독일교회의 옥중 성도들이 보인 신학적, 정치적 성숙성이 돋보인다. 그러나 출옥성도들이 교만해서가 아니라 신학적인 사고와 표현의 미숙에서 교회재건의 원칙을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출옥성도들이 신학적 소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은 이후의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북한 5도 연합노회는 1946년 1월 20일 5개 조항을 발표한다. 즉 주일 성수,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구분, 예배당의 예배 이외의 사용 거부, 정치에 종사하는 현직 교역자의 사면, 교회가 지닌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천명한다. 이 때문에 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순교를 당한다. 이에 비하여 고려신학교와 연관된 출옥성도들은 군사 정권 치하에서 협력하거나 침묵을 지켰고 맘몬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서 충분히 경계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신사참배 거부가 제한된 신앙 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자신들의 신앙 투쟁을 신학화할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특히 한상동 목사는 지도자로서 아쉬운 점도 더러 남겼다. 박형룡 박사와의 결별이 그렇게 원리적 선택이었고 모든 오해와 피해를 담담하게 감수할 정도로 정당하였다면, 합동에 적극적으로 응한 그의 태도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개인적으로 결정하고 그것도 신학교 경건회 시간에 선언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박형룡 박사와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박윤선 목사가 떠밀리어 떠날 때에도 한상동 목사는 침묵하였다. 박윤선 목사가 고신교회 10년 회고에서 이사와 교수로 동시에 사역하고 있는 문제도 거론하였는데, 이것은 양 신분을 유지한 한상동 목사를 향한 공개 질의의 성격을 지녔다. 고신교회가 인재를 아끼지 않는다는 평가는 한상동 목사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될 법하다. 이후 송상석 목사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신학교를 개편하여 대학 설립을 추진할 수야 있겠지만, 송 목사를 설득하면서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가(假)이사회의 이사장으로 보다 더 적극적인 일을 한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송 목사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고신교회가 고소파라는 비난을 받는 서막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을 가지고 소급하여 그는 애초부터 ‘분리주의자’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한상동 목사가 편의적인 처세술과 신학적 소양을 갖춘 지도자였다면 어느 정도는 헤쳐 나갈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지도자는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하지만 때로는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 지혜와 신학적 안목으로 난국을 미리 피하거나 인내하고 사람을 격려하고 아끼면서 회개운동을 지속했어야만 하였다. 한상동 목사에게는 이런 부족한 면도 있었다.
이후에 고신교회는 소송이나 문서 위조, 내적 비난과 분열의 악순환을 겪는다. 회개와 권징을 주장하던 고신교회와 고려신학교는 오히려 회개와 권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학교법인을 중심으로 벌어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태를 보자면, 고신교회의 원래 정신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세속 법정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교육부의 유권해석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정교의 분리의 진정한 정신을 알지 못하는 신학적 빈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가(假)이사회 사건은 ‘일은 먼저, 수습은 뒤에’라는 비개혁주의적, 비공동체적 선례가 생긴다. 신조에 기초하여 잘 훈련된 신학 전통이 수립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수주의나 복음주의적 경건주의에 기초하여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쉽게 요동질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학의 빈곤은 주로 고신대학교, 고신의료원과 신학대학원 등에 연관된 사안을 처리하는 데에서 역력하게 나타난다. 총회나 노회 등 치리회의 운영에서도 같은 양상은 수없이 나타난다. 신학적 토론의 전통이 아예 정착하지 못했다. 한국교회의 회개와 개혁을 외치고 출범한 고신교회는 이제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에서 오랫동안 목회학과 설교학을 가르쳤다. 그의 영성을 고신교회 목사들이 본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성경 중심적 보수주의가 고신교회 목회의 면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후배들이 이 시대에 강요되는 신사참배에 해당하는 우상숭배를 영적 통찰력으로 간파하고 믿음의 용기로 싸우며 순결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고신교회는 한국장로교회 일반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2-4. 이근삼 교수의 보통은혜에 기초한 문화신학
이근삼 교수는 개혁신학의 틀을 박윤선 목사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리고 박 목사보다 개혁주의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하였다. 고신신학의 정체성을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한 신학, 곧 칼빈이 성경을 해석하고 우리에게 가르쳐준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정의한다.
자신은 박윤선 목사에게서 계시의존 사색, 하나님의 말씀 중심,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철두철미하게 훈련받았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가 혼자 거의 모든 과목을 가르치다 보니 세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유학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목적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현대신학을 공부하고 “박윤선 목사가 그렇게 좋아하던 화란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 교수는 1962년부터 32년간 고려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기도와 순결한 생활을 강조했다.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여 많은 후배와 제자들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무엇보다도 인재 양성과 기독교 문화 창달을 위하여 기독교대학에 누구보다도 집중적으로 몰두하였다.
이 교수는 신학자로서 많은 주제들을 다루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일본 신도를 비판하고 신사참배 거부 정신의 신앙적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점에서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좋은 자료이다. 이후에도 두 차례나 일본 고베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도주의의 실상을 강의하고 경고하였다. 무엇보다도 칼빈 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연구하였다. 칼빈의 생애를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교육자의 입장에서 살폈고, 교회론과 성찬론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칼빈주의에 대한 글도 많이 남겼다. 칼빈주의의 종교관, 인간관, 학문론, 생활관, 직업관, 사회관, 국가관 등을 연구하였고, 무엇보다도 칼빈주의와 문화는 그가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친 분야이다.
이 교수는 신조를 개혁신학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가르쳤다. 먼저 「웨스트민스터대교리문답서」를 번역하였고 고신교회는 이것을 다른 신조와 함께 1970년 20회 총회에서 채택한다. 이 교수는 고백서에 고백된 신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글도 썼고, 「소교리문답서」를 해설했다. 나아가 교단 교육위원회의 위원 또는 위원장으로서 교리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이 칼빈을 통하여 이해된 성경 교리 사상 체계는 교회들이 채택한 공적 신앙고백들과 그를 따르는 대표적 신학자들의 고전적인 저서들을 통해서 발달되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를 종종 검토한다. 어거스틴과 칼빈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개혁신학자들을 나열하면서 동시에 신조의 입장에서 개혁파의 계보를 살핀다. 개혁주의의 특성으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공교회 중심의 신학이라고 요약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는 예정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구별도 덧붙인다. 물론 칼빈주의 오대교리도 언급한다. 또는 특이한 정치제도로서 권징, 순수한 교리와 순결한 생활 강조,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개혁주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통하여 교리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 전체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학이다. 이 문맥에서 기독교대학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종사하는 개혁주의 전통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안임을 말한다. 박윤선 목사가 가히 그냥 지나가듯 거론한 바가 이론적으로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실제로도 구현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기독교대학으로서 고신대학교는 이근삼 교수와 그의 사역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1946)에는 ‘보통은혜 원리’라는 말이 나온다. 문화운동을 말하다가 갑자기 대학제도를 거론하면서 “역사가 오랜 켐브리지, 옥스퍼드 대학등이 皆是(개시=모두 다) 교회대학으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말하자면 기독교대학을 포함하는 문화운동도 천국을 구하는 정통신학운동에 수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시의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아주 진취적인 입장이다. ‘보통은혜 원리’라는 표현은 화란신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서 취지서의 필자가 화란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점이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를 박윤선 목사가 작성했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이다. 화란 유학 이전부터 화란신학자들의 신학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에 발표한 교회론에 관한 논문에서 “장로교는 개혁신학을 주장하나니 개혁신학의 최중요사상은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autopistia)을 믿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점은 개혁신학을 성경관의 관점에서 정립하려는 그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개혁신학의 성경관의 입장에서 칼빈주의 신학의 교회론을 다룬다. 특이한 것은 그가 바빙크의 교회론을 소개하면서 바빙크가 교회론을 보통은혜의 관점에서 먼저 다루고 나서 마지막으로 특별은혜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을 그대로 소개한 점이다. “헬만빠빙은 교회론에 있어서도 역시 보통은혜의 영역에서부터 그 원리를 찾는다.” 박윤선 목사가 칼빈주의를 굳이 개혁파라 부른 배경에는 화란 개혁신학이 있으며, 그 중 보통은혜원리에 관한 관심도 포함된다. 바빙크에 대한 글이 이보다 이전에는 출판된 적이 없긴 하지만, “헬만빠빙은 교회론에 있어서도 역시”라는 말은 박윤선이 바빙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 1952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칼빈주의에 관한 일련의 논문에서 화란신학과 보통은혜를 길게 소개하고 있다.
고려신학교는 1955년에 종합대학교를 목표로 하고 예과 과정을 4년제 대학과정으로 개편하고 칼빈대학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보통은혜에 기초한 칼빈주의 문화관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고, 이 영향은 박윤선 목사를 통하여 들어온 화란개혁신학의 문화관이다. 박윤선 목사는 고신교회를 이미 영구히 떠났고, 고신교회는 환원한 후 고려신학교를 직영하면서 곧장 대학 설립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설립을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등장하고, 양편의 알력과 견제 가운데서 사조 이사회사건이나 성도간의 법정 소송 등 교회 정치의 갈등, 교회 분열과 교회의 정체성 상실의 위기를 계속 당한다.
대학 설립 찬성 인사 중에 이근삼 교수가 있다. 칼빈주의 문화관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기독교대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우리 귀에 익은 ‘일반은총’이라는 표현은 주로 그가 전파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화란 개혁신학자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일단 전제로 받아들인다. “문화는 일반은총을 통하여 자연에 주어진 원시적인 힘이 결실하기 때문에 일반은총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의 문화활동은 단순히 일반은총의 역사로만 해석할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간의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바빙크와 칼빈을 따른다. 화란 신학은 문화와 세상에 무관심한 신자들을 일반은총론으로 설득하고 활성화시켜 개혁파 고유의 문화관을 수립하고 실제적으로 문화적인 삶을 살았다.
이 교수는 일반은총에 기초한 문화관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이것은 기독교대학에 집중된다. 기독교대학의 신학적 기초는 일반은총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대한 문화적 명령에 따라 발전하고 가꾸고 활용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이다. 이 사명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타락 이전에 맺어진 일반은총에 속한다.” 이 사명을 개혁주의 세계관, 칼빈주의 세계관 또는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칼빈주의 세계관은 신학이 아니고, 정치, 사회, 과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견해를 포함하는 전체 포괄적인 사상 체계이다. 이 세계관은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며, 세계를 보며 판단하는 사상체계이다.
이런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곳이 기독교대학이며, 기독교대학은 이 세계관의 구체적 실천을 돕는다. “이 대학교에서 교육받고 나가는 학생들이 장차 목사나 선교사, 의사가 되고 의료선교사, 간호사가 되어서 세계 각지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 사명을 받아 나가게 될 것이다. 또한 교육자, 음악가, 과학자들이 되어서 국내외 사회의 요원으로 자기가 봉사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복음을 증거하면서 일하는 일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애지중지했던 대학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지난 반년이 넘게 계속되는 사태는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 언론기관을 통해서 사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주목과 염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전에 우리가 잘 믿는다고 자랑하고 교만하던 고신파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이제는 ‘고신파’라고 자칭하거나 부름 받기가 부끄러워졌다고 한탄한다.” 해결책으로 대학과 신대원의 분리를 주장한다. “현재 고신대학은 총회직영이라는 이름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 총회직영을 신학대학원(목사 양성기관)에 한정시켜서 명실 공히 총회직영 기관답게 전국 교회들이 그 경영을 책임지며, 신학사상도 철저히 감독하여 일심으로 협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은 대학답게 발전할 수 있도록 출자이사들을 모아 대학 경영의 새로운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 이제 현시점을 잘 파악하여 총회적으로 결단을 내릴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근삼 교수는 한국 사역 말기에 고신교회의 상징인 대학교의 장래에 대하여 특단의 대안을 제시한 셈이다. 이 대안은 그 이후 고신교회가 연례적으로 겪게 될 내부 갈등과 임시이사의 파송을 예상이나 하는 듯하다. 이 대안은 엄청난 수업료를 치르고 난 뒤에 얻은 지혜이고, 궁극적으로는 고신교회가 따라야 할 고견이다.
그렇지만 이 지혜로운 대안에도 재고해야 할 문제가 있다. 후천적인 결론으로 등장한 이 대안은 그의 초기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개혁주의 기독교문화관을 정립한 것은 고신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 역사에서 높이 평가할 이론적, 실천적 업적이다. 그러나 이 문화관의 연장과 총체로서 기독교대학을 말한 것이 이근삼 교수의 특징이요 동시에 한계이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기독교대학의 중요한 기초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기독교학교로서 기독교대학의 출발점은 유아세례이다. 부모가 세례의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의 사명은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학교교육까지도 포함한다. 자유대학교를 세운 카이퍼를 화란의 수상으로 만든 배경은 멀리 소급하면 기독교학교운동이다. 이 부모의 교육적 사명과 책임을 기독교학교로 실천하면서, 기독교문화도 개혁파 신학과 신자의 주요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순서는 바뀔 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학교의 설립과 운영 주체는 부모이다. 굳이 따지자면 ‘출자이사’가 이에 해당한다 하겠지만, 이것은 재정과 운영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다는 입장이지, 부모의 입장을 고려한 대안은 아니다. 고신교회가 개혁파로 자부하였지만, 고신교회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신대학교를 볼 때, 고신교회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원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랬다면 기독교교육학과는 졸업생을 위하여 교회 안에 ‘교육사’ 제도를 소개하기 전에, 기독교 초등, 중등학교를 먼저 세워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전후가 엇갈린 상황에서 ‘출자이사’ 제안은 뜬금없는 제안으로 들릴 것이요,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고신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교회와 정치의 관계는 중요 주제였다. 바로 신사참배 강요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학위논문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다루었다. 그렇지만 고신대학교의 역사는 그의 논문에서 별 도움을 얻지 못하였다. 이 교수는 대학 인가의 필요성을 논할 때에 여권 발급이나 입영 연기 등을 든다. 이런 논거까지도 고신총회에서 수용되어 가(假)이사회나 세속 송사까지 불사하면서 대학은 설립되었고, 의료원을 가진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카이퍼가 대중화시킨 ‘영역주권론’은 자유대학교의 ‘자유’의 의미에 잘 들어있다. 즉 신앙고백에 기초한 기독교교육을 국가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 영역 주권의 주요 핵심이요 적용이다. 그래서 카이퍼는 비기독교적이고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학교를 목표로 삼았다. 동시에 성경을 비판하고 신조를 떠나 신앙적,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한 교회의 교권으로부터도 ‘자유’하기를 원했다. 이 후자의 자유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도 추구하는 셈이다.
그런데 고신교회는 고신대학교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국가 권력인 교육부의 정당한 개입뿐만 아니라 부당한 개입까지 자초하였다. 영역 주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교육부는 교회의 기관인 학교에게 지시할 수 없다. 이 말을 교회법이 세속법에 우선한다거나 국가권력에 대한 불복종해도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일차적으로 교회는 국가와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필요하게 국가의 간섭을 받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학부모인 교인이 아니라) 교회가 학교를 운영하면서 병원을 수익기관으로 삼는 것은 불가피하고 불필요하게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사조 이사회 사건 이후 최근, 아니 지금 이 순간까지 고신교회는 고신대학교의 위치를 신학적으로 정리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지속적으로 교육부를 상대로 교회 구성원 내부의 갈등을 판단하도록 요청한다. 교육부의 권세를 전제로 하여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정립되기도 한다. 이것은 세속 법정에서 가부를 결정하려는 송사와 같은 맥락에 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으려는 개혁주의는 극적으로 무너져가고 있다.
기독교대학의 본질의 문제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 문제에서 이근삼 교수는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한 개인 신학자가 다 걸머질 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맡아야 할 짐의 분량은 상대적으로 누구보다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근삼 교수는 신학자, 대중 강연자, 대학 경영자로서 남다른 열정과 성과를 거두었다. 박윤선 목사가 추구했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확립하고 널리 보급한 후계자이다. 박윤선 목사를 선생으로 만나 ‘세밀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개혁주의에 대한 열정을 배우고, 미국과 화란으로 가서 세밀한 부분까지 공부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출옥성도들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그 역사와 신조로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확립하였고, 이 신학이 지닌 힘,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정립하였다. 이 신학은 성경에 기초한 신학이고 계속 따라야 할 신학이다. 이미 받은 전통적인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계속)
자료출처 http://cafe.daum.net/osm.or.kr/CPdF/6
[고신의 역사와 신학]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2-3.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의 성경 중심적 보수주의
박윤선 목사를 만나기 전에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가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운위하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비록 이들이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공언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신학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학교와 목회 현장의 괴리를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신학이 있으며, 있다면 어떤 신학인가? “한상동은 기도 중에 다음 계획을 세웠다. 신학교를 세워 보수신학의 요람을 만드는 일이었다. 생활의 순결을 생명으로 하는 성경중심의 교역자 양성을 하여 점차적으로 한국교회를 정화하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성경 중심과 기도의 신학이었다.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신사참배, 동방요배, 국기배례 등 모든 죄악을 우상숭배로 파악하였다. 즉 신사참배는 영적 간음이며,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로 보았다. “신사참배는 일본 국신을 숭배하는 일종의 우상 숭배와 종교 의식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 기독교 신자로서는 양심적으로 생각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나, 절대로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명을 내놓을지언정 신사참배는 절대로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기도하였고, 기도로 말씀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들은 고려신학교를 기도하는 학교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앙을 개혁신학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차라리 정통신학, 또는 보수주의, 또는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아니면 박윤선 목사의 표현처럼 근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신학 10년을 회고하면서 고려신학교는 혼란한 신학 사조 가운데서 진리를 밝혀주는 보수신학과 회개운동을 주도한다고 말한다. 혼란한 신학 사조로는 신신학, 신정통, 신비사상 등을 들지만,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로 보건대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는 신학적 훈련을 크게 받지 못한 인물들이다. 그저 평양신학교의 청교도적인 경건을 배워 성실하게 사역한 목회자들이다.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선교사 교수들에 대해서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르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 혹은 개혁주의 사상을 신봉하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의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그들도 역시 평양신학교에서 받은 그대로 성경 무오성을 믿으며 경건하고 정직하게 목회하는 보수주의자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은 신학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신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지도 않았다. 가령 이들의 글이나 설교에서 신신학이나 신정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경계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또 웨스터민스터 신조에 대한 이들의 입장도 그러하다. 비록 고려신학교 교육 지표에는 신조에 대한 언급이 분명하게 나오지만, 이들이 신조를 연구했거나 설교나 강의로 교인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공식적인 입장 표명과 그것을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것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크게 존재한다. 그들이 신조에 대해서 미온적이었고, 신학적 훈련을 계속하거나 자력으로 연구하지도 않았지만, 이들의 신학을 굳이 지목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선교사로부터 전해 받은 단순한 경건 생활과 그것을 삶으로 실천한 소박한 목회에서 나오는 현장의 신학이라 하겠다. 많이 배우거나 연구하지 않았지만, 성경 말씀에 기본적으로 충실하였고 그 말씀을 따라 설교하고 가르쳤으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당대의 다른 목회자들과는 달리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파악하는 영적 통찰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핍박을 감내하면서도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믿음의 용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결단을 내리는 이들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특별하신 은혜라고 할 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가 회개운동의 중심이라고 자주 말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를 정화시키겠다는 계획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려고 신학교를 세웠다. 이들이 공적 회개와 권징을 주장하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데 실패한 한국사회의 일부로서 회개하지 않았다. 당시 교권을 잡은 이들은 대부분이 친일 행적을 지닌 자들이었고, 이들이 스스로 회개하지 않을 때,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는 회개를 지속적으로 촉구하였다.
이 회개와 권징에 대한 이견 역시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는 이유였다. 그가 떠나자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신학교 지지 세력은 분리주의적인 폐쇄 집단으로 비쳐지기 시작한다. 박 박사는 참 교회 건설에 선행해야 하는 공적 회개와 권징을 간과하고 총회의 인준을 받는 신학교 설립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옥중 성도들이 “새 교단을 형성하고자 교회 밖에서 싸우고 있다”고 발언하여 이들이 교회분열주의자로 눈총을 받는 데에 일조하였다.
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삼지 않으려는 한상동 목사의 태도는 오해를 사고도 남았다.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재편과 여기에서 나타난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적 좌경에서 교훈을 얻어 신학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총회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그가 교회 자체를 불신한 것은 아니다. 총회 직영은 피하거나 유보하면서도 경남노회의 인허는 취득했다. 즉 적대적인 총회와 호의적인 노회를 구별한 것이다. 이것은 교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른바 ‘신성파’도 아니었다. 이들은 야심 없이 소박하였고, 그냥 제한적인 방법만을 강구하였다. 친일하다가 친미로 전향한 당시의 여러 교계 지도자들이 지녔던 타협적인 처세술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당시의 평균적인 목사보다 조금이라도 더 신학적 소양을 가졌고, 세태를 파악하고 전체 장로교회를 장악하려는 욕심을 가졌더라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신학교 측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호의적인 경기노회를 기반으로 삼아 총회 직영으로 인정받았고 결국 인정 철회에 반발하여 총회를 떠났다. 이들이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은 것은 일제의 통치를 자기들 방식으로 평가한 정치적 처신이다. 이들은 분명한 처세술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성경 비판학’을 소개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을 갖추었고, 학적 사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이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교수는 신학의 제학설을 소개하고 학생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게” 한다는 교육이념을 표방하였다. 조선신학교(1940년 개교) 설립의 견인차였던 김재준은 “당시 한국교회의 전투적인 교권주의와 독선적인 바리새주의에게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그의 신학적 실존을 토로하기를, ‘저가 칼빈신학을 애호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나는 칼빈이 주장하였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학자의 순수한 학적 양심을 두드리다가 결국 칼빈의 문하에서 내 지적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정세 변화에 따르는 처세술에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학적 대세를 판단하고서 스스로 칼빈을 읽고 칼빈신학 애호자로 자청할 수 있는 신학적 훈련도 쌓았다.
이런 정치력과 자발적인 교회 분리 자세를 출옥 성도들은 갖고 있지도 않았다. 처세술이라는 것은 없고 신학적 훈련도 부족했고 신조에 대한 태도도 불분명했던 옥중성도들이 제시한 교회 재건의 원칙은 결과적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그들과 유사한 핍박을 받았으나 전후의 독일교회를 화합의 장으로 이끌었던 독일교회의 옥중 성도들이 보인 신학적, 정치적 성숙성이 돋보인다. 그러나 출옥성도들이 교만해서가 아니라 신학적인 사고와 표현의 미숙에서 교회재건의 원칙을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출옥성도들이 신학적 소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은 이후의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북한 5도 연합노회는 1946년 1월 20일 5개 조항을 발표한다. 즉 주일 성수,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구분, 예배당의 예배 이외의 사용 거부, 정치에 종사하는 현직 교역자의 사면, 교회가 지닌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천명한다. 이 때문에 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순교를 당한다. 이에 비하여 고려신학교와 연관된 출옥성도들은 군사 정권 치하에서 협력하거나 침묵을 지켰고 맘몬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서 충분히 경계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신사참배 거부가 제한된 신앙 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자신들의 신앙 투쟁을 신학화할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특히 한상동 목사는 지도자로서 아쉬운 점도 더러 남겼다. 박형룡 박사와의 결별이 그렇게 원리적 선택이었고 모든 오해와 피해를 담담하게 감수할 정도로 정당하였다면, 합동에 적극적으로 응한 그의 태도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개인적으로 결정하고 그것도 신학교 경건회 시간에 선언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박형룡 박사와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박윤선 목사가 떠밀리어 떠날 때에도 한상동 목사는 침묵하였다. 박윤선 목사가 고신교회 10년 회고에서 이사와 교수로 동시에 사역하고 있는 문제도 거론하였는데, 이것은 양 신분을 유지한 한상동 목사를 향한 공개 질의의 성격을 지녔다. 고신교회가 인재를 아끼지 않는다는 평가는 한상동 목사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될 법하다. 이후 송상석 목사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신학교를 개편하여 대학 설립을 추진할 수야 있겠지만, 송 목사를 설득하면서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가(假)이사회의 이사장으로 보다 더 적극적인 일을 한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송 목사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고신교회가 고소파라는 비난을 받는 서막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을 가지고 소급하여 그는 애초부터 ‘분리주의자’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한상동 목사가 편의적인 처세술과 신학적 소양을 갖춘 지도자였다면 어느 정도는 헤쳐 나갈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지도자는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하지만 때로는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 지혜와 신학적 안목으로 난국을 미리 피하거나 인내하고 사람을 격려하고 아끼면서 회개운동을 지속했어야만 하였다. 한상동 목사에게는 이런 부족한 면도 있었다.
이후에 고신교회는 소송이나 문서 위조, 내적 비난과 분열의 악순환을 겪는다. 회개와 권징을 주장하던 고신교회와 고려신학교는 오히려 회개와 권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학교법인을 중심으로 벌어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태를 보자면, 고신교회의 원래 정신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세속 법정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교육부의 유권해석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정교의 분리의 진정한 정신을 알지 못하는 신학적 빈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가(假)이사회 사건은 ‘일은 먼저, 수습은 뒤에’라는 비개혁주의적, 비공동체적 선례가 생긴다. 신조에 기초하여 잘 훈련된 신학 전통이 수립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수주의나 복음주의적 경건주의에 기초하여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쉽게 요동질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학의 빈곤은 주로 고신대학교, 고신의료원과 신학대학원 등에 연관된 사안을 처리하는 데에서 역력하게 나타난다. 총회나 노회 등 치리회의 운영에서도 같은 양상은 수없이 나타난다. 신학적 토론의 전통이 아예 정착하지 못했다. 한국교회의 회개와 개혁을 외치고 출범한 고신교회는 이제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에서 오랫동안 목회학과 설교학을 가르쳤다. 그의 영성을 고신교회 목사들이 본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성경 중심적 보수주의가 고신교회 목회의 면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후배들이 이 시대에 강요되는 신사참배에 해당하는 우상숭배를 영적 통찰력으로 간파하고 믿음의 용기로 싸우며 순결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고신교회는 한국장로교회 일반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2-4. 이근삼 교수의 보통은혜에 기초한 문화신학
이근삼 교수는 개혁신학의 틀을 박윤선 목사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리고 박 목사보다 개혁주의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하였다. 고신신학의 정체성을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한 신학, 곧 칼빈이 성경을 해석하고 우리에게 가르쳐준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정의한다.
자신은 박윤선 목사에게서 계시의존 사색, 하나님의 말씀 중심,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철두철미하게 훈련받았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가 혼자 거의 모든 과목을 가르치다 보니 세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유학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목적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현대신학을 공부하고 “박윤선 목사가 그렇게 좋아하던 화란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 교수는 1962년부터 32년간 고려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기도와 순결한 생활을 강조했다.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여 많은 후배와 제자들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무엇보다도 인재 양성과 기독교 문화 창달을 위하여 기독교대학에 누구보다도 집중적으로 몰두하였다.
이 교수는 신학자로서 많은 주제들을 다루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일본 신도를 비판하고 신사참배 거부 정신의 신앙적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점에서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좋은 자료이다. 이후에도 두 차례나 일본 고베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도주의의 실상을 강의하고 경고하였다. 무엇보다도 칼빈 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연구하였다. 칼빈의 생애를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교육자의 입장에서 살폈고, 교회론과 성찬론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칼빈주의에 대한 글도 많이 남겼다. 칼빈주의의 종교관, 인간관, 학문론, 생활관, 직업관, 사회관, 국가관 등을 연구하였고, 무엇보다도 칼빈주의와 문화는 그가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친 분야이다.
이 교수는 신조를 개혁신학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가르쳤다. 먼저 「웨스트민스터대교리문답서」를 번역하였고 고신교회는 이것을 다른 신조와 함께 1970년 20회 총회에서 채택한다. 이 교수는 고백서에 고백된 신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글도 썼고, 「소교리문답서」를 해설했다. 나아가 교단 교육위원회의 위원 또는 위원장으로서 교리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이 칼빈을 통하여 이해된 성경 교리 사상 체계는 교회들이 채택한 공적 신앙고백들과 그를 따르는 대표적 신학자들의 고전적인 저서들을 통해서 발달되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를 종종 검토한다. 어거스틴과 칼빈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개혁신학자들을 나열하면서 동시에 신조의 입장에서 개혁파의 계보를 살핀다. 개혁주의의 특성으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공교회 중심의 신학이라고 요약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는 예정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구별도 덧붙인다. 물론 칼빈주의 오대교리도 언급한다. 또는 특이한 정치제도로서 권징, 순수한 교리와 순결한 생활 강조,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개혁주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통하여 교리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 전체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학이다. 이 문맥에서 기독교대학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종사하는 개혁주의 전통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안임을 말한다. 박윤선 목사가 가히 그냥 지나가듯 거론한 바가 이론적으로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실제로도 구현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기독교대학으로서 고신대학교는 이근삼 교수와 그의 사역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1946)에는 ‘보통은혜 원리’라는 말이 나온다. 문화운동을 말하다가 갑자기 대학제도를 거론하면서 “역사가 오랜 켐브리지, 옥스퍼드 대학등이 皆是(개시=모두 다) 교회대학으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말하자면 기독교대학을 포함하는 문화운동도 천국을 구하는 정통신학운동에 수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시의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아주 진취적인 입장이다. ‘보통은혜 원리’라는 표현은 화란신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서 취지서의 필자가 화란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점이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를 박윤선 목사가 작성했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이다. 화란 유학 이전부터 화란신학자들의 신학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에 발표한 교회론에 관한 논문에서 “장로교는 개혁신학을 주장하나니 개혁신학의 최중요사상은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autopistia)을 믿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점은 개혁신학을 성경관의 관점에서 정립하려는 그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개혁신학의 성경관의 입장에서 칼빈주의 신학의 교회론을 다룬다. 특이한 것은 그가 바빙크의 교회론을 소개하면서 바빙크가 교회론을 보통은혜의 관점에서 먼저 다루고 나서 마지막으로 특별은혜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을 그대로 소개한 점이다. “헬만빠빙은 교회론에 있어서도 역시 보통은혜의 영역에서부터 그 원리를 찾는다.” 박윤선 목사가 칼빈주의를 굳이 개혁파라 부른 배경에는 화란 개혁신학이 있으며, 그 중 보통은혜원리에 관한 관심도 포함된다. 바빙크에 대한 글이 이보다 이전에는 출판된 적이 없긴 하지만, “헬만빠빙은 교회론에 있어서도 역시”라는 말은 박윤선이 바빙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 1952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칼빈주의에 관한 일련의 논문에서 화란신학과 보통은혜를 길게 소개하고 있다.
고려신학교는 1955년에 종합대학교를 목표로 하고 예과 과정을 4년제 대학과정으로 개편하고 칼빈대학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보통은혜에 기초한 칼빈주의 문화관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고, 이 영향은 박윤선 목사를 통하여 들어온 화란개혁신학의 문화관이다. 박윤선 목사는 고신교회를 이미 영구히 떠났고, 고신교회는 환원한 후 고려신학교를 직영하면서 곧장 대학 설립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설립을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등장하고, 양편의 알력과 견제 가운데서 사조 이사회사건이나 성도간의 법정 소송 등 교회 정치의 갈등, 교회 분열과 교회의 정체성 상실의 위기를 계속 당한다.
대학 설립 찬성 인사 중에 이근삼 교수가 있다. 칼빈주의 문화관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기독교대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우리 귀에 익은 ‘일반은총’이라는 표현은 주로 그가 전파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화란 개혁신학자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일단 전제로 받아들인다. “문화는 일반은총을 통하여 자연에 주어진 원시적인 힘이 결실하기 때문에 일반은총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의 문화활동은 단순히 일반은총의 역사로만 해석할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간의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바빙크와 칼빈을 따른다. 화란 신학은 문화와 세상에 무관심한 신자들을 일반은총론으로 설득하고 활성화시켜 개혁파 고유의 문화관을 수립하고 실제적으로 문화적인 삶을 살았다.
이 교수는 일반은총에 기초한 문화관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이것은 기독교대학에 집중된다. 기독교대학의 신학적 기초는 일반은총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대한 문화적 명령에 따라 발전하고 가꾸고 활용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이다. 이 사명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타락 이전에 맺어진 일반은총에 속한다.” 이 사명을 개혁주의 세계관, 칼빈주의 세계관 또는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칼빈주의 세계관은 신학이 아니고, 정치, 사회, 과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견해를 포함하는 전체 포괄적인 사상 체계이다. 이 세계관은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며, 세계를 보며 판단하는 사상체계이다.
이런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곳이 기독교대학이며, 기독교대학은 이 세계관의 구체적 실천을 돕는다. “이 대학교에서 교육받고 나가는 학생들이 장차 목사나 선교사, 의사가 되고 의료선교사, 간호사가 되어서 세계 각지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 사명을 받아 나가게 될 것이다. 또한 교육자, 음악가, 과학자들이 되어서 국내외 사회의 요원으로 자기가 봉사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복음을 증거하면서 일하는 일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애지중지했던 대학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지난 반년이 넘게 계속되는 사태는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 언론기관을 통해서 사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주목과 염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전에 우리가 잘 믿는다고 자랑하고 교만하던 고신파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이제는 ‘고신파’라고 자칭하거나 부름 받기가 부끄러워졌다고 한탄한다.” 해결책으로 대학과 신대원의 분리를 주장한다. “현재 고신대학은 총회직영이라는 이름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 총회직영을 신학대학원(목사 양성기관)에 한정시켜서 명실 공히 총회직영 기관답게 전국 교회들이 그 경영을 책임지며, 신학사상도 철저히 감독하여 일심으로 협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은 대학답게 발전할 수 있도록 출자이사들을 모아 대학 경영의 새로운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 이제 현시점을 잘 파악하여 총회적으로 결단을 내릴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근삼 교수는 한국 사역 말기에 고신교회의 상징인 대학교의 장래에 대하여 특단의 대안을 제시한 셈이다. 이 대안은 그 이후 고신교회가 연례적으로 겪게 될 내부 갈등과 임시이사의 파송을 예상이나 하는 듯하다. 이 대안은 엄청난 수업료를 치르고 난 뒤에 얻은 지혜이고, 궁극적으로는 고신교회가 따라야 할 고견이다.
그렇지만 이 지혜로운 대안에도 재고해야 할 문제가 있다. 후천적인 결론으로 등장한 이 대안은 그의 초기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개혁주의 기독교문화관을 정립한 것은 고신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 역사에서 높이 평가할 이론적, 실천적 업적이다. 그러나 이 문화관의 연장과 총체로서 기독교대학을 말한 것이 이근삼 교수의 특징이요 동시에 한계이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기독교대학의 중요한 기초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기독교학교로서 기독교대학의 출발점은 유아세례이다. 부모가 세례의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의 사명은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학교교육까지도 포함한다. 자유대학교를 세운 카이퍼를 화란의 수상으로 만든 배경은 멀리 소급하면 기독교학교운동이다. 이 부모의 교육적 사명과 책임을 기독교학교로 실천하면서, 기독교문화도 개혁파 신학과 신자의 주요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순서는 바뀔 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학교의 설립과 운영 주체는 부모이다. 굳이 따지자면 ‘출자이사’가 이에 해당한다 하겠지만, 이것은 재정과 운영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다는 입장이지, 부모의 입장을 고려한 대안은 아니다. 고신교회가 개혁파로 자부하였지만, 고신교회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신대학교를 볼 때, 고신교회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원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랬다면 기독교교육학과는 졸업생을 위하여 교회 안에 ‘교육사’ 제도를 소개하기 전에, 기독교 초등, 중등학교를 먼저 세워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전후가 엇갈린 상황에서 ‘출자이사’ 제안은 뜬금없는 제안으로 들릴 것이요,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고신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교회와 정치의 관계는 중요 주제였다. 바로 신사참배 강요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학위논문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다루었다. 그렇지만 고신대학교의 역사는 그의 논문에서 별 도움을 얻지 못하였다. 이 교수는 대학 인가의 필요성을 논할 때에 여권 발급이나 입영 연기 등을 든다. 이런 논거까지도 고신총회에서 수용되어 가(假)이사회나 세속 송사까지 불사하면서 대학은 설립되었고, 의료원을 가진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카이퍼가 대중화시킨 ‘영역주권론’은 자유대학교의 ‘자유’의 의미에 잘 들어있다. 즉 신앙고백에 기초한 기독교교육을 국가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 영역 주권의 주요 핵심이요 적용이다. 그래서 카이퍼는 비기독교적이고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학교를 목표로 삼았다. 동시에 성경을 비판하고 신조를 떠나 신앙적,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한 교회의 교권으로부터도 ‘자유’하기를 원했다. 이 후자의 자유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도 추구하는 셈이다.
그런데 고신교회는 고신대학교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국가 권력인 교육부의 정당한 개입뿐만 아니라 부당한 개입까지 자초하였다. 영역 주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교육부는 교회의 기관인 학교에게 지시할 수 없다. 이 말을 교회법이 세속법에 우선한다거나 국가권력에 대한 불복종해도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일차적으로 교회는 국가와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필요하게 국가의 간섭을 받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학부모인 교인이 아니라) 교회가 학교를 운영하면서 병원을 수익기관으로 삼는 것은 불가피하고 불필요하게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사조 이사회 사건 이후 최근, 아니 지금 이 순간까지 고신교회는 고신대학교의 위치를 신학적으로 정리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지속적으로 교육부를 상대로 교회 구성원 내부의 갈등을 판단하도록 요청한다. 교육부의 권세를 전제로 하여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정립되기도 한다. 이것은 세속 법정에서 가부를 결정하려는 송사와 같은 맥락에 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으려는 개혁주의는 극적으로 무너져가고 있다.
기독교대학의 본질의 문제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 문제에서 이근삼 교수는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한 개인 신학자가 다 걸머질 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맡아야 할 짐의 분량은 상대적으로 누구보다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근삼 교수는 신학자, 대중 강연자, 대학 경영자로서 남다른 열정과 성과를 거두었다. 박윤선 목사가 추구했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확립하고 널리 보급한 후계자이다. 박윤선 목사를 선생으로 만나 ‘세밀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개혁주의에 대한 열정을 배우고, 미국과 화란으로 가서 세밀한 부분까지 공부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출옥성도들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그 역사와 신조로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확립하였고, 이 신학이 지닌 힘,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정립하였다. 이 신학은 성경에 기초한 신학이고 계속 따라야 할 신학이다. 이미 받은 전통적인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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