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의 역사와 신학(3)
고신의 역사와 신학(3)
자료출처 http://cafe.daum.net/osm.or.kr/CPdF/5
[고신의 역사와 신학]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2-2. 박윤선 목사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1946),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쓴 ‘대한예수교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1949) 그리고 송상석 목사가 초안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1952) 등 초기 문헌에서는 개혁주의와 칼빈신학을 표방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개진한다. 그런데 ‘설립 취지서’는 박윤선 목사가 초안하거나 그의 영향 하에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46년 고려신학교 개교 이래 약 15년 동안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설립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의 순교적 신앙의 틀 안에서 박윤선 목사가 미국과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을 배합 주조해 낸 경건과 신학이 겸전한 박윤선 목사의 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신학은 박윤선 목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개혁주의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았던 설립자나 송상석 목사 등이 칼빈주의나 개혁신학을 운위한 것은 전적으로 박윤선 목사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다 평양신학교를 수학하였다. 이들이 수학할 당시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은 어떠했는가? 그 신학교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고 가르쳤지만, 근본주의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개혁주의(Reformed)신학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하였다.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말을 별로 들어 본 적이 없으며, ... 물론 교수진이 성경의 권위를 칼빈주의적으로 믿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의 신학생들이 교수들로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는 못했다.”
박윤선 목사의 신학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과 독서와 유학으로 습득한 화란신학이 근간을 이룬다. 박윤선 목사는 두 차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1934-6; 1938-39)과 한 차례 화란 자유대학교 유학(1953,10-54,3)의 기회를 가졌다. 평양신학교 시절까지 보수주의이면서 주관적 체험을 탐구하는 정도였으나,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연구하면서부터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 신앙을 자각하였고, 한국에서 가르칠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돌아왔다고 회고한다.
박윤선 목사가 말하는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관과 신조 그리고 문화관에서 나타난다. 먼저 성경관을 살펴보자. 조선신학교가 “우선 성경관에 있어서,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칼빈주의 입장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개혁교회의 특징으로 성경 교육, 즉 일반 교우들에게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에게서 칼빈주의는 한 마디로 성경주의이다. “개혁주의(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를 말한다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믿되 성경을 바로 해석한 그 내용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성경주의이다.” 이것은 성경의 자증적인 신임성(autopistia)을 말한다. 이에 기초하여 “성경이면 그만이다”는 신앙 논리에 안착한다. 이런 성경관은 그가 평생 몰두한 성경 주석 작업의 저변에 깔려있다. 박 목사는 성경 말씀을 기도로 깨닫는 노력도 중시하였다. “경중으로 말하면 성경 연구가 더 중요하지만 기도도 없어서는 안 된다.”
박 목사의 화란 유학 기간은 짧았지만, 일차 미국 유학 때부터 화란어를 틈틈이 자습하여 화란어 주석과 교리학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삼대 칼빈주의 신학자에 속하는 카이퍼와 바빙크 뿐만 아니라 신약 주석가인 흐로쉐이드와 흐레이다너스, 그리고 교의학자 스킬더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바빙크의 개혁교리학을 애독함으로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초대 교장으로 내정된 박 형룡 박사의 귀국이 늦어지자, 박윤선 목사는 교장 서리와 교수로서 주경신학은 물론,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그리고 성경 원어까지 맡아 가르쳤다. 개교 2년 후에 이 상근 목사가 조직신학 교수로, 김진홍 목사가 구약과 히브리어 담당 교수로 취임한다. 그래도 강의와 저작을 통하여 신학 전반에서 박윤선 목사의 영향이 가장 컸다. 박윤선 목사는 강의, 설교와 저작 활동 특히 성경 주석 작업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가운데서도 주석 작업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았다. 박 목사는 주석으로 목사들의 설교를 돕고 싶었다.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칼빈주의의 원칙을 따라 주석하였다. 이 원칙을 따라 칼빈과 칼빈주의 계열에 선 저자들을 많이 인용한다. 특히 신약 주석에서는 화란 주석가들을 많이 인용한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한 성경적인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신조를 강조하여 장로교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나아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전통과 화란 전통을 소개함으로 평양신학교나 한국장로교회 일반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개혁파’라는 용어를 보편화시켰다. 그리고 문화관이다.
먼저 신조와 장로교의 정체성 확립을 살펴보자. “경건과 신학이 겸전한” 박 목사는 고신교회의 신학을 주조하였다. 이것은 안정을 유지하지 못한 해방 후 한국교회의 상황, 기반을 제대로 잡지 못한 신학교, 과중한 업무와 고신교회 내의 교회정치의 부조리 가운데서도 박 목사가 홀로 이룬 업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박 목사는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적인 신학 작업을 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직접 인용하고 가르침으로 고신교회가 장로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 목사는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의 위기신학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입장을 웨스트민스터고백서 1장(성경), 3장(하나님의 작정), 4장(창조), 6장(죄), 8장(중보자 그리스도), 11장(칭의), 14장(구원받는 믿음) 등으로 대별시켜 비판한다. 또 성경관을 진술하고 변호하며, 치리회의 오류 가능성을 제기하기 위하여 개혁파 신조 및 여타 복음주의 신조들의 입장을 소개한다.
이로 보건대 초기 고려신학교가 신조를 가르쳤고 총노회 발회 선언문이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교리로 파수하는 운동임을 선포한 것은 기릴만한 일이다. “(한국 장로교) 4대 교단 중에서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장로교회의 교리, 즉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지지하고 연구하고 가르친 곳은 고신교회이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박 목사의 기여이다. 박 목사의 기여로 고신교회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박 목사가 이런 정체성 확립 위에 초기 고신교회를 평가하고 경고한 것도 그가 말하는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의 고백적 관점에서 나왔다. 경남노회가 장로교 신조를 받아들이고 일제 말기의 오점들을 밝히 회개하여 청산하고 신학적 타협주의를 배척하고 칼빈주의 신학을 보수한다고 하지만, 이 노회 지지자들이라 하여 다 성자라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에 절대 복종을 기약하며 전 세계의 큰 무리의 위협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립 인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혈기와 만용으로 발악하는 일이 없는가를 반성해야 한다고도 경고한다. 박 목사는 이런 입장을 파수군 또는 항의자의 노선이라고 설명하면서 자신은 “이 입장이 너무 영광스러움을 느끼면서 황송하게 생각한다. 소경이 문고리를 잡게 된 격이다”고 감격해 한다.
박 목사는 신조에 기초한 신앙고백적 입장을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초기 고신교회 안에 소개하였다. 그는 이런 고백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벗어난 사조들을 비판하고 경계했다. 근대의 자유주의 신학, 칼 바르트 신학이나 신비주의는 말할 필요도 없고, 알미니안주의와 복음주의까지 비판한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적 노력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본주의로서, 감리교나 성결교회에 많고 장로교 안에서 이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장로교의 교역자들로서도 무의식적으로 알미니안 신학 사상을 가진 실례가 많으니 통탄할만하다.” 특이한 것은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소위 복음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정통신학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확하게 개혁파 신학을 깨닫지 못한 관계로 계약신학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계약신학도 그리 고조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타협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실상 진정한 열매있는 개혁주의 신앙은 안 가진다.” 바로 이점에서 박 목사가 견지하는 개혁신학의 진면목이 들어난다.
박 목사가 신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교회에 뿌리내리도록 애썼다. 고려신학교는 이미 출범부터 이 신조들을 채택하였으니, 이 신조들이 칼빈주의나 개혁신학의 내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신교회 안에서는 특히 중고등부와 대학부에서 소요리문답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고백서까지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고신교회는 69년 9월에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공식적인 신조로 채택하였다. 박 목사의 주석과 이런 공부로 고신교회의 설교는 내용과 뼈대가 있으며, 고신교회 신자들은 믿음이 곧고 삶은 반듯하다는 평을 들었다. 한국교회 안에서 고신교회는 아주 건실하게 성숙하고 있었다.
역사를 되돌아보자면 그가 추구한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한국교회 토양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 성경 비평이 들어올 때,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성경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신조와 이에 기초한 신학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종국에는 청교도적 열심을 가진 복음주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장로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 전체에 해당되고 고신교회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셋째로, 박윤선 목사의 사역으로 고신교회는 한국교회에서 ‘개혁신학, 개혁파, 개혁교회’ 등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기까지 선한 싸움을 싸운다고 말한다. 이것은 복음주의와 다른 개혁신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가 화란신학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28에 기초하여 과학을 말하며, 비록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지만 속화되지 않고 이 세상에서도 나라에 대한 책임도 행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칼빈주의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도 사람을 위함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 줄 안다.” 이 말은 이원론을 기초로 하는 복음주의를 넘어서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기조요, 선구자 박윤선 목사가 고신교회에 남겨준 유산이다. 고신교회는 장로교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세계관과 문화 이해에 있어서 한국장로교회에서 독특한 유산을 전수받았다.
그렇지만 박 목사의 사역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그의 강의와 주석 집필로 보급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주석에는 구속사적 언약신학과는 대치되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자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을 주석하면서 이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죄인이 성자(聖者)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른바 이런 식의 영해(靈解)는 주석 전반부에 골고루 나타난다. 또 그가 주석에 첨가한 설교나 설교 개략에서도 이런 영해가 종종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중심의 것이니 만큼 해석자는 그 본문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어떻게 관계된 것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도 강조한다. 즉 그의 영해는 제동 장치를 가진 셈이다. 그럼에도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 되고 때로는 예화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가 강해설교를 소개한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설교 방식, 즉 청교도적 열심은 있었으나 신학적으로는 부족했던 한국교회의 설교 전통을 기독론적이고 구속사적인 해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요 선배이신 박윤선 목사가 지닌 한계를 본다. 그의 주석에는 “깊이가 결여”되었다. 우리는 선구자인 그분의 업적을 폄하할 의도는 추호도 없지만, 그가 전력을 다하여 저술한 주석 구석구석까지 기독론적 해석과 개혁신학의 기조가 깊이 스며들지 못했음도 지적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박 목사가 개혁파의 중요한 특징인 말씀과 성례라는 은혜의 방편에 진정한 관심을 보였다면 고신교회는 초기부터 진정한 칼빈적 개혁파가 되었을 것이다. 가령 화란 개혁교회가 이 관점에서 확립한 기독교학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는 언급한 적이 없다. 기독교 학교는 유아세례 시에 행한 부모의 약속, 즉 구원의 도리인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집에서 가르치며 또 가르치게 하겠다는 약속에 기초하여 세웠다. 복음주의와 구별되는 주요한 특징으로서 개혁파는 언약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은혜언약의 표와 인인 세례에 대한 강조와 함께 세계관과 문화 그리고 기독교대학에 대한 염원을 통합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즉 박윤선 목사가 책을 통하여 배운 화란 개혁신학은 그 내용상 제한적인 면이 있다. 이후 개혁신학은 고신교회에서 이 중요한 특성이 빠진 채 문화적 개혁신학으로 소개되고 정착한다.
하나 더 부언할 바가 있다. 초기 고려신학교가 장로교 총회에 대해서 가진 태도이다. 고려신학교는 초기부터 독립신학교를 지향하였다. 이것은 박형룡 박사가 부산을 떠나는 주요한 이유였다. 교권이나 교회 정치가 신학의 자유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데, 이것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 독립신학교의 기조이다. 그런데 독립신학교에 대한 생각은 박윤선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독립신학교를 표방한 신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하면서 그 학교의 강한 지도자인 메첸의 지도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신학교 시절에 그가 독립신학교를 지향하는 발언을 하였다거나 이 이론의 정신적인 지주로 전면에 나선 적은 없지만, 이후 그가 합동신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이 정신은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신학교는 교단의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된 ‘인준’신학교로 남아있다. (계속)
자료출처 http://cafe.daum.net/osm.or.kr/CPdF/5
[고신의 역사와 신학]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2-2. 박윤선 목사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1946),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쓴 ‘대한예수교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1949) 그리고 송상석 목사가 초안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1952) 등 초기 문헌에서는 개혁주의와 칼빈신학을 표방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개진한다. 그런데 ‘설립 취지서’는 박윤선 목사가 초안하거나 그의 영향 하에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46년 고려신학교 개교 이래 약 15년 동안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설립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의 순교적 신앙의 틀 안에서 박윤선 목사가 미국과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을 배합 주조해 낸 경건과 신학이 겸전한 박윤선 목사의 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신학은 박윤선 목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개혁주의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았던 설립자나 송상석 목사 등이 칼빈주의나 개혁신학을 운위한 것은 전적으로 박윤선 목사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다 평양신학교를 수학하였다. 이들이 수학할 당시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은 어떠했는가? 그 신학교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고 가르쳤지만, 근본주의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개혁주의(Reformed)신학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하였다.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말을 별로 들어 본 적이 없으며, ... 물론 교수진이 성경의 권위를 칼빈주의적으로 믿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의 신학생들이 교수들로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는 못했다.”
박윤선 목사의 신학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과 독서와 유학으로 습득한 화란신학이 근간을 이룬다. 박윤선 목사는 두 차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1934-6; 1938-39)과 한 차례 화란 자유대학교 유학(1953,10-54,3)의 기회를 가졌다. 평양신학교 시절까지 보수주의이면서 주관적 체험을 탐구하는 정도였으나,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연구하면서부터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 신앙을 자각하였고, 한국에서 가르칠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돌아왔다고 회고한다.
박윤선 목사가 말하는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관과 신조 그리고 문화관에서 나타난다. 먼저 성경관을 살펴보자. 조선신학교가 “우선 성경관에 있어서,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칼빈주의 입장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개혁교회의 특징으로 성경 교육, 즉 일반 교우들에게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에게서 칼빈주의는 한 마디로 성경주의이다. “개혁주의(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를 말한다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믿되 성경을 바로 해석한 그 내용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성경주의이다.” 이것은 성경의 자증적인 신임성(autopistia)을 말한다. 이에 기초하여 “성경이면 그만이다”는 신앙 논리에 안착한다. 이런 성경관은 그가 평생 몰두한 성경 주석 작업의 저변에 깔려있다. 박 목사는 성경 말씀을 기도로 깨닫는 노력도 중시하였다. “경중으로 말하면 성경 연구가 더 중요하지만 기도도 없어서는 안 된다.”
박 목사의 화란 유학 기간은 짧았지만, 일차 미국 유학 때부터 화란어를 틈틈이 자습하여 화란어 주석과 교리학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삼대 칼빈주의 신학자에 속하는 카이퍼와 바빙크 뿐만 아니라 신약 주석가인 흐로쉐이드와 흐레이다너스, 그리고 교의학자 스킬더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바빙크의 개혁교리학을 애독함으로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초대 교장으로 내정된 박 형룡 박사의 귀국이 늦어지자, 박윤선 목사는 교장 서리와 교수로서 주경신학은 물론,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그리고 성경 원어까지 맡아 가르쳤다. 개교 2년 후에 이 상근 목사가 조직신학 교수로, 김진홍 목사가 구약과 히브리어 담당 교수로 취임한다. 그래도 강의와 저작을 통하여 신학 전반에서 박윤선 목사의 영향이 가장 컸다. 박윤선 목사는 강의, 설교와 저작 활동 특히 성경 주석 작업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가운데서도 주석 작업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았다. 박 목사는 주석으로 목사들의 설교를 돕고 싶었다.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칼빈주의의 원칙을 따라 주석하였다. 이 원칙을 따라 칼빈과 칼빈주의 계열에 선 저자들을 많이 인용한다. 특히 신약 주석에서는 화란 주석가들을 많이 인용한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한 성경적인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신조를 강조하여 장로교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나아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전통과 화란 전통을 소개함으로 평양신학교나 한국장로교회 일반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개혁파’라는 용어를 보편화시켰다. 그리고 문화관이다.
먼저 신조와 장로교의 정체성 확립을 살펴보자. “경건과 신학이 겸전한” 박 목사는 고신교회의 신학을 주조하였다. 이것은 안정을 유지하지 못한 해방 후 한국교회의 상황, 기반을 제대로 잡지 못한 신학교, 과중한 업무와 고신교회 내의 교회정치의 부조리 가운데서도 박 목사가 홀로 이룬 업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박 목사는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적인 신학 작업을 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직접 인용하고 가르침으로 고신교회가 장로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 목사는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의 위기신학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입장을 웨스트민스터고백서 1장(성경), 3장(하나님의 작정), 4장(창조), 6장(죄), 8장(중보자 그리스도), 11장(칭의), 14장(구원받는 믿음) 등으로 대별시켜 비판한다. 또 성경관을 진술하고 변호하며, 치리회의 오류 가능성을 제기하기 위하여 개혁파 신조 및 여타 복음주의 신조들의 입장을 소개한다.
이로 보건대 초기 고려신학교가 신조를 가르쳤고 총노회 발회 선언문이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교리로 파수하는 운동임을 선포한 것은 기릴만한 일이다. “(한국 장로교) 4대 교단 중에서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장로교회의 교리, 즉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지지하고 연구하고 가르친 곳은 고신교회이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박 목사의 기여이다. 박 목사의 기여로 고신교회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박 목사가 이런 정체성 확립 위에 초기 고신교회를 평가하고 경고한 것도 그가 말하는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의 고백적 관점에서 나왔다. 경남노회가 장로교 신조를 받아들이고 일제 말기의 오점들을 밝히 회개하여 청산하고 신학적 타협주의를 배척하고 칼빈주의 신학을 보수한다고 하지만, 이 노회 지지자들이라 하여 다 성자라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에 절대 복종을 기약하며 전 세계의 큰 무리의 위협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립 인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혈기와 만용으로 발악하는 일이 없는가를 반성해야 한다고도 경고한다. 박 목사는 이런 입장을 파수군 또는 항의자의 노선이라고 설명하면서 자신은 “이 입장이 너무 영광스러움을 느끼면서 황송하게 생각한다. 소경이 문고리를 잡게 된 격이다”고 감격해 한다.
박 목사는 신조에 기초한 신앙고백적 입장을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초기 고신교회 안에 소개하였다. 그는 이런 고백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벗어난 사조들을 비판하고 경계했다. 근대의 자유주의 신학, 칼 바르트 신학이나 신비주의는 말할 필요도 없고, 알미니안주의와 복음주의까지 비판한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적 노력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본주의로서, 감리교나 성결교회에 많고 장로교 안에서 이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장로교의 교역자들로서도 무의식적으로 알미니안 신학 사상을 가진 실례가 많으니 통탄할만하다.” 특이한 것은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소위 복음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정통신학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확하게 개혁파 신학을 깨닫지 못한 관계로 계약신학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계약신학도 그리 고조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타협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실상 진정한 열매있는 개혁주의 신앙은 안 가진다.” 바로 이점에서 박 목사가 견지하는 개혁신학의 진면목이 들어난다.
박 목사가 신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교회에 뿌리내리도록 애썼다. 고려신학교는 이미 출범부터 이 신조들을 채택하였으니, 이 신조들이 칼빈주의나 개혁신학의 내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신교회 안에서는 특히 중고등부와 대학부에서 소요리문답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고백서까지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고신교회는 69년 9월에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공식적인 신조로 채택하였다. 박 목사의 주석과 이런 공부로 고신교회의 설교는 내용과 뼈대가 있으며, 고신교회 신자들은 믿음이 곧고 삶은 반듯하다는 평을 들었다. 한국교회 안에서 고신교회는 아주 건실하게 성숙하고 있었다.
역사를 되돌아보자면 그가 추구한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한국교회 토양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 성경 비평이 들어올 때,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성경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신조와 이에 기초한 신학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종국에는 청교도적 열심을 가진 복음주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장로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 전체에 해당되고 고신교회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셋째로, 박윤선 목사의 사역으로 고신교회는 한국교회에서 ‘개혁신학, 개혁파, 개혁교회’ 등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기까지 선한 싸움을 싸운다고 말한다. 이것은 복음주의와 다른 개혁신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가 화란신학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28에 기초하여 과학을 말하며, 비록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지만 속화되지 않고 이 세상에서도 나라에 대한 책임도 행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칼빈주의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도 사람을 위함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 줄 안다.” 이 말은 이원론을 기초로 하는 복음주의를 넘어서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기조요, 선구자 박윤선 목사가 고신교회에 남겨준 유산이다. 고신교회는 장로교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세계관과 문화 이해에 있어서 한국장로교회에서 독특한 유산을 전수받았다.
그렇지만 박 목사의 사역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그의 강의와 주석 집필로 보급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주석에는 구속사적 언약신학과는 대치되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자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을 주석하면서 이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죄인이 성자(聖者)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른바 이런 식의 영해(靈解)는 주석 전반부에 골고루 나타난다. 또 그가 주석에 첨가한 설교나 설교 개략에서도 이런 영해가 종종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중심의 것이니 만큼 해석자는 그 본문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어떻게 관계된 것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도 강조한다. 즉 그의 영해는 제동 장치를 가진 셈이다. 그럼에도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 되고 때로는 예화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가 강해설교를 소개한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설교 방식, 즉 청교도적 열심은 있었으나 신학적으로는 부족했던 한국교회의 설교 전통을 기독론적이고 구속사적인 해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요 선배이신 박윤선 목사가 지닌 한계를 본다. 그의 주석에는 “깊이가 결여”되었다. 우리는 선구자인 그분의 업적을 폄하할 의도는 추호도 없지만, 그가 전력을 다하여 저술한 주석 구석구석까지 기독론적 해석과 개혁신학의 기조가 깊이 스며들지 못했음도 지적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박 목사가 개혁파의 중요한 특징인 말씀과 성례라는 은혜의 방편에 진정한 관심을 보였다면 고신교회는 초기부터 진정한 칼빈적 개혁파가 되었을 것이다. 가령 화란 개혁교회가 이 관점에서 확립한 기독교학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는 언급한 적이 없다. 기독교 학교는 유아세례 시에 행한 부모의 약속, 즉 구원의 도리인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집에서 가르치며 또 가르치게 하겠다는 약속에 기초하여 세웠다. 복음주의와 구별되는 주요한 특징으로서 개혁파는 언약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은혜언약의 표와 인인 세례에 대한 강조와 함께 세계관과 문화 그리고 기독교대학에 대한 염원을 통합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즉 박윤선 목사가 책을 통하여 배운 화란 개혁신학은 그 내용상 제한적인 면이 있다. 이후 개혁신학은 고신교회에서 이 중요한 특성이 빠진 채 문화적 개혁신학으로 소개되고 정착한다.
하나 더 부언할 바가 있다. 초기 고려신학교가 장로교 총회에 대해서 가진 태도이다. 고려신학교는 초기부터 독립신학교를 지향하였다. 이것은 박형룡 박사가 부산을 떠나는 주요한 이유였다. 교권이나 교회 정치가 신학의 자유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데, 이것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 독립신학교의 기조이다. 그런데 독립신학교에 대한 생각은 박윤선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독립신학교를 표방한 신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하면서 그 학교의 강한 지도자인 메첸의 지도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신학교 시절에 그가 독립신학교를 지향하는 발언을 하였다거나 이 이론의 정신적인 지주로 전면에 나선 적은 없지만, 이후 그가 합동신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이 정신은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신학교는 교단의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된 ‘인준’신학교로 남아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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