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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의 역사와 신학(2)

고신의 역사와 신학(2)
자료출처 http://cafe.daum.net/osm.or.kr/CPdF/4 

[고신의 역사와 신학]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2. 고신교회의 신학
 
2-1. 약사에서 나타난 고신교회의 삶의 특징과 신학
 
고신교회의 역사 초기에는 일제 신사참배 강요를 대항하여 생명까지 내어놓은 신앙의 선배인 출옥 성도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참배를 국민의식이 아니라 제1계명을 어기는 큰 죄로 보는 영적 통찰력을 지녔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갱신과 재건을 위하여 먼저 신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다. 신학 훈련을 특별하게 받지 않았으며, 이른바 정치력도 없었지만 신학적 자유주의를 대항하여 보수주의 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성경을 신앙과 본분에 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며,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의 교리대로 고려신학교에서 교리와 신학을 가르치며, 한국장로교회가 칼빈적 개혁파의 사상 그대로 생활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에 머물렀지 개혁신학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거나 개혁신학을 이해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었다.
 
결국 초기 고신교회의 신학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목사의 몫이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를 곧장 떠난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 작업을 할 기회를 포기한 반면, 박윤선 목사는 고신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초기 10년 동안 일구었다. 박윤선 목사는 메첸(J.G. Machen; 1881-1937)을 존경하고 반틸(C. Van Til)을 추종했으며 화란신학을 사모하였다. 역사적 개혁신학이 가진 대부분의 면모, 곧 신조에 기초한 장로교 정체성 확립,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세계관이나 인생관 등을 소개하였다.
 
고신교회에서 인재가 떠나는 일에는 거의 다 신학교와 신학교를 중심한 법정 송사가 개입되어 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 때문에 왔다가 신학교 때문에 떠났다. 첫 위기는 교회당 쟁탈 소송문제이다. 경기노회의 행정 보류나 박윤선 목사가 일차로 고려신학교를 떠난 것은 송사와 관련되어 있다. 위기를 극복하려고 1960년 12월 승동측과 합동하였으나, 더 큰 상처만을 안고 환원한다. 환원 이후 신학교를 중심으로 분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다가 급기야는 세속 법정에서 송사라는 큰 오류를 범했다. 가(假)이사회 사건이나 1976년의 교단 분열에는 이사장과 송사 문제가 그 중심에 서있다. 이후에도 학교법인을 중심으로 한 송사문제가 고신교회를 계속 흔들 것이다.
 
이런 혼란의 중심에 대학교가 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나 한명동 목사가 문화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이 관심이 고신대학교로 나아가는 시발점이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고신대 학생의 미문화원 방화나 데모 등, 복음병원을 중심으로 한 갈등은 계속된다. 2003년 관선 이사가 오고도 내부의 갈등을 지속되었다. 비록 정이사 체제가 되었지만, 이제는 이사 중에 비고신교회 인사도 있다. 고신교회의 정체성은 계속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고신교회 역사 60년 동안 시끄러웠던 문제들은 신학적, 교리적 문제나 전도와 선교의 문제도 아니었다. 1963년 환원을 기점을 삼아 그 이전에는 송사 문제가 관건이었는데, 이것은 신사참배 반대 정신으로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는 고신교회의 정체성과는 합치될 수 없다. 환원 이후 교회가 직영하는 대학과 병원을 둘러싼 문제들은 목사, 장로들이 대학과 수익기관인 병원을 운영하는 이사직을 사모하여 교회직분의 속화를 야기하였다. “사이비한 복음주의, 허울 좋은 보수주의,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까지 사랑하여 달라는 화평론과 타협정신이 교권을 타고서 (고신)교회 속에 들어왔고, 교회를 현세생활처세의 도구로 삼고 말았다.”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에서 고신교회가 개혁하려고 했던 점들이 이제는 고신교회 안에서도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송사문제나 대학의 확장이나 운영 문제에서 신학적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사실은 아예 없다. 일을 진행시키지만 정치적, 행정적인 결정으로만 이루어질 뿐, 신사참배 거부 정신을 따라 사안의 정당성과 순결성을 미리 논의하고 개혁신학의 원리를 따라 일의 진행을 점검하고 목표에 도달하려는 전통을 정착시키지 못했다. 망루를 짓거나 전쟁을 하기 전에 자신의 형편과 능력을 점검하는 지혜를 고신교회는 갖지 못했다. 신학적, 교리적으로 영글지 못한 탓이었다!
 
우리는 본고에서 고신교회의 역사로부터 고신교회의 신학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고려신학교와 초기 고신교회가 공식적으로 표방한 신학적 입장은 ‘칼빈주의 또는 개혁신학’인데, 이것은 박윤선 목사의 신학이기도 하다. 이와는 구별되게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들이 지닌 신학은 현장의 신학이었고, 그것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신학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 ‘성경중심적 보수주의’이다. 이 두 입장이 고신교회의 신학과 정체성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 이후 고신교회 안에서 이 두 입장을 계승하면서 발전시킨 신학적 입장이 있으니, 그것을 ‘문화적 개혁신학’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근삼 교수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 세 입장을 차례로 살펴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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