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기념주일 /루터와 츠빙글리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서 숨어지내는 동안 마부의 복장을 한 채 수염과 머리를 길러야 했다.
오늘은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중세 암흑의 교회권력에 항거하여 빛의 사자들을 통해 결국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하나님의 섭리를 돌아보게 하는 날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잠잠하면 길가에 돌들로 외치게 하리라.
죄사함을 받는다는 명복으로 면죄부를 팔고 있는 교황에 대항하여 95 개조의 반박문을 선포한 루터를 교황은 파문한다.
교황의 파문칙령을 불태우면서 마르틴 루터는 악의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예수는 걸어 다니셨는데 교황은 가마를 타고,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교황은 자기 발에 입을 맞추라고 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는데 교황은 예수의 종들을 이단이라고 화형에 처한다. 그는 가증스러운 적그리스도이다. 또 교황이 나를 이단자라 파문한다면 나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파문하리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목자가 아니라 악마의 사도이다』
루터(1483~1546)는 이렇게 해서 교황을 상대로 종교 개혁의 불을 당겼다.
창호지도 맞들면 나은 법 종교개혁 운동이 한창이었던 1529년 당시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츠빙글리(1484~1531)는 신학적인 견해가 달라 관계가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의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서로 느끼고 '마르부르크'에서 만남을 가졌지만 성만찬이 신학적 논쟁의 암초가 되었다.
두 사람은 화체설이 잘못이라는 데는 의견이 같았으나 루터는 성만찬의 요소들은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요소로 임재한다. 곧 "이것이 나의 몸이고 피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사실이라는 견해였다.
반면에 츠빙글린은 "이것이 나의 몸이고 피다"라는 그리스도의 발언은 그저 "내몸을 기억하라"는 의미 이외는 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견해였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났지만 둘의 주장은 변화의 기미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합의를 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포도나무와 피가 빵과 포도주 안에 육체적으로 어떻게 임재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양측은 양심이 허락하는 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것이다"
츠빙글리는 이후 1531년 카펠전투에서 사망했다.
신학적인 견해가 다른 루터와 이런 결과를 도출해내는 데는 츠빙글리의 겸손함이 한몫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츠빙글리가 산에서 산책 중에 우연히, 좁은 길에서 두 마리의 염소가 각각 내려오고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염소들은 곧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자리에 서더니 약간 뒤로 물러섰다.
돌진 하려는 염소를 보며 츠빙글리는 한바탕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산으로 올라가던 염소는 그 자리에 엎드렸고, 내려오던 염소는 엎드린 염소 위를 뛰어 넘어갔다.
그리고 엎드렸던 염소는 몸을 일으켜 제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츠빙글리는 생각했다. 엎드리는 게 위로 올라가는 것이며, 바로 겸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종교개혁을 위해 루터파와 제휴를 결심하고 '마루부르크 회담'을 갖게 된 것이다.
-낙타문-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루터는 말씀을 강조하며 ‘말씀’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6:44)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 즉, 성령의 부분을 더욱 강조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설교의 부분에 있어서도 츠빙글리는
‘나는 씨를 뿌렸고 마태 누가 바울 베드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멋지게 자라게 해주셨다’ 말했다.
말씀의 부분에 대해서도 츠빙글리는 말씀의 능력은 말씀 안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츠빙글리는 성경은 성령으로부터 나오고 성령이 깨달음을 주시는 곳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에 기본원칙으로 하였다.
츠빙글리가 볼 때 자신들의 견해를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성경에 접근하려 했기 때문에 성경을 오해하였다고 보았다.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성경을 판단하고 이해하게 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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