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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목사의 신학을 반성하며(15년동안 친구였다는 P목사님의 비판글)

이근호목사의 신학을 반성하며(15년동안 친구였다는 P목사님의 비판글)

자료출처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lBq/97

 

*아래의 글은, 이근호목사와 더불어 15년동안 지근에서 함께 생활해 왔던 P목사님이 권정희님을 통해서 보내온 "이근호 목사의 신학을 반성하며"라는 글입니다. 2000년도에 쓴 글입니다. 귀한 옥고를 보내 주신 P목사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양무리마을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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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의 신학을 반성하며

 

 이 글은 구원에 있어서 시간의 연관성의 문제라는 글을 읽으면서 적게 되었다. 어떤 의도에서인지 모르지만 그에게 배우는 사람들이 나에게 그의 신학에 대한 질의를 해 달라는 강한 요구가 있어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에서 지금까지 의아하게 생각해 오던 바가 위의 글에서 집약되어 나타나 있기에 요구를 받고는 글로 써서 대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과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의 철학적인 지식에 본인은 따라 갈 수가 없다. 그러나 본인은 반드시 철학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철학은 계시가 아니며 또 철학으로 믿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여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 속에 들어 있는 죄를 일일이 밝혀서 오늘 우리 인간들의 죄인 됨을 밝혀내면 오늘 신자들이 죄인됨을 수긍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이 통째로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일이 그 죄인됨을 분석해야만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인은 죄를 분석하기 위하여 반드시 철학을 분석하고 연구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본인의 지적인 면을 생각해 볼 때 그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만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철학에 담겨 있는 논리를 알면 인간의 논리를 대적할 수 있겠지만 본인은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계시만으로 족하지 굳이 인간의 논리를 알고 반박하는 것이 신앙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은 계시만으로 족하다. 여력이 있다면 보조적인 측면에서 접해 볼 대상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성경을 다 알고 여력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신자 속에서도 어떤 모습이 죄며 또 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통해서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력이 있어서 철학과 다른 주변 학문을 공부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공부하여 주를 위하여 유익하게 쓰여지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죄성을 반드시 지적해 줌으로 주를 바라보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철학의 도식으로 성경을 접근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1. 이목사가 위 글을 쓴 의도를 큰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목사가 철학 및 물리학자들의 시간론을 먼저 논한 것은 오랫동안 철칙으로 여겨져 오던 기계론적인 절대적 시간관이 특수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깨어져버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된다.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준하여 진리를 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문학에서만은 여전히 기계론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인간의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의 본질적인 요소인 허구를 사용하여 인간은 구원을 찾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구원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 문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신학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내어버린 기계론적인 시간을 신학에서 도입하여 신학적인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결과로 나타난 신학 이론이 이미아직이라는 도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구속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목사가 보기에 이 도식은 주님 중심의 구원을 역사중심의 구원 즉 시간에 예속된 구원으로 변질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지만 주님은 하늘에서 와서 역사를 심판하러 나타난 분이기 때문에 그는 시간에 매이지 않는 분인데 구속사는 이러한 주님을 시간에 예속된 분으로 만들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구속사는 시간적인 틀을 가지고 하늘의 계시를 담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목사는 주님 중심의 구원을 제시하고자 이 글을 쓴 것으로 이해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도식을 초월하는 주님을 중심해서 구원을 말해야 하겠다는 충정에서 이 글을 쓴 것 같다.

 

 본인도 구속사의 잘 못을 인정한다. 구속사라고 할 때 주님의 초월성을 시간의 도식에 예속시켜버리는 위험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만사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은 옳다. 쿨만이 그리스도 중심을 시간 중심으로 옮기려는 의도로 그러한 도식을 만들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에 의해 제시된 도식은 충분히 그럴 위험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을 오도하게 할 위험이 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시각은 시간을 초월해버린다고 할 수 있다. 구약 선지자들의 시각은 사건중첩적이다. 앞의 사건이 뒤에 올 사건을 내포하면서 예시하고 있고 뒤에 올 사건이 앞의 사건을 받아서 하나의 사건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 시간을 개입시켜 말하려는 의도는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언제 그 사건이 일어날 것인지를 밝히지는 않는다. 종이 한 장에 그림을 그리듯이 함께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말은 한 날이요 그 날의 사건들은 하나의 사건들로 그리고 있다. 이런 시각은 신약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신약에 있을 사건들을 한 날의 사건들로서 말씀하셨다(24). 그래서 재림에 대한 날짜까지도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던 가보다. 이렇기 때문에 속히 오신다는 말씀은 시간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확실성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시간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개입을 인정하기 때문에 기다림이 있고,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재림과 부활의 때를 바라보고 있으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항상 현재의 사건으로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 중심은 아니라도 시간의 개입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중에도 안심하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취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또 완성이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거룩한 세계를 이루시고 또 통치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몸의 구속을 기다렸다. 이런 기다림은 미래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시간이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시간상의 순서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상의 순서를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완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님을 통하여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로 인하여서 완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완성이 될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8:23-24)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목사는 이것을 너무나 무시하고 있다. 성경이 종속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정하고 있는 시간을 억지로 배제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성이 신자의 현재의 완성이 된 것처럼, 사람의 죄의 몸이 실제로 죽고 부활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을 억지로 논리에 맞추려는 극단적인 주장이다.

 

 이렇기 때문에 그의 논지에는 불신자가 아니면 실제로 완전한 영을 가진 사람밖에 없다. 몸의 부활을 기다리기는 하지만 죽을 몸 때문에 긴장하며 씨름하는 신자는 없다. 그에게는 씨름하는 자는 주님의 완성의 영을 받지 못한 자이다. 완전한 영을 받지 못했으니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잡으려고 씨름하고 있는 자다. 자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목사에게는 죽을 몸 안에 있는 성도의 긴장이 없다. 때문에 사랑하라, 사모하라, 기도하라, 섬기라, 성령을 추구하라, 죄와 싸우라 등의 권면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핍박은 있어도 고통을 느끼는 성도의 아픔은 없다. 그가 말하는 성도는 핍박이 있어도 그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핍박은 있어도 고난은 없다. 고난이란 당하는 자가 고통스러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탄식도 없다. 자기의 죄성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탄식하는 자는 아직도 그가 의미하는 신자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이목사가 구속사를 말하는 사람 즉 자기가 보기에 논리적인 미숙을 가진 사람이나 세상에서 허덕이는 신자를 불신자와 같은 맥락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목사가 보기에는 시간의 개입을 인정하고 아직을 이야기하고 있는 자는 아직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다. 즉 예수의 완성을 받지 못하고 인간의 결단과 구원 의지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로 보이는 것이다. 예수의 완성에 참여하고 있다면 아직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인데, 아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인간의 구원의지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로 밖에 분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목사는 논리적인 우상숭배자다. 자기 논리를 절대화시키고 신격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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