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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목사의 신학은 주관주의신학이다(열매님/십자가마을에서 퍼옴)|

이근호목사의 신학은 주관주의신학이다(열매님/십자가마을에서 퍼옴)
자료출처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lBq/288
 
*아래의 글은 한무리님의 권면에 의해서 십자가마을 이근호목사의 신학을 극복하고 참된 복음으로 돌아온 한 형제 "열매"님이 통곡하는 심정으로 십자가마을의 이근호목사에게 올린 글입니다. 문단을 약간 보기 쉽도록 정리를 한 것외에는 전혀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단수정을 이해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홀리 죠이).
 
(열매님)

 
이근호님의 글들을 오랜 시간 동안 읽어 오면서 인간자체를 부정하며 인간의 가치와 인간의 회복을 부정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성화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인간의 변화라고 하는 측면은 아예 생각할 수 조차 없었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는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신앙고백 또한 인정치 않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성경은 인간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중심에 있는 그리스도를 전체로 가져갈 경우 이근호님의 주장처럼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근거가 어디있습니까?  또 거룩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보시고 인간의 회복을 거룩을 빼았는 행위처럼 규정하시는데 성경에서 인간을 거룩에 참예케 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순복음에서 축복을 강조하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만 하고 고난은 죄의 결과로 이해한다면, 이근호님은 고난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근호님이 주장하시는 하나님은 단지 심판주로만 보여지고 사랑의 하나님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순복음이 극단이라면 이근호님 또한 다른 극단은 아닌가요? 왜 하나님이 인간 자체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로마서 5장 8절에서는 사랑의 확증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고 성경 곳곳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거룩에 참예케 하시는 모습이 많이 있는데 이근호님은 너무 중심에 있는 십자가로 전체를 설명하려 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물론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 중심에 위치하지만 그것이 전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이근호님의 말대로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자신만이 다 맞는 것처럼 주장되어져서는 안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근호님의 신학은 주관주의적 요소가 강합니다. 기존의 건전한 신학들 마저도 잘못된 신학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듯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근호 님은 사람이 아닙니까? 이근호님도 많은 신학을 공부하셨고 배워서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기존의 모든 신학을 건전한 신학마저 부정하려 하십니까? 오히려 자신이 다원주의 물결 속에서 신학적 상대주의를 주장하며 주관주의에 빠져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신학은 전부가 될 수 없다하더라도 그리고 비록 타락의 가능성이 있다하더라도 역사성이 있기에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학 안에도 많은 성경을 보는 관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성경을 해석해 나갈 수 있겠으나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수 많은 타인을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항상 자신 안에 연약함이 있음을 인정하며 자신의 신학도 하나의 관점임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계시 의존적 사고는 다릅니다. 기존의 개혁주의는 계시의존적 사고이기에 완전하지 않다하더라도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존중되어야 마땅합니다. 이근호신학과 개혁신학의 대립은 사실상 결과가 뻔합니다.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주관주의 신학(이근호 신학)과 역사성을 지닌 신학(개혁주의)의 대립입니다. 그리고 그 주관주의 신학의 문제점은 자의적인 성경해석입니다.  
 

1.
 
인간의 회복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이근호님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거룩을 빼앗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근호님은 마치 기존신학이 예수그리스도의 거룩을 인간이 빼았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에 참예케 하시며 그것을 기뻐함에도 불구하고요. 십자가가 동원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예정이기도 하지만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정인 동시에 사랑의 확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근호님에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세상, 예정은 있는데 사랑의 확증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고, 아직 죄있되었을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말입니다. 즉, 인간존재 자체를 인정 안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존귀한 주의 자녀라고 부르시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가득한 분이십니다.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환난과 고난을 주신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분명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5)

2.
 
그리고 인간의 의지를 율법주의적인  행위처럼 말씀하시는데 분명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종교적인 행위처럼 되어지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고백 전부가 그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근호님의 글들을 읽으면 한국교회의 신앙고백 전부가 그렇다는 쪽으로 들려집니다. 이근호님은 제가 잘 알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를 대립관계에 놓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그 근거로 믿음은 예수라고 하는 것을 들 수 있으며, 구원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만 되고 우리가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하시고 인간은 구원하시지 않으며 도리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하기에) 심판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물론 이런 측면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인 것이 사실이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성공해야만 하나님이 성공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가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인간의 의지가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이렇게 말하면 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길...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룩한 소원을 두고 행하시기에 그것이 인간의 의지로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근호 님은 우리 안에 성령께서 주신 거룩한 소원, 거룩한 열망 마저 인간에게서 나온 의지 처럼 생각하며 그런 하나님에 의해서 나온 신앙고백 조차 잘못된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의 신앙고백이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앙고백까지 싸 잡아서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대안도 없고 오직 점점 더 나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인됨만을 드러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분명 사랑의 차원에서 행해야 할 일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삶의 영역들과 삶의 자리에 충실할 것을 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일이 없다는 것은 멍청하게 나는 죽을 놈입니다. 나는 버러지 보다 못한 인생입니다만 날마다 고백하고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우리 안에 거룩한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실 때에 아멘하며 반응하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성경은 죽은 행실을 회개함으로 그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완전한데 나아가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안에 항상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히브리서 6장 1절에서 3절이 이것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근호 님에 의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6;3)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할 수 없다고 하나님이 허락하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됨만 고백하고 앉아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6:3)는 것은 조금도 인정치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하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인 것 처럼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하겠다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셔도 나는 못합니다. 나는 버러지 보다 못한 인생이니까 주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거 아니겠습니까? 분명 우리는 죄인이고 주님은 의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런 고백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고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 말씀하실 때 순종하며 달려가는 것인데 그것을 종교적인 행위라고 교회의 연약함을 보면서 모두가 그렇다고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말씀의 초보요 그리스도 도의 초보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고 하는 말씀을 통해서 의의 말씀(히브리서 5:13)을 경험한 자는 믿음으로 살게 되어 있고 이것이 히브리서 5장 14절에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을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근호님의 경우 선악체계에 대해 말씀하면서 선악을 인간이 분별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로마서12;2에는 '너희는' 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변화'라는 용어가 나오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합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지 알려고 힘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삶을 살기 위해 힘써 달려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달려간다 하여도 우리 안에 항상 고백하는 바는 히브리서 6장 3절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인간의 의지를 말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거룩한 소원, 열망을 품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인간의 의지를 율법적인 행함처럼 주장하고 사랑의 차원에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될 경우 이근호님에게는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될 수가 없다고 하며 하나님이 그것(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 롬12;2)을 자녀들에게서 기대할지라도, 또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선한 소원과 의지를 두신다 할지라도 나는 할 수 없노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하라고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이 인간을 사용하신다 하더라도 이근호님에게서는 인간을 기계적으로(인간자체를 인정치 않기에) 사용하실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용하실 때 인격적으로 사용하십니다. 성령님이 인격적이시기에 인간을 설득하셔서 당신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근호님의 경우는 인간의 인격은 훌륭한 자아상에 불과합니다. 요컨데, 이근호님의 경우, 하나님이 인간을 사용하실 때 기계적으로 사용한다는 것과 기존신학(성경, 그리고 개혁주의)의 경우 인격적으로 사용한다는 차이입니다. 성령께서 성경저자들을 사용하실 때도 그들의 개성을 사용하셨습니다. 기계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도 인간의 언어를 통해 주어졌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역사와 시간을 무시하지 않고 역사와 시간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이근호님의 인간론은 거의 '죄론'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분명 성경에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사건이 있습니다. 기존신학(개혁주의)에서는 창조 시의 인간, 타락 시의 인간, 구속 이후의 인간에 대해 말하면서 타락 못지 않은 중요한 차원으로 구속의 차원을 강조합니다. 아니 어쩌면 타락 보다  더 중요한 차원이 구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자녀라고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분명 구속 이후의 인간에게도 타락한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근호님 처럼 기존의 성화 개념을 깨고 들어가야 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이근호님에게는 인간의 변화가 그리스도의 거룩에 도전하는 차원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겠지만 그래서 훌륭한 자아상을 챙기려는 속셈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기뻐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전혀 변화되지 않는 것 같다 하더라도 지난 시간 뒤에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신 것을 봅니다. 때로는 변화라고 하는 것이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실 때의 그 부담감만 하겠습니까?
 
인간의 변화를 무시해선 안됩니다. 우리의 지성과 열정(감정)그리고 의지, 전인격을 드려야 하고 삶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말로만 나는 죽을 놈입니다. 나는 버러지 보다 못합니다. 이게 아닙니다. 신앙인격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는 삶입니다. 내 삶에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참된 변화를 지향하며 나아가는 삶을 포기해선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말로만 나는 죽었다고 고백하는 삶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율법주의적인 행함도 아닙니다. 바로 사랑의 차원에서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참된 신앙인격의 변화가 일어나는 삶은 말과 혀로만 하는 그런 이근호님의 고백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기존의 성화(개혁주의 신학)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시간과 역사 가운데 들어 오신 것은 예정이기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그것은 로마서 5장 8절에 의하면 사랑의 확증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말이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살아가게 우리 자신을 하나 하나 내려 놓도록 바꾸어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고 있습니다. 정확한 때에 완성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참된 회개를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그러면 참된 회개는 뭡니까? 그저 이근호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나는 죽을 놈이요. 그리스도께서 다 하시요. 이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 허락하신 거룩한 부담감을 외면하는 길일 뿐입니다.
 
참된 회개는 신앙인격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이해하기 힘든 기독교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바로 천국직행이 아닌 것을 발견합니다. 왜 이 광야 같은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까? 이 부분을 공식화 시켜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참된 회개는 신앙인격의 변화요 우리의 전인격을 드리는 삶이며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결코 기계적이 아닙니다. 인격적입니다.
 
예수 믿으면 바로 천국 들어가는게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가기까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계십니다.)  우리의 인격의 성숙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합니다. 자라가라! 무엇에서 말입니까?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우리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값으로 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신 한 가지는 참된 회개입니다.
 
그것은 내 삶의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께 드리며 나의 전인격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까? 결코 행함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말하려는게 아니라 온전한 믿음은 행함이 수반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근호님이 교단에서 제명되신 사실이 안타깝지만 반면에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연약함이 많이 있고 잘못된 목사들도 많이 있을 수 있고, 신학도 타락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존신학전체를 잘못된 것처럼 말하고 자신을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현실이 어렵다 하더라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함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의 고백이 참으로 멋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방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장 37~39)

저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구속사라는 차원이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의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심에 있는 그리스도가 정말 중요하지만 이것이 전체가 되면 곤란합니다. 중심은 전체일 수는 없습니다.

계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주어졌고 그것은 다른 말로는 문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는 문맥을 통해 드러나는 겁니다. 분명 언약,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경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관점입니다.
 
성경은 다양한 관점들을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어느 하나만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하나만을 절대적인 것처럼 차별할 수 없습니다. 분명 중심을 놓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하더라도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근호님의 십자가는 중심이 전체가 된 경향이 있습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에 말씀하실 때도 기존신학이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연결시킨다면 이근호님은 예수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본체 따로 속성 따로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의존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요. 그러나 기존신학은 그 자체를 계시로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계시의존적 사고일 뿐이죠. 그것은 오픈시스템, 열려있는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근호님의 경우는 성령받은 자가 알 수 있다고 성령을 주장하면서 이근호님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으면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계시로 자신을 차별화하시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근호님께서 기존신학을 끝까지 무시하는 쪽으로 나아가신다면 주관주의적 관점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이근호님 본인도 잘 아시겠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죄인 아닙니까?
 
그러면 누가 감히 자신의 조금 아는 지식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까? 결국에는 자신도 연약함이 있고 오류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인정하신다면 이근호님 자신도 하나의 신학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고 상대를 비판하시고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시고, 목회자들을 비판하시고, 신학의 타락할 가능성을 비판하시더라도 전체가 그런 것처럼 비판하셔서는 옳은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님 또한 죄인이고 오류가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상대에게 열린 마음과 자세, 긍휼한 마음으로 비판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치 바리새인이 율법적으로 정죄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사랑이 빠져 있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비판, 목사님들 비판, 기존신학 비판... 다 좋습니다.
 
사랑이 빠져 있는 게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이 님에 대해 충고하는 말들도 겸손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와 성경해석이 다르더라도 그것을 크게 이단처럼 정죄하는 태도는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글을 쓰는 저 자신은 목회자도, 장로도, 전도사도, 집사도 아닌 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 청년에 불과합니다. 제가 우연히 이 사이트에 들어와서 이근호님의 언약신학과 십자가 중심의 성경해석에 많이 심취했었고 그래도 자신의 실패로 인해 복음이 실패하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많이 도전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해야만 하나님이 성공하시고 자신이 실패하면 하나님이 실패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근호님과 다른 분들이 쓴 열린 토론과 글들을요. 하루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8시간 이상을 님의 글에 심취해 있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보면 볼수록, 님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공격하는 입장에서 자신과 동일하게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입장에서 많이 쓰여진 글을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님에게는 기회인 듯 보여집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 남을 비판할 때 사랑이 없고 인간의 존재, 가치, 인격, 기존 성화 개념 등을  특히, 기존의 신학 전체를 싸잡아서 부정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에 박홍섭님과 대화하실 때 차라리 솔직하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보다 기존신학을 더 믿는다고 말하는게 어떻느냐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제가 보기에는 님 또한 하나의 신학이며, 성경을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임을 잊고 계시는 듯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님의 신학이 주관주의 신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자신이 자신의 주관을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습니까 ? 만약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해도 일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요.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기독교 철학자들이 그러더군요.
 
제가 볼 때 님은 역사와 시간을 부정하는 듯 보여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역사 속에, 우리의 시간 속에 들어 오셨습니다. 그것은 예정인 동시에 사랑이었고. 시간을 창조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계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성령께서 인간 저자들의 개성을 살려서 기록하셨습니다. 계시는 열계자, 보일 시자로 열어 보이는 것이고, 결국 성경의 저자인 성령께서 열어 보이신다는 뜻이지만, 그러나 계시는 문맥을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직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님께서 주장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경의 중심을 차지할 정도로 정말 중요하지만 이것이 전체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것이 사실이지만 전체는 아닙니다. 저는 성경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또 다른 누가 저와 비슷하게 주장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통치가 핵심이라고 봅니다. 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 또한 바울이 담대하게 전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때 그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기존의 성화개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 자신을 계시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계시의존적 사고를 지향할 뿐이죠. 저는 저의 관점만이 옳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기존의 신학에는 지금도 저보다 백 배는 더 뛰어난 신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님을 볼 때, 그리고 제 안에 하나의 소망으로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해야만 하나? 왜 긍휼한 마음은 다 사라지고 자신은 계시처럼, 남들은 배워서 아는 것처럼 그렇게 주장하는 걸까? 자신은 성령으로 깨닫고 남들은 배워서 알고... 감히 묻습니다.
 
님은 배우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리고 기존신학과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용어를 쓰셨는데 그런다고 배운것이 완전히 사라질 것 같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고 저 자신이 죄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님 또한 죄인이고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자랑할 것이 없는 그저 그런 인간이 아닙니까? 진짜 님의 말처럼 어떻게 보면 벌레마도 못한...(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나를 존귀한 주의 자녀라고 말씀하시고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거절하고 거역하는 나를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설득하셔서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나를 기쁘게 움직여 가십니다.) 그렇다면, 인정해야 합니다. 내 안에도 오류가 있음을 ...
 
님의 말대로 나는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나도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주관을 내려놓고 역사와 시간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 계시니까요. 역사는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까요. 지금도 나의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구속의 경륜을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이 인격적인 분이신 것처럼 인격적으로요.   나를 설득하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결코 내가 기계적으로 일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나를 자라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론 내가 참 변화가 없다고 낙심할 때도 찾아오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순간에는 모른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계셨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인격적으로 당신의 구속의 경륜을 가르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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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의견 1

  • ckaqhrdma · 2011-04-26 20:28
    열매님! 님의 분별의 글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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