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 Ⅳ 단성론자들(Monophysites)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 Ⅳ 단성론자들(Monophys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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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역사 속에 형성된 관습가운데 하나는 교리적인 문제로 교회 안에 분열이 발생한 경우에 범 교회적인 종교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4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교회는 일곱 번에 걸친 중요한 종교회의들을 개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소모적이고 신학발전에 큰 유익을 주지 못한 종교회의는 콘스탄티노플에서 553년에 개최되었던 제5차 종교회의일 것 같다. 제 5차 종교회의는 단성론자(Monophysitism) 논쟁을 둘러싼 종교회의였다.
그리스도는 한분이시면서도,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One person, Two natures)이라는 451년의 “칼세돈 신조”는 서방에서는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팔레스틴이나 애굽을 중심으로한 동방에서는 지속적으로 저항을 받았다. 동방교회의 많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닌 분이 아니라 한가지 본성(One nature)을 지닌 분이라고 주장했다. 칼세돈 신조에서 말하는 바처럼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본성을 지니신 분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는 두 분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칼세돈 신조를 비판했다. 그리스도가 진실로 한 분(One person)이시라면, 그리스도는 한가지 본성만을 소유한 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리스도가 만일 두 가지 본성을 소유하셨다면 하나님은 두 아들(신성을 지닌 아들과 인성을 지닌 아들)을 두셨다는 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세돈 신조가 나온 이후에 이와 같은 사상을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단성론자”라고 부른다.
단성론 논쟁
단성론자들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배의식에도 자기들의 사상을 반영하고자 했다. 동방의 교회들은 “삼성송”(三聖頌, Trisagion) 이라고 불리우는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전능자, 거룩하신 영생자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문구를 공중예배에서 낭송하는 관습이 있었다. 단성론자들은 삼성송 앞에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이라는 귀절을 삽입하였다. 그 목적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삽입 귀절은 단성론자들의 독특한 표식이 되었고, 따라서 단성론자들은 “신성수난설자”(Theopaschites)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신성수난설”은 3세기초의 교부 터툴리안이 말한 바 “성부수난설”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성부수난설이 일종의 양태론으로서의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무시한 이론이라면, 신성수난설은 그리스도의 위격(person)과 본성(nature)의 구별을 무시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제 4차 종교회의(칼세돈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던 451년부터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던 553년까지 약 100년에 걸친 단성론의 논쟁과정은 매우 지루하고 복잡한 과정이지만, 그 흔적을 20세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므로 무시할 수도 없는 사건들이다. 생명력이 없는 메마른 신학논쟁이 동방교회를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감독과 감독사이에 음모와 쟁토와 추방과 분열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위로는 황제와 감독들, 아래로는 수도승과 평범한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이 논쟁에 가담하여 피해를 입었다.
칼세돈 신조가 공포된 이후로부터 약 30년 동안 동방교회에서는 수도승들간에 피비린내 나는 쟁투와 폭력이 끊이지 않았고, 단성론은 정통교회에서 추방되어 분파가 되었다. 그러나 단성론자들은 정치적인 호기가 오면 다시 득세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헤노티콘(Henoticon)
474년에 황제가 된 제노(Zeno)는 475년에 바실리쿠스(Basilicus)라는 자에게 황제자리를 찬탈 당하였다. 찬탈자 바실리쿠스는 약 2년간 통치하다가 다시 제노에게 황제자리를 빼앗겼는데, 바실리쿠스가 통치하던 2년 동안에 단성론자들은 정치적 호기를 맞게 되었다. 바실리쿠스는 모든 감독들에게 칼세돈 종교회의를 정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회람서신 형태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엔싸이클리온”(Encyclion)이라고 불린다. 바실리쿠스의 황제직이 오래 계속되었다면 단성론자들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477년에 제노는 다시 황제직에 복귀되어 491년까지 통치하였다.
482년에 이르러 제노는 단성론자들과 정통교회의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서 한가지 중요한 시도를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아카시우스”(Acacius)의 권면을 따라서 “헤노티콘”(Henoticon)이라고 불리우는 타협적인 조서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교회의 감독들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황제의 권위를 가지고 이 조서를 공표했다. 헤노티콘의 핵심적인 내용은 “3위1체중 한 분이 성육신 하셨다”는 것이었고, 그리스도가 양성을 가지셨느냐 단성을 가지셨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헤노티콘은 교회에 평화와 타협을 가져온 해결책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문제의 핵심을 회피한 도피적인 조서일 뿐만 아니라 동서방교회간에 분열을 초래했다. 헤노티콘은 단성론자들에게도 만족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통교리를 표방한 로마감독에게는 로마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황제가 주제넘게 나선사건으로 보였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휄릭스 2세”(Felix Ⅱ)는 동방교회가 헤노티콘을 발표한 이후에 공공연하게 단성론자들을 인정하고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갖고 484년에는 아카시우스와 함께 제노를 파문했다. 이로 인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이 분열은 518년에 황제에 득위한 “저스틴 1세”(Justin Ⅰ)가 519년에 이르러 칼세돈 종교회의의 권위를 재확립함으로써 치유되었다. 약 35년간에 걸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분열의 원인제공자가 아카시우스였기 때문에 “아카시우스의 분열”(Acacian schim)이라고 부른다.
단성론자들의 분열
제노 이후에 황제가 된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는 419년에 즉위하여 약 27년간 통치했는데, 단성론에 대해서 특히 너그러운 자세를 보였다. 아나스타시우스의 통치하에서 단성론은 더욱 발전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내부적인 분열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다가 보니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던 육신은 어떤 종류의 육신이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시 되었다. “할리카르나수스”라는 동네의 감독이었던 “쥴리안”(Julian of Halicarnassus)은 그리스도의 육신은 보통인간의 육신과는 달리 부활이전에도 썩지 않는 육신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은 2세기의 이단 사상인 가현설과도 근접한 것이었다. 따라서 쥴리안의 사상은 극단적인 만성론이라고 할 수 있고 “부패 불가능을 신봉하는사현설주의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반면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세베루스”(Severus of Antioch)은 온건한 단성론자로서 그리스도가 신성만을 지닌 존재임을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육신은 부활이전에는 썩을 육신이었고 죽을 육신이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세베루스의 견해는 “썩을 육신을 경배하는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단성론의 내부적인 분열은 쥴리안과 세베루스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신이 피조된 육신이냐 아니냐, 그리스도는 전지하신 분이냐 아니냐 등의 문제들로 인해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였다.
단성론 논쟁이 결국 범교회적 종교회의를 소집하는데 까지 이른 것은 527년에 동로마의 황제로 즉위한 “저스티니안 1세”(Justinian Ⅰ)의 재위기간이었다. 그는 565년까지 장기적인 통치를 하면서 서로마의 영토 일부를 야만족들로부터 탈환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법령을 통합하여 “저스티니안 법령집”을 편찬했고, “성소피아 성당”과 같은 웅장한 건축물도 건조했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일뿐만 아니라 훌륭한 신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밤을 새워 금식하며 기도했고, 신학적인 연구와 토론에 가담했다. 그는 처음에는 칼세돈 신조에 동조했으나, 황후 “쎄오도라”(Theodora)의 영향으로 단성론을 편들게 되었다. 황후 세오도라는 매우 천박한 신분(그녀의 전기를 기록한 “프로코피우스”(Procooius)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창녀출신이라고 한다)에서 황후의 자리에까지 출세한 인물로서 황제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되고자 했다.
저스티안이 신학적으로 경계심을 가졌던 것은 단성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두 분이 계시다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였다. 따라서 그는 결과적으로 단성론의 편을 들게 되었다. 그는 칼세돈 신조조차도 폐기하고 싶어했으나, 칼세돈 신도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두면서 알랙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씨릴(Cyril of Alexandria)처럼 신성이 비위격적인 인성을 흡수했다는 쪽으로 재해석하고 싶어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주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사상을 가진 세 명의 신학자의 저서를 정죄하고자 했다. 그 세 명의 신학자는 네스토리우스의 스승인 “몹수에스티아”의 “세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 네스토리우스의 친구인 “에뎃사”의 “이바스”(Ibas of Edessa)와 역시 친구인 “싸이러스”의 세오도렛(Theodoret of Cyros)이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안디옥 학파에 속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는 양성교리를 주장했고 단성론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세 사람의 저서는 보통 “3장”(Three Chapter)라는 통칭으로 알려져 있다.
제 5차 종교회의
553년에 저스티니안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5차 범교회적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두 가지 논제를 다루고자 했다. 164명의 동방감독들이 참석했으나 회의는 황제가 각본을 짜놓은 대로 진행되었다. 이 회의는 황제가 교리를 신조화하는데 직접적이고, 신학적으로 개입한 케이스로는 첫 번째 것이었다. 결국 첫 번째 논재로서 “3장”은 정죄되었고, 두 번째 논제로서 칼세돈 신조는 알렉산드리아의 씨릴처럼 해석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단성론자들이 예배의식서에 삽입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등의 표현은 문제 없는 귀절로 인정되었다.
그 당시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던 “비질리우스”(Vigilius)는 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로마감독이 된 자로서 감독이 된 후에는 단성론을 비밀리에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바른 소신을 펴지 못하고 자기의 입장을 네 번씩이나 변개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비질리우스는 제 5차 종교회의의 결과를 내심 반대하고 있었으나 결국은 정치적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 결정에 동의하고 말았다. 지조없는 로마감독 비질리우스는 이 결정에 동의한 후 로마로 돌아가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정치적인 압력으로 강요된 제 5차 종교회의는 그 결정사항이 실질적인 효과를 낳지 못하였다. 종교회의 이후에 교회는 단성론을 비정통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며 두 본성을 가지셨다는 칼세돈 신조는 더욱 공고해졌고, 결국 칼세돈신조를 씨릴처럼 해석하고자 하는 저스티니안 황제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단성론자들은 이단적인 분파가 되어 지하교회로 동방여러나라에 잔존하게 되었다. 시리아의 야곱파(Jacobites), 애굽의 콥트교회(Copts), 아르메니안 교회(Armenians), 시리아의 마론파(Maronites) 등은 오늘날까지도 잔존하고 있는 단성론자들이다.
단일의지론자들(Monothelites)
7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방교회의 분열을 치료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썰지우스”(Sergius, 610~638)는 그리스도는 한가지 의지만 소유하고 있고 그 의지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의지(divine will)라고 주장했다. 썰지우스의 주장은 황제인 “헤라틀리우스”(Heraclius)의 지원을 받았다. 황제가 단일의지론을 지원한 이유는 단일의지론이 단성론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페르시아와 동로마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싶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가미된 것이었다.
로마감독이었던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Ⅰ)는 황제의 탄원을 받아들여서 심사숙고함이 없이 단일의지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칼세돈 신조를 신봉하는 대부분의 서방교회들은 단일의지론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비서 노릇을 하다가 수도승이 된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는 아프리카 카르타고 근처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단일의지론 논쟁에 가담하게 되었다. 막시무스는 그리스도에게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있고, 따라서 두 의지(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있음으로 명백히 선언함으로써 7세기의 주요 신학자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단일의지론이 정치적, 신학적으로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더 큰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자, 황제 “콘스탄틴 4세”(Constantin Ⅳ, 668~685)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 6차 범교회적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그 결과 단일의지론을 주장한 썰지우스와 이를 용납한 로마감독 호노리우스1세는 “그리스도는 두 의지를 가지셨는데 …… 그의 인간적 의지는 반항이나 주저함 없이 신적의지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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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역사 속에 형성된 관습가운데 하나는 교리적인 문제로 교회 안에 분열이 발생한 경우에 범 교회적인 종교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4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교회는 일곱 번에 걸친 중요한 종교회의들을 개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소모적이고 신학발전에 큰 유익을 주지 못한 종교회의는 콘스탄티노플에서 553년에 개최되었던 제5차 종교회의일 것 같다. 제 5차 종교회의는 단성론자(Monophysitism) 논쟁을 둘러싼 종교회의였다.
그리스도는 한분이시면서도,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One person, Two natures)이라는 451년의 “칼세돈 신조”는 서방에서는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팔레스틴이나 애굽을 중심으로한 동방에서는 지속적으로 저항을 받았다. 동방교회의 많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닌 분이 아니라 한가지 본성(One nature)을 지닌 분이라고 주장했다. 칼세돈 신조에서 말하는 바처럼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본성을 지니신 분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는 두 분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칼세돈 신조를 비판했다. 그리스도가 진실로 한 분(One person)이시라면, 그리스도는 한가지 본성만을 소유한 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리스도가 만일 두 가지 본성을 소유하셨다면 하나님은 두 아들(신성을 지닌 아들과 인성을 지닌 아들)을 두셨다는 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세돈 신조가 나온 이후에 이와 같은 사상을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단성론자”라고 부른다.
단성론 논쟁
단성론자들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배의식에도 자기들의 사상을 반영하고자 했다. 동방의 교회들은 “삼성송”(三聖頌, Trisagion) 이라고 불리우는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전능자, 거룩하신 영생자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문구를 공중예배에서 낭송하는 관습이 있었다. 단성론자들은 삼성송 앞에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이라는 귀절을 삽입하였다. 그 목적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삽입 귀절은 단성론자들의 독특한 표식이 되었고, 따라서 단성론자들은 “신성수난설자”(Theopaschites)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신성수난설”은 3세기초의 교부 터툴리안이 말한 바 “성부수난설”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성부수난설이 일종의 양태론으로서의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무시한 이론이라면, 신성수난설은 그리스도의 위격(person)과 본성(nature)의 구별을 무시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제 4차 종교회의(칼세돈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던 451년부터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던 553년까지 약 100년에 걸친 단성론의 논쟁과정은 매우 지루하고 복잡한 과정이지만, 그 흔적을 20세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므로 무시할 수도 없는 사건들이다. 생명력이 없는 메마른 신학논쟁이 동방교회를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감독과 감독사이에 음모와 쟁토와 추방과 분열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위로는 황제와 감독들, 아래로는 수도승과 평범한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이 논쟁에 가담하여 피해를 입었다.
칼세돈 신조가 공포된 이후로부터 약 30년 동안 동방교회에서는 수도승들간에 피비린내 나는 쟁투와 폭력이 끊이지 않았고, 단성론은 정통교회에서 추방되어 분파가 되었다. 그러나 단성론자들은 정치적인 호기가 오면 다시 득세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헤노티콘(Henoticon)
474년에 황제가 된 제노(Zeno)는 475년에 바실리쿠스(Basilicus)라는 자에게 황제자리를 찬탈 당하였다. 찬탈자 바실리쿠스는 약 2년간 통치하다가 다시 제노에게 황제자리를 빼앗겼는데, 바실리쿠스가 통치하던 2년 동안에 단성론자들은 정치적 호기를 맞게 되었다. 바실리쿠스는 모든 감독들에게 칼세돈 종교회의를 정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회람서신 형태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엔싸이클리온”(Encyclion)이라고 불린다. 바실리쿠스의 황제직이 오래 계속되었다면 단성론자들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477년에 제노는 다시 황제직에 복귀되어 491년까지 통치하였다.
482년에 이르러 제노는 단성론자들과 정통교회의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서 한가지 중요한 시도를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아카시우스”(Acacius)의 권면을 따라서 “헤노티콘”(Henoticon)이라고 불리우는 타협적인 조서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교회의 감독들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황제의 권위를 가지고 이 조서를 공표했다. 헤노티콘의 핵심적인 내용은 “3위1체중 한 분이 성육신 하셨다”는 것이었고, 그리스도가 양성을 가지셨느냐 단성을 가지셨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헤노티콘은 교회에 평화와 타협을 가져온 해결책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문제의 핵심을 회피한 도피적인 조서일 뿐만 아니라 동서방교회간에 분열을 초래했다. 헤노티콘은 단성론자들에게도 만족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통교리를 표방한 로마감독에게는 로마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황제가 주제넘게 나선사건으로 보였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휄릭스 2세”(Felix Ⅱ)는 동방교회가 헤노티콘을 발표한 이후에 공공연하게 단성론자들을 인정하고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갖고 484년에는 아카시우스와 함께 제노를 파문했다. 이로 인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이 분열은 518년에 황제에 득위한 “저스틴 1세”(Justin Ⅰ)가 519년에 이르러 칼세돈 종교회의의 권위를 재확립함으로써 치유되었다. 약 35년간에 걸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분열의 원인제공자가 아카시우스였기 때문에 “아카시우스의 분열”(Acacian schim)이라고 부른다.
단성론자들의 분열
제노 이후에 황제가 된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는 419년에 즉위하여 약 27년간 통치했는데, 단성론에 대해서 특히 너그러운 자세를 보였다. 아나스타시우스의 통치하에서 단성론은 더욱 발전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내부적인 분열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다가 보니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던 육신은 어떤 종류의 육신이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시 되었다. “할리카르나수스”라는 동네의 감독이었던 “쥴리안”(Julian of Halicarnassus)은 그리스도의 육신은 보통인간의 육신과는 달리 부활이전에도 썩지 않는 육신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은 2세기의 이단 사상인 가현설과도 근접한 것이었다. 따라서 쥴리안의 사상은 극단적인 만성론이라고 할 수 있고 “부패 불가능을 신봉하는사현설주의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반면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세베루스”(Severus of Antioch)은 온건한 단성론자로서 그리스도가 신성만을 지닌 존재임을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육신은 부활이전에는 썩을 육신이었고 죽을 육신이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세베루스의 견해는 “썩을 육신을 경배하는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단성론의 내부적인 분열은 쥴리안과 세베루스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신이 피조된 육신이냐 아니냐, 그리스도는 전지하신 분이냐 아니냐 등의 문제들로 인해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였다.
단성론 논쟁이 결국 범교회적 종교회의를 소집하는데 까지 이른 것은 527년에 동로마의 황제로 즉위한 “저스티니안 1세”(Justinian Ⅰ)의 재위기간이었다. 그는 565년까지 장기적인 통치를 하면서 서로마의 영토 일부를 야만족들로부터 탈환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법령을 통합하여 “저스티니안 법령집”을 편찬했고, “성소피아 성당”과 같은 웅장한 건축물도 건조했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일뿐만 아니라 훌륭한 신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밤을 새워 금식하며 기도했고, 신학적인 연구와 토론에 가담했다. 그는 처음에는 칼세돈 신조에 동조했으나, 황후 “쎄오도라”(Theodora)의 영향으로 단성론을 편들게 되었다. 황후 세오도라는 매우 천박한 신분(그녀의 전기를 기록한 “프로코피우스”(Procooius)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창녀출신이라고 한다)에서 황후의 자리에까지 출세한 인물로서 황제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되고자 했다.
저스티안이 신학적으로 경계심을 가졌던 것은 단성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두 분이 계시다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였다. 따라서 그는 결과적으로 단성론의 편을 들게 되었다. 그는 칼세돈 신조조차도 폐기하고 싶어했으나, 칼세돈 신도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두면서 알랙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씨릴(Cyril of Alexandria)처럼 신성이 비위격적인 인성을 흡수했다는 쪽으로 재해석하고 싶어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주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사상을 가진 세 명의 신학자의 저서를 정죄하고자 했다. 그 세 명의 신학자는 네스토리우스의 스승인 “몹수에스티아”의 “세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 네스토리우스의 친구인 “에뎃사”의 “이바스”(Ibas of Edessa)와 역시 친구인 “싸이러스”의 세오도렛(Theodoret of Cyros)이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안디옥 학파에 속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는 양성교리를 주장했고 단성론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세 사람의 저서는 보통 “3장”(Three Chapter)라는 통칭으로 알려져 있다.
제 5차 종교회의
553년에 저스티니안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5차 범교회적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두 가지 논제를 다루고자 했다. 164명의 동방감독들이 참석했으나 회의는 황제가 각본을 짜놓은 대로 진행되었다. 이 회의는 황제가 교리를 신조화하는데 직접적이고, 신학적으로 개입한 케이스로는 첫 번째 것이었다. 결국 첫 번째 논재로서 “3장”은 정죄되었고, 두 번째 논제로서 칼세돈 신조는 알렉산드리아의 씨릴처럼 해석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단성론자들이 예배의식서에 삽입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등의 표현은 문제 없는 귀절로 인정되었다.
그 당시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던 “비질리우스”(Vigilius)는 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로마감독이 된 자로서 감독이 된 후에는 단성론을 비밀리에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바른 소신을 펴지 못하고 자기의 입장을 네 번씩이나 변개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비질리우스는 제 5차 종교회의의 결과를 내심 반대하고 있었으나 결국은 정치적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 결정에 동의하고 말았다. 지조없는 로마감독 비질리우스는 이 결정에 동의한 후 로마로 돌아가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정치적인 압력으로 강요된 제 5차 종교회의는 그 결정사항이 실질적인 효과를 낳지 못하였다. 종교회의 이후에 교회는 단성론을 비정통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며 두 본성을 가지셨다는 칼세돈 신조는 더욱 공고해졌고, 결국 칼세돈신조를 씨릴처럼 해석하고자 하는 저스티니안 황제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단성론자들은 이단적인 분파가 되어 지하교회로 동방여러나라에 잔존하게 되었다. 시리아의 야곱파(Jacobites), 애굽의 콥트교회(Copts), 아르메니안 교회(Armenians), 시리아의 마론파(Maronites) 등은 오늘날까지도 잔존하고 있는 단성론자들이다.
단일의지론자들(Monothelites)
7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방교회의 분열을 치료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썰지우스”(Sergius, 610~638)는 그리스도는 한가지 의지만 소유하고 있고 그 의지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의지(divine will)라고 주장했다. 썰지우스의 주장은 황제인 “헤라틀리우스”(Heraclius)의 지원을 받았다. 황제가 단일의지론을 지원한 이유는 단일의지론이 단성론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페르시아와 동로마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싶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가미된 것이었다.
로마감독이었던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Ⅰ)는 황제의 탄원을 받아들여서 심사숙고함이 없이 단일의지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칼세돈 신조를 신봉하는 대부분의 서방교회들은 단일의지론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비서 노릇을 하다가 수도승이 된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는 아프리카 카르타고 근처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단일의지론 논쟁에 가담하게 되었다. 막시무스는 그리스도에게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있고, 따라서 두 의지(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있음으로 명백히 선언함으로써 7세기의 주요 신학자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단일의지론이 정치적, 신학적으로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더 큰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자, 황제 “콘스탄틴 4세”(Constantin Ⅳ, 668~685)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 6차 범교회적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그 결과 단일의지론을 주장한 썰지우스와 이를 용납한 로마감독 호노리우스1세는 “그리스도는 두 의지를 가지셨는데 …… 그의 인간적 의지는 반항이나 주저함 없이 신적의지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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