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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 Ⅲ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 Ⅲ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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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교회들이 전호에 언급한 각종 이단들과 대적하며 성서적인 기독론 확립을 위해서 논쟁하는 동안에, 서방의 교회들은 펠라기우스를 추종하는 이단들과 대적하며 성서적인 인간론과 구원론의 확립을 위해서 논쟁하였다. 인간론과 구원론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별개의 영역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연결된 신학영역인 것이다. 인간론이 달라지면 인간론에도 변화가 올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구원론과 인간론은 마치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며 교회역사 속에서 불쑥불쑥 논쟁의 주제로 그 머리를 들었다.

5세기초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을 필두로 해서, 9세시의 곳찰크(Gottschalk)와 마인즈 대주교 사이의 논쟁, 17세기 젠센파(Jansenists)와 교황주의자들간의 논쟁 등이 그 두드러진 예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많은 교파들은 구원론과 인간론의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조화시킬 수 없는 이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간의 논쟁을 다시 돌이켜 보는 것은 역사상 발생했던 많은 논쟁들뿐 아니라 오늘날 교파간의 신학적 차이를 이해함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Pelagius)는 약 370년경에 영국에서 태어난 수도승이었다. 제롬은 펠라기우스에 대하여 말하기를 스코틀랜드 족속 출신으로 아일랜드에서 활동한 수도승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펠라기우스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활동한 수도승이라고 했다. 그는 수도승이기는 했으나 어느 특정한 수도원 종단에 가입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명료한 지성과 온유한 기질, 학자적인 성품과 흠 없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펠라기우스의 교리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을 가한 어거스틴도 펠라기우스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거듭해서 존경스러운 어조로 말한 바 있다. 펠라기우스는 동방의 신학을 공부했으나, 그의 영성은 깊은 신앙생활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기 보다는 금욕적이고 자기 절제적인 수도승의 율법주의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펠라기우스가 언제 로마에 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약 400년경에 로마에 있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400년 이전에도 로마에 있으면서 제롬과 논쟁했다는 증거도 남아있다. 400년경의 로마는 도덕적으로 대단히 부패한 상태에 있었다. 사회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로서 능력이나 지혜가 부족하였다. 부자들은 폭식, 폭음, 간음, 마술 등에 빠졌고, 일반인들의 성적 부패도 심각한 상태였다.

교회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했어야 마땅할 텐데 로마교회의 부패는 세속의 부패에 못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한 역사가 훨거슨(Ferguson)은 그 당시 교회의 타락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했다.

첫째, 목회자들은 세속적인 부의 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둘째, 독신생활을 표방하는 목회자들이 속으로는 첩을 두고 있었다. 셋째, 교회는 신학적인 차이로 인해 사분오열 되었다. 넷째, 성령의 능력에 대한 역동적인 신앙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펠라기우스는 이와 같이 부패한 현장 속에 뛰어들어 개혁을 일으켜 보고자 했다. 그의 개혁의지 자체는 나무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개혁의 바탕이 되는 신학기조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은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명을 주셨다면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이 기독교의 중심 진리라는 것이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405년이 되었을 때 펠라기우스는 한 감독이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한 문장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주께서 명하신 계명을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계명을 제게 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이 문장은 펠라기우스를 지극히 분노하게 하였고, 하마터면 그 감독과 펠라기우스 사이에 큰 다툼이 벌어질 뻔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만이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어거스틴의 사상은 펠라기우스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하나의 로봇 정도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즈음에 펠라기우스는 셀레스티우스(Celestius 혹은 Coelestius)를 제자로 삼게 되었다. 셀레스티우스는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로마에서 법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셀레스티우스는 펠라기우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도덕성 하락에 실망하였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에 근거하여 로마의 도덕성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셀레스티우스는 펠라기우스의 제자이기는 하였으나, 스승보다도 설득력이나 논리적 기술이 뛰어났다. 펠라기우스가 시작한 운동을 셀레스티우스가 논리 정연하게 표현했다.

고트족 지도자인 알라릭(Alaric)이 로마를 침공한 411년에 이 두 사람은 로마를 떠나서 아프리카로 향했다. 어거스틴을 방문하기 위해서 히포(Hippo)를 방문했으나 어거스틴은 마침 카르타고(Carthago)에 출타중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에게 정중한 편지를 남겼고, 후에 어거스틴도 정중한 어조로 답장을 하였다. 약 1년 동안 아프리카에 머물던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을 만나지 못한 채 팔레스틴(Palestine) 지방으로 갔다. 셀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에 머물면서 장로직분을 받고자 했다. 그의 재능과 함께 수도승적인 열정으로 인해 많은 친구를 얻기도 했으나, 그의 신학사상으로 인해 많은 의심도 사게 되었다. 때마침 카르타고에 머물러 있던 밀라노교회의 집사 파울리누스(Paulinus)는 셀레스티우스의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
 
 
카르타고 종교회의(A.D 412)
412년에 카르타고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파울리누스는 셀레스티우스의 사상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① 아담은 범죄하지 않았어도 죽었으리라는 주장, ② 아담의 타락은 아담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쳤지 인류 전체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는 주장, ③ 유아들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이 무죄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주장, ④ 온 인류는 아담의 타락으로 사망하지도 않거니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공로로 부활하게 되지도 않는다는 주장, ⑤ 유아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도 구원 받은 다는 주장, ⑥ 복음뿐만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 ⑦ 그리스도 이전에도 죄 없는 삶을 산 사람이 있다는 주장.
셀레스티우스는 이러한 정죄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은 신앙의 실체와는 관련이 없는 단순한 사변적 견해이므로, 견해의 차이는 교회 내에서도 인정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식의 답변을 하였다. 카르타고 종교회의는 셀레스티우스에게 장로 직분을 수여하기는커녕 도리어 이단으로 정죄하여 추방했다. 셀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를 떠나서 에베소로 갔고 에베소에서 장로가 되었다. 펠라기우스주의가 431년 에베소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될 때까지 그 사상을 전파하다가, 431년 이후에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제롬과 오로시우스
414년에는 펠라기우스가 머물고 있던 팔레스틴에서 다시 논쟁이 재연되었다. 팔레스틴 지방은 자유의지론을 주장했던 오리겐(Origen)의 영향력이 지속된 곳이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받아들이기에는 큰 무리가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서방출신의 두 신학자들이 팔레스틴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들이 펠라기우스의 열렬한 반대자가 되었다. 한 사람은 베들레헴에 남녀수도원을 설립하고 저작활동과 신학연구에 몰두하던 제롬(Jerome)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스페인 출신의 젊은 장로 오로시우스(Orosius)였다. 제롬은 라틴 벌게이트 성서의 번역자로 유명한 사람인데, 382년부터 385년까지 로마에서 다마서스 감독의 비서로 일할 때부터 펠라기우스와는 안면이 있었고 서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팔레스틴에서 다시 펠라기우스를 만난 제롬은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을 향하여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제롬 자신도 완전히 어거스틴의 노예의지론에는 이르지 못하고,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에 머무르고 말았다.

오로시우스는 스페인이 반달족(The Vandals)의 침략을 받았을 때 스페인을 떠나서 415년경에 어거스틴이 있는 히포를 방문했다. 그는 스페인의 진정한 문제는 야만족의 침입이 아니라 이단 사설의 만연이라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에게서 그 시대의 이단들의 문제점들을 배우고자 했다. 어거스틴은 그를 제롬이 머물고 있던 베들레헴으로 보냈다. 오로시우스는 제롬의 수하에서 공부하는 도중에 펠라기우스와 직면하게 되었다.

415년 7월28일 예루살렘에서는 펠라기우스 사상을 청문하는 종교회의가 열렸다. 오로시우스는 이 회의에서 펠라기우스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오로시우르는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셀레스티우스가 이미 412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또한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에 반대하는 저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했다. 예루살렘의 감독은 서방교회나 어거스틴에 대해서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에게 충분히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능력이 있으며, 죄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죄 없는 상태속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교묘하게 부연하였다.

라틴어와 헬라어간의 언어 소통도 부자연스러운 가운데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쌍방은 더 이상 상호간의 공격을 중지하고 서방교회의 로마감독인 인노센트(Innocent)에게 이 문제를 맡기자는 식으로 유야무야 결론을 맺었다. 오로시우스는 416년에 제롬의 편지를 가지고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디오스폴리스종교회의(A.D 415)
415년 12월20일에는 팔레스틴의 디오스폴리스(Diospolis)에서 가이사랴의 감독인 율로기우스(Eulogius)의 사회아래 또 다시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다. 제롬의 사주를 받은 두 사람이 펠라기우스를 공격했으나,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논쟁자도 되지 못했다. 펠라기우스는 비효율적인 논객들을 상대로 자신이 정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범주 안에 있는 사람임을 강조했다. 셀레스티우스의 이단사상이 바로 펠라기우스의 사상이 아니냐는 비난에 대해서, 자신은 남의 사상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답변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14명의 동방교회 감독들은 펠라기우스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렸다.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결여된 이 회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이단정죄를 취하하였다. 도리어 어거스틴, 제롬, 오로시우스가 음모를 꾸며 펠라기우스를 공격했는데 그 음모가 분쇄되었다고 비난했다. 제롬은 디오스폴리스 종교회의를 가리켜 ‘비루한 종교회의’라고 비난했다. 제롬은 펠라기우스를 계속 공격하다가 베들레헴 수도원에 폭도의 습격을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에베소종교회의(A.D 431)
이에 맞서서 아프리카 교회들은 펠라기우스주의를 향하여 총공세를 감행했다. 416년에 카르타고에 모인 68명의 감독들과, 밀르베(Mileve)에 모인 58명의 감독들은 펠라기우스와 셀레티우스가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였다고 정죄하며 로마감독인 인노센트 1세에게 펠라기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선고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인노센트 1세는 펠라기우스파의 압력도 있었지만 결국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신성모독적이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파문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인노센트는 이 결정을 내린 지 44일만에 죽고 말았다. 조시무스(Zosimus)가 뒤를 이어 417년에 로마 감독이 되었는데, 인노센트 1세의 결정을 번복하고 펠라기우스주의를 사면했다. 조시무스가 동방교회 출신이라는 점이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 진영은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에게 호소했고, 호노리우스 황제는 418년 4월30일에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로마감독 조시무스도 418년 중반경에 견해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고 펠라기우스와 셀레티우스에 대한 파문을 선언했다. 이 파문에 동조치 않는 감독들을 폐위시키겠다고 했다. 이태리에서는 18명의 감독이 동조치 않고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에크라눔의 감독 줄리안(Julian of Eclanum)이었다. 그는 어거스틴에 대항했고 418년에 감독직에서 추방된 후 가톨릭교회 외곽에서 쓸쓸히 사라져 갔다. 줄리안이나 셀레티우스 등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게 도피했고, 네스토리우스는 그들을 환대했다. 431년 에베소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정죄되자 덩달아 펠라기우스주의도 정죄되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
그 이후 펠라기우스주의가 외형적으로는 사라진 듯 하지만 동방교회에서는 반펠라기우스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서방교회도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어거스틴을 전적으로 따른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서방교회도 반펠라기우스주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세기의 교회는 동서방을 막론하고 반펠라기우스주의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펠라기우스가 원죄를 부인한 것과는 달리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원죄를 인정하며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과는 달리 절대예정론이나 제한속죄설,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등의 개념은 거절하고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협력함으로써 중생하게 된다는 ‘합력중생설’(Synergism)을 취했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인간이 단독으로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외형적으로 이 과정을 돕는다는 ‘인간적독력중생설’(Human Monergism)이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의 사상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타락된 인간의 중생이 가능하다는 ‘신적독력중생설’(Divine Monergism) 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기의 합력중생설에 대항해서 루터와 칼빈은 어거스틴의 인간론과 구원론을 회복했고, 이것이 위대한 개신교 종교개혁인 것이다. 그러나 20세기는 또 다시 개신교내에도 중세기적인 반펠라기우수주의가 창궐하고 있는 점에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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