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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교실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 Ⅱ 칼세돈종교회의(A.D. 451)까지의 이단들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 Ⅱ 칼세돈종교회의(A.D. 451)까지의 이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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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은 초대교회가 씨름했던 가장 어려운 두 가지 신학적 주제였다. 이 두 가지 교리는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관을 가지고 발전해갔다. 삼위일체론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기독론이 정립되어야 하고, 기독론이 바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론의 범주가 정립되어야만 했다.
정통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들은 기독론에 관해서 다음의 네 가지 요소들을 조화시키고자 했다. 첫째,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시실. 둘째,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 셋째, 그리스도는 한 분(One Person)이라는 사실. 넷째, 그리스도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신성과 인성은 구분된 두 본성(Two Natures)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네 가지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교회는 그러한 기독론을 건전치 못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기독론에 관해서 초대교회에는 두 종류의 학파가 대립되어 있었다. 하나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를 알렉산드리아학파였고, 다른 하나는 시리아의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안디옥학파였다. 이 두 학파는 기독론에 관해서 모두 문제성을 안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대해서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위험이 있었다. 술과 물이 섞이면 결국 모두 술이 되듯이,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 섞여서 결국은 신성만 남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 반면에 안디옥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지나치게 분리하는 위험이 있었다. 신성이 인성 안에 단지 내주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리스도는 신성을 지닌 분과 인성을 지닌 분이 도덕적으로 결합하여 한 분이 아니라 두 분(Two Persons)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름과 물이 섞이면 함께 섞여 있기는 해도 환전한 결합은 될 수 없고 결국 분리된 두 물질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학파는 ‘술과물파’로 기억하는 것이 쉽고, 안디옥학파는 ‘기름과물파’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교회의 사명은 이 두 가지 극단을 견제하면서 교회의 정통적인 기독론의 네 가지 요소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안디옥학파와 알렉산드리아학파로부터는 기독론에 관한 세 사람의 이단자가 탄생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네스토리우스(Nestorius), 그리고 유티케스(Eutyches) 이 세 사람이 기독론의 대표적 이단사상가였고, 교회는 세 번에 걸친 종교회의를 통해서 이 세 사람의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했고, 정통적인 기독론을 확립했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
안디옥학파와 알렉산드리아학파로부터는 기독론에 관한 세 사람의 이단자가 탄생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네스토리우스(Nestorius), 그리고 유티케스(Eutyches) 이 세 사람이 기독론의 대표적 이단사상가였고, 교회는 세 번에 걸친 종교회의를 통해서 이 세 사람의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했고, 정통적인 기독론을 확립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시리아에 속한 라오디게아 지방의 감독이었다. 그는 시리아에서 감독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인 장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the Elder)의 고향이 알렉산드리아였는데, 라오디게아로 이주해서 장로로 지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아들 아폴리나리우스는 모두 경건했고 고전 문학에 정통했으며, 니케아신조를 열렬히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니케아신조의 참피온이라고 불리우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도 아폴리나리우스 감독을 대단히 존경했고, 아폴리나리우스가 이단적인 기독론을 유포한 이후에도 아다나시우스는 그 이단 사상만을 공격했을뿐 아폴리나리우스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공격한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도 그러한 사상이 견건한 아폴리나리우스 감독의 머리에서 나왔으리라고는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폴리나리우스 감독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선언한 니케아신조를 철저히 신봉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훼손하는 극단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23절과 플라톤 철학을 근거로 해서 인간을 영(Sprit), 혼(Soul), 육(Body)을 지닌 존재로 보았는데, 그리스도는 인간의 혼과 인간의 육을 지녔으나 영은 신성을 지닌 로고스의 영이라고 주장했다. 3분의1은 신성을 지녔으나, 3분의2는 인성을 지닌 존재로 본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유기적 일체성을 지니게 되었고, 참된 성육신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죄성이 존재하는 자리를 ‘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영은 인간의 영이 아니라 로고스의 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의 원죄를 이어받지 않은 무죄한 분이라고 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아울러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한 분이라는 사상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교류되었다고 생각했다. 신성의 모든 속성들이 인성속으로 침투했고, 인성의 모든 속성들이 신성속으로 침투함으로써 두 속성이 교류되었다고 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이러한 속성의 교류를 두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했다. 그 하나는 포도주와 물의 예화인데, 포도주 3분의1과 물 3분의2를 섞어도 결국은 물과 포도주가 섞여서 한가지 맛을 내게 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불속에 있는 달구어진 쇠의 예화인데, 쇠가 불속에 있는지 불이 쇠속에 있는지 달구어진 상태에서는 구별됨이 없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이런 예화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일부신성과 일부 인성을 지닌 분이지만, 결국은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는 주장을 전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수난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리스도의 육신도 숭배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인성에 대해서는 불완전하게 제시했던 것이다.

교회는 아폴리나리우스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불완전한 인성, 불구적인 인성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아다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의 교부’라고 불리는 세 사람(가이사랴의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저스의 그레고리), 그리고 에피파니우스는 아폴리나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대표적인 교부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혼과 육신 전부를 포함하는 인성이라고 했다. 죄의 자리는 “영”뿐만 아니라 영혼과 육신 모두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영혼과 육신 모두 죄없으신 인성을 취하심으로, 영혼과 육신 모두를 가지고 죄를 지은 인간의 구속주가 되셨다고 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아폴리나리우스 이단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차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니케아종교회의에 이어서 전교회가 다 참여하는 두번째 범 교회적 종교회의였다. 이 회의 결과 그리스도는 영혼과 육신 모두 인성을 취하신 참 인간이라는 진리가 정착되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정통교회로 돌아오고 일부는 후에 카타날 단성론자들과 혼합되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아폴리나리우스주의가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신학적 위험성이 이단화 된 것이라고 한다면,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안디옥학파의 신학적 위험성이 이단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스토리우스는 원래 수도승이었던 인물이었는데, 안디옥에서 장로가 되었고, 428년부터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었다. 큰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네스토리우스를 환영했고, 크리소스톰이 설교를 할 때와 같은 영광을 되찾기를 원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인격적으로 정직한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통신학을 열렬히 옹호하고자 하는 열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수도승으로 훈련된 경건성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대단한 웅변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건전한 판단력이 부족하고 성급하다는 인격적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자마자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의 도움으로 이단척결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단자들 가운데 자유의지론을 옹호한 펠라기우스파에 대해서는 비교적 동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자 대중들이 사용하던 “데오토코스”(Theotokos)라는 용어에 대해서 심한 반감을 가지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데오토코스”라는 말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마리아를 지칭해서 사용된 표현이었다. 이 용어는 nf론 피조물인 마리아가 조물주인 하나님을 낳았다는 불경스러운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리아가 낳은 예수는 보통인간이 아닌 하나님-인간 이라는 뜻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이었다. 이 용어는 마리아에게 경배심을 가진 대중들의 경건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용어를 건드리는 것은 곧 대중들의 경건생활을 비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는 현명치 못하게도 이 용어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디옥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지나치게 분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을 인정하면서도 두 품성이 진정한 통일을 이룬 것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신성을 지닌 로고스가 인성안에 도덕적으로 내재한 것으로 생각했다. 마치 하나님이 성전안에 거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God-man)이 아니라 “신을 그 안에 소유하고 있는 인간”(God-bearing man)일 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하나님을 그 안에 소유하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안디옥학파는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선언한 점에서는 정통적이라고 볼 수 있었으나, 신성과 인성을 지나치게 분리하여 두 위격(Two Persons)으로 설명한 것은 비정통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한 분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남편과 아내가 도덕적으로 한 뜻이 되면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의미였다. 따라서 안디옥학파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일부 사람들은 마리아를 “사람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리아에 대해서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용어와 “사람의 어머니”라는 용어가 대립되어 사용된 것이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네스토리우스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용어를 정죄하면서, 아울러 단순히 “사람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고 하여 그 중간적 용어로 “그리스도의 어머니”(크리스토토코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 하였다.

대중들은 사변적 신학보다는 통속적인 경건생활에 더 익숙해 있었다. 따라서 대중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설교에 반발하였다. 이러한 대중들의 반발과 편승해서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은 412년부터 444년까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을 지낸 씨릴(Cyril)이었다. 씨릴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을 지닌 분으로써 완전한 인성을 입어서 한위격(One person)으로서 불가분적인 연합을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씨릴역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공통된 약점을 드러냈으니, 그리스도안에 있는 양성이 상호교류를 통해서 결국은 신성으로 단일화 되었다는 표현을 많이 드러냈다. 네스토리우스와 씨릴은 상호간에 열두가지씩의 저주문을 교환하면서 대립을 심화시켰다.
결국 황제 데오도시우스2세는 431년에 에베소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 했다. 이 회의의 결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예수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녔지만 두 분이 아니고 한 분(One Person)이시다. 둘째, 마리아에 대해서 “데오도코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합당하다. 셋째,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은 이단으로 정죄한다, 아울러 펠라기우스의 사상도 이단으로 정죄한다는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성했고, 왕성한 선교정신을 가지고 페르시아, 인도, 아라비아, 중국 등지에 자기들의 사상을 전파했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공헌도 하였다. 중국의 경교는 바로 네스토리우스파를 가리킨다.
 
 
유티케스주의(Eutychianism)
알렉산드리아학파는 에베소종교회의의 결정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약 삼백명의 수도승이 있는 수도원의 원장이었고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했던 늙은 수도승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살면서도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사상을 추종했다. 그에 따르면 예수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는 신성과 인성을 소유했으나 성육신 이후에는 신성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육신은 보통인간의 육신과는 다른 신적인 육신이라는 주장이었다.

유티케스의 사상은 씨릴의 후계자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디오스커러스의 지지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감독인 플래비안과 로마의 감독인 레오1세에게는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레오1세는 로마감독이면서 유능한 신학자였는데 유티케스를 “매우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플래비안에게 장문이 편지를 띄웠는데 이것이 유명한 “레오의 공한”(Tome of LeoⅠ)이다. 이 편지에서 레오1세는 그리스도는 한 분 안에 신성과 인성의 양성을 지니신 분이라고 명백히 선언했다.

로마황제 데오도시우스2세는 유티케스편을 들어서 449년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유티케스를 인정하고, 플래비안을 폐위시킨다고 했다. 레오1세는 이 회의를 “강도들의 회의”라고 부르며 새로운 종교회의를 열것을 요구했다.
450년에 데오도시우스2세가 사망하자 말시안(Marcian)이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말시안 황제는 451년에 칼세돈(Chalcedon)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유티케스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양성을 지닌 분으로 선언되었다. “레오의 공한”은 정통적인 신앙을 표현한 서적으로 추천되었다.
칼세돈종교회의에 이르러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은 거의 완벽한 정통교리로 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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