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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신정정치론과 장로교회의 정치적 이상




칼빈의 신정정치론과 장로교회의 정치적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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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호익 교수

1. 서론

종교개혁의 쟁점중의 하나는 교회와 국가의 바른 관계 설정이다. 이에 관해 루터와 칼빈의 상황은 판이하였고 그 주장도 상이하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양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첫째는 세속권력의 공격으로 그는 웜스 국회에 나아가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루터는 「세속권력에 대하여: 그 복종의 한계」(1523)라는 글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유를 수호하려고 하였다.1)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세속 정부가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 일체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신앙에 관한 한 세속 정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의무가 없음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영적 통치의 영역과 세속 권력의 영역 사이에 가시적인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 일과 영적 정부가 세속정부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밝히고 그리고 세속권력의 본질과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두 왕국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이 분명하지 않으면 ‘칼로 영혼을 다스리고 문자로 육신을 다스리는 것’2) 즉, 보른캄이 말한 바와 같이 ‘통치 권력의 이중 왜곡’3)이 생기기 때문이다.

둘째는 과격한 개혁자들이 종교개혁 뿐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여 농민 반란을 일으키며 루터의 온건한 개혁을 공격하였다. 농민들이 수도원과 성을 강탈하고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난폭한 무정부 상태에 이르게 되자 ‘이 세상의 멸망은 시간 문제’라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4)  루터는 「농민폭도들에 만행에 반대함」(1525)이라는 글에서 농민 폭도들의 만행에 분노하고5) 「평화를 위한 제언」(1525)이라는 글에서는 폭도를 무자비하게 진압할 것을 촉구했다.6)

하나님이 세우신 세속 정부의 법질서와 징계를 거부하는 것은 악마의 사도나 할 짓으로 보았다. 농민폭도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세속정부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려고 하는 또 다른 ‘통치권력의 이중적 왜곡’에 빠져있으므로 두 왕국의 구분을 다시금 명확히 할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루터의 이왕국론에서 두 왕국 또는 두 정부를 구분한 것은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두 왕국을 혼돈하여 종교적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 카톨릭 교회의 교권주의자와 과격한 개혁주의자들과 맞서기 위한 것이다. 전자에 의한 두 왕국의 중세적 혼합은 내적으로 영혼의 자유를 침해했고, 후자가 주장하는 천년왕국론에 의한 두 왕국의 혼합은 외적으로 세속 질서의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7)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루터는 이왕국론을 통해 영적 자유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다보니 자연히 정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루터는 영적 자유를 보호해 줄 정치적인 질서의 효율성을 앞세워 정치적인 이유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항거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기독교 국가이든 아니든 정치적인 이유로 세상 나라에 반역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므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이 정당하지만, 복음을 수호하기 위한 저항은 정당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저항에 관해서도 이중적인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8)

루터의 이왕국론은 질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정치적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불의에 항거할 필요성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하게 만들었다.9)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루터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무관심과 사회변혁에 대한 무책임을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의 종말론적 긴장을 약화시킨 것으로 후대의 신학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루터의 영향으로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교회가 정치적인 문제를 건설적으로 책임있게 다루지 못한 치명적인 과오를 초래하였으므로10) 루터의 이왕국론의 재검토는 정치신학이 주요한 과제로 부각하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왕직”을 강조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칼빈이 활동하였던 제네바는 일직이 시민들의 참정권이 인정된 시민사회가 건설되었고 대의정치가 시행되고 있었다. 감독과 군주의 영향력이 최소화 된 공화국이었으므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개신교도들이 정치적 박해를 피하고 종교적 자유를 찾기 위하여 몰려온 곳이었다. 세속정부와 개신교회 사이에는 갈등보다는 조화와 협조가 용이한 분위기였으므로 중세기적 신정정치에 버금가는 개신교적 신정정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바탕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 글에서는 제네바에서 칼빈에 의해 시도된 종교와 정치를 조화시키려는 개혁의 역사를 살펴보고 칼빈의 신정정치론을 골간을 검토한 후 정치적 문제에 대한 장로교의 근본적인 태도를 재조명하려고 한다.

2. 제네바의 정치와 종교
제네바는 일찌기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확보한 도시였다. 1387년에 엄숙히 선포된 헌장에는 이 도시 안에서의 3개의 서로 다른 권위를 인정하였다. 자유도시민에게 선거권이 주어짐으로서 주교와 백작과 자유 도시민은 동등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11) 이 때부터 평신도의 송사에 대한 재판도 교구의 감독이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4인의 평의원(syndic)들에게 넘어 갔다. 1519년을 전후하여 감독은 감독대로 시민들과 백작을 통제하려 하였고, 볼소이 백작은 백작대로 감독과 시민들을 장악하려고 마지막 시도를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제네바는 일련의 의회(councils)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12) 네 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되 평의회(syndics)가 점차 확대되어, 시 회계와 16명의 의원에 추기된 소위원회(the little council)를 구성하였는데 이 소의회에서 종교 개혁의 주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이어서 60인 의회(council of sixty)가 생겨났으며, 1527년 부터는 그 수를 추가하여 200인 의회(council of two hundred)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배후에는 모든 시민들의 모임인 총회(general council)가 있었다.13)

1536년 5월 21일 총회에서 시민들은 손을 들고 개신교의 신앙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것과 우상을 버릴 것을 서약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것과 모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것을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무상 의무교육이 시작되었다.

그해 7월에 칼빈은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에 온 것이다. 다음 해 1월 16일 소의회는 목사들이 제출한 “제네바의 교회와 예배 조직에 관한 조항들”이라는 문서를 채택하였다. 이 규칙에는 성찬을 합당하고 경외하는 태도로 자주 시행하게 하였고 그것을 지키지 않거나 모독하는 자에게는 배찬을 중지하거나 출교의 징계를 하게 하였다. 신자들 중에 ‘좋은 평판과 모범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어떤 사람들을’을 목사로 임명하여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생활과 처신과 비행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다른 사람의 현저한 비행을 목격한 자는 목사에게 보고해야 하며 목사와 함께 그 형제를 훈계하여 회개를 촉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교회에 보고하여 죄인의 고집을 꺽기 위한 출교의 치리도 불사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시간에 카드 놀이나 공놀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1938년 1월 4일 200인 의회는 목사들이 문제가 있는 교인들에 대한 성찬중지 초치를 취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에 불복하여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던 칼빈과 파렐은 그해 선거에서 다수를 이룬 반대파에 의해 그해 4월 23일 총회에서 제네바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1540년 9월 21일 소의회는 칼빈을 복권하였다.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와 11월 20일 주일 총회에서 “제네바 교회의 법령들”을 다시 채택하였다. 교회의 조직과 권징의 일반적인 원칙들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 네게의 직분을 세우셨는데, 목사14),교사, 장로15), 집사라고 하였다. 이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장로와 목사로 구성된 치리법원(Consistory)이다 

열두 장로들은 목사들-처음에는 여섯명 뿐이었다-과 함쳐서 치리법원을 구성하였다. 여기서 교회의 권징을 치리하게 되었다. 권징은 교회의 순결을 보호하고 회개를 유도하는 수단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오락과 도박과 춤과 같은  관습에 관한 지극히 사소하고 다양한 과오들을 직접 치리하였고, 강팍한 범죄자의 처벌은 관원에게 인계하였다. 더 중요한 문제는 치리법원에서 다루기 직전이나 직후에 소의회에서 취급되었다.16)

이 치리법원에서는 칼빈이 중심이 되어 술집과 사창가를 제거하기 위한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1546년에는 술집을 건전한 오락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하여 과음과 외설적이고 불경건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금하게 하였고 불어 성경을 펴 놓고 종교적 담화를 장려하였으며 9시에는 문을 닫게 하였다.

칼빈은 1537년에 이어 1541에 제2의 요리 문답을 만들어 어린이의 신앙교육에 사용하였는데, “제네바 교회에서 이용하기 위한 신앙의 강요와 고백”이라는 긴 이름을 붙였다. 그 내용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 ,성례전등을 간결하게 해석한 것이다. 제네바의 시민과 주민들과 관리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신앙의 고백과 반듯이 지켜야 할 신앙의 지침이었다.17) 1563년에는 제네바에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종교개혁의 요세로 만들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과 더불어 그 도시의 헌법과 법률을 개혁하고, 사회적 관습을 개혁, 그리고 교육 제도를 개혁하는 일을 병행하였고 이 일을 위해 관리들과 협력하였다. 관리들인 장로와 목사들로 구성된 ‘치리법원’과 관리와 시민의 대표로 구성된 ‘소의회’ 두 기관 사이의 협조는 대체로 잘 이루어졌다. 소의회는 장로들을 비록 정치적으로 임명되었으나 교회적인 역활을 맡고 있었다. “교회의 멤버라는 것과 도시의 시민권을 가진 멤버라는 것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시민 공동체의 사람들과 동일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8) 

이처럼 16세기 제네바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긴밀한 유대를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당시로서는 양자의 관계가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와 국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제네바의 경우는 교회와 국가는 별개의 공동체가 아니라 같은 공동체 내에서의 종교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의 구별에 지나지 않았다. 칼빈은 1560년 시의회 선거 전날 밤 시민 총회에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집권자들을 “순수한 양심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만을 염두에 두고서 이 공화국의 안전과 방어를 위하여 뽑도록” 촉구하였다.19) 이처럼 신정정치와 민주정치가 그의 가르침에서 쉽고도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었으며, 자신의 특별한 활동영역이었던 도시국가 제네바는 그로 인해 지속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지향한 정부는 현대적인 의미의 인권과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법’에 대한 성서적 관념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은 신앙의 자유와 더불어 범죄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동시에 수행되는 것을 이상을 삼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이상은 현대의 자유민주국가의 정치적 이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현대적 의미의 인본주위적 자유민주주의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3. 칼빈의 신정정치론
칼빈이 제네바의 시민권을 얻기 이전에 이미 완성된 「기독교강요」에서 신정정치론을 제시한 것으로 주장되어 왔다. 칼빈은 삼직무론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왕직을 아주 강조 했으며, 그리스도의 영적 영원한 통치를 역설하였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자유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자유는 모든 부분에서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20) 칼빈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양심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관계를 이왕국론으로 전개하였다.20)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영적인 자유에 촛점을 두어 파악했으나 칼빈은 정치적 자유의 개념으로 파악한 것은 그들이 처했던 상황과 해결해야 할 신학적 과제가 상이했기 때문이다.20)

루터와 달리 칼빈은 제네바와 같은 도시국가의 귀족계급의 통치하에서 교회의 선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세속통치를 이용해 종교를 보호 육성하고 종교가 침해되는 것을 막으려는 동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정치적 자유와 관련하여 해명한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non terrenum velcarnale) 외적인 제도나 통제로부터 자유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제정한 제도를 폐기해버리는 것은 아니다.20) 칼빈은 양자의 관계에 대해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두 개의 정부를 구분하였다. 인간 가운데는 두 세계가 있어 서로 다른 왕과 다른 법을 가지고 통치한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다(duplex esse in homine regnen). 하나는 영적 정부인데 그것에 의해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지도 받는다. 다른 하나는 시민 정부인데 그것에 의해 인간은 인간됨과 시민의 의무를 교육받는다. 전자는 영혼의 내적 생활에 관한 영적 통치(sprituale regium) 이고 후자는 현세의 생활에 관한 정치적 통치(politicum regium)에 해당하는 것이다.20)

양자의 관계를 ‘세속정치에 관하여’20)라는 제목의 독립적인 장에서 자세히 다룬 칼빈은 두 개의 정부가  구분되긴 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이 두 정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이 두 정부를 구분한 것은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교합일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하기 위한 제안이라는 점에서 같은 동기를 지니고 있다.20)

칼빈은 시민정부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입장을 거부한다. 첫째는 재세례파의 무정부주의적 입장이다. 이들은 양심의 자유에 따라 법정도 법도 관리도 없는 새로운 이상적인 사회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 아래 기존의 정부 형태를 전적으로 배격하였다.20) 둘째로 마키야벨리의 정치지상주의이다. 이들은 제후들의 권력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하나님 자신의 통치와 대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하였다.20) 칼빈은 시민정치를 부정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이 세우신 시민통치의 사명과 그 유용성을 분명히 설정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시민통치의 최우선적인 사명은 “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보호 격려하고, 경건한 자의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방어”20) 하는 것이며, “우상 숭배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모독과 그 밖의 종교에 대한 침해가 사람들 가운데서 공공연하게 일어나 만연하는 일이 없도록”20)하는데 그 유용성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종교를 옳게 제도화하는 일은 ‘인간의 정치적 과제’로 본 것이다.20)

칼빈은 루터보다도 국가의 권리를 더 많이 인정하였다.20) 루터는 불의한 자를 다스려 외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것만을 국가의 과제로 여겼으며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 국가는 일체의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관헌이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다만 인간 가운데서 정의를 행하는 일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어리석은 자이다.”20) 건전한 종교를 육성 보호하고 종교에 대한 침해를 적극적으로 방지하는 것을 세속 정치의 주요한 사명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관헌의 직무를 중시하였다. 관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고 신적 권위로 부여 받으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직무를 행하는”20)자들이므로 관헌에게 저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20) 군주의 주권에 복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의미에서 ‘비록 군주로서 그 의무를 다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20) 부당한 관헌이나 사악한 군주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자이기 때문에  불의하고 난폭한 독재자가 등장하더라도 국민은 저항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악행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불의한 통치자를 세울 수도 있으므로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악한 군주를 등장하게 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할 경우에 하나님께서 해방자를 보내어 악한 정부를 벌하고 불의하게 압박 받는 백성을 구출하실 것이다.20)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칼빈은 시민저항권을 부정하였는가 하는 논의가 제기되어 왔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칼빈은 사인(privatis hominibus)으로서 국민의 저항권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백성의 관리(populares magistratus)의 저항권을 인정한 것만은 분명하다.21) “관헌들이 직무상 왕들이 광포한 방종에 저항하는 것을 나는 결코 금하지 않는다. 아니 왕들이 무절제하게 모든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서 못본 채한다면 그들의 행위는 사악한 배신행위라고 단언한다.”21)고 하였다.  어쨌든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려는 동기에서 시민정부의 종교적 의무를 강조했고 불의한 정부에 대한 관리들의 무저항을 배신행위로 규탄함으로써 관리들의 종교적인 의무를 역설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칼빈이 지향한 신정정치의 개념을 좀더 분명히 규명하여 보자. 신정정치(theocracy)라는 용어가 여러 의미로 사용되으므로 우선 그 개념을 명확히 설정하여야 한다. 성직자들의 속권을 주장하는 성직자의 통치(hierocracy)나, 성서의 말씀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는 성서적 통치(biblio-cracy)도 신정정치로 이해되곤 하였다.21) 칼빈의 정치적 이상은 성직자의 직접 통치나 성서에 입각한 통치가 아닌 설교와 교육을 통해 훌륭한 정치가를 길러 내어 그들에 의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신정정치라는 말을 ‘신앙을 가진 정치인들의 통치’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면 제네바는 신정사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신정정치는 보다 성서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칼빈의 신정정치론은 삼직무론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왕권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요 세상의 주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교회 안에서 영적인 직접통치와 세계의 주로서 시민정부에 대한 간접통치를 포함한다.21) 칼빈은 그리스도의 통치의 이중적인 성격을 중보자의 인격과 관련하여 설명하였다.21)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자(聖子)’이신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제2위로서 성부와 함께 우주적 통치를 수행하시지만 ‘신인(神人)으로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교회 내에서의 영적 통치와 정부 안에서의 시민통치를 모두 수행하신다.

이러한 구분은 육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육체 밖에 있는 그리스도를 구분한 칼빈의 근본적인 사유와 일치한다.21)  육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영적인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순간에도 ‘육체 밖에 있는 그리스도(extra Calvinisticum)’는 세계를 다스린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이 주장한 신정정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온 우주에 미친다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과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뜻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신정정치는 그리스도의 통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통치가 영적으로 실현되고, 이와 동시에 교회 밖에 있는 세속정부도 그리스도가 세우신 경건한 관리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가 정치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 결 론
칼빈은 루터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리스도의 왕직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의 제네바에서의 활동을 살펴 볼 때 신정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21)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인 사제직에 관한 루터의 사상을 모든 믿는 자의 보편적 왕권의 사상으로 고쳐 읽었다”21)고 몰트만은 평가하였다. 이러한 신정정치의 신념을 이어받은 장로교회(개혁교회)는 정치 문제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루터교회와는 달리 강한 정치 지향적인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루터와 달리 칼빈은 제네바와 같은 도시국가의 귀족계급의 통치하에서 세속정부를 이용하여 종교를 보호 육성하고 종교가 침해되는 것을 막으려는 동기에서 기독교적 자유를 정치적 자유와 관련하여 새롭게 설정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을 계승한 칼빈주의자들은 유럽의 전통적인 귀족주의적 정치체제가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항거했으며, 정치적인 자유를 찾아 유랑의 생활도 사양치 않았으며 강한 하나님의 주권의 세속적인 정치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도록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다하려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1) J. M. Porter(ed),「루터의 정치사상」,홍치모역(서울: 컨콜디아사, 1985), p. 75ff. 1521년 웜스의  국회가 교황의 비호 아래 그 전해에 루터가 저술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를 비롯한  루터의 저작을 모두 철회할 것을 명령하자 루터는 이에 불복하였다. 그 결과 세속권력에 의해 루터의 저작들은 불태워졌으며 그 자신은 출교(出敎)를 당하였고 그의 조국에서 모든 직위와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투옥되었으며 종교 개혁운동은 세속권력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되었으므로 「세속 권력에 대하여-그 복종의 한계」라는 글을 쓰게 되었다.

2) Heinrich Bornkamm,, “두 왕국의 교리”, 「루터신학의 진수」, 지원용 편(서울: 컨콜디아사, 1986), pp. 90, 212.

3) J. M. Porter(ed), op.cit., p. 82.

4) Willistion Walker, 「기독교회사」, 유형기 역편(서울: 한국기독교문화원, 1980), p. 381. 종교개혁이 확산되면서 과격한 개혁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1524년 독일 남단 쉬바비아(Swabia) 지역에서 토마스 뮌쳐(Thomas Müntzer 1488-1525)의  지도로 12 조항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의 요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유를 확립하자는 요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경제적 불의를 시정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자는 정치적 이상향을 꿈꾸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5) Ibid., p. 141.

6) Ibid., p. 110. 루터는 「평화를 위한 제언」(1525)이라는 글에서 파괴적인 반란을 자초한 제후, 영주, 눈먼 주교, 미치광이 사제와 수도사의 사치와 방탕,  속임과 강탈의 책임을 추궁하는 한편 농민들에게는  “통치자들이 악하고 부당하다는 사실이 여러분들의 무질서와 반항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악을 벌할 책임은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칼을 든 세상통치자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고 자제를 요구했다.         .

7) Paul Althaus, 「말틴 루터의 윤리」, 이희숙 역(서울: 컨콜디아사, 1989), pp. 98-99.

8) J. C. Bennett, 「그리스도人과 國家」, 김재준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1), p. 46.

9) Paul Althaus, op. cit., pp. 120-121.

10) I. C. Henerr(ed),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pp. 320-321.

11) T. M. Lindsay, 「종교개혁사 II」, 이형기 차종순역(서울: 장로회출판국, 1991), p. 79.

12) J. T. Macnill,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pp. 154-156.

13) Ibid. ,p.156.  평의원과 회계는 전 시민들의 총회에서 선출하였고, 200인 의회가 해마다 소의원회 16명을 선출하였고, 자신들의 소의회에 의해 선출되었다.   

14) Ibid., pp. 185-186. 목사는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훈계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장로들과 함께 형제로서 교도를 행한다. 목사후보자는 소명의 증거를 보여야 하고 교리시험에 통과하고 행실에 인정을 받아아 하며 목사들의 추천과 소의회의 수락과 교인들의 동의 과정을 거치게 하였다.

15) Ibid., pp. 187-189. 장로는 선량한 생활과 좋은 평판, 믿을 만하며 쉽게 부패하지 않는 이어야 하며, 권징과 영혼들의 지도의 사명을 가진다. 열 두 명의 장로들은 관원들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소의회에서 후보들을 추천하였는데, 소의회에서 2명, 60인 의회에서 4명, 200인 의회에서 6명의 후보를 내어 최종적으로 200인 의회의 재가를 받게 하였다. 장로는 주로 치리법원(Consistory)에 파견되는 고회의 대표러서의 역활을 감당하였다.

16) Ibid., pp. 190-191

17) T. M. Lindsay, op. cit., pp. 136-137

18) Ibid., 190

19) D. K. McKim, 「칼빈신학의 이해」, 이종태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1), p. 360.

20) Inst. III. xix. 9(LCC XX. p. 840).

21) Inst. III. xix. 15(LCC XX. p. 847).

22) 칼빈은 자유의 구성요소를 율법의 의를 넘어서 신자들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 율법의 멍에와  강제에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영적 자유 뿐 아니라 외적인 제도와 통제로 부터의 정치적 자유도 포함시켰다.

23) Inst. III. xix. 15(LCC XX. p. 847).

24) Ibid.

25) Inst. IV. xx. 1-32(LCC XX. pp. 1481-1520).

26) J. Staedtke, “Die Lehre von der Königsherschaft Christi und zwei Reichen bei Calvin”, Kerygma und Dogma 18(1972).  p. 208.

27) Inst. IV. xx. 1(LCC XX. p. 1486).

28) Ibid.

29) Inst. IV. xx. 1(LCC XX. p. 1487). 칼빈은 건전한 종교의 보호 육성 외의 시민통치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공적 평화를 유지하고,  개인의 소유를 보호하고, 원만한 거래를 유지하고  사람들 사이에 정직함과 순수함을 유지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칼빈은 가난한 자를 돌보고 학교를 세우고 가난한 자와  여행자를 위한 건물을 세우는 것이 시민정부의 사명이라고 하였다. CO XXXVII.211; W. Niesel, op. cit., p. 234 에서 재인용.

30) Inst. III. xx. 3(LCC XX. p. 1483).

31) Inst. III. xx 4(LCC XX. p. 1489).

32) I. C. Herner(ed), op. cit., pp. 320-321.

33) Inst. IV. xx. 6(LCC XX. p. 1491).

34) Inst. IV. xx. 4(LCC XX. p. 1489).

35) Inst. IV. xx. 23(LCC XX. p. 1511).

36) Inst. IV. xx. 5(LCC XX. p. 1490).

20) Inst. IV. xx. 30(LCC XX. p. 1517).

38) 이양호, “칼빈의 政治思想”, 「神學思想」 53(1986, 여름), p. 427.

39) Inst. IV. xx. 31(LCC XX. p. 1519).

40) J. T. Mcnill, op. cit. ,pp. 211-212.

41) W. Niesel, op. cit. p. 234에서 재인용.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왕으로 삼으셨고 지금은 그의 도움으로 통치한다.  그리스도는 동시에 하나님의 대리자요 지상의 모든 주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왕직의 주권의 모사물이다.”

42) R. A. Muller, op. cit. p. 43.

43) H. A. Obermann, “The Extra Dimension in the Theology of Calvin”, Jounarl of Ecclesiastical History, 21:1(1970), pp. 43ff. 루터가 속성의 교류라는 교리를 통해 양성의 편재를 주장했듯이 칼빈은 ‘Extra Cavinisticum’의 교리를 통해 인성과 신성의 편재를 주장하였다.

44) K. Bornkamm, op. cit., p. 2.

45) J. Moltmann, “칼빈주의 윤리”, 「希望의 實險과 政治」, 전경연 역(서울: 종로서적, 1977),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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