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서양의 만남
불교와 서양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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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http://www.cheontae.org/kumkang/2003/09/07.htm)불교와 서양의 만남[ 독일불교(1) ]진우기·인터넷 불교대학 기획실장독일은 철학, 문화로서의 불교가 가장 먼저 유입되어 학자와 식자들 간에 활발하게 토론되고 펼쳐졌던 곳이다. 일찍부터 불교와 인연이 많았고 불교 애호자, 지지자가 많았던 독일의 19세기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이렇게 말했다.나의 철학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계의 종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불교라고 나는 생각한다.인도철학과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이후 니체 같은 철학자, 토마스 만같은 문학가, 바그너 같은 음악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른 철학가들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조화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과 생의 딜레마를 깊게 숙고했으며, 융이 지적했듯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적나라한 고통과 그로 인한 인간의 혼란, 열정, 악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쇼펜하우어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철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집안에 불상을 모셔놓을 정도였다.쇼펜하우어가 독일 불교뿐 아니라 유럽 불교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있다. 바로 그의 저서를 통해서 붓다의 가르침을 처음 접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 경전번역가 노이만(Karl Eugen Neumann), 판사이며 고불교회를 창립한 그림(Georg Grimm), 독일 최초의 비구승인 나냐틸로카(Nyanatiloka)가 있었기 때문이다.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경우는 삶의 예술과 도로서의 불교에 심취하여 베를린 인근의 흑림(黑林) 속에 일본식 다실(茶室)을 닮은 초당을 지어놓고 일본의 대선사들을 초대하곤 했다. 이로 인해 하이데거는 본국에서보다 일본에서 훨씬 인기가 있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불교를 ‘내세 중심의 고행주의’라고 보았고 ‘이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종교이며 ‘외부세계로부터 물러난’ 종교이며 ‘행동하지 않는 윤리’를 중시한다고 했다. 베버 때문에 서구에서는 불교를 이 세상에 관련된 행동을 하지 않는 허무주의로 보는 시각이 퍼졌고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1951년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헷세는 소설 ‘싯달타’를 써서 불교와 힌두교 사상을 다시 한번 세계에 전하였다.- 서양불교에 끼친 독일불교의 공과불과 150년 밖에 안되는 서양 불교의 역사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위치는 특이하다. 일찍부터 불교와 접하여 불교를 철학, 역사, 학문, 예술로 전하는 개척자와 전달자 역할을 맡아 한 긍정적인 면과 그들이 전한 불교의 이미지가 왜곡되어 있었다는 부정적인 면이 엇비슷하게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독일이라는 땅에 뿌리박고 불교를 수행하며 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현재도 불교도수가 서양에서 5위이며 이중 반은 베트남 이민자들이라고 한다. 독일에는 티베트 불교의 승원, 미국의 피스메이커 오더, 틱낫한 스님의 접현종에서 모두 지부를 설립했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세계로 뻗어나간 수행단체는 아직 없다.1881년 영국에 팔리경전협회(Pali Text Society)가 생긴 이후로 독일에도 1909년 성격이 비슷한 ‘독일 팔리회(Deutsche Pali-Gesellschaft)’가 설립되어주로 학문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불교 출판물, 특별히 불교 초기경전의 번역에 주력했다.이동호 박사에 의하면 경전을 번역하고 종교로서의 불교를 독일에 소개하는데 공헌한 독일인으로 노이만과 달케가 있다고 한다. 인도학 전공자인 노이만(Karl Eugen Neumann, 1865-1915) 박사는 독일어권에서 최초로 불교 원전을 번역 소개했다. 1892년부터 그는 법구경을 비롯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차례로 번역하였고 1894년에는 불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실론(오늘날 스리랑카)과 인도를 방문하였다. 헷세는 그의 놀라운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이만 이전의 또는 이후의 어떤 번역도 그의 번역에는 도저히 견줄 수 없다. 온화하고, 성스러운 붓다의 말씀이 노이만 박사의 번역을 통해 경이롭게도 진실 그대로 생생히 남아 있게 되었다.’파울 달케 (Paul Dahlke, 1865-1928)는 1900년 두 번째 아시아 여행도중 콜롬보에서 스리랑카 스님들로부터 불교를 배우고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관심있는 사람들로 그룹을 만들어서 불교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03년 첫 불교 저서에 이어 1917년부터는 ‘신(新)불교(Neubu -ddhistische Zeitschrift)’를 정기적으로 발행하였다. 그는 의사였지만 유럽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불교 저술과 번역일을 꾸준히 하였다. 1924년 달케는 베를린에 ‘불교의 집 (Buddhis tisches Haus)’을 건립했다. 베를린 시 변두리 조용한 숲 속에 지어진 ‘불교의 집’은 법당, 설법 및 참선을 위한 선방, 도서관, 그리고 요사채, 정원, 불탑 등 아시아 사원의 전통 양식이 깃든 아름다운 사찰이다.미국에 불교가 확산된 것이 60년대 히피들이 반전운동과 대체적인 삶의 방식을 찾으면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사회가 어느 정도 경제적 수준이 향상되었던 60년대 중반에 불교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는 독일의 주요도시에 일본 조동종이나 임제종의 선원이 세워졌고 독일인들은 선의 매력을 맛보게 되었다.1975년 독일 전역에 공식 등록된 불교 단체는 45개였지만 90년대 말에는 400여개로 늘었고, 2000년대에는 500여개의 불교단체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중 티베트불교단체가 약 삼분의 일을 차지한다. 19세기에 상좌부 불교를 처음 전수받은 독일은 이후 지난 30년간 대승불교가 강세를 유지했고 현재는 티베트 불교가 강세를 타고 있다. 티베트 불교의 인기몰이에는 달라이 라마나 칼마파 등 큰스님들의 초청강연 탓도 있지만 이웃나라 덴마크 출신의 재가 법사인 올레 니달 라마의 격식없고 소탈한 강연도 단단히 한 몫 한다. 그의 유머 가득하고 열정적이며 생활에 밀접한 주제와 적절한 비유를 곁들인 설법을 경청하기 위해 수천명의 독일인들이 법회에 몰려들고는 한다.- 독일어로 계를 집전한 최초의 스님, 아야케마1923년 독일에서 태어난 아야 케마(Ayya Khema, 1923-1999)는 후에 독일에 사원을 세우고 제자를 배출하였다. 나치가 득세를 하던 시절에 유태인의 딸로 태어났던 그는 1938년 15세 때 부모와 생사를 알수없는 작별을 하게 된다. 자신은 200명의 유태 어린이 피난단에 섞여 영국으로 떠나고 부모는 샹하이로 피난했기 때문이다. 2년 후 샹하이로 가 부모와 합류하지만 2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다시 가족은 일본 포로 수용소에 갇히고 여기서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미군이 진주하자 포로들이 해방되었고 얼마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 케마는 그곳에서 결혼하여 1남1녀를 둔다. 케마는 60년대에 남편과 함께 히말라야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을 다녔는데 거기서 명상을 배웠다. 케마가 원했던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정확한 길과 지침이었지만 그때까지는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1973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살고 있던 케마는 영국의 비구 칸티팔로(Khantipalo)를 만났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실용적인 깨달음의 길을 발견했다. 1979년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한 케마는 스리랑카에서 니안포니카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차로 2시간을 달리면 다라그 국립공원이 있는데 이곳에 숲속 승가의 승원인 왓부다다마(Wat Buddha-Dhamma)를 이전에 설립했었고, 또 칸티팔로와 함께 전법을 해왔기 때문에 비구니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이 된 것이 자신의 삶 중에서 제일 잘한 일이었다고 하는 케마는 사미니계를 받은 후의 그 해탈감과 안도감을 이렇게 전한다.이제는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졌다. 예뻐질 필요도, 매력적일 필요도, 재미있는 사람이 될 필요도, 부자가 될 필요도 없어졌다. 다만 가사를 걸치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가사를 입은 나는 그저 사람일 뿐이다. 누가 나를 좋아한다면 좋은 일이다. 누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문제될 게 없었다.1987년 로스엔젤레스의 시라이(Hsi Lai) 사에서 비구니계를 받은 케마는 1989년 독일에 붓다하우스를 설립해 승원장이 되었으며 97년에는 독일 최초의 숲속 승가인 메타 비하라를 뮌헨에 설립하여 독일어로 비구계를 집전한 최초의 스님을 배출하였다.아야 케마는 많은 비구니 제자를키웠고 여성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여성들이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기에 1987년 세계 최초의 비구니 국제 대회를 주관하여 개최했다. 그로 인해 세계 여성 불교 단체인 샤카디타(Sakyadhita, ‘붓다의 딸들‘이라는 뜻)가 탄생했다. 1987년에는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유엔에 초청되어 불교와 세계 평화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동년 스리랑카의 비구섬 바로 옆에 ’파푸두와 비구니섬’을 설립하여 서양 여성들이 기거하며 수행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였다.비구니섬을 설립할 때 케마는 남성들의 횡포에 가까운 저항과 싸워야 했다. 처음에는 비구니섬이 비구섬에 너무 가까워 비구들이 헤엄쳐 건너올 수 있으니 안된다고 했다. 건너오기도 어렵겠지만 건너온다 하더라도 이미 너무 피곤해서 아무 것도 할 기력도 없을거라고 케마는 응수했다. 그랬더니이번에는 산적들이 와서 도적질하고 여자들을 강간할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케마는시원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여기 비구니섬의 서양 여자들은 토박이 산적들보다 체구가 두배는 될걸요.1999년 자신이 설립한 붓다하우스에서 입적한 케마는 자신의 삶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하나의 커다란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자신의 삶 구비구비에서 맞닥뜨린 어려운 일들은 바로 자신을 가르치는 자애로운스승이었던 것이다.2000년대를 맞아 불교계에서는 불교 페미니즘이 거세게 일고 있다. 불교가 서양에서 융성하기 때문에 그러하고, 또한 70년대에 불교를 수용한 세대 중 다수가 대학 졸업자 내지 대학원 졸업자이라서 ‘엘리트 불교’라는 말이 나왔고 그러다 보니 더욱더 불교가 페미니즘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는 여성불자들이 많다. 그리고 현재 이 분야의 스승과 비구니들이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아야 케마는 세계 최초로 비구니들을 단결시켰고 수많은 차세대 비구니를 키워 불교 페미니즘의 초석을 놓았다는 면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남들이 은퇴하여 안락한 삶을 꿈꾸고 손자 볼 생각을 할 55세라는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던 스님이 늘 되풀이 일러주었던 수행이란 어떤 것일까?수행은 무언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온몸과 온마음일 뿐이다. 조금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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