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교리교실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영생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영생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영생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기사입력: 2010/10/29 [08:25]  최종편집: ⓒ 크리스찬투데이
서재생 목사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불교의 해탈(解脫)의 세계와 기독교의 영생(永生)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구원론) 
 

1. 들어가는 말 
 
동 서고금(東西古今)의 여러 사상(思想)들은 공통적(共通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 세상의 삶을 마치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이 행한 삶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審判)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도 사람이 죽으면 생전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업보(業報)심판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 동안 선하게만 살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성경에서는 선(善)을 행하고 죄(罪)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이 세상에 아주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罪)를 전혀 짓지 않고 완전한 선(善)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성철 종정 스님도 열반(涅槃)법어에서 “수많은 죄(罪)를 짓고 간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인간 한계의 현실로, 여기에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罪)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스러운 형벌의 길을 가야만 하는가? 역사 이래로 많은 종교들이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불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해탈(성불)의 길,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영생(구원)의 세계가 무엇이 다른 가를 비교하고자 합니다. 
 
2. 불교의 해탈(解脫)의 의미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자신의 선악간 행위(업보)에 따라 윤회하는 존재라고 불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되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길을 불교에서는 해탈(解脫) 혹은 성불이라고 하는데,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해탈이라고 하고,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된다는 의미에서 성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 불경이나 종파에 따라서 불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내용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께서는 팔정도(八正道)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주선 1세기경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주후 3-4세기까지 지속된 대승불교에서는 각 종파에 따라 상이한 여러 가지 수행법을 해탈과 성불의 길로 제시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육바라밀입니다. 이 육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보살의 수행법으로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실천 덕목을 말 합니다. 보시(布施; 베푸는 것), 지계(持戒; 계율을 잘 지키는 것), 인욕(忍辱; 어려움을 참는 것), 정진(精進;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선정(禪定;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 지혜(智慧;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 보살이 이를 잘 수행하면 성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대승 불교인 북방불교로서 율종에서는 계율을 강조하고, 선종에서는 참선을 강조하고, 정토종에서는 염불을 강조하고, 밀교종파에서는 진언을 강조를 합니다.
 
 이처럼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해탈과 성불의 길이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서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해탈, 성불의 길은 누구나 원한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출가 승려가 되어 수행한다고 해서 해탈, 성불의 길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불교의 해탈의 세계 

불교의 해탈(解脫)이란 산스크리트어 비모크샤(vimoksa)로 뜻은 욕망과 번뇌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불교의 궁극적 이상은 중생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는데 있습니다. 모든 중생이 어떻게 해야 해탈이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설명한 것이 팔만사천대장경 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탈인가 하면, 바로 윤회세계로부터의 해탈입니다. 윤회설에 따르면 세상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을 보면 석가모니는 인간계에 처음 나타난 부처님이 아니라 일곱 번째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처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즉 인간과 부처가 된 일곱 번째 사이는 180겁이나 되는 긴 세월의 간격이 있다고 합니다. 

1 겁[천지가 한 번 개벽한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은 43억 2천만 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으로 크기가 160평방킬로미터인 바위 위를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3년에 한 번씩 스쳐 지나감으로써 그 바위가 다 달아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만약 1겁을 43억 2천만년으로 계산하면 180겁은 7,776억 년이 됩니다. 석가모니 즉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윤회를 거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윤회설에 따르면 생명은 삼계 육도로 다음 여섯 세상 사이를 영원 전 옛날부터 영원한 미래에 걸쳐 계속해서 윤회전생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윤회세계인 육도(六道)의 세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는 천상(天上)계라 하여 신의 세계인 극락세계이고, 둘째로는 인간(人間)계란 인간세계로 사바세계라고 하여 소위 인도환생 세계입니다. 셋째로는 축생(畜生)계로써 동물의 세계로 환생세계, 넷째로 아귀(餓鬼)계로써 보통 귀신이 많이 사는 곳으로 이들에게 잡혀서 고통을 받게 되는 곳, 다섯째로 아수라(阿修羅)로써 악령의 세계로 이곳에서는 살아서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되는 곳, 여섯째로 지옥도(地獄道) 형벌의 세계입니다. 

삼계육도 윤회의 세계, 이들 가운데 인간(人間)계와 축생(畜生)계는 우리 육안으로 보고 있는 세계인 반면. 나머지 네 세계는 상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중생은 이 여섯 세계를 영원히 윤회전생하고 있는 셈인데, 불교는 이 모든 세계를 <고통(苦痛)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누구든 한 번 지옥에 가면 아무리 짧아도 1조 6,200억 년 동안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일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아귀와 아수라와 축생의 세계도 고통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 만만치가 않고, 인간 세계도 마찬가지로 고통의 세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 의 고통세계를 다음과 같이 생, 노, 병, 사의 고통을 비롯한 이별애고(離別愛苦:-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증오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 구불득고(求不得苦高:-구하는 데 얻지 못하는 고통], 오음성고(五陰盛苦:번뇌의 고통] 등 사고(事故)와 팔고(八苦)라 불리는 갖가지 고통이 인간사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천상(天上)세계는 여러 가지 괘락으로 가득 차 있어 가장 고통이 적은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사는 자들에게도 죽음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장 수명이 짧은 자라도 900만 년의 수명이 약속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윤회 속에 어딘가에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天上)계는 기독교의 천국(天國)과는 매우 다릅니다. 
 
4. 불교의 해탈(解脫)의 내용 
 
1) 불교는 윤회(輪廻)에서의 생존으로부터 해탈(解脫)을 지향합니다. 

윤 회 세계로부터의 해탈[탈출], 생존 그 자체로부터의 해탈하는 것이 불교의 이상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사물에 집착하는 근본 원인은 자기의 생존에 있습니다. 생존의 원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늙고, 죽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통(苦痛)의 원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인 생존(生存)으로부터 해탈 될 수 있을까하는 방법론이 불경(佛經)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고통과 생존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모든 욕망(慾望)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실과 현상은 계속 변하는 것으로 실체(實體)를 지니지 않는 공(空)이므로 이것을 깨닫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라. 그러므로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욕망을 끊을 때 윤회(輪廻)세계로 태어나게 하는 업(業)은 소멸된다. 그렇게 되면 윤회에서 해탈되어 생존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자기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기의 존재(存在)를 부정하면 윤회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고.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 죽음, 슬픔, 고통, 번뇌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삶 그 자체를 부정합니다.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만 않는다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거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어 집착하는 마음을 버린 자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해탈이란 두 번 다시 생명(生命)을 부여받지 않고, 두 번 다시 생존하지 않으며, 윤회(輪廻)의 유전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집착(執着)과 욕망(慾望)과 번뇌(煩惱)의 끈을 자르면,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해 열반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열반(涅槃)이란 해탈한 상태를 말합니다. 
 
2) 불교의 해탈(解脫)이란 불교 발생 이전 인도 고유사상 이었습니다. 

해 탈(解脫)이란 말은 원래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교가 발생하기 1000년 전부터 이미 시작된 순수한 인도 사상이었습니다. 브라만교에서는 자아(自我)의 일상생활을 벗어나 아트만의 본성에 들어가 순정(純淨)하게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그것은 진여(眞如:우주의 대 생명)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며 삼애(三毐)에 에워싸인 자기 본래의 마음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불교의 연대와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자이나교에서도 이 해탈을 무엇보다 이상으로 하여 출발한 것은 이 해탈사상이 그만큼 인도 전역에 보편화된 까닭이었습니다. 이렇게 상식이 된 해탈 사상을 두고도 소승과 대승은 해석상에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즉 해탈에 대한 견해는 소승적(小乘的)입장과 대승적(大乘的) 입장의 차이점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승적 견해는 해탈을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인식하려고 합니다. 번뇌와 욕망의 속박은 어디까지나 중생 개인의 문제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승(小乘)에서 제시하는 수행방법은 개인적 수행(修行)의지에 비중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적(大乘的)견해는 비록 개인이 번뇌와 욕망을 없애고 해탈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에 있어서 해탈의 이념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실천의지입니다. 이것이 보살사상입니다. 지장보살은 해탈 할 수 있지만 지옥의 중생들을 다 해탈시킨 후, 열반하게 된다는 것이고, 관세음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소원을 성취시킨 후, 해탈하겠다는 것이며,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들을 질병을 고친 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해탈이 성취된다고 믿는 것이 대승불교의 해탈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 두 파의 해석을 합쳐보면 이 인생의 바른 길을 방해하는 번뇌와 업보와 같은 결박에서 벗어나 도달하는 것이 해탈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얻어진 해탈을 통해 비로소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혜(지혜)해탈은 오온이나 십이연기에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을 봄으로써 지적으로 해탈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서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을 직관하는 것[정견]만으로 마음의 번뇌가 완전히 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정(正定)을 통해 마음에서 그것을 멸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心:-마음)해탈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이 갖추어 질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입니다. 
 
4. 열반(涅槃)에 대한 불교계의 해석 
 
불 교에서 인생의 고뇌로부터 해방인 해탈의 경지를 표현할 때 열반(涅槃)이라는 말을 씁니다. 열반은 불교에서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열반은 해탈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럼 해탈은 또 무엇일까요? 해탈이란 두 번 다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두 번 다시 생존하지 않으며, 윤회(輪廻)의 윤(輪)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집착과 욕망과 번뇌의 끈을 자르면 생사윤회로부터 해탈(解脫)해 열반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구원받은 세계인 영생(永生)의 세계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열반은 일반적으로 불교 고유의 중심개념으로 알고 있으나, 인도에서는 자이나교나, 브라만교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던 관념을 채용한 것입니다. 

열반 은 산스크리트어 “비루비나(zirvana)”를 음사한 말로 “동요를 가라앉힌다.” “조용하게 가라앉는다.”는 의미로도 사용한 예가 있지만, 보통은 “불꽃을 불어 끄는 것” 또는 “불어 끈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역(漢譯)에서는 적멸(寂滅), 멸도(滅度)등으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열반(涅槃)의 어의(語義)가 나타내고 있는 “불이 껴진 상태”는 불교의 이상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인간이 무명업력(無明業力)에 의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그릇된 가치에 얽매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 반(涅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했을 때 성취됩니다. <잡아함경>에 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일체번뇌가 영원히 없어져야 열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법화경에는 “집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자기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면 윤회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 죽음, 슬픔, 고통, 번뇌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사실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멸망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이는 열반의 세계가 무(無)존재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1) 불교의 구원인 해탈(解脫)의 세계는 정적인 무(無)의 세계입니다. 

해 탈의 세계는 첫째로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인 정적(靜寂),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근본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실제로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니르바나>로 “꺼져 버린 상태”라는 뜻을 가지며 마치 거센 바람에 꺼져 버린 불꽃처럼 열반은 거센 바람에 의해 생명의 불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날 석가모니가 “열반(涅槃)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에게는 저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 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결국 석가모니는 열반은 윤회(輪廻)라는 생존(生存)의 틀 밖으로 나간 것이기에 통상적으로 말하는 유무(有無)의 차원에서 “열반(涅槃)에 들어간 자가 존재 하는가 존재(存在)하지 않는가?”라고 물을 수는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열반은 생명에 관한 모든 것들이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무생(無生)무사(無死)의 현상을 의미하면서 생사환멸 연기라고도 합니다. 
 
2) 해탈(解脫)의 상태가 너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 일부 후세 사람들은 해탈의 세계인 열반에 들면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기 시 작했습니다. 
이 러한 해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변화해 해탈이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과도 같은 이미지를 주게 된 것입니다. 해탈의 세계인 열반(涅槃)은 <정토>나 <불국토>라는 말과 결부되어 그곳에는 환희와 행복과 영생이 있다고까지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열반의 해석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불교의 본래 사상이라기보다는 후세에 와서 부가(附加) 또는 변질된 것입니다. 

초기불교 경전을 보면 해탈세계는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단절된 절대적인 무(無)를 의미합니다. 불교는 원래 생사윤회로부터의 해탈을 목표로 해서 생긴 종교(宗敎)입니다. 즉 생존의 틀 밖으로 벗어나고픈 희망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해탈인 열반의 세계란 거기에는 즐거움도 슬픔도 없는 단지 불이 꺼진 상태의 정적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생사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불교에 있어서 열반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삼법인(三法印)에도 이 뜻을 포함하는 교리로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열반(涅槃)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성제인 팔정도(八正道)의 수행을 통해 실현된 그 곳도 모든 번뇌(煩惱:-탐, 진, 치)와 무지(無知)가 사라져 생사(生死)의 괴로움을 멀리 초월된 해열반의 세계 해탈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5. 기독교의 영생(永生)의 세계 
 
성경은 영생(永生)을 기독교의 구원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2;23) 앞에서 살펴본 불교의 해탈은 고통의 존재에서 구원 받아 성불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안타깝게도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렘 2: 22)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누구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구원의 문재를 해결 할 수가 있는가. 
 
1)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영생을 받는 종교입니다.. 

기 독교의 구원의 세계인 영생을 얻는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영생의 구원 문재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성경말씀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써는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롬 10;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내 마음에 믿고 고백할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롬10;10) 기독교(基督敎)는 영생(永生)의 종교(宗敎)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리라.”(요3:36) 이처럼 성경은 한결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죄(罪)의 문제를 해결 방법. 

로마서에서는 영생(永生)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로 파생된 새 생명(生命)으로 죄(罪)로 인해 들어온 사망(死亡)을 전복한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죄(罪)의 삯은 사망(死亡)이었으나 예수 안에서는 거룩함에 이르는 영생의 열매가 있다(롬5:21, 6:22~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는 이 영생(永生)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죄 해결 문제는 제5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3), 기독교의 영생(永生)의 세계 

기 독교의 구원의 세계인 영생이 만약에 이 땅에서의 행복, 기쁨, 성공 같은 것을 의미한다면 다른 종교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의 영생세계는 이 땅의 차원을 넘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생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해탈의 구원의 세계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성경은 “육체(肉體)를 위해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두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갈6:8)고 말씀합니다. 
 
영생(永生)은 본래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으로(딤1:2) 의와 거룩함의 표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후사가 되어 영원토록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딤3:7). 영생(永生)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며, 이 생명은 영을 살리는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復活)하심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적 상태를 뛰어넘는 영화(靈化)된 몸으로의 영원한 삶을 뜻하며, 그것은 육체적 삶이 있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자유롭고 안정된 영원한 부활의 몸(영적인 몸)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부활(復活)의 몸은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에 죽은 신앙인에게,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 시에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신앙인에게 일어날 것을 의미합니다. 
 
6, 불교의 해탈(解脫)의 세계와 기독교 영생(永生)의 세계의 다른 점? 
 
불교(佛敎)는 기독교(基督敎)와 같은 영생(永生)의 교리(敎理)가 없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같은 교리 때문에 철저하게 삶을 부정하려 하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삶을 부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생명. 충실한 생명. 영원한 생명(生命)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설에 입각한 불교와 창조론에 입각한 기독교의 차이점입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나 인간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영원부터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인간은 모두 시작이 있습니다. 또한 현재의 삶은 처음 삶이지, 전생(前生)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죽은 후 다시 동물이나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윤회설(輪回說)을 믿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삶을 어떻게든 소중히 영위해야 합니다, 불교(佛敎)에서처럼 더 이상 다른 어떤 존재(存在)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생존(生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생명(生命)에 사랑과 성결의 약동과 기쁨의 영원성이 부여되길 원합니다. 기독교는 불교와 같이 무(無)로 공(空)으로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영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향합니다. 생명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약동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종교입니다. 

불교(佛敎)의 열반(涅槃)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탈출(脫出)하는 것"으로 비유된다면 기독교(基督敎)의 영생(永生)은 “생명의 큰 바다에 들어가 헤엄치는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간 자는 사랑과 능력과 환희와 거룩함과 끝없는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또한 열반(涅槃)을 “생존의 거센 바람에 꺼져 버린 불꽃”에 비유한다면, 기독교의 영생(永生)은 오히려 “꺼지지 않고 계속 피어나는 영원한 생존의 세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선지자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한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엔 불이 붙었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또는 모세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을 상징한 것입니다. 영생은 빛과 열(熱)과 사랑으로 크게 약동합니다. 불교(佛敎)의 열반(涅槃)에서 우리는 부정적(否定的)인 것 밖에는 느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基督敎)의 영생(永生)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크신 영생 속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 사랑과 거룩함과 기쁨과 끝없는 행복에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언제까지나 사는 생명”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 기쁨과 행복의 원천을 갖고 있는 생명은 지루하거나 허무해지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으면 무척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립니다. 
또 평소 무척 갖고 싶었던 자동차를 갖게 되면 그 당시는 매우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성능도 떨어지고 스타일도 구식이 되어 싫증이 날 것입니다. ‘왜 이러한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까?’ 그것은 그러한 기쁨이나 행복감이 <외부>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이나 자동차도 모두 자신 외부의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재산이나 연인이나 더 나아가 명성도 모두 자신 외부의 것입니다. 
 
자신의 내부에 기쁨과 행복의 원천을 갖고 있는 생명은 살아가는 것에 염증을 느끼거나 지겨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영생은 그러한 생명입니다. 영생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 안에 참된 사랑과 거룩함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결코 삶을 지루해 하시거나 허무해 하시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영원한 생명을 성도가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태양이 자기 안에 광원을 갖고 있듯 영생(永生)은 자기 안에 행복의 원천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원천인 주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주셨는데, 그것이 영생(永生)입니다.(요일5:11~1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기독교(基督敎)의 영생(永生)이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生命)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심(창2:7)로 시작됩니다. 영생(永生)이란 육체적 생명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새 생명(生命)을 말합니다. 공간복음에서 영생은 죄(罪)를 버리는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7. 나오는 말 
 
불 교의 열반(涅槃)의 세계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일체고(苦)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고, 일체고(一體苦)인 나의 삶을 냉철한 관념으로 응시하여 해탈(解脫)을 목표로 깨달음의 세계를 실현시키는 것이 불교(佛敎)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불교의 열반(涅槃)의 세계는 기독교(基督敎)처럼 자기의 몸이 변하여 하늘나라로 또는 다른 세계로 가서 그 모양대로 산다는 그런 동일체의 가르침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운 부모형제를 만난다는 소망도 없습니다. 

불교(佛敎)의 내세관(來世觀)이 이토록 실감이 없는 것은 그곳에 대한 상세한 석가모니의 교훈이 없는 것도 원인이 되지만, 본래 그러한 설명 자체를 할 수가 없는 불교(佛敎)의 ‘공(空)사상’, ‘무(無)사상’이 바로 그 주된 원인입니다. 불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교의 구원의 세계인 해탈은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신자에게는 이생에서 부처가 될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만 현생에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하게 살고, 그 과보로 내생에는 출가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고자 하는 희망사항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행2;21)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지 못한 불교신자는 생의 마지막 길에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극락에 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저 업보윤회의 굴레 속에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막막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로부터 오는 참된 기쁨과 소망과 참된 평화와 안식이 함께 합니다.(마11;28. 요 3;16)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 
http://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17971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