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율법
복음과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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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 론
1. 글쓴 이유와 목적
신약 교회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과 함께한다. 부활하신 주님,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라고 하였은즉 땅위에 내리셨고 죽으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영광스럽게되신 주님의 이해는 땅위의 사역이 필수적이며 거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예수님의 땅위의 사역은 각복음서의 증거가 다르지만 엣 언약의 완성자로서 사역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옛 언약은 모세 언약이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모세 언약이 토대이다. 그리고 그 언약의 핵심은 율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의 성취이다.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율법을 어김없이 다 지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을 지켰으면 주님은 영광스럽게 되지 못하며 여전히 휘장 밖에 있어야된다. 휘장 밖은 저주며 사망이며 죄아래 있는 것이다.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율법이 주지 못한 생명을 주심이다. 율법을 다 지켜서는 그 생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땅위의 사역은 그런 사실을 증거한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죽으시기 전에 증거하신 그 생명을 부활의 생명, 하늘 보좌의 생명, 아버지와 함께 계신 생명으로 완성하였다.
신약 교회는 이 생명의 토대위에 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옛 언약과 대비해서 예수님의 사역과 교회의 생명을 말한다. 이 생명을 여러 서신들이 교회에 증거하며 교회가 이 터 위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도 이 관점에서 기록되었으며 이 빛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구약 성경도 부활하신 주님의 완성의 빛 가운데서 보아야한다.
이 생명의 빛은 진리의 빛이다. 교회는 이 빛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 있지 않다. 휘장 밖의 저주 가운데 있지 않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가 이 빛 가운데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어왔다. 중세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종교 개혁의 칼빈과 루터, 특히 개혁 교회의 토대가 되는 웨스터 민스터 신앙 고백에서도 율법과 의의 문제가 바르게 서 있지 못하였다. 모든 견해들을 다 제시하여야 하겠지만 종교 개혁의 열매이자 개혁 교회의 토대인 웨스터 민스터 신앙 고백서만 살펴 보겠다.
19장은 율법에 관한 것인데 첫째 율법은 의의 완전한 법칙이다. 둘째 의식법, 시민법은 일시적이다. 세째 도덕법은 영원한데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한 순종의 의무이며 반드시 순종해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강화하셨다. 세째 율법은 죄의 본성을 드러내며 그렇게함으로 자신들을 살피어 겸손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의의 필요성을 밝히 보인다.(거듭난 자들에게도 마찬가지)
7장의 언약에 관계된 곳에서 동일한 한 은혜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이 다양한 경륜으로 시행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약 사람들은 구약의 예표들 안에서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온전한 사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완전히 수행하여 완전한 순종을 이룬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구속 사역의 효력과 효험이 시초부터 만대에 계속적으로 약속과 예표들을 통하여 택한 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말한다.
11장 칭의에서는 예수님의 순종과 보속으로 믿는 자들의 모든 빚을 다 갚으셔서 믿는 자들에게 의가 전가된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구약 백성의 칭의도 신약 백성과 다 같은 것으로 이야기한다.
13장 성화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화가 불가능하며, 부패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육과 영의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으로 힘을 얻어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되어 은혜 안에서 자라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율법과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살펴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 구원의 도식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 신앙 고백이라고 말할 수 없고 모세의 제자보다 더한 어둠의 저주 가운데 가두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토대가 이 고백서 안에 있었다. 물론 최근에는 시각의 변화가 나타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도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하는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 논문에서 율법에 대하여 그리고 의에 대하여 성경의 증거를 따라 살펴보고자한다.
2.전개방법
모든 성경의 의미의 토대는 구약 모세 언약에 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이해도 거기에 토대를 두어야한다. 그러므로 먼저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하여 살펴 봄으로 율법에 대한 바른 견해를 살피겠다.(물론 구약 성경도 그리스도의 완성의 빛에서 보아야하기 때문에 단순한 증거 본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의 문맥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이고 구속사적인 해석을 하여야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율법의 문제를 살핌으로 과연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을 지키는 사역인지 아니면 율법을 완성하셔서 새 생명을 주는 것인지를 살피겠다. 바울의 율법관에서도 구원과 칭의가 율법을 지킨 에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으로 주어진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 보겠다.
II. 율법에 대한 근본 이해-구약의 증거
1. 언약의 법
1) 애굽에서의 구원의 목표-소유로 삼으심
우리가 이 사실을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조상들의 약속을 이루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3:7-8, 출6:1-8, 15:17)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소유로 삼으심이다. 곧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삼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6:)초태생을 내게 돌리라는 내용도 그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심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4:22, 11:7)그 일에 있어서 마지막 장자 심판이 결정적 사건이다. 그래서 애굽 장자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초태생은 내게 돌리라고 말한다.(13:)
해석을 하자면 이 두 목적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번째 목적에 한정하겠다. 또한 19:3~4은 언약을 체결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왜냐하면 19:5은 그러므로의 접속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엎어 여호와께로 인도하심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4절에서 강조된 점은 너희이다. 곧 너희가...보았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보았다는 의미는 제 3자의 입장에서 그 사실을 간접 체험하는 정도나 사실을 보도하는 정도가 아니다. 보았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의 체험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였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서 19장 이전에 말했던 구원의 목표인 소유로 삼으리라는 내용과 19장에서 말하는 구원의 일을 보았기 때문에 언약을 체결한다는 것을 일치되게 보아야한다. 또한 우리는 19장에서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신 최종 목적이 내 앞으로에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한다. 곧 시내산 여호와 면전으로 인도하셨다. 여호와 앞으로 인도된 백성이다. 어떻든 여기서 구원의 목표는 소유로 삼으심, 언약 체결이다. 다시말해서 소유로 삼으심과 언약 체결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2) 언약에 참여하는 것은 공로적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짚고 넘어 가야할 문제가 있다. 그러면 언약에 참여하고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킴에 의해서 들어가는 공로적인 것인가. 그 대답은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이다. 율법을 주기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지키리라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 서두에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고 있다. 언약을 지키리라한 백성에게 율법을 주고 있다. 이전 조상들에게는 이러한 법을 주시지 아니햇다. 여호와의 구원을 본 백성, 그래서 여호와를 안 백성들에게 언약의 조건을 제시하며 언약적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먼저 율법을 지킨 백성에게 하나님이 임하신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긍휼과 구원을 본 백성에게, 여호와의 언약을 순종하리라한 백성에게 임하신다.
그렇다면 5절과 6절의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러한 말은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언약 체결에 있어서 항상 복과 저주의 방식으로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십게명과 그리고 출23:20~33, 레26:, 신명기에서 이러한 것들이 등장한다.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면 복을 주고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등식은 출19:5,6에 나오는 내용의 발전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런 복과 저주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복, 거룩한 백성으로서, 열국 중에서 여호와의 소유로서의 복과 저주이다. 특별히 복과 저주의 내용들은 가나안 땅에서의 복과 저주로 나타난다. 이 복은 조상들 때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 주어지는 축복은 이전에 없었던 복을 받는 공로적인 것이 아니라 언약의 복의 지속과 발전이다. 이 복이 충만하게 나타난 시대는 구약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이다. 그리고 저주가 극에 달한 시대는 바벨론 포로의 시대이다. 열왕기서에서는 그 평가를 언약의 법의 지킴과 불순종에 평가 기준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언약을 지키면 이제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언약 백성들에게 언약적 순종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들이 언약을 지키면 그 언약의 복을 장성하게 누릴 것이며 그렇지 아니하면 언약의 복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이다.
3) 율법은 무엇인가
(1) 언약 지킴=율법 행함
율법 지킴이 언약 백성이 되는 공로가 아니라면 과연 율법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은 이 법은 언약의 법이다. 출애굽기 19:5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말씀하셨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언약은 무엇인가. 그리고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명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제히 응답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다 행하리이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아직 그 명하신 것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했다. 그 명하심은 20장에 나타나는 십계명과 21:~23에 나타나는 율례와 법도이다. 그러한 사실을 24:에 나타나는 언약 체결식에서 알 수 있다. 24:3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19:에 있었던 말씀과 동일하다.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은 언약과 동일하다. 곧 율법을 지킴은 언약을 지킴이다.
(2) 율법의 근본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언약이 근본적으로 무엇이가를 살펴야한다. 그래야만 율법의 근본도 밝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앞에서 그 언약은 소유로 삼으심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19장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었는가? 그렇지 않다. 4:22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 내 장자로 말한다. 3;에서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말하며 내 백성의 우고를 들었다고 말한다. 5:1,8:1,20,9:1,13,10:3,에서도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은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5;3과 7:16,9:1,13,10:3에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로 말한다. 바로는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말한다.(8:25,10:8)모세와 아론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린다고 말한다.(8:26)유월절 규례에서 초태생은 다 여호와의 것이다(13:11~16)홍해 심판 후 노래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구원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며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 주의 사신 백성으로 표현한다. (15:) 15:26에서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한다. 16:12에서도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그분이 너희 하나님 이시다. 18:1에서도 모세의 장인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들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위하셨다.(18:8)여호와는 이스라엘 중에 계신다.
또한 십계명을 주시는 상황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20:2에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을 살펴 보자. 여기서 하나님 자신을 말하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있다.
그러면 이전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였는데 시내산 언약에서 소유로 삼는 다는 의미의차이점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그래야만 율법의 의미도 나타난다. 그 차이점은 19장 이하의 내용에 있다. 우리가 모세 오경을 한 책으로 보았을 때 출애굽기19:~민10:까지가 그 특징이다. 이 본문은 모두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규례와 율례들인데 시내산 언약의 특징이 이 부분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삼으심의 특징이다. 그 특징은 하나님이 성막을 짓고 함께 거하심,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그 상에서 먹으며, 하나님이 거룩하니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며, 여호와의 성막을 호위하고 봉사하며 동행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 즉 모세 언약의 특징인데 이전에는 주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안에 그 언약의 특징이 나타난다. 그러니 언약의 내용은 소유로 삼으심인데 그 내용은 율법이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언약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만고불변한 의의 표준과 도덕적 표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성막에 계신 하나님과 거룩의 삶으로 함께하는 언약의 법이다.
(4) 무엇이 언약의 법인가?(율법의 구분)
앞에서 율법을 언약의 내용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무엇이 언약의 법인가? 십계명과 다른 계명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러한 관계를 살펴보겠다.
a) 십계명
십계명은 언약 체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가지점에서 다른 계명과 다르다.
첫째는 계시의 방식이다. 우리는 20장의 계시의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19장과 20장의 문학적인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5의 내용은 여호와게서 이스라엘 백성의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하실 것이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강림하심의 전제는 우리가 살펴 보았던 언약 체결 때문이다. 강림하시는 이유는9절 때문이다. 9절에서는 모세에게 임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임하시는 이유는 모세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모세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다. 그리고 나서 백성들을 3일 동안 성결케하고 있다.
16~19절은 여호와께서 빽빽한 구름과 나팔 소리와 불 가운데서 강림하신 내용과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신 내용이다.
20~25절은 다시 모세를 부르시고 백성들이 성결케하고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명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19절과 20절 이하는 내용상으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절 이하의 내용은 내용상 첨가되어 있는 인상이 있다. 그 이유는 20절에서 여호와께서 강림하신 내용을 다시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25절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고한 내용은 21~24절의 내용이지 20장의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20장이 19절과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 순리롭다.
또한 십계명 단락을 구성하는 20:1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포를 확증하는 구조이다. 20:2에서 너와 나의 관계 는 직접 대면하는 관계를 나타낸다. 그 이하의 계명도 대상이 2인칭으로 되어 있다.(하나님과의 대면의 관계를 나타낼 때는 2인칭으로 서술하고 그외는 3인칭으로 서술한다.) 그래서 20:18이하에서 백성들이 두려워 떨며 모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로 말하였다. 20:22에서도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라고 말하고 잇다. 신5:22에서도 여호와께서 산위 불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총회에 이르셨다고 되어 있다.
이상의 결론으로 십계명은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는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계시하신 방식이다.
계시의 형식에 있어서는 언약체결의 형식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국가간의 종주권 조약 형식으로 이해한다.(전문, 역사적 서언, 계명, 언약 문서 낭독, 증인, 축복과 저주, 맹세의 형식-성경에서 이런 언약 체결 형식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아담, 아브라함, 다윗 언약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나타난다) 물론 십계명에서 그 형식을 모두 채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십계명 자체의 계약 형식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십계명에서는 전문, 역사적 서언, 게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문-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역사적 서언-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19:4~5의 언약 체결의 서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같은 구조이다.)
*계명-20:4~17
축복과 저주에 대한 문제는 19:5,6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언약 즉 명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리라한 백성에게 임하셔서 말씀하신 언약의 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2,3,5계명에 반영되어 있다.
위의 두가지 내용으로 인해서 십게명의 독특성을 알아 보았다. 그 특성은 십게명이 언약의 법인데 언약 그 자체를 표현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소위 모법, 헌법으로 보아야한다. 즉 근본적 언약 관계, 다시 말해서 너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는 것을 선언하며 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법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십계명만 언약의 법인가? 다른 계명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b) 출20:22~23:
먼저 십계명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법을 살펴 보자. 그것은 출20:22~23의 내용이다. 이것은 24장에서 모든 율례로 언약서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이 부분의 계명도 언약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그 형식과 내용을 살피면 언약 체결 구조와 같다.
*출20:22은 역사적인 서언으로 볼 수 있다. 그 서언은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이다. 역사적 서언에서 이 법을 특성을 알 수가 있다. 즉 시내산에서 십계명 선포를 보았기 때문에 계명의 말씀을 주고 있다. 십계명의 근거 때문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십계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에서 나타난 언약 관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다른 신상을 만들면 안되며 여러 규례를 지켜야한다.
*계명에 대한 내용은 십계명에 나타난 내용과 상응한다. (20:23~23:19)
*경고와 약속이 주어져 있다.(23:20~30)
그리고 나서 24장에서 언약을 체결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은
*언약 문서를 낭독
*맹세
*언약 체결식
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가지는 19장~24장을 하나의 언약 체결 장면으로 보는 것이다.
*역사적 서언-19장:애굽에서의 구원과 여호와의 강림
*계명
-십계명-20:1~17:하나님의 이 모든 말씀, 직접 계시-헌법
-모세를 중보자로 세움-20:18~21
-모든 율례-20:23~23:1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순종에 대한 경고와 약속-23:20~30
*언약서 낭독:여호와의 모든 말씀(십계명)과 모든 율례
*맹세
*언약체결식
그렇다면 그 이하의 계명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c)레위기
먼저 레위기를 살펴보자. 레위기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언약의 법과 차이점과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
레위기는 출애굽기24장에서 언약 체결식에 사용된 십게명과 율례들과는 차이가 있다. 첫째는 언약 체결식에 등장하는 법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격상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 제도를 살펴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성막예 계신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고 성결의 삶을 사는 것과 관게되기 때문이다.
성막은 언약의 법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명령했는데 그 돌판을 주기 전에 성막 식양에 대해 주된 내용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성소는 하나님이 언약의 법인 돌판을 두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회막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성막에 거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는 것으로 말하고 애굽 땅에서 구원한 목표도 그렇게 말한다.(출29:45~46) 그러므로 구원의 목표와 언약 체결과 회막에 거하는 것은 일치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언약 체결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언약 체결의 목표이자 내용이다.
그러므로 레위기도 그러한 성격으로 이해되어야한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성막과 관계된 법으로, 성막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인데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백성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사는 백성이다. 그들이 레위기의 법을 지키면 그들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또한 성결의 삶을 사는 언약의 복을 누린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은 성소에 속한 거룩이다. 왜냐하면 정결의 모든 토대는 제사장의 성결과 성소의 정결이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점:언약의 법-
1:1을 보면 이제 더이상 여호와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지 않는다.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말씀하신다.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하였던 영광으로 회막 중에 거하시기 때문이다.(출40:34) 이제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규례를 말씀하시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이 규례인 것은 다음의 이유에서 이다.
첫째는 1;1,2의 내용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는 말은 출애굽기20:22부터 전형적으로 율법을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두번째는 레위기의 반복되는 어구인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어구이다.(11:44,45, 19:2, 20:7,8,26, 21:8,15,22,23, 22:2,32,33)이 말은 두가지 점에서 언약적 성결을 요구하는 말이다. 첫째는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는 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언약 백성이라는 말이다.(출애굽기19장과 20장 참조)두번째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점이다. 이 말은 첫번째의 근거 때문에 명령하는 말이다.
세째는 레위기 27:34에서 이상은 여호와게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네째 26장은 레위기의 결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출애굽기 23장에 상응하는 전형적인 축복과 저주의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d)신명기 율법
신명기 율법은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과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차이가 난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행한 설교의 말씀인데 가나안 땅에서 행할 규레와 법도이다. 그런 역사적인 사실에서 차이가 나며, 내용에 있어서도 가나안 땅의 삶에 조절되어 있다. 신명기 율법서도 시내산에서 체결한 언약의 법은 아니다. 그러나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언약적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29장 모압 땅에서 세운 언약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롭다. 그리고 이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의 말씀도 언약궤 옆에 보관하며 면제년 초막절에 성전에서 낭독하여 이스라엘로 듣게하고 지켜 행하게해야한다.
-형식-
신명기의 형식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겟으나 모세의 설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설교는 언약 체결의 형식을 따라 배열되어 잇다.
*서언1:1~5
히브리어 성경은 말씀들이니라로 시작한다. 즉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다. 그리고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역사적 서문1:6~4:43
지금까지의 역사적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며, 가나안 땅에서도 이 하나님만 의뢰하고 섬기는 것이 그들의 복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이유는 여호와의 규레와 법도를 준행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권면의 전제 조건과 토대를 이룬다.
*율법4:44~26:19
율법 선포의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잇다. 이 구분은 출애굽기19:~24:과 구조상 일치를 이룬다. 구조가 일치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가나안 땅의 삶의 법으로 조절되어 있으며 권면의 내용들이 많이 덧 붙여져 있다.
첫째 십계명 부분이다(5:5~5:21)
둘째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는 단락이다(5:22~11:32)
세째 가나안 땅에서 평생에 행할 규례와 법도(12:~26:)
*축복과 저주27:1~30:20
축복과 저주27:~28:
언약체결식29:
언약의 유효성30:~34:
e)결론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십계명과 다른 계명들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약의 두 돌판으로 언약궤 안에 보관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계명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 등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오히려 모세 오경의 특성과 계시 방식, 그리고 계명의 성격을 따라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실지로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으로 분류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도덕법은 영원하고 의식법과 시민법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그 언약의 법의 특징에 따라서 출애굽기 언약 율법, 레위기 언약 율법, 신명기 언약 율법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출애굽기 언약 율법이 시내산 언약 체결의 율법으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십계명은 더 독특하다. 레위기 언약 법은 성막에 나아감으로 언약을 누림에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신명기 언약 법은 그 구조에 있어서 출애굽기 언약과 일치하는데 율법의 내용과 축복과 저주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언약서의 해설처럼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땅에서 행할 구체적인 법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언약의 법의 근본 토대는 출애굽기 언약 율법이다. 그 중에서 토대는 십계명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헌법으로 이해하고 그 이하는 그 시행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출애굽기 언약 법과 신명기 언약 법은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구조와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이다. 구조와 내용은 살펴 보았다. 목적은 언약 체결의 목적이다. 출애굽기는 근본적인 시내산 언약의 법이고 출애굽기는 모압 평지에서 세운 언약 체결 즉 갱신의 법이다. 레위기 언약법은 오히려 그 언약의 법에 덧붙여진 법이다.
결론적으로 근본적인 언약 관계는 십계명에 있고 그 언약 관계에 토대를 둔 시행령은 여러 율례들이다. 그것이 출애굽기나 신명기에서 나타난 형태들이다. 그리고 레위기는 그 언약 관계의 복을 누리는데 있는데, 그 복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며 거룩으로 동행하는 복이다.
2.율법은 지킬 수 없는가?
지금까지 율법은 죄 때문에 지킬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메시야를 소망하는 식으로 이해를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율법 자체가 그들의 언약의 내용이며 복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의 소유삼으심을 누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법을 지키기 쉽다.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하심으로, 시내산에서 친히 말씀하심으로, 성막에 거처를 두고 함께 하심으로, 모든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신실히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 관계를 나타내며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지키기 쉽다. 소유된 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능력이며 율법을 소유한 자체가 능력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면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율버이 그 관계를 나타내며, 언약적 순종을 나타낸다.
1)신30:11~14
이 단락의 구조를 먼저 살펴 보자. 11절과 14절은 주제적인 말이며 12절과 13절은 11절과 14절의 근거를 제시한다. 11절에서 어려운 것도 아니며 먼 것도 아니다는 말은 14절에서 심히 가까와 행할 수 있다는 말로 발전한다. 율법의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며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다. 말씀이 심히 가까와서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행할 수가 있다. 즉 이 말은 신약의 용어대로 하자면 거듭남의 말씀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들었든지 모세를 통하여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언적인 말이 아니다. 물론 10절까지 그들이 범죄하고 돌이키면 언약을 회복시킬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11절부터 다시 권면의 말을 시작한다. 그 특징은 오늘날에 특징이 있다. 신명기에서 오늘날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 언약 지킴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미래에서 지키거나 지켜질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이다.
2)신명기 역사서
신명기 역사서는 여호수아~열왕기하까지이다.(여기서는 왜 이 역사서들이 신명기적인지는 논하지 않겠다) 이 역사서의 사관은 신명기 사관이다. 곧 언약의 법인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저주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역사적 사실에 내포되어 있다.
이 역사서는 다윗을 중심으로 나눌 수가 있다. 다윗 이전 역사는 다윗 왕을 목표로 진행되며 이후 역사는 다윗의 길로 갔는지 아니 갔는지로 왕들의 역사를 평가한다. 다윗 이전 역사는 다윗을 목표로하는데 두가지 점에서이다. 하나는 율법의 온전한 시행이다.(삿17:6, 18:1, 21:25)또 한가지는 여호와를 의뢰하고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는 왕국의 나타남이다. 사울은 그 길에 있어서 여호와께 범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자이다. 물론 다윗이 범죄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를 의뢰하였고 용서함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신명기에서도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면 그들에게는 사망이다. 그 사망은 이방 백성에게 끌려감이다. 그러나 죄를 돌이키고 율법을 지키면 돌이키실 것이고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말씀하셧다. 다윗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범하였는데 그것은 율법으로하면 죽음을 당하여야한다.(마치 율법을 범하면 잇라엘이 이방 땅으로 좇겨나야 하듯이) 그러나 그가 여호와를 의뢰하였고 회개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돌이키시고 복을 주셨다. 즉 언약을 지키는 것은 계명으로서 율례를 말하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까지 포함한다. 왜냐하면 신명기 언약서 자체가 그렇게 언약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노래에서 이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중심되는 내용은 환난 중에서도 여호와께 아뢰며 의뢰한 내용과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함으로 모든 대적과 원수로 부터 구원한 이야기이다. 분명히 다윗은 여호와의 율레를 범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래에서 그는 여호와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된 고백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행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뢰하고 회개하고 여호와의 율레와 규례를 지키는 자를 돌이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순종 때문에 열국이 복종하고 열방의 보화가 그 왕국에 들어 오도록했다. 그리고 율법지킴 즉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 때문에 그 후손에게 여호와께서 인자를 베푸심이 영원하다. 그러므로 다윗 이후의 왕들은 다윗의 길로 갔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로 평가한다. 다윗의 길을 따른 자들은 율법을 순종하고 지킨 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에서도 알 수 있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를 순종치 아니하고 이방신을 섬기고 여호와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것이다. 곧 그들은 다윗의 길로 걷지 아니함으로 멸망한 것이다.(왕하17장)
시편119편에서 저자는 율법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주의 증거를 지켰고 그 증거를 지극히 사랑하였다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켜 그의 모든 행위가 여호와 앞에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율법은 그들이 지키기 쉬우며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여 멸망한 이유는 온전히 여호와를 의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지 율법 지킬 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서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 되심으로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멸망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으며, 회개하고 돌이켜야한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약의 복으로 복주신다.
3.구약에서 율법의 평가
1)지혜
지혜와 율법 사이의 관계는 신명기 4:6에서 먼저 나온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레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명기서에서는 율법이 지혜 자체이다.
솔로몬은 열왕기서에서 지혜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9) 그리고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다. 그 지혜는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이다.(3:) 이 지혜는 여호와의 율법을 가까이 두고 판결하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동양 모든 사람들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모든 민족 중에서,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헤를 들으러 왔다.이것은 신명기 4: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며 다윗과 솔로몬은 신명기 역사서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지혜 문학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으로 이야기한다.(잠1:17, 9:10, 15:37, 욥28:28) 신명기서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모든 율법 준수의 토대이며 율법을 지킴이 하나님을 경외함이다.(신4:10, 6:2, 13, 24, 8:6, 10:12, 20, 13:4, 14:23, 17:19, 28:58, 31:12, 13)
율법을 행하는 복과 저주와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에게 있는 복과 저주의 형태는 언약 율법과 잠언서 전반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고 그렇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다는 말이다.
들으라는 권면 형태는 신명기(5:1, 6:4, 9:1, 20:3)와 잠언(1:8, 4:1, 10, 5:7, 7:24, 23:19)의 유사한 권면 형태이다.
시편의 지혜시(시1:, 36:, 37:, 49:, 73:, 112:, 127, 128들에서도 율법과 지혜를 일치시키는 사상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여기 있는 시들이 전적으로 지혜 자체를 찬양하는 시들은 아니다. 그 내용상 교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지헤 문학에 가깝기 때문이다. 교훈과 권면을 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시편 1편을 대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시로 이해되며 지혜시로 구분했을 때 그 특징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 악인은 그 반대의 사람이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의인이다. 이 두 대비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로 나타난다. 복있는 사람은 그 행사가 형통한다.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나튼 겨와 같고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이 대비는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것과 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나는 사상들은 언약의 법으로서 율법의 사상을 담고 있다. 특히 율법을 행하면 복이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가 있는 것은 전형적인 신명기적 사상이다.
시편112편은 시현 1편과 서로 상응한다.이 시편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악인은 소멸될 것이다.
시편 37:30~31에서는 지혜와 율법에 대한 동일성이 나타난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결국 율법은 이스라엘의 지혜이며 복이다. 율법을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며 모든 환난 중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그들이 번성해도 필경은 멸망할 것이다.
2)율법찬가
(1)시19
시편 19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6은 하늘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고 7~13은 율법이 나타내는 여호와의 영광을 말한다. 이 부분은 서로 상응한다.
이 시편에서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규레는 같은 말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지혜롭게하고, 마음을 기쁘게하고, 눈을 밝헤하고,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확실하여 의롭고, 꿀과 송이끌보다 더 달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평가도 같은 말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경계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다.
12절 이하에서는 정결함을 구하고 있다. 이렇게 간구할 수 있는 것은 7~11에서 말했던 여호와의 율법과 그 기능 때문이다.
(2)시119
시편 119편은 알파벳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여덟절이 한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한 연을 이룬다. 이 시편의 내용은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율법이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율법 지킴에 대한 간구이다. 둘째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키는 지혜의 시이다 세째 원수로부터 구원을 간구하는 노래의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단락에 혼합되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시편 저자의 상황은 그가 환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주의 구원을 간구한다. 그런데 그 간구의 토대는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지킴에 있다.(신명기 사상-언약의 말씀을 지키면 원수의 손으로부터 구원)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것이 모든 절에 나타난다. 그것은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율법, 법, 증거, 법도, 율례, 계명, 판단, 규례, 도와 같은 말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84, 121, 122, 132절 제외)
여기서는 이 시편 저자가 율법을 어떻게 평가하였는가만 살펴 보고자한다.
나의 즐거움이요 모사이다(24)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다(38)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됩니다(92)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함으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98)주의 말씀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끌보다 더하니이다.(103)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주의 증거가 기이하니이다(129)주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138)주의 말씀이 심피 정미함으로 주의 조이 이를 사랑하나이다(150)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1420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폈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143)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144)여호와여 주게서 가가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151)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레가 영원하리이다(160)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172)
3)결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율법은 언약의 법이다. 신약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평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 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의의 길이며 복음이며 생명의 능력과 거룩의 능력과 성화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지키기 힘드는 무거운 짐이나 저주가 아니다. 이 법은 그들에게 복의 근원이며 그들은 이 법을 지킬 수 있고 지켜야한다. 지킴으로 언약의 복을 누리며 산다.
4.율법과 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율법 지킴이 그들의 의이다. 신6:25, 신24:13에서는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모든 명령을 여호와 앞에서 지키면 그것이 그들의 의로움이라고 말한다.
신6: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 시1:, 시38 에 나타나는데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즉 지키는 자는 의로운 자이며 복있는 자이다. 그의 길은 형통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시24:5에서도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거룩한 곳에 서는 자들이며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사46:12은 마음이 완악한 자들을 의에서 떠난 자들로 말하며, 사51:7에서는 의를 아는 자들을 여호와의 율법이 마음에 있는 자들로 언급한다.
겔18:5~9에서도 여호와의 율례를 좇으며 규레를 신실히 행하는 자는 의인이라고 말한다.
레18:5에서는 율법을 지키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한다. 레위기에서 율법을 지키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을 나타내고 그 거룩에 참여하는 삶이다. 레위기에서는 율법 안에 사는 것을 저주로 말하지 않는다. 율법 안에 사는 것은 성막에 계신 여호와의 거룩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하는 삶이요 복이다.
5.율법과 이방인
1)거룩한 장벽
구약 시대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공간과 시간과 사람의 거룩한 구분이 있다. 이 거룩의 구분은 성소와 관련된 구분이다. 즉 성소에 속한 것은 거룩하다. 특별히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거룩의 구분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군대로 계수와 진배치, 행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군대로 계수한 의미와 진배치에 대한 것은 레위인의 구별에서 잘 알 수가 있다. 레위 지파는 성막 봉사를 위하여 구별된다. 일반 백성은 군대로 계수되어도 그 일을 담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다.(민3:13)그들은 제사장 아론에게 온전리 돌리운 자들로 아론 앞에서 시무하는 자들이다.(3:5~10) 그리고 레위 지파는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붕에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해야한다.(1:47~54)왜냐하면 그 처소는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도 이 본을 따라 회막 사면에 진을 친다. 그리고 그 진은 거룩하다. 그러므로 민5장에 규정된대로 부정한 자는 진 밖으로 나가야한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 그 직무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성소의 직무를 지키며 다른 사람이 가까이 하면 죽여야한다. 그들의 진은 장막 앞 동편 곧 해 돋는 편에 진을 친다.(민3:38,39) 레위 지파의 진보다는 성막에 더 가까이 있고 거룩하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린 고라당이 죽임을 당하였다. 고라당의 말처럼 회중이 다 거룩하고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계신다. 그러나 여호와께 속한자 즉 거룩한자의 구분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열국의 장자요 제사장 백성이다. 그러나 레위 지파만 성막의 기구를 봉사한다. 제사장만 성막에서 봉사한다. 대제사장만 휘장 안에 일년에 한번 들어간다.
그리고 날의 질서에서도 안식일이 있고 성회로 모이는 날들이 구분되어 있다. 공간의 질서에서도 온 땅을 하나님이 성소로 지었어도 가나안 땅만 하나님의 성소요, 성전만 하나님의 성소요, 그중에서 지성소는 거룩한 처소이다.
왜 구약은 이러한 구분이 있는가? 그것은 근본적인 구분의 벽이 휘장이기 때문이다. 휘장은 지성소와 외소를 구분하는 장이다. 지성소는 법궤 위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 외소는 제사장이 봉사하며 섬기는 장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한 장막에 있어도 하나님과의 거룩의 간격이 있다. 물론 1년에 일차 나가지만 금식하고 나가며 향연으로 가리우고 나가야한다. (레16:)
2)이방인의 구원
위에서 살펴 본 거룩의 장벽 때문에 이방인은 근본적으로 죄의 백성이며 부정한 백성이다. 왜냐하면 모세 언약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 언약에서 주는 구원이 없는 백성이다. 그들이 이 언약에 참여할려면 할례를 받아야하며 언약의 법을 지켜야한다. (창17:출12:48) 그러나 모두 언약의 백성으로 들어 오는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 족속은 진멸해야한다. 신23장에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오지 못할 자들을 언급하고 잇다.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자는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사생자도 여호와의 총회에 십대까지라도 들어오지 못한다.(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모두)모압과 암몬 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다른 족속은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있다.
종말론적인 이방인의 구원을 언급할 때도 이러한 사상이 전제된다. 이사야56:6~8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산에 나아가며 하나님이 그들의 예물을 받으실 것을 말한다. 스가랴서에서는 이방 백성들이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초막절을 지키지 아니하면 재앙이 있을 것이다.
6.새계명(구약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
구약은 신학적 자료를 위한 단순한 증거 본문이 아니다. 이제는 구약을 하늘 보좌의 질서로 완성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책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이 있어야한다.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은 결국 새계명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것이 구약 율법에 대한 연속성이된다. 그러나 그 연속성은 불연속성이 필연적으로 전제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야 옛 언약의 법인데도 옛 언약의 법이 아닌 새계명, 새언약의 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논문의 구조와 조직성 때문에 V장에서 언급하도록하겠다.
III.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
1.성전
성전에 관계된 내용을 먼저 살피고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성전이 옛 언약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체결의 목표는 그들과 함께 거하심이다. 둘째는 복음서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그 위치는 공관복음(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이유에 관계되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성전을 정결케한 기사를 그 주제에 맞게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 배열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먼저 성전에 관계된 기사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순리롭다고 생각한다.
1)요한복음에서의 성전 청결과 새로 짓는 의미
요한복음에서는 이 기사가 예수님 사역 초기에 배열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의 특성 때문이다.
먼저 요한복음의 기록 이유를 살펴 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태초에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여기서 거하신다는 것은 이전에 성막과 성전에 거하신 것처럼 우리 중에 거하심을 말한다. 그러나 구약때 처럼 구름 중에, 모세 율법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다. 그 영광은 세상에 아버지를 나타내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아들에 대해 증거하는데 새로운 거처를 우리 중에 두시는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면 자기 백성을 위해서 거처를 예비할 것이며 오셔서 함께 하실 것이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표적을 통해서 증거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를 때 부터 더 큰일(표적)을 보이리라했는데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가나안 땅의 성소가 아니라 인자로 말미암는 새로운 성전을 말한다. 그래서 그 후에 있는 더 큰일들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한다.
성전을 청결케하고 새로 짓겠다는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성전에서 소와 양을 파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정당한 것이었다. 공관복음에 비해서 요한복음은 더군다나 과격한 표현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거짓된 행위가 전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초점이 아니다. 여기서의 초점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유대인들이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 청결의 기사는 19절 이하의 내용 안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예수님게서 성전을 청결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여기서 가져 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였다. 이 인용구절은 시69:을 인용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예수님의 죽음에만 관련시키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한 이유로 핍박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일체 보도하지 않는다.(그것이 암시 될 수도 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며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신다고 말함으로 유대인의 핍박을암시하기 때문이다-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음)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심으로 새로운 성전을 자기 육체로 지으신다. 그는 그 일에 있어서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옛 성전과 예배 질서는 끝났다. 그는 새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옛성전을 청결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죽을 것이며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새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래서 에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하는 것은 단순히 옛 예배를 개혁하는 정도가 아니다. 구약 때처럼 휘장으로 가리운 영광의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거처를 함께 두시는 새로운 성전, 만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의 거처를 짓는 것이다.
2)공관복음에서의 성전 청결 의미
공관복음에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서로 차이가 있게 기록이 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순서가 에루살렘 입성 뒤에 바로 성전청결의 기사가 있다. 마가복음은 입성 뒤에 바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틀 뒤에 베다니에서 돌아 온 뒤에 일어난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앞서 있다. 아마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의 배교 상황과 그로 인한 심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성 뒤에 바로 위치시킨듯하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마가복음에는 첫째는 병든자를 치료한 기사가 없다. 둘째는 어린아이들의 찬양이 없다. 세째는 성전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는 말을 듣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멸할려고 꾀하였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이 그의 교훈을 듣고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는 내용이 있다.
또 한가지 차이점은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묻는다.(마21:23) 그러나 마가복음은 성전을 청결케한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묻는다.(막11:27) 그리고 그 이하의 예수님의 가르침 내용도 마태복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고 심판하리라는 내용이 더 조직적이며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고 마가복음도 그것을 전제하지만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예수님이 권세 있다는 것을 아울러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설명하도록하겠다.
공관복음은 요한복음처럼 성전을 청결케하는 일이 성전을 새로 짓는 것과 상관이 없다. 21장에 나오는 기사에서는 성전을 새로 짓겠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전을 청결케하는 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그 문맥을 살펴 보도록하겠다. 21장부터 25장은 한 단락이다.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거절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심판과 그로 인한 예루살렘의 심판 그리고 그때 즉 세상 끝에 교회가 믿음으로 깨어 있을 것에 대한 권면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4장에서 옛 백성의 배교에 대한 심판이 절정에 이르며 종말의 주님의 심판과 믿는 자들의 권면이 연결된다. 교회도 행함에서 이 주님을 거절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1장은 23:37이하와 짝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21장은 공생애에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을 말하며 24:39은 주님 재림할 때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찬양의 내용을 일치시켜서 한세트를 이루게한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왕으로 입성한 주님을 거절한 그들은 주님이 다시 왕으로 오시기 까지 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전 청결 사건도 이해가 되어야한다. 23장과 24장에서는 성전 청결이 문제가 아니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허물어 질 것을 말한다. 즉 배교에 대한 심판의 문맥에서 이해해야한다.
성전 청결의 앞뒤 문맥에서도 그러한 사실이 주가 된다.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왕을 무리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로 찬양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들어가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것은 2:3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메시야로 거절하는 것이 전제된 소동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찬양하지만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거절한다. 그래서 17절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유하셧다.
그것을 18절 이하의 내용에서도 알 수가 있다. 18절 이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내용이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호9:10)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선지자적인 관점(미7:1, 렘8:13)에서 이스라엘이 에수님을 거절한 것을 나타낸다. 성전 청결 기사는 이 두 사이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성전 청결도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이런 문맥의 정황으로 여기서 성전청결은 요한복음처럼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의미가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더 자세히 살펴 보고자한다.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선지서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하나는 예레미야서를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서 56:7의 인용 내용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내용이다. 이사야서의 문맥은 여호와의 안식일과 언약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물과 기도를 드릴 것이라는 내용이다. 마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대로 인용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하기 때문에 생랴된 듯하다. 예레미야의 7:11내용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인데 개작해서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로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 7:11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괴하고 배교하면서 성소에 출입하는 자들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이사야서의 인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서의 인용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전 청결케 한뒤로 언급한 말이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는 말이 강조점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청결 기사도 그들의 잘못된 행위나 예배에 대한 것에 대한 책망이 강조점이 아니다. 예레미야 때에는 여호와의 언약을 거절함으로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고 훼방하는 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인 자기 자신을 거절함을 인해서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소에서 행하는 것이 합법하더라도 도적의 행위이며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아들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 시대를 전제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단순한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로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선지자가 약속했던 여호와의 종, 메시야로서 그 일을 행하고 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성전 자체를 훼방하지 못하였다. 또한 성전을 파괴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인용을 말씀함을 통해서 새 시대가 전제됨을 알 수 있다. 구약처럼 제사장과 서기관만 온전한 자만 어른만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치셨고 성전에서 어린아이들의 찬송을 합당케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상하고 분하게 여겼다. 이들의 분함은 옛 방식으로는 당연할지 몰라도(구약 때는 불구자나 어린아이들은 성전에서 찬양하지 못함-레위 지파가 찬양)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거절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기사는 메시야에 의해서 성전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말이 성취될 것인데 예루살렘은 이 메시야를 거절한다. 이 거절 때문에 그들의 제사 행위는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배교 행위이다. 그래서 주님이 성전을 청결케하고 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그 일을 행하고 있으며 모세 율법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그들의 심판을 상징한다.
3)공관복음에서의 성전 재건의 의미
공관복음에서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내용은 성전 청결의 내용과 함께 있지 않다.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에만 나타나는데 모두 예수께서 공회 앞에서 심문 받을 때 나온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았다. 그러나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은 두 사람의 증인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의 증거가 일치하기 때문에 그 증거는 참되다.(신17:6) 그러므로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지을 수 있다한 것은 참 증거이다. 이 증거를 말하였으나 예수님은 잠잠하였다. 결국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죽음의 판결을 받는다. 이 증거로 인해서 대제사장인 에수께 묻기를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말하였다. 성전을 헐고 짓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27:40참조) 그 증거 때문에 맹세로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ㅇ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시인하였다. 이에 대해 대제사장이 참람하게 여겼고 더이상 증인을 요구하지 아니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고자하는 것은 성전을 새로 짓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어떻든 여기서 볼수 있는 것은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성전을 짓는 분이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때도 성전을 짓는 시기는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기에서 지어진다. 성전의 의미는 구약 성경에서 4부분에서 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서 성전 건립의 의미를 살펴 보겠다. 포로 후의 성전이 물론 더 영광스럽다고 하지만은 새로운 식양으로 지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에스겔 성전은 새로운 식양이 제시되고 있지만 구약 역사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포로후의 성전 문제도 학개나 스가랴, 에스겔의 문맥에 따라 그 의미들을 밝혀야한다.
출애굽 시대 때 성막이 이스라엘 성전의 모든 토대가 된다. 그때 처음 하나님의 거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평강을 허락하셨을 때 성전을 짓는다. 물론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보도하는 바가 차이는 있지만 출애굽 시대의 성막과 규모와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열왕기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전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셔서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게 하신 분이시다. (왕상5:)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를 위함인데 여호와의 거처로서 지음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거하심은 언약궤 안에서 거하심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전은 출애굽기 성막처럼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는 처소이다. 이전에는 움직이는 장막 가운데, 임시 처소에 있었지만 이스라엘에게 평강을 주시고 자기 궁전을 짓고 거하신다. 그래서 언약궤를 그 전에 놓았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고 아무도 능히 섬기지 못하였다. 또한 이 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죄를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회개하고 기도하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을 돌이킬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거기 있으며 여호와의 눈과 마음이 항상 거기 있다. 그러나 조건이 있는데 여호와의 율법을 순종하면 복을 줄 것인데 그렇지 아니하면 이 전도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 전의 건축에 있어서 역대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두가지 점에서 특징이 있다. 첫째는 묘사가 전반적 집과 기구들을 만드는 것에 대한 묘사로 되어 잇다는 것이다. 둘째는 솔로몬 궁전 건축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솔로몬 궁 건축을 중심으로 앞에는 여호와의 집을 짓는 내용이며 뒤에는 전의 기구들을 만드는 내용이다. 솔로몬 궁은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처럼 지었다.(왕상7;11) 그리고 그 궁에는 재판하는 보좌의 낭실이 있다.(7:7) 이 장소는 단순한 국정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시행하고 집행하는 곳이다. 결과적으로 ==열왕기서에서 성전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고 거하시는 여호와의 집이며 궁전이다.
역대기서에서 성전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그 장소는 모리아산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곳이며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나타나 성전 장소로 정한 곳이다. 성전에 대한 묘사는 열왕기처럼 집짓듯이 전반적인 묘사가 아니라 제사 의식과 관계된 곳이 강조되어 있다. 중심되는 언급은 지성소, 휘장, 제사장의 뜰, 놋단, 제사장이 씻기 위한 놋바다, 번제를 씻기 위한 물두멍, 금등대, 금 등잔, 떡상, 금대접, 기타 기구들이다. 성전 낙성식에도 레위인들의 봉사가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24반차로 나누어서 성전에서 찬양한다. 결과적으로 역대기에서 성전은 여호와께서 계시는 처소인데 에배 드리는 장소이며 자기 백성에게 얼굴을 향하시며 자기 백성의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시는 장소이다.
이상에서 구약의 증거들을 보았을 때 한 성전이 불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이전의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때 하나님의 집도 바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는 질서가 새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 왔을 때 성전 재건의 약속은 종말론적 소망과 결합되어 있다. 특별히 학개서나 스가랴서에서 그런 사상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에스겔서 40장 이하에 나타나는 성전은 구약 역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에스겔서도 메시야적 소망으로 이해한다면 그 성전은 메시야 나라에서 세워질 성전이다. 그랬을 때 그 성전은 메시야 나라에서 세워지는 성전이다. 특별히 스가랴6:12은 그 사실을 약속하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음을 지금 본문의 증거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러면 메시야가 세우는 성전은 어떤 성전인가. 복음서의 말대로 지금 성전은 헐고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이다. 곧 옛 시대 즉 지금 성전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였던 질서는 끝나고 새로운 성전에서 함께 하실 것이다. 메시야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리기 때문이다. 구원의 새 시대는 예수님의 증거와 사역에서 나타난다. 여기서의 예수님의 증거는 너희들의 말처럼 내가 메시야다는 것과 그러나 이 후에는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예수 자신의 증거를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떠한 분인가를 설명함 안에서 새 시대의 특성이 나타난다. 마태복음은 이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되셨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영광이 연결되어 있다. 고난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 오르기 위한 순서이다.(26:12,64)그래서 그의 죽으심에서 온 땅이 진동케되고 죽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이러한 사건은 구약에서 묵시적이며 종말의 사건을 언급하는 내용인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특히 성전과 관계하여 보았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옛 제도의 끝과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을 지시한다. 이것이 새로운 성전의 의미이다. (여전히 옛 성전으로, 옛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새시대를 설명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특징이다-21:13, 27:53)
그러면 예수님이 지으신 것은 선지서에 약속된 성전인가? 그렇지 않다. 선지서에 나타난 성전이 이전 시대보다는 영광스러워도 여전히 휘장으로 가리운 성전이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신 성전은 휘장이 제거된 하늘 성전이다. 왜냐하면 죽으심에서 휘장이 갈라졌고 주님이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왕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성전을 짓는 것과 왕이 연결되어 있다.-메시야에 대한 강조-26:61~64, 27:40~42) 그 권세로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하신다.
마가복음에서는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짓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땅에 속한 성전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성전을 언급한다. 마태복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승천 기사가 있는데 16:13에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올리우신 분이시다. 보좌는 왕적인 강조점이 있지만 구약에서 하늘 보좌는 성소적 의미를 깔고 있다.
참고로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그런 의미들이 나타나다. 스데반이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한 것을 말하면서 그들이 성령을 거스려 예수님을 거절한 사실을 책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 그러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것을 보았다. 이것은 하늘 성소를 본 것이다. 여기서의 대비는 손으로 지은 성전과 그렇지 아니한 하늘 성전 그리고 성령을 거스림과 성령의 충만함이다. 결국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하늘 성소에 예수께서 오를 것을 말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신 분이시다.
히브리서9장에서는 그가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 땅에 속한 시대인 옛 시대는 끝나고 하늘 보좌의 시대인 새 시대가 열렸다. 주님께서 찬송 받을 자의 아들로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2.산상수훈
본 논문에서 산상수훈을 전부 주석을 하지는 않고 산상수훈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한다. 여기서 주장하고자하는 산상수훈은 구약의 도덕법의 정신을 잘지키고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법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언약의 법의 토대에서 읽어져야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언약의 법으로서의 특징과 성격을 밝히겠다. 그 언약적 성격 때문에 다음이 전제되어야한다. 첫째 산상수훈은 언약체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둘째 첫째 이유 때문에 구원 얻는 기준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째 모세 율법의 해석이나 주석이 아니다.
1)언약체결적 성격
산상수훈은 언약체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산상수훈의 구조와 내용 자체에 있다. 그 구조는 십계명과 신명기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그것들의 구조를 살펴 보았는데 전문, 역사적 서언, 계명, 축복과 저주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구조이다.
(1)전문5:1~2
여기 나오는 전문은 출애굽기 20:1(십계명)이나 신1:1~5에 나오는 전문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십계명과 신명기의 유사성을 서로 비교하면서 설명하도록하겠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동일 선상에 두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문학적인 형태와 내용을 보고자하는 것이다. 그래야 산상수훈의 성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마태복음 차체의 증거 안에서 이해 되어야한다. 그 내용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쳐 가라사대 안에서 모세를 능가하며 새시대를 주시는 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계명의 전문과는 그 권위에 있어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십계명 서언에서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로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로 말하고 있다. 십게명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대면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셨고 백성들은 두려워 떨어따.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고 주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대면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십계명을 시내산에 말씀하신것처럼 마태복음도 평지에서 설교한 누가복음과 비교했을 때 의도적으로 산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 산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5장처럼 산에서 말씀하시고 15:29에서는 병자를 치료하시며 높은산에서 영광스럽게 되셨고(17장)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리의 명하신 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산상수훈과 부활하신 후에 있는 내용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산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출애굽기에서 산은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셔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말씀하신 장소이다. 또한 하나님의 산은 시온산,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일컬어진다. 이사야2:2(미4:1~3)의 말대로 하자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며 많은 백성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여호와께서 그 도로 가르칠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이 시온에서 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2:2의 상황은 메시야 나라에서 성취될 일을 나타낸다. 마태가 의도적으로 산에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또한 복음서 전체에서 산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사상이 깔려 있다.
무리를 보시고 앉으셨는데 제자들이 나아왔다. 이것은 마치 구약 시내산에서 백성들은 산 아래 있고 모세가 가까이 가는 것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은 마태복음에 게속해서 흐르고 있다.
신명기의 내용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선포한 장소와 대상, 말씀하신 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의 내용에 있어서다. 구체적인 내용은 뒤에서 설명되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1:6의 내용이다. 모세가 말한 내용이지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이 근본적으로 다른 형식이다. 물론 1:6의 말이 어디 까지 한정하는가를 살펴야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것이 근본 토대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구조가 아니라 그가 입을 열어 가르쳤다. 그가 곧 자기 백성 중에 오셔서 천국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세와 같은 반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문은 산상수훈이 누구의 말씀인가를 단순히 보도하지 않는다. 시내산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 분은 하나님의 권세로 말씀하고 있으며 모세보다 크신 분이시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임마누엘로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 이 아들은 11장의 증거대로하자면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은 상속자이며 아버지의 계시로서 아들이다. 그는 천국을 가져 오는 하나님이시다. 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약처럼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시거나 모세를 대신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친히 자기 백성과 대면해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주님이 세우시는 천국의 특성이다.
(2)역사적 서언5:3~20
역사적 서언은 전문과 함께 언약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이제 나타난 역사적 사실 때문에 언약 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서언도 십계명과 신명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 즉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구약 언약에서 근본적인 역사적 서언은 그들을 애굽의 권세에서 구원하였다는 것과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드린다는 것이었다. 산상수훈은 역사적 서언이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3~15절과 17~18절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권면하는 내용이 그 서언에 상응해서 두부류로 나누어진다. 16절과 19~20절이다.
첫번째 부분은 두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첫번째는 3~12까지이며 두번째 부분은 13~16까지이다. 3~12은 복에 대해서 선언하고 있다. 그 복은 ...을 받는 것에 의해서 나타나는데 중심되는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지금 그 복이 심령이 가난한자....들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천국 백성으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11절 이하에서는 그 대상이 2인칭으로 바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인하여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 지금 복을 받은 백성, 천국의 복에 참여하는 백성을 자기 백성 삼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남은 자들, 긍휼의 하나님과 동행한 신실한 자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데 그 복을 받았다는데 핵심이 있다.
13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은 선언적인 표현이다. 이전에 하나님이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을 자기 소유삼으심을 나타낸 것처럼 이 표현도 너희는 내 백성이다는 말이 전제되어 있다. 13절과 14~16절은 같은 개념이면서도 그 결과에 있어서는 대비된 표현을 가지고 있다. 13절에서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을 전제한뒤 저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저주는 버리움을 받는 것인데 마태복음 문맥에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14~16절에서는 세상의 빛임을 전제한뒤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물론 13절에서 저주의 표현을 쓰고 있어도 곧 권면의 말을 하기 위함이다. 결국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약적인 권면을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권면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천국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20절과 7장에서 확대된 방식으로 나타난다.
두번째 서언 부분은 두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17~18절과 19~20절이다. 17~18은 역사적 서언을 새로운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19~20은 거기에 따른 언약적 권면을 하고 있다. 이 서언은 두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 서언과 21절이하의 연관성 이다. 앞부분과는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지만 상호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하기 위해서 오셨다는데 있다. 여기에서 단지 율법으로 말하지 않고 선지자를 첨가하고 있다. 그렇게함으로 옛 역사를 완성하러 왔다는 것을 말한다. 옛 역사의 완성은 남은자에게 천국을 주심으로, 빛과 소금으로 삼으심으로 완성된다. 그런데도 옛 언약의 완성은 율법의 완성에서 나타난다.
권면의 말에 있어서도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빛과 소금이다는 것은 사60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라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은 20절에서 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와 연결된다.
17~18은 예수님 자신의 오심에 대한 설명으로 설명된다. 17절 말씀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할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에서 설명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18절에 설명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온전케하기 위함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온전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에서 온전케한다, 성취한다는 것은 자주 사용된다.(1:22, 2:15, 17, 23, 4:14, 8:17, 12:17, 13:35, 21:4, 26:54, 56) 마태복음의 특징중의 하나인데 구약 성경의 성취를 언급하는 표현이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께서 옛 약속의 성취자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성취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율법만 언급하지 않고 선지자를 첨가함으로 그가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을 주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지시한다.
그렇다면 18절에 나오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이 말은 천지가 없어지기 까지와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한글 성경은 다 이루리라)에 의하여 한정된다. 이 두가지 한정구는 서로 대응하고 있는데 똑같은 사건을 가르킨다. 17절과 문멕에서 살핀다면 18절은 17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점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기까지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한다는 것과 연관해서 이해해야한다. 율법은 예수님의 성취의 일이 일어나기 까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천지가 없어지기 까지와도 동일한데 구약에서 천지가 없어지는 것은 종말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에 의해서 구약의 약속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17절과 18절에서 말하고 있다.
사2:2에서 말하듯이 구약 개념은 종말에도 율법이 폐하여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율법은 영원하고 여호와는 그 산 시온에서 만민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신다. 그리고 열방은 그 도를 베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말에는 페하여져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 자체의 영원함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경륜 안에서의 성취를 말한다.
그런데 구약 약속의 성취를 율법과 관련해서 말하고 잇다. 그것은 구약 언약의 핵심은 율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해석처럼 세상 끝까지만 율법은 영원하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함이 아니라 온전케하려 함이다. 모세 율법은 새 시대에 합당치 않다. 그것은 폐하여져야한다. 종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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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 론
1. 글쓴 이유와 목적
신약 교회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과 함께한다. 부활하신 주님,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라고 하였은즉 땅위에 내리셨고 죽으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영광스럽게되신 주님의 이해는 땅위의 사역이 필수적이며 거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예수님의 땅위의 사역은 각복음서의 증거가 다르지만 엣 언약의 완성자로서 사역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옛 언약은 모세 언약이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모세 언약이 토대이다. 그리고 그 언약의 핵심은 율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의 성취이다.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율법을 어김없이 다 지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을 지켰으면 주님은 영광스럽게 되지 못하며 여전히 휘장 밖에 있어야된다. 휘장 밖은 저주며 사망이며 죄아래 있는 것이다.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율법이 주지 못한 생명을 주심이다. 율법을 다 지켜서는 그 생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땅위의 사역은 그런 사실을 증거한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죽으시기 전에 증거하신 그 생명을 부활의 생명, 하늘 보좌의 생명, 아버지와 함께 계신 생명으로 완성하였다.
신약 교회는 이 생명의 토대위에 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옛 언약과 대비해서 예수님의 사역과 교회의 생명을 말한다. 이 생명을 여러 서신들이 교회에 증거하며 교회가 이 터 위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도 이 관점에서 기록되었으며 이 빛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구약 성경도 부활하신 주님의 완성의 빛 가운데서 보아야한다.
이 생명의 빛은 진리의 빛이다. 교회는 이 빛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 있지 않다. 휘장 밖의 저주 가운데 있지 않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가 이 빛 가운데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어왔다. 중세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종교 개혁의 칼빈과 루터, 특히 개혁 교회의 토대가 되는 웨스터 민스터 신앙 고백에서도 율법과 의의 문제가 바르게 서 있지 못하였다. 모든 견해들을 다 제시하여야 하겠지만 종교 개혁의 열매이자 개혁 교회의 토대인 웨스터 민스터 신앙 고백서만 살펴 보겠다.
19장은 율법에 관한 것인데 첫째 율법은 의의 완전한 법칙이다. 둘째 의식법, 시민법은 일시적이다. 세째 도덕법은 영원한데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한 순종의 의무이며 반드시 순종해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강화하셨다. 세째 율법은 죄의 본성을 드러내며 그렇게함으로 자신들을 살피어 겸손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의의 필요성을 밝히 보인다.(거듭난 자들에게도 마찬가지)
7장의 언약에 관계된 곳에서 동일한 한 은혜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이 다양한 경륜으로 시행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약 사람들은 구약의 예표들 안에서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온전한 사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완전히 수행하여 완전한 순종을 이룬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구속 사역의 효력과 효험이 시초부터 만대에 계속적으로 약속과 예표들을 통하여 택한 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말한다.
11장 칭의에서는 예수님의 순종과 보속으로 믿는 자들의 모든 빚을 다 갚으셔서 믿는 자들에게 의가 전가된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구약 백성의 칭의도 신약 백성과 다 같은 것으로 이야기한다.
13장 성화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화가 불가능하며, 부패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육과 영의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으로 힘을 얻어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되어 은혜 안에서 자라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율법과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살펴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 구원의 도식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 신앙 고백이라고 말할 수 없고 모세의 제자보다 더한 어둠의 저주 가운데 가두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토대가 이 고백서 안에 있었다. 물론 최근에는 시각의 변화가 나타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도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하는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 논문에서 율법에 대하여 그리고 의에 대하여 성경의 증거를 따라 살펴보고자한다.
2.전개방법
모든 성경의 의미의 토대는 구약 모세 언약에 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이해도 거기에 토대를 두어야한다. 그러므로 먼저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하여 살펴 봄으로 율법에 대한 바른 견해를 살피겠다.(물론 구약 성경도 그리스도의 완성의 빛에서 보아야하기 때문에 단순한 증거 본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의 문맥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이고 구속사적인 해석을 하여야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율법의 문제를 살핌으로 과연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을 지키는 사역인지 아니면 율법을 완성하셔서 새 생명을 주는 것인지를 살피겠다. 바울의 율법관에서도 구원과 칭의가 율법을 지킨 에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으로 주어진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 보겠다.
II. 율법에 대한 근본 이해-구약의 증거
1. 언약의 법
1) 애굽에서의 구원의 목표-소유로 삼으심
우리가 이 사실을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조상들의 약속을 이루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3:7-8, 출6:1-8, 15:17)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소유로 삼으심이다. 곧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삼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6:)초태생을 내게 돌리라는 내용도 그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심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4:22, 11:7)그 일에 있어서 마지막 장자 심판이 결정적 사건이다. 그래서 애굽 장자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초태생은 내게 돌리라고 말한다.(13:)
해석을 하자면 이 두 목적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번째 목적에 한정하겠다. 또한 19:3~4은 언약을 체결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왜냐하면 19:5은 그러므로의 접속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엎어 여호와께로 인도하심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4절에서 강조된 점은 너희이다. 곧 너희가...보았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보았다는 의미는 제 3자의 입장에서 그 사실을 간접 체험하는 정도나 사실을 보도하는 정도가 아니다. 보았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의 체험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였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서 19장 이전에 말했던 구원의 목표인 소유로 삼으리라는 내용과 19장에서 말하는 구원의 일을 보았기 때문에 언약을 체결한다는 것을 일치되게 보아야한다. 또한 우리는 19장에서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신 최종 목적이 내 앞으로에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한다. 곧 시내산 여호와 면전으로 인도하셨다. 여호와 앞으로 인도된 백성이다. 어떻든 여기서 구원의 목표는 소유로 삼으심, 언약 체결이다. 다시말해서 소유로 삼으심과 언약 체결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2) 언약에 참여하는 것은 공로적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짚고 넘어 가야할 문제가 있다. 그러면 언약에 참여하고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킴에 의해서 들어가는 공로적인 것인가. 그 대답은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이다. 율법을 주기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지키리라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 서두에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고 있다. 언약을 지키리라한 백성에게 율법을 주고 있다. 이전 조상들에게는 이러한 법을 주시지 아니햇다. 여호와의 구원을 본 백성, 그래서 여호와를 안 백성들에게 언약의 조건을 제시하며 언약적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먼저 율법을 지킨 백성에게 하나님이 임하신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긍휼과 구원을 본 백성에게, 여호와의 언약을 순종하리라한 백성에게 임하신다.
그렇다면 5절과 6절의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러한 말은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언약 체결에 있어서 항상 복과 저주의 방식으로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십게명과 그리고 출23:20~33, 레26:, 신명기에서 이러한 것들이 등장한다.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면 복을 주고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등식은 출19:5,6에 나오는 내용의 발전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런 복과 저주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복, 거룩한 백성으로서, 열국 중에서 여호와의 소유로서의 복과 저주이다. 특별히 복과 저주의 내용들은 가나안 땅에서의 복과 저주로 나타난다. 이 복은 조상들 때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 주어지는 축복은 이전에 없었던 복을 받는 공로적인 것이 아니라 언약의 복의 지속과 발전이다. 이 복이 충만하게 나타난 시대는 구약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이다. 그리고 저주가 극에 달한 시대는 바벨론 포로의 시대이다. 열왕기서에서는 그 평가를 언약의 법의 지킴과 불순종에 평가 기준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언약을 지키면 이제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언약 백성들에게 언약적 순종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들이 언약을 지키면 그 언약의 복을 장성하게 누릴 것이며 그렇지 아니하면 언약의 복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이다.
3) 율법은 무엇인가
(1) 언약 지킴=율법 행함
율법 지킴이 언약 백성이 되는 공로가 아니라면 과연 율법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은 이 법은 언약의 법이다. 출애굽기 19:5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말씀하셨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언약은 무엇인가. 그리고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명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제히 응답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다 행하리이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아직 그 명하신 것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했다. 그 명하심은 20장에 나타나는 십계명과 21:~23에 나타나는 율례와 법도이다. 그러한 사실을 24:에 나타나는 언약 체결식에서 알 수 있다. 24:3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19:에 있었던 말씀과 동일하다.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은 언약과 동일하다. 곧 율법을 지킴은 언약을 지킴이다.
(2) 율법의 근본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언약이 근본적으로 무엇이가를 살펴야한다. 그래야만 율법의 근본도 밝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앞에서 그 언약은 소유로 삼으심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19장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었는가? 그렇지 않다. 4:22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 내 장자로 말한다. 3;에서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말하며 내 백성의 우고를 들었다고 말한다. 5:1,8:1,20,9:1,13,10:3,에서도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은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5;3과 7:16,9:1,13,10:3에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로 말한다. 바로는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말한다.(8:25,10:8)모세와 아론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린다고 말한다.(8:26)유월절 규례에서 초태생은 다 여호와의 것이다(13:11~16)홍해 심판 후 노래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구원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며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 주의 사신 백성으로 표현한다. (15:) 15:26에서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한다. 16:12에서도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그분이 너희 하나님 이시다. 18:1에서도 모세의 장인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들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위하셨다.(18:8)여호와는 이스라엘 중에 계신다.
또한 십계명을 주시는 상황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20:2에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을 살펴 보자. 여기서 하나님 자신을 말하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있다.
그러면 이전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였는데 시내산 언약에서 소유로 삼는 다는 의미의차이점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그래야만 율법의 의미도 나타난다. 그 차이점은 19장 이하의 내용에 있다. 우리가 모세 오경을 한 책으로 보았을 때 출애굽기19:~민10:까지가 그 특징이다. 이 본문은 모두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규례와 율례들인데 시내산 언약의 특징이 이 부분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삼으심의 특징이다. 그 특징은 하나님이 성막을 짓고 함께 거하심,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그 상에서 먹으며, 하나님이 거룩하니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며, 여호와의 성막을 호위하고 봉사하며 동행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 즉 모세 언약의 특징인데 이전에는 주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안에 그 언약의 특징이 나타난다. 그러니 언약의 내용은 소유로 삼으심인데 그 내용은 율법이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언약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만고불변한 의의 표준과 도덕적 표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성막에 계신 하나님과 거룩의 삶으로 함께하는 언약의 법이다.
(4) 무엇이 언약의 법인가?(율법의 구분)
앞에서 율법을 언약의 내용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무엇이 언약의 법인가? 십계명과 다른 계명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러한 관계를 살펴보겠다.
a) 십계명
십계명은 언약 체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가지점에서 다른 계명과 다르다.
첫째는 계시의 방식이다. 우리는 20장의 계시의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19장과 20장의 문학적인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5의 내용은 여호와게서 이스라엘 백성의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하실 것이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강림하심의 전제는 우리가 살펴 보았던 언약 체결 때문이다. 강림하시는 이유는9절 때문이다. 9절에서는 모세에게 임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임하시는 이유는 모세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모세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다. 그리고 나서 백성들을 3일 동안 성결케하고 있다.
16~19절은 여호와께서 빽빽한 구름과 나팔 소리와 불 가운데서 강림하신 내용과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신 내용이다.
20~25절은 다시 모세를 부르시고 백성들이 성결케하고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명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19절과 20절 이하는 내용상으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절 이하의 내용은 내용상 첨가되어 있는 인상이 있다. 그 이유는 20절에서 여호와께서 강림하신 내용을 다시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25절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고한 내용은 21~24절의 내용이지 20장의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20장이 19절과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 순리롭다.
또한 십계명 단락을 구성하는 20:1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포를 확증하는 구조이다. 20:2에서 너와 나의 관계 는 직접 대면하는 관계를 나타낸다. 그 이하의 계명도 대상이 2인칭으로 되어 있다.(하나님과의 대면의 관계를 나타낼 때는 2인칭으로 서술하고 그외는 3인칭으로 서술한다.) 그래서 20:18이하에서 백성들이 두려워 떨며 모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로 말하였다. 20:22에서도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라고 말하고 잇다. 신5:22에서도 여호와께서 산위 불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총회에 이르셨다고 되어 있다.
이상의 결론으로 십계명은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는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계시하신 방식이다.
계시의 형식에 있어서는 언약체결의 형식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국가간의 종주권 조약 형식으로 이해한다.(전문, 역사적 서언, 계명, 언약 문서 낭독, 증인, 축복과 저주, 맹세의 형식-성경에서 이런 언약 체결 형식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아담, 아브라함, 다윗 언약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나타난다) 물론 십계명에서 그 형식을 모두 채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십계명 자체의 계약 형식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십계명에서는 전문, 역사적 서언, 게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문-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역사적 서언-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19:4~5의 언약 체결의 서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같은 구조이다.)
*계명-20:4~17
축복과 저주에 대한 문제는 19:5,6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언약 즉 명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리라한 백성에게 임하셔서 말씀하신 언약의 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2,3,5계명에 반영되어 있다.
위의 두가지 내용으로 인해서 십게명의 독특성을 알아 보았다. 그 특성은 십게명이 언약의 법인데 언약 그 자체를 표현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소위 모법, 헌법으로 보아야한다. 즉 근본적 언약 관계, 다시 말해서 너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는 것을 선언하며 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법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십계명만 언약의 법인가? 다른 계명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b) 출20:22~23:
먼저 십계명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법을 살펴 보자. 그것은 출20:22~23의 내용이다. 이것은 24장에서 모든 율례로 언약서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이 부분의 계명도 언약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그 형식과 내용을 살피면 언약 체결 구조와 같다.
*출20:22은 역사적인 서언으로 볼 수 있다. 그 서언은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이다. 역사적 서언에서 이 법을 특성을 알 수가 있다. 즉 시내산에서 십계명 선포를 보았기 때문에 계명의 말씀을 주고 있다. 십계명의 근거 때문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십계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에서 나타난 언약 관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다른 신상을 만들면 안되며 여러 규례를 지켜야한다.
*계명에 대한 내용은 십계명에 나타난 내용과 상응한다. (20:23~23:19)
*경고와 약속이 주어져 있다.(23:20~30)
그리고 나서 24장에서 언약을 체결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은
*언약 문서를 낭독
*맹세
*언약 체결식
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가지는 19장~24장을 하나의 언약 체결 장면으로 보는 것이다.
*역사적 서언-19장:애굽에서의 구원과 여호와의 강림
*계명
-십계명-20:1~17:하나님의 이 모든 말씀, 직접 계시-헌법
-모세를 중보자로 세움-20:18~21
-모든 율례-20:23~23:1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순종에 대한 경고와 약속-23:20~30
*언약서 낭독:여호와의 모든 말씀(십계명)과 모든 율례
*맹세
*언약체결식
그렇다면 그 이하의 계명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c)레위기
먼저 레위기를 살펴보자. 레위기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언약의 법과 차이점과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
레위기는 출애굽기24장에서 언약 체결식에 사용된 십게명과 율례들과는 차이가 있다. 첫째는 언약 체결식에 등장하는 법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격상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 제도를 살펴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성막예 계신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고 성결의 삶을 사는 것과 관게되기 때문이다.
성막은 언약의 법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명령했는데 그 돌판을 주기 전에 성막 식양에 대해 주된 내용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성소는 하나님이 언약의 법인 돌판을 두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회막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성막에 거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는 것으로 말하고 애굽 땅에서 구원한 목표도 그렇게 말한다.(출29:45~46) 그러므로 구원의 목표와 언약 체결과 회막에 거하는 것은 일치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언약 체결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언약 체결의 목표이자 내용이다.
그러므로 레위기도 그러한 성격으로 이해되어야한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성막과 관계된 법으로, 성막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인데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백성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사는 백성이다. 그들이 레위기의 법을 지키면 그들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또한 성결의 삶을 사는 언약의 복을 누린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은 성소에 속한 거룩이다. 왜냐하면 정결의 모든 토대는 제사장의 성결과 성소의 정결이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점:언약의 법-
1:1을 보면 이제 더이상 여호와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지 않는다.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말씀하신다.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하였던 영광으로 회막 중에 거하시기 때문이다.(출40:34) 이제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규례를 말씀하시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이 규례인 것은 다음의 이유에서 이다.
첫째는 1;1,2의 내용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는 말은 출애굽기20:22부터 전형적으로 율법을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두번째는 레위기의 반복되는 어구인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어구이다.(11:44,45, 19:2, 20:7,8,26, 21:8,15,22,23, 22:2,32,33)이 말은 두가지 점에서 언약적 성결을 요구하는 말이다. 첫째는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는 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언약 백성이라는 말이다.(출애굽기19장과 20장 참조)두번째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점이다. 이 말은 첫번째의 근거 때문에 명령하는 말이다.
세째는 레위기 27:34에서 이상은 여호와게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네째 26장은 레위기의 결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출애굽기 23장에 상응하는 전형적인 축복과 저주의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d)신명기 율법
신명기 율법은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과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차이가 난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행한 설교의 말씀인데 가나안 땅에서 행할 규레와 법도이다. 그런 역사적인 사실에서 차이가 나며, 내용에 있어서도 가나안 땅의 삶에 조절되어 있다. 신명기 율법서도 시내산에서 체결한 언약의 법은 아니다. 그러나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언약적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29장 모압 땅에서 세운 언약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롭다. 그리고 이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의 말씀도 언약궤 옆에 보관하며 면제년 초막절에 성전에서 낭독하여 이스라엘로 듣게하고 지켜 행하게해야한다.
-형식-
신명기의 형식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겟으나 모세의 설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설교는 언약 체결의 형식을 따라 배열되어 잇다.
*서언1:1~5
히브리어 성경은 말씀들이니라로 시작한다. 즉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다. 그리고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역사적 서문1:6~4:43
지금까지의 역사적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며, 가나안 땅에서도 이 하나님만 의뢰하고 섬기는 것이 그들의 복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이유는 여호와의 규레와 법도를 준행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권면의 전제 조건과 토대를 이룬다.
*율법4:44~26:19
율법 선포의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잇다. 이 구분은 출애굽기19:~24:과 구조상 일치를 이룬다. 구조가 일치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가나안 땅의 삶의 법으로 조절되어 있으며 권면의 내용들이 많이 덧 붙여져 있다.
첫째 십계명 부분이다(5:5~5:21)
둘째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는 단락이다(5:22~11:32)
세째 가나안 땅에서 평생에 행할 규례와 법도(12:~26:)
*축복과 저주27:1~30:20
축복과 저주27:~28:
언약체결식29:
언약의 유효성30:~34:
e)결론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십계명과 다른 계명들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약의 두 돌판으로 언약궤 안에 보관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계명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 등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오히려 모세 오경의 특성과 계시 방식, 그리고 계명의 성격을 따라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실지로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으로 분류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도덕법은 영원하고 의식법과 시민법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그 언약의 법의 특징에 따라서 출애굽기 언약 율법, 레위기 언약 율법, 신명기 언약 율법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출애굽기 언약 율법이 시내산 언약 체결의 율법으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십계명은 더 독특하다. 레위기 언약 법은 성막에 나아감으로 언약을 누림에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신명기 언약 법은 그 구조에 있어서 출애굽기 언약과 일치하는데 율법의 내용과 축복과 저주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언약서의 해설처럼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땅에서 행할 구체적인 법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언약의 법의 근본 토대는 출애굽기 언약 율법이다. 그 중에서 토대는 십계명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헌법으로 이해하고 그 이하는 그 시행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출애굽기 언약 법과 신명기 언약 법은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구조와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이다. 구조와 내용은 살펴 보았다. 목적은 언약 체결의 목적이다. 출애굽기는 근본적인 시내산 언약의 법이고 출애굽기는 모압 평지에서 세운 언약 체결 즉 갱신의 법이다. 레위기 언약법은 오히려 그 언약의 법에 덧붙여진 법이다.
결론적으로 근본적인 언약 관계는 십계명에 있고 그 언약 관계에 토대를 둔 시행령은 여러 율례들이다. 그것이 출애굽기나 신명기에서 나타난 형태들이다. 그리고 레위기는 그 언약 관계의 복을 누리는데 있는데, 그 복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며 거룩으로 동행하는 복이다.
2.율법은 지킬 수 없는가?
지금까지 율법은 죄 때문에 지킬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메시야를 소망하는 식으로 이해를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율법 자체가 그들의 언약의 내용이며 복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의 소유삼으심을 누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법을 지키기 쉽다.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하심으로, 시내산에서 친히 말씀하심으로, 성막에 거처를 두고 함께 하심으로, 모든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신실히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 관계를 나타내며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지키기 쉽다. 소유된 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능력이며 율법을 소유한 자체가 능력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면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율버이 그 관계를 나타내며, 언약적 순종을 나타낸다.
1)신30:11~14
이 단락의 구조를 먼저 살펴 보자. 11절과 14절은 주제적인 말이며 12절과 13절은 11절과 14절의 근거를 제시한다. 11절에서 어려운 것도 아니며 먼 것도 아니다는 말은 14절에서 심히 가까와 행할 수 있다는 말로 발전한다. 율법의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며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다. 말씀이 심히 가까와서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행할 수가 있다. 즉 이 말은 신약의 용어대로 하자면 거듭남의 말씀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들었든지 모세를 통하여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언적인 말이 아니다. 물론 10절까지 그들이 범죄하고 돌이키면 언약을 회복시킬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11절부터 다시 권면의 말을 시작한다. 그 특징은 오늘날에 특징이 있다. 신명기에서 오늘날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 언약 지킴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미래에서 지키거나 지켜질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이다.
2)신명기 역사서
신명기 역사서는 여호수아~열왕기하까지이다.(여기서는 왜 이 역사서들이 신명기적인지는 논하지 않겠다) 이 역사서의 사관은 신명기 사관이다. 곧 언약의 법인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저주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역사적 사실에 내포되어 있다.
이 역사서는 다윗을 중심으로 나눌 수가 있다. 다윗 이전 역사는 다윗 왕을 목표로 진행되며 이후 역사는 다윗의 길로 갔는지 아니 갔는지로 왕들의 역사를 평가한다. 다윗 이전 역사는 다윗을 목표로하는데 두가지 점에서이다. 하나는 율법의 온전한 시행이다.(삿17:6, 18:1, 21:25)또 한가지는 여호와를 의뢰하고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는 왕국의 나타남이다. 사울은 그 길에 있어서 여호와께 범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자이다. 물론 다윗이 범죄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를 의뢰하였고 용서함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신명기에서도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면 그들에게는 사망이다. 그 사망은 이방 백성에게 끌려감이다. 그러나 죄를 돌이키고 율법을 지키면 돌이키실 것이고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말씀하셧다. 다윗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범하였는데 그것은 율법으로하면 죽음을 당하여야한다.(마치 율법을 범하면 잇라엘이 이방 땅으로 좇겨나야 하듯이) 그러나 그가 여호와를 의뢰하였고 회개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돌이키시고 복을 주셨다. 즉 언약을 지키는 것은 계명으로서 율례를 말하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까지 포함한다. 왜냐하면 신명기 언약서 자체가 그렇게 언약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노래에서 이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중심되는 내용은 환난 중에서도 여호와께 아뢰며 의뢰한 내용과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함으로 모든 대적과 원수로 부터 구원한 이야기이다. 분명히 다윗은 여호와의 율레를 범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래에서 그는 여호와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된 고백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행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뢰하고 회개하고 여호와의 율레와 규례를 지키는 자를 돌이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순종 때문에 열국이 복종하고 열방의 보화가 그 왕국에 들어 오도록했다. 그리고 율법지킴 즉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 때문에 그 후손에게 여호와께서 인자를 베푸심이 영원하다. 그러므로 다윗 이후의 왕들은 다윗의 길로 갔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로 평가한다. 다윗의 길을 따른 자들은 율법을 순종하고 지킨 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에서도 알 수 있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를 순종치 아니하고 이방신을 섬기고 여호와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것이다. 곧 그들은 다윗의 길로 걷지 아니함으로 멸망한 것이다.(왕하17장)
시편119편에서 저자는 율법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주의 증거를 지켰고 그 증거를 지극히 사랑하였다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켜 그의 모든 행위가 여호와 앞에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율법은 그들이 지키기 쉬우며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여 멸망한 이유는 온전히 여호와를 의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지 율법 지킬 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서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 되심으로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멸망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으며, 회개하고 돌이켜야한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약의 복으로 복주신다.
3.구약에서 율법의 평가
1)지혜
지혜와 율법 사이의 관계는 신명기 4:6에서 먼저 나온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레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명기서에서는 율법이 지혜 자체이다.
솔로몬은 열왕기서에서 지혜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9) 그리고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다. 그 지혜는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이다.(3:) 이 지혜는 여호와의 율법을 가까이 두고 판결하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동양 모든 사람들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모든 민족 중에서,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헤를 들으러 왔다.이것은 신명기 4: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며 다윗과 솔로몬은 신명기 역사서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지혜 문학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으로 이야기한다.(잠1:17, 9:10, 15:37, 욥28:28) 신명기서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모든 율법 준수의 토대이며 율법을 지킴이 하나님을 경외함이다.(신4:10, 6:2, 13, 24, 8:6, 10:12, 20, 13:4, 14:23, 17:19, 28:58, 31:12, 13)
율법을 행하는 복과 저주와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에게 있는 복과 저주의 형태는 언약 율법과 잠언서 전반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고 그렇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다는 말이다.
들으라는 권면 형태는 신명기(5:1, 6:4, 9:1, 20:3)와 잠언(1:8, 4:1, 10, 5:7, 7:24, 23:19)의 유사한 권면 형태이다.
시편의 지혜시(시1:, 36:, 37:, 49:, 73:, 112:, 127, 128들에서도 율법과 지혜를 일치시키는 사상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여기 있는 시들이 전적으로 지혜 자체를 찬양하는 시들은 아니다. 그 내용상 교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지헤 문학에 가깝기 때문이다. 교훈과 권면을 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시편 1편을 대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시로 이해되며 지혜시로 구분했을 때 그 특징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 악인은 그 반대의 사람이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의인이다. 이 두 대비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로 나타난다. 복있는 사람은 그 행사가 형통한다.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나튼 겨와 같고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이 대비는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것과 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나는 사상들은 언약의 법으로서 율법의 사상을 담고 있다. 특히 율법을 행하면 복이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가 있는 것은 전형적인 신명기적 사상이다.
시편112편은 시현 1편과 서로 상응한다.이 시편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악인은 소멸될 것이다.
시편 37:30~31에서는 지혜와 율법에 대한 동일성이 나타난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결국 율법은 이스라엘의 지혜이며 복이다. 율법을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며 모든 환난 중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그들이 번성해도 필경은 멸망할 것이다.
2)율법찬가
(1)시19
시편 19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6은 하늘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고 7~13은 율법이 나타내는 여호와의 영광을 말한다. 이 부분은 서로 상응한다.
이 시편에서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규레는 같은 말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지혜롭게하고, 마음을 기쁘게하고, 눈을 밝헤하고,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확실하여 의롭고, 꿀과 송이끌보다 더 달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평가도 같은 말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경계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다.
12절 이하에서는 정결함을 구하고 있다. 이렇게 간구할 수 있는 것은 7~11에서 말했던 여호와의 율법과 그 기능 때문이다.
(2)시119
시편 119편은 알파벳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여덟절이 한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한 연을 이룬다. 이 시편의 내용은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율법이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율법 지킴에 대한 간구이다. 둘째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키는 지혜의 시이다 세째 원수로부터 구원을 간구하는 노래의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단락에 혼합되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시편 저자의 상황은 그가 환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주의 구원을 간구한다. 그런데 그 간구의 토대는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지킴에 있다.(신명기 사상-언약의 말씀을 지키면 원수의 손으로부터 구원)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것이 모든 절에 나타난다. 그것은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율법, 법, 증거, 법도, 율례, 계명, 판단, 규례, 도와 같은 말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84, 121, 122, 132절 제외)
여기서는 이 시편 저자가 율법을 어떻게 평가하였는가만 살펴 보고자한다.
나의 즐거움이요 모사이다(24)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다(38)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됩니다(92)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함으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98)주의 말씀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끌보다 더하니이다.(103)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주의 증거가 기이하니이다(129)주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138)주의 말씀이 심피 정미함으로 주의 조이 이를 사랑하나이다(150)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1420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폈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143)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144)여호와여 주게서 가가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151)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레가 영원하리이다(160)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172)
3)결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율법은 언약의 법이다. 신약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평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 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의의 길이며 복음이며 생명의 능력과 거룩의 능력과 성화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지키기 힘드는 무거운 짐이나 저주가 아니다. 이 법은 그들에게 복의 근원이며 그들은 이 법을 지킬 수 있고 지켜야한다. 지킴으로 언약의 복을 누리며 산다.
4.율법과 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율법 지킴이 그들의 의이다. 신6:25, 신24:13에서는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모든 명령을 여호와 앞에서 지키면 그것이 그들의 의로움이라고 말한다.
신6: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 시1:, 시38 에 나타나는데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즉 지키는 자는 의로운 자이며 복있는 자이다. 그의 길은 형통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시24:5에서도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거룩한 곳에 서는 자들이며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사46:12은 마음이 완악한 자들을 의에서 떠난 자들로 말하며, 사51:7에서는 의를 아는 자들을 여호와의 율법이 마음에 있는 자들로 언급한다.
겔18:5~9에서도 여호와의 율례를 좇으며 규레를 신실히 행하는 자는 의인이라고 말한다.
레18:5에서는 율법을 지키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한다. 레위기에서 율법을 지키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을 나타내고 그 거룩에 참여하는 삶이다. 레위기에서는 율법 안에 사는 것을 저주로 말하지 않는다. 율법 안에 사는 것은 성막에 계신 여호와의 거룩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하는 삶이요 복이다.
5.율법과 이방인
1)거룩한 장벽
구약 시대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공간과 시간과 사람의 거룩한 구분이 있다. 이 거룩의 구분은 성소와 관련된 구분이다. 즉 성소에 속한 것은 거룩하다. 특별히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거룩의 구분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군대로 계수와 진배치, 행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군대로 계수한 의미와 진배치에 대한 것은 레위인의 구별에서 잘 알 수가 있다. 레위 지파는 성막 봉사를 위하여 구별된다. 일반 백성은 군대로 계수되어도 그 일을 담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다.(민3:13)그들은 제사장 아론에게 온전리 돌리운 자들로 아론 앞에서 시무하는 자들이다.(3:5~10) 그리고 레위 지파는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붕에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해야한다.(1:47~54)왜냐하면 그 처소는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도 이 본을 따라 회막 사면에 진을 친다. 그리고 그 진은 거룩하다. 그러므로 민5장에 규정된대로 부정한 자는 진 밖으로 나가야한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 그 직무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성소의 직무를 지키며 다른 사람이 가까이 하면 죽여야한다. 그들의 진은 장막 앞 동편 곧 해 돋는 편에 진을 친다.(민3:38,39) 레위 지파의 진보다는 성막에 더 가까이 있고 거룩하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린 고라당이 죽임을 당하였다. 고라당의 말처럼 회중이 다 거룩하고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계신다. 그러나 여호와께 속한자 즉 거룩한자의 구분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열국의 장자요 제사장 백성이다. 그러나 레위 지파만 성막의 기구를 봉사한다. 제사장만 성막에서 봉사한다. 대제사장만 휘장 안에 일년에 한번 들어간다.
그리고 날의 질서에서도 안식일이 있고 성회로 모이는 날들이 구분되어 있다. 공간의 질서에서도 온 땅을 하나님이 성소로 지었어도 가나안 땅만 하나님의 성소요, 성전만 하나님의 성소요, 그중에서 지성소는 거룩한 처소이다.
왜 구약은 이러한 구분이 있는가? 그것은 근본적인 구분의 벽이 휘장이기 때문이다. 휘장은 지성소와 외소를 구분하는 장이다. 지성소는 법궤 위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 외소는 제사장이 봉사하며 섬기는 장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한 장막에 있어도 하나님과의 거룩의 간격이 있다. 물론 1년에 일차 나가지만 금식하고 나가며 향연으로 가리우고 나가야한다. (레16:)
2)이방인의 구원
위에서 살펴 본 거룩의 장벽 때문에 이방인은 근본적으로 죄의 백성이며 부정한 백성이다. 왜냐하면 모세 언약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 언약에서 주는 구원이 없는 백성이다. 그들이 이 언약에 참여할려면 할례를 받아야하며 언약의 법을 지켜야한다. (창17:출12:48) 그러나 모두 언약의 백성으로 들어 오는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 족속은 진멸해야한다. 신23장에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오지 못할 자들을 언급하고 잇다.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자는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사생자도 여호와의 총회에 십대까지라도 들어오지 못한다.(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모두)모압과 암몬 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다른 족속은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있다.
종말론적인 이방인의 구원을 언급할 때도 이러한 사상이 전제된다. 이사야56:6~8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산에 나아가며 하나님이 그들의 예물을 받으실 것을 말한다. 스가랴서에서는 이방 백성들이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초막절을 지키지 아니하면 재앙이 있을 것이다.
6.새계명(구약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
구약은 신학적 자료를 위한 단순한 증거 본문이 아니다. 이제는 구약을 하늘 보좌의 질서로 완성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책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이 있어야한다.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은 결국 새계명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것이 구약 율법에 대한 연속성이된다. 그러나 그 연속성은 불연속성이 필연적으로 전제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야 옛 언약의 법인데도 옛 언약의 법이 아닌 새계명, 새언약의 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논문의 구조와 조직성 때문에 V장에서 언급하도록하겠다.
III.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
1.성전
성전에 관계된 내용을 먼저 살피고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성전이 옛 언약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체결의 목표는 그들과 함께 거하심이다. 둘째는 복음서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그 위치는 공관복음(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이유에 관계되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성전을 정결케한 기사를 그 주제에 맞게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 배열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먼저 성전에 관계된 기사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순리롭다고 생각한다.
1)요한복음에서의 성전 청결과 새로 짓는 의미
요한복음에서는 이 기사가 예수님 사역 초기에 배열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의 특성 때문이다.
먼저 요한복음의 기록 이유를 살펴 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태초에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여기서 거하신다는 것은 이전에 성막과 성전에 거하신 것처럼 우리 중에 거하심을 말한다. 그러나 구약때 처럼 구름 중에, 모세 율법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다. 그 영광은 세상에 아버지를 나타내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아들에 대해 증거하는데 새로운 거처를 우리 중에 두시는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면 자기 백성을 위해서 거처를 예비할 것이며 오셔서 함께 하실 것이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표적을 통해서 증거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를 때 부터 더 큰일(표적)을 보이리라했는데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가나안 땅의 성소가 아니라 인자로 말미암는 새로운 성전을 말한다. 그래서 그 후에 있는 더 큰일들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한다.
성전을 청결케하고 새로 짓겠다는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성전에서 소와 양을 파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정당한 것이었다. 공관복음에 비해서 요한복음은 더군다나 과격한 표현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거짓된 행위가 전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초점이 아니다. 여기서의 초점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유대인들이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 청결의 기사는 19절 이하의 내용 안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예수님게서 성전을 청결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여기서 가져 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였다. 이 인용구절은 시69:을 인용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예수님의 죽음에만 관련시키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한 이유로 핍박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일체 보도하지 않는다.(그것이 암시 될 수도 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며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신다고 말함으로 유대인의 핍박을암시하기 때문이다-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음)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심으로 새로운 성전을 자기 육체로 지으신다. 그는 그 일에 있어서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옛 성전과 예배 질서는 끝났다. 그는 새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옛성전을 청결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죽을 것이며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새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래서 에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하는 것은 단순히 옛 예배를 개혁하는 정도가 아니다. 구약 때처럼 휘장으로 가리운 영광의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거처를 함께 두시는 새로운 성전, 만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의 거처를 짓는 것이다.
2)공관복음에서의 성전 청결 의미
공관복음에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서로 차이가 있게 기록이 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순서가 에루살렘 입성 뒤에 바로 성전청결의 기사가 있다. 마가복음은 입성 뒤에 바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틀 뒤에 베다니에서 돌아 온 뒤에 일어난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앞서 있다. 아마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의 배교 상황과 그로 인한 심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성 뒤에 바로 위치시킨듯하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마가복음에는 첫째는 병든자를 치료한 기사가 없다. 둘째는 어린아이들의 찬양이 없다. 세째는 성전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는 말을 듣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멸할려고 꾀하였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이 그의 교훈을 듣고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는 내용이 있다.
또 한가지 차이점은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묻는다.(마21:23) 그러나 마가복음은 성전을 청결케한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묻는다.(막11:27) 그리고 그 이하의 예수님의 가르침 내용도 마태복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고 심판하리라는 내용이 더 조직적이며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고 마가복음도 그것을 전제하지만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예수님이 권세 있다는 것을 아울러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설명하도록하겠다.
공관복음은 요한복음처럼 성전을 청결케하는 일이 성전을 새로 짓는 것과 상관이 없다. 21장에 나오는 기사에서는 성전을 새로 짓겠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전을 청결케하는 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그 문맥을 살펴 보도록하겠다. 21장부터 25장은 한 단락이다.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거절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심판과 그로 인한 예루살렘의 심판 그리고 그때 즉 세상 끝에 교회가 믿음으로 깨어 있을 것에 대한 권면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4장에서 옛 백성의 배교에 대한 심판이 절정에 이르며 종말의 주님의 심판과 믿는 자들의 권면이 연결된다. 교회도 행함에서 이 주님을 거절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1장은 23:37이하와 짝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21장은 공생애에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을 말하며 24:39은 주님 재림할 때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찬양의 내용을 일치시켜서 한세트를 이루게한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왕으로 입성한 주님을 거절한 그들은 주님이 다시 왕으로 오시기 까지 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전 청결 사건도 이해가 되어야한다. 23장과 24장에서는 성전 청결이 문제가 아니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허물어 질 것을 말한다. 즉 배교에 대한 심판의 문맥에서 이해해야한다.
성전 청결의 앞뒤 문맥에서도 그러한 사실이 주가 된다.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왕을 무리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로 찬양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들어가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것은 2:3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메시야로 거절하는 것이 전제된 소동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찬양하지만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거절한다. 그래서 17절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유하셧다.
그것을 18절 이하의 내용에서도 알 수가 있다. 18절 이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내용이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호9:10)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선지자적인 관점(미7:1, 렘8:13)에서 이스라엘이 에수님을 거절한 것을 나타낸다. 성전 청결 기사는 이 두 사이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성전 청결도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이런 문맥의 정황으로 여기서 성전청결은 요한복음처럼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의미가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더 자세히 살펴 보고자한다.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선지서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하나는 예레미야서를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서 56:7의 인용 내용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내용이다. 이사야서의 문맥은 여호와의 안식일과 언약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물과 기도를 드릴 것이라는 내용이다. 마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대로 인용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하기 때문에 생랴된 듯하다. 예레미야의 7:11내용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인데 개작해서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로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 7:11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괴하고 배교하면서 성소에 출입하는 자들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이사야서의 인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서의 인용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전 청결케 한뒤로 언급한 말이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는 말이 강조점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청결 기사도 그들의 잘못된 행위나 예배에 대한 것에 대한 책망이 강조점이 아니다. 예레미야 때에는 여호와의 언약을 거절함으로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고 훼방하는 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인 자기 자신을 거절함을 인해서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소에서 행하는 것이 합법하더라도 도적의 행위이며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아들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 시대를 전제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단순한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로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선지자가 약속했던 여호와의 종, 메시야로서 그 일을 행하고 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성전 자체를 훼방하지 못하였다. 또한 성전을 파괴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인용을 말씀함을 통해서 새 시대가 전제됨을 알 수 있다. 구약처럼 제사장과 서기관만 온전한 자만 어른만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치셨고 성전에서 어린아이들의 찬송을 합당케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상하고 분하게 여겼다. 이들의 분함은 옛 방식으로는 당연할지 몰라도(구약 때는 불구자나 어린아이들은 성전에서 찬양하지 못함-레위 지파가 찬양)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거절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기사는 메시야에 의해서 성전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말이 성취될 것인데 예루살렘은 이 메시야를 거절한다. 이 거절 때문에 그들의 제사 행위는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배교 행위이다. 그래서 주님이 성전을 청결케하고 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그 일을 행하고 있으며 모세 율법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그들의 심판을 상징한다.
3)공관복음에서의 성전 재건의 의미
공관복음에서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내용은 성전 청결의 내용과 함께 있지 않다.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에만 나타나는데 모두 예수께서 공회 앞에서 심문 받을 때 나온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았다. 그러나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은 두 사람의 증인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의 증거가 일치하기 때문에 그 증거는 참되다.(신17:6) 그러므로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지을 수 있다한 것은 참 증거이다. 이 증거를 말하였으나 예수님은 잠잠하였다. 결국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죽음의 판결을 받는다. 이 증거로 인해서 대제사장인 에수께 묻기를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말하였다. 성전을 헐고 짓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27:40참조) 그 증거 때문에 맹세로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ㅇ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시인하였다. 이에 대해 대제사장이 참람하게 여겼고 더이상 증인을 요구하지 아니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고자하는 것은 성전을 새로 짓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어떻든 여기서 볼수 있는 것은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성전을 짓는 분이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때도 성전을 짓는 시기는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기에서 지어진다. 성전의 의미는 구약 성경에서 4부분에서 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서 성전 건립의 의미를 살펴 보겠다. 포로 후의 성전이 물론 더 영광스럽다고 하지만은 새로운 식양으로 지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에스겔 성전은 새로운 식양이 제시되고 있지만 구약 역사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포로후의 성전 문제도 학개나 스가랴, 에스겔의 문맥에 따라 그 의미들을 밝혀야한다.
출애굽 시대 때 성막이 이스라엘 성전의 모든 토대가 된다. 그때 처음 하나님의 거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평강을 허락하셨을 때 성전을 짓는다. 물론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보도하는 바가 차이는 있지만 출애굽 시대의 성막과 규모와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열왕기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전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셔서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게 하신 분이시다. (왕상5:)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를 위함인데 여호와의 거처로서 지음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거하심은 언약궤 안에서 거하심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전은 출애굽기 성막처럼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는 처소이다. 이전에는 움직이는 장막 가운데, 임시 처소에 있었지만 이스라엘에게 평강을 주시고 자기 궁전을 짓고 거하신다. 그래서 언약궤를 그 전에 놓았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고 아무도 능히 섬기지 못하였다. 또한 이 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죄를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회개하고 기도하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을 돌이킬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거기 있으며 여호와의 눈과 마음이 항상 거기 있다. 그러나 조건이 있는데 여호와의 율법을 순종하면 복을 줄 것인데 그렇지 아니하면 이 전도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 전의 건축에 있어서 역대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두가지 점에서 특징이 있다. 첫째는 묘사가 전반적 집과 기구들을 만드는 것에 대한 묘사로 되어 잇다는 것이다. 둘째는 솔로몬 궁전 건축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솔로몬 궁 건축을 중심으로 앞에는 여호와의 집을 짓는 내용이며 뒤에는 전의 기구들을 만드는 내용이다. 솔로몬 궁은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처럼 지었다.(왕상7;11) 그리고 그 궁에는 재판하는 보좌의 낭실이 있다.(7:7) 이 장소는 단순한 국정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시행하고 집행하는 곳이다. 결과적으로 ==열왕기서에서 성전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고 거하시는 여호와의 집이며 궁전이다.
역대기서에서 성전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그 장소는 모리아산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곳이며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나타나 성전 장소로 정한 곳이다. 성전에 대한 묘사는 열왕기처럼 집짓듯이 전반적인 묘사가 아니라 제사 의식과 관계된 곳이 강조되어 있다. 중심되는 언급은 지성소, 휘장, 제사장의 뜰, 놋단, 제사장이 씻기 위한 놋바다, 번제를 씻기 위한 물두멍, 금등대, 금 등잔, 떡상, 금대접, 기타 기구들이다. 성전 낙성식에도 레위인들의 봉사가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24반차로 나누어서 성전에서 찬양한다. 결과적으로 역대기에서 성전은 여호와께서 계시는 처소인데 에배 드리는 장소이며 자기 백성에게 얼굴을 향하시며 자기 백성의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시는 장소이다.
이상에서 구약의 증거들을 보았을 때 한 성전이 불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이전의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때 하나님의 집도 바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는 질서가 새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 왔을 때 성전 재건의 약속은 종말론적 소망과 결합되어 있다. 특별히 학개서나 스가랴서에서 그런 사상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에스겔서 40장 이하에 나타나는 성전은 구약 역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에스겔서도 메시야적 소망으로 이해한다면 그 성전은 메시야 나라에서 세워질 성전이다. 그랬을 때 그 성전은 메시야 나라에서 세워지는 성전이다. 특별히 스가랴6:12은 그 사실을 약속하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음을 지금 본문의 증거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러면 메시야가 세우는 성전은 어떤 성전인가. 복음서의 말대로 지금 성전은 헐고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이다. 곧 옛 시대 즉 지금 성전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였던 질서는 끝나고 새로운 성전에서 함께 하실 것이다. 메시야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리기 때문이다. 구원의 새 시대는 예수님의 증거와 사역에서 나타난다. 여기서의 예수님의 증거는 너희들의 말처럼 내가 메시야다는 것과 그러나 이 후에는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예수 자신의 증거를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떠한 분인가를 설명함 안에서 새 시대의 특성이 나타난다. 마태복음은 이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되셨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영광이 연결되어 있다. 고난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 오르기 위한 순서이다.(26:12,64)그래서 그의 죽으심에서 온 땅이 진동케되고 죽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이러한 사건은 구약에서 묵시적이며 종말의 사건을 언급하는 내용인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특히 성전과 관계하여 보았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옛 제도의 끝과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을 지시한다. 이것이 새로운 성전의 의미이다. (여전히 옛 성전으로, 옛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새시대를 설명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특징이다-21:13, 27:53)
그러면 예수님이 지으신 것은 선지서에 약속된 성전인가? 그렇지 않다. 선지서에 나타난 성전이 이전 시대보다는 영광스러워도 여전히 휘장으로 가리운 성전이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신 성전은 휘장이 제거된 하늘 성전이다. 왜냐하면 죽으심에서 휘장이 갈라졌고 주님이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왕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성전을 짓는 것과 왕이 연결되어 있다.-메시야에 대한 강조-26:61~64, 27:40~42) 그 권세로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하신다.
마가복음에서는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짓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땅에 속한 성전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성전을 언급한다. 마태복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승천 기사가 있는데 16:13에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올리우신 분이시다. 보좌는 왕적인 강조점이 있지만 구약에서 하늘 보좌는 성소적 의미를 깔고 있다.
참고로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그런 의미들이 나타나다. 스데반이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한 것을 말하면서 그들이 성령을 거스려 예수님을 거절한 사실을 책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 그러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것을 보았다. 이것은 하늘 성소를 본 것이다. 여기서의 대비는 손으로 지은 성전과 그렇지 아니한 하늘 성전 그리고 성령을 거스림과 성령의 충만함이다. 결국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하늘 성소에 예수께서 오를 것을 말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신 분이시다.
히브리서9장에서는 그가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 땅에 속한 시대인 옛 시대는 끝나고 하늘 보좌의 시대인 새 시대가 열렸다. 주님께서 찬송 받을 자의 아들로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2.산상수훈
본 논문에서 산상수훈을 전부 주석을 하지는 않고 산상수훈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한다. 여기서 주장하고자하는 산상수훈은 구약의 도덕법의 정신을 잘지키고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법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언약의 법의 토대에서 읽어져야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언약의 법으로서의 특징과 성격을 밝히겠다. 그 언약적 성격 때문에 다음이 전제되어야한다. 첫째 산상수훈은 언약체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둘째 첫째 이유 때문에 구원 얻는 기준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째 모세 율법의 해석이나 주석이 아니다.
1)언약체결적 성격
산상수훈은 언약체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산상수훈의 구조와 내용 자체에 있다. 그 구조는 십계명과 신명기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그것들의 구조를 살펴 보았는데 전문, 역사적 서언, 계명, 축복과 저주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구조이다.
(1)전문5:1~2
여기 나오는 전문은 출애굽기 20:1(십계명)이나 신1:1~5에 나오는 전문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십계명과 신명기의 유사성을 서로 비교하면서 설명하도록하겠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동일 선상에 두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문학적인 형태와 내용을 보고자하는 것이다. 그래야 산상수훈의 성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마태복음 차체의 증거 안에서 이해 되어야한다. 그 내용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쳐 가라사대 안에서 모세를 능가하며 새시대를 주시는 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계명의 전문과는 그 권위에 있어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십계명 서언에서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로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로 말하고 있다. 십게명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대면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셨고 백성들은 두려워 떨어따.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고 주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대면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십계명을 시내산에 말씀하신것처럼 마태복음도 평지에서 설교한 누가복음과 비교했을 때 의도적으로 산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 산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5장처럼 산에서 말씀하시고 15:29에서는 병자를 치료하시며 높은산에서 영광스럽게 되셨고(17장)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리의 명하신 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산상수훈과 부활하신 후에 있는 내용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산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출애굽기에서 산은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셔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말씀하신 장소이다. 또한 하나님의 산은 시온산,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일컬어진다. 이사야2:2(미4:1~3)의 말대로 하자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며 많은 백성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여호와께서 그 도로 가르칠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이 시온에서 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2:2의 상황은 메시야 나라에서 성취될 일을 나타낸다. 마태가 의도적으로 산에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또한 복음서 전체에서 산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사상이 깔려 있다.
무리를 보시고 앉으셨는데 제자들이 나아왔다. 이것은 마치 구약 시내산에서 백성들은 산 아래 있고 모세가 가까이 가는 것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은 마태복음에 게속해서 흐르고 있다.
신명기의 내용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선포한 장소와 대상, 말씀하신 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의 내용에 있어서다. 구체적인 내용은 뒤에서 설명되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1:6의 내용이다. 모세가 말한 내용이지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이 근본적으로 다른 형식이다. 물론 1:6의 말이 어디 까지 한정하는가를 살펴야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것이 근본 토대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구조가 아니라 그가 입을 열어 가르쳤다. 그가 곧 자기 백성 중에 오셔서 천국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세와 같은 반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문은 산상수훈이 누구의 말씀인가를 단순히 보도하지 않는다. 시내산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 분은 하나님의 권세로 말씀하고 있으며 모세보다 크신 분이시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임마누엘로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 이 아들은 11장의 증거대로하자면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은 상속자이며 아버지의 계시로서 아들이다. 그는 천국을 가져 오는 하나님이시다. 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약처럼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시거나 모세를 대신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친히 자기 백성과 대면해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주님이 세우시는 천국의 특성이다.
(2)역사적 서언5:3~20
역사적 서언은 전문과 함께 언약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이제 나타난 역사적 사실 때문에 언약 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서언도 십계명과 신명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 즉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구약 언약에서 근본적인 역사적 서언은 그들을 애굽의 권세에서 구원하였다는 것과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드린다는 것이었다. 산상수훈은 역사적 서언이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3~15절과 17~18절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권면하는 내용이 그 서언에 상응해서 두부류로 나누어진다. 16절과 19~20절이다.
첫번째 부분은 두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첫번째는 3~12까지이며 두번째 부분은 13~16까지이다. 3~12은 복에 대해서 선언하고 있다. 그 복은 ...을 받는 것에 의해서 나타나는데 중심되는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지금 그 복이 심령이 가난한자....들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천국 백성으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11절 이하에서는 그 대상이 2인칭으로 바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인하여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 지금 복을 받은 백성, 천국의 복에 참여하는 백성을 자기 백성 삼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남은 자들, 긍휼의 하나님과 동행한 신실한 자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데 그 복을 받았다는데 핵심이 있다.
13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은 선언적인 표현이다. 이전에 하나님이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을 자기 소유삼으심을 나타낸 것처럼 이 표현도 너희는 내 백성이다는 말이 전제되어 있다. 13절과 14~16절은 같은 개념이면서도 그 결과에 있어서는 대비된 표현을 가지고 있다. 13절에서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을 전제한뒤 저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저주는 버리움을 받는 것인데 마태복음 문맥에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14~16절에서는 세상의 빛임을 전제한뒤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물론 13절에서 저주의 표현을 쓰고 있어도 곧 권면의 말을 하기 위함이다. 결국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약적인 권면을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권면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천국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20절과 7장에서 확대된 방식으로 나타난다.
두번째 서언 부분은 두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17~18절과 19~20절이다. 17~18은 역사적 서언을 새로운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19~20은 거기에 따른 언약적 권면을 하고 있다. 이 서언은 두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 서언과 21절이하의 연관성 이다. 앞부분과는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지만 상호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하기 위해서 오셨다는데 있다. 여기에서 단지 율법으로 말하지 않고 선지자를 첨가하고 있다. 그렇게함으로 옛 역사를 완성하러 왔다는 것을 말한다. 옛 역사의 완성은 남은자에게 천국을 주심으로, 빛과 소금으로 삼으심으로 완성된다. 그런데도 옛 언약의 완성은 율법의 완성에서 나타난다.
권면의 말에 있어서도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빛과 소금이다는 것은 사60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라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은 20절에서 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와 연결된다.
17~18은 예수님 자신의 오심에 대한 설명으로 설명된다. 17절 말씀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할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에서 설명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18절에 설명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온전케하기 위함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온전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에서 온전케한다, 성취한다는 것은 자주 사용된다.(1:22, 2:15, 17, 23, 4:14, 8:17, 12:17, 13:35, 21:4, 26:54, 56) 마태복음의 특징중의 하나인데 구약 성경의 성취를 언급하는 표현이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께서 옛 약속의 성취자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성취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율법만 언급하지 않고 선지자를 첨가함으로 그가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을 주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지시한다.
그렇다면 18절에 나오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이 말은 천지가 없어지기 까지와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한글 성경은 다 이루리라)에 의하여 한정된다. 이 두가지 한정구는 서로 대응하고 있는데 똑같은 사건을 가르킨다. 17절과 문멕에서 살핀다면 18절은 17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점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기까지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한다는 것과 연관해서 이해해야한다. 율법은 예수님의 성취의 일이 일어나기 까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천지가 없어지기 까지와도 동일한데 구약에서 천지가 없어지는 것은 종말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에 의해서 구약의 약속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17절과 18절에서 말하고 있다.
사2:2에서 말하듯이 구약 개념은 종말에도 율법이 폐하여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율법은 영원하고 여호와는 그 산 시온에서 만민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신다. 그리고 열방은 그 도를 베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말에는 페하여져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 자체의 영원함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경륜 안에서의 성취를 말한다.
그런데 구약 약속의 성취를 율법과 관련해서 말하고 잇다. 그것은 구약 언약의 핵심은 율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해석처럼 세상 끝까지만 율법은 영원하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함이 아니라 온전케하려 함이다. 모세 율법은 새 시대에 합당치 않다. 그것은 폐하여져야한다. 종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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