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가 정말 일어날까요 이필찬 교수
휴거가 정말 일어날까요? 이필찬 교수
휴거(이필찬교수) | 성경의 종말론곤륜산 2013. 2. 7. 09:08http://blog.daum.net/deepimpact/13369108이필찬교수의 성경 연구http://cafe.daum.net/pcleeschool휴거가 정말 일어날까요?(1)행 1:9과 단 7:13의 관계를 얘기해 볼까요? 어떤 점에서 유사한가요? '구름'이라는 주제가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 사건을 통하여 단 7:13의 성취를 보여 주기를 원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성도들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왕권을 받는 대관식과 같은 것이지요. 바울은 살전 4:17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성도들이 이러한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구요. 부활한 후에 예수님은 이미 천상적 차원에서 존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눅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루살렘에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의 형식을 보면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 24:37)의 경우처럼 부활하시기 전의 모습과는 다른 형상을 지니시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 1:9의 '하늘로 올려가심'은 일종의 퍼포먼스인것이지요. 이 모습에서 마치 예수님께서 올려 가신 하늘이 우주 공간의 어느 물리적 공간이라는 오해를 갖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먼저 소천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계신 하늘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신비적 공간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톰 라이트가 말했듯이, "예수님이 지금 계신 곳은 우리가 속한 시공간의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우리가 '하늘'이라고 부르는 세계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세계-'땅-와는 다르지만 수많은 방식으로 서로 교차되어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인 자신의 내적 삶에서 교차된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220); "이 하늘은 하나님의 공간으로서 우리 세계의 공간에 속한 어떤 장소가 아니라 비록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공간이다"(같은 책, 219).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을 우주적 하늘로 여행하듯이 공간적 이동을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렇다면 행 1:9의 사건은 물론 사실적인 관찰을 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한 묘사를 하는 것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는'(히 2:9) 일종의 대관식의 정황을 연출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휴거에 대하여(2)흥미롭게도 성경에 예수님의 승천과 성도들의 승천을 일치시키는 본문이존재한다.그것은 계 11:12(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이다.이 본문에서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두 증인은 죽음-부활-승천에 이르는 과정을 예수님의 경우와 일치시키고 있다.이것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이 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목적을 갖는다.그런데 승천 장면에서 행 1:9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게 묘사되고 있다.물론 이러한 장면은 두 증인이 그러하듯 문자적 의미로 이해할 수 없고 상징적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곧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왕으로 공식적으로 등극하시게 된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임을 보여 주려는 목적을 갖는다.바로 살전4:17의 '구름속으로(ἐν νεφέλαις)(구름 안에) 끌어 올려진다'는 것과계 11:12의 '그들이 구름을 타고(ἐν τῇ νεφέλῃ)(정확하게 번역하면 '구름 안에'라고 해야 함)와 동일한 정황이다.물론 이것은 단 7:13이 배경이 되고 있다.이 두 경우 모두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이상의 두 경우 모두 사실적 묘사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다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임하시는 예수님은 왕으로서 오신다. 그 왕으로부터 그의 백성들도 동일하게 왕으로 취급해 주시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휴거에 대하여(3)신약 성경에서 특히 종말적 내용을 표현하는 언어들은요한계시록을 비롯하여 많은 경우 구약의 용어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또한 당시의 상황에 빗대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예를 들면 계 4:2에서 '하늘에 보좌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을 하늘에 문자 그대로 '보좌'가 있다고 보기가 어렵지요.그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통치가 발현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이와같이 살전 4:16-17도 그렇게 이해해 보자는 것입니다.고든 피(Gordon Fee)는 그의 데살로니가 주석에서이 살전 4:17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리다'의 구약 배경으로단 7:13(여기에서 '인자'를 단 7:18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라고 해석을 합니다)과신약...에서는 행 1:9을 비교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이것은 살전 4:17에서 '구름 속으로 꿀오 올리다'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앞에서도 말했지만 NICNTT 시리즈 고린도전서 주석으로 유명한 Gorden Fee는"Here especially Paul's usage can be traced to the appearance of one like 'a son of man' in Daniel 7:13, who is described as 'coming with the clouds of heaven."라고 합니다.고든 피의 이러한 제안이 맞다면 살전 4:16-17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 7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이러한 원리에 근거해서 생각을 전개해 보지요.단 7:13에서 '인자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간 이유가 무엇일까요?그것은 단 7:14에서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라고 한 것처럼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기 위함입니다.그런데 이 '인자'는 단 7:18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라고 해설을 해 주고 있습니다.이들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내다보면서 이스라엘을인자 같은 이라는 집합적 명사로 묘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인자 같은이의 뿌리를 아담으로 볼 수 도 있습니다(Tom Wright).그렇다면 이것을 살전 4:17의 '구름속으로 끌어 올린다'는 것과 어떻게 관련될까요?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다니엘서의 인자같은이처럼하나님으로 오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그림을 그리고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바울은 다니엘이 꿈꾸던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회복의 완성을이 그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휴거에 관하여(4)마 24:40-41은 휴거에 대한 근거 구절로 가능한가?안녕하세요?오늘은 휴거에 관하여 네 번째 글입니다.보통 휴거의 근거 구절로 사용되는 본문 중의 하나가 마 24:40-41이다. 두 사람이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을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는데 한 사람을 데려가고 한 사람을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우리말 성경은 ‘데려가다’는 휴거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버려둠’이라는 단어는 휴거되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되도록 의도하여 번역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의도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번역본을 읽는 독자는 휴거를 주장하는 해석에 설득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먼저 이 두 동사는 수동형으로 되어 있다. 이 수동형은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신적 수동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동형태를 살려서 번역하면 ‘데려가고’는 ‘데려감을 당하다’(수동형)라고 하고 ‘버려둠’은 ‘내버려 둠을 당하다’라고 해야 한다.전자의 단어는 ‘παραλαμβάνεται’라는 동사이다. 이것을 휴거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근거 없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디로, 왜 데려가는 것인지 본문에서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단어는 24:17-18에서 로마인들이 침략했을 당시 도망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구조받는 것이라기 보다는 로마인들에 의해 데려감을 당하는 위협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France, 940). 27:27에서도 이 동사는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아가는 행위를 가리켜 사용되고 있다. 이 동사는 또한 구약 렘 6:11에서처럼 포로로 잡혀가는 경우에 사용될 수도 있다.그리고 노아 홍수 때에 물이 사람들을 휩쓸어 가는 정황에도 이 동사의 의미가 적용될 수 있다. 마태의 독자들의 정황과 노아 홍수 때의 정황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동사의 이러한 적용을 가능하다. 노아와 그 당시의 사람들이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일을 하며 지냈지만 노아는 남게 되고 사람들은 데려감을 당하게 되었다(France, The Gospel of Matthew, 940). 후자의 단어가 ‘ἀφίεται’(ἀφίημι)라는 동사로서 ‘용서하다’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는 점이 이러한 입장을 더욱 강화시켜 주고 있다.자료출처http://blog.daum.net/deepimpact/13369108
이필찬교수의 성경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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