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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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 비판
푸르름 2009.10.24 11:01 http://blog.daum.net/alphacourse/11297361
서평 - 하늘아이
이 책은 다비 개인과 그의 영향에 대한 비판과 크리스챤 시오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비쳐진다. 다비가 교회관과 종말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해석에서 떠났다는 것이다. 세대주의가 성장한 배경을 설명하며 그 사상 체계로 함축하고 있는 것을 분석하여, 중요한 것은 다비의 세대 체계보다 문자적 이스라엘과 "커다란 삽입부"인 신약교회에 대한 그의 성경해석학에 있다고 주장한다. 배스는 이런 성경해석을 보급한 세대주의 체계가 다비의 인도를 어떻게 따랐는가를 보여주고 세대주의가 교회에 끼친 영향과 결과, 심각성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 보니 다비 개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지면을 할애했고, 또한 그것이 세대주의의 전부인양 집필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보여준 관용적 태도는 본받을 만한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지은이 소개
클라런스 배스(Clarence B Bass)
세대주의 체계 속에서 교육받으며 대학 시절과 신학교 시절을 보냈다. 다비의 교회관 연구로 박사 과정을 준비하며 역사적 신앙과는 크게 다른 성경 해석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해석학적 패턴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용 요약
서론
이 책은 신학적 해석의 체계로서의 세대주의는 19세기부터 시작되었고 기독교 사상의 그 이전 역사에는 없던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세대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적인 전천년왕국 신앙의 특징적인 견해들로부터 이탈했는가를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다비의 교회론이 분석되는데 이는 교회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에 대한 그의 개념에 영향을 끼친 전제들을 확정하며 또한 그 차이점이 교회의 활동에 끼친 영향을 밝히고자 함이다. 세대주의의 전제들과 함축들을 설명하고 있다.
1. 세대주의와 구별되는 특징들
예언에 관한 사상의 발전의 역사를 개괄해 보면, 오늘날 널리 주장되고 있는 예언 해석 첵의 어떤 특성들이 역사적으로 교회에 의하여 견지되던 해석의 체계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늘날 세대주의로 알려진 사상과 역사적인 전천년주의 사이의 단 한 점의 연속성도 제시할 수 없었다. 전천년주의자인 래드는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전환난주의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세대주의자들은 교회사에 있어서의 여러 성경 주석가들의 글 속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과 교회, 옛 언약과 새 언약,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 같은 말들의 다양한 용법 속에 수반된 자연적인 구별들 속에서 자기들의 체계의 최초의 발단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여러 사람들이 성경 역사를 자연스러운 단락을 따라서 나누었다는 것을 인정한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포아레의 세대주의 체계에서 인용된 사건들은 교회가 역사적으로 고수하여 온 그것들과 다른 것이 아니며, 도한 죤 다비의 신학에 뿌리를 둔 해석의 체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죤 다비와 그의 추종자들의 세대주의 체계의 기본 전제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간과하고 있다. 캐멜 몰간은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영광 가운데 오시기 이전에 교회를 데려가시기 위하여 따로 은밀하게 오신다는 생각은 예언을 엉뚱하게 해석한 것으로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세대주읠르 구별하는 특징들은 배제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세대주의의 견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엄격하게 적용되는 문자적 해석, 이스라엘과 교회의 이분법, 제한된 교회관, 유대적인 왕국 개념, 지연된 왕국,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식의 복합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율법과 은혜의 구분, 성경의 구획화, 환난 이전의 휴거, 대환난 목적에 관한 견해,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의 목적에 관한 견해, 영원한 상태에 관한 견해, 기독교계의 배교적 성격에 관한 견해 등이다. 구개의 기본적인 특징으로 요약하면 성경 해석에 관한 해석학적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세대주의가 일어나기 이전의 교회의 역사적 신앙이 알지 못하고 있던 사건들의 연대기에 뿌리는 두고 있다. 여기에 그 정신과 실천에 있어서 분리주의적이 되려는 경향이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세대주의의 성경 해석의 기본 원리, 곧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배제에서는 서로 다른 원리에 의하여 인간과 더불어 일하신다는 이 해석적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논리적으로 세대주의의 연대기까지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 운동이나 내적 치유는 어떤가? 이도 역시 이전의 역사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세대주의의 성격과 목적
다비는 "인간이 처음부터 그렇게 실패한 배제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어떻게 참고 이끌어 가셨든지간에 각 경우마다 인간의 전적이고도 즉각적인 실패가 어떻게 있었는가 하는 것만을 보여주려는 것이며, 또한 나아가서 신앙을 통한 각 배제의 부분적인 부흥이 있기했짐나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배제가 회복된 경우는 한번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주목받는 성경 학자요 본문 비평가이며 초기 플리머드 형제단의 일원이었던 사무엘 트레겔레스는 다비의 새로운 해석을 배격하면서 그것을 "고도의 사변적 넌센스"라고 불렀다.
문자적 성경 해석
세대주의자들은 엄밀한 문자적 해석의 철저한 적용을 고집하는데, 특히 이스라엘과 교회의 해석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경직된 문자적 해석의 패턴에 따라서 그것의 자연적인 결론들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 동안에 땅, 국가의 보좌, 성전의 회복 등과 같은 이스라엘에 관한 무조건적인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19세기까지 교회는 이스라엘이 천년왕국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기는 했지만,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하나의 다른 왕국으로 서게 된다고 보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스라엘은 교회 안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통치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이분법
하나님께서 아브라하에게 주신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약속들에 대하여 경직된 문자적 해석 원리가 적용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각각의 약속들을 성취하는 일에 자신을 구속시키신다는 결론이 그 하나이며, 또한 이 언약의 세사한 부분까지 아직 성취된 것이 아니므로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미래 통치는 그리스도께서 현재 교회와 맺고 계신 관계와는 전혀 별개로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결론이다. 다비의 시대 이전에는 언제나 교회를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단일한 구속 계획의 연장으로 보았다.
제한된 교회관
현대의 세대주의는, 예수께서 왕국을 유대인에게 제안했는데도 유대인들이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 교회라고 주장한다. 다비는, 지금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원래의 구원 계획의 일부가 분명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이언사이드는 교회의 위치를 하나의 막간극이라고 불렀다.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 사이에서 지지되던 견해는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무리로 융합해서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야 할 자로 서게 했다는 견해이다. 세대주의는 교회를 아담에게서 시작된 구속 계획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역사적인 견해에 있어서보다 교회의 역할을 훨씬 제한했던 것이다.
유대적인 왕국 개념
세대주의는 미래의 왕국을 유대 왕국의 회복으로 제한한다. 예수께서는 영적인 왕국을 주셨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왕국이 거절되었다는 것이 역사적인 해석이다. 역사적 전천년주의는 이스라엘이 그 왕국을 거절했기 때문에 교회라는 형태의 영적인 이스라엘이 제정되었으며 천년왕국 속에서 그것이 완성된다고 공언하고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를 다른 것으로 본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의 하나님의 보편적인 주권적 통치이지만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지상적 통치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의 어느 부분도 교회와 왕국을 이렇게 구분하는 사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지연된 왕국
'지연된' 왕국 혹은 '제안되었지만 수립되지 않은' 왕국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영광인 교회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역사적 신앙은, 그 왕국은 지연된 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서 성취되었으며 천년왕국 속에서 그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율법과 은혜의 구분-이 구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복합적인 근거를 만든다
구원의 복수적인 형태 즉 인간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될 것이다. 세대주의는율법과 은혜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하나의 체계를 건설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시대에는 서로 다른 원칙으로 인간을 다루시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복음은 단 하나 곧 은혜의 복음뿐이다. 현재의 복음과 미래의 복음을 나누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의 구획화
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며, 또한 전체 그룹들은 다른 그룹들로부터 면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겅경 메시지의 연속성은 성경 이해의 기초로 받아들여져 왔다. 세대주의의 성경 구획화는 역사적 신앙으로부터의 일탈이다.
환난 이전의 휴거
환난 이전이라는 개념이 나타난 것은 세대주의가 출현하면서부터이다. 환난 이전의 휴거라는 견해는 물론 하나님의 전체적인 구속계획에서 교회를 분리시키는 해걱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환난의 목적
예레미야 30장, 다니엘 12장, 마태복음 24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7장에서 가르친 하나의 환난에 대한 신앙은 또한 역사적 전천년주의의 특징이 되어 왔다. 유대 왕국과 관련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세대주의가 말하는 대환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교회는 휴거를 통하여 지상에서 들림받는다. 그 뒤에 계속되는 7년 기간은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으로 나누어지는데, 전 3년 반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적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으며, 그 기간이 끝나갈 무렵에 적그리스도가 그 언약을 파기한다. 후 3년 반은 사탄이 적그리스도를 정복시키고 야곱의 환난의 때가 지상에 쏟아짐으로써 시작된다. 이 7년간의 환난 동안에 왕국의 복음이 전파된다(은혜의 복음이 아님을 주목하라). 이스라엘의 선택된 남은자 144,000명이 환난 기간에 살아 남아서 그 왕국이 되며, 그리스도께서는 7년 후에 이 왕국으로 재림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구분에 그 뿌리를 둔 세대주의의 전체적인 체계이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의 성격
세대주의의 천년왕국은 그 성격이 결정적으로 유대적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천년왕국은 구약 예언의 문자적인 성취가 될 것이다. 선전이 재건되며 제사 제도가 회복된다. 역사적 신앙은 천년왕국을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시기로 보아왔다. 세대주의의 해석학은 교회와 이스라엘을 그렇게 예리하게 구분함으로써 그 신앙의 유산에서 분리되어 나간 것이다.
영원한 상태
세대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의 새 예루살렘은 교회가 영원히 거하게 될 실제 도성이라고 가르친다. 역사적 전천년주의는 이 구절을 이렇게까지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천년왕국에 적용된다는 것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기독교계의 배교적 성격
다비의 사고 속에서 최초로 떠오른 원리들 중의 하나는 참 교회와 기독교계 사이의 구분이다. 각 개인이 그리스도와 맺은 천상적인 관계가 교회를 구성한다는 생각과 교회의 조직들에 대한 불신이 합쳐져서 영적인 분리주의를 확립했다.
2. J.N.다비:그 인물에 대한 평가
교회의 모든 가짓을반박하며 신자들은 모든 분파주의적인 구별을 없애고 단순히 그리스도에게로 모여야 한다고 제안하는 어떤 체계가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료된다. 만약 그 체계가 자기는 성경을 단순하게 믿는다고 공안하며 또한 그만큼 신학을 혐오한다고 선언한다면, 그리고 그 체계의 추종자들이 겸손과 고결과 열정을 뛰어나게 구비하고 있다면 그 체계의 매력은 더욱 커진다. 나아가서 종교개혁의 정신과 현대의 자유로운 탐구의 재능 사이의 조화를 반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지 환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대에, 그 체계가 자기는 성경에 대한 철저한 영적 통찰의 가장 최근의 결과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체계는 확실히 많은 청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인물에 대한 평가
다비-그 스타일은 단순하고, 태도는 자비로우며, 기질은 친절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사려깊으며, 그 정신은 겸손하고, 성격은 동정적이다. 동시에 그는 논쟁을 할 때에는 무례하고,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호전적이며, 자기의 권위의 위치에 대해서는 질투심이 많고 무엇을 요구할 때에는 강요적이었다. 다비의 전체 생애의 단 하나의 동기는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이었다. 결혼과 자녀의 즐거움을 희생했다. 전적인 자기 포기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가난한 카톨릭 교도들과 프랑스와 스위스의 농민들 사이에서 성공하게 된 비결일 것이다. 지성인들 사이에서 학자로 훈련을 받았으면서도 그는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 속에서 일하면서 평안을 발견했다.
종교 지도자로서의 다비
모든 행동과 가르침을 위해서 신약성경의 선례를 찾는다고 공언했으며 또한 성경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직책과 제도의 문제들을 토론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부요함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훨씬 행복한 일이며, 문제들은 영혼의 메마름과 황폐를 가져다 주기 쉽지만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것은 영혼을 살찌우고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쓰고 있다. 협소하게 제한된 교제를 강요한 것 등은 결코 그에게 있어서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화평을 진정으로 원하는 마음이 있긴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중요한 원리들을 제시하는 일을 피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가 논쟁을 꺼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논쟁을 자기의 사명의 일부로 보았다. 그는 믿음이 연약한 자의 성장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을 반박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라고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교리적 순결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는 나머지 마침내 그의 전투적인 정신에 그의 인격의 한 부분이 되었던 것 같다.
저자로서의 다비
성경의 모든 글자의 권위를 강조하는 반면에 많은 사람이 가진 모순된 태도를 그도 가지고 그는 기독교를 지지하는 학문적인 역사적이고 비평적인 증거에 대해서는 더욱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가 번역한 성경은 '끝없는 대실책, 오류들, 오역, 법과 시제와 전치사의 혼동'이라고 평가된다. 그의 문체의 난해성은 학문이 부족한 까닭이 아니다. 그는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에 정통해 있었다. 그의 글들은 철학, 역사(특히 교회사), 그리고 여러 학문 분야의 광범위한 지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19세기의 터툴리안이라고 불렸다. 그는 새벽부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복음의 진리를 진술하고 변호하려는 그의 압도적인 열정과 형식을 무시하는 성급함이 그런 문체를 갖게 했다.
결론
사역의 초기에 그를 알았던 모든 사람은 그를 성도의 미덕이 가득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의 말년에 관한 공정한 증어에 따르면 그에게서 비고이고 신랄하며 심지어 어떤 때에는 사악하기까지 한 성격이 발휘되었음이 드러난다. 비록 그는 언제나 자신의 동기가 순수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행동 속에서는 종종 개인적인 야망과 이기심을 부인할 수 없도록 반영되곤 한다.
3. 세대주의의 역사적 배경
플리머드 형제운동은 독립해서 모이던 그룹들이 병합하여 그로브스, 뉴튼, 돌만, 크로닌, 벨렛, 트레겔레스, 그리고 다비와 같은 지도자들에 의하여 성장이 촉진되었다. 다비는 전략적 직관과 천재적 관리능력으로 형제 운동을 하나의 조직으로 확립시켰다. 형제 운동의 '핵심적 진리' 중의 하나가 된 깨달음은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역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로 연결되었다. 그로브스는 형제운동의 기초가 되는 두 가지 원칙을 제공하였는데 즉 매주일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그의 고별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떡을 떼는 일을 위하여 구별되어야 한다는 원칙, 그리고 목회의 자유는 인간의 성직수임에 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서 나온다는 원칙이었다. 다비는 사도행전의 모습이 현재의 실제적인 상태와 깊이 대조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829년) 언기어 가의 공공 장소로 옮겨서 임대한 홍에서 모임을 가졌다. 예배를 최초로 공적으로 선포한 것이었다. 잉글랜드내의 그룹과 관계되어 형제단(Brethren)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 곳은 플리머드였다. 브리스톨에 생긴 형제단은 죠지 뮬러와 헨리 크레익이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베데스다 그룹에서는 회원의 자격이 침례를 받은 자들로만 한정되었으며, 기드손 그룹에서는 그 자격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브리스톨의 두 그룹은 1837년 회원자격을 개방한다는 원칙하에서 병합되었다. 형제운동의 흥기에 유익한 여러 조건 중에서 두드러진 조건은, 초기의 지도자들이 대단한 사회적 신분과 지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들로서 그들은 상당한 재능, 도덕적 위신, 그리고 지성을 갖춘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 성직자, 법정 변호사, 사무 변호사, 육군과 해군 장교들, 의사, 그리고 높은 명성과 부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세대주의를 탄생시킨 다비의 교리에 관한 재미있는 해설 중의 하나는, 그의 교리가 역사적 신앙으로부터 이탈된 것이 완전히 분명해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대부분의 이 초기 지도자들은 다비와 관계를 단절했거나 아니면 그에게 반대한 까닭에 출교를 당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다비가 반대한 관행들 중에는 만찬의 설교자가 언제나 가장 먼저 떡을 뗌으로써 거기서의 지도자로 인식되게 되었다는 것과 어떤 설교자들을 위한 날들을 정해 놓은 관행이 포함되어 있다. 다비는 교회와 구약의 성도를 구별하면서 복음서 중 일부를 '유대적인' 것으로 구분하였고, 뉴튼은 구약의 성도들은 교회의 일부라고 가르쳤다. 환난 이전의 휴고, 성경의 구획화, 그 왕국의 유대적 성격 등 세대주의 체계의 구성요소가 된 모든 것들이 이 분쟁 속에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다. 뉴튼과 다비는 평화롭게 하지만 따로 길을 가기로 했다. 최초의 분열이 있은 이후에도 또 다른 분쟁을 촉발시켰다. 그로브스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다비의 경향에 대한 자신의 불쾌함을 표시했었다. 1946년 최초의 비난은 시편 6장에 관한 뉴튼의 설교를 들은 사람의 부정확한 기록들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그의 실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모든 면에서 인간의 그것과 너무 동일시하려 했던 것 같다. 뉴튼은 남이 그를 욕할 때 그는 되받아 욕하지 않았다. 처음에 이 운동이 함께 시작하였던 바 통일과 관용의 원칙이 모든 신학적 차이를-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것이더라도-신랄하게 조사해서 마침내 완전한 의견의 일치와 한 사람에 대한 충성에 이를 것을 요구하는 원칙으로 대체되었다. 그 한 사람이란 바로 다비였다. 개방과 배타라고 불리는 두 개의 그룹으로 명확하게 갈리게 되었는데, 다비는 배타 그룹을 지배하게 되었다. 각 도시에 모이는 각 회중은 개교회의 한 부분만을 구성하므로 다른 부분들의 동의가 없이는 교회적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비는 런던 중심 모임을 만들어 교회적 행동을 손쉽게 하기 위하여 런던과 근교의 회중들의 대표자들로 구성하여, 런던 중심 모임의 결정이 형제 운동 전체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졌다. 다비의 교회론의 모든 것은 개방 그룹에 까지 적용시키는 것은 오류이다. 1865년 경 그로브스, 뮬러, 해리스 그리고 뉴튼은 출교당했고, 벨렛과 크레익은 죽었으며, 그 후 수십년 동안 더욱 많은 분열이 일어났다. 60년대와 70년대 배타 그룹 내에서는 새로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모든 교회에서 나온 가장 신령하고 지적이며, 양심적이고, 단호하며, 헌신된 사람들의 물결에 의하여 그들의 수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현저한 지도자들은 매킨토시, 앤드류 밀러, 그리고 챨스 스탠리 등이 있었다. 1861년 이전만 해도, 다비의 칙령에 도전한다는 것은 아무도 꿈꾸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중요한 지지자들이 죽음과 출교를 통하여 하나 둘 사라지고, 그와 함께 1860-70년대의 부흥을 통항 새로운 회원들이 유입됨에 따라 다비의 자기의 지반에 대한 지배력은 약화되었으며 그 붕괴는 철저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다비는 1882년 죽었다. 1926년의 재결합 회의 때까지 형제단 사이의 참된 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재결합 회의 때에 비로소 회복과 원래의 통일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했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죤 다비는 모든 종교 혁신자가 공통으로 당하는 유혹, 즉 자기의 추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계속 잡아 두기 위한 영적 진리의 새로운 계시를 끊임없이 내어놓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던 것이다. 참된 기독교와 교제의 시금석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의 중요성에 대한 질문이 없었고, 신학의 중요한 점들은 별로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서 교회에서 의 실천의 차이점을 특별히 포함하고 있다. 분리의 원리는 신학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 곳에는 교제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비가 문제가 있고 그런 역사가 있다고 해도 오늘날 기독교의 분리주의가 다 다비의 책임인가는 의문이다. 다비의 추종자들도 후에 재결합을 하지 않았는가? 다비 이전에도 그런 분리는 많았고 그 이후에도 역시 많았다.
4. 다비의 교회론
파멸된 교회
다비는 "교회는 파멸되어 있다"는 용감한 선언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원래의 순결성이 인간의 규칙과 통치에 의해서 부패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신자의 보편적인 제사장직을 전문적인 목사의 조직이 빼았아갔다.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교구의 주님들로서 만나는 것이다. 그 파멸이란 교회의 전체적인 성격과 목적이 완전히 왜곡되어 교회가 원래 설립되었던 근본적인 이유와 정반대의 존재가 된 상태를 말한다. 사람은 그리스드의 영광 대신에 자기 자신의 길을 추구해 왔다. 교회가 타락해서 그 능력을 상실한 정도가 아니라 교회는 파멸된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행해야 한다는 원칙이 제거되고 인간의 제도가 대체되었다. 사도시대와 성경의 시대에도 조직이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오늘날 존재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조직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고안품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 대신에 교회의 윤리로 만족했다. 교회의 미래는 하나의 배제로서 실패했고 하나님의 경영 속에서 그 위치를 상실했으므로 교회 내의 신실한 자들은 분명히 구원을 얻겠지만 교회는그 이유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집에 관한 한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폐허로부터 취해질 남은 자가 회중(assembly)이 될 것이다. 신자에게는 이렇게 파멸된 교회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그것을 회복해야 할 책임은 없다.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 것인데, 이는 교회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닐 뿐더러 인간에게는 그렇게 할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폐허를 수선해 보려는 모든 노력은 악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무너진 배제를 원해의 상태로 회복시키신 적이 없으며, 언제나 인간을 다루시는 새로운 방식으로 나아가셨던 것이다. 사람은 교회를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시 시작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파멸되고 정죄당한 교회를 쳐다보는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께 종하고 사도를 모방하지 않는 것이다. 신자들이 취할 유일하게 정당한 길은 '교회'라고 불리는 모든 종교적 사회에서 떠나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만나며 서로를 참된 하나님의 회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회중이 되어야 할 책임이 형제단에게 있다. 다비는 자기들이야말로 지상의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대표자라고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이 모든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형제단만이 그것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오직 형제단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다. 오직 회중(형제단)만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다비는 교회라고 지칭하는 보이는 형태의 모든 교회를 실패한 배제의 심판에 넘기며, 형제단 운동을 특징짓는 신자 회중의 원칙을 열거한다. 배교한 기독교계와 분리된 회중에 관한 이와 똑같은 신념이 오늘날 세대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고 있다.
교회의 성격
비록 교회의 가시적인 현상은 파멸의 상태이지만, 실제의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은 훼손당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회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에클레시아'는 '회중'이라고 옮기는 것이 보다 정확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번역한 신약성경에서 다비는 어김없이 에클레시아를 회중(assembly)이라고 옮겨 놓았다. 다비에게 있어서 회중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그 이상이다. 즉 '그 이름으로' 모인 신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이름'의 규정을 부인하는 허울뿐인 교회 안에서 서로 만난다면, 그들은 '그의 이름으로'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은 교회의 범위를 결정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교회의 역사적 연원
유대적 교회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구약성경에는 교회가 나타나 있지 않을지라도 회중은 존재했었는데,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고 오직 남은 자만을 남겨두심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뒤에 이스라엘의 영광이 다시 확립되게 하셨다(이사야 8장).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회중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체현인 것이다. 교회는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교회는 분명히 오순절 이후의 것이 된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은 회중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나 외적인 단체는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관계를 소유할 수 없다. 오직 각각의 신자들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만약 교회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과 구별된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거하신다는 일 따위는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회중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회중을 신자들의 실제적인 연합과 동일한 것으로 볼 때이다.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교회
회중은 지상의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의 거처도 신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서 신자들이 거기에 덧붙여지는 것이다. 완성된 건물로서의 회중은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것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으시는 것으로서 다른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어져 가고 있는 집으로서의 회중은 교회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관한 절대적인 지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책임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교회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궁극이다. 다른 모든 배제들은 조건적인 것으로서 그 책임이 인간에게 있었다. 하지만 교회는 조건적이 아닌데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존재와 그 미래를 전적으로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지상의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 속에서 그와 교제해야 하며, 천상의 백성으로 구성된 천상적인 실체이다 - 즉 이 지상적인 조직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조직이다. 자싱의 교회는 하나의 가시적인 교회이다.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의 활동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의 활동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에 이를 때까지는 교회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불완전한 교회가 지상에 존재함에 대한 이유이다. 지상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보편 교회란 있을 수 없다. 각각의 회중은 자체의 관리상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자율적인 지역회중이다. 그 회중은 오로지 성령의 통치만을 받는다. 고린도에 있는 회중은 저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몸 전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각 회중은 오직 교회 정치에 있어서만 독립된 것이지,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으로서의 존재에 있어서 독립된 것이 아니다. 각각의 회중은 하나님의 전체 회중을 대표한다. 이 교리는 다비에게 전체 그룹에 대한 어마어마한 지배력을 부여했다.
교회의 통일성
교회는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은 함께 모여져서 하나가 된다. 회중 가운데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며, 따라서 악을 엄격하게 피함에 의해서 그 통일이 유지되어야 한다. 외적인 권위를 강화하는 것은 성령의 지위를 찬탈하는 것이며, 회중 가운데서의 그의 정당한 위치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 혹은 경건한 행보의 진리는 외적인 통일이라는 것으로 대체되는 희생을 결코 당해서는 안된다. 성경에는 독립된 회중이라는 것은 없다. 한 회중은 다른 회중에서 온 형제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로 맞아들여야 한다. 역으로 만약 어떤 회중이 한 사람을 징계했는데 다른 회중이 그를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의 몸임을 부인하는 것이 든지 징계한 회중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다. 회중의 통일성의 외적인 상징은 성찬식이다. 다비의 가르침이 오늘날 개신교 신학 속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경향은 개인 구원에 대한 강조이다. 신자의 무리와는 별도로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상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였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메사아를 고백하는 청중들을 향하여 그 에클라시를 자신의 걸이라고 선언하신다. 다비의 직접적인 추종자를 제외한다면 교회는 파멸되어 있다고 주장한 사람도 다비뿐이다. 결론적으로 한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다비의 교회론은 오늘날 그 신학적 주장에 있어서보다는 그것의 실제적인 효과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전 기독교계가 실제로 배교했다고 믿으며 따라서 그 악으로부터의 분리에 의해서만 교회의 통일성이 유지된다면, 우리는 그 배교한 기돌교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야 할 것이다. 세대주의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날카롭게 분리하고, 배교한 기독교계 내에서 교회가 배타적인 역할을 할당하며, 교회에게 천상적인 위치와 미래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지역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이유로서 각 지역 교회에게 독립성을 허락하며, 악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하여 연합을 견지하는 개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역사적 평가는 진단을 내릴 것이다.
5. 다비의 종말론
다비의 종말론의 기본적인 요소들과 해석학적 패턴은 오늘날 세대주의 속에서도 변치 않고 고수되고 있다. 다비는 "천년주의자들이 말한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면 나는 그 전체 체계를 거부했을 것이다"고 말하며 과거의 학문적 업적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그의 정신을 반영한다. 다비의 종말론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는 그의 세대주의적 이원론에 뿌리를 둔 그의 교회론과 특별히 성경의 예언적인 부분에 대한 경직된 문자주의의 해석 원리의 적용이 두 가지 기본 원칙에서 성장한 것이다. "현 시대는 ...삽입이라고 불리며... 다니엘의 육시 구 이레가 다 지나가면 다음에는 상당한 시대의 간격이 있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 이레가 다시 시작된다".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이분법이 다비의 종말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회의 지상적 영광
"부활에 관한 구절들 중에서 의인과 불의한 자가 동시에 부활하리라고 말하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또한 의인의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구절들은 그것을 구별된 어떤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을 입증하는 구절로는, 썩지 아니할 사람만이 부활하리라고 분명하게 이야기가는 고린도전서 15:51,52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리라고 말하는 데살로니가전서 4:16, 그리고 의인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누가복음 14:14, 첫째 부활에 참여함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 요한계시록 20:6 등이 있다. 세례와 중생 속에서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부활했으며 실제로 부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그때를 지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심판의 부활이 아닌 생명의 부활(요 5:29)이다. 두 부활 사이의 간격에 관하여 불확실한 점이 있다. 의인 즉 교회의 부활은 교회가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기 위하여 휴거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루어지고, 한편 불의한 자들은 지상의 영광 속에서의 교회의 통치 기간 끝에 있을 심판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땅을 심판하실 때에 교회는 그의 으뜸되는 공의의 도구가 될 것이다(계19장). 의롭게 된 땅을 통치하실 때 교회는 그 영광을 나누어 가질 것이다(유다서, 슥14장).
교회의 천상적 영광
교회는 지금 하나의 과정의 상태에 있다. 교회의 천상적 영광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하여 들림을 받는 '어린양의 혼인'때에 시작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돌려지는 영광을 나누어 가질 것이며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보탬이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교리들이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의 이분법, 그리고 문자적인 해석 원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여 하며, 그 둘 중 어느 것도 교회의 역사적 신앙의 일부는 아니었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소망
환난을 지난 남은 자들로부터 일어날 것이며, 일단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면 그는 중재적 왕국을 세울 것이며 거기로부터 이스라엘의 영광이 사방으로 비추일 것이다.
6. 오늘날의 교회 생활을 위한 평가와 함축
다비의 개인적인 기여
세대주의에 대한 다비의 기여의 일부는 이 체계가 생겨날 수 있는 분위기를 그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형제단 안에서 현저한 인물이 되면서 그의 비이기성이 개인적인 야망으로 바뀌었다. 교리적 차이와 교회관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견해 차이를 관용하며, 개방된 사역의 원리와 모든 성도는 떡을 뗄 수 있다는 원리 위에 연합된 형제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기네들 만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명칭을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네 좁은 교제 밖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의 밖에 있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 권리가 자기네에게 있는 것처럼 교만을 떠는 정도로까지 변화되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평가의 자유를 축소시켰으며 자기들의 분별력을 사용하기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고서 맹목적으로 그의 지도를 따랐던 것이다. 다비 시대의 형제단의 교리, 정신, 그리고 실천들은 오늘날 형제단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수정의 경향들이 그의 극단적인 견해들을 폐기시켰기 때문이다. 세대주의에서 그의 시대 이래로 이루어진 수정이란 고작 그 세부사항에 관한 것이었고 그 원리는 바뀌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환난 이전의 휴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은 그 복된 소망을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주관적인 느낌이 아직까지도 세대주의자들에게 있지 아니한가? 자기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형제들과도 교제를 유지하며, 더우기 사랑의 정신으로 그렇게 한 세대주의자들도 물론 없는 것은 아니다.누구든지 그 운동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정신은 주로 다비의 영향력에 돌려져야 한다. 그의 체계 자체가 역사적 전천년주의로부터의 일탈이었다.
천상적 교회
천상적 교회 개념의 근원을 보면 교회에 관한 구절들 특히 교회를 지상의 이스라엘과 대비시키는 에베소서의 구절들에 관한 해석, 다비로 하여금 기독교계는 배교했다고 가르치게 만든 그의 교회 파멸론, 교회는 이 세상에 있긴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교리에 대한 강렬한 강조 등이 있다. 교회 경영을 위한 편의가 그의 이런 교리의 형성에 기여했다. 자기들만 순결하다는 개념과 교회는 악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다비의 가르침이 개인적 권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에 의하여 자극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도 있다. 통일성과 획일성을 동일시 했기 때문에 그 몸의 영적인 통일이 교리와 실천의 차이점과 병존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엄격한 교리적 획일성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선결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계가 배교했다는 그들의 전제는 그런 분리주의의 경향을 부채질한 것이 사실이다. 분열의 정신이 이 체계의 내재적인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전체 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고 있다. 다이엘 풀러는 "두개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이 채택된다면, 환난 이전 휴거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레겔레스, 뉴튼, 뮬러 등과 또한 다른 초기 형제단 지도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그 견해를 반대한 사실에 의하여 그것이 다비의 교리에게만 특징적이었다. 초대교회의 초기로부터 환난 이전의 은밀한 휴거에 대한 어떤 신앙도 발견하지 못했다. '폴리갑 이랴로 모든 교회사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제창자도 없던 이론'을 소개했다. 교회의 목적은 '천상적 집단'으로 구별되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며 따라서 결국 이 집단은 환난을 피해서 마침내 휴거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은, 교회가 이 세상 속에 위치해 있는 것은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이 세상에게 전파되게 하려는 것임을 잊고 있다. 스코필드 성경이 "산상보훈은 그 1차적 적용에 있어서 교회의 특권이나 의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세대주의는 교회로 하여금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일을 회피하게 만든다. "안에 있지만 속하지 않았다"는 분리의 외투를 벗어 던질 필요가 있다.
천상적 교회 개념이 그들을 비사회적으로 만들었다는 논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논리의 비약으로 보인다. 그들도 복음을 전했고 사회에서 역할을 감당했다. 수많은 책들로 써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스코필드 성경처럼.. 다비의 교회관이 분리주의에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겠미나 이미 카톨릭이나 칼빈이나 모두 자기들만 순수하다는 논리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상대를 제압하려는 논리가 강했고 교리의 획일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미 종교개혁이후 분리주의적 움직임이 많았는데 현대의 분리주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비의 영향으로 치부하기에는 역시 논리의 비약으로 보인다.
문자주의적 해석 원칙
세대주의의 기본적인 내용들은 연대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해석 원칙에서 생겨난다. 세대주의는 용어의 기술적인 정의를 자기의 해석의 근거로 강조한다. 단어의 의미를 찾는 것보다 하나의 해석이라는 점이다. 성경의 모든 예언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코필드는 '역사를 기록한 성경은 문자적으로 참되지만 풍유적인 혹은 영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지만, 예언을 기록한 성경은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해석될 수 없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 문자적 해석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한 프로이드 해밀튼의 태도가 정당한 것 같다. (1) 그 구절이 명백하게 상징적인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 않을 때, (2) 문자적 의미 이외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신약성경이 제공하지 않을 때, (3) 문자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신약성경의 비상징적인 책들에 포함된 진리, 원리, 혹은 사실 진술과 모순이 되지 않을 때, 그리고 (4) 구약성경에 포함된 모호하고 부분적인 계시보다는 비상징적인 책들에 포함된 가장 분명한 신약구절들을 해석의 규범으로 삼고자 할 때이다. 세대주의는 구약의 예언들을 더욱 완전한 신약성경의 계시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을 구약성경의 예언에 비추어 해석하고 있지 않은가? 신약성경이 교회와 아브라함의 후손을 동일시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도 속에서 세대주의는 뒤틀린 성경해석에 빠지지 않았는가?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밀접한 일체성이 있다. 교회가 실제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덧붙여진 존재나 삽입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 구원 계획의 결정의 드러남이다.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통치가 될 것이다. 신약성경에 비춰볼 때 이스라엘은 수단으로서 부름받은 것이며 도구로써 부름받은 것이다. 신약은 구약의 성취인 것이다. 신약성경은 계속해서 구약에서 말해지고 행해진 것, 그리고 구약의 역사와 예언의 깊은 영적인 내함들을 일관되게 이끌어 내고 있다. 세대주의를 분리주의적이며 움츠러들며 총괄적인 신학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한 부분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더 큰 교제에서 물러나게 만들며 고립주의와 분리주의에 의하여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체계라면 그것이 어떤 체계가 되었든지 잘못된 것이다.
신약에서 인용한 구약의 예언들은 모두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풍유적으로나 영적인 의미는 문자적으로 이루어진 일에 덧붙여서 해석된 것이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찾으려고 한 것은 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지적인 개념이었다. 신약에서 말하는 유대인은 영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이 모두 있다. 표면적 유대인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예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문제 삼을 것은 못된다. 20세기 복음주의의 분리운동이 편협하게 정의된 종말 교리를 중심으로 삼는 제한된 교제 때문인가? 교제도 좋지만 성경의 진리를 거스르는 것과의 타협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맺는 말
세대주의는 교회의 역사적 신앙의 일부가 아니다. 이전 1800년 동안 내려온 역사적인 전천년 주의 해석이 있었다. 사건의 순서보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하나의 본질적인 강조점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단절할 생각은 없다. 사랑 안에서의 교제를 유지하면서도 나는 세대주의를 역사적 신앙으로부터의 이탈이라고 강하게 믿으며 또한 잘못된 해석 체계 위에서 있다고 강하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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