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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2

율법과 복음 2 
 http://blog.naver.com/holyhillch/60046706340 홍인규

2. 율법의 속박
3:15-2229의 과도적인 부록에서 율법과 죄의 관계를 다룬 후에, 바울은 3:23-4:730에서 율법의 속박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자됨과 대조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노예 상태는 3:23과 4:4-5에서 율법 아래에 있는 상태(being. ύπό νόμον)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3:25에서 παιδαγωγός 아래의 상태(being. ύπό παιδαγωγόν), 4:2에서 ʾεπιτρόπους καί οʾικονόμους 아래의 상태(being. ύπό ʾεπιτρόπους καί οʾικονόμους), 4:3에서 τά        στοιχεΐα τοΰ κόσμου 아래의 상태(being. ύπό τά στοιχεΐα τοΰ κόσμου)와 비교되고 있다. 이것은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가 죄 아럐(ύπό ʿαμαρτίαν. 3:22)의 노예 상태처럼 범법을 자극하는 율법의 기능의 결과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율법에 관한 여러 가지 analogies의 취지를 고려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갈라디아서에 사용된 ύπό νόμον의 의미를 연구해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ύπό νόμον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παιδαγωγός 와 ʾεπιτρόπους 그리고 οʾικονόμους의 역할을 그레코-로만 사회의 배경 안에서 조사하는 것을 먼저 한다(e.g. Longenecker, Belleville, Young). 그러나 이런 순서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비유들의 의의는 바울이 ύπό νόμο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ύπό νόμον이란 표현은 3:23에서31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동사 ʾεφρουρούμεθα와 분사 συγκλειόμενοι과 동반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믿음이 오기전의 유대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의 상태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있다. (1). Gordon은 율법의 기능을 이방인의 불경한 수상 숭배로 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2). Bellevile은 율법 아래의 상태를 중립적인 것으로 본다. 그녀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죄의 무서운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엄격한 감시(잘못에 대한 처벌 포함)와 율법의 보호가 필요하다. (3). Young은 율법 아래의 상태를 사회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율법 아래의 상태를 율법의 제한 아래 있는 것으로 본다. 율법의 제한이란 율법이 유대인을 이방인과 자유롭게 교제하는 것을 막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존재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23절의 율법 아래 있는 상태는 22절의 죄 아래 있는 상태와 병행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상태가 매우 부정적임을 시사한다. 둘째, 그렇다면 22절에서의 죄의 예속시키는 능력과 관련되어 사용된 “가두다(συγκείω)”는 동사가 23절에서도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절에서 언급된 범법함을 생산하는 율법의 기능 또한 매우 부정적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23절에 묘사된 율법 아래의 실존이 부정적인 것으로서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억압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와 같은 것임을 말해 준다.
율법의 속박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ύπό νόμον이란 표현이 두 번이나 나타나 있는 4:4-5을 보자.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서도 being ύπό νόμον는 노예 상태로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는 έξαγοράζω(속량하다)는 단어가 구출 또는 해방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사가 갈 3:13에서 두 번이나 나오는 “우리”는 이미 주장한 대로 유대인만을 가리킨다. 3:10에 의하면, 그들은 율법 순종에 실패함으로 저주아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3:13a가 4:4b-5a와 상통함이 현저함을 보이기 위해서 13절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저주가 되셨다. 이제 이것을 4:5a과 비교하면, 우리는 4:4b-5a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 아래의 실존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실존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 즉 율법의 자주 아래 있는 실존을 묘사하기 위해서 바울은 갈 3:24-25에서 παιδαγωγός라는 metaphor를 고용하고 있다. παιδαγωγός는 선생이 아니라, 종으로서 주인의 아들이 어디를 가든지, 특별히 학교를 갈 때 동행한다. 그의 임무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 소년을 보호하고, 그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행동에 대해서 책망과 처벌을 포함한다. 이 παιδαγωγός는 그 소년이 성년이 되기까지 그를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한다. 그런데 그 당시 많은 παιδαγωγός들 중에는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례하고 거칠게 소년들을 다루는 자들이 많았다.
많은 학자들은 παιδαγωγός의 주요 임무가 소년을 모든 종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그에게 합당한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 3:34-25의 문맥에서 우리는 율법의 그러한 보호적이고 교육적인 역할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문맥은 παιδαγωγός의 불유쾌한 속박이 metaphor의 핵심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3:24에서32 바울이 παιδαγωγός와 율법을 비교한 것은 3:23의33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23절은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으로       παιδαγωγός 아래의 실존은 자유가 없는 노예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은 율법의 지배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Luther, Ridderbos, Cole, Suh). 그들은 3:24에서 είς χριστόν을 “그리스도에게로”라고 이해하여, 율법이 억압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에 대한 열방을 창조함으로써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είς χριστόν의 είς는 문맥에서 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cf. 3:19; 3:23(2번); 3:25; 4:2, 3). 또한 우리가 고려할 것은 갈 3:15-4: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전의 율법의 예속시키는 기능을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갈 4:2에서34 바울은 율법 아래의 노예상태를 being ύπό ʾεπιτρόπους καί οʾικονόμους으로 묘사하고 있다. (4:1의 초두에 나온 λέγω δέ가 암시하는 것처럼, 갈 3:23-29의 기본사상이 4:1-7에 반복되어 있다.) ʾεπίτροπος는 아버지나 법원이 정한 때까지 미성년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후견인이다. οʾικονόμος는 보통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4:1에서 바울이 “(갈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상태는 어린 상속자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자기 재산에 대하여 아무런 자유를 행사할 수 없는 노예상태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서 4:3이하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의 노예상태를 being ύπό τά στοιχεΐα τοΰ κόσμου와 비교하고 있다. τά στοιχεΐα τοΰ κόσμου는 4:9에서 단순히 τά στοιχεΐα 라고 불리우고 있다. 헬라 고전 문학에서 τά στοιχεΐα 는 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1) 지식의 요소 또는 근본적인 원리들; (2) 땅, 물 공기, 그리고 불과 같은 우주의 물질적인 요소들. 이것들은 이방인에 의해서 신들로 숭배되었다. (3) 그러나 Justin Martyr의 Second Apology를 보면, στοιχεΐα가 천체들, 특별히 자연의 계절에 영향을 미치는 해와 달, 그리고 다른 혹성들을 가리킨다. 이것들도 이방인들에 의해서 신들로 숭배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τά στοιχεΐα τοΰ κόσμου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내 논문은 8개의 다른 학설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다양한 학설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
(1) 4:3-5에서35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와 τά στοιχεΐα τοΰ κόσμου의 노예 상태가 병행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율법과 στοιχεΐα를 비교하지 않음). (2) 4:8은36 στοιχεΐα가 이방인에 의해서 신들로 여김을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자들”이란 표현은 이방 다신교에 대한 전형적인 유대인의 비판을 상기시킨다.(e.g. 사 37:19; 레 2:11; 5:7; 16:20).37 (3) 마지막으로, 4:9은38 갈라디아인들이 στοιχεΐα의 노예로 돌아가려는 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4:10에서 천체 숭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칼렌다 준수를 갈라디아인들이 행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στοιχεΐα가 이방 종교에서 신으로 숭배된 천체와 우주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는 Betz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것을은 1:4에서39 언급된 “ 이 악한 세대”를 지배하는 마귀적인 세력을 대표한다. 이 마귀의 세력은 그리스도 이전과 밖에 있는 모든 인간을 지배한다. 그래서 우리는 στοιχεΐα 밑에 있는 노예 상태와 율법 아래 있는 노예 상태를 바울이 동일시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실존 상태는 자유가 없고, 압박에 복종된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율법 아래의 실존과 육체에의 복종을 바울이 갈 5:16-18에서40 병행시키고 있음을 관찰한다. 5:18과 5:16. 여기서 육체는 성령과 반대되는 세력으로서, 옛 시대의 악한 세력이다. 이 세력에 복종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율법의 저주 밑으로 끌어내린다. 그러므로 육체에 복종하는 것과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과는 동일한 것이다.
요약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범법을 생산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그 결과 율법은 모든 범죄자를 그 저주 아래 가둔다. 바울은 이러한 감금상태를 3:25에서 소년 인도자, 그리고 4:2에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놓인 자유 없는 상태와 비교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율법 아래의 감금 상태를 3:22에서 죄, 4:3, 9에서 마귀의 세력, 그리고 5:13 이하에서 육체 아래의 노예 상태와 연결시킨다.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유대인의 실존이다. 이 특수한 노예 상태는 죄와 마귀의 육체 아래 있는 우주적인 인간의 절망 상태를 대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서문에 해당한다.
 

3.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갈 3:25에서 바울은 율법의 지배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종식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4:4b는41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셨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진술은 하나님께서 선재하는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다.
 4:4c는42 그 아들이 어떻게 나타나셨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참된 인간이 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가 구속하러 온 사람들의 수준까지 낮아지심을 의미한다.
“율법 아래 나다”라는 말은 주석가들을 당혹시키는 말이다. Burton이나 Cole 같은 학자들은 그 말을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야 만 하는 의무를 가진 유대인의 한사람으로서 태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율법 아래”가 ‘율법의 저주 아래’를 가리킨다는 좀전의 우리의 주장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주장이 옳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탄생시에 유대인이 율법을 불순종함으로 초래한 모든 저주를 자기 몸에 짊어 지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성이신의 깊은 낮아지심을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같은 수치스러운 도성이신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의미 있는 단계이다. 그 도성이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의 연약함에 복종하고, 오해를 받고, 천대를 받고, 거절당하고, 고난을 받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으셨다.(우리는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형을 당하신 것은 그가 이미 저주가 되셨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완전히 제거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셨다(갈 3:13). 이 특수한 구속(유대인의 구속)은 우주적인 결과, 즉 죄와 마귀의 세력과 육체로부터 모든 사람의 구속을 가져왔다. 그 이유는 유대인이 모든 인류의 대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도성이신, 고난,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완전히 동일시하셨다.
3:23-4:7과 병행되는 갈 2:18-2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수혜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갈 2:19에서 “나”는 바울 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우선적으로 대표한다. 또한 2:19의 율법은, 율법과 하나님이 대조되어 나타난 것으로 봐서, 3:23-:7에서와 같이 옛 시대의 악한 세력을 가리킨다. 이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죽었다. 이것은 율법의 예속시키는 능력으로부터 완전한 결별을 의미한다.(여격 νόμω와 θεώ는 관계를 나타내는 여격이다). 그 결별의 결과는 율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율법에 대한 죽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리는 2:19a(실제로는 2:20a가 19절에 포함되어 있음)에서 환언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당하심과의 사이에 아주 가까운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에서 본 대로 율법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율법의 저주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으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 믿는 자들 또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율법의 저주와 그것의 포악한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구출된 것을 옛 기대로부터 새 시대에로의 종말론적인 이동이라고 이해하고 있다(cf. 1:4; 6:14). 그러므로 이 구출은 죄와 마귀와 육체와 같은 옛 세력들로부터의 구출이다.
이 해방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2:19b). 하나님께 대한 이 새로운 삶은, θεώ를 advantage(여격)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으로 이해되었다(Burton, Ridderbos, Fung). 이 의미가 여기서 완전히 제외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바울의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2:19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과 옛 세력으로서의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이 정면으로 대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새 삶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다스림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다. 2:20a는 이 삶을 새 시대의 주인인 그리스도께서 안에서 사시고 control하는 삶으로 묘사되어 있다. 5:25에서 그 삶은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에 지배를 받는 삶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IV.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1. 율법과 사랑
우리는 앞에서 율법의 두 독특한 기능인 시내산 언약의 의무와 예속시키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종식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아무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어떤 학자들이(Drane, Huebner) 주장하는 대로 갈라디아에서 율법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완전히 부정적인가?
위에서 본대로, 선동자들의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서 혼동과 논쟁과 분쟁을 일으켰다. 그럼으로써, 아주 심각하게 그들의 하나 됨을 위협하였다. 5:15은43 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5:14에서44 말하고 있다. 5:13-14에 나타난 일반적인 권고는 6:1-2에서45 상술되고 있다. 1절에서 바울은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여기서 우리가 관찰해야 할 것은 5:14과 6:2에서 율법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대치하거나, 그것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 사랑은 완성(the fulfillment of the law)이라고 말한다. (5:14 fulfill{πεπλήρωται - πληρόω} ;        6:2 ʾαναπληρώσετε - ʾαναπληρόω). 이것은 바울이 5:12까지 율법을 냉혹하게 비판한 것을 고려할 때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 ; 율법의 저주 ; 율법은 범법을 생산한다 ;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긍정적인 율법에 관한 진술을 앞에 나오는 부정적인 율법에 대한 견해와 관련시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Raeisaenen이 주장한대로, 바울은 자기 모순에 빠져있는가? 아니면, 그는 앞에서 언급한 율법과는 다른 율법을 5:13이하에서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는 율법의 다른 측면을 제시하고 있는가?
5:14과 6:2에서 나오는 율법의 긍정적인 진술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5:14의 ʿο π΅ας νόμος와 6:2의 ʿο νόμος τοΰ Χριστοΰ의 identity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러나 Huebner는 그것이 모세의 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Huebner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자세한 것은 내 논문을 보라.
그러면 6:2의 ʿο νόμος τοΰ Χριστοΰ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에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Davies는 ʿο νόμος τοΰ Χριστοΰ를 메시야의 법, 즉 메시야의 새로운 토라이다고 주장한다. 비슷하게 Stuhlmacher는 그리스도의 법을 시내산 토라와는 다른 시온 토라라고 생각한다. Dodd는 그리스도의 법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한다. Gutbrod, Furnish, Beker, Fung과 같은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이 5:14에서 언급된 사랑의 계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Guthrie, Raeisaenen, Hays는 그리스도의 법의 ‘법’을 은유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의 법이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모범적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ʿο νόμος τοΰ Χριστοΰ가 모세의 법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그 이유로 우리는 5:14과 6:2이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두 진술을 똑같은 주제, 즉 사랑에 의한 율법의 완성을 다루고 있다. 이 두 진술의 주동사는 πεπλήρωται와 ʾαναπληρώσετε인데, 그들은 동의어로서 같은 어간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5:14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고, 6:2은 특수한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조 분석에 의하면, 5:13-24과 5:25-6:10은 일반과 특수의 관계에 서있다.) 실제로 6:2의 권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5:14의 권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의 특수한 표현이다. 이러한 관찰 때문에 우리는 6“2의 ‘그리스도의 법’은 5:14의 ‘온 율법’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5:14의 온 율법이 모세의 법이기 때문에 6:2의 그리스도의 법은 반드시 모세의 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온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이 모세의 법을 가리킨다면, 모세의 법이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성취된다, 완성된다)라는 5:14과 6:2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2을 우리는 이렇게 바꿀 수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짐<하나의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으로써 성취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fulfill이다. 이 영어 단어는 5:14에서 πληρόω이고, 6:2에서는 ʾαναπληρόω이다. 그러나 롬에서 율법의 완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8:4; 13:8) πληρόω만 사용되었다.
Schlier, Raeisaenen, Huebner, Thielman 등은 πληρόω가 poiέω와 같은 의키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Betz가 올바로 관찰한 대로, 바울이 율법을 ‘행하는 것’과 ‘성취하는 것’과의 사이에 조심스런 구별을 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시내산 언약 아래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다 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갈 34:10, 12 ; 5:3; 롬 10:5). 그러나 새 언약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의무 아래 있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율법을 ‘성취한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행하라’고 결코 명령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과 율법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갈 5:14; 6:2; 롬 8:4; 13:8; cf. 롬 13:10; 마 5:17).
Furnish와 NEB, JB, TEV, NIV와 같은 영어 성경 번역들은 πληρόω를 롬 13:9에 나오는 ʾανακεφαλαιάω(sum up)과 동등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이유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롬 13:8-9에서 바울은 πληρόω를 ʾανακεφαλαιάω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둘째, πληρόω가 sum up의 의미로 사용된 예가 신약, LXX,  그리고 고대 헬라 문헌에서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내 생각엔, 가장 좋은 해석은 πληρόω를 ‘참된 의도를 충족시킨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Westerholm, Barclay).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낱낱이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해방되었지만, 율법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으로(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한다는 말은 율법의 참된 목적과 의미가 사랑을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말은 사랑이 전 율법을 취소하거나 대치하거나 혹은 흡수해 버린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상세한 지침이 없는 사랑은 낭만주의에 기초를 둔 막연한 관대함이나 또는 충동적인 즉석 연주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롬 13에서 율법의 완성에 대하여 말하면서 바울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라고 분명히 말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진술은 십계명 중 4계명의 인용 바로 다음에 따라 온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그러한 계명들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그전 13:6에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비록 사랑은 율법의 계명들을 낱낱이 지키는 것들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오히려, 사랑은 율법을 올바른 관점으로 조명하여 율법이 사람들에 의해서 오용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궁극적으로 사랑의 표현임을 말해준다. (공의와 사랑과의 관계, 공의는 사랑 없이도 존재, 그러나 사랑은 공의를 포함하면서 초월).
랍비 유대교에서도 또한 우리는 사랑이 율법의 모든 계명들의 핵심으로 여겨 지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아키바라는 랍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토라 라에 있는 대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대교의 이러한 입장은 바울의 입장과 똑같은 것이 아니다. 랍비들에게 있어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의 모든 규례들을 실제적으로 행한다는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은 할례 그리고 율법의 다른 조항들이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이장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갈 5:6; 6:1546(cf. 2:3이하; 6:12-13)은 그리스도안에서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2:14이하는 유대 그리스도인이 음식법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음식법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완전히 부적절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서, 4:10은47 이방 신자들이 유대인의 축제일들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과거 신들을 섬기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율법의 이 조항들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전형적으로 유대적이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그것들은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강력한 유대인의 상징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것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Sanders는 이에 대해 바울이 아무런 이론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 대답을 바울의 그리스도의 사건의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저주를 짊어 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도래시켰다. 이 은혜의 시대에 아브라함의 축복은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근거하여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받아 들이셨다.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바울의 “이웃”에 대한 개념은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유대교 안에 있을 때 바울은 “이웃”을 동료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는 “이웃”을 민족과 국적을 초월한 모든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크는 것으로 본다. 그 결과, 바울은 레 19:18의48 이웃 사랑의 계명을 유대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배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방 그리스도인들까지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이유 때문에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과 같은 전형적인 유대인의 규례들, 즉 유대인을 이방인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율법의 조할들의 준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러한 조항들을 지키는 것을 고집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 안에 하나의 벽을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럼으로써, 그 공동체의 사랑의 하나됨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 된다.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반대하는 것이다(cf. 갈 2:14이하).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율법의 특수한 준수들을 갈라디아서와 다른 서신에서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Raeisaenen과 Sanders가 주장한 대로, 이웃 사랑안에서 완성되는 “온 율법”(갈 5:14)은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이 제외된 축소된(그러니까 소우 도덕법만을 포함하는) 율법인가? 여기서 우리는 “완성”이라는 말이 율법의 모든 문자적인 요구들에 부응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요구의 참된 의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 율법”이 율법 전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갈 5:14의 진술뒤에 있는 바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예 언약에서 율법 준수는 출애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다.
(2) 새 언약에서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다(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한 측면이 아니라 그 삶의 전 내용과 방식이다).
(3)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전 율법의 종말론적인 완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비록 율법의 어떤 조항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하지 않지만 전 율법의 참된 정신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은 오직 율법의 내적 의미만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율법을 구체적인 도덕 가이드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갈 5:14에서 레 19:18을 인용한다. 율법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사상이 또한 나타나 있는 롬에서 바울은 십계명을 13:9에서 인용하고, 1:24-27에서 동성 연예를 정죄하면서 레 18:22과 2:13을 염두해 두고 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고전 14:34에서49 여자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면서 율법에 호소하고 있고, 5:1-5에서 성적 문란을 꾸짖으면서 레 18:8과 20:11을 의심없이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바울이 율법을 그것을 민족적인 제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의 표현, 특별히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율법은 올바로 해석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표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믿는 자에게 율법을 행하라거나 순종하라고 결코 명령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히려 그는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단순히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율법 완성이 사랑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 완성에 대해서 말할 때 결코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있다.
 

2. 율법과 성령
갈 5:14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은 5:16-24에서 더욱 발전되고 있다. 5:16에 있는 λέγω δέ가 이것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의 완성이 궁극적으로 성령에 의한 삶의 결과임을 단언하고 있다. 외냐면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5:22). (모든 다른 성령의 열매는 사랑의 표현이다. Cf. 고전 13:4-7). “열매”라는 Metaphor가 시사한 대로 성령은 사랑의 내적 원천과 힘이다. 믿는 자의 사랑은 성령의 내적 사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리하여 율법은 성령의 능력 아래 사는 믿는 자의 삶 안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5:23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κατά τ΅ων       τοιούτων οʾυκ ʾέστιν νόμος. 중성복수 τ΅ων τοιούτων은 9개의 성령의 열매를 가리킨다.
κατά는 againinst를 의미한다. NEB와 Styler는 그것을 dealing with, with respect to, in realtion to로 이해하여 성령의 열매를 율법과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근거로 5:18을 가리킨다. 그러나 5:18의50 under the law = under the curse of the law이다. 또 우리가 앞에서 본대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율법의 페지로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κατά + 소유격은 dealing with, with respect to, in realtion to의 의미로 사용된적이 한 번도 없다. 또 많은 학자(Burton, Guthrie, Yates, 한국말 성경)들은 νόνος를 일반적인 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5:23이하의 사상은 5:14과 5:18의 사상과 잘 들어 맞는다(아래를 보라). 그러므로 5?:23이하의 νόμος는 모세의 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5:23이하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율법은 그러한 것들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 말은 즉, 율법은 그러한 것들을 반대하여 심판을 선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5:21과 비교하라). 사실, 성령의 열매는 율법의 기본 정신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5:23이하는 성령의 열매는 율법의 참된 의도를 완전히 만족시킨다는 말을 강조하는 단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자동적으로 생산하지 않는다. 5:13은51 육체가 이미 성령을 소유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윤리적인 삶의 심각한 위협임을 말하고 있다. 육체는 옛 시대의 악한 세력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패배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정과 욕심을 소유하고 있으며(5:24), 성령의 열매와 반대되는 육체의 일을 생산한다. 그럼으로써 육체는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을 율법의 자주 아래 끌어내린다(5:18). 사실, 육체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성령과 반대되는 세력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는 육체와 성령의 갈등 안으로 인도되었다. 그리하여 5:1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절은 많은 해석가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이다. 어떤 학자들은(Lightfoot, Althaus, Ridderbos, Dunn, Cole, Raeisaenen) 갈 5:17을 롬 7:14-25와52 연결시켜 육체와 성령의 싸움을 묘사하는데, 그 결과는 육체가 믿는 자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Jewett, Guthrie, Arichea & Nida) 16의 약속의 빛 아래서 17절을 이해한다. 그들에 의하면, 17절은 육체와 성령의 갈등을 말하고 있는 데, 그 결과 성령은 믿는 자로 하여금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17절은, 특별히 17절 이하는, 육체 또는 성령의 일방적인 승리보다는 육체와 성령의 상호 적대를 분명히 묘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또한 17절은 “너희의 원하는 것”이 육체나 혹은 성령에 의해서 자극된 원함을 가리킨다는 어떤 인디케이터가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5:17이 성령과 육체의 갈등안에서 믿는 자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Fung, Hong). 그는 육체를 섬기든지 아니면 성령을 따르든지 해야 한다. 여기서 17이하의 ʾίνα는 결과를 나타내고, “너희의 원하는 것”이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믿는 자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대한 자유로운 주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육체에 복종하든 아니면 성령을 따르든지 양자 택일을 해야한다.
물론 이것은 승리가 온전히 믿는 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말 기억해야 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이 악한 세대에서 구출하셨다는 것과 믿는 자는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함으로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5:24).53 그 결과 믿는 자는 지금 성령 안에 산다(cf. 5:25).54
이와 같이 신학적인 바탕에 근거하여,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5:16에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로 한 심각한 결심을 포함한다. 성령은 옛시대의 악한 세력인 육체의 세력을 파괴할 수 있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자신을 성령의 능력에 맡기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한다.
이러한 진리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성령은 육체에 저항 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특징되어지는 성령의 열매를 생산하는 능력을 공급한다. 4:6에55 보면,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인정하게 된다. 나는 이 인정이 필연적으로 그의 아들의 십자가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동반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바울은 롬 5:5에서56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란 문맥을 고려할 때 subjective genitive로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이 더 나아가서 믿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도록 인도하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강권하다고 말할 수 있다. 믿는 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바울에 의하면, 그것은 이웃(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공동체의 동료 일원을 가리킴)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자기 백성을 위하여 희생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자기 사랑을 보여 준 것처럼, 믿는 자들은 자기 이웃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해진 이 믿는 자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리하여 바울은 5:18에서 만약 믿는 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다면, 그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6:8b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말한다. “(갈6:8)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나 육체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의 혜택을 포기하고 육체 아래의 옛 노예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율법을 완성하지 못하고 육체의 일을 생산하므로, 정죄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5:21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6:8a도 동일한 선언을 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cf. 롬 8:1-4; 13:8-14).
그러면 이와 같은 행위 심판의 교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토록 정렬적으로 논증하고 선포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결국 부인하는 것인가? 이 두 가르침은 서로 상반되는 것인가? 그들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함 법정적인 개념으로서 죄용서함을 선언받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근본적으로 언약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으로서, 죄용서함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 악한 주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주인에게 모든 충성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와 마귀와 육체와 같은 악한 세력들이 지배하는 악한 시대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로 이동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윤리적으로 볼 때,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육체의 정욕에 복종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이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이 세상 주관자들에게 노예처럼 완전히 예속되어 살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계속적으로 이 악한 세상의 절대 군주들에게 구원을 받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성취 불가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다스리심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이다. 이런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생산하게 된다. 그리하여 율법은 완성된다. 이런 자들에게 율법은 정죄를 선언할 수 없다<갈 5:23이하>.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에게 주어지고, 영생의 복이 임한다<갈 6:>).
결론적으로 말하면, 비록 율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로 시내산 언약의 의무와 예속시키는 능력으로서의 두 기능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믿는 자에게 율법을 행하라고 결코 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옛 언약 시대에는 율법의 모든 외적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중요한 의무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 시대에는 그것이 더 이상 효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훨씬 더 깊은 헌신, 즉 성령의 절대 주권적인 다스림에 전 삶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위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이웃을 사랑하도록 강권을 받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안에서 율법의 전 의도는 실현된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의 모든 계명은 명시적이든지 아니면 암시적이든지 사랑의 총망라적인 요구를 표현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결     론
지금까지의 우리의 연구가 정당하다고 한다면, 우리의 연구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
1. 바울은 유대 종교의 율법을 잘못 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Raeisaenen은 바울이 자기 당대의 율법을 언약의 틀에서 분리시켜 구원의 수단으로 완전히 잘못 제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철저히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이 유대교를 포함하여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유대교가 율법주의적인 종교이고 율법이 의와 구원의 수단이 되어 있기 때문이거나(전통적인 해석), 혹은 당대의 유대교가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하였기 때문이거나(Sanders), 혹은 율법이 유대종교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특수한 민족에게 한정시키는 사회학적인 기능 때문이(Dunn, Wright, Barclay) 아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건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범죄 때문에 그들 위에 임하였던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써(갈 3:10,13),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우주적인 구원의 약속(창 12:3; 갈 3:8)을 성취시켰으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와 더불어 새 언약을 재정하셨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옛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한 이스라엘에 의하여 파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2.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관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Huebner는 바울의 초기 서신인 갈라디아에서는 율법이 전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어 있고, 반면에 후기 서신인 로마서에는 갈라디아서와는 대조적으로 긍정적인면이 많이 나타나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두 서신 사이에 율법에 관한 진화론적인 발달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권면 부분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은 모든 율법의 성취라고 말하면서 새 시대에 있어서는 율법의 유효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Huebner의 주장은 정당치 않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묘사되어 있는 율법이 정확하게 동일하지 않는 것은 율법에 관한 바울 자신의 사상적 발달 때문이 아니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수신자와 그들의 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강조점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3. 갈라디아서에 있는 율법에 관한 바울의 취급이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Raeisaenen은 갈라디아서 자체 안에서도 율법에 대한 바울의 묘사가 서로 불일치를 보이고 서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이것이 상호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바울이 다른 관점에서 율법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언약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율법 준수를 언약에 머물러 있기 위한 조건으로 본다. 그렇지만 그는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율법의 역할을 존재하는 상황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기 위하여 범죄를 산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의 율법에 대한 Raeisaenen의 접근은, 비록 그의 주장이 가끔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단수하여 바울의 부유한 사상을 잡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결론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에 관한 언급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일 우리가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는 동일한 주제를 접근하는 데 있어서, 각 서신의 전체적인 수사학적인 구조와 상황,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과 그리고 다양한 신학적인 관점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바울의 불일치에 관한 대부분의 비판이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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