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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1

율법과 복음 1
 http://blog.naver.com/holyhillch/60046706340 홍인규
 
차    례
서 론 1
 I.      에 대한 바울의 이해 2
 II.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 4
   1. 율법은 구원(입회)의 조건이 아니다. 4
   2. 율법은 시내산 언약 안에 계속 머무르기 위한 조건이다. 9
   3.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독특성의 심볼이다. 15
 III. 예속시키는 세력으로서의 율법 17
   1. 율법과 죄 17
   2. 율법의 속박 20
   3.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25
 IV.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27
   1. 율법과 사랑 27
   2. 율법과 성령 31
결 론 36

차    례
서 론                                                                                    1

   I. νόμος에 대한 바울의 이해  
                                                         2
   II.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                                                      4
      1. 율법은 구원(입회)의 조건이 아니다.                                               4
      2. 율법은 시내산 언약 안에 계속 머무르기 위한 조건이다.                             9
      3.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독특성의 심볼이다.                          15
   III. 예속시키는 세력으로서의 율법                                                     17
     1. 율법과 죄                                                                      17
      2. 율법의 속박                                                                    20
      3.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25
   IV.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27
     1. 율법과 사랑                                                                   27
      2. 율법과 성령                                                                    31
결 론                                                                                      36
 
율법과 복음
 강사 : 홍 인규
 서       론
율법은 바울 신학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것은 바울의 신학과 윤리의 여러 주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주제이다. 그래서 바울의 율법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사상을 공부하는 데 절대 필요하다.
바울 서신에서 율법은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Schoeps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도 “바울의 신학에서 가장 복잡한 교리적인 이슈”이다. 그 난해성은 주로 바울의 율법관에서 나타난 외견상의 모순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을 부정적으로 말한다. -때로는 아주 냉혹하게. (1) 칭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갈 2:16; 3:11; 롬 3:28). (2) 율법은 약속보다 열등하다(갈 3:15이하). (3) 율법은 범법함을 (생산하기)위해서 주어졌다(갈 3:19). (4) 율법은 죄를 더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롬 5:20; 7:5, 8-13; cf 고전 15:26). (5) 율법은 생명을 공급해 주지 못한다(갈 3:21). (6)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갈 2:19; 롬 7:4).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갈 3:25; 5:1 롬 7:6). (7)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롬 10:4). 등등.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1) 율법은 거룩하고 (롬 7:12), 영적이다(롬 7:14). (2) 율법은 지식과 진리의(구체적) 표현이다(롬 5:20). (3) 계명은 생명을 위한 것이다(롬 7:10; cf 갈 3:12). (4)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을 세운다(롬 3:31) (5) 모든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갈 5:14; 롬 13:8, 10; cf 갈 6:2; 롬 8:4) 등등.
그러므로 지금까지, 특별히 지난 20-30년 동안에, 바울과 율법에 대하여 막대한 양의 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엄청난 학자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의견의 일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더욱 더 많은 다양한 의견들만 생산되었다. 모든 의견들을 여기서 다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현재까지 제안된 것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들만 소개하겠다.
1. 수많은 학자들은 율법주의적으로 사용된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을 구분하거나(Burton, Cranfield, Moule, Ladd),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분하거나 (Haufe, Kaiser, Schreiner), 또는 모세의 토라와 메시야 토라 사이를 구분하여(Davies, Longenecker. Stuhlmacher) 바울의 율법관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2. 어떤 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 불일치(inconsistencies)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진술들을 발전적인 구도(developmental scheme) 안에서 조화시키려고 시도한다. Drane, Huebner, Wilckens에 의하면, 바울의 사상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에 로마서를 쓸 때 사이에 의미있는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갈라디아서에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는 데 반하여, 로마서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적 부정에서 긍정으로 발전되었다고 이해한다.
3. Sanders는 갈라디아에서 로마서로 직선적인 발전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로마서에서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 내적 긴장과 불일치가 있음을 인식한다. 예를 들면, 롬 1:18-2:29에서 바울은 우주적인 죄를 주장한다. 그러나 2:14-15, 25-29에서는 어떤 자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보고 있다.
Raeisaenen은 Sanders보다 더 과격한 입장을 취하여, 바울의 율법 신학에서 모순과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율법의 계속적인 유효성, 성취 가능성 등.
4. Dunn은 Raeisaenen와 Sanders의 견해에 만족치 못하고, 그들이 바울의 저작의 (서신의) 사회적인 문맥과 그 당시의 문맥과 그 당시의 율법의 사회적인 기능의 온전한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Dunn에 의하면,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구분하는 율법의 사회적인 기능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우월의식을 공격하고 있다).
5. 이상의 모든 주장에 반대해서, Westerholm은 바울에 대한 Luther의 이해를 복원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세의 율법은 생명을 이해서 “doing"(순종)을 요구한다(갈 3:12; 롬 10:5; 레 18:5).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상의 모든 견해들은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바울과 율법이란 주제는 이해할 만한 해결을 위해서 과학적인 탐구(연구)를 요구하는 문제이다.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바울 서신의 각권에 들어 있는 율법에 관한 진술에 대하여 완전하고 철저한 연구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바울 서신의 각권은 그것의 독특한 수사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상황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복잡성 때문에 필자의 연구는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때때로 로마서와 다른 바울 서신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I. νόμος에 대한 바울의 이해
율법은 헬라어로 νόμος이다. 이 νόμος는 갈라디아서에 32번 나온다. (롬 72번). 갈라디아서에서 νόμος는 때때로 정관사와 함께 (ό νόμος, 11번), 다른 때는 정관사 없이 (νόμος, 21번) 나타난다.
Lightfoot에 의하면, ό νόμος 와 νόμος는 의미의 차이 없이 서로 바꾸어 사용된다(갈 3:11-12, 23-24; 롬 2:23-27).
Blaeser에 의하면. 정관사의 존재와 무는 다음과 같은 언어학적인 규칙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첫째로, νόμος가 소유격으로 사용될 때는 정관사가 붙지 않는다.(갈 2:16; 3:2,5,10). 둘째로,, 전치사구에서 νόμος는 보통 정관사를 동반치 않는다(갈 2:19, 21; 3:11, 23; 4:4, 5, 21; 5:4, 18). 예를 들면, ύπο νόμον έν νόνω, 그러므로 ό νόμος는 νόμος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νόμος는 갈라디아서에서 시내산 위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압도적으로 가리킨다(3:17; cf. 4:24). 그러나 예외가 있다. (1) 3:21b는 가정적인 진술인데, 거기서 두 번 사용된 νόμος는 any divine law를 의미한다(비록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divine law의 최고의 예로 생각했겠지만). (2) 4:21에서 νόμος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갈의 이야기를 지칭한다.
5:23b에 나오는 νόμος를 많은 학자들은 예외적인 범주에 포함시킨다(Burton, Guthrie, Moo, Yates). 5:23b를 읽으라.1 그러나 필자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갈 5:18-23에서 바울은 성령과 모세의 율법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5:18은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율법 아래”는 모세의 율법의 저주 아래를 의미한다. 5:18의 선언의 기본적인 사상은 5:23b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육체의 일에 반대되는 성령의 열매를 나열한 후에(5:19-23a), 5:23b에서 바울은 κατά τών τοιούτων ούκ ʾέστιν νόνος라고 말한다. 이 헬라어의 문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율법은 이러한 것들(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을 반대하지 않는다”가 된다. 그 이유는 5:14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온 율법은 성령의 주요한 열매인 사랑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cf. 롬 8:4). 그러므로 갈 5:23b의 νόνος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또한 Bultman, Gutbrod, Bauer, Fitzmyer, Raeisaenen과 같은 학자들은 갈 6:2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법”을 비유적인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5:14에서 모세의 율법을 의미하는 “온 율법”과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6:2의 “서로 다른 짐을 지라”는 5:14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명령의 구체적인 표현 그 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의 complete unit 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바울이 νόνος를 항상 단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의식법, 시민법, 또는 윤리적인 법 사이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갈 5:3에서 바울은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율법 전체”는 5:14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 가운데서 완성이 되는 “온 율법”과 동일하게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 전체를 하나로 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모세의 율법을 바울은 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것들은 시내산 언약의 의무, 예속시키는 능력(세력),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다.
 

     II.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
1. 율법은 구원(입회)의 조건이 아니다.
갈라디아 지방에서 활동한 바울의 대적자들의 주 issue는 누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이방 갈라디아인들을 아브라함의 언약의 국외자(outside)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그 대적자들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는 믿음 외에 할례와 율법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분명히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믿음을 수단으로 한 구원과 행위를 수단으로 한 구원과를 대조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할례와 율법을 이방인의 경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추가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새 언약의 시대에는 누구든지 믿음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것은 즉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필요 충분 조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에다 할례와 율법을 더 요구하는 것은 믿음을 불 충분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효화하고 하나님의 절대 은혜를 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이유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기의 율법관을 제시하고 있다.
율법은 구속사에서 여러 기능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에 관한 한, 율법은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 의도된 적이 없다. 바울은 갈 3:6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칭의는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드는 것은 지극히 권위가 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칭의 경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의 모범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갈 3:6에서 창 15:을 인용하고 있다.2
대적자들은 율법의 선재(pre-existence)를 전제하여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해석한다. 시련의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표현되는 데, 이것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시험 때에 가장 극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렇게 대적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적 성취(meritorious achievement)로 이해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righteousness)의 실제 행위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창 15:6을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라는 말은 창 15:5의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리라고 확신했다는 뜻이다.3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 수용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것은 어떠한 선행과도 반대되는 개념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면 율법은 430년 이후에 주어졌기 때문이다(갈 3:17)4.-여기서 율법 선재 개념은 부인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롬 4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믿음은 행위와 반대 개념이다(롬 4:2-4).5 그것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롬 4:5),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롬 4:5, 17)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이루어지기 힘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이다(롬 4:18-21).6 이러한 과격한 믿음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위와 같은 아브라함의 예에서 바울은 3:7에서7 믿음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테제를 도출해 내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처럼 믿는 자들은 그의 참 자손이다는 것과 믿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윈리는 새 시대에 이방인에게도 적용된다. 왜냐면 갈 3:88-여기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칭의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유한 자들은 누구든지(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없이) 아브라함과 함께, 즉 아브라함과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것은 구속사의 초두부터 믿음만이 하나님의 정하신 칭의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Howard는 갈 3:7(또한 갈 3:9)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는 구절에서 믿음이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한 Hays는 갈 3:7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란 구가 3:11에 인용되어 있는 메시야적인 구절인 합 2:4에 대한 암시적인 언급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믿음이 메시야의 신실성이라는 의견을 개진한다. 이와 같은 의견들은 바울의 논쟁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다. 여기서 여러 가지 반대 주장을 제시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3:7의 첫 단어인 ʿάρα를 주목하는 것이다. 이 헬라어 단어는 추론적인 불변화사인데, 그것은 3:7이 3:6에서 추론된 statement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3:7의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행위가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인간의 행위이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Howard나 Hays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튼 아브라함과 똑같은 성격의 믿음으로써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3:1-5).9 여기서 그들이 성령을 받은 방법은 ʾεκ ʾαλοής πίστεως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헬라어는 많은 해설가들을 당황케하고 있다. 그 이유는 ʾακοή나 πίστις나 모두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ʾακοή는 능동적인 의미로는 듣는 행위, 또는 수동적인 의미로는 들어지는 것(즉 메시지 또는 보고)을 가리킨다. 한편 πίστις는 능동적인 의미로는 믿는 행위 또는 수동적인 의미로는 믿어지는 것(즉 기독교 메시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가까운 문맥이 그 헬라어 구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한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갈 3:2, 5에서 ʾακοή πίστεως가 ʾέργα νόμου와 대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ʾέργα는 율법을 준수하는 인간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ʾέργα와 평행 관계를 이루고 있는 ʾακοή가 똑같이 인간의 행위(즉 듣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ʾακοή πίστεως라는 구에서 πίστις는 무슨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갈 3:6의 초두에 나타난 부사 καθώς에 특별한 관심을 모아야 한다. Louw와 Lida에 의하면, 이 부사는 사건과 상태에 유사점을 나타내는 표시물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받음과 아브라함의 칭의 경험은 같은 성격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 갈라디아 사람들은 ʾεκ ʾαλοής πίστεως로 성령을 받았다. 이 평행적 관계는 όκοή πίστεως라는 구에서 πίστις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인간의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όκοή와 πίστις를 모두 능동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ʾακοή는 듣는 것을 의미하고 πίστις는 믿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듣고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은 것처럼, 갈라디아인들의 경험은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경험이다. 왜냐면 갈라디아인들이 바울에 의해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최초로 반응을 보일 때, 그들은 모세의 율법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받음은 그들이 갈 4:6의10 말씀처럼 아들의 영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의롭다하고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케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 성령을 받은 것은 동일한 사건이다. 사도행전에 근거해서, 구원받고 그 후에 성령을 받는다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갈 3:8에서 인용된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창 12:3의 우주적인 약속이 성령을 받음으로 성취되었음을 본다. 이와 관련하여 갈 3:14하반절에서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복의 복의 참여하는 것이 성령의 약속(=약속된 성령, 이미 성령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을 받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평행 관계 역시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약속된 성령의 수여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약속의 성취는 갈 3:6에 함축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무수하리라는 약속의 성취로 자연스럽게 성취된다. 만약 이방인(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들)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여 그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수많으리라는 약속이 성취된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우리는 성령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앞에서 언급한 두 약속의 성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아브라함의 약속들은 성령의 약속이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건의 빛아래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재해석한 것이다.
갈 3:14에서11 성령과 관련되어 ʾεπαγγελία(약속)라는 단어가 처음으로(물론 갈라디아에서) 사용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단어는 다음에 따라오는 pericope들에서 자주 나타나면서 중심주제가 된다. (3:16, 17, 18, 19, 21, 22, 29). 이것은 3:14에서 언급된 약속과 3:16-29에서12 취급된 약속 사이에 가까운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3:16에서 언급된 약속들은 땅에 대한 약속들임이 분명한 것 같다. 그 이유는 3:16의 καί τώ σπέσματί σου(네 자손이라)라는 구가 땅에 대한 약속들과 관련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창 13:15; 17:8; cf. 12:7; 15:7; 24:7). 3:16이하에서도 다른 약속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한 약속이 계속 바울의 염두에 있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그 땅은 원래 가나안 땅을 가리켰다. 바울이 볼 때, 그것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세계를 의미한다. 롬 4:13을 보라.13 이 땅에 대한 약속은 3:6, 8에서 언급된 다른 두 약속과 날카롭게 구분되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세계를 소유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가족 안에 수많은(3:6)14 이방인들(3:8)이15 포함됨으로써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약속 또한 성령의 선물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성령의 오심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의 성취이다.
만약 이방 갈라디아인들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그럼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에 참여하였다면, 그 구원의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믿음에만 근거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약속들을 상속하기 위해서 할례와 율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선동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오직 믿음만이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자손이 되고 그의 약속들에 참여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한 구원의 수단이다. 믿음은 율법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첫 시도가 끝난 후 두 번째로 주어진 길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결코 의도된 적이 없었다.(CF. 루터교파와 세대주의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대조시킨다. 아담-아브라함-모세-새언약).
 

2. 율법은 시내산 언약 안에 계속 머무르기 위한 조건이다.
갈 3:10-13은16 이방인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리라는 약속을 담고 있는 3:8과17 그 약속이 성령의 선물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3:14과의18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3:10-13은 어떻게 아브라함의 복(즉 이신칭의)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자. 그럼으로써 3:10-13은, 특별히 3:10과 13은 바울의 율법 신학의 새로운 차원을 계시해 주고 있다.
갈 3:10은 율법의 저주에 대한 문제를 소개하고 있다(3:10을 보라).(우리는 이미 이 절을 다루었지만, 여기서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3:10의 ʾέργα νόμου(우리 말 성경에는 “율법의 행위”로 번역되어 있음)는 전통적으로 율법의 요구에 순응한 행위로 이해되었다.(Moo; Raeisaenen; Fung; Westerholm).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최근에 여러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Burton, Bring, 그리고 Cosgrove는 ʾέργα νόμου가 율법의 유대적인 오해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ʾέργα νόμου가 항상 칭의의 조건인 믿음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표현을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율법주의적인 율법준수로 해석한다. Full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ʾέργα νόμου는 선행을 근거로 해서 축복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을 매수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ʾέργα νόμου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cf. Bultmann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로써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행위로써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이 말 자체는 옳다). 그러나 바울은 3:13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러한 율법주의적인 율법의 오해로부터의 구속이라고 보지 않는다. 또한 갈 2:16, 21; 3:11; 5:4에서 ʾέργα νόμου가 율법과 맞바꿔 쓰여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ʾέργα νόμου를 시내산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의무의 총계로서의 율법과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서, 롬 3-4에서 τό ʾέργα τοΰ νόμου와 평행관계에 서 있는 ʾέργον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은 ʾέργα νόμου를 율법주의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Dunn은 갈 2:1이하, 11이하; 4:10; 5:2이하; 6:12-13에서 제기된 특별한 이슈들을 주목하면서 ʾέργα νόμου를 일반적인 선행으로 이해하지 않고 할례, 음식법, 그리고 특별한 축제일과 같은 율법의 특정한 준수로 이해한다. Dunn에 의하면, 이러한 특정한 율법 준수는 이방인과 구별된 유대 공동체의 독특성을 드러내 주는 “Jewish identity makers"로서의 역할을 한다.(cf. Tyson, Heligenthal, Lambrecht, Hamerton-Kelly).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율법의 의식적인 조항들만 주창한 것이 아니라 전율법의 순종을 요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ʾέργα νόμου가 교체되어서 사용된 것은 ʾέργα νόμου가 단순히 율법의 특수한 준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시사한다. 게다가 롬 3-4에서 τά ʾέργα τοΰ νόμου와 기능적으로 동등한  ʾέργα는 의식적인(cultic) 율법 준수아닌 일반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Gaston은 ʾέργα νόμου와 대조되어 사용된 믿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faithfulness를 가리킨다고 전제하고 ʾέργα νόμου는 주격적인 소유격, 그니까 율법이 행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Gaston에 의하면, 율법은 능동적인 세력으로서 저주, 죄, 그리고 죽음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 또한 잘못된 전제위에 서 있다. 위에서 주장한 대로 갈 3:1-14에서 칭의와 관련된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인간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ʾέργα νόμου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롬 3-4에서 τά ʾέργα τοΰ νόμου와 병행되어 나타난 ʾέργα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ʾέργα νόμου를 율법에 순응행위로 이해한 전통적인 해석이 여전히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3:10상반절은 율법 순종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3:10상반절의 진술에 대하여 10하반절에 인용된 신 27:26은 그 이유를 제공한다. 이 신명기 인용은 율법 순종 불가능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Drane, Bruce, Moo, Schreiner. Gundry, Lambrecht). 이 견해가 옳다면, 우리는 바울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 (1) 율법을 완전히 순종치 못한 사람은 다 저주를 받는다(10하). (2) 그러나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한다(암시된 전제). (3) 그러므로 율법 순종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10상). (enthymeme).
그러나 Sanders는 이러한 일반적인 학설을 반대해서 3:10에서 바울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논거들을 제시한다. 나는 여기서 Sanders의 설득력있이 없는 모든 논거들을 취급하지 않고 (관심있는 사람들은 내 논문을 보라). 그 중에서 흥미있는 것 하나만 소개 비판하겠다. Sanders에 의하면, 빌 3:6하반절은 율법이 완전히 성취될 수 있음을 말한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바울이 율법을 조금의 흠도 없이 순종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맥 속에서 3:6을 이해할 때 그것은 개종전의 자신에 대한 바울의 평가이다.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바울은 자신의 율법 순종이 완벽했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물론 그의 율법 순종이란 자신이 실패에 대하여 성전에서 속죄 제사를 드린 것까지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밝은 빛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무서운 죄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안에 있을 때 보지 못했던 자신의 종교적 윤리적 파산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존재했던 율법과의 무의식적인 갈등을 새롭게 깨달은 것을 포함한다(cf, 롬 7). (이러한 바울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믿기 전에는 제법 의로운 것처럼 생각했으나, 주님을 만난 후 엄청난 빛이 우리 마음속에 밀고 들어와 숨겨진 모든 죄가 드러나는 경험을 한다.). 그러므로 Sanders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갈 3:10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취하는 것은 여전히 안전하다. 롬 1:18-3:20과 7:1-25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그러나 Sanders는 이 로마서 구절들에서조차 바울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Sanders의 논쟁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수많은 학자들은 율법이 칭의의 수단이 아니라는 바울의 주장의 이유는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e.g,. Wilckens, Moo, Huebner). 이 말은 누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면, 그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인가? 더 나아가서 그것은 율법과 믿음 공히 칭의의 수단으로서 서로 경쟁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견해는 바울의 율법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다. 바울에 의하면, 약속보다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은 약속을 폐하지 못하고(갈 3:17) 약속을 반대하지도 않는다(3:21). 또한 바울은 갈 3:18에서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의 약속에 참여하는 수단으로서 결코 계획된 적이 없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신칭의의 계획을 취소시킬 의도가 단 한 번도 율법에게 주어진적도 없다. 갈 3:11에 의하면, 칭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3:12은 계속해서 율법은 믿음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원칙적으로 칭의의 대안이 아니다. 만에 하나 어떤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앞에서 소개한 Bultmann의 주장은 옳다.
우리가 갈 3:10-13에서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을 제대로 이해할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여야 한다 : 왜 율법은 그것을 완전히 순종치 못한 사람들을 저주하는가?(이미 우리는 이 문제를 논의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논의의 일부분을 좀 더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바울은(이) 범죄자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신 27:26를 인용할 때 히브리 원문에 나타나 있는 “이 율법”을 갈 3:10하반절에서 “율법 책”으로 대치함으로써 그 신명기의 저주를 전 모세의 율법에 적용시켰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모세의 율법이 야웨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인 공동체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야웨의 특별한 관계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99세 되었을 때, 야웨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은혜로 약속하시길(창 17:7)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야웨는 후에 이삭과 그 다음엔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족장과의 언약 때문에 야웨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출애굽 이야기는 실제로 이렇게 시작된다. 출 2:4이후. 출에굽이라는 위대한 구원 사건을 통하여 야웨는 언약에 신실하심을 보이시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입증하였다. 그 후 그는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주어 자기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이니셔티브(initiative)로써 먼저 설립되고, 그 후에 율법이 선포되었다. 환언하면, 언약이 율법을 선행한다. 이것은 즉 율법이 언약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임을 말한다. 율법은 언약의 설립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언약을 맺는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에의 순종은 언약을 설립하기 위해 이니셔티브를 취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이것은 율법이 언약의 의무임을 뜻한다. 율법준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안에 머물도록 한다. 갈 3:12에19 인용된 레 18:5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서 “산다”는 말은 오는 세계에서의 삶을 가리키지 않고, 언약안에서의 삶, 즉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이미 주어진 생명이 계속 이어진다-이 언약 안에 거하는 것은 생명의 축복을 향유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축복이 언약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Noth는 말한다. “사실 신 28에 포함된 축복은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 순종으로 새롭게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미 주어진 언약과 그것 안에 들어 있는 축복이 계속 유지된다. 순종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경험한 언약 백성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떠한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cf. 순종-보상, Bultmann의 말을 기억하라). 그러나 율법 위반은 언약의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저야 할 충성의 포기이다. 그것은 즉 율법을 파기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저주를 초래한다. 이 저주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저주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언약 안에 존재하는 모든 축복의 몰수를 의미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가져온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Noth가 말한 것처럼 “순종과 불순종, 축복과 저주는 양자 모두 똑같은 차원 위에 서 있지 않다.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개의 선택 가능성이 아니다. 율법 준수는 인간의 의무이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보상도 요구할 수 없고, 다만 언약에 속한 축복이 계속 유지된다. 반대로, 범법과 그 결과인 저주는 인간이 자기의 자유 의지로써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cf. 국방의 의무).
바울이 볼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이것은 갈 3:10,13,22,23; 4:4-5에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Sanders는 바울 당시 유대인은 율법 안에 있는 속죄 수단들(즉 제사와 회개)이 범죄를 속하는 데 충분하다고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건의 빛 아래서 그러한 속죄 수단들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만약 그것들이 완전한 것들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바울이 그러한 속죄 수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임박한 파멸을 예언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스라엘 위에 놓인 율법의 저주를 제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갈 3:13에서 일인칭 복수 “우리”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유대인은 모든 민족의 대표 역할을 함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유대인을 구속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는 우주적인 결과, 즉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는 갈 3:8에 인용된 창 12:3에서20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우주적인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을 본다.
이제 바울은 갈 3:10-13에서 율법은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언약의 의무이다. 그것은 결코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완전히 지켜진다해도, 율법에의 순종은 단지 언약과 그 안에 있는 축복이 계속되게 할뿐이다. 그러나 율법 위반은 저주를 불러 일으키고 그 범죄자를 언약에서 추방시킨다.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이러한 율법의 기능은 십자가 위에서 종식되었다(cf. 롬 10:4)21.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례없는 구원의 행위로 새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율법의 이해는 어떤 율법주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똑같은 율법에 대한 이해가 다른 바울서신에도 나타난다. 롬 10:1-10은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의와 하나님의 의이다(3절). 전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10:5)이고 ; 후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10:6)이다. 이 둘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Ridderbos, Beker, Wilckens 등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의, 즉 율법에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의 율법주의적 준수에 기인한 이스라엘의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에서는 바울이 율법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의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힌트가 없다. 또한 바울은 10:2에서 실제로 율법에 대한 열심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Dunn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의는 이스라엘만의 의, 그러니까 언약의 의를 가리킨다. 이와 관련하여 Dunn은 롬 10:3에서 사용된 ʾίδος(one's own)를 “peculiar to me"(나에게 독특한 또는 고유한)의 의미로서 ”mine"(and not yours)로 이해한다. 그리고 στήσαί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로 보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세우거나 확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율법에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롬 10:5에서 레 18:5를 인용한다.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Dunn에 의하면 이 레위기 구절은 “이스라엘의 언약적 의무의 전형적 표현이다.” 이것은 행위를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시도라고 비판하지 않고 언약안에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의, 즉 언약의 의는 율법을 행하고 그 언약 안에서의 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이란 자기 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의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대속하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세우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중단되었다(롬 10:4). 여기서 τέλος는 종지 또는 종료(goal)를 의미한다.
빌 3:9에도 똑같은 구원사적인 대조가 나타난다. 그것은 바울의 의(율법에서 난 의)와 대조적인 하나님의 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난 의)이다. 바울은 전자를 그리스도를 아는 빛아래서 “해(loss)"로 여긴다(3:8). 롬 10:3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이처럼, 여기 율법에서 나온 바울의 의도 전통적으로 인간의 업적에 근거를 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해석되었다(Bultmann, Beare, Ernst). 그러나 문맥에서 그 의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다는 암시가 없다. 오히려 3:7은 그것을 ”유익하던 것(gain)“이라고 불리운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3:5-6에서 율법에서 난 의를 다른 언약적 특권들(즉 할례, 이스라엘에 속함, 율법에 대한 열심)에 포함시킨다. 이것은 그 의가 율법주의적인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아니라 언약의 의(covenant-righteousness)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율법은 언약의 의무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바울의 대적자들이 이방 갈라디아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자손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했지만, 그들도 또한 율법을 언약의 뼈대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순종 덕분으로 선택되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선, 그리스도는 율법을 확인하고 시내산 언약을 강화하기 위해 온 새로운 모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언약을 파괴했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위에 놓인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 죽으셨으며, 그럼으로써 새언약을 수립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바울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행위 의(work-righteousness)의 종교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Sanders는 1977년 그의 저서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그 유대교는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언약 종교라는 것을 아주 설득력있게 입증하고 있다(cf. Neusner).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유대교는 Babylonian exile 이후에 율법주의적인 종교로 변질되었다).
요컨대 갈 3:10-13은 바울이 모세 언약의 관점에서 율법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율법은 언약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고 언약안에 머무는 조건이다. 그러나 율법은 범죄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이러한 율법의 이해는 롬 10:1-10과 빌 3:9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또한 율법과 언약과의 관계에 관한 한, 갈라디아에서 활동한 바울의 대적자들과 1 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도 기본적으로 바울과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3.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독특성의 심볼이다.
최근에 율법에 대한 바울의 비판의 핵심은 율법의 사회적 기능이다는 주장이 상당한 세를 형성해 가고 있다. Dunn이 이러한 유행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cf. Helilgenthal, Watson. Gordon). Dunn에 의하면, ʾέργα νόμου는 유대인의 독특성을 나타내 주는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과 같은 특정한 율법준수를 가리킨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identity를 결정하는 율법의 기능을 공격함을 보여 준다. 그래서 3:10에서 말한 율법의 저주라는 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이스라엘에게만 제한시키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Dunn의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비록 흥미가 있지만, 많은 약점이 있다. 첫째, 우리가 이미 주장한 대로 ʾέργα νόμου는 율법의 어떤 부분만 행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전체를 요구하는 순종행위이다. 둘째, 율법에 대한 바울의 공격은 Dunn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 바울이 저주하고(3:10.13), 범죄를 생산하고(3:19), 예속시키는(3:23이하) 율법에 대해서 말할 때 또한 율법을 죄의 세력(3:22), 마귀의 세력(4:3,9),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반대되는 육체의 세력과 관련시킬 때, 그는 전 율법을 염두해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율법의 그러한 민족주의적인 이해로 부터의 해방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순종하기 위해서 경건치 못한 민족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자연적으로 boundary maker(표시) 역할을 하는 율법을 소유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데 있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 악한 세상으로 부터의 종말론적인 구속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Dunn의 학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의 사회학적인 기능에 대한 암시가 갈라디아서에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갈 2:15에서 바울은 이방인을 유대화시키려는 베드로에 반대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제거하기에 앞서 일단 유대인의 관점을 수용한다.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유대인은 원래 이방인을 죄인 취급하였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니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완전히 율법밖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οʿι ʾανόνοι 라고 불리워졌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들을 율법의 백성으로 간주하였다. 왜냐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때문에 그것을 지킬 엄숙한 의무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율법은 원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묶으려고 계획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에의 순종은 필연적으로 이방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불경스러운 우상 숭배의 관습과 습관으로부터의 분리를 포함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 7:1-11과 에스라 10:11에서 율법에 순종하라는 명령과 불경스러운 이방 민족과 분리하라는 명령이 나란히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반복되는 호소는 암시적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이웃 백성들로부터 분리하라는 요구이다. 이처럼 원래 언약의 의무로서의 주어진 율법은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들과 구분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우리는 ʾέργα νόμου가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과 같은 율법의 특정한 준수를 가리킨다는 Dunn의 의견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의식법 준수가 유대인의 독특성을 유별나게 특징적으로 드러내 준다는 Dunn의 주장에 동의한다. 왜냐면 도덕법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될 수 있는 데 반하여 그 의식법은 이스라엘에게만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2:3에 언급된 디도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받았고, 2:11-14는 안디옥에서의 issue가 유대 음식법임을 말하고 있으며, 4:10은 선동자들의 설득으로 갈라디아인들이 받아들인 것은 Jewish calendar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 특별히 음식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유대교의 identity symbol로서 기능하였다. 그것은 엡 2:14-1522에 언급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새 시대를 도래케 함으로써 그 벽을 허물어 버리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유대인 위에 놓인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심으로써 새 언약을 세우셨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까지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와 무할례, 그리고 유대인과 헬라인의 옛 구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유대인을 다른 민족으로부터 구별시키는 율법의 사회적인 기능은 소멸되었다.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이다.
 

     III. 예속시키는 세력으로서의 율법
1. 율법과 죄
이미 말씀 드린바와 같이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방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약속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할례와 율법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으며, 또한 갈라디아 사람들은 믿음으로 성령, 즉 아브라함의 약속의 실제적인 성취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3:18에서 유업이 율법에 근거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바울이 볼 때, 율법은 약속을 폐할 능력이 없다(3:17). 율법은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3:21). 오히려 그것은 약속 성취의 길을 예비한다. 율법은 원래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이스라엘이 위반하자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구속하셨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되었다(3:13-14). 이 성취와 함께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은 폐지되었다. 이리하여 율법의 시기는 약속과 성취 사이에 일시적으로 제한된다.
이 시점에서 바울은 구속사에서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3:19a :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3:19b에서 찾아진다 : τών παραβάσεων χάριν προσετέθη. 여기서 χάριν이란 전치사는 목적 혹은 이유를 뜻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범법을 목적으로)범법을 위하여)”, 그러니까 범법을 생산하거나 자극하기 위하여라는 의미가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범법함을 인하여”, 그러니까 범법함을 처리하거나 방지하기 위하여라는 뜻이 된다. 후자의 뜻은 토라를 죄로부터의 방지를 위한 울타리로 이해하는 유대적인 전통과 일맥상통한다. Keck과 Lull은 이 견해를 취한다. 그러나 갈에서나 다른 바울 서신에서는 이 의견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첫 번째 견해가 바울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e.g. Cranfield, Eckert. Betz, Ebeling, Fung). 그들은 그 근거로서 롬 3:20; 4:15; 5:13, 20 ; 7:5.7-24; 고전 15:56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갈라디아서 자체에서 충분한 근거를 차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갈라디아서가 그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충분한 인디케이터들(indicators)을 제공한다. 첫째, 3:8-14를 보면, 약속은 율법이 선포되어지기 훨씬 저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 약속은 율법의 저주를 제거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 약속이 주어졌을 때 율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특별히 범법)이 전제되었다. 이것은 율법이 범법을 생산함으로써 약속의 성취를 돕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지킬 능력을 주었다면, 율법은 약속을 분명히 취소시켰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율법의 예속시키는 능력을 주목해야 한다. 3:23을 보라. 여기서 묘사된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는 4:3-9에서 마귀의 세력 아래 있는 노예 상태와 병행되어 나타난다. 율법의 이러한 부정적인 성격은 범법을 생산하는 율법의 기능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범법(παράβασις)가 법 용어로서 일반적인 죄가 아니라 공포된 법을 범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롬 4:15과 5:14에 의하면, 아담과 모세 사이에 ʿαμρτία는 있었지만 παράβασις는 없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παράβασις는 율법이 온 결과로서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τών      παραβάσεων χάριν를 “법범함을 인하여”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번역은 율법 없이도 범법함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χάριν를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3:19은 율법은 범죄를 생산할 목적으로 더해졌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23
이와 관련하여 롬 5:20상반절을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5:20 상반절24 :νάμος δʿε παρεισηλθεν, ʾίνα πλεονάση τό παράπτωμα. 여기서 παράπτωμα는 παράβασις보다 더 더 넓은 개념이다. 그러나 παράπτωμα는 마귀적 세력으로서의 ʿαμαρτία와는 다르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 논문을 보라). Cranfield에 의하면 παράπτωμα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잘못된 행동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롬 5:20 상반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 율법은 이미 생겨난 죄악된 행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들어 왔다. 이 상은 갈 3:19b의 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율법이 인간의 기존 상태를 악화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갈 3:19b로 돌아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 어떻게 율법은 범법을 생산하는가? 불행하게도 이점에 있어서 갈라디아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만약 롬 5:20a가 갈 3:19b와 기본적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롬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롬 7:5ff가 갑작스런 진술인 롬 5:20a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7:5a :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이 사상은 7:8ff에서25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율법이 없을 때, 죄(하마르티아)는 상대적으로 활기가 없었다. 그러나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오자 죄는 그 계명을 통하여 인간에게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이처럼 죄가 인간의 죄악된 정욕을 자극하도록 작전 기지를 제공함으로써, 율법은 비록 간접적이나마 범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26(이 설명은 뱀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도록 아담을 유혹한 창 3에 나오는 타락 이야기에 대한 분명한 암시적 언급이다). (나는 7:7-13)이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곤경 상태를 바울이 크리스챤의 눈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 아니다27).
3:19b의28 결과는 3:22a에 나타나 있다.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성경”이라 함은 그것이 의인화되어 기술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권위 수여 받은 전성경을 가리킨다. “가두다(συγκείω)”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긍정-보호, 부정-자유제한),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모든 것(τά πάντα)”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죄아래(ύπο ʿαμαρτίαν)“이란 표현은 옛 시대의 악한 세력인 ‘죄의 속박 아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3:22a가 제시하고 있는 그림은 감옥인 것 같다. 성경은 치안 판사, 모든 사람은 죄인들, 그리고 죄수는 간수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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