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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성교수의 “치유적 예배, 가능한가?”에 대하여




하재성교수의 “치유적 예배, 가능한가?”에 대하여



정태홍 목사(거창노회 가조제일교회)
http://www.esesang91.com/






저는 하재성교수의 “치유적 예배, 가능한가?”를 읽고 ‘예배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교회 안에 심리학적인 요소가 들어오게 됨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만드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함께 고민해 보는 차원에서 글을 올립니다. 하재성 교수님의 글은 코람데오닷컴, “치유적 예배, 가능한가?”(http://www.kscoramdeo.com/news/read.php?idxno=6190)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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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정한 예배는 치유적인 예배인가?



하재성 교수는 「1. 여는 글」에서, “인간의 창조자이시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님의 감동에 힘입어 예배할 때 과연 인간에게 치유와 회복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예배에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치유적인 예배이다”라는 말은 문제가 있다.



하재성 교수는, “예배에서 치유적 요소를 찾는 것에 대해 경악스러워하는 복음주의자들도 있다.”고 말하면서,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예배론”을 말하면서, “시장에 의해 결정되고, 심리 치료적이며, 오락으로 형성된 우리의 예배관은 배교의 시기에 이웃 나라의 신들을 섬기자고 소리치던 이스라엘 자손의 아우성과 유사한 것”이라는 말에 대하여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예배에서 치유적인 요소를 찾고 거기에서 사람들이 위로를 경험한다고 해서 그것을 배교의 아우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격한 이분법이다.”라고 격한 어조로 말한다. 성전을 청결하시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하시며 만민의 것으로 회복시킨 ”예수님의 행위는 과연 세상 사람들의 인기와 구미에 맞추려던 배교의 시도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하재성 교수의 말은 정말 마이클 호튼이 말하는 의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마이클 호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들의 구미에 맞추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은 인간의 탐욕이 성전을 장악했기 때문에 성전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신 것이다. 마이클 호튼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예배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돕고자 하는 섬세한 신학이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과격하게 칼을 휘두르는 무모하고 맹목적인 서술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마이클 호튼의 의도를 무시하고 하재성 교수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술에 불과하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 두어야 하는 것은, 예배가 인간이 초점이 되면 그것은 이교적 예배가 된다는 사실이다.







2. 로드니 헌터(Rodney Hunter)의 혼합주의적인 성향



하재성 교수가 이 글에서 자주 인용하는 책이 있다.



로드니 헌터(Rodney Hunter)의 『Dictionary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Nashville: Abingdon, 1990)이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이 책이 얼마나 혼합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2) To integrate practice with theological and social scientific theory.



Theory and practice need to and can speak to each other. Thus we have tried to show, first, that deeper questions of meaning, truth, and faith are present in the immediate problems of care and counseling, and second, that theoretical and theological ideas often have empirical and practical dimensions. Naturally, some articles focus more on practice and others more on theory, but many combine both, and cross references supply further connections, often revealing unexpected insights.



Over its long history,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has provided an impetus for deepened theological understanding, just as theological developments have shaped and reshaped pastoral practice. This is because practice is not simply applied theory. As the "wisdom of experience," practice is also itself a source of theory, just as theoretical thinking is a kind of practice. Thus we have aimed to promote a thoughtful, critically minded practice, and a practical, humanly rich and caring mode of theorizing.



(자료출처 http://www.amazon.com/Dictionary-Pastoral-Counseling-Rodney-Hunter/dp/068710761X)







하재성 교수는 예배에 대한 개념을 로드니 헌터(Rodney Hunter)의 사전에서 말하는 개념을 말한다. 예배의 개념이 신학과 심리학을 혼합하고 절충하는 자의 개념에 집중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교회사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교회를 죽인 것인 이 혼합주의가 주범이었다. 초대교회 안에 영지주의는 교회를 초토화 시켰다. 사도는 그런 일에 대하여 이미 적그리스도가 왔다고 말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심리학이 신학과 어울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같은 차원이다. 심리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다. 심리학은 종교와 영성을 다루는 것이다. 심리학을 다만 학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도 심리학의 언저리만 돌고 있는 것이다.







3. Ramshaw의 에큐메니칼적인 접근



하재성 교수는, 「2. 상담적 예배 인도자」에서 “한 영혼을 세워주는 상담자인 목회자”를 말하면서 목회자의 역할을 말한다. 여기서 하재성 교수가 인용하는 글의 책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그 책은 Ramshaw의 『 Ritual and Pastoral Care』이다. 이 글을 읽어보면, 하재성 교수의 이 글은 Ramshaw의 주장을 요약한 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Series Foreword」에는 이 책의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Our purpose in the Theology and Pastoral Care Series is to present ministers and church leaders with a series of readable books that will (1) retrieve the theological and ethical foundation of the Judeo-Christian tradition ofr pastoral care, (2) develop lines of communication between pastoral theology and the other disciplines of theology, (3) create an ecumenical dialogue on pastoral care, and (4) do this in such a was as to affirm yet go beyond the recent preoccupation of pastoral care with secular psychotherapy and the other social sciences.



The books in this series are written by authors who are well acquainted with paychology, psychotherapy, and the other social science.



(자료출처http://www.amazon.com/RITUAL-PASTORAL-CARE-Theology-Pastoral/dp/080061738X/ref=



             la_B001K8L2S0_1_1?ie=UTF8&qid=1368762298&sr=1-1)







Ramshaw가 네 번째로 하는 말을 잘 보라. 그는 세상의 심리치료와 세상의 사회과학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를 명심해야 한다. Ramshaw와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혼합주의자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예배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접근 자체가 에큐메니칼(ecemunical approach)하다. 서문에 나오는 다음 글을 참고해 보라.







…… This series addresses that task out of a broad ecumenical stance, with all of the authors taking and ecemunical approach to theology, Besides a vigorous investigation of Protestant resources, there are specific treatments of pastoral care in Judaism and Catholicism.



(자료출처http://www.amazon.com/RITUAL-PASTORAL-CARE-Theology-Pastoral/dp/080061738X/ref=



             la_B001K8L2S0_1_1?ie=UTF8&qid=1368762298&sr=1-1)







하재성 교수가 말하듯이, 예배가 목회적이고 치유적이기 위해서는 “목회자는 성도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들에 익숙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그러나, 하재성 교수는 진정으로 예배가 목회적이고 치유적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송영과 참된 말씀 선포이다.







4. 실존주의적인 관점의 예배



하재성 교수는 지극히 실존주의적인 관점으로 예배를 정의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인도자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온 예배자가 주관적 의지와 결단 가운데 예배하기 위해 서로 만나는 것이 예배의 장이다.”



하재성 교수는 이것을 “주관적 인격성”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실존적 조우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그 말씀 앞에 회개와 고백과 찬송이 흘러나야 한다. 그것은 “일방적인 굴종”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께 나타내야 하는 당연한 자태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황과 필요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그러나, 예배의 중심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예배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예배의 대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재성 교수는, “모든 예배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하는 만큼, 모든 예배는 하나님께서 만나기를 원하시고 위로받기를 원하시는 예배자 중심적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예배가 두 개의 중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왜곡된 예배관을 제시하고 있다.







5. James F. White가 누구인가?



하재성 교수는 참된 예배에 인간의 필요성이 간과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James F. White의 말을 인용한다. <미국 Notre Dam 대학교의 저명한 예배학자 James F. White는 “모든 예배의 제1구성요소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James F. White가 누구인가? 그가 개신교 신학자인가? 로마가톨릭 신학자인가? 하재성 교수가 분명히 말했듯이, “미국 Notre Dam 대학교의 저명한 예배학자”이다. 분명히 로마 가톨릭 예배학자이다! 그들은 왜 사람을 “모든 예배의 제1구성 요소”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6. 트라우마가 1번인가?



「3. 인간 주목의 위험성과 인간 이해의 중요성」에서



하재성 교수는, “예배의 진행에 있어서도 인도자인 목회자는 인간 예배자들인 성도들의 다양한 고난과 환란과 혼돈, 삶의 절망과 트라우마를 예배 의식을 통해 끌어안아야 한다. ”고 말한다. 또한, 하재성 교수는, “성도들의 영적이고 정서적인 상태를 가장 가까이에서 살펴서 이해하는 인도자가 그 개인들의 삶의 모습을 면밀히 알고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성경의 관점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죄에 대한 차원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배자의 고난, 환난, 혼돈, 절망, 트라우마를 말하는 것은 순전히 심리학적인 접근이다. ‘트라우마’란 정신적 외상을 말하는데, 이런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인간을 분석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자체가 예배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자기를 살피고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인 관점으로 나아가게 되면 인간의 죄는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상처에 대한 해결책을 찾게 된다.







7. 상징이란 무엇인가?



「4. 성육신적 예배가 주는 확신과 위로」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은 바로 “상징”이다.







하재성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배에 있어서 상징들(symbols)이 중요한 이유는 예배자들에게 “생명과 죽음, 사랑과 악, 인류와 우주의 기원과 운명 등에 대한 거대한 질문들을 마주하고서, 논리적인 형식으로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29) 이처럼 심층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들조차도 고난의 심오한 의미들을 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의 방편이다.>







이것은 지극히 융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하는 말이다.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글이 지극히 융 심리학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칼 융은 특히 기독교를 반대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 원형을 체험케 해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신성을 체험하는 것이었기에 매일 만다라는 그리면서 영적인 안내자를 만났다. 그것은 접신하는 것이고 그야말로 양복 입은 무당이었다.







성경은 “생명과 죽음, 사랑과 악, 인류와 우주의 기원과 운명”에 대하여 명제적으로 분명하게 말한다. 하재성 교수는 Ramshaw의 말을 인용하면서 “논리적인 형식으로 하나의 대답을 제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그것이 상징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융 심리학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하재성 교수는, “예배는 철저하게 예배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기획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다. 그것은 예배의 요소와 상징이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반영한다는 것에서도 분명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상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계시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고 확실하게 교제한다고 말한다. Ramshaw가 계속해서 상징을 강조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심리학적이며 에큐메니칼한 접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만 한다.







이제 하재성 교수는 Ramshaw 글에서 한진한 목사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마이클 호튼, 칼빈 등의 글을 인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Ramshaw의 글이 마치 성경적으로 정당한 예배인 것처럼 둔갑되어 버린다. 융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상징을 말하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성례를 말하는 상징과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다. 상징이라는 그 단어 자체가 같다고 해서 그 의미가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알려주는 상징을 말한다. 그러기에 반기독교적이다. 그 위험한 말을 Ramshaw는 기독교적인 용어와 섞어서 말하기 때문에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별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이런 관점이 일어나는 것은 심리학이 예배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결코 학문으로 끝나지 않는다. 심리학은 학문이 아니다. 심리학은 종교다. 심리학은 영성이다.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예배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오직 성경이 말하는 관점에서만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 심리학은 순진한 양처럼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 이빨에 물려 뜯기고 손과 발에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해야만 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정태홍 목사(거창노회 가조제일교회)
http://www.esesang91.com/







---하재성교수의 댓글---------




하재성 2013-05-18 07:34:10


부족한 논문을 아주 상세하게 읽으시고 적극 비평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주 날카로운 비판력을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매우 치우친 편견이 위험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제가 이 논문을 쓰면서 거듭 깨달은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요소요소가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과의 만남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으로서의 설교자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책임을 가지는가 하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쓴 글의 핵심은 예배 인도자가 예배자인 성도들의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예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목회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고, 또한 그런 예배가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예배에 대해 통합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중요한 논문의 중심은 상실한채, 심리학의 용납은 곧 혼합주의라는 무시무시한-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전제에만 의존하여 이 글을 쓰셨습니다. 제가 공간이 충분하지 못하여 미처 Ramshaw 에 대해 비판하지 못한 것을 상세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물론 저는 결코 Ramshaw의 다원주의를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실존적 경험과 돌봄의 입장에서 예배의 한 측면을 기술하고, 예배자들이 처한 삶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목회신학자들이 반드시 해야할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 논문에 나타난 예배의 본질에 대한 모든 중요한 신학적 전제들을 무시한 채, '심리학 비판'이라는 칼을 들고, 온통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한 단순논리로 매도하는 것은, 인문주의적 소양으로 학문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신학적 자신감 속에서 일반 학문의 가치들을 성령의 풍성한 선물로 인정했던 칼빈의 신학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 정태홍 목사의 댓글 ----




정태홍 2013-05-18 08:36:21


교수님, 감사합니다.


바쁘신 가운데 댓글을 달아 주시어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교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그 논지를 피력하시기 위하여


교수님의 말씀대로 다원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적절치 못한 것임을 말씀 드린 것이며,


심리학의 위험성에 대해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심리학의 실체를 간과하고 학문의 다양성이라는 


명목으로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


칼빈이 선물로 인정했던 것은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은 그 시작부터가 반기독교적이며,


지금의 그 활동은 더욱 적그리스도적입니다.


교수님께서도 저의 글에 대하여 


구체적인 반박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올린 글에 대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저도 더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심리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고,


성경에서 출발하여 성경의 증거를 받는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재성교수의 댓글--


하재성 2013-05-18 15:21:55

사랑하는 정태홍 목사님,

한 교수의 논문에 대한 평가란 목사님처럼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느 학회, 어느 학자도 목사님처럼 논문을 매도하거나 자신이 보고 싶은 색깔만을 덧칠해서 비판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댓글은 저의 논문 전체를 공정하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의 글 전체가 공정성에 있어서 신뢰성을 잃고 있습니다. 




논문의 가치를 전체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하지 않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은 전혀 보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찾아서, 그 관점에서 모든 합당한 주장들을 뒤엎어 버리는 것은 학문적으로 매우 편협한 태도입니다. 이 댓글만 읽으면 마치 이런 논문을 쓴 사람이 혼합주의자나 다원주의자가 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이는 논문을 쓴 사람 개인에게 심각한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균형 잡히지 않은 댓글로 인해 그것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아니라 편견과 오해를 심어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심리학? 저는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심리학이 그렇게 대단한 영적인 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더 깊이 이해하고 치료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연구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이 이야기하는 여타 학문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영역일 뿐입니다. 목사님이 경계하시는 사람들이 프로이트나 융 같은 사람들을 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기독교에 대한 이 사람들의 논리는 너무나 허술하고 약해서, 성경을 들고 반박할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차라리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으로 사람들을 호도하는 신천지가 훨씬 더 교회에 위협적입니다. 안 믿는 학자들 조차도 그들의 생각이 시대착오적이고, 더구나 21세기에 와서는 일부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영향력이 전혀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기독교에 대단한 위협이 되는 것처럼 크게 보시는 것은 기독교를 과소평가하시거나, 아니면 혹시 목사님께서 주적을 잘못 선택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목사님, 영어를 인용하고 계시기에 부탁드리는 것은, 아무런 편견 없이 아직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이 심리학자들의 책들까지도 한 번 다 구입하셔서 모두 정독해서 읽어 보시기를 권면드립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과연 그들 속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반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있는지, 남의 주장에 근거해서 말하지 말고, 직접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들만이 아니라 현대 발달심리학과 정신병리학,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인간 행동에 대한 연구 논문들을 더 깊이 공부해 보시고, 거기에도 과연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비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있는지 차근차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거기에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현재 기독교인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실체를 발견하지 못하신다면 목사님은 지금 교회와 개인에게 매우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면서 다양한 기술과 성경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목회의 중심축으로 삼는 것에 대한 탄식을 하셨다는 것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중심을 잃고, 말씀을 떠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지난 6년 반 동안 강의와 설교와 20여 편의 논문, 이미 나온 책 한 권과 앞으로 나올 두 권의 책 [긍휼의 심장]이나 [소그룹 리더들을 위한 목회상담적 리더십]에서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신 인격을 이야기하고, 성령님의 인격성을 이야기하고,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구와 공부와 논문, 그리고 상담을 통해 삼위 하나님에 대한 깊이와 인격성을 더 깊이 알아가고 있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심리학을 무비판적으로 선전하는 전도사가 아니고, 혼합주의나 다원주의가 옳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위의 댓글은 그런 오해를 충분히 일으킬 수 있겠군요. 




그리고 혹시 제가 위의 논문에서 인용한 Rodney Hunter 나 Ramshaw 등의 책들을 끝까지 다 읽어보셨습니까? 그저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는 서론 영문 몇 귀절, 그것도 자신의 주장을 전혀 지지해 주지 못하는 구절들을 가져와서 혼합주의 운운하면서 단순하게 매도하는 것은 전혀 공정하거나 의롭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amazon.com 에서 가져온 Hunter 의 영문 서론을 보면, 제가 읽은 영어로는 신학적 사상의 혼합주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적 돌봄과 상담에 나타나는 의미, 진리, 신앙에 대한 깊은 질문들을 드러내고…사려깊고 비판적 능력을 갖춘 실천을 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번역이 되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이 귀절을 보고 전혀 엉뚱하게도 혼합주의를 이야기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이건 목사님의 논리가 심각하게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저자가 전혀 말하지도 않고 있는 이 영문을 왜곡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Ramshaw가 말하는 (4)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셨군요. 목사님 해석처럼 (4)은 Ramshaw가심리치료와 사회과학을 의지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라, 이 책의 의도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심리학과 사회과학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요지입니다. Go beyond 라는 말은 그렇게 해석되어야 마땅한 말인데 어떻게 목사님은 “그것을 의존하고 있다”는 말로 거꾸로 해석하셨는지요? 




책의 서론도 이렇게 제대로 해석되지 않았는데, 그 책이 혼합주의, 다원주의적인 책, 혹은 학자라고 단정하여 말씀하십니까? 왜 이런 잘못된 해석에 근거해서 이렇게 공정하지 못한 논쟁을 일으키십니까? 책을 전체적으로 충분히 읽지도 않고, 눈에 띄는 단어 몇 개로 사상을 논하십니까? 




목사님, 우선 제가 말씀 드린대로 프로이트와 융의 책들을 충분히 읽어보시고, 그들에 대해 평가한 다른 사람 이야기로 비판하지 마시고, 목사님의 목소리를 직접 순수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로저스와 코헛, 멜라니 클라인과 해리 건트립, 페어베언과 위니캇 등의 심리학자들의 일차 자료들을 먼저 다 읽고 나서 공정하게 자신의 주장들을 펼치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정하다는 말은 반드시 논찬과 비평을 균형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헌터와 램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찰스 거킨, 토마스 오덴, 론 나이담과 폴 프로이저, 그리고 저의 논문과 책들을 가능하면 정확히, 공정하게 읽으시고, 공정하게 판단하셔서 필요한 논의를 하십시다. 위의 목사님의 요청에 대해 일일이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목사님의 편견에 의해 제기된 질문들은, 이미 공정하지 않게 맹목적으로 치우친 출발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정하지 않은 편견은 끊임없는 논쟁만 일으킬 뿐이며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해서는 지금 바로 댓글을 달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좀 더 시간을 두시고건강한 많은 연구와 반성과 숙고를 통해 충분한 공정성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그 글들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의 코닷의 공간은, 신앙과 경험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균형 있게 사고하여 모두에게 유익하고 덕이 되는 글을 올려야 하는 교회를 위한 책임 있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목사님, 신학교 교수로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 말씀을 사랑하는 목사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순수해야 한다는 목적도 인정합니다. 그럴수록 부족하지만 우리 신대원 교수들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신학교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공정하게 판단해 볼 때 부족함이 있으면 꾸짖어 주세요. 그러나, 연구와 주장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이처럼 상식적으로 균형을 잃은 방식으로는 그 누구도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부디 가정과 교회의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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