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택-내적치유-"죽음 앞에서..," 과연 성경적인가?
주서택-내적치유-"죽음 앞에서..," 과연 성경적인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는 주서택 목사에게
주서택 목사는 죽음 앞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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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를 인용하면 아주 고상하게 보이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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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이름 주서택 작성일 2012.09.19
낙엽의 계절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하나의 낙엽처럼 땅에 묻힐 것입니다. 죽음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은 이 세상에 홀로 왔다 홀로 죽어간다. 누구도 내 죽음을 대신 할 수 없다. 집단 자살을 하더라도 각자의 죽음은 따로 따로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죽음이란 종점을 향해가고 있다. 삶이 절대 나의 것이듯이 죽음도 먼 남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다.
나는 장례식을 집례할때마다 하관식이 끝나고 모든 가족들이 다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주검앞에서 내 양심과 내세와 하나님 앞에서 피묻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자료출처 http://inner.or.kr/board/view.php?key=153&start=0&id=bbs_06&sn=&ss=on&sc=&keyword=&vn=)
------------------------- 인용 자료 끝 ------------------------------------ (자료출처 http://inner.or.kr/board/view.php?key=153&start=0&id=bbs_06&sn=&ss=on&sc=&keyword=&vn=)
하이데거를 인용하면 아주 고상하게 보이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매우 큰 오해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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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본래적인 존재는 현존재가 가진 하나의 실존적 가능성을 의미한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 죽음이란 현존재 자신이 그때마다 인수해야 하는 한 존재 가능성이다. 죽음과 더불어 현존재 자신이 그의 가장 본래적인 존재 가능 속에서 자기와 직면한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현대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는 유신론적 실존을 주장하는 키에르케고오르와는 달리 우리 자신의 죽음을 깊이 사유할 것을 강조한다. 죽음이란 그에게 있어서 삶의 지평으로, 현재의 삶의 의미를 규정하는 근본적 가능성이다. 죽음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이 세계의 모든 다른 것과 아무 관계를 갖지 않는 가장 분명한 모습이다.
현존재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특징짓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비중을 갖는다. 현존재란 단순히 현실적으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는 거기에 있는 것으로, 언제나 지속적을 존재함과는 대립되는 시간성을 전제로 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존재, 존재자, 현존재라는 세 가지의 전제로 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존재, 존재자, 현존재라는 세 가지의 개념 위에 세워진 관계속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이들은 어느 한 가지로 압축되거나, 요약될 수 없는 것으로 분명한 차이와 한계를 갖고 서로를 규정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인간 존재의 본질로 이해하면서, 이것은 '세계 내의 존재' 라고 말한다. 세계란 단순히 인간이 살아가는 외적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현존재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집으로서의 의미이다. 따라서 세계는 현존재에 의해서 세워지고, 규정되는 것이며,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주관과 객관의 의미를 초월하는 개념이다.
'거기에 지금 있는것' 으로서의 현존재는 인간의 실존을 의미하며 이러한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이미, 항상' 있는것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유한함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은 현존재가 드러나는 가장 본래적인 방식이며, 현존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본질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하듯이 인간존재속에 깊이 담겨진 열매로서 삶과 함께 자라는 것으로 우리의 고유한 삶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모든 낯선 규정의 의미를 제거하고 나의 유일무이한 본질앞에 서게 된다. 또한 그 어떤것도 죽음을 능가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죽음은 어떠한 존재자가 아닌 철저한 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을 결코 대상화할 수 없으며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있는 존재 라고 말한다.
인간 자신이 죽음을 향해서 던져져 있다는 사실은 불안을 통해서 체험하게 되며 불안의 경험은 일상적인 삶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허구성을 밝혀내고 지금까지의 세계속에서 느겨온 고향과 같은 친밀성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안을 통해서 인간은 죽음이라고 불리는 절대적 무를 향해서 달려가는 존재이며, 삶은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 따라서 불안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제 더이상 편한하고 익숙한 집이 아니라 낯설고 기이한 모습으로 드러내고, 현존재는 철저하게 홀로 서 있는 단독자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불안을 통해서 절대 고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단독자'란 그러한 불안 앞에서 현존재가 내면 속으로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존재로서의 단독자는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본질과 시간성을 깨닫고 죽음에로 앞서 달려가는 결단과 선택의 행위자이다.
그래서 단독자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현존재는 불안을 회피하기위하여 일상적인 삶속에서 비본래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익명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은 인간 실존의 불확실함과 낯설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피상적이고 공허한 일상 속에서 나의죽음은 닥치지 않았다고 위호한다. 이들은 돈, 명예, 권력과 같은 것을 뒤쫒는 비본래적인 타자의 삶 속에서 죽음의 확실성을 숨기고 외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커다란 재앙이며, 도피하고자 하는 대상이며 자신의 삶과 분리된 낯선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삶은 불안속에서 계속된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죽음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단독자는 죽음을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서 또 삶의 마지막 행위로서 받아들인다. 이것은 죽음을 완전한 무로서 받아들이고, 그 무를 통해서 매 순간의 삶을 새로운 빛 아래 드러냄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오로지 자신에게서 출발하며 자신에게 의지하는 절대 고독 속의 창조행위에서 찾는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ss0420ss/140032014688 >
------------ 자료 인용 끝 --------------------
죽음이란 무슨 의미를 가는 것일까요?
하이데거는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위의 글이 말하들이 죽음 앞에 불안해 하는 단독자입니다.
그런 단독자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오로지 자신에게서 출발하며
자신에게 의지하는 절대 고독 속의 창조행위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주서택 목사는,
하이데거의 글을 인용해 놓고서,
"나는 장례식을 집례할때마다 하관식이 끝나고 모든 가족들이 다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주검앞에서 내 양심과 내세와 하나님 앞에서 피묻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주서택 목사가 말하는 '양심'과 '내세'와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 선택으로 자기 의지로 붙잡은 예수를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하이데거를 통하여
죽음을 생각하는 주서택 목사가 말하는
그런 십자가는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근래에 주서택 목사는 안셀름 그륀의 뉴에이지 영성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생각하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 빠진 주서택 목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분별을 하지 못하는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은
실존주의와 뉴에이지 영성에 물든 주서택 목사의 내적치유에 미혹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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