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로 치유한다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그렇게 관조하는 하나님은 철학적 타자, 곧 알려지지도 않고
알려질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무한자일 뿐이다
영성이라는 이름하에 심리치유와 기독교를 섞어서 가르치고 치유하는 단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특히나 신플라톤주의에 기초한 관상기도가 점점 교회 내에 파고들면서 치유와 접목이 되어서 그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00영성치유연구소를 들 수가 있는데, 오늘은 이 연구소와 함께 관상기도와 치유에 대해서 짧게나마 살펴보자.
00영성치유연구소 “L” 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사들은 병원 시스템 상 반나절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만나야 하기에 환자들과 제대로 상담을 하지 못하고, 약을 처방해 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정신과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약물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환자들을 진료하는 가운데 역동상담(정신분석적 치료)이 인간을 전인적으로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일반 병원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정신치료와 기독교 영성을 통합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L” 원장이 말하는 역동상담이란 무엇인가? 역동상담이란, "인간은 자신의 정신역동(Psychodynamic, 심리역동)에 따라 생활 패턴과 문제가 결정된다"는 심리 이론에 기초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상담이다. 역동의 개념은 학자마다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만 7세까지 성장하는 동안 이루어지는 개인의 패턴 및 취약성이다. 7세까지 이루어지는 역동은 이후 인생의 경험에서 다소 수정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틀이 변하지 않고 평생을 간다고 본다. 이것은 S. Freud(프로이드)와 C. Jung(융)의 정신역동이론이다.
그가 이렇게 프로이드에 기반한 심리학에 기초한 상담을 하는 이유는 그의 고통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그의 관점이 지극히 프로이드적인 발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 나는 순전하고 의로운데 공연히 마귀가 나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가해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일그러진 부분, 나의 병든 부분이 (때로는 마귀와 연합하여) 나 자신을 상처내고 타인을 상처 낼 따름이다.”
“L”원장은 이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고심을 했으나 그 절망의 한계선을 뛰어넘으려고 그 해답을 관상기도에서 찾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L” 원장은 기독교계의 치유 사역이 너무 ‘주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너무 쉽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 말 그대로 기적적인 치유사역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는 이미 기독교 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구상화치유’가 주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과거여행은 이미 국외에서는 많은 문제가 되었고, 또한 그것이 이런 주술적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신은 익히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런 길을 가지 않고 택한 다른 길은 ‘관상기도’와 ‘심리학’의 접목이다.
프로이드적이고 주술적인 구상화는 중간에서 누군가가 개입을 해서 과거여행을 통해 치유하는 개념이고, 00영성치유연구소 “L” 원장이 만들어낸 것은 그런 심리치유의 한계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간에서 개입하는 사람 없이 자기 스스로 과거로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의사책임이 안되게 된다. 과거여행을 통한 기억치유는 문제가 심각해서 정신과 의사들이 소송을 당해서 되레 돈을 물어주는 사건이 너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원장의 방법은 내담자 본인이 스스로 해결해 가는 방법이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가 관상기도를 도입하게 되는 배경을 말하면서 기도에 대한 그의 말은 그럴듯해 보이나 실상은 얼마나 그 신앙의 기초가 부실한지를 알 수가 있다. “충격적이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것의 핵심은 내 환경이나 여건을 바꾸어 달라는 요구지요.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는 기도고요. 지금까지 제가 크게 잘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러면서 “L” 원장이 선택하고 모색한 길은 무엇인가? 그는 우울증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정신분석과 영성을 함께 접목하는 심리치료와 영성지도를 통합한 영성치유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야말로 정신분석의 한계를 느끼고, 사람들을 영적으로 치유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영적”이라는 이 말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가 말하는 ‘영적’이라는 것은 관상기도를 두고 염두에 두는 말이다. 이전의 기도를 버리고 관상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그분이 만나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의 아우성 소리에 그분의 노크소리를 못 들은 것이었음을 40년이 지난 최근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나는 그분을 뵙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펴고 같은 구절을 세 번씩 소리 내어 읽은 다음 입을 다물고 나를 비운 채 그분이 말씀하시길 기다린다. 나는 그분 앞에서 요구할 것도 주장할 것도 없다. 그저 그분의 생명으로 채워지길 바라고, 그분이 내게 속삭이시고 나를 이끌어 가시길 바랄 뿐 나는 그냥 앉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는 이루어진다. 그것은 뜨거운 것도, 감동적인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분과 함께 있음을 느낀다. 사막 가운데서 느끼는 바람과도 같이, 캄캄한 하늘에 멀리 비치는 별빛처럼, 내 삶과 존재를 감싸고도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나는 깊은 대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이 의도하는 말은,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내가 한 기도는 두 인격체 간의 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넋두리, 자기도취에 빠진 중얼거림, 떼쓰는 아이의 외침이었다. 거기에는 상대방의 인격과 존재를 의식하는 대화란 없었다. 일방적인 감정의 발산, 제멋대로의 주장, 나를 위한 끝없는 요구,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이전의 기도에서 분명히 “인격과 존재를 의식하는 대화란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전의 기도를 헌신짝같이 버리고 관상기도를 하면서 그것이 이전의 기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하고 생명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그런 것인가? 오히려 정반대다. 그가 이전의 기도 방식을 저버리고 관상기도를 택한 것은 결국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왜 그렇게 신비적인 방법을 택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그는 정신분석치료로는 한계에 다다른 심리치료의 종국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심리치료를 포기하고 단념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도 의존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여정의 출발점은 정신분석적인 치료가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발 후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고민하고 있다. 무조건 하나님께로 가라고 외칠 수도 없다. 나는 종종 내담자와 하나님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코 하나님의 변호사가 될 수 없는데 절규하는 내담자 앞에서 그 분을 어설프게 변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분의 침묵을 궁색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절망하는 내담자의 속으로 들어가 함께 절망하고 함께 하나님께 외치고 싶어진다.”
한편 겸손한 변호사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내담자인 인간도 자기 손안에 두고 하나님도 마음대로 조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세 관계 속에서 최고의 수장 자리에 은근슬쩍 앉은 셈이다. 그리고 그 ‘상담’이라는 일에 전능함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하면 과언일까 과찬일까? 자신의 한계를 관상이라는 새로운 방편을 통하여 해결하려는 그의 의도는 시대의 조류에 편성하는 어느 정신과의사의 야심차고 새로운 도전이라고 하면 무리가 될까? 대답은 독자에게 맡기고 싶다.
그는 이미 관상기도에 대해서 심취해 있다. 관상에 대해 이름난 소위 대가들과 어깨를 겨루면서 영성치유를 한다며 영토를 확장해 가고 있다. 그의 북카페 한 쪽에는 침묵의 방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답을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분리되면서 수도원 영성을 버렸다. 저는 종교개혁 이전 예수님의 원형을 찾아가는 것을 꿈꾼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개신교 영성과 가톨릭 영성이 어우러지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관상기도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관상기도하게 되면 주님 안에 거하면서 쉼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수도원 영성이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말일까? 수도원 영성을 버린 것이 개혁의 큰 실수요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가 개신교의 영성과 카톨릭의 영성의 혼합을 말한다는 것은 개혁주의 영성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유유히 편승하여 앞서가는 정신과 의사의 능수능란함이다.
실제로, 00영성치유연구소에서 하는 교육일정에는, 놀랍게도 관상기도가 주요 강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지난 과정을 보면, 전반 6주는 성공회 사제이며 성공회대 겸임교수 윤종모 신부의 지도로 묵상(관상)기도와 생활에 대한 강의와 지도를 하고 후반 6주는 영성지도의 역사와 개념, 집단 영성지도의 구성 등에 관하여 본 연구소 소장 “L” 교수의 강의로 구성 되었다.
결론적으로 “L” 원장원장의 이런 혼합적인 방법들은 현대인의 절망이 얼마나 완전한 절망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한계는 알지만, 답은 없다. 그 증거는 그가 심리학을 끌어안고 관상의 세계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묵상이 아니다. 특히나 그것이 관상기도와 맞물릴 때는 더욱 그렇다. 그는 관상이라 하지 않고 묵상이라고 하여 더욱 혼선이 일어나게 만든다. 그렇게 관조하는 하나님은 철학적 타자, 곧 알려지지도 않고 알려 질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무한자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는지를 다시 알게 된다. 그들은 영혼의 갈등을 이 유한한 것으로는 유한한 것 속에서는 도저히 해소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합리성을 포기했고 신비주의의 종살이를 하면서 절망 속에 죽어갔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말씀하시되 살리고 회복하시어 다시 그 언약 안에 머물러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신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다움으로 가는 과정이다. 심리학에 기반한 고통의 해결책은 인간을 더 절망의 나락으로 끌어갈 뿐이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그 말씀 안에서만 정답이 있다. 성령론적으로, 구원론적을 바라보지 않는 고통은 의미가 없다. 그 눈길 속에서만 신자는 삼위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기쁨과 자유가 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알려질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무한자일 뿐이다
영성이라는 이름하에 심리치유와 기독교를 섞어서 가르치고 치유하는 단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특히나 신플라톤주의에 기초한 관상기도가 점점 교회 내에 파고들면서 치유와 접목이 되어서 그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00영성치유연구소를 들 수가 있는데, 오늘은 이 연구소와 함께 관상기도와 치유에 대해서 짧게나마 살펴보자.
00영성치유연구소 “L” 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사들은 병원 시스템 상 반나절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만나야 하기에 환자들과 제대로 상담을 하지 못하고, 약을 처방해 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정신과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약물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환자들을 진료하는 가운데 역동상담(정신분석적 치료)이 인간을 전인적으로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일반 병원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정신치료와 기독교 영성을 통합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L” 원장이 말하는 역동상담이란 무엇인가? 역동상담이란, "인간은 자신의 정신역동(Psychodynamic, 심리역동)에 따라 생활 패턴과 문제가 결정된다"는 심리 이론에 기초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상담이다. 역동의 개념은 학자마다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만 7세까지 성장하는 동안 이루어지는 개인의 패턴 및 취약성이다. 7세까지 이루어지는 역동은 이후 인생의 경험에서 다소 수정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틀이 변하지 않고 평생을 간다고 본다. 이것은 S. Freud(프로이드)와 C. Jung(융)의 정신역동이론이다.
그가 이렇게 프로이드에 기반한 심리학에 기초한 상담을 하는 이유는 그의 고통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그의 관점이 지극히 프로이드적인 발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 나는 순전하고 의로운데 공연히 마귀가 나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가해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일그러진 부분, 나의 병든 부분이 (때로는 마귀와 연합하여) 나 자신을 상처내고 타인을 상처 낼 따름이다.”
“L”원장은 이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고심을 했으나 그 절망의 한계선을 뛰어넘으려고 그 해답을 관상기도에서 찾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L” 원장은 기독교계의 치유 사역이 너무 ‘주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너무 쉽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 말 그대로 기적적인 치유사역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는 이미 기독교 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구상화치유’가 주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과거여행은 이미 국외에서는 많은 문제가 되었고, 또한 그것이 이런 주술적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신은 익히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런 길을 가지 않고 택한 다른 길은 ‘관상기도’와 ‘심리학’의 접목이다.
프로이드적이고 주술적인 구상화는 중간에서 누군가가 개입을 해서 과거여행을 통해 치유하는 개념이고, 00영성치유연구소 “L” 원장이 만들어낸 것은 그런 심리치유의 한계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간에서 개입하는 사람 없이 자기 스스로 과거로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의사책임이 안되게 된다. 과거여행을 통한 기억치유는 문제가 심각해서 정신과 의사들이 소송을 당해서 되레 돈을 물어주는 사건이 너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원장의 방법은 내담자 본인이 스스로 해결해 가는 방법이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가 관상기도를 도입하게 되는 배경을 말하면서 기도에 대한 그의 말은 그럴듯해 보이나 실상은 얼마나 그 신앙의 기초가 부실한지를 알 수가 있다. “충격적이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것의 핵심은 내 환경이나 여건을 바꾸어 달라는 요구지요.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는 기도고요. 지금까지 제가 크게 잘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러면서 “L” 원장이 선택하고 모색한 길은 무엇인가? 그는 우울증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정신분석과 영성을 함께 접목하는 심리치료와 영성지도를 통합한 영성치유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야말로 정신분석의 한계를 느끼고, 사람들을 영적으로 치유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영적”이라는 이 말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가 말하는 ‘영적’이라는 것은 관상기도를 두고 염두에 두는 말이다. 이전의 기도를 버리고 관상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그분이 만나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의 아우성 소리에 그분의 노크소리를 못 들은 것이었음을 40년이 지난 최근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나는 그분을 뵙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펴고 같은 구절을 세 번씩 소리 내어 읽은 다음 입을 다물고 나를 비운 채 그분이 말씀하시길 기다린다. 나는 그분 앞에서 요구할 것도 주장할 것도 없다. 그저 그분의 생명으로 채워지길 바라고, 그분이 내게 속삭이시고 나를 이끌어 가시길 바랄 뿐 나는 그냥 앉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는 이루어진다. 그것은 뜨거운 것도, 감동적인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분과 함께 있음을 느낀다. 사막 가운데서 느끼는 바람과도 같이, 캄캄한 하늘에 멀리 비치는 별빛처럼, 내 삶과 존재를 감싸고도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나는 깊은 대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이 의도하는 말은,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내가 한 기도는 두 인격체 간의 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넋두리, 자기도취에 빠진 중얼거림, 떼쓰는 아이의 외침이었다. 거기에는 상대방의 인격과 존재를 의식하는 대화란 없었다. 일방적인 감정의 발산, 제멋대로의 주장, 나를 위한 끝없는 요구,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이전의 기도에서 분명히 “인격과 존재를 의식하는 대화란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전의 기도를 헌신짝같이 버리고 관상기도를 하면서 그것이 이전의 기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하고 생명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그런 것인가? 오히려 정반대다. 그가 이전의 기도 방식을 저버리고 관상기도를 택한 것은 결국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왜 그렇게 신비적인 방법을 택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그는 정신분석치료로는 한계에 다다른 심리치료의 종국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심리치료를 포기하고 단념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도 의존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여정의 출발점은 정신분석적인 치료가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발 후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고민하고 있다. 무조건 하나님께로 가라고 외칠 수도 없다. 나는 종종 내담자와 하나님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코 하나님의 변호사가 될 수 없는데 절규하는 내담자 앞에서 그 분을 어설프게 변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분의 침묵을 궁색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절망하는 내담자의 속으로 들어가 함께 절망하고 함께 하나님께 외치고 싶어진다.”
한편 겸손한 변호사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내담자인 인간도 자기 손안에 두고 하나님도 마음대로 조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세 관계 속에서 최고의 수장 자리에 은근슬쩍 앉은 셈이다. 그리고 그 ‘상담’이라는 일에 전능함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하면 과언일까 과찬일까? 자신의 한계를 관상이라는 새로운 방편을 통하여 해결하려는 그의 의도는 시대의 조류에 편성하는 어느 정신과의사의 야심차고 새로운 도전이라고 하면 무리가 될까? 대답은 독자에게 맡기고 싶다.
그는 이미 관상기도에 대해서 심취해 있다. 관상에 대해 이름난 소위 대가들과 어깨를 겨루면서 영성치유를 한다며 영토를 확장해 가고 있다. 그의 북카페 한 쪽에는 침묵의 방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답을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분리되면서 수도원 영성을 버렸다. 저는 종교개혁 이전 예수님의 원형을 찾아가는 것을 꿈꾼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개신교 영성과 가톨릭 영성이 어우러지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관상기도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관상기도하게 되면 주님 안에 거하면서 쉼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수도원 영성이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말일까? 수도원 영성을 버린 것이 개혁의 큰 실수요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가 개신교의 영성과 카톨릭의 영성의 혼합을 말한다는 것은 개혁주의 영성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유유히 편승하여 앞서가는 정신과 의사의 능수능란함이다.
실제로, 00영성치유연구소에서 하는 교육일정에는, 놀랍게도 관상기도가 주요 강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지난 과정을 보면, 전반 6주는 성공회 사제이며 성공회대 겸임교수 윤종모 신부의 지도로 묵상(관상)기도와 생활에 대한 강의와 지도를 하고 후반 6주는 영성지도의 역사와 개념, 집단 영성지도의 구성 등에 관하여 본 연구소 소장 “L” 교수의 강의로 구성 되었다.
결론적으로 “L” 원장원장의 이런 혼합적인 방법들은 현대인의 절망이 얼마나 완전한 절망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한계는 알지만, 답은 없다. 그 증거는 그가 심리학을 끌어안고 관상의 세계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묵상이 아니다. 특히나 그것이 관상기도와 맞물릴 때는 더욱 그렇다. 그는 관상이라 하지 않고 묵상이라고 하여 더욱 혼선이 일어나게 만든다. 그렇게 관조하는 하나님은 철학적 타자, 곧 알려지지도 않고 알려 질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무한자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는지를 다시 알게 된다. 그들은 영혼의 갈등을 이 유한한 것으로는 유한한 것 속에서는 도저히 해소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합리성을 포기했고 신비주의의 종살이를 하면서 절망 속에 죽어갔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말씀하시되 살리고 회복하시어 다시 그 언약 안에 머물러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신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다움으로 가는 과정이다. 심리학에 기반한 고통의 해결책은 인간을 더 절망의 나락으로 끌어갈 뿐이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그 말씀 안에서만 정답이 있다. 성령론적으로, 구원론적을 바라보지 않는 고통은 의미가 없다. 그 눈길 속에서만 신자는 삼위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기쁨과 자유가 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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