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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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대면-이요나 목사의 "성경적"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자기대면-이요나 목사의 "성경적"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아래 글은 이전에 "오늘날의 "성경적"이라는 의미에 대해서"를 수정하고 보완한 것입니다.)

최근에 자기대면의 이요나 목사의 항의 전화로 시작된
자기대면이 성경적이냐의 논란은
결국 "성경적"이라는 의미가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적"이라는 의미를 사용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성경적"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성경적"이라고 말할 때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때는 
그 의미가 퇴색되고 변질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과 "세상의 사상"을 섞어서 "성경적"이라고 말합니다.

"성경"과 "심리학"을 섞어서 가르치면서도 
나는 "성경적"으로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섞어서 가르치는 것을 통합주의 혹은 절충주의라고 합니다.
위키백과를 참고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절충주의(折衷主義)란 각종 사상 가운데 진리라고 여겨지는 내용을
절충하고 조화함으로써 학설을 만들어가는 사상 혹은 경향을 의미한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학파, 17세기 라이프치히의 학설,
19세기 쿠쟁의 학파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자료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C%A0%88%EC%B6%A9%EC%A3%BC%EC%9D%98)
 
이것보다, 브리태니커 사전은 훨씬 더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절충주의 折衷主義eclecticism
(eclecticism은 '선택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eklektikos에서 유래)
철학과 신학에서 각 학설의 근원이 되는 체계를 전체로 채택하지 않고,
서로 다른 사상 체계에서 학설들을 선택하는 수법.
절충주의는 서로 다른 체계들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은 채 남겨놓기 때문에, 서로 다른 체계들을 융합하거나 결합하려 하는 통합주의(syncretism)와는 다르다. 추상적 사고의 영역에서 각각의 체계는 여러 가지 학설을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 삼는 하나의 전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체계에서 나온 학설들을 자의적으로 병렬하는 절충주의는 근본적인 부정합성의 위험이 있다는 반론에 부딪히기 쉽다. 그러나 실천적인 일에서는 절충적 정신이 권장할 만한 가치가 많다.
정치가 못지 않게 철학자도 절충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자가 원리에서는 아니지만 반대파들이 주장한 학설의 독특한 장점을 감지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상황이나 과학 지식이 변화함에 따라 기존 체계들이 참신함을 잃어버리거나 결점을 드러낼 때 이러한 경향이 쉽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BC 2세기초부터 유서 깊은 학파들(그리스 아카데메이아 학파, 소요학파, 스토아 학파)에 속해 있다고 자처한 많은 철학자들이 다른 학파의 견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특히 모든 그리스 철학을 계몽적이라고 생각한 로마 철학자들은 대체로 완고한 당파적 주장을 삼간 편이었다(키케로는 탁월한 절충주의자였음). 고대의 수많은 절충주의자들을 마치 그들이 절충주의 학파라도 형성한 듯이 한데 묶는 것은 분명히 무의미한 일이다. 스코틀랜드 형이상학의 옹호자인 19세기 프랑스의 빅토르 쿠쟁은 자신의 철학체계를 지칭하기 위해 '절충주의'(eclectisme)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자료출처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9j0871a)
 
이요나 목사가 통합주의적이라고 말한 것은 더 위험한 말이지만,
통합주의와 절충주의에 대한 개념적 차이를 알고
이요나 목사가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보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통합주의나 절충주의나 같은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의 두 사전을 살펴보면 통합주의와 절충주의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통합주의자'라고 하면 헤겔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통합과 절충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기독교에서 통합이라는 말은, 에큐메니즘을 말합니다.
에큐메니즘은 교파와 교회를 초월하여 하나로 통합하자는 것입니다.
말은 그럴듯 해 보이나, 그렇게 되면 진리를 수호해 갈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과 심리학을 섞어서 통합주의로 가든지
성경과 심리학을 섞어서 절충주의로 가든지
그 어떤 것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요나 목사는 이미 자신의 글에서
자기대면과 자기대면의 저자 존 블로거가 통합주의적임을 시인했습니다.
(그 글에서 이요나 목사가 말하는 통합주의적는 아마 절충주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말입니다.
이요나 목사가 "성경적"이라고 하는 의미는,
"오직 성경만으로"가 아닙니다.
 
이요나 목사의 "성경적"이란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심리학"=통합주의(절충주의)
 
오늘날 절충주의자들은
성경으로 심리학을 걸러내어서 사용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리학의 좋은 점만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눈으로 심리학을 보기 때문에 심리학의 문제들은 다 걸러낸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요?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요?

성경과 심리학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말하는데,
성경으로 심리학을 걸러내면 남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걸러낼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걸러내었을까요?

심리학은 성경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데
왜 목회자들은 심리학을 그렇게 좋아할까요?
심리학자들조차도 왜 목회자들이 심리학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데
왜 목회자들은 심리학을 그렇게 좋아할까요?

설교 중에 설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심리학자의 말을 언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릅니다. 
심리적인 설교로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심리학을 얕잡아 보거나, 심리학을 일반은총의 차원으로 생각하거나,
심리학을 문화의 차원으로 생각하거나, 심리학을 학문의 차원으로 생각하거나,
심리학을 인간 이해의 도구로 생각하거나...,
그 어떤 경우라도 심리학에 대한 우호적인 그 접근으로
심리학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신앙은 죽습니다.

오늘날 "성경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되짚어 보아야할 때입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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