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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주_양촌치유센터의 치유법은 성경적인가?1

김종주_양촌치유센터의 치유법은 성경적인가?1 
양촌치유센타의 전인치유사역자인 이화영 목사님께서
정태홍 목사의 글에 대하여 반박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글을 올린다는 것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햇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어떤 목회자"라고 하는 글은 정태홍 목사의 글입니다.
그런데 이화용 목사님께서는 출처없이 글을 여러번 그렇게 인용을 하셨네요
한 두 번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계속 그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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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치유센터의 치유법은 성경적인가?
글: 이화영(새마음교회 담임목사, 양촌치유센터 전인치유사역자)
 
양촌치유센터는 독특한 방법으로 내적 치유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간혹 양촌치유센터의 치유법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양촌치유센터의 치유사역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양촌치유센터의 독특한 치유법은 토설, 기억치유, 내담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돕는 것, 내담자를 의자에 앉혀서 치유하는 것, 삼분설을 주장하는 것, 가계치유를 하는 것(가계저주론을 주장하는 것) 등이 있다.
필자는 양촌치유센터의 치유사역자들이 우리의 치유법을 충분히 홍보하지 않아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늦게나마 책임의식을 느끼며 오해가 발생하는 우리의 치유법에 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다만 가계치유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필자의 가계치유 설명은 유투브에서 ‘가계저주란 무엇인가’를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고, 아래에 소개한 필자의 블로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블로그 주소:
http://blog.chosun.com/blog.screen?userId=yespay
 
자, 그러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양촌치유센터의 치유법에 관한 오해를 풀어보도록 하자. 
 
1) 토설을 이용하여 치유하는 것은 성경적인가?
양촌치유센터의 치유법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토설인 것 같다.

토설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토설이 성경에 없다”, “토설을 통하여 내적 치유를 하는 것은
뉴에이지의 구상화를 원용하여 치유하는 것일 뿐”이라는 등의 주장을 하면서 토설을 반대한다.

다음은 어떤 목회자의 주장이다.
 
“많은 분들이 토설해서 치유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토설치유의 방법은 심리학의 게슈탈트 치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토설을 심리학적 치유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기에 필자는 토설이 철저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임을 밝혀서 사람들의 오해를 해소하고자 한다.
 
개역성경에 토설이란 말이 딱 한번 나온다.
 
(시 32: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개역개정판 성경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시 32:3)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개역성경에 ‘토설’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라쉬’다.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새기다, 쟁기질 하다, 조각하다, 고안하다. 2)침묵하다, 언어능력을 상실하다, 말을 못하다, 귀가 들리지 않다.”
히브리어 사전에서 보는 것처럼 시편 32편 3절의 ‘하라쉬’는 ‘침묵’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내가 침묵할 때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다”는 뜻이다. 
시편 32편은 다윗의 시다. 본문에서 다윗이 언급한 ‘침묵’은 ‘회개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본문의 문맥이 가르쳐 준다.
 
(시 32:3-5)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처럼 다윗은 회개할 죄를 침묵한 것(입을 열지 아니한 것) 때문에 종일 신음하므로 그의 뼈가 쇠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죄를 숨기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본문을 보면 사람은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으면 몸에 병이 드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꼭 해야 할 말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죄를 회개하지 않은 것 때문에 몸에 병이 들게 되었다. 위기를 느낀 그는 서둘러 회개했다. 그로 인하여 그는 건강을 회복했을 것이다.
 
토설의 사전적인 뜻은 ‘숨겼던 사실을 비로소 밝히어 말함’이다. 따라서 다윗이 숨겼던 죄를 회개한 것이 토설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참고하면 시편에 토설이 많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시편 중의 상당부분은 시편 기자가 자신의 상한 마음을 토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편 39편에 기록된 토설을 보자.
 
(시 39:1-6)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개역성경이 본문 3-6절을 더 잘 번역한 것 같다. 개역성경은 본문을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라고 번역했다.
 
본문은 다윗의 시다. 다윗은 진실하게 살기를 힘썼고, 사울 왕에게 충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 왕과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처음에 그는 모든 것을 참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그의 근심이 심해졌다. 마침내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았다. 다윗의 원망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내 목숨은 손 넓이만큼 짧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곧 죽게 되었습니다. 나의 생명은 주님 앞에서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제가 그 친구들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결과란 말입니까? 속상해서 죽겠습니다!”
 
욥도 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그는 처음에 재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재난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욥 1:20-22)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부아를 돋아도 아내를 책망하며 참았다.
 
(욥 2:10)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하지만 재난이 오래 가고, 친구들의 비난이 계속되자, 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쏟아놓았다.
 
(욥 7:11-12)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욥 10:18)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욥 13:24)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욥 23:1-2)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사람은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을 참기만 하면 병이 된다. 옛날 한국의 여성들이 억울함을 참고 살아서 화병이 생긴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토설해야만 건강하게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원망을 토하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으신다. 그래서 다윗과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토설을 하고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는커녕 갑절의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징계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까닭 없이 나를 힘들게 하신다”고 착각하여 하나님을 원망을 하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회개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어떤 목회자는 어떤 교회의 부목회자로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그러던 중에 담임목사의 오해를 받게 되었다. 담임목사는 그에게 절대로 이유를 말하지 않고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침묵한 채로 그 교회를 사임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억울해서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시라”고 원망했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하나님 노릇을 하시려면 사표를 내시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에게 작은 교회를 담임할 길이 열렸다. 그 목회자는 그 교회에 부임했다. 그 때부터 그에게 성령의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교회는 오늘날 큰 교회가 되어 있다. 만일 그가 억울함을 속으로 삭였으면 십중팔구 그는 병에 걸렸을 것이다. 이렇게 토설이 중요하다!
 
다윗은 악인들에게 일절 대응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을 어느 정도는 실천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대응하지 않는 대신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으며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악인들을 저주하는 토설을 했다.
시편 109편에 다윗이 악인들을 격렬하게 저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시 109:8-13)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격렬하게 저주했다.
 
“그가 빨리 죽게 하소서!”
“그가 실직하게 하소서!”
“그의 자녀가 고아가 되게 하소서!”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게 하소서!”
“그의 자녀들이 거지가 되게 하소서!”
“고리대금업자가 그의 재산을 다 빼앗게 하소서!”
“그의 대가 끊어지게 하소서!”
“그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는 것으로 토설했고, 악인들을 저주하는 것으로 토설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억울하게 어려움을 당한 것을 아시고 그의 토설을 용납해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토설을 통하여 다윗의 상한 마음을 치유해 주셨다. 그 결과 다윗은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성경은 명백하게 토설을 통하여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때문에 양촌치유센터의 치유사역자들이 내담자들에게 토설을 시키는 것이고, 토설을 열심히 하는 내담자들에게 강력한 치유가 발생하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다”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고, 토설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큰 찬양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자료출처 http://blog.chosun.com/yespay/6553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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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본문에 대한 주석과 이해
그러면,
시 32편 3절에 대해서 주석은 무엇이라고 할까요?
 
다음은 호크마 주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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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여기서 `토설치 아니할 때에'란 문자적으로 `침묵하였을 때에'로 번역된다.
이는 곧 죄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을 가리키며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다윗이 죄를 고백하지 아니하고 숨겼을 때
가장 먼저 양심의 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체험을 보여 준다.
여기서 `신음하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아그'(*)는 `으르렁거리다', `고함치다'는 뜻으로
이는 고함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그의 혹독한 양심적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다(Briggs, Delitzsch).
게다가 그의 신음이 `종일' 계속되었으니 그의 양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양심적 고통은 육체적 질병으로 이어졌다.
특히 질병의 밀접한 관계는 본서에서 기정화된 사실이다.
특히 죄로 인해 발생한 질병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이해된다(6:1, 2, Kraus, Craigie, Delitzsch, Lange, Hitzig).
본 구절에서 `내 뼈가 쇠하였도다'는 말은 바로 죄로 인한,
또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육체적 질병으로 그의 몸이 매우 약해졌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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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의 내용이나
이화영 목사가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을 인용해서 하는 말이나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화영 목사는
"다윗은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는 것으로 토설했고, 악인들을 저주하는 것으로 토설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 대해서 메튜헨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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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Calvin)은  당시 프란체스코 수사들과 다른 수사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신성 모독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자기 이웃 사람에게 앙심을 품고 있으면,
그는 수도사들 중 어떤 자들을 고용하여 자기가 미워하는 자를 매일같이 저주케 하고,
그는 이 성경 귀절을 인용해서 저주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특히 자기 친아들과 의좋지 않은 한 프랑스 여인이 수도사를 시켜
자기 아들을 저주케 했던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렇듯 성서에서 악마적인 감정을 뽑아내며,
하나님의 제단에서 불을 훔쳐다가 불화의 불을 붙이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지옥불을 붙이라고 기도하는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불경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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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나, 메튜헨리나 그 말의 핵심은 동일합니다.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저주를 한다는 것은 "불경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화영 목사는, 다윗이 그렇게 했으니 다윗처럼 악인을 저주하라 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접근 방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칼빈주석에서)----------------
그러므로 다윗은 이 시에서 자기가 겪은 환난을 탄식하기는 하지만
다윗은 전형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이 시에 표현된 모든 것들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와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되어 마땅하다.
그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원수들에게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나 고통을 당할 때는
보응하시는 권한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p. 368).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은 다윗의 원수들이 다윗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해 오던 바로 그 순간에
다윗이 원수들을 위해 드렸던 기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이 견해는 우리가 시편 35편 13절에서 말한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내게 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해석으로 보이는 것은
다윗이 잔인하고도 악의에 찬 방법으로 공격을 당했 때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과 같은 합당치 못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함으로써 자신만은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음을
매우 만족하게 여겼다고 보는 견해이다.
또 사람이 이유없이 능욕을 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자기가 당한 모든 손해를 계산해서 그들에게 보응하고자 하려는 바로 그 때에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그 즉시로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자신을 호소하는 것은
매우 엄청나고도 바람직한 미덕임에 틀림없다.
선한 자들과 친교를 나누며 살기를 목표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악한 자들과 접촉하여 자신이 입을 피해를 그 피해대로 갚으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모든 경건한 자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져들기 쉬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성령게서는 우리를 억제하심으로써 우리 원수들의 잔인함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갚고 싶은 생각이 들지라도 모든 부정하고 격한 방법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도록 격려하신다(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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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칼빈은 이화영 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토설하라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처럼 그렇게 자신이 입은대로 갚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2) 신약의 틀 안에서 구약을 해석한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구약은 신약의 틀 안에서 해석하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화영 목사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 중에서,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시 109:8)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 알다시피,
성경에서는 가룟 유다에게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칼빈도 애써 이 점을 강조합니다.
-------(칼빈주석에서)----------------
베드로는 이 말씀이 유다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행 1:20)
그 이유는 여기에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p.376).
------------------------
 
그러면 이화용 목사님 방식으로만 해석하면
다윗의 토설은 토설로만 끝나는데,
성경은 오히려 그것이 '가롯 유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시편 22편도 그렇습니다.
다윗 자신의 처절한 고통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메시야의 고통으로 연결합니다.
 
그래서 메튜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메튜헨리 주석에서)--------------
선지자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은 이 시편에서,
모든 구약 속에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분명하고 충분하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벧전 1:11)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윗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다윗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 특이해서
우리는 그 당시 그를 장차 오실 자의 표상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부 지혜롭고 선한 자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이 시편을 지을 때에 그는 그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훨씬 능가한 예언의 영에 의해 놀라웁게 이끌리고 있는 그 자신을 발견했으며,
이 시편은 곧 자신이 메시야의 선조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예표라는
사실에 대한 만족감을 가지고(우리는 이렇게 짐작할 수 있다) 지어진 것이다(p. 285).
------------------------------

그렇다면,
시편 109편 역시 그런 메시야적인 시로 봐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시는 다윗 개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 속에 역사하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3) 성경에서 "쌍욕"을 하면서 토설하라고 가르치는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양촌치유센타는 토설의 정당성을 말하면서
성도와 목회자로서는 감히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토설을 하면서 "쌍욕"을 했을까요?
다윗 속에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온갖 더러운 "쌍욕"을 하면서 토설하게 했을까요?
 
양촌치유센타의 이런 토설은 심리학에 근거한 것입니다.
심리학은 억압이 곧 병을 만들기 때문에 드러내어야 병이 안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양촌치유센터에 갔다 온 사람들이 왜 그 마음의 병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시달리고 견디다 못해 정신과를 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양촌치유센터를 갔다 온 어떤 분의 말의 근거해서 말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토설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토설이 곧 치유의 열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위험성은 과거 심리학의 역사에서 입증이 되었습니다.
 
양촌치유센터의 토설은 성경적이라 말하면서 증거구절을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해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칼빈과 메튜헨리 역시 양촌치유센터 식의 토설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양촌치유센터의 토설은 심리학과 잘못된 성경해석에 기초한
그릇된 치유방법입니다.

양촌치유센터의 김종주 장로와 이화영 목사를 비롯한 양촌치유센터의 간사들이 
심리학과 뉴에이지에 물든 내적치유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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