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택_내적치유_창조적 소수 속에 당신도 속하십시오?
주서택_내적치유_창조적 소수 속에 당신도 속하십시오?
주서택 목사는 "창조적 소수 속에 당신도 속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는 아놀드 토인비와
플라톤의 철학적 마인드를 가진 소수를 말합니다.
우선 주서택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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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서택 이메일 healing119@hanmail.net 작성일 2012.04.24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세계 운명을 좌우한다고 했고,
희랍의 플라톤도 철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소수가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8식구는 홍수 이후 세 세대의 주역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혈혈 단신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오늘의 유대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오늘의 기독교를 형성하였고
요한 웨슬레는 ‘내게 죄는 미워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 12명을 주옵소서
그리하면 영국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창조적 소수는 가정에도 있고 지역사회에도 있고 작은 교회안에도 있습니다.
창조적 소수는 자기 희생을 의식하지 못하며, 누군가의 인정을 받으려고 웃음을 팔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희생의 보람과 역사의 심판만이 그의 힘이요 생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창조적 소수 속에 당신도 속하십시오.
(자료출처http://www.innerheali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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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놀드 토인비의 창조적 소수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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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읽고
민원기 조회 수 : 4082009.09.04 (13:49:52)
토인비에 의하면 문명이나 사회는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발생, 성장, 쇠퇴, 해체의 과정을 밟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여러 문명들은 각각 흥하고 멸망하는 가운데서도 이들을 초월한 신의 계획에 따라 문명은 이끌려 가게 된다. 일반적으로 문명의 발생과 성장의 단계에서는 인간 개체의 자발성과 창조성이란 자유가 두드러졌다. 반면 문명의 쇠퇴나 원시사회에서는 기계적 패턴이나 규칙이란 필연이 지배하였다. 결국 자유와 필연이란 일련의 사고방식은 신의 창조 원리에 근거해 있는 토인비의 사건 전개 방식과 함께 이 책의 전반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고난과 응전을 기뻐하라
토인비는 문명의 발달을 우수한 인종적 자질이나, 유리한 지리적 자연 환경에서 찾지 않았다. 그보다 인간의 무한한 힘을 일으켜주는 어려운 역경이 문명발생의 기원이라고 본다. 이 때 중요한 것이 도전과 응전이다. 인간의 창의적 행동은 역경을 당하여 이를 이겨내려는 인간 본연의 무의식과 그가 서 있는 준거점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 때 더 이상 역경은 그들에게 좌절의 대상이 아니다. 더 크게 진보 할 수 있는 희망의 대상이자 자기 개혁 내지는 쇄신의 이유가 된다.
사실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어떤 기쁨이나 성취도 그것 혼자 오는 법은 없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공짜배기는 없는 것이다. 무엇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가가 따라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시인 고은의 말처럼 “우리가 고(苦), 락(樂)을 합쳐 고락이라고 말할 때 어느덧 고(苦)는 락(樂)이고 락(樂)은 고(苦)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있는 고난이 있다면 기쁨으로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소수가 되느냐 평범한 다수가 되느냐의 갈림길은 역경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달린 것이다. 세상의 도전과 응전은 항상 우리에게 굴복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에 좌절하지만 않으면 우리에게 기회는 온다. 그리고 창조적인 능력으로 우리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바로서면 여기서 비창조적 집단의 미메시스(모방)가 이루어지고 토인비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문명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끊임없이 도전하자.
□ 창조적 미메시스의 대상으로
토인비가 문명의 쇠퇴 원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자연환경이나 인간 환경이 아니다. 그는 사회적 미메시스를 이야기 하고 있다. 비창조적 집단은 창조적 소수자들을 모방하여 사회적 관습, 재산, 사상 등을 그들의 것으로 삼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창조적 소수집단이 나중에는 지배적 소수집단으로 변질 된다는데 있다. 그렇게 되면 이 비창조적 소수들은 그 사회를 이탈하게 된다. 이는 자아 정체성과 사회의 혼란을 야기 시킨다. 결국 그 두 집단 사이에서는 충돌이 일어나 그들의 문명은 성장이 멈추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지배집단이 다시 한 번 개혁에 성공을 하면 문명이 성장하지만 토인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그 한번 도전에 성공한 사람들은 다음 도전에 철저한 대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이겨낼 능력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들이 성공한 후 자기 성찰과 반성 없이 자기만족에 도취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갈 리더로 손꼽히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도취되어 자기기만에 빠져버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한번 뒤쳐진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 오르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미 그가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미메시스가 일어났고, 그 보다 더 성공한 사람은 그가 가진 성공의 결과물을 뛰어 넘은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다시 성공하기 위해서는 처음 성공한 것 몇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그어버리므로 좌절하고 만다. 꾸준히 성공하는 사람이 소수이고 좌절 했다가 다시 성공하는 사람이 더 소수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 순간 자기의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창조적 소수의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 멈춰서면 어느새 그의 생각과 행동은 창조적 미메시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자기에게나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끊임없는 도전은 우리를 창조적 소수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더 많은 것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 창조적 소수
문명의 해체는 수직적 분열(전쟁) 보다는 수평적 분열(계급간의 갈등)에 더 주요한 이유가 있다. 창조적 소수는 그 지도력을 상실하고 지배적 소수가 된다. 그들은 무력과 폭력으로 대중을 강압한다. 두 번째 내적 프로레타리아트는 무능한 지배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투력을 집중시킨다. 마지막으로 외적 프로레타리아트는 국경 바깥에 있는 야만인들로 내적 프로레타리아트처럼 무력적 전투를 상습 수단으로 삼는다. 그의 의하면 문명의 해체는 이런 과정을 거쳐 실패-회복-실패-회복-실패를 거듭하는 리듬이 있다. 고난의 시기가 첫 실패이고 세계국가의 수립이 회복이며 그 후에 외적 프로레타리아트의 활약으로 오는 것이 영웅시대이다.
(자료출처 http://peaceground.or.kr/xe/?document_srl=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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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말하듯이,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란
결국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는 인간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세에 따라서 인간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사상이
과연 성경적 사고방식과 일치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서택 목사는 지금 인본주의 사고방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플라톤의 소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와 있습니다.
이상국가와 철인정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하단 글 참고).
이런 개념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할까요?
"우매한 군중이 주도하는 민주정치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철인정치'를 주창했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을 시작으로 근대에는 니체가 대중에 대한 강한 불신과 경멸감을 바탕으로
'초인'의 출현이 절심함을 피력한것과 같이 소수 엘리트 역활을 강조하는 견해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내려 왔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또한 인류 역사에 등장한 26개 문명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역사를 진보와 발전으로 이끄는것은 '창조적 소수'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창조적 소수의 역활을 강조하는 것은 비단 보수주의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발견되는것은 아니었다.
렌닌의 혁명 이론에서 극적으로 표현되었다시피 좌파가 이끄는 사회혁명에도 전문적인 혁명가 그룹의 역활은
언제나 결정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렌닌은 이러한 전문가 그룹의 역활 없이는 사회주의 혁명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edhian&logNo=20054562519&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창조적 소수"라는 소위 "전문가 그룹"을 통해서 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말하는 그 "창조적 소수"는 이상적 이데아를 만들기 위하여,
국가의 구성원을 세 직종으로 분류하며,
통치계급(왕), 수호계급(군인), 생산계급(농민,수공업자,노동자)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통치계급(왕)"은 지혜가 필요한데 이 지혜는 깊은 철학적 사색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을 말합니다.
즉 동굴의 비유에서 말하자면 동굴의 세계에서 나와 이데아의 세계를 본 사람에 속합니다.
이 통치자의 지식은 대내적인 일과 대외적으로 관련되는 국가 전체에 관한 철학적 지식이며,
최선의 지식은 선의 이데아이고 이것이 바로 통치자가 가져야할 정의로운 국가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http://theology.ac.kr/institute/dtdata/%EA%B8%B0%EB%8F%85%EA%B5%90%EA%B5%90%EC%9C%A1/%EC%A2%85%EA%B5%90%EC%B2%A0%ED%95%99/%ED%94%8C%EB%9D%BC%ED%86%A4(%EA%B5%AD%EA%B0%80%EB%A1%A0).htm)
다시 말해서 "철학적 사색"을 통해 이데아의 세계를 본 사람이 "창조적 소수"입니다.
그런 "창조적 소수"는 성경이 말하는 개념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 역시 토인비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이었지, 무슨 철학적 사색을 통해서 "이데아"에 도달한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고 연결을 한다면 기독교는 철학사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삼분설을 가르치는 주서택 목사는 역시 삼분설을 말하는 플라톤과 너무나도 잘 어립니다.
신비주의적 영성을 가르치는 주서택 목사의 성향 역시 플라톤의 그런 신비적인 영성과 무관할까요?
내적치유에서 주서택 목사는
뉴에이지적이며 로마가톨릭적인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과연 그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창조적 소수"를 말하는 것을 보면 더 놀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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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국가론
플라톤에 있어서 국가의 기원은 인간의 필요성에서 시작된다. 즉 인간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 자족하지 못하고 많은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서로의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도움과 협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필요의 충족을 위해서 요구하는 첫번째 것은 육체의 필요한 의,식,주의 필요이다. 플라톤은 분업과 교환의 원칙에 입각하여 동반자와 협력자들이 일정한 주거지에 모여 경제적 사회를 형성하였을 때 그 주민들의 조직체를 국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때로는 이 국가가 거대해질 때 국민들의 물질적 욕구와 충족이 비례해짐으로써 내적 불안과 외적 전쟁 등의 위협 때문에 국가는 건강과 균형을 잃고 해체될 위기에 놓이게되며 부정국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때문에 플라톤은 그가 이상국가를 말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대표적 저서인 국가론 이다.
1)이상국가
플라톤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과 정의의 이데아를 국간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국가론의 형이상학적 기초는 그 구조에 나타나는데 인간의 영혼의 세 부분의 이론에 부합된다. 즉 영혼의 지적인 부분에 해당되는 통치자와, 용기(氣槪)의 부분에 속하는 수호자,감각적이고 쾌락적인 부분은 생산계급에 비유된다.
그의 이상국가의 목적은 어떤 한 계급에만 행복을 편중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 안의 전체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려는 데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게 되며 정의의 원칙에 따라 사람들이 선한 삶을 누리도록 한다. 이러한 선은 교육에 의존하며 정의를 통해서만 이 선의 이데아가 실현된다.
플라톤은 국가의 구성원을 세 직종으로 분류하는데 통치계급(왕), 수호계급(군인), 생산계급(농민,수공업자,노동자)이 있고 이들 각각은 각자에 합당한 덕이 있으며 이 덕목들이 국가 내에서 조화를 잘 이룰 때 정의로운 이상국가가 된다고 한다.
첫째로 가장 머리부분에 속하는 통치자는 지혜가 필요한데 이 지혜는 깊은 철학적 사색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을 말한다. 즉 동굴의 비유에서 말하자면 동굴의 세계에서 나와 이데아의 세계를 본 사람에 속한다. 이 통치자의 지식은 대내적인 일과 대외적으로 관련되는 국가 전체에 관한 철학적 지식이며, 최선의 지식은 선의 이데아이고 이것이 바로 통치자가 가져야할 정의로운 국가의 근본이다.
둘째로 국가를 수호하는 수호자에게는 용기가 필요한데, 이 용기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며 어떠한 고통, 쾌락, 욕망, 공포에 굴복함이 없이 무서운 것들과 무섭지 않은 것들에 관한 올바르고 합리적인 견해를 한결같이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생산자 계급에는 절제 있는 행동이 필요한데, 이 절제는 일종의 질서이며 쾌락이나 욕망의 극복을 말한다.
이상의 세 계급의 각자가 자기의 천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을 맡아 이에 충실할 때 정의로운 이상국가가 탄생된다는 것이다.
2)철인정치
플라톤은 국가를 통치할수 있는 사람을 철인으로 말하는데, 철인을 정의하여 일체의 지식을 탐구하며 기꺼이 배우려는 자, 배움을 끝없이 추구하여 학문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진정한 지혜와 학문영역은 이성을 으뜸으로 삼고 다른 정신작용들을 그 하위에 두면서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인은 아름다운 사물들이나 아름다운 현상보다 아름다움 자체를 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나 빛깔 및 모양을 볼뿐 아름다움 그 자체의 본질을 볼 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인간, 즉 철인이나 철학자라야 비로소 아름다움 자체 즉 미의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철인은 모든 지혜를 바라는 사람이어서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철인만이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철인은 잠재력이 있는 자를 찾아내어 교육을 하므로 만들어지는데, 체육,음악,수학,논리학,철학등과 같은 교육을 10세에서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50세가 될 때까지 교육받는다.
플라톤은 이렇게 훈련된 철인 지배자 만이 파악할 수 있는 선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하면서 증명하려 했다. 즉 눈에는 시각이 내재하고 있어 눈을 가진 자가 시각을 사용하려 해도 그리고 보여지는 사물에 색채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부터 이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진 제 3의 것 즉 태양이 없으면 시각은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빛깔도 보이지 않는 채로 있을 것이다. 선의 이데아가 가시계에서 지성과 가시적인 것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태양이 가시계에서 시각과 가시적인 것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개인의 독특한 내면적인 경험에 의해 지배되는 지적인 특성을 지닌 철인만이 끊임없이 비합리적인 욕망에 얽매여 살아가는 즉 환상에 사로잡힌 동굴속의 생활로부터 국가의 구성원들을 벗어나게 할 수가 있다.
철인이 지배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과 이에 바탕을 둔 정치적 기술뿐 아니라 그의 도덕적 자질 때문이기도 한다. 철인 지배자는 권력의 유혹에 둔감하고 이기심이 없는 자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배권을 담당하기에 적합한 자이다. 그는 육체적인 즐거움과 긍정적인 가치를 내려다보고 사적 이해관계를 극복한 자이며 권력을 사랑하지 않으며 유혹에 빠지지 않는 자이다.
이러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자를 지배자로 선택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을 선의 지식 획득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사적 이해관계의 유혹을 막을 수 있도록 지배자의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자에게는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고 사적인 가정생활도 부정되고 있다. 철인의 차원에서 즐거움이란 오직 최고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지혜에만 전념하고 나라 전체가 가능한 한 행복하게 되기를 추구하는데 있어야 한다.
또한 철인에게 있어서 여자들은 모두 남자들의 공유물이어야 하고 어떤 여자도 한 남자와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며 또한 자식들도 공유하고 부모가 자기자식을 알거나 자식이 그 부모를 알아서도 안된다. 특히 플라톤은 여자도 남자와 더불어 통치계급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여성관은 당시 희랍의 문화 풍토 면에서 보면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남녀의 역할과 기능이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타고난 바탕은 양성에게 고르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녀 공히 기능을 담당하거나 다만 모든 점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약할 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들과 같은 일에 종사하게 하려면 그들에게도 음악과 체육 및 수학과 철학의 단계에까지 교육이 시행되어져야 하며 최고 통치자의 단계에 이른 여자들은 같은 본성의 소유자인 남자들과 동료나 동반자의 관계에서 짝지어져 가장 뛰어난 자손을 낳게 한다.
플라톤은 여자와 자녀의 공유가 최고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일임을 강조하면서 국가를 분열시키는 것은 악이요 그것을 한데 묶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최대의 선이라고 한다. 또한 국가 생활 속에서 내것 이라든가 내것이 아니라든가 하는 따위의 말이 가장 적게 말해지는 국가가 가장 강하게 단련된 국가라고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철인이 통치하는 국가야말로 최고의 이상국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 http://theology.ac.kr/institute/dtdata/%EA%B8%B0%EB%8F%85%EA%B5%90%EA%B5%90%EC%9C%A1/%EC%A2%85%EA%B5%90%EC%B2%A0%ED%95%99/%ED%94%8C%EB%9D%BC%ED%86%A4(%EA%B5%AD%EA%B0%80%EB%A1%A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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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http://www.facebook.com/RPTministries
주서택 목사는 "창조적 소수 속에 당신도 속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는 아놀드 토인비와
플라톤의 철학적 마인드를 가진 소수를 말합니다.
우선 주서택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읽어 보십시오.
---------- 자료 인용 시작 -------------------
주서택 이메일 healing119@hanmail.net 작성일 2012.04.24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세계 운명을 좌우한다고 했고,
희랍의 플라톤도 철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소수가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8식구는 홍수 이후 세 세대의 주역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혈혈 단신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오늘의 유대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오늘의 기독교를 형성하였고
요한 웨슬레는 ‘내게 죄는 미워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 12명을 주옵소서
그리하면 영국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창조적 소수는 가정에도 있고 지역사회에도 있고 작은 교회안에도 있습니다.
창조적 소수는 자기 희생을 의식하지 못하며, 누군가의 인정을 받으려고 웃음을 팔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희생의 보람과 역사의 심판만이 그의 힘이요 생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창조적 소수 속에 당신도 속하십시오.
(자료출처http://www.innerheali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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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놀드 토인비의 창조적 소수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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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읽고
민원기 조회 수 : 4082009.09.04 (13:49:52)
토인비에 의하면 문명이나 사회는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발생, 성장, 쇠퇴, 해체의 과정을 밟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여러 문명들은 각각 흥하고 멸망하는 가운데서도 이들을 초월한 신의 계획에 따라 문명은 이끌려 가게 된다. 일반적으로 문명의 발생과 성장의 단계에서는 인간 개체의 자발성과 창조성이란 자유가 두드러졌다. 반면 문명의 쇠퇴나 원시사회에서는 기계적 패턴이나 규칙이란 필연이 지배하였다. 결국 자유와 필연이란 일련의 사고방식은 신의 창조 원리에 근거해 있는 토인비의 사건 전개 방식과 함께 이 책의 전반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고난과 응전을 기뻐하라
토인비는 문명의 발달을 우수한 인종적 자질이나, 유리한 지리적 자연 환경에서 찾지 않았다. 그보다 인간의 무한한 힘을 일으켜주는 어려운 역경이 문명발생의 기원이라고 본다. 이 때 중요한 것이 도전과 응전이다. 인간의 창의적 행동은 역경을 당하여 이를 이겨내려는 인간 본연의 무의식과 그가 서 있는 준거점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 때 더 이상 역경은 그들에게 좌절의 대상이 아니다. 더 크게 진보 할 수 있는 희망의 대상이자 자기 개혁 내지는 쇄신의 이유가 된다.
사실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어떤 기쁨이나 성취도 그것 혼자 오는 법은 없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공짜배기는 없는 것이다. 무엇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가가 따라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시인 고은의 말처럼 “우리가 고(苦), 락(樂)을 합쳐 고락이라고 말할 때 어느덧 고(苦)는 락(樂)이고 락(樂)은 고(苦)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있는 고난이 있다면 기쁨으로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소수가 되느냐 평범한 다수가 되느냐의 갈림길은 역경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달린 것이다. 세상의 도전과 응전은 항상 우리에게 굴복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에 좌절하지만 않으면 우리에게 기회는 온다. 그리고 창조적인 능력으로 우리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바로서면 여기서 비창조적 집단의 미메시스(모방)가 이루어지고 토인비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문명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끊임없이 도전하자.
□ 창조적 미메시스의 대상으로
토인비가 문명의 쇠퇴 원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자연환경이나 인간 환경이 아니다. 그는 사회적 미메시스를 이야기 하고 있다. 비창조적 집단은 창조적 소수자들을 모방하여 사회적 관습, 재산, 사상 등을 그들의 것으로 삼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창조적 소수집단이 나중에는 지배적 소수집단으로 변질 된다는데 있다. 그렇게 되면 이 비창조적 소수들은 그 사회를 이탈하게 된다. 이는 자아 정체성과 사회의 혼란을 야기 시킨다. 결국 그 두 집단 사이에서는 충돌이 일어나 그들의 문명은 성장이 멈추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지배집단이 다시 한 번 개혁에 성공을 하면 문명이 성장하지만 토인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그 한번 도전에 성공한 사람들은 다음 도전에 철저한 대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이겨낼 능력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들이 성공한 후 자기 성찰과 반성 없이 자기만족에 도취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갈 리더로 손꼽히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도취되어 자기기만에 빠져버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한번 뒤쳐진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 오르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미 그가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미메시스가 일어났고, 그 보다 더 성공한 사람은 그가 가진 성공의 결과물을 뛰어 넘은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다시 성공하기 위해서는 처음 성공한 것 몇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그어버리므로 좌절하고 만다. 꾸준히 성공하는 사람이 소수이고 좌절 했다가 다시 성공하는 사람이 더 소수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 순간 자기의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창조적 소수의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 멈춰서면 어느새 그의 생각과 행동은 창조적 미메시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자기에게나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끊임없는 도전은 우리를 창조적 소수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더 많은 것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 창조적 소수
문명의 해체는 수직적 분열(전쟁) 보다는 수평적 분열(계급간의 갈등)에 더 주요한 이유가 있다. 창조적 소수는 그 지도력을 상실하고 지배적 소수가 된다. 그들은 무력과 폭력으로 대중을 강압한다. 두 번째 내적 프로레타리아트는 무능한 지배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투력을 집중시킨다. 마지막으로 외적 프로레타리아트는 국경 바깥에 있는 야만인들로 내적 프로레타리아트처럼 무력적 전투를 상습 수단으로 삼는다. 그의 의하면 문명의 해체는 이런 과정을 거쳐 실패-회복-실패-회복-실패를 거듭하는 리듬이 있다. 고난의 시기가 첫 실패이고 세계국가의 수립이 회복이며 그 후에 외적 프로레타리아트의 활약으로 오는 것이 영웅시대이다.
(자료출처 http://peaceground.or.kr/xe/?document_srl=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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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말하듯이,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란
결국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는 인간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세에 따라서 인간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사상이
과연 성경적 사고방식과 일치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서택 목사는 지금 인본주의 사고방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플라톤의 소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와 있습니다.
이상국가와 철인정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하단 글 참고).
이런 개념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할까요?
"우매한 군중이 주도하는 민주정치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철인정치'를 주창했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을 시작으로 근대에는 니체가 대중에 대한 강한 불신과 경멸감을 바탕으로
'초인'의 출현이 절심함을 피력한것과 같이 소수 엘리트 역활을 강조하는 견해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내려 왔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또한 인류 역사에 등장한 26개 문명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역사를 진보와 발전으로 이끄는것은 '창조적 소수'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창조적 소수의 역활을 강조하는 것은 비단 보수주의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발견되는것은 아니었다.
렌닌의 혁명 이론에서 극적으로 표현되었다시피 좌파가 이끄는 사회혁명에도 전문적인 혁명가 그룹의 역활은
언제나 결정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렌닌은 이러한 전문가 그룹의 역활 없이는 사회주의 혁명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edhian&logNo=20054562519&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창조적 소수"라는 소위 "전문가 그룹"을 통해서 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말하는 그 "창조적 소수"는 이상적 이데아를 만들기 위하여,
국가의 구성원을 세 직종으로 분류하며,
통치계급(왕), 수호계급(군인), 생산계급(농민,수공업자,노동자)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통치계급(왕)"은 지혜가 필요한데 이 지혜는 깊은 철학적 사색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을 말합니다.
즉 동굴의 비유에서 말하자면 동굴의 세계에서 나와 이데아의 세계를 본 사람에 속합니다.
이 통치자의 지식은 대내적인 일과 대외적으로 관련되는 국가 전체에 관한 철학적 지식이며,
최선의 지식은 선의 이데아이고 이것이 바로 통치자가 가져야할 정의로운 국가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http://theology.ac.kr/institute/dtdata/%EA%B8%B0%EB%8F%85%EA%B5%90%EA%B5%90%EC%9C%A1/%EC%A2%85%EA%B5%90%EC%B2%A0%ED%95%99/%ED%94%8C%EB%9D%BC%ED%86%A4(%EA%B5%AD%EA%B0%80%EB%A1%A0).htm)
다시 말해서 "철학적 사색"을 통해 이데아의 세계를 본 사람이 "창조적 소수"입니다.
그런 "창조적 소수"는 성경이 말하는 개념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 역시 토인비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이었지, 무슨 철학적 사색을 통해서 "이데아"에 도달한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고 연결을 한다면 기독교는 철학사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삼분설을 가르치는 주서택 목사는 역시 삼분설을 말하는 플라톤과 너무나도 잘 어립니다.
신비주의적 영성을 가르치는 주서택 목사의 성향 역시 플라톤의 그런 신비적인 영성과 무관할까요?
내적치유에서 주서택 목사는
뉴에이지적이며 로마가톨릭적인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과연 그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창조적 소수"를 말하는 것을 보면 더 놀라게 됩니다.
성경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세상의 철학과 사상은 너무나도 잘 어울리게 됩니다.
말씀을 맡은 목회자는 말로만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하며,
세상의 철학과 사상을 섞는 절충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적 소수"를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26-31)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세상의 철학과 사상을 섞어서 가르치는 주서택 목사는 "창조적 소수"를 말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만을 증거하는 사도 바울은
"죄인 괴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택하심"을 말합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요?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을 증거해야만 합니다.
세상을 따라가면 오직 한 가지 멸망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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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국가론
플라톤에 있어서 국가의 기원은 인간의 필요성에서 시작된다. 즉 인간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 자족하지 못하고 많은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서로의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도움과 협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필요의 충족을 위해서 요구하는 첫번째 것은 육체의 필요한 의,식,주의 필요이다. 플라톤은 분업과 교환의 원칙에 입각하여 동반자와 협력자들이 일정한 주거지에 모여 경제적 사회를 형성하였을 때 그 주민들의 조직체를 국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때로는 이 국가가 거대해질 때 국민들의 물질적 욕구와 충족이 비례해짐으로써 내적 불안과 외적 전쟁 등의 위협 때문에 국가는 건강과 균형을 잃고 해체될 위기에 놓이게되며 부정국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때문에 플라톤은 그가 이상국가를 말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대표적 저서인 국가론 이다.
1)이상국가
플라톤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과 정의의 이데아를 국간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국가론의 형이상학적 기초는 그 구조에 나타나는데 인간의 영혼의 세 부분의 이론에 부합된다. 즉 영혼의 지적인 부분에 해당되는 통치자와, 용기(氣槪)의 부분에 속하는 수호자,감각적이고 쾌락적인 부분은 생산계급에 비유된다.
그의 이상국가의 목적은 어떤 한 계급에만 행복을 편중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 안의 전체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려는 데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게 되며 정의의 원칙에 따라 사람들이 선한 삶을 누리도록 한다. 이러한 선은 교육에 의존하며 정의를 통해서만 이 선의 이데아가 실현된다.
플라톤은 국가의 구성원을 세 직종으로 분류하는데 통치계급(왕), 수호계급(군인), 생산계급(농민,수공업자,노동자)이 있고 이들 각각은 각자에 합당한 덕이 있으며 이 덕목들이 국가 내에서 조화를 잘 이룰 때 정의로운 이상국가가 된다고 한다.
첫째로 가장 머리부분에 속하는 통치자는 지혜가 필요한데 이 지혜는 깊은 철학적 사색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을 말한다. 즉 동굴의 비유에서 말하자면 동굴의 세계에서 나와 이데아의 세계를 본 사람에 속한다. 이 통치자의 지식은 대내적인 일과 대외적으로 관련되는 국가 전체에 관한 철학적 지식이며, 최선의 지식은 선의 이데아이고 이것이 바로 통치자가 가져야할 정의로운 국가의 근본이다.
둘째로 국가를 수호하는 수호자에게는 용기가 필요한데, 이 용기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며 어떠한 고통, 쾌락, 욕망, 공포에 굴복함이 없이 무서운 것들과 무섭지 않은 것들에 관한 올바르고 합리적인 견해를 한결같이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생산자 계급에는 절제 있는 행동이 필요한데, 이 절제는 일종의 질서이며 쾌락이나 욕망의 극복을 말한다.
이상의 세 계급의 각자가 자기의 천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을 맡아 이에 충실할 때 정의로운 이상국가가 탄생된다는 것이다.
2)철인정치
플라톤은 국가를 통치할수 있는 사람을 철인으로 말하는데, 철인을 정의하여 일체의 지식을 탐구하며 기꺼이 배우려는 자, 배움을 끝없이 추구하여 학문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진정한 지혜와 학문영역은 이성을 으뜸으로 삼고 다른 정신작용들을 그 하위에 두면서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인은 아름다운 사물들이나 아름다운 현상보다 아름다움 자체를 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나 빛깔 및 모양을 볼뿐 아름다움 그 자체의 본질을 볼 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인간, 즉 철인이나 철학자라야 비로소 아름다움 자체 즉 미의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철인은 모든 지혜를 바라는 사람이어서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철인만이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철인은 잠재력이 있는 자를 찾아내어 교육을 하므로 만들어지는데, 체육,음악,수학,논리학,철학등과 같은 교육을 10세에서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50세가 될 때까지 교육받는다.
플라톤은 이렇게 훈련된 철인 지배자 만이 파악할 수 있는 선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하면서 증명하려 했다. 즉 눈에는 시각이 내재하고 있어 눈을 가진 자가 시각을 사용하려 해도 그리고 보여지는 사물에 색채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부터 이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진 제 3의 것 즉 태양이 없으면 시각은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빛깔도 보이지 않는 채로 있을 것이다. 선의 이데아가 가시계에서 지성과 가시적인 것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태양이 가시계에서 시각과 가시적인 것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개인의 독특한 내면적인 경험에 의해 지배되는 지적인 특성을 지닌 철인만이 끊임없이 비합리적인 욕망에 얽매여 살아가는 즉 환상에 사로잡힌 동굴속의 생활로부터 국가의 구성원들을 벗어나게 할 수가 있다.
철인이 지배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과 이에 바탕을 둔 정치적 기술뿐 아니라 그의 도덕적 자질 때문이기도 한다. 철인 지배자는 권력의 유혹에 둔감하고 이기심이 없는 자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배권을 담당하기에 적합한 자이다. 그는 육체적인 즐거움과 긍정적인 가치를 내려다보고 사적 이해관계를 극복한 자이며 권력을 사랑하지 않으며 유혹에 빠지지 않는 자이다.
이러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자를 지배자로 선택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을 선의 지식 획득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사적 이해관계의 유혹을 막을 수 있도록 지배자의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자에게는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고 사적인 가정생활도 부정되고 있다. 철인의 차원에서 즐거움이란 오직 최고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지혜에만 전념하고 나라 전체가 가능한 한 행복하게 되기를 추구하는데 있어야 한다.
또한 철인에게 있어서 여자들은 모두 남자들의 공유물이어야 하고 어떤 여자도 한 남자와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며 또한 자식들도 공유하고 부모가 자기자식을 알거나 자식이 그 부모를 알아서도 안된다. 특히 플라톤은 여자도 남자와 더불어 통치계급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여성관은 당시 희랍의 문화 풍토 면에서 보면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남녀의 역할과 기능이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타고난 바탕은 양성에게 고르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녀 공히 기능을 담당하거나 다만 모든 점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약할 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들과 같은 일에 종사하게 하려면 그들에게도 음악과 체육 및 수학과 철학의 단계에까지 교육이 시행되어져야 하며 최고 통치자의 단계에 이른 여자들은 같은 본성의 소유자인 남자들과 동료나 동반자의 관계에서 짝지어져 가장 뛰어난 자손을 낳게 한다.
플라톤은 여자와 자녀의 공유가 최고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일임을 강조하면서 국가를 분열시키는 것은 악이요 그것을 한데 묶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최대의 선이라고 한다. 또한 국가 생활 속에서 내것 이라든가 내것이 아니라든가 하는 따위의 말이 가장 적게 말해지는 국가가 가장 강하게 단련된 국가라고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철인이 통치하는 국가야말로 최고의 이상국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 http://theology.ac.kr/institute/dtdata/%EA%B8%B0%EB%8F%85%EA%B5%90%EA%B5%90%EC%9C%A1/%EC%A2%85%EA%B5%90%EC%B2%A0%ED%95%99/%ED%94%8C%EB%9D%BC%ED%86%A4(%EA%B5%AD%EA%B0%80%EB%A1%A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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