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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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서택_내적치유_안셀름그륀-아래로부터의 영성-예수의 족보가 의미하는 것

주서택_내적치유_안셀름그륀-아래로부터의 영성-예수의 족보가 의미하는 것
자료출처 http://www.koreamonitor.net/print_it.cfm?upccode=BG682D5DB8-B  
 
주서택 목사는 내적치유에서 안셀름 그륀의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안셀름 그륀이 말하는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말합니다.
이런 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기독교 교리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주서택 목사는 내적치유에서 이런 것을 도입할까요?
그러면서도 왜 성서적인 내적치유라고 말할까요?

------------------------------ 자료 인용 시작 --------------------------------
예수의 족보가 의미하는 것
(http://www.koreamonitor.net)

-아래로의 영성
지난 번에 예수의 호적에 대한 개론을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마태와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굳이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 봐야 할 것이다. 마태와 누가가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는 데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하나는 영웅주의를 경계하고자 함이다.

기독교 영성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위로의 영성’이고 또 하나는, ‘아래로의 영성’이다. ‘위로의 영성’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기를 원하고, 더 나은 인간, 더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완전함에 이르려는(“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레 11:44) 인간의 본래적 욕구와 일치한다. 그러나 ‘위로의 영성’에는 자기분열을 야기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상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늘 현재의 자기와 이상적인 자기와의 갈등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 크면 클수록 그 분열 현상도 커지고, 그 현상이 심화되면 내적으로 병들게 되고 외적으로는 위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 심리학에서도 이러한 ‘위로의 영성’을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아래로의 영성’은 현대 심리학으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이유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인간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인정할 때 비로소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로의 영성’에 대해 안셀름 그륀은 이렇게 말한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향해 위로만 올라가는 일방통행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히려 잘못된 길, 돌아서 가는 우회로, 처절한 실패,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통해 더 잘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성덕이 내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드리는 첫째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약한 부분들, 나의 무능, 더 나아가 나의 죄조차도 하나님을 향해 내 마음의 문을 여는 데에 우선적인 역할을 한다”  

계속해서 그는, 곤궁의 심연에서 나오는 기도야말로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기도라고 말한 장 라프랑스(Jean Lafrance)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면서 ‘아래로의 영성’을 설명한다.
‘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는 자기 훈련, 금욕, 그리고 기도를 통해 수행하는 모든 노고들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 그러한 행위는 마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하늘의 불을 가지려고 했던 그런 헛된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런 완전성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것은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알려준 길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완전성을 향한 사다리를 놓은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겸손이라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제시 하셨다.
– 중략 –
만약 여러분이 겸손의 길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가기를 원한다면, 그 길을 올바르게 찾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실질적으로 처해있는 빈약한 심연에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도마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그 빈곤 그 자체니라” -도마복음 3장
도마는 “안다”는 것과 “알려진다”는 것을 대조 시키고 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요, “알려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알려진다는 말이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알려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 된다는 말이다. 그럼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 내면으로, 존재의 골자기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Raimond Panikkar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에 목말라 하는 존재는 참회, 묵상, 자기를 준비하고 정화시키기 위해 골자기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그는 그곳에서 탄식하게 되고 그러면 그 순간 그는 정상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된다. 그러면 그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산 정상으로 기어오른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순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고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면 그는 실망해서 다시 계곡으로 내려와 다시 통곡한다. 그러면 그 순간 그에게는 산 정상에서 음성이 다시 들려오고, 그러면 그는 다시 기어오른다. 그러나 그는 역시 그곳에서 침묵 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면 실망하여 다시 계곡으로 내려간다. 이렇게 굴러 떨어지고, 올라가는 일이 반복하면서 그 자신은 점점 침묵 그 자체가 된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찾는 것을 그치게 되고, 지금까지 그가 들었던 것은 그 자신의 메아리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파니카는 침묵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자신의 깊은 내면, 존재의 골자기에 있는 것이지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밖에서, 삶의 정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는 자기 욕망의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셀름 그륀, 장 라프랑스(Jean Lafrance), 파니카, 그 외 모든 영성가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결론이다. 하나님을 밖에서 찾지 말고 네 안에서 찾으라. 이것은 도마 뿐만 아니라, 복음서 기자들, 바울 사도가 말하는 바이다.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에 나타난 아브라함, 야곱, 유다, 다윗 등과 같은 인물들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자리매김 할 수 잇었던 것은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자기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경험했던 인물들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치졸한 자신을 보면서, 야곱은 천사와의 씨름판 위에서, 유다는 만삭이 된 며느리가 ‘당신의 아들이다’라고 고발하는 그 현장에서, 다윗은 자신의 아내를 빼앗아 간 인간도 주군으로 섬기고  충성하며 죽어가는 우리아를 보면서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임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오늘 기독교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기독교 안에 팽배해 있는 영웅주의이다.
노자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설 수 없고, 다리를 쩍 벌리는 사람은 걸을 수 없다. 자기를 들어내려는 사람은 들어날 수 없고 스스로 의로운 체 하는 사람은 돋보일 수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다(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한번 발끝으로 서보라! 몇 분 안 돼 다리가 후둘거려 주저앉을 것이다. 가랑이를 쩍 벌리고 달려보라! 얼마 안 가서 사타구니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발 끝으로 서려하고, 가랑이를 벌리고 마라톤에 우승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 한다. 그런 게 성공이라면 성공이라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가? 성공과 위대함은 다르다. 성공은 어리석음이고 위대함은 위대한 것이다. 예수의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은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발끝으로 서보려다가 주저앉아 본 사람들이고, 스스로 뽐내보려다가 손가락질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실패를 통해 일찍부터 ‘거룩해지고 의로워지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허무한가를 깨닫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그들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라! 그들은 영웅이 되려고 한 적이 없다. 그들은 영웅주의를 거부한다. 만일 그들 모두가 영웅들이었다면 예수가 외양간에서 태어날 이유가 없다. 영웅주의를 말하는 지도자들을 믿지 말라. 위대한 신앙인이 되라고 가르치는 목사들의 말을 믿지 말라. 그들은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스승이 아니라 사기꾼이요 장사치일 뿐이다. 위로 올라가려 하지 말고 아래로 내려가라! 발끝으로 서려하지 말고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라! 성자가 되려하지 말고, 인간으로 남아 있으라! 성공한 영웅이 되려하지 말고 위대한 인간이 되어라!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당신 내면에 존재하는 외양간에 계신다. 자기 내면의 외양간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 그가 위대한 사람이다
 ------------------------------ 자료 인용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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