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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관련자료

김종주_크리스찬치유센터_어머니 뱃속에서 받은 상처를 치료해?

김종주_크리스찬치유센터_어머니 뱃속에서 받은 상처를 치료해?
 
김종주 장로는 내적치유가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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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이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며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거나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이다.
이와관련해 19세기후반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였던 월리엄 제임스는
"우리의 정신적 유산과 능력 가운데 10%만 사용되고 90%는 무덤 속에 묻혀 버린다"고 했다.
또 캐나다 정신과 의사 월드 팬필드 박사는 "인간의모든 경험은 출생 전부터
우리의 뇌 속에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되듯 기억되고 있다.
기억하지 못한 것도 그 어떤 자극을 주면 옛날 경험이 튀어나온다. 즉 재생산 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한(限)이라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내적치유 전문가인 잭 윈터 목사는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사역하는 가운데 느낀 것인데,
한국 민족은 민족적으로 한(恨)을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료출처 김종주, "나는 왜 그럴까요?", 치유와 영성, p.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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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주 장로가 말한대로,
그는 내적치유가 필요한 이유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이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며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나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 축복이라고 말하는데, 그 축복은 또한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그런 축복을 누리기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김종주 장로는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하여
어머니 백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김종주 장로는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였던 윌리엄 제임스 교수와
캐나다 정신과 의사 월드 팬필드 박사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들의 말의 핵심은 출생 전부터 인간의 경험이 뇌 속에 녹음되듯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자극을 주면 옛날 경험이 튀어나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과연 진실일까요?
 
우선 윌리엄 제임스에 대한 기사를 참고해 보겠습니다.
"법보신문"이라는 불교 인터넷 신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김종주 장로가 인용하는 사람이니 만큼 읽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 자료 인용 시작 ---------------------
[불교와 지성] 6.윌리엄 제임스-김종욱 동국대 교수
“마음은 고정된 실체 없는 흐름” 강조한 현대의 붓다
중도적 삶 역설한 20세기 최고 석학
칸트 선험적 자아 터무니없는 가정
“사고는 강물과 같은 것”... 무아 역설
2009.03.17 11:35 입력 발행호수 : 990 호 / 발행일 : 2009-03-17
 
윌리엄 제임스의 모습. 
무언가 상당히 좋아하거나 매우 싫어하는 것은 어쨌든 그 무언가에 대해 잘 알고있음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 미국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볼 때, 우리만큼 미국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미국의 정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대다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도대체 그런 것이 있기나 한가”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렇지만 답은 “있다”이고, 그것이 바로 프래그머티즘이다. 혹시 이 말을 들어본 사람이 있다면,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실용주의로 번역하고, 이에 대해 ‘최종적 이익을 위해 수단을 유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효율성의 주장’쯤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프래그머티즘의 어원인 그리스어 프라그마(pragma)는 ‘실행’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어떤 것을 실제로 해본다는 뜻이고, 이렇게 실제로 해본 것이 쌓일 때 실행은 ‘관행’이 되며, 이 관행은 관습과 관점에 따른 상대적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어 ‘관용’을 가져온다. 따라서 프래그머티즘이란 단순한 실용이 아니라 실행적 관행에 따른 관용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관용의 사상으로서 프래그머티즘이 어떻게 미국의 정신이 되었을까? 2002년 퓰리처상 수상작에 루이스 메넌드가 쓴 『메타피지컬 클럽』이라는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직후인 1872년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올리버 홈스,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등이 주축이 되어 메타피지컬 클럽이라는 토론 모임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이 모임은 고작 9개월 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하나의 사상이 태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프래그머티즘이다.

그들은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 싸운 내란이 끝나자 이를 치유할 사상의 통합을 모색하였으며 그 정신이 프래그머티즘이었다. 이 정신 아래서는 남부의 농업주의도 북부의 산업주의도 실용적 관용의 원리에 의해 융합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융합은 19세기말에 팽배한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변질되어 미국을 패권국가의 길로 몰고가게도 했지만, 대법관 홈스와 기호학자 퍼스와 심리학자 제임스가 학문·언론·종교의 자유와 관용, 문화적 다원주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등을 미국적인 것으로 되게 한 것 역시 사실이다.

더욱이 비슷한 남과 북의 분열과 전쟁을 치르고서도 여전히 분쟁과 반목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친미든 반미든 그 다원주의적 관용의 프래그마티즘 정신만큼은 자기반성과 더불어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에 입각한 철학적 태도를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명칭으로 해석한 사람이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이다. 우리가 미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것만큼 윌리엄 제임스에 대해서도 더 더욱 알지 못하고, 그에 관한 국내의 논문 역시 아주 미미한 숫자에 머물고 있지만, 그는 심리학·종교학·철학 분야에 있어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20세기 최고 수준에 있는 사람이다.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지적인 부친에 의해 일찍부터 유럽 각국을 돌며 여러 문물과 학문을 접하게 되었기에 그의 업적도 다양한 방면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학문적 업적은 크게 심리학 시기와 종교학 시기와 철학 시기 셋에 걸쳐 나타난다.
먼저 심리학 시기란 하버드 대학교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1869년) 하버드 대학교에 미국 최초로 실험심리학 연구소를 개설한 후(1875년) 그의 대표작 『심리학의 원리』를 출간할 때까지(1890년)를 말한다.

그리고 종교학 시기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기포드 강연을 하고(1901년) 이를 토대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출간한 때(1902년)를 전후한 시기를 가리킨다.
또한 철학 시기란 로웰 연구소 강연을 토대로 『프래그머티즘』을 내고(1907년) 옥스퍼드의 히버트 강연을 기초로 『진리의 의미』를 낸 다음, 같은 해(1909년) 『다원적 우주론』를 출판하고 이듬해(1910년) 68세의 나이로 심장 이상 때문에 사망할 때까지의 만년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이년 뒤(1912년) 그의 형이상학적 주장들이 담긴 유고를 모은 책 『근본적 경험론』이 출간되었다.


이제 이런 저술 속에 담긴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을 불교와 관련시켜 보자.
어떤 양 사상을 관련지우는 데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양자 사이에 실제로 맺어진 영향 관계를 추적하여 복원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양자 사이의 중요 개념 내용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해석하는 것이 또 하나이다. 전자의 방식을 취할 경우 불교에 대한 제임스의 직접적인 언급이나 평가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나타난다. 그 대목은 이렇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중도’를 지적하면서, 단순한 욕망과 쾌락만큼이나 비실제적이고 무가치한 극단주의의 지나친 금욕을 절제하도록 말했다. 그는 완벽한 삶이란 오직 내적 지혜가 담긴 삶이라고 한다. 이런 삶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집착하지 않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런 삶은 우리를 휴식과 평화 그리고 열반으로 이끈다.” 여기서 제임스는 붓다의 중도적 삶의 지혜를 거론하면서, 불교처럼 지·정·의가 조화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삶을 이어나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양 사상의 중요 개념 내용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방식을 동원할 경우, 이보다 훨씬 더한 사상적 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미국의 대표적 불교학자인 데이비드 칼루파하나는 그의 책 『불교심리학의 원리』에서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심리학적 가르침에 관한 한 윌리엄 제임스를 ‘현대의 붓다’라고까지 찬양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세 시기에 나온 저술들이 세 분야 모두에서 20세기의 고전이 되었지만, 윌리엄 제임스에게 세계적인 석학의 명성을 최초로 안겨줌과 동시에 그의 전 사상의 기초가 되어준 것은 『심리학의 원리』이다. 이 책의 기본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명제로 압축할 수 있다. “두뇌에서 심리상태가 유래한다.” “그러나 심리상태가 물리상태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 또한 그 심리상태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첫 번째 명제는 의식이라는 심리적 상태가 두뇌라는 신체의 물리적 상태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 상태가 있는 곳을 표현할 때 자기 머리를 가리키는 것을 보면, 이는 매우 당연한 말인 것 같다. 더욱이 하버드 대학 시절을 화학 공부로 시작했고 의학부에서 생리학을 공부했으며 모교에 생리심리학 관련 강좌를 개설한 제임스로서는 두뇌의 생리 화학적 구조가 심리상태를 일으킨다는 주장이 전혀 이상할 리 없었다.
이렇게 생리학이 심리학의 기초가 됨으로써 마음에 관한 탐구가 기존의 영혼에 대한 논쟁을 넘어 비로소 과학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신체의 물리상태가 심리상태의 발생 조건이 된다는 것은 불교에서도 인정된다. 색(色, 물질)·수(受, 감각)·상(想, 표상)·행(行, 의지)·식(識, 의식)의 다섯 가지 기능(五蘊)이 인연화합하여 인간을 이룬다는 초기불교의 오온설에 의하면, 색이라는 신체물리적 기능이 수상행식 등의 심리정신적 기능을 상호 발생시키는 조건이 된다.
 
그렇지만 첫 번째 명제처럼 물리상태가 심리상태를 발생 변화시킬 뿐 그 반대의 경우가 불가능하다면, 이것은 명백한 물리주의 혹은 유물론일 따름이다. 이는 제임스나 불교의 본의가 아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명제가 있다. 즉 심리상태가 물리상태에 영향을 주고, 마음이 물질을 바꾼다. 이는 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의 두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다. 심리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제임스는 의지라는 심리상태가 인간의 행위를 거쳐 물리세계의 변화에 영향을 초래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계에는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의 12연기 중 “의지를 조건으로 하여 의식이 일어나고(行緣識) 그 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정신물리적 대상 세계 일체가 일어난다(識緣名色)”는 설명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두뇌라는 선행구조가 심리상태를 발생시키지만, 그 심리상태의 변화에 따라 두뇌의 물리상태도 재구조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최초의 직립보행 이후 생존을 위해 사고가 활성화될수록 대뇌 용적량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왔다는 데서도 입증된다.

그런데 이런 심리상태 자체도 끝없이 변화한다. 이것이 세 번째 명제이다. 제임스에게 있어 사고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다. 사고나 의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상과 대상에 대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지향되는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이며 매우 능동적인 경험의 연속이다. ‘사고의 흐름’(stream of thoughts)이라는 이 관점은 20세기에 의식을 이해하는 기본 관점이 되었으며, 그 후 문학 작품 등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수없이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과 사고를 일종의 흐름으로 보는 것은 초기불교에선 ‘의식의 흐름’(識流, vinnanasota)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불교에선 무시이래의 업력이 개인에게 투영되어 드러난 성향(行)에 따라 의식의 흐름이 생겨나고, 이 흐름에 맞춰 생명 ‘형성의 흐름’(有流, bhavasota)이 성립되어 생노병사가 이어져 간다고 본다. 후대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선 이런 흐름을 알라야식(alayavijnana, 阿賴耶識)이라는 말로 정립했다. 알라야식이란 누적된 경험 내용(種子)들의 저장소(alaya, 藏)로서, 항상 변화하며 흘러가면서도 나름대로의 고유성을 지니는 폭류(瀑流)와도 같은 것이다. 이렇듯 마음을 변화의 흐름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제임스와 불교는 명백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양자가 일치하는 대목은 자아에 대한 관점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제임스가 사고를 연속적 흐름이라고 할 때, 그 연속은 마치 기차(train)와 같은 것이 아니라 강(river)과 같은 것이었다.
한 량 두 량 개개의 독립된 칸들을 인위적 연결장치로 묶어 놓은 것이 기차라면, 강이란 애당초 끊어지지 않는 일관된 흐름이다. 마음이 기차가 아니라면, 인위적 연결장치로서 통일적 자아는 불필요하다. 그래서 제임스는 칸트의 선험적 자아를 터무니없는 가정물이라 했고, 붓다는 오온무아(五蘊無我)라 했다.
오온이라는 경험 현상 배후에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자아란 허구라는 것이다. 이처럼 양자의 사상은 여러 지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미국의 정신적 지주인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을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심장부를 불교화하는 첫걸음이 된다고 하겠다.
(자료출처
http://beopbo.com/news/view.html?section=93&category=171&page=2&no=55561)
-------------- 자료 인용 끝 ---------------------
조금 긴 글이지만 윌리엄 제임스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글이라는 것을 파악했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김종주 장로가 인용한 윌리엄 제임스는 한 마디로 "현대의 붓다"입니다.
김종주 장로가 인용한 글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의 핵심을 제대로 말해주지 못합니다.
물론 그 말 속에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지만,
김종주 장로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알지 못하고 잘못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붓다"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김종주 장로는 언필칭 "내적치유"에 사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김종주 장로의 내적치유가 얼마나 심각하게 위험한가를 여실히 드러내어 주는 것입니다.
 
윌리엄 제임스의 책 표지만 봐도
그가 말하는 심리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자료출처 http://www.amazon.com/Principles-Psychology-Vol-1-William-James/dp/1602062846/ref=sr_1_23?ie=UTF8&qid=1324378711&sr=8-23
 
윌리엄 제임스 는 그의 책에서 세 가지 명제 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명제: 의식이라는 심리적 상태가 두뇌라는 신체의 물리적 상태에서 나온다.
두 번째 명제: 즉 심리상태가 물리상태에 영향을 주고, 마음이 물질을 바꾼다.
세 번째 명제: 제임스에게 있어 사고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다. 사고나 의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상과 대상에 대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지향되는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이며 매우 능동적인 경험의 연속이다.
 
현명한 독자들은 벌써 간파하리라 생각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세 가지 명제를 실현하는 윌리엄 제임스의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명상(meditation)이라는 방법입니다.
 
다음의 글을 참고해 보겠습니다.
----------------------- 인용 글 시작 ----------------------------------------

William James on meditation

Philosopher William James wrote the following around the turn of the last century:
We have lately had a number of accomplished Hindoo visitors at Cambridge, who talked freely of life and philosophy. More than one of them has confided to me that the sight of our faces, all contracted as they are with the habitual American over-intensity and anxiety of expression, and our ungraceful and distorted attitudes when sitting, made on him a very painful impression. “I do not see,” said one, “how it is possible for you to live as you do, without a single minute in your day deliberately given to tranquillity and meditation. It is an invariable part of our Hindoo life to retire for at least half an hour daily into silence, to relax our muscles, govern our breathing, and meditate on eternal things. Every Hindoo child is trained to this from a very early age.” The good fruits of such a discipline were obvious in the physical repose and lack of tension, and the wonderful smoothness and calmness of facial expression, and imperturbability of manner of these Orientals. I felt that my countrymen were depriving themselves of an essential grace of character. How many American children ever hear it said by parent or teacher, that they should moderate their piercing voices, that they should relax their unused muscles, and as far as possible, when sitting, sit quite still? Not one in a thousand, not one in five thousand! Yet, from its reflex influence on the inner mental states, this ceaseless over-tension, overmotion, and over-expression are working on us grievous national harm.
I beg you teachers to think a little seriously of this matter. Perhaps you can help our rising generation of Americans toward the beginning of a better set of personal ideals.
from Talks to Teachers, chapter 8, “The Laws of Habit”.
(자료출처 http://pranshuarya.com/blog/2006/11/25/william-james-on-meditation/)
----------------------- 인용 글 끝 ----------------------------------------
글의 내용에서 다른 것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윌리엄 제임스는 그 명상이라는 방법을 힌두교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김종주 장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인용했을까요? 아니면 모르고 인용했을까요?
모르고 인용했으면 지금이라도 내적치유를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인문학에서 개념이란 기초공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개념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됩니다.
 
김종주 장로의 내적치유 정의가
이렇게 불교적이고 힌두교적인 개념 위에서 세워진 것이라면
과연 기독교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요?
기초 공사는 힌두교와 불교식으로 하고 지상건물은 기독교로 세우면
그것이 과연 하나의 건물로 준공검사가 떨어질까요?
 
이런 배경 위에 세워진 것이 김종주 장로의 내적치유입니다.
과연 김종주 장로가 말하는 내적치유를 따라가시겠습니까?
겉으로는 기독교적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유념하시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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