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택목사_내적치유_내적치유-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서택목사_내적치유_내적치유-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름 주서택 이메일 healing119@hanmail.net 작성일 2011.11.16
자료출처 http://www.innerhealing.or.kr/
주서택 목사님께서 오늘 날짜로 "내적치유 그런 것이 아닙니다"로 글을 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말하는 것의 핵심은 하나도 말씀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내적치유의 원리와 방법이
인본주의 심리학이며 뉴에이지 구상화라는 것에 대한
반박이나 해명을 기대했었습니다.
-------------------- 퍼온 자료 내용 -----------------
내적치유-그런 것이 아닙니다.
1992년 C.C.C 안에서 내적치유사역을 시작한지 20여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저희가 주관한 내적치유세미나에 99차에 걸쳐 4만 1천 500여명이 참여하여 치유와 변화를 체험하였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 안에 여러 사역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내적치유사역이 성도들의 신앙 성숙과 영적 부흥을 위하여 이바지하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적치유사역이 조금은 오해되는 면이 있어 이 사역에 대한 정확하고 바른 이해와 성령께서 이 사역을 행하시는 진정한 목적 그리고 방향성의 제시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는 현대인들이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에 전에는 교회 안에서 필요 없던 내적치유라는 사역이 요구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로 내적치유사역에 임한다면 결국 일반심리학적인 사역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고 인본주의적인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내적치유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등장한 방법일까요?
얼마 전에 브라질의 밀림지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께서 저희의 책을 통해 원주민들에게 접근했을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밀림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무슨 현대인이 겪는 스트레스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곳 원주민들에게 내적치유 강의를 통해 큰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만일 내적치유가 복잡해진 현대사회의 구조로 인해 시대적인 흐름을 타고 일어난 것이라면 아직도 원시 농경사회를 가지고 있는 브라질의 밀림이나 개발이 안된 제3국들에서 내적치유사역은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브라질의 밀림지역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의 깊은 지역 그리고 일본과 멀리 스웨덴 노르웨이까지 내적치유적인 접근을 시도한 결과 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간증을 저희는 수없이 받았습니다.
내적치유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사역이었고 기독교 역사에서 깊은 영성훈련 속에 행하여져 온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후 처음 고향인 나사렛에 가셔서 제일 먼저 사람들 앞에서 읽은 부분이 바로 이사야 61장 1절부터 3절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깨어진 마음을 치유하기 원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내적치유란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의 해결로 그치는 것이 아닌 성령께서 행하시는 진정한 복음화의 과정입니다.
복음화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아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불화되고 하나가 되지 못한 부분들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기에 주님은 죽기 직전까지 간절히 이 일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 21절)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게 막는 것, 즉 복음화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죄악과 내면의 걸림돌이 있는데 이것을 제거하는 사역이 바로 내적치유 사역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더럽고 추한 부분을 감추고 싶어 하고 잘난 부분만을 내놓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로 그 추한 우리 내면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치욕적이고 비참한 자리에서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가장 어두운 그 자리에 성령의 등불이 켜지고 온전한 내면의 복음화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저희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내적치유의 목적입니다.
이와 덧붙여 내적치유가 필요한 또 다른 목적을 말한다면 그것은 죄악과 죄성을 이길 유일한 힘인 사랑을 위하여 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반드시 세상적인 것과의 갈등에 부딪히게 됩니다. 물질적인 유혹, 명예, 세상의 권력, 이런 갈등 앞에서 끝까지 주님의 편에 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그것은 주님과 나누는 순결한 사랑의 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한 삶의 고통과 상처들 그리고 죄악들이 주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게 하는 딱정이 구실을 합니다. 이 딱정이가 떨어지지 않는 한 머릿속에 나님에 대한 수많은 지식들이 넘쳐도 결국은 자기의 이기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가장 약한 것을 감당해주신 주님에 대한 구체적 깨달음은 어린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듯이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순결한 사랑을 키웁니다. 역사 속에서 충성되게 신앙을 지킨 진정한 주님의 사람들 모두에게 있는 공통적인 특징 하나는 영적 능력의 강약보다는 그들이 주님과 가진 개인적인 친밀한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저희는 이십여년이 되도록 이 일을 진행해오면서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결국 하나님에게 이어져 하나님이란 분을 불신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분노를 해결하지 않는 한 어떤 위기와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랑은 만들어지지 못합니다.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충성된 관계를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오늘도 이 내적치유사역을 행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내적치유사역은 치유가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장에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몸의 연약함이 치유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성숙한 분량까지 나아가도록 돕는데 내적치유사역의 목표가 있습니다. 치유에만 눈을 고정시킨다면 치유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으며 이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점을 경계해야 됩니다.
성서적 내적치유세미나를 섬기는 주서택 목사
---------------------------------- 퍼온 글 자료 끝 ------------
왜 브라질 밀림 지역에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것은 주서택 목사님께서 내적치유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뉴에이지 구상화이기 때문입니다.
구상화(visualization)은 원래 그 자체가 샤마니즘적입니다.
브라질 밀림의 원주민들에게 효과가 나타나게 된 것은 그런 샤마니즘적인 기초 때문입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 스웨덴, 노르웨이까지 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효과가 나타날까요?
노르웨이가 아니라 북대서양 전체에서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내적치유는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본주의 심리학이 그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샤마니즘적이고 뉴에이지적인 구상화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뻔히 심리학에 기초하고 있으면서 왜 심리학을 사용안한다고 하실까요?
주서택 목사님께서는 윗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적치유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사역이었고
기독교 역사에서 깊은 영성훈련 속에 행하여져 온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후 처음 고향인 나사렛에 가셔서
제일 먼저 사람들 앞에서 읽은 부분이 바로
이사야 61장 1절부터 3절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깨어진 마음을 치유하기 원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내적치유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 잠재의식을 치유하고
눈을 감고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하나님 그 때 어디 계셨습니까?'하고 물어 보셨던가요?
그렇게 말한 성경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깊은 영성훈련"이란 무엇일까요?
주서택 목사님께서 그의 책에서 신비주의 찰스 쉘과 관상기도의 대가 토마스 키팅을 인용합니다.
그러면 주서택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깊은 영성훈련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61:10-3절이 과연 내적치유에 관한 본문일까요?
호크마 주석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이는 바벨론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이사야가 공식적으로 위임받는 대목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Gesenius, Rosemnuller).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메시야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는 예수께서 본절을 자신에 관한 예언으로 명시하셨다는 사실이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눅 4:18-21).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순간에도 그 사역의 공적 인정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바 있다(마 3:16;요 1:32).
기름을 부으사(*, 마솨흐) - 이 용어에서 '메시야'란 단어가 유래된다. 이스라엘의 왕(삼상 16:13), 제사장(출 30:30), 선지자(왕상 19:16) 등은 그들의 중요 직책을 위해 구별될 때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5 주제 강해, '기름 부음의 영적 의미' 참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구별해 세우신 것을 암시하기 위해 본 표현이 사용되었다. 메시야를 언급하려고 이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시 45:7;히 1:9 등에도 나온다.
가난한 자(*, 아나윔) - 원래 이 용어는 상처나 억압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를 뜻하며, 여기서는 1차적으로 낙담 중에 있었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이 용어는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이 보낼 메시야를 고대하며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정확하겠다(마 5:3). 이 말은 시편에서 개인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고대하였던 신실해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종종 사용되었다(시 9:12,18).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신 자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한 마음이 교만한 자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고 풍자하셨고 반대로 그를 알아본 자들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부르셨는데 이자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다(눅 10:2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을, 더나아가서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또한 본 표현은 희년의 때에 모든 종된 자에게 선포되는 자유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레 25:10;렘 34:8,9).
갇힌 자에게 놓임 - 원문상으로는 '갇힌 자의 감옥문을 여는 것'이란 뜻이다. 여기서 '여는 것'이란 메시야의 도래와 연관지어 볼 때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의 해방(롬 6:18;7:24,25;히 2:5) 혹은 영적으로 장님되었던 자가 영의 눈을 뜨는 것을 가리킨다(Ewald). 눅 4:18은 본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본절에는 없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이란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후자의 뜻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렇게 주석을 참고해 보면,
내적치유를 지지할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메시야의 사역을
이사야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잠재의식을 치유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이사야는 눈을 감고 과거로 돌아가서 영적인 안내자(spirit guide)를 만나
내면아이(divinde inner child)를 치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서택 목사님께서 내적치유의 정당성을 지지하기 위하여
이사야 61:1-3을 인용을 했으나,
오히려 이사야서의 말씀은
주서택 목사님의 내적치유를 무너뜨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성경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주서택 목사님께서 내적치유의 정당성을 말씀하시려면,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과 주서택 목사님님께서 말씀하시는 속사람
성경이 말하는 쓴뿌리와 주서택 목사님님께서 말씀하시는 쓴뿌리의 차이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필자가 이사야의 주석을 찾아보았듯이,
주석을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옵니다.
앞선 믿음의 선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드러낸 주석을
참고하면 엉뚱한 길이 아닌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저는 주서택 목사님과 내적치유사역원이
성경적 토대 위에 바른 내적치유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런 이론적 토대와 방법으로는 결코 성경적으로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주서택 목사님과 내적치유사역원에서
내적치유에 대한 좀 더 실제적이고 설득력 있는 글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저는
주서택 목사님과 언제든지 공개토론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날짜와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언제든지 공개토론에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1) 속사람(내면아이) 2) 쓴뿌리 3) 구상화
이 세 가지 핵심 개념을 가지고 토론에 응하겠습니다.
준비가 되시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http://www.facebook.com/RPTministries
이름 주서택 이메일 healing119@hanmail.net 작성일 2011.11.16
자료출처 http://www.innerhealing.or.kr/
주서택 목사님께서 오늘 날짜로 "내적치유 그런 것이 아닙니다"로 글을 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말하는 것의 핵심은 하나도 말씀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내적치유의 원리와 방법이
인본주의 심리학이며 뉴에이지 구상화라는 것에 대한
반박이나 해명을 기대했었습니다.
-------------------- 퍼온 자료 내용 -----------------
내적치유-그런 것이 아닙니다.
1992년 C.C.C 안에서 내적치유사역을 시작한지 20여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저희가 주관한 내적치유세미나에 99차에 걸쳐 4만 1천 500여명이 참여하여 치유와 변화를 체험하였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 안에 여러 사역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내적치유사역이 성도들의 신앙 성숙과 영적 부흥을 위하여 이바지하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적치유사역이 조금은 오해되는 면이 있어 이 사역에 대한 정확하고 바른 이해와 성령께서 이 사역을 행하시는 진정한 목적 그리고 방향성의 제시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는 현대인들이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에 전에는 교회 안에서 필요 없던 내적치유라는 사역이 요구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로 내적치유사역에 임한다면 결국 일반심리학적인 사역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고 인본주의적인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내적치유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등장한 방법일까요?
얼마 전에 브라질의 밀림지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께서 저희의 책을 통해 원주민들에게 접근했을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밀림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무슨 현대인이 겪는 스트레스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곳 원주민들에게 내적치유 강의를 통해 큰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만일 내적치유가 복잡해진 현대사회의 구조로 인해 시대적인 흐름을 타고 일어난 것이라면 아직도 원시 농경사회를 가지고 있는 브라질의 밀림이나 개발이 안된 제3국들에서 내적치유사역은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브라질의 밀림지역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의 깊은 지역 그리고 일본과 멀리 스웨덴 노르웨이까지 내적치유적인 접근을 시도한 결과 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간증을 저희는 수없이 받았습니다.
내적치유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사역이었고 기독교 역사에서 깊은 영성훈련 속에 행하여져 온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후 처음 고향인 나사렛에 가셔서 제일 먼저 사람들 앞에서 읽은 부분이 바로 이사야 61장 1절부터 3절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깨어진 마음을 치유하기 원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내적치유란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의 해결로 그치는 것이 아닌 성령께서 행하시는 진정한 복음화의 과정입니다.
복음화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아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불화되고 하나가 되지 못한 부분들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기에 주님은 죽기 직전까지 간절히 이 일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 21절)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게 막는 것, 즉 복음화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죄악과 내면의 걸림돌이 있는데 이것을 제거하는 사역이 바로 내적치유 사역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더럽고 추한 부분을 감추고 싶어 하고 잘난 부분만을 내놓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로 그 추한 우리 내면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치욕적이고 비참한 자리에서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가장 어두운 그 자리에 성령의 등불이 켜지고 온전한 내면의 복음화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저희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내적치유의 목적입니다.
이와 덧붙여 내적치유가 필요한 또 다른 목적을 말한다면 그것은 죄악과 죄성을 이길 유일한 힘인 사랑을 위하여 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반드시 세상적인 것과의 갈등에 부딪히게 됩니다. 물질적인 유혹, 명예, 세상의 권력, 이런 갈등 앞에서 끝까지 주님의 편에 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그것은 주님과 나누는 순결한 사랑의 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한 삶의 고통과 상처들 그리고 죄악들이 주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게 하는 딱정이 구실을 합니다. 이 딱정이가 떨어지지 않는 한 머릿속에 나님에 대한 수많은 지식들이 넘쳐도 결국은 자기의 이기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가장 약한 것을 감당해주신 주님에 대한 구체적 깨달음은 어린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듯이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순결한 사랑을 키웁니다. 역사 속에서 충성되게 신앙을 지킨 진정한 주님의 사람들 모두에게 있는 공통적인 특징 하나는 영적 능력의 강약보다는 그들이 주님과 가진 개인적인 친밀한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저희는 이십여년이 되도록 이 일을 진행해오면서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결국 하나님에게 이어져 하나님이란 분을 불신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분노를 해결하지 않는 한 어떤 위기와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랑은 만들어지지 못합니다.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충성된 관계를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오늘도 이 내적치유사역을 행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내적치유사역은 치유가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장에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몸의 연약함이 치유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성숙한 분량까지 나아가도록 돕는데 내적치유사역의 목표가 있습니다. 치유에만 눈을 고정시킨다면 치유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으며 이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점을 경계해야 됩니다.
성서적 내적치유세미나를 섬기는 주서택 목사
---------------------------------- 퍼온 글 자료 끝 ------------
왜 브라질 밀림 지역에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것은 주서택 목사님께서 내적치유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뉴에이지 구상화이기 때문입니다.
구상화(visualization)은 원래 그 자체가 샤마니즘적입니다.
브라질 밀림의 원주민들에게 효과가 나타나게 된 것은 그런 샤마니즘적인 기초 때문입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 스웨덴, 노르웨이까지 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효과가 나타날까요?
노르웨이가 아니라 북대서양 전체에서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내적치유는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본주의 심리학이 그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샤마니즘적이고 뉴에이지적인 구상화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뻔히 심리학에 기초하고 있으면서 왜 심리학을 사용안한다고 하실까요?
주서택 목사님께서는 윗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적치유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사역이었고
기독교 역사에서 깊은 영성훈련 속에 행하여져 온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후 처음 고향인 나사렛에 가셔서
제일 먼저 사람들 앞에서 읽은 부분이 바로
이사야 61장 1절부터 3절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깨어진 마음을 치유하기 원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내적치유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 잠재의식을 치유하고
눈을 감고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하나님 그 때 어디 계셨습니까?'하고 물어 보셨던가요?
그렇게 말한 성경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깊은 영성훈련"이란 무엇일까요?
주서택 목사님께서 그의 책에서 신비주의 찰스 쉘과 관상기도의 대가 토마스 키팅을 인용합니다.
그러면 주서택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깊은 영성훈련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61:10-3절이 과연 내적치유에 관한 본문일까요?
호크마 주석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이는 바벨론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이사야가 공식적으로 위임받는 대목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Gesenius, Rosemnuller).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메시야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는 예수께서 본절을 자신에 관한 예언으로 명시하셨다는 사실이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눅 4:18-21).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순간에도 그 사역의 공적 인정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바 있다(마 3:16;요 1:32).
기름을 부으사(*, 마솨흐) - 이 용어에서 '메시야'란 단어가 유래된다. 이스라엘의 왕(삼상 16:13), 제사장(출 30:30), 선지자(왕상 19:16) 등은 그들의 중요 직책을 위해 구별될 때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5 주제 강해, '기름 부음의 영적 의미' 참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구별해 세우신 것을 암시하기 위해 본 표현이 사용되었다. 메시야를 언급하려고 이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시 45:7;히 1:9 등에도 나온다.
가난한 자(*, 아나윔) - 원래 이 용어는 상처나 억압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를 뜻하며, 여기서는 1차적으로 낙담 중에 있었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이 용어는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이 보낼 메시야를 고대하며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정확하겠다(마 5:3). 이 말은 시편에서 개인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고대하였던 신실해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종종 사용되었다(시 9:12,18).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신 자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한 마음이 교만한 자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고 풍자하셨고 반대로 그를 알아본 자들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부르셨는데 이자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다(눅 10:2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을, 더나아가서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또한 본 표현은 희년의 때에 모든 종된 자에게 선포되는 자유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레 25:10;렘 34:8,9).
갇힌 자에게 놓임 - 원문상으로는 '갇힌 자의 감옥문을 여는 것'이란 뜻이다. 여기서 '여는 것'이란 메시야의 도래와 연관지어 볼 때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의 해방(롬 6:18;7:24,25;히 2:5) 혹은 영적으로 장님되었던 자가 영의 눈을 뜨는 것을 가리킨다(Ewald). 눅 4:18은 본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본절에는 없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이란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후자의 뜻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렇게 주석을 참고해 보면,
내적치유를 지지할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메시야의 사역을
이사야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잠재의식을 치유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이사야는 눈을 감고 과거로 돌아가서 영적인 안내자(spirit guide)를 만나
내면아이(divinde inner child)를 치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서택 목사님께서 내적치유의 정당성을 지지하기 위하여
이사야 61:1-3을 인용을 했으나,
오히려 이사야서의 말씀은
주서택 목사님의 내적치유를 무너뜨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성경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주서택 목사님께서 내적치유의 정당성을 말씀하시려면,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과 주서택 목사님님께서 말씀하시는 속사람
성경이 말하는 쓴뿌리와 주서택 목사님님께서 말씀하시는 쓴뿌리의 차이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필자가 이사야의 주석을 찾아보았듯이,
주석을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옵니다.
앞선 믿음의 선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드러낸 주석을
참고하면 엉뚱한 길이 아닌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저는 주서택 목사님과 내적치유사역원이
성경적 토대 위에 바른 내적치유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런 이론적 토대와 방법으로는 결코 성경적으로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주서택 목사님과 내적치유사역원에서
내적치유에 대한 좀 더 실제적이고 설득력 있는 글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저는
주서택 목사님과 언제든지 공개토론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날짜와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언제든지 공개토론에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1) 속사람(내면아이) 2) 쓴뿌리 3) 구상화
이 세 가지 핵심 개념을 가지고 토론에 응하겠습니다.
준비가 되시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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