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택 목사_내적치유_내적치유가 만들어낸 변종 "원상처"개념 과연 성경적인가?
주서택 목사_내적치유_내적치유가 만들어낸 변종 "원상처"개념 과연 성경적인가?
'지금은 하나님께 대한 '원상처'를 치유받는 중' 이름 이종학 작성일 2011.11.08
(자료출처 http://www.innerhealing.or.kr/)
이 분은 "원상처"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글을 읽어 보면 제목을 붙인대로,
내적치유가 이런 변종을 만들어 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런 결과는 심리학으로 성경을 접근하며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레마'로 접근 하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성경을 자의로 해석하여 엉뚱한 변종이 발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적치유라는 이 시대의 유행병입니다.
----------------- 퍼온 글 자료 --------------
지금은 하나님께 대한 '원상처'를 치유받는 중
보통 우리가 치유의 관점볼 때 상처라고 하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같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상처때문에 상처를 입힌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전혀 관계성이 없는 남과의 관계성에서 부정적으로 나타나 관계성이 깨어져 버린 상태로 고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나아가 이 상처는 신앙 안에서도 부정적으로 나타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몸의 상처는 사람의 눈에 보여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던지 해서 최대한 몸의 상처를 치료할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도 남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치료받도록 도와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난 상처는 몸의 상처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본인도 오래도록 잘 못느끼다 보니 웬만해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이로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절망하기도 하고 극단적인 행동인 자살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처를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 상처를 온전히 치유받기까지 나아가는 것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많은 이들이 상처에 대한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특히 사람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병들을 치료 치유 회개하도록 도와야 하는 목회자들 중에서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상태에서 목회를 시작해 성도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편입하기 전 누나 집에 잠시 거할 때 누나가 다니던 교회에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목사님과 사모님이 제가 신학교입학에 필요한 등록금마련 등 여러 도움을 주어서 신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혼한 상태에 있던 누나를 성적으로 부정한 여자로 몰아가는 모습에 실망을 해서 누나와 저는 다른 교회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 사건은 제게 목회자가 누구보다 상처를 치유받은 경험들이 많아야 함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겉은 목회자로서의 자격을 다 갖추었는데 그 목회자가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은 경험없이 목회를 하다보니 상처입은 성도들을 치유받도록 돕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입혀 신앙에서 실족하도록 만드는 일이 한국교회에 비일비재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에도 상처에 대한 치유 경험이 많았음에도 더 깊이 제 안에 있을 상처를 치유받고나서 사역을 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다짐한 대로 제 안에 있는 상처에 치유의 시간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에 대한 것들을 본 게시판 '치유 시리즈'에 글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에 대한 치유의 경험을 온전히 하고나자 깨달아지는 한 깨달음은 제 안에 하나님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해롭게 작용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또한 사람과의 상처와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1:1 관계성에서 생긴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는 상처에 대한 치유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적은 많은 책들에도 없는 내용으로 지금까지는 저만 깨달은 영적 비밀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생긴 이 상처를 이름하길 '원상처'라고 명명하였는데 '원'이라는 단어를 '상처'앞에 붙인 것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저지른 '원죄'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창세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그 죄가 아담의 후손이면 모두가 타고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깨어진 상태에서 그리고 이 죄로 인해 아무리 이 땅에서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심판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원죄'라는 신학적개념은 기독교신학에서 핵심적 사항입니다. 이 원죄가 있기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깨달은 것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으로 따먹지 말라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원죄'를 저지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하나님이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상처를 먼저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상처받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데 용기를 내었던 것입니다. 비록 선악과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를 따먹어 당신처럼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을 두려워해서 먹지말라고 하신 것처럼 말한 뱀의 잘못된 정보때문이였지만 어쨌든 아담은 하나님에게서 상처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처가 제가 보기에 '원상처'인데 이 '원상처'는 '원죄'와 함께 인류에게 유산처럼 물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상처'와 '원죄'의 관계는 성경속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데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깨어진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 대한 편애대한 상처로 아버지 야곱이 사랑하는 요셉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앞서 아버지 노아와 아들 함의 깨어진 관계에서도 나타나기도) 이 경우보다 좀더 대표적인 예는 다윗과 압살롬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동복누이인 다말을 범한 이복형인 암논의 잘못을 다스리지 못한 아버지 다윗을 압살롬이 배반을 해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아버지로 부터 상처를 받았기에 아버지가 사랑하는 이나 아버지를 죽이고자 한 것처럼 아담이 받은 원상처가 원죄를 저지르게 한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나타나 무의식 가운데 가지고 있는 '원상처'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죄를 저지르는데 용감합니다. 죄를 짓고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뱀의 거짓정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거짓이였음을 알려주는 간접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열매에 대한 계명에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죄를 지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이후 죄를 짓지 않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자신을 대신하여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아담의 원죄로 인해 심판당할 죄인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성이 회복되어, 창세때의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성보다 더 깊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관계성을 가졌음에도 죄에 자주 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면서 원죄는 연기처럼 살아졌지만 '원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아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원상처'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이 원상처가 겉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생긴 상처로 나타나 대부분의 치유프로그램은 겉으로 드러난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그러나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가 치유되어도 '원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아마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받은 상처를 대부분 치유받은 제가 지금은 아담으로 인해 물려받은 '원상처'를 치유받고 있는 중이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본격적인 사역자로서 쓰임받기 전 몇년동안 계속되어지고 있는 인내의 시간과 물질적 가난 등 이런 광야의 환경을 제게 가장 큰 시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의심이 영적 광야에서 가장 힘든 영적 싸움의 대상이였습니다. 사람같으면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줌으로 알려주는 것과 달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사람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고난당한 욥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습니다. 이는 고난으로 인해 겉으로는 고생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으로 힘든 시간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타고난 '원상처'가 조금씩 치유되어지고 하사 고난 후에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치유되지 않은 '원상처'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더운 여름을 더운 음식을 먹고 나서 오히려 시원함을 느끼듯이 하나님께선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 하시는데 이는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원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함이십니다.
제가 아직은 이 '원상처'의 치유의 시간을 영적 광야에서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을 인내로 보내고 난다면 더 깊은,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풍성한 누림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간에 실족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아마 이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의 '원상처'가 온전히 치유되어 광야의 시간이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는 제게 이런 레마의 말씀을 주실 것으로 기대하며 예상합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두 번이나 공개적으로 들으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말씀입니다. 사명의 말씀이 아닌 사랑의 말씀을 주신 것이 의미심장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치유와 광야 시리즈 글이 서로 중복되는 부분인데 먼저 다음 글에 치유의 관점에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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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나님께 대한 '원상처'를 치유받는 중' 이름 이종학 작성일 2011.11.08
(자료출처 http://www.innerhealing.or.kr/)
이 분은 "원상처"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글을 읽어 보면 제목을 붙인대로,
내적치유가 이런 변종을 만들어 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런 결과는 심리학으로 성경을 접근하며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레마'로 접근 하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성경을 자의로 해석하여 엉뚱한 변종이 발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적치유라는 이 시대의 유행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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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나님께 대한 '원상처'를 치유받는 중
보통 우리가 치유의 관점볼 때 상처라고 하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같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상처때문에 상처를 입힌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전혀 관계성이 없는 남과의 관계성에서 부정적으로 나타나 관계성이 깨어져 버린 상태로 고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나아가 이 상처는 신앙 안에서도 부정적으로 나타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몸의 상처는 사람의 눈에 보여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던지 해서 최대한 몸의 상처를 치료할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도 남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치료받도록 도와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난 상처는 몸의 상처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본인도 오래도록 잘 못느끼다 보니 웬만해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이로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절망하기도 하고 극단적인 행동인 자살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처를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 상처를 온전히 치유받기까지 나아가는 것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많은 이들이 상처에 대한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특히 사람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병들을 치료 치유 회개하도록 도와야 하는 목회자들 중에서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상태에서 목회를 시작해 성도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편입하기 전 누나 집에 잠시 거할 때 누나가 다니던 교회에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목사님과 사모님이 제가 신학교입학에 필요한 등록금마련 등 여러 도움을 주어서 신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혼한 상태에 있던 누나를 성적으로 부정한 여자로 몰아가는 모습에 실망을 해서 누나와 저는 다른 교회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 사건은 제게 목회자가 누구보다 상처를 치유받은 경험들이 많아야 함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겉은 목회자로서의 자격을 다 갖추었는데 그 목회자가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은 경험없이 목회를 하다보니 상처입은 성도들을 치유받도록 돕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입혀 신앙에서 실족하도록 만드는 일이 한국교회에 비일비재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에도 상처에 대한 치유 경험이 많았음에도 더 깊이 제 안에 있을 상처를 치유받고나서 사역을 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다짐한 대로 제 안에 있는 상처에 치유의 시간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에 대한 것들을 본 게시판 '치유 시리즈'에 글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에 대한 치유의 경험을 온전히 하고나자 깨달아지는 한 깨달음은 제 안에 하나님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해롭게 작용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또한 사람과의 상처와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1:1 관계성에서 생긴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는 상처에 대한 치유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적은 많은 책들에도 없는 내용으로 지금까지는 저만 깨달은 영적 비밀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생긴 이 상처를 이름하길 '원상처'라고 명명하였는데 '원'이라는 단어를 '상처'앞에 붙인 것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저지른 '원죄'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창세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그 죄가 아담의 후손이면 모두가 타고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깨어진 상태에서 그리고 이 죄로 인해 아무리 이 땅에서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심판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원죄'라는 신학적개념은 기독교신학에서 핵심적 사항입니다. 이 원죄가 있기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깨달은 것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으로 따먹지 말라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원죄'를 저지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하나님이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상처를 먼저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상처받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데 용기를 내었던 것입니다. 비록 선악과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를 따먹어 당신처럼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을 두려워해서 먹지말라고 하신 것처럼 말한 뱀의 잘못된 정보때문이였지만 어쨌든 아담은 하나님에게서 상처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처가 제가 보기에 '원상처'인데 이 '원상처'는 '원죄'와 함께 인류에게 유산처럼 물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상처'와 '원죄'의 관계는 성경속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데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깨어진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 대한 편애대한 상처로 아버지 야곱이 사랑하는 요셉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앞서 아버지 노아와 아들 함의 깨어진 관계에서도 나타나기도) 이 경우보다 좀더 대표적인 예는 다윗과 압살롬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동복누이인 다말을 범한 이복형인 암논의 잘못을 다스리지 못한 아버지 다윗을 압살롬이 배반을 해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아버지로 부터 상처를 받았기에 아버지가 사랑하는 이나 아버지를 죽이고자 한 것처럼 아담이 받은 원상처가 원죄를 저지르게 한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나타나 무의식 가운데 가지고 있는 '원상처'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죄를 저지르는데 용감합니다. 죄를 짓고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뱀의 거짓정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거짓이였음을 알려주는 간접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열매에 대한 계명에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죄를 지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이후 죄를 짓지 않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자신을 대신하여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아담의 원죄로 인해 심판당할 죄인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성이 회복되어, 창세때의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성보다 더 깊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관계성을 가졌음에도 죄에 자주 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면서 원죄는 연기처럼 살아졌지만 '원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아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원상처'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이 원상처가 겉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생긴 상처로 나타나 대부분의 치유프로그램은 겉으로 드러난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그러나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가 치유되어도 '원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아마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받은 상처를 대부분 치유받은 제가 지금은 아담으로 인해 물려받은 '원상처'를 치유받고 있는 중이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본격적인 사역자로서 쓰임받기 전 몇년동안 계속되어지고 있는 인내의 시간과 물질적 가난 등 이런 광야의 환경을 제게 가장 큰 시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의심이 영적 광야에서 가장 힘든 영적 싸움의 대상이였습니다. 사람같으면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줌으로 알려주는 것과 달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사람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고난당한 욥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습니다. 이는 고난으로 인해 겉으로는 고생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으로 힘든 시간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타고난 '원상처'가 조금씩 치유되어지고 하사 고난 후에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치유되지 않은 '원상처'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더운 여름을 더운 음식을 먹고 나서 오히려 시원함을 느끼듯이 하나님께선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 하시는데 이는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원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함이십니다.
제가 아직은 이 '원상처'의 치유의 시간을 영적 광야에서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을 인내로 보내고 난다면 더 깊은,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풍성한 누림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간에 실족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아마 이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의 '원상처'가 온전히 치유되어 광야의 시간이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는 제게 이런 레마의 말씀을 주실 것으로 기대하며 예상합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두 번이나 공개적으로 들으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말씀입니다. 사명의 말씀이 아닌 사랑의 말씀을 주신 것이 의미심장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치유와 광야 시리즈 글이 서로 중복되는 부분인데 먼저 다음 글에 치유의 관점에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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